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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에 대해 2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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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는 고시조에 대비되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갖춘 시조를 말한다. 일명 근대시조 또는 신시조라고도 한다. 그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갑오경장 이전의 작품을 고시조라고 하고 그 뒤 오늘날까지의 작품을 한데 묶어 현대시조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적·시대적 관념이며, 시조의 근대적 변화 또는 근대적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만 시대라는 기준에 의하여 단선적으로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조의 근대적 변화가 관념보다 구체, 집단보다 개인에 대한 발견과 표현에 있는 것이라고 볼 때, 근대적 감수성의 시조가 본격적으로 쓰여진 것은 1920년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편의상 1920년 이전의 시조를 개화기시조라 하고, 그뒤의 시조를 현대시조 또는 근대시조라 한다.

(1) 개화기 시조 개화기 시조는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고시조와 비교하여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제국신문 帝國新聞≫·≪대한민보 大韓民報≫·≪대한유학생회보 大韓留學生會報≫·≪태극학보 太極學報≫·≪대한학회월보 大韓學會月報≫ 등에 실린 시조를 비롯하여 ≪소년 少年≫·≪청춘 靑春≫·≪매일신보 每日申報≫ 등에 실린 최남선(崔南善)과 이광수(李光洙)의 초기 시조까지를 말한다.

개화기 시조의 첫 작품으로는 1906년 7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대구여사(大丘女史)의 〈혈죽가 血竹歌〉를 들 수 있다. 이어 1907년 3월 3일 ≪대한유학생회보≫에 실린 최남선의 〈국풍 4수 國風四首〉가 있다.

이들 첫 작품 이후에 많은 시조들이 발표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385여수를, ≪대한민보≫는 ‘가요(歌謠)’ 또는 ‘청구가요(靑丘歌謠)’라는 이름 아래 150여수를 각각 게재하여 시조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대한매일신보≫·≪대한민보≫ 등에 실린 시조의 대부분은 공적인 감정이 주를 이룬다. 즉 망국민(亡國民)의 우국충정이나 아니면 매국정권에 대한 저항, 또는 문명개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현실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같은 시대적 요청을 전통시가의 형식인 시조의 리듬을 통하여 토로하고 있다.

우국충정을 토로한 시조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하리라〉·〈혈죽가〉·〈보국심 報國心〉, 장생(長生)의 〈더욱 바삐〉, 지아생(知我生)의 〈누가 감히〉·〈자강력〉 등을 들 수 있다.

매국적 집권층을 규탄하고 민족적 각성을 촉구한 시조로는 〈해산약 解散藥〉·〈부지자 不知者〉나 ≪대한민보≫에 발표된 〈귀자자유 貴子自由〉와 기필생(期必生)의 〈금향로 今香路〉·〈송죽 松竹〉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개화사상을 강조하거나 의리를 고수하기도 하고 교육구국의 이상을 펼치는 등 문명개화를 부르짖은 시조도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문재목(文在穆)의 〈경화매일신보정신곡 敬和每日新報精神曲〉·〈권소년 勸少年〉·〈의구결 醫口決〉·〈한반도 韓半島〉·〈배양력 培養力〉 등과 ≪대한민보≫에 실린 〈대기 對棋〉, ≪대한학회월보≫에 실린 벽미산인(碧眉山人)의 〈시가 詩歌〉가 대표적이다.

개화기는 서구문화의 충격과 일본의 침략이라는 외래적 상황과 그에 대한 저항 및 내적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그리고 민족적 역량의 자각 등으로 점철된 시대인만큼, 개화기시조 역시 심미적인 차원에서보다 그 시대적 성격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기시조가 문학적 의미보다 그 사회적 기능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고시조와 마찬가지로, 개화기 시조는 개화기의 이념을 모방하고 이상화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개인의 삶의 현실이 반영될 수 없었음을 뜻한다. 고시조의 주요 주제인 유교적 이념이 이때에 와서는 우국·저항·개화 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형식이나 표현방법 또는 시를 인식하는 태도 등은 고시조와 별로 다른 바가 없다.

