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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에 나타난 처용 - 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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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에 나타난 처용 

 

1. 처용이 나타난 시들

 

. <취재수첩.16> 정일근

-처용의 도시

 

술 취한 처용(處容) (33. 울산시 남구 개운동)가 공업탑 로터리에서 춤을 춘다. 그의 아니는 일주일째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 도시의 상징인 푸른 작업복은 누런 때에 찌들었으며 어린 아이와 늙은 어머니는 오늘 저녁도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으리라. 달 밝은 그날 밤 야근을 하지 않고 돌아온 것이 잘못이었을까 역신(疫神)같이 건장했던 그 사내를 용서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공업화로 일찍 시든 그의 청춘 때문인가. 하루하루 몸은 야위어 가고 다달이 월급봉투는 기름져 갔다. 검은 강은 입안부터 썩어 가 구취를 풍기고 떠나간 물고기와 새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는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전라의 춤을 추는 아내를 보았다고 했다. 누구는 헌강왕(憲康王)을 따라 서라벌로 도망가는 아내를 보았다고 했다.

 

처용(處容) 씨가 춤을 춘다. 슬픔으로 수그러진 어깨와 탄식으로 늘어진 소매를 가진 처용(處容) 씨가 마침내 흐느낀다. 얼굴 가득 피어나는 열꽃들을 견디지 못해 흐느끼며 춤을 춘다. 자정 지나자 저마다 열병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수많은 처용(處容)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 나와 춤을 추고, 거대한 이 도시가 밤마다 기어 나와 어기적어기적 함께 춤춘다.

 

. <처용> 김춘수 시선, 민음사,1990.

 

@ 처용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 처용 3

1.

그대는 발을 좀 삐었지만/ 하이힐의 뒷굽이 비칠하는 순간

()이 좀 틀어지긴 하였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대는 나의 노래 나의 춤이다.

 

2.

6월에 실종한 그대

7월에 산다화가 피고 눈이 내리고,

난로 위에서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다.

서촌 마을의 바람받이 서북쪽 늙은 홰나무,

맨발로 달려간 그날로부터 그대는

내 발의 티눈이다.

 

3.

바람이 인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람은 바다에서 온다.

생선가게의 납새미 도다리도

시원한 눈을 뜬다.

그대는 나의 지느러미 나의 바다다.

바다에 물구나무선 아침 하늘,

아직은 나의 순결이다.

 

@ 처용단장

1.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늑골과 늑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고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의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계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2.

3월에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3.

벽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 선교사네 집/ 회랑의 벽에 걸린 청동시계가

겨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토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밤의 망토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 숭어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잠이 들곤 하였다.

 

호주 선교사네 집에는/ 호주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두화가 피어 있었다.

 

주님 생일날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4.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5.

아침에 내린 / 복동이의 눈과 수동이의 눈은

두 마리의 금송아지가 되어/ 하늘로 갔다가/ 해질 무렵

저희 아버지의 외발 달구지에 실려

금 간 쇠방울 소리를 내며/ 돌아오곤 하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아침을 뭉개고

바다를 뭉개고 있었다./ 먼저 핀 산다화 한 송이가

시들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서넛 둘러앉아/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이들의 목덜미에도 불 속으로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6.

모과나무 그늘로/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지는 석양을 받은/ 작은 비탈 위

구기자 몇 알이 올리브빛으로 타고 있었다.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쉬게 하는/ 어항에는 크낙한 바다가

저물고 있었다. vou하고 뱃고동이 두 번 울었다.

모과나무 그늘로/ 느린 햇살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장난감 분수의 물보라가/ 솟았다간/ 하얗게 쓰러지곤 하였다.

 

7.

새장에는 새똥 냄새도 오히려 향긋한/ 저녁이 오고 있었다.

잡혀 온 산새의 눈은/ 꿈을 꾸고 있었다.

눈 속에서 눈을 먹고 겨울에 익는 열매/ 붉은 열매,

봄은 한 잎 두 잎 벚꽃이 지고 있었다.

