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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血)의 누(淚)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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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血)의 누(淚)

 

 

 

 일청 전쟁(日淸戰爭)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티끌뿐이라.

 

 평양성 외 모란봉에 떨어지는 저녁 볕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저 햇빛을 붙들어 매고 싶은 마음에 붙들어 매지는 못하고, 숨이 턱에 닿은 듯이 갈팡질팡하는 한 부인이 나이 삼십이 될락말락하고, 얼굴은 분을 따고 넣은 듯이 흰 얼굴이나 인정 없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가을 볕에 얼굴이 익어서 선앵두빛이 되고, 걸음걸이는 허둥지둥하는데 옷은 흘러내려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맛자락은 땅에 질질 끌려서 걸음을 걷는 대로 치마가 밟히니, 그 부인은 아무리 급한 걸음걸이를 하더라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허둥거리기만 한다.

 

 남이 그 모양을 볼 지경이면 저렇게 어여쁜 젊은 여편네가 술 먹고 한길에 나와서 주정한다 할 터이나, 그 부인은 술 먹었다 하는 말은 고사하고 미쳤다, 지랄한다 하더라도 그따위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아니할 만하더라.

 

 무슨 소회가 그리 대단한지 그 부인더러 물을 지경이면 대답할 여가도 없이 옥련이를 부르면서 돌아다니더라.

 

 “옥련아 옥련아, 옥련아 옥련아, 죽었느냐 살았느냐. 죽었거든 죽은 얼굴이라도 한 번 다시 만나보자. 옥련아 옥련아, 살았거든 어미 애를 그만 쓰이고 어서 바삐 내 눈에 보이게 하여라. 옥련아, 총에 맞아 죽었느냐, 창에 찔려 죽었느냐. 사람에게 밟혀 죽었느냐. 어리고 고운 살에 가시가 박힌 것을 보아도 어미 된 이 내 마음에 내 살이 지겹게 아프던 내 마음이라. 오늘 아침에 집에서 떠나올 때에 옥련이가 내 앞에 서서 아장아장 걸어다니면서, ‘어머니 어서 갑시다.’ 하던 옥련이가 어디로 갔느냐.”

 

 하면서 옥련이를 찾으려고 골몰한 정신에, 옥련이보다 열 갑절 스무 갑절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잃고도 모르고 옥련이만 부르며 다니다가 목이 쉬고 기운이 탈진하여 산비탈 잔디 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혼자말로 옥련 아버지는 옥련이 찾으려고 저 건너 산 밑으로 가더니, ‘어디까지 갔누?’ 하며 옥련이를 찾던 마음이 홀지에 변하여 옥련 아버지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 오고, 인간 사정은 조금도 모르는 석양은 제 빛 다 가지고 저 갈 데로 가니 산빛은 점점 먹장을 갈아 붓는 듯이 검어지고 대동강 물소리는 그윽한데, 전쟁에 죽은 더운 송장 새 귀신들이 어두운 빛을 타서 낱낱이 일어나는 듯 내 앞에 모여드는 듯하니, 규중에서 생장한 부인의 마음이라, 무서운 마음에 간이 녹는 듯하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앉았는데, 홀연히 언덕 밑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리거늘, 그 부인이 가만히 들은즉 길 잃고 사람 잃고 애쓰는 소리라.

 

 “에그, 깜깜하여라. 이리 가도 길이 없고 저리 가도 길이 없으니 어디로 가면 길을 찾을까. 나는 사나이라, 다리 힘도 좋고 겁도 없는 사람이언마는 이러한 산비탈에서 이 밤을 새고 사람을 찾아다니려 하면 이 고생이 이렇게 대단하거든, 겁도 많고 다녀 보지 못하던 여편네가 이 밤에 나를 찾아다니느라고 오죽 고생이 될까.”

 

 하는 소리를 듣고 부인의 마음에 난리 중에 피란 가다가 부부가 서로 잃고 서로 종적을 모르니 살아 생이별을 한 듯하더니, 하늘이 도와서 만나 본다 하여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더라.

 

 “여보, 나 여기 있소. 날 찾아다니느라고 얼마나 애를 쓰셨소.”