이렇게 주제의 새로움이 나타나 있다고 해도 그것은 감수성의 내면적 필연성에서 오는 작자의 표현의지가 아니다. 이는 외부의 시대적 요청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개화기의 정신적 분위기에 대한 선구자로서의 자각을 노래한 것이다. 개화기시조는 바로 이러한 의식을 반영한 시가였다.

게다가 작자 대부분이 비전문적인 사람들로서 신문집필진 아니면, 시대정신을 자각한 독자들이었다. 이러한 점에서도 개화기시조의 내용 내지 주제는 계몽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 목소리는 시인이 직접 청중에게 말하는 설득적인 목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시조에 비하여 신문에 발표된 개화기시조의 형태는 몇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첫째, 외형상의 특징으로서 시조마다 제목이 붙어 있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제목은 시조의 내용에 대한 작자의 의식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하리라〉·〈일신우신 一新又新〉 등의 제목은 각 시조에서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표현하는 데에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3장이라는 형식상의 문장보다 6구라는 시적 리듬의 반복형태가 현저하다. 3장 분장의 형식에서 각 장을 2구씩 분절하여 표기함으로써 6구라는 시적 리듬의 반복형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시조의 종장을 처리하는 방법에서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당시의 많은 시조들이 종결어미의 꼬리를 잘라버린 것이다. 즉 ‘……하노라’, ‘……이더라’ 등의 ‘러라’체의 어미는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한마디 어절 전체가 생략된 것들도 있다.

종결어미에 대한 이러한 생략은 ‘러라’체가 주는 유창하고 완만한 느낌을 감소시키고, 결의가 단호하고 힘참을 실감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넷째, 고시조가 가졌던 종장의 엄격한 규칙이 동요하고 있다. 고시조에서는 첫 구절이 반드시 3음절이어야 하며, 둘째 구절은 5음절 이하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개화기시조에서는 종장의 이러한 규칙에서 벗어나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형식의 변화는 그것이 비록 3장의 분장형식이 가지는 시조 특유의 형식을 완전히 파괴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통시가에 대해 형태적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화기시조는 최남선의 시조와 함께 현대시조의 대두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짐으로 보이는 것이다.

(2) 최남선의 시조 최남선이 처음 발표한 시조는 〈국풍 4수〉이다. 이 작품은 첫 수만 단시조이고, 나머지 세 수는 장시조 형태이다. 종래의 기사형식은 바꾸었으나 그 서술내용으로 보아 고시조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그 뒤에도 ≪대한유학생회보≫·≪대한매일신보≫·≪소년≫·≪청춘≫ 등에 계속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국풍 4수〉를 비롯한 그의 초기시조는 개화의식을 나타내고 있어서 개화기시조라고 부른다.

그의 시조에 대한 관심은 1909년 자신이 발행한 ≪소년≫에 ‘옛사람은 이런 시를 끼쳤소’라는 상설란에 고시조를 소개함으로써 나타난 바 있다. 최남선은 ≪소년≫에 〈국풍 4수〉를 비롯하여 14제 40여수와 ≪청춘≫지에 10제 30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소년≫에서 최남선은 시조를 국풍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시조를 중국 ≪시경≫의 국풍에 해당하는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가요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때에 국풍 아닌 새 제목도 볼 수 있다. 〈삼면환해국 三面環海國〉·〈봄마지〉·〈태백(太白)에〉·〈청천강〉 등이다. 여기에 와서 〈국풍 4수〉나 신문의 개화기시조보다 더욱 분명하게 시조의 형식을 6구의 형식으로 분절해놓은 점에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국풍 4수〉는 말할 것도 없고 ≪소년≫·≪청춘≫지의 시조는 한결같이 개인적 리듬에서 나온 새로운 의미내용은 아니다. 그의 시정신의 본질인 ‘조선심(朝鮮心)’을 기존의 관습적 리듬에 맞추어 노래한 것에 불과하다.

