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행복한 왕자 / 오스카 와일드

by 송화은율
반응형

 

행복한 왕자 / 오스카 와일드


1. 조각상과 제비

'행복한 왕자'의 조각상이 높고 둥근 기둥 위에 서서 도시 위에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온몸이 종잇장처럼 얇게 편 순금으로 감겨 있고, 두 눈은 반짝거리는 푸른 구슬이었습니다. 칼자루에는 루비가 빛나고 있었지요.

이 조각상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했습니다.

"마치 바람개비 새처럼 우아하구나." 시 의원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술을 아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고 싶어서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용성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것도 두려웠기 때문에 전혀 격에도 맞지 않는 걱정을 하면서 이렇게 한 마디 덧붙였지요.

"물론 바람개비 새만큼이라도 실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어린아이가 떼를 쓰고 짜증을 내면서 울어대면 현명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아가야, 왜 저 왕자님을 본받지 못하니? 저 왕자님은 설혹 꿈속에서라도 젖을 달라고 울지는 않는단다."

불행 가운데서 온갖 희망을 다 잃어버린 어떤 사나이는 이 훌륭한 조각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 세상에는 진짜 행복한 것도 있는 모양이야...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하면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지."

고아원에서 자라는 어린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조각상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반짝거리는 길고 빨간 옷을 입고 하얗고 깨끗한 턱받이를 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교회에서 나오는 길이지요.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야, 정말 천사님 같아!"

"너희들이 그런 걸 어떻게 알지?" 배운 것이 많은 교사가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아직 천사를 본 적이 없을 텐데 말이야."

"네, 하지만 그래도 꿈속에서는 천사님을 보는 걸요." 아이들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학식이 풍부한 교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 교사는 어린아이들이 이런 꿈을 꾸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밤, 조그마한 제비 한 마리가 그 도시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친구 제비들은 이미 육 주일 전에 모두 따뜻한 이집트 쪽으로 날아가 버리고 주위에 없었습니다. 이 제비는 그러니까 홀로 남겨진 것이지요. 다름이 아니라, 아주 아름다운 한 포기 갈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어요.

제비는 이른 봄날에, 커다란 노랑나비를 쫓아 냇가를 날고 있을 때 처음으로 그 갈대 아가씨를 보고 그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답니다. 그 날씬한 허리의 모습이라니... 제비는 그 옆으로 날아가 땅에 내려앉아 갈대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도 좋을까요?"

이 제비는 마음속 생각을 당장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말을 건넨 것이지요. 그러자 갈대 아가씨는 가만히 머리를 숙이며 제비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제비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 갈대 아가씨 주위를 휘감으려 날았답니다. 날개로 냇물 수면을 어루만지면서, 은빛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면서 말이지요. 이것이 그 사랑의 최초의 속삭임이었고, 그 뒤로는 제비는 여름 내내 갈대 아가씨와 함께 놀았어요.

"거 참,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군 그래. 저 아가씨는 가난한데다, 일가 친척들이 너무 많아서 귀찮을 텐데..." 다른 제비들은 이 사랑을 보고 이렇게 지저귀곤 했습니다. 정말 그 냇가에는 갈대가 무척 무성했어요. 그리고 어느새 가을이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제비들은 모두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지요.

친구들이 모두 가 버리자 제비도 어쩐지 쓸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그동안 사랑하던 갈대에게도 어쩐지 싫증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저 아가씨는 도대체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단 말이야. 게다가 좀 곁눈질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언제나 바람이란 녀석과 함께 놀고 있으니 말이야!"

사실 제비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갈대 아가씨는 그 아름다운 몸을 형언할 수 없이 부드럽게 굽히곤 했거든요. 그리고 제비는 또 말했지요.

"저 아가씨는 아무래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라는 팔자인 모양이야. 하지만 나는 여행을 즐기는 사나이 아닌가. 그러니 내 아내가 될 사람도 아무래도 여행을 좋아하지 않으면 곤란하단 말이야."

"당신은 나와 함께 먼 곳으로 갈 생각은 없으십니까?" 마침내 제비는 마음을 먹고 갈대 아가씨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습니다. 마치, 나에게는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답니다... 하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그 동안 당신은 날 희롱해왔군요. 전 이제 피라밋이 있는 나라로 갈 겁니다. 그럼 잘 있어요!" 제비는 이렇게 소리치고 그 자리를 떠나 날아갔습니다.

