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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인대를 비판함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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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인대를 비판함

김일손 지음

권경렬 번역

 

당(唐) 나라 때 호 지방에 어머니의 병이 깊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병을 낫게 한 사람이 있었다. 고을 영윤(令尹)이 조정에 아뢰어 그 집안에 정려(旌閭)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는데, 한유(韓愈)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어미가 병이 깊으면 약이나 침으로 치료하는데 그쳐야 할 것이니, 자신의 지체(支體)를 손상시키면서까지 봉양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것은 불효 중에서도 심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설사 효도에 부합된다고 하더라도 정문(旌門)을 해서는 안될 것이니, 산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가지고 어찌 특이하다고 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그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릇 남의 자식이 된 자는 부모가 병이 깊으면 온갖 수단과 약을 다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한번 효과를 보려고 할 것이니, 심지어는 무당을 불러 귀신에게 축원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비록 그 요망함은 알고 있지만 효험이 있다면 못하는 짓이 없어서이다.

설령 훌륭한 의원이 의서(醫書)를 인용하여 인육(人肉)을 약에 섞어 쓰지 않으면 나을 수가 없다고 한다면, 장차 그 말을 허탄(虛誕)하다고 여겨 따르지 않고 그 어머니의 죽음을 앉아서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만에 하나라도 어머니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면서 그 지체를 아끼지 않을 것인가?

나의 지체는 곧 부모의 유체(遺體)이다. 옛사람들은 몸을 온전히 한 채로 죽는 것을 효라고 하였으니, 그 지체를 상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효에 해가 된다. 그러나 내가 나의 지체를 아낀다면 타인들 또한 자신의 지체를 아낄 것이니, 누가 자신의 지체를 훼손시켜가면서 타인의 어머니를 위하려고 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약은 끝내 구할 수 없을 것이고 병도 끝내 나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가령 한퇴지(韓退之)가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의당 어떻게 했을 것인가?

군자는 언제고 그 몸을 아끼지 않는 적이 없다. 그러나 때로 이 몸을 아낄 수 없는 경우는 항상 부득이한 변고에서 나온다. 이러한 경우에 자식은 효에 죽고 신하는 충에 죽으니, 바로 퇴지가 말한 ‘역란(逆亂)에 죽는다.’라는 것이다. 역란에 임하여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면, 위급한 병세를 앞에 두고 내가 죽음에 이르지 않는데도 한 덩어리의 살을 아까워하겠는가? 위급한 병세를 앞에 두고 한 덩어리의 살을 아끼는 자는 역란에 임하여서도 구차하게 생존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퇴지가 또 말하였다.

“위난(危難)에 빠졌을 때 그 충효의 마음을 확고히 하여 구차히 살아나려고 하지 않는 경우라야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고 자손에게 작록(爵祿)을 내리는 것이 권면(勸勉)하는 하나의 방도가 될 것이다.”

만일 그 말대로라면 자식이나 신하는 의당 평시에 생활할 때는 효를 다하고 충을 다할 기회가 없을 것이며, 조정에는 위난이 아니면 충신이나 효자를 얻어 쓸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본성과 관련된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아닌 것이 없다. 범인은 그 본성을 채우지 못하고 오직 성인이라야 그 본성을 다할 수 있다.허벅지 살을 베어 바치는 한 가지 일은 애초에 본성을 다하는 성인이 할 바가 아니니, 그 말의 폐단을 미루어 단정해 본다면 장차 그 본성을 다하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바라고 하여 성인을 범인들과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폄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고금 천하에 누군들 부모가 없겠으며 누군들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마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는 대체로 드물며, 재화를 좋아하고 처자만을 아끼면서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많고도 많다. 대개 재화는 외물(外物)이고, 처자는 비록 일체이기는 하나 내 몸에 비해서는 구분이 있는데도 오히려 사사로이 이들에게 빠져 있는데, 하물며 그 자신의 몸에 대해서이겠는가?