 

 하면서 급한 걸음으로 언덕 밑으로 향하여 내려가다가 비탈에 넘어져 구르니, 언덕 밑에서 올라오던 남자가 달려들어서 그 부인을 붙들어 일으키니, 그 부인이 정신을 차려 본즉 북두갈고리 같은 농군의 험한 손이 내 손에 닿으니 별안간에 선뜻한 마음에 소름이 끼치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겁결에 목소리가 나오지 못한다.

 

 그 남자도 또한 난리 중에 제 계집 찾아다니는 사람인데, 그 계집인즉 피난갈 때에 팔승무명을 강풀 한 됫박이나 먹였던지 장작같이 풀센 치마를 입고 나간 터이요, 또 그 계집은 호미자루?절구공이?다듬이 방망이, 그러한 셋궂은 일로 자라난 농군의 계집이라, 그 남자가 언덕에서 소리하고 내려오는 계집이 제 계집으로 알고 붙들었는데, 그 언덕에서 부르던 부인의 손은 명주같이 부드럽고 옷은 십이승 아랫질 세모시 치마가 이슬에 눅었는데, 그 농군은 제 평생에 그 옷 입은 그런 손길은 만져 보기는 고사하고 쳐다보지도 못하던 위인이러라.

 

 부인은 자기 남편이 아닌 줄 깨닫고 사나이도 제 계집 아닌 줄 알았더라. 부인은 겁이 나서 간이 서늘하고, 남자는 선녀를 만난 듯하여 흥김 겁김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숨소리는 크고 목소리는 아니 나온다. 그 부인의 마음에, 아까는 호랑이도 무섭고 귀신도 무섭더니, 지금은 호랑이나 와서 나를 잡아먹든지 귀신이나 와서 저 놈을 잡아가든지 그런 뜻밖의 일을 기다리나, 호랑이도 아니 오고 귀신도 아니 오고, 눈에 보이는 것은 말 못하는 하늘의 별뿐이요, 이 산 중에는 죄 없고 힘 업는 이 내 몸과 저 몹쓸 놈과 단 두 사람뿐이라.

 

 사람이 겁이 나다가 오래 되면 악이 나는 법이다. 겁이 날 때는 숨도 크게 못쉬다가 악이 나면 반벙어리 같은 사람도 말이 물 퍼붓듯 나오는 일도 있는지라.

 

 “여보, 웬 사람이요. 여보, 대답 좀 하오. 여보, 남을 붙들고 떨기는 왜 그리 떠오. 여보, 벙이리요 도둑놈이요? 도둑놈이거든 내 몸의 옷이나 벗어 줄 터이니 다 가져가오.”

 

 그 남자가 못생긴 마음에 어기뚱한 생각이 나서 말 한 마디가 엄두가 아니 나던 위인이, 불 같은 욕심에 말문이 함부로 열렸더라.

 

 “여보, 웬 여편네가 이 밤중에 여기 와서 있소? 아마 시집살이 마다고 도망하는 여편네지. 도망꾼이라도 붙들어다가 데리고 살면 계집 없느니보다 날 터이니 데리고 갈 일이로구. 데리고 가기는 나중 일이어니와……. 내가 어젯밤 꿈에 이 산중에서 장가를 들었더니 꿈도 신통히 맞친다.”

 

 하면서 무지막지한 놈의 행위라 불측한 소리가 점점 심하니, 그 부인이 죽어서 이 욕을 아니 보리라 하는 마음뿐이나, 어느 틈에 죽을 겨를도 없는지라.

 

 사람이 생목숨을 버리는 것은 사람의 제일 설워하는 일인데, 죽으려 하여도 죽지도 못하는 그 부인 생각은 어떻다 형용할 수 없는 터이라.

 

 빌어 보면 좋을까 생각하여 이리 빌고 저리 빌고 각색으로 빌어 보나, 그 놈의 귀에 비는 소리가 쓸데없고 하릴없을 지경이라. 언덕 위에서 웬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데, 무슨 소린지는 모르나 부인은 그 소리를 듣고 죽었던 부모가 살아온 듯이 기쁜 마음에 마주 소리를 질렀더라.

 

 “사람 좀 살려 주오…….”

