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현진건 - 역사의 증언과 사실주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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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역사의 증언과 사실주의
김우종

 

 

빙허(憑虛) 현진건은 1900년에 대구에서 우체국장인 현경운씨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일찍이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죠 중학을 졸업하고 상해로 건너가서 호강대학의 독일어 전문부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했다. 그리하여 1920년에 《개벽(開闢)》에 <희생화>를 처음으로 발표했다가 황석우로부터 다음과 같이 혹평을 받기도 했다.

<희생화>는 물론 소설은 아니다. 작자가 무슨 예정으로 썼는지 모른다. 이것은 하등의 예술 형식을 갖추지 아니한 그저 사실을 있는 대로 그대로 기록한 소설도 아니요, 독백도 아닌 일개 무명의 산문이다.

시인 황석우는 평필을 들면서 이런 식으로 현진건의 최초의 데뷔작을 뭉개 버린 것이다. 물론 황석우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이광수를 비롯해서 김동인 나도향 등 대부분이 맨 처음엔 그렇게 습작을 발표했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진건은 유독 황석우를 만나서 이처럼 첫 번부터 창피를 당했으나 그래도 곧 이어 기술면에서는 비교적 딴 작가들보다 우수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운수 좋은 날> <불> 등이 모두 그 다음해부터 발표해 나간 작품이며 그는 이로 말미암아 당시 《백조》 동인 중 단편 작가로서, 그리고 사실주의 작가로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근대 문학사에 큰 공적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프로 문학의 전성기에 들어서 있던 1927년경부터는 창작 생활을 거의 중단하고 기자 생활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1936년에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구속되어 약 1년간 옥고를 겪었다.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던 그는 베를린의 세계 올림픽 경기에서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하게 되었을 때 사진부 기자와 함께 투옥되었던 것이다. 관제엽서 2배쯤 크기의 손기정 사진을 게재하면서 사진부에선 가슴의 일장기를 문질러 태극기인지 일장기인지 분간 못하게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9년에는 <흑치상지>를 신문에 연재하다가 내용이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는 이유로 중간되고 1943년에 병사했다. 해방되기 2년 전 애석하게 작고해 버린 것이다. 18세 때 결혼하여 단 하나 얻은 딸은 백조파의 시인이요, 소설가인 박종화씨 댁 맏며느리가 되었다.

《백조》는 당시의 3대 동인지 《창조》나 《폐허》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경향이 짙었다. 그렇지만 현진건은 같은 백조파이면서도 그들과는 달리 어두운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짙은 관심이 있었다.

시간과 장소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치 못하는 것이다. 달나라의 소요도 그만둘 일이다. 구름바다의 유희도 그칠 일이다. 조선 문학인 다음에야 조선의 땅을 든든히 서야 할 줄 안다.(1922년 《개벽》1월호)

이것을 보면 그는 백조파에 속하고 있으면서 처음부터 전연 독자적으로 자신의 문학 세계를 걷기 시작했음을 알게 된다. '더구나 달나라의 소요도…'또는 '구름바다의 유희도 그칠 일이다.'한 것은 꿈에 젖어 있던 딴 백조파 동인들과는 오히려 정반대 방향을 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앞에 인용한 작가의 말을 분석하면 그의 문학관은 다음과 같이 집약된다.

즉 그는 사회적.역사적 현실을 증언하는 리얼리즘의 길을 선택했으며 둘째로 그는 민족주의적 자각이 투철했고 민족의 당면 현실을 외면한 어떤 문학도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면을 그의 대표작 <운수 좋은 날>(1924년)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라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고 숨을 걸그렁걸그렁하였다. 그 때에 김첨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젠장맞을 년, 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멱여 살릴 줄 알아."

주인공인 인력거꾼 김첨지는 돈벌이를 위해서는 빈사 직전의 아내의 애원도 이렇게 뿌리치고 만다. 가난이 이 같은 비정과 냉혹함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그 같은 외면적인 표현과는 달리 내면적으로는 아내에 대한 동정이 깔려 있다. 그리고 허기진 배로 온종일 빗속을 철버덕거리면서도 아내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인력거를 끌고 달리다가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기도 한다. 그리고 그 날 마침내 아내를 위해서 설렁탕 한 그릇을 사 가지고 들어가지만 아내는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건을 통해서 작자가 보여준 것은 일제하의 가난한 우리 민족의 고통이며 특히 하층 계급의 인간들에게 행운의 기적도 있을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왜냐하면 김첨지는 그 날 운수가 좋아서 오래간 만에 돈 몇 푼을 벌게 되지만 그 날 이미 아내는 세상을 떠나 버리고 다시 비극에 말려드는 것이 작품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발표 연대로 보자면 프로 문학이 대두되던 시기이며 주요섭의 <인력거>에서도 나타나고 있듯이 그것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적인 대립 관계를 나타낸 적절한 소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작자는 그 같은 입장을 떠나서 다만 고통받는 계층의 모습을 현실 그대로 표현하였을 뿐 프로 문학적인 입장은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역시 당시의 문단 풍조에 말려들지 않고 독자적인 리얼리즘 문학을 추구해 나갔던 것이다.