제비는 하루 종일 하늘을 날아서 밤이 될 무렵 이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어디에 머무르면 좋을까? 도시에는 여러 가지 준비가 잘 갖춰져 있을 텐데."

그 때 높고 둥근 기둥 위에 서 있는 조각상이 눈에 띄었습니다.

"음, 그래. 여기 머무는 게 좋겠군." 제비는 소리쳤습니다. "공기도 좋고, 아주 기막히게 좋은 장소로군 그래!" 제비는 그렇게 행복한 왕자의 두 발 사이에 날아와 앉은 것입니다.

"오늘 밤은 황금으로 꾸민 침실에서 자게 됐지 뭐야!" 제비는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선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제비가 날개 그늘에 막 머리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그 순간, 커다란 물방울이 제비에게 뚝 떨어져 내렸습니다.

"이거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제비는 소리쳤습니다. "하늘엔 구름 한 조각 없고, 별이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데... 그런데 이렇게 비가 오다니... 유럽도 이렇게 북쪽 지방에서는 이상한 날씨가 가끔 생기는 모양이로군. 하긴, 그 갈대 아가씨도 비를 무척 좋아했지. 그거야 그 아가씨 자유니까."

또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이렇게 비도 피할 수 없다면 이따위 조각상은 도대체 뭘 하려고 만든 거야? 이거, 어디 괜찮은 굴뚝이라도 찾아봐야겠구먼." 제비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른 곳을 찾아 날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비가 날개를 미처 펴기도 전에 물이 또 한 방울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제비는 위쪽을 쳐다보았어요... 그런데 아아, 그 때 제비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을까요?

행복한 왕자의 두 눈이 눈물로 가득 차서 그 눈물이 황금의 두 볼로 흘러내려 떨어졌던 것입니다. 달빛을 받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자 제비는 어쩐지 왕자가 무척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제비는 물었습니다.

"나는 행복한 왕자란다."

"그런데 왜 울고 계시죠? 덕분에 제가 흠뻑 젖었잖아요!" 제비는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2. 바느질 집과 궁전

왕자의 조각상은 대답했어요.

"내가 살아있을 때, 인간의 심장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나는 도대체 눈물이 무엇인지도 몰랐단다. 내가 사는 궁전의 이름조차 상수시(걱정이 없음)였으니까 말이야. 그 궁전에는 도대체 슬픈 일 따위는 전혀 들어올 수가 없었지.

나는 그때 낮에는 꽃밭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고, 밤에는 커다란 방에서 무도회를 열고 제일 앞 줄에서 춤을 추었지. 정원 둘레에 높은 담이 둘러 세워져 있어서 그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단다. 내 주위에 있는 것은 어느 것이나 무척 아름다웠어. 궁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행복한 왕자'라고 불렀지. 만약 '즐거움'이 행복이라면, 난 분명 행복했어.

어쨌든 난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행복한 채로 죽었단다. 그런데 내가 죽고 난 뒤에 사람들이 날 이렇게 높은 곳에 세워놓았지 뭐야. 그래서 난 여기서 이 도시의 온갖 보기 싫은 것들, 슬픈 일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게 됐지. 내 심장은 납으로 만들어졌단다. 하지만 난 내가 본 것들 때문에 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그리고 보니, 이 양반은 완전 순금은 아닌 모양이군." 제비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제비는 예의발랐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큰 소리로 똑바로 대놓고 하지는 않았어요.

"저기 저 멀리 말이야..." 왕자의 조각상은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얘기를 계속했습니다.

"여기서 훨씬 멀리 저 쪽, 좁은 골목길에 가난한 집이 있어. 창문이 열려 있어서 그 집 식탁에 어떤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이 내게는 다 보인단다. 얼굴은 비쩍 여위었고, 온 몸이 지쳐 있어. 손은 온통 바늘에 찔린 자국 때문에 벌겋게 거칠어졌어. 그 집은 바느질을 하는 집이란 말이야.

그 여자는 지금 두껍고 윤이 비단 옷감 저고리에 정열화라는 열대 지방의 꽃 무늬를 수놓고 있어. 이 다음 궁전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황후의 제일 아름다운 시녀가 입고 나올 옷이야. 하지만 이 집 방 구석 침대에는 조그만 사내아이가 앓아 누워 있어. 열이 심해서 오렌지를 먹고 싶어하지.

하지만 엄마는 그 아이에게 맹물밖에는 먹여줄 수가 없어. 그래서 아이는 지금 울고 있단다. 제비야, 제비야, 꼬마 제비야. 내 칼자루의 루비를 뽑아서 저 여자에게 갖다줄 수 없겠니? 내 발은 이 받침대에 붙어 있어서 난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단다."