 

 하는 소리가 아무리 부인의 목소리라도 죽을 힘을 다 들여서 지르는 밤소리라 산골이 울리니 언덕 위의 사람이 또 소리를 지른다. 언덕 위와 밑이 두 간 길이쯤 되나 지척을 불변하는 칠야에 서로 모양도 못 보고 또 서로 말도 못 알아 듣는 터이라, 언덕 위의 사람이 총 한 방을 놓으니 밤중의 총소리라. 산이 울리면서 사람이 모여드는데, 일본 보초병들이러라. 누구는 겁이 많고 누구는 겁이 없다 하는 말도 알 수 없는 말이라. 세상에 죄 있는 사람같이 겁 많은 사람은 없고, 죄 없는 사람같이 다기 있는 것은 없다. 부인은 총소리에도 겁이 없고 도리어 욕을 면한 것만 천행으로 여기는데, 그 남자는 제가 불측한 마음으로 불측한 일을 바라던 차이라, 총소리를 듣고 저를 죽이러 온 사람으로 알고 달아난다.

 

 밝은 날 같으면 달아날 생의도 못 하였을 터이나, 깜깜한 밤이라 옆으로 비켜서기만 하여도 알 수 없는 고로 종적 없이 달아났더라. 보초병이 부인을 잡아서 앞세우고 가는데, 서로 말은 못 하고 벙어리가 소를 몰고 가듯 한다.

 

 계엄중(戒嚴中) 총소리라 평양성 근처에 있던 헌병이 낱낱이 모여들어서 총 놓은 군사와 부인을 데리고 헌병부로 향하여 가니, 그 부인은 어딘지 모르고 가나 성도 보이고 문도 보이는데, 정신을 차려본즉 평양성 북문이라.

 

 밤은 깊어 사람의 자취도 없고 사면에서 닭은 홰를 치며 울고 개는 여염집 평대문 개구멍으로 주둥이만 내어 놓고 짖는다. 닭소리?개소리에 부인의 발이 땅에 떨어지지 못하여 걸음을 멈추고 섰는데 오장이 녹는 듯하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개는 명물이라 밤사람을 알아보고 반가워 뛰어나오다가 헌병이 칼을 빼어 개를 치려 하니 개가 쫓겨 들어가며 짓으나 사람도 말을 통치 못하거든 더구나 짐승이야…….

 

 “개야 너 혼자 집을 지키고 있구나. 우리가 피란 갈 때에 너를 부엌에 가두고 나왔더니 어디로 나왔느냐. 너와 같이 집에 있었더면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아니하였을 것을 살 곳 찾아가느라고 죽을 길 고생길로 들어갔다. 나는 살아와서 너를 다시 본다마는 서방님도 아니 계시다, 너를 귀애하던 옥련이도 없다. 내가 너와 같이 다리 힘이 좋으면 방방곡곡이 찾아다닐 터이나, 다리 힘도 없고 세상에 만만하고 불쌍한 것은 여편네라 겁나는 것 많아서 못 다니겠다. 닭도 주인 없는 집에서 혼자 울고, 개도 주인 없는 집에서 혼자 짖는구나. 개야 이리 나오거라. 나는 어디로 잡혀 가는지 내 발로 걸어가나 내 마음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헌병이 소리를 질러 가기를 재촉하니 부인이 하릴없이 헌병부로 잡혀 가는데, 개는 멍멍 짖으며 따라오니 그 개 짖고 나오던 집은 부인의 집이러라.

 

 그 날은 평양성에서 싸움 결말나던 날이요, 성 중의 사람이 진저리 내던 청인이 그림자도 없이 다 쫓겨 나가던 날이요, 철환은 공중에서 우박 쏟아지듯 하고 총소리는 평양성 근처가 다 두려빠지고 사람 하나도 아니 남을 듯하던 날이요, 평양 사람이 일병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일병은 어떠한지, 임진 난리에 평양 싸움 이야기하며 별 공론이 다 나고 별 염려 다 하던 그 일병이 장마통에 검은 구름 떠들어 오듯 성 내, 성 외에 빈틈없이 들어와 박히던 날이라.