최남선의 본격적인 시조 창작활동은 1926년에 발표한 ≪백팔번뇌≫에서 시작된다. ≪백팔번뇌≫는 현대 최초의 개인창작 시조집이다. 그 서문에서 시조를 ‘문자의 유희가 아니라, 엄숙한 사상의 한 용기’로 보고 있다. 또한 시조를 우리 시가의 본류로 보면서 시조 부흥의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최남선의 시조는 문학적 의미보다 그 사회적 기능을 중요시하는 교술문학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발표된 이광수의 시조, 특히 명승지를 읊은 기행시조는 개인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최남선의 시조에 비하면 분명히 새로운 세계이다.

(3) 1920·1930년대의 근대적 변화 시조의 근대적 변화가 관념보다 구체, 집단보다 개인의 발견과 표현이라고 할 때, 근대적 감수성의 시조가 본격적으로 쓰여진 것은 이광수·주요한(朱耀翰)·변영로(卞榮魯)·정인보(鄭寅普)·조운(曺雲)·이은상(李殷相)·이병기(李秉岐) 등의 활동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화기시조가 등장한 것은 1910년 전후이겠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현대시조가 논의되고 쓰여진 것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1926년 이른바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대항하여 국민문학운동이 전개될 때 조선주의의 부흥과 더불어 본격적인 시조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근대 최초의 개인시조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가 발간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시조에 관한 논문과 작품이 많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는 서구적 충격 속에서 전통적인 것과 단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구적인 것을 무시하기도 불가능한 문화적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했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일본을 통하여 이식된 자유시가 시단을 휩쓸던 상황 속에서도 시조가 전통적 시형식으로 자각되고 시조의 가치가 역설된 것은 맹목적인 서구화에 대한 반작용, 곧 자기상실이라는 위기감의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즉 전통적 질서에 복귀함으로써 한국시가 자기를 찾고 자기의 원모습을 발견하려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시조라는 전통적 시형식을 처음으로 들고 나왔던 이는 최남선이었다. 1926년 ≪조선문단≫ 5월호에 발표한 〈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라는 논문이 그 본격적인 움직임이었다.

최남선은 시조가 절대 최선의 문학양식은 아니더라도 조선국토·조선인·조선심·조선어·조선음률을 통하여 모든 조선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시조를 조선이라는 체로 걸러진 정수라고 규정하고, 민족문학으로서 가장 알맞은 전통양식이 시조임을 강조하였다.

이어 손진태(孫晉泰)는 1926년 ≪신민 新民≫ 7월호에 〈시(詩)와 시조에 표현된 조선사람〉에서 시조의 명칭·기원·형식 등을 간단히 말하고는 시조에서 본 우리 나라 사람의 생활과 사상성에 대하여 말하였다.

염상섭(廉想涉)은 〈시조에 관하여〉(조선일보, 1926.12.)에서 “시조마저 빼버리면 조선문학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편협한 국수적 견해를 벗어나 널리 인생을 위한 예술로서 시조를 가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민≫에서는 〈시조는 부흥할 것인가〉(1927.3.)라는 설문을 가지고 이병기 외 11인이 다양한 의견을 들어 발표한 바 있다. 이 설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 이은상은 고시조는 그대로가 우리 민족문학의 체계에 대한 광탑(光塔:등대)이 되는 것이니, 이를 연구하여 이 형식에다 새로운 사상과 감정을 담아 새로운 시조를 창작하여 시로서 지향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이병기는 〈시조를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라는 논문을 통하여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실감실정(實感實情)을 표현하자는 것이며, 둘째는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셋째는 용어의 수삼(數三:선택), 넷째는 격조의 변화를 들었고, 다섯째는 연작을 쓰자는 것이었으며, 마지막 여섯째로는 쓰는 법, 읽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최초로 현대시조 창작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 것인데 현대시의 방법과도 상응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또 하나 이 시기에 있어서 시조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안확의 ≪시조시학 時調詩學≫(1940)이다.