입에 바람개비를 물고 한 아이가/ 비 개인 해안통을 달리고 있었다.

한 계집아이는 고운 목소리로/ 산토끼 토끼야를 부르면서

잡목림 너머 보리밭 위에 깔린/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8.

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때의 어리디 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새끼 무수리가 처음의 깃을 치고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바다는 많이 자라서

허리까지 가슴까지 내 살을 적시고

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하였다.

바다에 젖은/ 바다의 새하얀 모래톱을 달릴 때

즐겁고도 슬픈 빛나는 노래를/ 나는 혼자서만 부르고 있었다.

여름이 다한 어느 날이던가 나는/ 커다란 해바라기가 한 송이

다 자란 바다의 가장 살진 곳에 떨어져/ 점점점 바다를 덮는 것을 보았다.

 

9.

팔다리를 뽑힌 게가 한 마리/ 길게 파인 수렁을 가고 있었다.

길게 파인 수렁의 개나리꽃 그늘을/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가고 있었다.

등에 업힌 듯한 그/ 두 개의 눈이 한없이 무겁게만 보였다.

 

10.

은종이의 천사는/ 울고 있었다./ 누가 코밑 수염을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제가 우는 눈물의 무게로/ 한쪽 어깨가 조금 기울고 있었다.

조금 기운 천사의/ 어깨 너머로/ 얼룩 암소가 아이를 낳고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얼룩 암소도 새벽까지 울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은 눈이/ 그 언저리에만 오고 있었다.

 

11.

울지 말자./ 산다화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꽃잎 하나로 바다는 가려지고/ 바다는 비로소

밝은 날의 제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가벗은 바다를 바라보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설청(雪晴)의 하늘 깊이/ 울지 말자,

산다화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12.

겨울이 다 가도록 운동장의/ 짧고 실한 장의자의 다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겨울이 다 가도록/ 아이들의 목덜미는 모두/ 눈에 덮인 가파른 비탈이었다.

산토끼의 바보,/ 무르팍에 피를 조금 흘리고 그때

너는 거짓말처럼 죽어 있었다./ 봄이 와서

바람은 또 한 번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겨울에 죽은 네 무르팍의 피를/ 바다가 씻어주고 있었다.

산토끼의 바보,/ 너는 죽어 바다로 가서/ 밝은 날 햇살 퍼지는

내 조그마한 눈웃음이 되고 있었다.

 

13.

봄은 가고/ 그득히 비어 있던 풀밭 위 여름,

네잎토끼풀 하나,/ 상수리나무 잎들의

바다가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언제나 거기서부터 먼저/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이 있었고/ 탱자나무 가시에 찔린/ 서녘 하늘이 내 옆구리에

아프디 아픈 새 발톱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김 춘수는 <잠자는 처용> <처용> <처용 3> '처용'을 제재로 다룬 시를 여럿 발표했다. 이처럼 김 춘수의 '처용'에 대한 관심은 유별나다. 역신에게 사랑을 뺏긴 고대의 '처용'이 김 춘수의 시에서는 고독에 싸인 시인 자신의 이미지로 대변된다.

 