제비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지금 제 친구들이 이집트에서 절 기다리고 있어요. 제 친구들은 지금쯤 나일강 위를 날으면서 커다란 연꽃과 얘기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고 나면 임금의 무덤으로 잠을 자러 가는 거지요. 그 임금은 화려하게 색칠한 관 속에 편안하게 누워 있어요. 임금의 몸에는 노란 삼베를 두르고, 향료를 발랐지요. 목에는 연록색 구슬 목걸이를 감고, 손은 마치 시든 나무 잎사귀 같지요."

"제비야, 제비야, 꼬마 제비야." 왕자는 말했습니다.

"단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내 옆에서 잠을 자면서, 내 심부름을 해줄 수 없겠니? 저 어린애는 이제 목이 타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이야. 엄마가 애타하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구나."

제비는 대답했습니다.

"전 별로 어린애들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지난번 여름에는요, 제가 냇물가에 앉아 있었는데요... 장난꾸러기 아이들 두 녀석이 오더군요. 물방앗간 아들인데, 이 녀석이 언제나 제게 돌을 던지는 거예요. 뭐 그 돌에 맞을 리야 없지요. 우선 우리 제비들이 그렇게 어설프게 날 리도 없거니와, 게다가 우리 집안은 대대로 몸이 날쌘 것으로 유명하걸랑요. 하지만 그래도 그 녀석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은 사실인 걸요. 돌 따위를 던지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너무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왕자를 보고 제비는 가엾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여긴 너무 추워서 곤란해요.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면 하룻밤만 더 있기로 해 보지요. 그리고 말씀하신 심부름을 하겠어요."

"고맙다, 꼬마 제비야." 왕자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는 왕자의 칼자루에서 커다란 루비를 쑥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리에 물고 길거리의 지붕들 위를 날아갔습니다.

제비는 교회의 탑에 스칠 듯 가볍게 날았습니다. 그 탑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천사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지요. 궁전을 스쳐 지날 때에는 안에서 무도회의 음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떤 아리따운 아가씨가 애인과 함께 테라스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 애인은 아가씨에게 이렇게 속삭였어요.

"아, 얼마나 아름다운 밤입니까? 아니,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힘입니까?"

"그런데 대무도회 때까지는 제 새 의상이 다 완성되어야 할 텐데..." 아가씨는 애인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전, 제 의상에 정열화 무늬를 수놓아 달라고 얘기를 했답니다. 그런데 바느질하는 집들은 어쩜 그리도 하나같이 게으름을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개천 위를 날아 지나갈 때에는 배의 돛대 위에 매달아 놓은 등불 빛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유태인 거리도 날아 지났습니다. 거기선 유태인들이 물건을 거래하고, 구리 거울로 황금의 무게를 다는 모습도 보였어요.

드디어 그 가난한 집에 다 와서 제비는 안을 들여다 보았어요. 어린아이는 열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침대 위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너무 피곤한 탓인지 벌써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어요. 제비는 창문 안으로 휙 날아들어가 식탁 위, 엄마의 골무 옆에다 루비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조용히 침대 주위를 날으면서 날개로 어린애의 이마에 시원한 바람을 부쳐 주었답니다.


3. 가난한 청년 시인

"열이 많이 내린 것 같아. 이제 꼭 좋아질 거야." 어린아이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기분 좋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 돌아가 자기가 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요?" 제비는 계속 말했어요. "이렇게 추운 밤인데도 나는 지금 무척 따뜻해요."

"그건 네가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란다." 왕자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는 그 말을 더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곧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제비는 뭔가 생각하려고 하면 항상 그렇게 졸음이 오곤 했습니다.

날이 밝자 제비는 냇가로 날아가 몸을 씻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냇물 위 다리를 지나가던 조류학 교수가 그 모습을 봤어요.

"이거 정말 놀라운 일이로군."

교수는 말했습니다. "이런 겨울에 제비가 있다니!" 그리고 교수는 이것에 관해 긴 글을 써서 그 지방 신문에 실었답니다. 워낙 잔소리를 이것저것 끊임없이 길게 그 글에 늘어놓아서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화제가 되었지요.

"오늘 밤에는 꼭 이집트로 가야 해요."