 

 본래 평양성 중 사는 사람들이 청인의 작폐에 견디지 못하여 산골로 피란 간 사람이 많더니, 산 중에서는 청인 군사를 만나면 호랑이 본 것 같고 원수 만난 것 같다. 어찌하여 그렇게 감정이 사나우냐 할 지경이면, 청인의 군사가 산에 가서 젊은 부녀를 보면 겁탈하고, 돈이 있으면 빼앗아 가고, 제게 쓸데없는 물건이라도 놀부의 심사같이 장난하니, 산에 피란 간 사람은 난리를 한층 더 겪는다. 그러므로 산에 피란 갔던 사람이 평양성으로 도로 피란 온 사람도 많이 있었더라.

 

 그 부인은 평양성 북문 안에 사는데, 며칠 전에 산에 피란도 갔다가 산에도 있을 수 없고, 촌에 사는 일가집으로 피란 갔다가 단칸방에서 주인과 손와 여덟 식구가 이틀 밤을 앉아 새우고 하릴없이 평양성 내로 도로 온 지가 불과 수일 전이라. 그 때 마음에 다시는 죽어도 피란 가지 아니한다 하였더니, 오늘 새벽부터 총소리는 천지를 뒤집어 놓고 사면 산꼭대기들 가운데에 불비가 쏟아지니 밝기를 기다려서 피란길을 떠났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젊은 내외와 어린 딸 옥련이와 단 세 식구 피란이라.

 

 성 중에는 울음 천지요, 성 밖에는 송장 천지요, 산에는 피란군 천지라. 어미가 자식 부르는 소리, 서방이 계집 부르는 소리, 계집이 서방 부르는 소리, 이렇게 사람 찾는 소리뿐이라. 어린아이를 내버리고 저 혼자 달아나는 사람도 있고, 두 내외 손을 맞붙들고 마주 찾는 사람도 있더니, 석양판에는 그 사람이 다 어디로 가고 없던지 보이지 아니하고, 모란봉 아래서 옥련이 부르고 다니는 부인 하나만 남아 있더라.

 

 그 부인의 남편 되는 사람은 나이 스물아홉 살인데, 평양서 돈 잘 쓰기로 이름 있던 김관일이라. 피란길 인해(人海) 중에 서로 잃고 서로 찾다가 김관일은 저의 집으로 혼자 돌아와서 그 날 밤에 빈 집에 혼자 있다가 밤중에 개가 하도 몹시 짖거늘 일어나서 대문을 열고 보려 하다가 겁이 나서 열지는 못하고 문 틈으로 내다보기도 하였으나 벌써 헌병이 그 부인을 앞세우고 가니, 김관일은 그 부인이 헌병에게 붙들려 가는 줄은 생각 밖이요, 그 부인은 그 남편이 집에 있기는 또한 꿈도 아니 꾸었더라.   (중략)

 

앞부분의 주요 내용 1894년에 일어난 청일 전쟁이 한창일 때, 평양에 살던 주인공 옥련은 피난길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부상을 입게 된다. 다행히 일본군에 구출된 옥련은 이노우에라는 군의관의 호의로 일본으로 가게 된다. 군의관과 그의 아내가 그녀를 보살피던 중, 이노우에가 사망하자 의붓 어머니로부터 온갖 구박을 받게 된다. 이러던 차에 구완서라는 조선인 청년을 만나 미국 워싱톤으로 유학을 함께 간다. 본문에 수록된 부분은 옥련이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구완서가 만나는 장면이다.

 

 

<전략>

 

  옥련이가 얼굴빛을 천연이 하고 고쳐 앉더니 모란봉에서 총맞고 야전 병원으로 가던 일과, 정상 군의(井上軍醫)의 집에 가던 일과, 대판서 학교를 졸업하던 일과, 불행한 사기로 대판을 떠나던 일과, 동경 가는 기차를 타고 구완서를 만나서 절처봉생(絶處逢生)하던 일을 낱낱이 말하고 그 말을 마치더니, 다시 얼굴빛이 변하며 눈물이 도니, 그 눈물은 부모의 정에 관계한 눈물도 아니요, 제 신세 생각하는 눈물도 아니요, 구완서의 은혜를 생각하는 눈물이라.