<처용단장> 연작시 제1부의 첫 편이다. 1부는 모두 13편으로 되어 있는데 <현대시학>1969년부터 1년 반에 걸쳐서 연재되었다. 2부는 8, 3부는 48, 4부는 17편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처용설화에서 소재를 취하였으나 '처용'이라는 말은 본문 속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제목 <처용단장>'처용이 노래한 짤막한 시'라는 뜻이다. 처용이라는 설화적 인물을 서정적 자아로 설정하고, 과거 어느 날 그 서정적 자아의 눈을 통해 바라본, 3월의 남쪽 바다의 인상을 서술적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인상을 서술하는 것이기에 모두 있었다, 들었다 등의 과거형을 쓰고 있다. 이와 같은 회상적 어법과 남쪽 바다라는 특정 지역의 제시를 통해 미묘한 향수, 그리움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작품은 다소 어려운 시이기도 하다. 이 시에는 이미지를 이루는 주된 사물은 1. 삼월의 눈, 2. 라일락 새 순, 3. 산다화, 4. 겨울 털옷, 5. 남쪽 바다, 6. 물개의 수컷, 7. 그 울음 소리, 8. 수렁, 9. 보얀 목덜미 등이 있다. 이들의 의미의 고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적 감각으로 어울려 추억(또는 무의식) 속에 아련히 잠재해 있는 '눈 내리는 삼월의 남쪽 바다'의 정경이 인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미처 벗지 못한 털옷’ - 3월의 바다는 여름의 바다나 겨울의 바다처럼 청명하지는 않다. 아직 겨울의 차가움에서 다 벗어나지 못하고 음산함을 드러내 보이는 바다의 정경을 '털옷'으로 심상화하였는데, '바다''털옷'은 의미상으로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그 어우러지지 않는 말이 낯설게 같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더욱 미묘한 느낌을 준다.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 -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은 계절적 느낌 속에서 따뜻한 남쪽의 바다가 눈을 뜨고 있다. 바다에 남쪽이 어울려 그리움 또는 따뜻함 등의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 - 우리 나라의 남쪽 바다에 물개 우는 소리가 들릴 리 없다. 여기에서의 물개는 '바다'와 어울리는 이미지이고, 또 물개의 '수컷'음이 주는 언어 감각과 '바다'가 주는 음의 언어 감각이 어울리게 한 것이다. 따라서 바다는 더욱 싱싱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 여기서 '우는 소리'는 슬픔이나 비애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보다 다만 가슴에 부딪는 울림으로 청각적 심상을 드러내는 말이다.

 

10행의 '수렁(웅덩이)'이라는 말이 선택된 것은, 앞의 '눈송이'에서의 '송이'와 뒤의 '적시고 있다'와 이미지가 어울리기 때문이다. '큰 눈송이''깊은 수렁'과 어울리고, 또는 '목덜미를 적시'기에 알맞은 의미로서 어울린다. '수렁'은 곧 물을 환기시키는 시어인 셈이다.

 

. 처용은 말한다 - 신석초 -

 

1.

바람아, 휘젓는 정자나무에 뭇 잎이 다 지겠다.

성긴 수풀 속에 수런거리는 가랑잎 소리 / 소슬한 삿가지 흔드는 소리

휘영청 밝은 달은 대지를 뒤엎는데 / 깊은 설레임이 나를 되살려 놓노라.

아아, 밤이 나에게 형체를 주고 / 슬픈 탈 모습에 떠오르는 영혼의

그윽한 부르짖음......

 

어찌 할거나. 무슨 운명의 여신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도 육체에까지 / 이끌리게 하는가.

무슨 목숨의 꽃 한 이파리가

나로 하여금 이다지 기찬 형용으로 / 되살아나게 하는가.

 

저 그리운 연못은 거친 갈대 우거져서 / 떠도는 바람결에도 몸을 떨며 체읍을 한다.

구비 많은 바다다운 푸른 물 거울은 / 나의 뜰이었어라.

밤들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가랑이 넷이어라.

 

그리운 그대, 꽃 같은 그대 / 끌어안은 두 팔 안에 꿀처럼 달고

비단처럼 고웁던 그대, / 내가 그대를 떠날 때

어리석은 미련을 남기지 않았어라.

꽃물 진 그대 살갗이 / 외람한 역신의 손에 이끌릴 때

나는 너그러운 바다 같은 눈매와 / 점잖은 맵시로

싱그러운 노래를 부르며 / 나의 뜰을 내렸노라.

나의 뜰, 우리만의 즐거운 그 뜰을.

 

아아, 이 가면, 이 무슨 공허한 탈인가.

아름다운 것은 멸하여 가고 / 잊기 어려운 회한의 찌꺼기만

천추에 남는구나.