세상에서 그 자신만을 알고 부모가 계시는 줄을 모르는 자가 어찌 한이 있으랴마는, ‘내게도 그 국 한 그릇을 달라.’고 한 한(漢) 나라 고조(高祖)와 어머니가 만류하는데도 옷소매를 자르고 떠나간 온교(溫嶠) 같은 이는 비록 성제(盛帝)와 명신(名臣)인데도 결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모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니, 호인(호人)같은 자는 비록 ‘부모가 있는 줄은 알고 그 자신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좋을 것이다.

퇴지는 ‘세상의 궤이(詭異)한 자들은 잔인하고 과감하여 도리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여 한때의 상을 바라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고 우려하였는데 그런 자들은 참으로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을 효자라고 한다면 이는 그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고 한 것은 ‘옛날의 성현들은 처한 상황에 따라 행한 바가 달랐으므로 당시 사람이나 후대 사람들이 그 자취에 따라 그 성대한 점만을 들었다.’는 경우가 전혀 아니다. 성현이 학문을 함에 효제(孝悌)로써 근본을 삼지 않는 이가 없지만 인류가 생긴 이래로 오직 순(舜) 임금만을 대효(大孝)라고 칭하고 증삼(曾參)만이 부모의 뜻을 잘 봉양하였다고 하면서 그 나머지는 언급한 바가 없으니, 그렇다면 그 나머지 성현들은 모두 효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한유의 설이 만약 널리 전해진다면 시샘하는 무리들이 뜻을 얻어서 남이 인륜을 닦는 것을 시기하여 그 행실을 덮어버려 천하의 효를 막고 뭇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할 것이니, 해로움이 너무 크지 않겠는가?

혹자는 말하였다.

“퇴지의 의론이 옳다. 평생 고도(古道)를 좋아하여 문사(文詞)의 화려함보다는 이치가 훌륭한 글만을 지었으니, 어찌 호인이 겉과 속이 달라서 효에 돈독하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공박한 것이겠는가? 퇴지가 호인을 공박한 것이 참으로 박절하기는 하거니와 그대가 퇴지를 공박하는 것은 또 어찌 그리도 박절한가?

대개 태고(太古) 때의 크게 질박함이 사라지면서 교묘함과 투박함이 드러났고 크게 흰 바탕을 꾸미게 되면서부터 흑과 백이 구분이 되었다. 한 사람의 효를 온 고을에 표장(表?)하지 말자고 한 것은 바로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성스럽게 되기를 기다려서이니, 그 뜻이 혼후(渾厚)한 것이다.

일찍이《신당서(新唐書)》를 보니, ‘본초습유(本草拾遺)에서 인육(人肉)으로 고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한 뒤로 부모의 병이 심해지면 허벅지 살을 베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에 대해 비단을 내리기도 하고 정려를 하기도 하였다.’고 하였으니, 당시에 이미 이러한 풍조가 범람했던 것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권면한다면 장차 천하 사람들의 허벅지 살을 모두 베어내게 될 것이니, 신체를 바쳐 효를 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자식의 일반적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장차 효의 축에도 끼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퇴지가 어찌 소견이 없어서 그르다고 했겠는가?”

내가 대답하였다.

“선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교화를 수립한 것이 혼후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곧 ‘선을 표창하고 악을 구별한다.’고 하였고, ‘한 사람을 선하다고 하면 이는 온 고을에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한 적은 없었다. 음양이 나뉘어짐에 선악이 구분되었으며 선악이 나뉘어지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으로써 조율하는 것이니, 중용의 도를 잘 하는 백성들이 드물게 된 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 말하기를,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유별로 하는 것이니, 잘못을 보면 그 인(仁)을 알 수 있다.’ 하였던 것이다.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것이 지나치기는 하지만 이 또한 효자의 부류이다. 불효라고 단정하는 것은 또한 너무 지나치지 않겠는가?