 

  '아버지, 어머니께서 나 같은 불효의 딸을 만나 보시고 기쁘신    마음이 있거든 구씨를 찾아보시고 치사(致謝)의 말씀을 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관일이가 그 말을 듣더니, 그 길로 옥련이를 데리고 구씨의 유하는 처소를 찾아가니, 구씨는 김관일을 만나 보매 옥련의 부친을 본 것 같지 아니하고 제 부친이나 만난 듯이 반가운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은 옥련의 기뻐하는 마음이 내 마음 기쁜 것이나 다름없는 데서 나오는 마음이요, 김씨는 구씨를 보고 내 딸 옥련을 만나 본 것이나 다름없이 반가우니, 그 두 사람의 마음이 그러할 일이라. 김씨가 구씨를 대하여 하는 말이 간단한 두 마디뿐이라.

 

  한 마디는 옥련이가 신세지은 치사요, 한 마디는 구씨가 고국에 돌아간 뒤에 옥련으로 하여금 구씨의 기체를 받들고 백년 가약 맺기를 원하는지라.

 

  구씨는 본래 활발하고 거칠 것 없이 수작하는 사람이라 옥련이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애 옥련아, 어 -- 실체(失體) 하였구나. 남의 집 처녀더러 또 해라 하였구나. 우리가 입으로 조선말은 하더라도 마음에는 서양 문명한 풍속이 젖었으니, 우리는 혼인을 하여도 서양 사람과 같이 부모의 명령을 좇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부부 될 마음이 있으면 서로 직접하여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나 우선 말부터 영어로 수작하자. 조선말로 하면 입에 익은 말로 외짝해라하기 불안하다."

 

하면서 구씨가 영어로 말을 하는데, 구씨의 학문은 옥련이보다 대단히 높으나 영어는 옥련이가 구씨의 선생 노릇이라도 할 만한 터이라. 그러나 구씨는 서투른 영어로 수작을 하는데, 옥련이는 조선말로 단정히 대답하더라.

 

  김관일은 딸의 혼인 언론(言論)을 하다가 구씨가 서양 풍속으로 직접 언론하자 하는 서슬에 옥련의 혼인 언약에 좌지우지할 권리가 없이 가만히 앉았더라.

 

  옥련이는 아무리 조선 계집아이이나 학문도 있고, 개명한 생각도 있고, 동서양으로 다니면서 문견(聞見)이 높은지라. 서슴지 아니하고 혼인 언론 대답을 하는데, 구씨의 소청이 있으니, 그 소청인즉 옥련이가 구씨와 같이 몇 해든지 공부를 더 힘써 하여 학문이 유여한 후에 고국에 돌아가서 결혼하고, 옥련이는 조선 부인 교육을 맡아 하기를 청하는 유지(有志)한 말이라. 옥련이가 구씨의 권하는 말을 듣고 조선 부인 교육할 마음이 간절하여 구씨와 혼인 언약을 맺으니,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 나라를 독일국(獨逸國)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 옥련이는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 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받지 말고 남자와 동등 권리를 찾게 하며, 또 부인도 나라에 유익한 백성이 되고 사회상에 명예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할 마음이라.

 

  세상에 제 목적을 제가 자기하는 것같이 즐거운 일은 다시 없는지라. 구완서와 옥련이가 나이 어려서 외국에 간 사람들이라. 조선 사람이 이렇게 야만되고 이렇게 용렬한 줄을 모르고, 구씨든지 옥련이든지 조선에 돌아오는 날은 조선도 유지한 사람이 많이 있어서, 학문 있고 지식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찬성하여 구씨도 목적대로 되고 옥련이도 제 목적대로 조선 부인이 일제히 내 교육을 받아서 낱낱이 나와 같은 학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려니 생각하고, 일변으로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제 나라 형편 모르고 외국에 유학한 소년 학생 의기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구씨와 옥련이가 그 목적대로 되든지 못 되든지 그것은 후의 일이거니와 그날은 두 사람의 마음에는 혼인 언약의 좋은 마음은 오히려 둘째가 되니, 옥련 낙지(落地) 이후에는 이러한 즐거운 마음이 처음이라.