그르친 용의 아들이여 / 처용

도 예절도 어떤 관념규제도 / 내 맘을 편안히 하지는 못한다.

지금 빈 달빛을 안고

폐허에 서성이는 나, 오오 우스꽝스런 / 제왕이여.

 

2.

모든 것은 흘러가 없어지는가.

시간의 여울로 / 어지러운 잊음의 숲이여.

변모한 서라벌이여.

빈 절 무너진 성 둘레

멸하고 또 멸하지 않는 대리석의 / 빛나는 소상들이여.

구름다락과 비단의 거리는 어디 있는가.

사랑하며 노닐던 나의 황금장소는 / 바이 없고

지금 황량한 갈대밭에 / 바람 달이 설렌다.

 

나의 범절과 나의 몸짓은 / 다시없는 보물을 잃게 했어라.

나는 우활(迂闊) 하였어라.

나는 빈 꿈 여울에서 크낙한 / 술을 마셨어라.

그대는 나를 떠나고 / 나는 나의 체념의 갈밭을

그지없이 헤맨다.

나의 달관은 스스로 나를 버리게 했구나.

지금 뉘우친들 무엇하리.

홀로 메어지는 슬픔을 안고 / 여기 서성이노니

하늘과 땅이 나에게 모멸하는 / 눈살을 던지는 듯

나무는 깔깔대고 돌들은 허허 웃는다.

바람에 부서지는 산란한

/ 모래

이슥한 물 거울에 비칠 그림자도 / 나는 갖지 못 하였어라.

우수수 듣는 나뭇잎이 낙화처럼 내려 / 찬 늪을 덮을 뿐......

 

아아, 나는 유령이 되었는가

형체만 남은, 형체도 안 보이는 / 유령의 그리메여.

못내 나는 슬픈 유령이 되고 말았는가.

이젠 사랑도 그리움도 없어라. / 이젠 의젓한 풍채도 높은 긍지도 없어졌어라.

머리 그득히 꽃 꽂아 , 밝은 모양에 / 수삼(袖衫) 드리워 늘씬한 몸매에

애인 상견하여 윤 나는 눈에 / 산상(山相) 이슥한 긴 눈썹에

홍도화 같은 붉은 입술에 / 백옥같이 흰 이빨에

칠보 늘이어 수긋한 어깨에 / 지혜 가득하여 풍만한 가슴에

그리움도 아름다움도 / 이젠 모두 소용없어라.

 

무녀(巫女), 네가 성화같이 날 불러 외었은 들 / 무엇하리

요사스런 미치광이여 / 밤 신명의 의붓딸이여.

너의 헐은 옷에 펄럭이는 쾌자자락이랑 / 징 소리에 흔드는 붉은 둥치랑

외잡한 네 몸둥아리의 뒤흔드는 물결은 / 나를 완구로 만들었을 뿐,

너의 수다스러운 언어의 주술도 /거만하고 실속 없는 나의 화상을 남겼을 뿐,

휘황한 궁궐도 춤추던 깁 장삼도 / 나의 서글픈 풍류에 지나지 않는다.

 

무녀, 지혜 많은 사생녀여, / 숱하고 오랜 어두운 밤

밤의 목마름이 너로 하여금 / 을씨년스러운 신화를 지어내게 했구나.

신들린 사지, 사시 남기처럼 / 떨리는 손길로

너는 무슨 광명의 불꽃을 가져왔는가. / 네 기특한 슬기도 이젠 쓸모가 없어졌어라.

아무도 네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 아무도 네 얼굴을 믿지 않는다.

나의 태양의 잠든 가지는 / 재난과 안개에 뒤덮여

희미한 전설의 내음으로 떠돈다.

 

3.

저기엔 내가 불던 옥적(玉笛)이 굴러 있어라.