(4) 8·15 이후의 시조 민족사의 거시적 단위로 보아 해방 후 50년은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다.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그때 그 광복의 감격과 기대가 반세기에 이르는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조금씩 퇴색하거나 망각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해방은 민족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남북 분단이라는 대결 관계에 놓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속해 온 것도 명백하다.

빼앗긴 국권, 그러나 국권을 찾았을 때 강대국의 대결의 장으로 분할된 국가와 더불어 사상과 이념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8·15는 해방과 광복의 의미를 지니면서 동시에 분단과 대결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러한 양면성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낳았고 좌우의 대립은 민족문학의 분열을 낳았으며, 심지어는 남과 북의 서로 이질적인 문학을 낳게 하였다.

시조라고 예외는 아니다. 시조를 보는 시각이 남과 북이 매우 다르다. 한 쪽에서는 시조가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형식이라면서 무조건 계승되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시조를 양반 사대부의 생활 감정과 미학적 요구를 반영한 노래로 보고 무조건 부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관심을 시각에서 실상으로 돌려 북에서는 시조에 대한 획일적인 시각을 버리고 시조의 실상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다. 동시에 남에서는 다시 한번 시조의 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다져야 한다.

해방 직후는 창작의 성과보다 이념의 대립, 정치적인 갈등이 고조되었던 비시적(非詩的) 시대다. 해방의 감격에 압도되어 대부분의 시가 정치적 전언 일변도였다.

양주동(梁柱東)의 〈님을 뵈옵고〉, 정인보의 〈십이애 十二哀〉, 이병기의 〈해방전-살풍경〉, 박노제의 〈해방〉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시편들이 당시 시의 정치적 전언이 있을 법한 판에 박힌 상투성과 무관한 것은 시조의 절제된 형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조운의 ≪조운시조집 曺雲時調集≫(1947), 정인보의 ≪담원시조집 饋園時調集≫(1948), 이병기의 ≪가람시조집 嘉藍時調集≫(중판, 1947), 양상경(梁相卿)의 ≪출범≫(1946), 정훈(丁薰)의 ≪머들령≫(1949), 이희승(李熙昇)의 ≪박꽃≫(1947) 등의 출간은 해방 직후 시조계를 대표하는 시사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들 시조는 대부분 해방 후가 아니라 해방 이전의 암흑기에 씌어져서 발표되지 못하고 있다가 출판된 것들이다.

이렇듯 해방전의 암흑기와 6·25전쟁까지의 공백기를 메꾸고 1950년대로 이어주는 과도기적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시인들은 이병기·이은상·조운·이호우(李鎬雨)·김상옥(金相沃)·김어수(金魚水)·이영도(李永道)·장하보 등이다. 그 중에서도 조운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이들은 주로 ≪백민≫·≪죽순≫·≪영문 嶺文≫·≪민성≫ 등을 통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현대시조에 있어서 1950년대는 주목할 만한 시기다. 1950년에 터진 6·25전쟁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정규전으로서 단순한 남과 북의 군사적 충돌이 아니었다. 대전 이후 국내 정치 구조의 필연적인 양극화와 더불어 시작된 동서 양 진영의 냉전이 실제의 무력 전쟁으로 벌어진 최초의 전쟁이다.

안으로는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 체제를 한층 강화시키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만큼 6·25의 충격은 해방 후 한국시의 양상을 바꾸는 데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으며 시조의 현대적 성격을 특징 짓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와서 시조는 현실시처럼 서정적 자아가 외향하기도 하고 전통시처럼 내향하기도 한다. 서정적 자아의 외향은 전쟁의 극한상황을 직접 다룬 이은상의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1958)·〈고지가 바로 저긴데〉(1956), 최성연(崔聖淵)의 〈핏자국〉(1955) 등의 시편에서 볼 수 있다. 서정적 자아의 내향은 박재삼(朴在森)·정소파(鄭韶坡)·장순하(張諄河)·최승범(崔勝範)·송선영(宋船影) 등처럼 전통적 서정을 노래하는 시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전통적 사상력을 통한 이러한 자기회복의 움직임은 1950년대가 거둔 시적 성취다. 그리고 이것은 전후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과 1930년대의 시문학파와 앞 세대의 가람·노산 등의 시조가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문화적 각성과 자연감각이 내면화된 것이다. 그렇다고 은둔·안주 등 조선조 시조 이래 오랜 내력을 지닌 귀거래사의 자연은 아니다. 그만큼 자연감각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자연은 인간의 감각으로 파악된 자연이다. 자연의 개념이 바뀐 것이다. 자연은 삶의 현실, 삶의 현장 그 자체가 된다. 이들 시에 나타나는 서정은 전후 현실적 상황에 대한 시적 대응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이후에 고조된다.