 

  김관일은 옥련이를 만나 보고 구완서를 사위감으로 정하고, 구씨와 옥련의 목적이 그렇듯 기이한 말을 들으니, 김씨의 좋은 마음도 측량할 수 없는지라.

 

  미국 화성돈의 어떠한 호텔에서는 옥련의 부녀와 구씨가 솔밭같이 늘어앉아서 그렇듯 희희낙락한데, 세상이 고르지 못하여 조선 평양성 북문 안에 게딱지같이 낮은 집에서 삼십 전부터 남편 없고 자녀 간에 혈육 없고 재물 없이 지내는 부인이 있으되, 십 년 풍상에 남보다 많은 것 한 가지가 있으니, 그 많은 것은 근심이라.

 

  그 부인이 남편이 죽고 없느냐 할 지경이면 죽지도 아니한 터이라. 죽고 없는 터이면 단념하고 생각이나 아니하련마는, 육만 리를 이별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될 듯한 정경이요, 자녀 간에 혈육이 없는 것은 생산을 못하였느냐 물을진대 딸 하나를 두고 아들 겸 딸 겸하여 금옥같이 귀애하다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잃었더라.

 

  눈앞에 참척(慘慽)을 보았느냐 물을진대 그 부인은 말없이 눈물만 흘리더라. 눈앞에 보이는 데서나 죽었으면 한이나 없으련마는, 어디서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니 그것이 한이더라.<후략>

 

 

 요점 정리

 

 작자 : 이인직
 연대 : 1906년 7월 22일부터 같은 해 10월 10일까지 50회에 걸쳐 '만세보 萬歲報' 에 장편소설로 연재
 형식 : 신소설
 성격 : 교훈적, 계몽적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5단 구성(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생하다가 조력자의 도움으로 행복에 이르게 되는 희극적 구성)
   발단 - 청일 전쟁의 난리로 옥련은 부모와 헤어짐
   전개 - 일본인 군의관의 도움으로 옥련은 구출되어 성장함
   위기 - 군의관이 전사하자 옥련은 집에서 나와 자살을 기도함
   절정 - 유학생 구완서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감
   결말 - 문명 개화한 신학문을 배운 후, 나라를 위해 봉사할 것을 다짐함
 표현 : 묘사체, 산문체(언문 일치에 접근했으나, 종결어미에는 문어체의 자취가 있음)
 주제 : 신교육 사상과 개화 의식의 고취
 줄거리 : 1894년 청·일전쟁이 평양 일대를 휩쓸었을 때 일곱 살 난 여주인공 옥련(玉蓮)은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고 부상을 당하나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어 이노우에[井上] 군의관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러나 이노우에 군의관이 전사하고 그 부인한테 구박을 당하게 된 옥련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중 구완서를 만나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다. 워싱턴에서 공부하던 옥련은 극적으로 아버지를 만나게 되어 구완서와 약혼한다. 한편 평양에서는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의 편지를 받고 어머니는 꿈만 같이 기뻐한다.이 작품은 난리에 가족과 헤어진 소녀가 새로운 문명을 접하며,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의의 :  이 소설 이전에도 유명무명의 신소설이 있었으나 문학적인 수준이나 가치로 보아 근대소설의  효시로서의 신소설은 이것이 최초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상편은 '만세보' 연재로 끝나고 하편에 해당하는 '모란봉(牡丹峰)'은 1913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되다가 미완성으로 끝났다.
 출전 : 1906년 '만세보(萬歲報)'에 연재되었던 작품

 

 

 내용 연구

 일청 전쟁(日淸戰爭)의 - 비린 티끌뿐이라. :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제시된 구절로 청일전쟁의 주 격전지인 평양 지방의 전후 참상을 보여 주고 있다. ‘화셜 ?명 OO년 간에 ~’와 같은 도입부 없이 곧바로 사건이 제시되도 있다. 고전 소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또 ‘일청 전쟁’이라고 하여 일본을 앞세운 것에서 작자의 친일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아무리 급한 걸음걸이를 - 허둥거리기만 한다. : 마음만 급할 뿐 실제로는 멀리 가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이다. 인물의 행동 묘사가 생생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남이 그 모양을 볼 지경이면, - 들리지 아니할 만하더라. : 고전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의 내면 표현 방식이 드러나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과 유사하지만 작가의 목소리가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근대 소설과 구별된다.