허무히 빈 갈대가 되어 / 써늘한 다락 속에

여인이 버린 패물 조각과 / 쓸쓸히 지는 나뭇잎과 함께

 

일찍이는 네 짙푸른 목청이 / 하늘가에 가 서렸더니

사랑하다 밀리는 흐느낌도 / 저녁노을도 비바람도

바다물결도 모두 멎었더니 /지금은 잠잠한 가락도 없이

무위(無爲)한 옥 가지가 되어 / 어둡고 이끼 긴 섬돌 위에 버려졌구나.

바다는 뒤설레어 상기 멎지 않고 / 바람은 부르짖고 물결은 솟아올라

언덕을 물어뜯는다.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저 / 금속의 별빛 소리는 내 것이 아니어라.

차고 현란한 위조보석 / 금강성이 부서지는 불야성은

은하의 별 구름다와라.

사월 초파일 황룡사에 높이 현 / 연등불도 무색하구나.

그러나 여기엔 정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찍이 너그럽고도 큰 고래등같은 / 기와집이 섰던 곳에

값싼 모형 건물들이 서서 / 그 속에 어지러운 장기판이 벌어진다.

'황무지'의 허술한 들창가에 / 간음하는 소리 들린다.

 

"춥다 춥다 / 내 품안에 들어오너라."

저며 논 보릇다운 몸둥아리, / 오오, 드러난 살갗들이여.

아내도 처녀도 없어라.

뒤섞인 소란한 수풀 속에 / 풀어지는 자락은 /

나랏 땅을 갈른 장벽만치나 / 저를 가리지 못하는구나.

갈대는 어질 머리처럼 흐트러져 / 은빛 물결은 흔들고

여기 흐트러진 성황 굿이 열렸는데 / 야만스런 인수(人獸)의 다리 얽혀

숨도 헐떡거리며 / 안간힘을 쓴다.

 

열반이 번져 온 마을에 / 노을이 타는

이 언덕에 / 꽃 타는 이 언덕에

언제 머루나무의 새 잎이 돋아날 건가.

밤 밤 밤 / 기어오르는 뱀의 혓바닥과 환장할

한 바다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움직임과 / 전신과 혼이 녹아 내리는 마디마디는

열병신(熱病神)에게야 홧갓이어라.

 

바다는 뒤엎질고 물결은 일어난다. / 바람이 인다, 동해바다

아홉 개의 머리의 용이 솟구쳐 올라 / 천지를 뒤흔드는데

성난 물결을 잠재울 태평의 가락이 / 없구나.

 

오오 처용, 너는 보는가 / 변화의 격한 물 이랑을

눈부신 세월은 그 위를 지나가고 / 너에겐 아무 할 일이 없구나.

너는 너에게로 돌아가야 하리 / 네 자신의 위치로 태양처럼

고독한 너의 장소로 / 지혜의 뜰, 표범가죽이 드날리는

그 속으로 / 동이 튼다.

 

아침해가 비늘진 물결너머로 / 굼실거리는 용의 허리 너머로

솟아오른다.

황금 빛 부채살을 펴고 / 바람꽃을 헤치며

아득한 푸름의 맞단 곳으로 / 붉게 불타는 찬란한 구름 높이

이글이글 뒤끓고 / 진동을 하며

보라색 안개의 가르마 위로 / 징 같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오오, 광명의 나래짓이여......

 

. 처용 처가 - 박라연 -

 

돌아돌아 사각 지대를

사만구천구백구십아홉 번을 돌아

처용 각시 문지방을 넘어온 꽃배암

 

둘이사 흐르는 눈물로

제아무리 강물을 흔들어도

 

눈뜬 장님되어 돌아선

처용의 슬픔 속엔 아무도

아무것도 섞일 수 없다

 

부끄러운 그대 몸 가리움 / 땅 한 점 없는 서러움에

날개 돋힌 꽃배암아

 

훠워이 훠워이 날아라 / 날아라 뜨겁게 못박히렴

저승의 잎새에 나뭇가지에 / 방울방울 달겨드는 빗방울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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