생전에는 봉양하고 병들면 근심하고 여의면 슬퍼하며, 심지어 자신의 신체발부(身體髮膚)도 감히 훼상(毁傷)하지 못하고 종신토록 공경하였으니, 발을 다치자 두문불출했던 일이나 손을 펴보고 불효를 면함을 알았다고 한 것은 바로 효자의 떳떳한 도리이다. 그러나 혹 부득이해서 일신을 군부에게 바쳐야 한다면 가볍기가 기러기의 깃털보다도 심한 점이 있을 것인데, 하물며 허벅지의 살 정도이겠는가? 허벅지를 베어내지 않고도 별다른 약이 있어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나는 굳이 허벅지 살을 베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약이 없어서 허벅지 살을 베어내지 않을 수 없다면 비록 중용을 지키는 군자에게 죄를 얻게 되더라도 나는 또한 호인처럼 할 것이다.

대개 입언(立言)하는 사람은 중용에 맞는 말을 남겨 전하여 만세토록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호인대(호人對)를 보건대 그 말에 폐단이 많으니, 그 글이 두찬(杜撰)으로서 퇴지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심도 든다. 만약 퇴지가 지은 것이 맞는다면 호인의 행위도 중용이 아니지만 퇴지의 대(對) 역시 중용이 아닐 것이다.

<주>

* 호인대 : 당(唐) 나라 때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가 지은 글. 당시에 백성들 사이에서 인육(人肉)을 써서 부모의 병을 고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고 조정에서는 이들을 효자라고 하여 부역과 조세를 면제시켜 주는 등의 포상을 함으로써 이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자 이 글을 지어 그 폐단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 내게도 ...... 고조 : 초 나라 패왕 항우가 한 나라 고조 유방과 천하의 패권을 다투면서 유방의 군사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인질로 잡고 있던 그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유방이 “너와 나는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나의 아버지는 곧 너의 아버지이다. 꼭 삶아 죽이려거든 내게도 그 국 한그릇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한 고사.《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 어머니가 ...... 온교 : 진(晋) 나라 때의 온교가 유곤(劉琨)의 명을 받고 사마예(司馬睿)에게 즉위하기를 권하기 위하여 떠나가려고 할 때, 그 어머니가 한사코 만류하였으나 온교는 어머니가 잡은 옷소매를 끊어 버리고 가버렸다는 고사.《진서(晋書)》온교전(溫嶠傳).

* 두문불출했던 일 : 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의 악정자춘(樂正子春)이 당(堂)을 내려오다가 발을 다쳤는데 수개월이 지나도록 두문불출하며 근심하는 기색이 있자, 제자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부모에게 받은 몸을 온전히 하여 손상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는 것이 효인데, 나는 그 도리를 잊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는 고사.《예기(禮記)》제의(祭義)

* 손을 ...... 알았다 : 증자(曾子)가 병이 깊어지자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불을 걷고 나의 손과 발을 열어 보아라. 늘 전전긍긍하면서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근심하였는데, 이제서야 그 근심을 면한 것을 알겠구나.”라고 한 고사.《논어(論語)》 태백(泰伯)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시호는 문민(文愍),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조선 성종조(成宗朝)의 문신으로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의 고제(高弟)이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로서 읍취헌(읍翠軒) 박은(朴誾 1479-1504)의 시와 함께 늘 병칭되곤 했으며, 중국의 사신으로부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거두인 한유(韓愈)의 문장과 방불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점필재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 중에서 정치적으로 강경한 입장에 속했던 그는 훈구대신(勳舊大臣)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올렸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35세 때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등과 함께 극형을 당하였다. 저서에《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속동문선(續東文選)》에도 한국 기행문의 수작으로 꼽히는 속두류록(續頭流錄) 등 다수의 이 실려 있다.이 글의 출전은 《탁영집(濯纓集)》 권1의 <비호인대(非호人對)>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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