이 작품이 그처럼 노동자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술 권하는 사회>(1921년)는 지식인의 고통을 표현한 것으로서 대조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주인공은 매일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온다. 아내는 남편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매일 보는 것은 혼자서 고민하고 술 마시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술 마신 동기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낯면이 말하는 '사회'의 낱말 뜻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한다.

이로써 작가가 표현하는 대화 속엔 꽤 심각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아내는 이 집안의 아내만이 아니라 당시 한국 사회의 어리석은 모든 민중을 상징한다. 교육받지 못했고 가난하게만 살아 온 민중이다. 그리고 이 같은 민중을 이끌어 나갈 책임자는 바로 여기서 남편으로 등장하는 지식인이다. 그러나 민중은 몽매하고 지식인은 무능할 뿐이다. 또 지식인은 무능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작당과 파벌의 분열만 일삼고 있다.

작자는 이처럼 민중과 지식인들 양쪽을 다같이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암담한 현실을 고발했던 것이다. 특히 지도층의 분열 현상은 그 무렵에 가장 현실 비판적인 경향이 짙었던 종합지 《개벽》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수탈 과정을 지적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그 같은 '구체적 참상을 목격할 때에 우리의 감회가 어찌 천연할 수 있으랴'하고 호소하고 있다. <술 권하는 사회>는 이 같은 기록과 대조해 볼 때 당시의 암담한 현실을  현진건이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작품으로 증언하고 고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립 정신 병원장>에서 더욱 끔찍한 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926년작인 이 작품의 주인공 나군은  낙천가요 어떤 고통도 웃고 넘기며 참아낼 수 있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므로 딴 작품들의 경우처럼 타고난 비극적 성격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과는 다르다. 어디까지나 웃음으로 끝낼 수 있는 인간형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비극의 깊이가 따르게 된다. 그는 뼈를 저미는 추위 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배가 고파도 웃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성격도 결국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는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요정에서 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음식을 주워 담다가 기생과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다. 굶주리는 처자식 때문에 굴욕을 참고 찌꺼기 음식을  주워담던 그는 그들의 조롱을 받다가 격분해 버리고 정신 이상자가 된다. 그래서 자식들을 기둥에 묶어 놓고 집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 동안 정신 이상자를 감시하고 간호하던 나군 자신이 정신 이상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당시의 우리 민중이 얼마나 처참한 굶주림 속에 빠져 있었으며 가족을 거느린 부모들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겠다. 또 이와 달리 그의 대표작으로서는 농촌 현실을 말해 주는 <불>(1925년)이 있다. 여기서 작자는 무지몽매한 민며느리 제도가 저지른 한국 농촌 사회의 비극성을 폭로하고 있지만 그 같은 비극서의 근본적인 원인도 가난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딸자식 하나를 먹여 기를 수 없을 만큼 가난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남의 집에 민며느리로 보내는 것이요, 자식이 노총각이 되도록 장가들일 밑천이 없기 때문에 그런 어린애를 민며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린 주인공 순이는 노예처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밤에는 그보다 더욱 가혹한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미성년자로서 이 집 노총각으로부터 당하는 그 짓은 견딜 수 없는 질곡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 짓을 매일 밤 당하던 방에 방화하게 된다.

<사립 정신 병원장>에서도 그랬듯이 작품의 종말은 방화로 맺어지며 그것이 비극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 같은 민중의 고통을 좀더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과 직접적으로 관련시켜서 작자가 마무리한 작품이 있다고 한다면 <고향>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 작품은 단편으로서의 기교적인 면에서는 큰 뜻이 없다. 왜냐하면 단편의 구서의 묘미나 표현의 기교를 살려 나간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열차 속에서 만난 한 사내의 이야기를 그대로 서술한 형식이다. 그렇지만 작자는 여기서 당시의 가난했던 백성이 일제 식민지 체제 하에서 그들의 수탈 행위로 말미암아 농토를 잃고 얼마나 처참한 역경을 헤쳐 나갔는지를 생생하게 기록 문학 형식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열차 속에서 만난 사내는 17세 때 이역만리 간도로 떠났던 인물이다. 조선 백성이 조선 땅을 버리고 남의 땅을 찾아간 건 일제에게 조선 땅을 빼앗겼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거기서 육신의 끝없는 혹사와 굶주림이 이어진다. 그래서 부친은 병을 얻어 작고한다. 홀어머니 역시 그 후 병들어 '흰 죽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아사한다. 다음에 주인공은 부모 유골을 버리고 현해탄을 건넌다. 역시 남의 땅이다. 규슈 탄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후 다시 그곳을 떠나서 오래간 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고향은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황폐해 있다. 우연히 꼭 하나 아는 사람을 만나는데 그녀는 유곽으로 팔려가서 시달리다 성병을 얻고 늙어 버린 폐물로서 지금은 일본인 집의 하녀로 있는 여자인데 바로 그녀가 옛날엔 그의 아내가 되려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26년 3월에 발행된 그의 단편집 《조선의 얼굴》의 맨 뒤에 수록되어 있다. 단편집의 이름을 《조선의 얼굴》이라 했고, 이런 표현이 단편집에서 사용된 것은 오직 <고향>에 단 한 번뿐이었으며 이 작품이 이 단편집의 맨 끝에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작자는 자기 문학의 결론적인 의미를 이 작품에 담았다고 짐작된다. 즉 <불>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사립 정신 병원장> 등이 모두 특정 시기와 공간을 무대로 표현해 나간 시대적 증언의 문학인데 비하여 <고향>은 그것을 긴 시간과 공간의 넓은 무대를 통해서 조감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현진건의 주요한 작품으로서는 <타락자> <그리운 흘긴 눈> <까막잡기> <B사감과 러브레터> <피아노> <신문지와 창> <무영탑> <적도> 등이 있다. 그 중에서 <B사감과 러브레터>는 일제 시대 교육 제도를 비판한 것도 되겠지만 노처녀의 열등감과 가학증과 고독감 등이 얽힌 심리적 변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파한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장편 <무영탑>(1939년)은 불국사 석가탑(일명 무영탑)에 얽힌 전설을 소재로 하여 하층 계급인 석수장이의 예술과 종교에 대한 진실성과 사랑하는 아내 아사녀에 대한 사랑 등을 감동적으로 엮어 나간 것이다.