  총에 맞아 죽었느냐, - 사람에게 밟혀 죽었느냐. : 이런 표현은 판소리 사설의 운율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신소설이 아직도 완전한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이루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해와 감상

 이인직 ( 李人稙 )이 지은 신소설. 작자의 대표적 신소설로, 상편은 1906년 7월 22일부터 같은 해 10월 10일까지 50회에 걸쳐 ≪ 만세보 萬歲報 ≫ 에 장편소설로 연재되었고, 하편에 해당하는 〈 모란봉 牡丹峰 〉 은 1913년 ≪ 매일신보 ≫ 에 연재되다가 미완성으로 끝나, 전편이 그대로 출간된 바는 없다.

 

 단행본으로 처음 발간된 것은 1907년 3월에 광학서포(廣學書 孃 )에서 발행한 〈 혈의 누 〉 이나, ≪ 만세보 ≫ 연재분과 내용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 뒤 1912년 12월에 동양서원(東洋書院)에서 〈 모란봉 〉 이라는 제목으로 정정본이 출간되었다.

 

 작품 내용은 청일전쟁의 전화(戰禍)가 평양 일대를 휩쓸었을 때, 일곱 살 난 여주인공 옥련(玉蓮)은 피난길에서 부모와 헤어지게 되고 부상을 당한다. 일본군에게 구출된 옥련은 이노우에라는 군의관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를 다니는데, 뜻밖에 이노우에가 전사하자 의모(義母)는 변심하여 옥련을 구박한다.

 

 옥련은 갈 바를 모르고 방황하던 중 구완서를 만나 함께 미국으로 간다. 워싱턴에서 공부하던 중 옥련은 극적으로 아버지 김관일을 만나게 되고, 구완서와 약혼한다. 한편, 평양에 있는 옥련의 어머니는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의 편지를 받고 꿈만 같이 생각한다.

 

 이 작품은 청일전쟁 때 평양 모란봉의 참상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뒤 10년간의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국 · 일본 및 미국을 무대로 옥련 일가의 기구한 운명의 전변(轉變)에 얽힌 개화기의 시대상을 그린 것으로, 자주독립 · 신교육사상 · 자유결혼관 등이 그 주제로 다루어져 있다.

 

 이 작품의 출현을 계기로 소설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적으나마 고대소설의 격식에서 벗어나 근대소설 영역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대소설의 문체를 탈피하지 못한 부분이 빈번하고, 구성이나 이야기의 전개 방법이 미숙한 점 등 초기 신소설의 공통된 취약점이 엿보이기도 한다.

 

≪ 참고문헌 ≫ 韓國開化期小說硏究(李在銑, 一潮閣, 1972), 韓國開化期小說의 史的硏究(宋敏鎬, 一志社, 1975), 韓國小說發達史 下(全光鏞, 韓國文化史大系 Ⅴ ,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67).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혈의 누'의 한계

 

 신교육, 신문명에 의한 개화 가능성을 비현실적인 차원에서 이상적으로만 설정하고 있다는 커다란 한계를 지닌다. 지식인 몇 사람의 힘으로 민족 전체를 각성시키고 부국 강병을 이룰 수 있다는 발상 자체는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또한 청일전쟁을 그리면서 일본군의 모습을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친일적인 성향의 작품이라 비판을 받게 되며, 또 작품 전체에 우연성의 남발과 동기 유발이 없는 행동의 연속으로 행복한 결말 구조를 이루어, 일본이나 미국의 배경 외에는 고전 소설을 보는 것 이상의 신선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

 

 

 신소설의 주제와 시대 의식

 주제상으로 보아 신소설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문명 개화에 대한 소박한 낙관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새로운 풍습과 지식, 문물은 곧 아름다운 미래에의 약속이며, 그러한 것들의 원천인 바깥 세계는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 된다. 주인공들은 위기 상황에서 흔히 일본인, 서양인의 도움을 받으며, 무한한 기대를 품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와 같은 안이한 낙관주의로 인해 신소설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천박한 개화주의로 전락하였으며, 이인직 등의 작품에서는 당대의 역사적 정황을 몰각한 친일적 환상을 띠기까지 하였다. 이 점은 같은 시대의 역사, 전기류가 대외적 자존의 문제에 민감한 의식을 지녔던 사실과 대조적인 현상이다.