4·19와 5·16의 역사적 격랑을 겪은 1960년대 이후는 물질주의의 팽배와 사회적 모순으로 물들은 시대이다. 이 시대는 분명 시의 시대라기보다는 산문의 시대다. 아니, 물량화의 시대다. 산문의 시대, 물량화의 시대 속에서 시적 상상력은 비인간화해 가는 현실의 이모저모를 헤아리면서 아울러 그 비인간화 과정에서 인간의 구원을 겨냥하고 있었다.

박경용(朴敬用)·정완영(鄭椀永)·이우출(李禹出)·이우종(李祐鍾)·유성규(柳聖圭)·배병창(裵秉昌)·김준(金埈)·이근배(李根培)·김제현(金濟鉉)·이상범(李相範) 등의 시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에 와서 장순하·서벌(徐伐)·윤금초(尹今初) 등의 장시조가 시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재영(柳在榮)·김남환(金南煥)·김연동(金演東)·김원각(金圓覺)·박기섭·박시교(朴始敎)·박재두(朴在斗)·백이운(白利雲)·이일향(李一香)·이우걸·이지엽(李志葉)·임종찬(林鍾贊)·정해송(鄭海松)·한분순(韓粉順)·민병도(閔炳道)·조동화(曺東和) 등의 시가 환기하는 주변적 경험 역시 여기에 따라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현대시조는 이미 있어온 잠재적 시조의 보편적 질서와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개인적 질서가 함께 실현된 시형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질서와 보편적 질서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개인적 질서는 보편적 질서에 의하여 안정을 얻고, 보편적 질서는 개인적 질서에 의하여 변형된다. 이때 보편적 질서란 물론 한국시가 전체가 나누어 가지고 있는 원초적 질서이다.

한국시가사상 오직 시조의 형식만이 시형으로서 지속적인 가치를 가졌다는 것은 시조의 형식이 한국시가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일관하는 민족적 동일성과 깊은 연관성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같은 보편적 질서는 시에 형식을 부여한다. 즉 보편적 질서를 통하여 개인적 경험을 표출하는 것이 시조라고 하는 전통양식인 것이다.

그것은 곧 보편적 질서에 뿌리를 박고 있되 개인적 질서로 재구성되는 실감실지의 눈이다. 실감실지의 눈은 이미 있어온 관습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저항은 개인적 질서에 의하여 완성된다. 곧 개인적 질서를 통하여 보편적 질서가 갱신될 때 현대시조에서는 새로운 시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曺雲의 石榴)

이 시조는 시어로 보나 율조로 보나 개화기시조와 비교하여 상당히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기시조와 같은 단조로움이 극복되어 시조가 단형 서정시로 변모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변모가 가능한 것은 보편적 질서에 근거하면서도 개인적 질서로 재구성되고 있는 ‘실감실지’의 눈으로 대상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실감실지의 눈은 무엇보다도 이미 있어온 시조적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자기의 개성적인 질서에 충실하였을 때에 재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있어온 시조의 틀 안에서도 현대시조는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 신축성과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이은상이 1925년 4월 18일에 발표한 〈봄처녀〉, 이병기가 같은해 7월 1일 ≪동아일보≫에 발표한 〈봉천행 9장 奉天行九章〉에서 잘 나타난다. 이어 주요한·변영로·조운·정인보 등을 거쳐 ≪문장 文章≫지의 추천을 거친 김상옥(金相沃)·이호우(李鎬雨)로 이어지면서 시조의 근대적 변화가 꾸준히 추구되었다.