<무영탑>이 <흑치상지>나 <선화공주>와 함께 역사 소설가로서의 그의 역량을 나타내기 시작한 대표작이라 한다면, 본 전집에 수록된 <적도>(1939)는 이와 달리 장편 연애 소설에서 우수한 기량을 보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 여해가 애정 관계 때문에 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옥하면서 애인 홍영애의 차에 실려 그녀의 집에 도착하게 되는 때부터 전개되는 스토리는 대중 소설로서의 극적 사건이 연속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우수한 문장력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현진건의 색다른 재능을 다시 과시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같은 작품들을 종합해서 본다면 문학사적 가치를 남긴 작품들은 20년대 초기부터 약 5,6년 간에 걸친 단편으로 끝나는 셈이다. 이 시대의 작품이야말로 그가 가장 투철한 작가적 사명감을 갖고 그 시대의 민족적 고난의 증인으로 활약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으로 가고요--

담뱃대나 터는 노인은

공동 묘지로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이것은 <고향>의 주인공이 술을 받아 마시며 흥얼거린 민요다. 우리 민족의 얼룩진 핏자국과 온갖 서러움이 이 노래 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며 현진건의 작품 세계는 바로 이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데뷔 시절에 '조선 문단인 다음에야 조선의 땅을 든든히 디디고 서야 할 줄 안다'고 주장한 대로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민족의 증인으로 사실주의적 작품에서 당시 문학에 선구적 공적을 남긴 것이다.

이 땅에서 사실주의를 대성한 이는 현진건이다. 묘사나 플롯이나 어느 한 점을 집어 나무랄 곳이 없다. 그 작품들을 읽을 때에 누구나 이 작자의 두뇌가 얼마나 안상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박종화의 평이다.

또 이와 비슷하게 백철은 '현진건의 특색으론 거기에서 심원한 사상성을 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문학 수법의 사실성에 있다……(중략)……그 작풍은 근대 리얼리즘 문학의 전형이다.'라고 평했다.

그런데 이 같은 평가는 현진건 문학의 가치를 부분적인 측면에서만 칭찬한 것이다. 즉 그의 문학이 사실주의적 묘사에 능하고 또 작자 자신이 그만큼 성실하게 기교를 닦아나간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현진건은 사실적 묘사의 문장력을 닦기 위하여 그런 문학만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문학은 사진처럼 사물의 특징을 정확히 표현하는 기교파로서의 사실주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암담한 현실을 고발하고 증언하기 위한 사실주의였다.

그런 의미의 사실주의였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단편이 얼마만큼 성실하게 그 시대의 증언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면 알 것이요, 또 작자 자신이 '조선 문학인 다음에야 조선의 땅을 든든히 디디고 서야 할 줄 안다'고 주장한 데서도 분명히 설명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백철은 그의 문학에 심오한 사상성이 없다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결코 기교만으로 끝났던 사실과 문학의 '사상의 공백 상태'로 지적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민족주의적 사상과 그 저항 의식도 사상이며, 그 같은 사상이 없이 무엇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 같은 문학을 했을 것인가? 독립 운동 중 옥사한  그의 중형, 그 때문에 자살한 형수,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일장기 말살 사건의 옥고, '불온한 사상성' 때문에 연재 중단된 <흑치상지>--이런 경력과 아울러 그의 단편들을 종합해 볼 때 그는 결코 기교적인 사실주의 작가로 끝난 것이 아니라 민족의 고난과 역사를 증언하는 사실주의 작가로서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살아 나간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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