 “혈의 누”에서도, 구완서와 옥련이 결혼에 대한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전적으로 외국 풍속에 따라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나, 옥련이 조선에 돌아와 부녀자들을 교육하여 금시라도 개화를 이룰 것 같은 믿음을 토로하는 부분은 이러한 낙관주의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혈의 누”의 문학사적 의의

  최초의 신소설이면서도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혈의 누”는 고대 소설적 요소와 현대 소설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 소설의 기법적 측면에 대한 뚜렷한 자각 없이 당시 보편화된 문학 양식이었던 고대 소설의 기법을 그대로 도입하고 여기에 근대적 성향을 가미하여 인물과 사건을 설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주인공 옥련의 일생은 고대 소설 “숙향전(淑香傳)”의 주인공인 숙향의 일생과 비슷한 면이 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생하나 위기 때마다 조력자(助力者)를 만나 결국은 행복한 결말을 이룬다는 대체적인 일생의 유형이 동일하다. 다만, “혈의 누”는 옥련의 일생을 일본, 미국 등 외국의 문물과 관련시키면서 근대적인 성향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소설과 다르다. 신소설의 양면성과 과도기적 성격은 이러한 사실에서 기인된다. 신소설은 “혈의 누” 이후 많이 양산(量産)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형식상의 괴리(乖離)로 인하여 질적 향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혈의 누”가 신소설의 최초의 작품이면서도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혈의 누의 특징

 '혈의 누'는 청일 전쟁 당시 평양을 배경으로, 옥련 일가의 이산과 7세에서 17세에 이르기까지의 옥련의 기구한 운명을 다루고 있다. 또, 일상적 대화 중심의 평이한 문장과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최초의 신소설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 작품은 개화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덕목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민족의 자주 독립 의식과 반봉건 사상이 주를 이룬다.

  신소설에 나타난 새로운 내용으로는 우선 개화 사상의 반영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통하여 신교육의 도입, 남녀 평등 사상, 자유 결혼의 주장, 계급 간의 갈등과 평등 의식의 대두 등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은 새로운 것이었지만 형식은 고전 소설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우선 소설의 전체적인 구조가 고전 소설의 영웅 설화 형식을 취하고 있고, 우연에 의한 사건 전개, 서술자가 자주 작품의 전면에 나와서 설명과 해설을 하고 있는 점들이 그러하다. 이로 보아, 신소설은 내용면에서는 당대의 새로운 시대 사상을 담고 있으나, 형식적 측면에서는 아직 고전 소설의 틀과 특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대적 영향으로 말미암아 문학의 예술적 기능에 대한 명백한 자각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사회적인 계몽과 같은 소설의 효용성에 치우쳐 있다는 것도 큰 특징이다. (출처 : 천재 문하교과서)

 

 신소설(新小說)의 특징

 

  '신소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출현한 일련의 소설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용어는 원래 일본에서 쓰이던 것인데, 1906년 '대한 매일 신보'의 광고에서 처음 보였고, 이듬해 '혈의 누'가 단행본으로 간행되면서 '新小說 血의 淚'라고 밝힘으로써 이후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이인직을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이 이전의 고전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소설 형식을 창출하였는데, 신소설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그들의 작품을 말한다. 이인직의 '혈의 누', 이해조의  '자유종', 최찬식의 '추월색'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신소설은 확대된 장면 묘사, 작품 서두의 참신성, 근대적인 사상과 신문물의 도입, 풍속의 개량 등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고전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부녀자들을 상대로 한 대중적 독서물로 변질되어 고전 소설의 상투적 수법인 우연을 통한 사건 전개, 선악의 평면적 대립, 흥미 위주의 사건 설정 등이 남발되면서 초기의 참신성이나 문제 의식이 점점 희석되고 오락성이 강화되어 갔다. (출처 : 천재 문하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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