현대시조의 특징으로는, 형식면에서 개화기시조의 경우와 같이 시조의 형태를 6구의 형식으로 분절해 놓은 것과, 이은상이 시도한 양장시조(兩章時調)를 들 수 있다. 양장시조는 3장에 담을 내용을 압축해서 평시조의 자수를 단축하여 30자 내외로 하고 종장의 3·5자를 지키면서 중장을 생략한 형태이다.

내용면에서는 계절이나 자연물·명승고적 등을 찾아 거기서 느끼는 서경과 회고, 여정의 회포 등이 대부분을 이룬다. 이 시기의 작품활동은 주로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의 신문과 ≪신동아 新東亞≫·≪조선문단≫·≪조광 朝光≫·≪사해공론 四海公論≫·≪문장≫ 등의 잡지를 무대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나온 시조집으로는 최남선의 ≪백팔번뇌≫(1926), 이은상의 ≪노산시조집≫(1932)을 비롯하여 장정심(張貞心)의 ≪금선 琴線≫(1934), 김희규(金禧圭)의 ≪님의 심금(心琴)≫(1935) 등이 있다. 이외에 오신혜(吳信惠)의 ≪망양정 望洋亭≫(1935), 이병기의 ≪가람시조집 嘉藍時調集≫(1939) 등의 시조집도 출판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요점 정리

현대 시조

 

개념 : 현대시조란, 개화기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조를 말하지만 그 뿌리는 고려말부터 발달한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로 통상 4음보 율격으로 구성되는 3장으로 된 짤막한 단형시형으로 종장에서 독특한 율격적 변화를 거쳐 한 편의 시로서 완결된다.

 현대 시조의 전개

 

신구문학(新舊文學)의 분수령인 갑오개혁을 맞아 시조는 고시조의 탈을 벗고 서서히 새 모습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향도역(嚮導役)을 맡은 이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다. 1926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립하여 국민문학론이 대두되면서 시조부흥운동이 전개되었고, 최초의 현대시조집인 육당의 《백팔번뇌(百八煩惱)》가 그 해에 발간되었으며, 최남선,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자산(自山) 안확(安廓) 등의 작품은 아직도 예스런 면이 있기는 하나 고시조와 현대시조의 교량적 구실을 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갑오개혁 이후의 시조를 모조리 현대시조로 다루기보다는 이상 열거된 이들의 시조를 신시조(新時調)로 다루고 그 이후부터의 시조, 곧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이후의 작품을 현대시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시조를 본격적으로 현대화시키는 데 이바지한 사람은 이병기·이은상 등이며, 31년에는 《노산시조집》이, 47년에 《가람시조집》, 48년에 《담원(앳園) 시조집》(정인보 저) 등이 발간되어 허술한 시조시단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38∼39년에 《문장(文章)》 《동아일보》 등을 통해 등단한 이호우(李鎬雨)·김상옥(金相沃) 등에 의해 시조는 심화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이호우는 현대시조에서 내면세계를 다루는 데 성공하여 현대시조의 격을 높인 공이 크다. 조종현(趙宗玄)·김오남(金午男) 등의 활약에 이어 이영도(李永道)·정훈(丁薰) 등은 제나름의 특유한 영토를 마련하였다. 월하(月河) 이태극(李泰極)은 시조 전문지인 《시조문학》(1960년 창간)을 34집까지 이끌어온 공이 크다. 시조 중흥에 크게 기여한 정부 주최의 ‘개천 경축 백일장'(1957년부터 3년간)에서는 정소파(鄭韶坡)·장순하(張諄河)·유성규(柳聖圭) 등이 배출되었고, 60년대 초에 신춘문예를 통하여 정완영(鄭梡永)·이우종(李祐鍾)·박경용(朴敬用)·이근배(李根培) 등에 뒤이은 역량있는 작가들이 속출하여 오늘의 시조 신단은 현역작가 수만도 약 200여 명에 달한다. 58년에는 《현대시조선총(現代時調選叢)》이 나왔으며, 64년에는 한국시조작가협회가 결성되었고 그 뒤 한국문인협회에는 시조분과가 마련되었다. 시조전문지로는 《시조문학》과 《현대시조》가 있으며, 시조시인에게만 주어지는 문학상으로는 노산문학상 ·가람문학상 ·정운문학상 등이 있다. 이은상은 양장(兩章)시조를 시도한 바 있으며, 단장(單章)시조 ·동시조(童時調) 등을 시도한 이도 있다. 최근 신예작가들의 발랄 ·참신한 작품이 현대시조의 앞날을 밝게 해준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내용 연구

현대 시조의 특징

형식상의 특징

① 음절 수에서 파격을 보인다. - 3 · 4 내지 4 · 4의 기본 자수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으나, 종장 제1구의 3음절은 변화시키지 않는 원칙을 따른다. 율격(律格)을 음수율에만 의존하지 않고 낱말이 지니는 의미나 호흡에서도 율(律)을 잡는다.

② 시행(구와 장)의 배열 방법이 다양하다 - 고시조는 장별(章別)조차 구분이 없이 내리닫이로 잇대어 기술했으나, 현대시조는 그 배열이 연시조의 경우 수별(首別)의 별도처리는 물론 초 ·중 ·종장을 구별해 씀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통한 배열도 고려한다.

③ 연시조의 형태를 많이 취한다. - 고시조는 대부분이 단수(單首)로 되어 있으나, 현대시조는 오늘날의 복잡다단한 문명상(像)이나 깊은 사상을 다스리기에는 단수 45자 정도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연시조를 쓰는 경향으로 기울고 있다.

내용상의 특징

① 전문적인 창작 정신이 드러난다. - 고시조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두루 불렀던 노래임에 비해, 현대시조는 전문적인 창작 정신에 의해 지어진 작품이다. 감각적 표현도 애용한다

② 참신하고 개성적인 느낌을 준다. - 어려운 한자어나 상투어를 피하고 가급적 고유어를 선택하며 표현과 주제를 생생하게 개별적인 것이 되게 한다. 허사(虛辭)인‘어즈버’‘아마도’‘아희야’'하노라’등은 배제하며, 음풍농월조(吟風弄月調)의 외면세계를 다루거나 표피적 감정처리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세계로 파고들어 인성(人性)의 심층묘사나 사상성을 다루기 위해 메타포(metaphor)를 즐겨 쓰며, 파격의 빈도가 많다.

③ 고시조의 대부분은 제목이 없는 것에 반해 현대시조는 내용을 축약(縮約)·암시할 수 있는 제목을 반드시 붙이는 것이 상례이다. 고시조에서는 연시조의 경우 불과 몇몇 작품에만 제목이 붙어 있을 뿐이다.

심화 자료

시조부흥론(時調復興論)

일제강점기에 국민문학파가 제창한 현대시조 창작운동.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가 중심인물이 되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등의 프로문학 세력에 대항한 것이 국민문학론이고, 그 핵심내용이 시조부흥운동이다. 최남선이 쓴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는 이와 같은 생각을 대변한다. 초기 운동가들의 주장은 시조의 중요성과 부활의 당위성이며, 연시조나 구별배행시조와 같은 실천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뒤를 이어서 시조의 혁신과 현대시조의 구체적 모형을 제시한 사람은 이병기(李秉岐)인데, 그의 <시조를 혁신하자>라는 논문은 그 방향을 엿보게 한다. 이은상(李殷相)은 이병기와 함께 시조부흥운동의 디딤돌이 되었으며, 《노산시조집》은 시조부흥의 가능성을 확인시켰다. 고전문학의 여러 분야에서 시조만이 이어져온 것은 이 운동의 결과이다.(출처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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