제비는 말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온 몸에 다시 기운이 솟구치는 것 같았지요. 도시의 기념탑 따위를 하나 빠트리지 않고 모두 구경하고 나서는 오랫동안 교회의 뾰족탑 꼭대기에 앉아 있었어요. 어디를 가나 참새들이 모두 제비를 보고 짹짹거리면서 "정말 믿음직한 손님 아니니?"하고 주고받는 소리를 듣는 것이 유쾌했지요. 제비는 아주 기분이 좋았답니다.

달이 떠오르자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어요.

"혹시 이집트에 전하실 말씀이라도 없어요? 저는 이제 떠날 참입니다."

왕자가 말했습니다.

"제비야, 제비야, 꼬마 제비야. 하룻밤만 더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으련?"

제비는 대답했어요.

"모두들 이집트에서 절 기다리고 있답니다. 내일 쯤이면 제 친구들이 모두 나일강 상류의 두 번째 여울까지 올라갈 거예요. 거기에는 창포 수풀이 무성하구요, 그 가운데 하마가 잠을 자고 있답니다. 커다란 화강암 옥좌에 '메므론' 신이 앉아 있죠. 밤새 가만히 별을 바라보다가 새벽에 샛별이 반짝이기 시작하면, 다들 일제히 기쁨의 환성을 터뜨리죠. 하지만 금방 잠잠해져요. 한낮이면 누런 사자가 강가로 내려와서 물을 마시지요. 눈은 마치 초록색 보석 같고, 그 부르짖는 외침은 냇물의 시끄러운 소리보다 더 요란하답니다."

왕자는 말했습니다.

"제비야, 제비야, 꼬마 제비야. 이 도시의 저 멀리 지붕 밑 다락방에 어떤 젊은 청년이 보인단다. 그 청년이 앉아 있는 책상에는 종이가 흩어져 있지. 그 청년이 기대고 앉은 책상에는 물컵이 하나 있지. 그리고 거기엔 시든 오랑캐꽃 한 다발이 꽂혀 있어.

그 청년의 머리카락은 꼬불꼬불한 다갈색 곱슬머리야. 입술을 석류처럼 붉고, 그 눈초리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지 뭐냐. 지금 극장 감독에게 주문 받은 대본을 끝마쳐야 하는데, 너무 추워서 그럴 기운이 없는 거야. 난롯불은 꺼지고, 배가 고파서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거든."

"그렇다면 제가 하룻밤만 더 여기 있기로 하지요."

원래 마음씨가 고운 이 제비는 왕자의 얘기를 듣고 이렇게 대답했어요.

"루비를 하나 더 가져다 줄까요?"

"아쉽게도 이제 루비는 더 없단다." 왕자는 말했습니다. "남아 있는 건 내 눈알 뿐이야. 이건 천 년 전에 인도에서 가져온 거란다. 사실 이만큼 좋은 에메랄드는 없다고 하더구나. 그 가운데 하나를 뽑아서 그 청년에게 갖다 주렴. 이걸 보석상에 가서 팔면 양식과 땔감을 장만해서 대본 쓰는 것을 마저 끝마칠 수 있을 거야."

"왕자님, 저는 그런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어요."

제비는 이렇게 말하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제비야, 제비야, 꼬마 제비야. 내가 말한 대로 해 주렴." 왕자는 말했습니다.

그랫 제비는 왕자의 눈알을 하나 뽑아내서 그 젊은이가 살고 있는 지붕 밑 다락방으로 날아갔습니다. 지붕에 구멍이 뚫려 있을 정도로 허술한 집이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어요. 제비는 구멍을 통해 집안으로 화살처럼 날아 들어갔습니다.

청년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고 있어서 이 작은 새가 날개를 파닥이는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그저 언뜻 고개를 들어보니, 시든 오랑캐꽃 위에 아름다운 에메랄드가 굴러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을 뿐이었답니다.

"이제야 세상이 나의 가치를 알게 된 모양이군. 틀림없이 누군가 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몰래 갖다 놓은 것이 틀림없어. 이젠, 나도 대본을 끝마칠 수 있게 됐어." 청년은 진심으로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음날, 제비는 도시의 선창가 쪽으로 날아가 봤습니다. 그리곤 커다란 배의 돛대 위에 날아가 앉았어요. 선원들이 배의 창고에서 커다란 상자들을 끌어 올리고 있었어요. 선원들은 상자를 끌어올릴 때마다 "영차, 영차, 어이-!"하며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도 이제 이집트에 간단다!" 제비도지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어요. 달이 떠오르자 제비는 다시 행복한 왕자에게 날아갔습니다.

"이제야말로 정말 작별 인사를 드릴 겁니다!" 제비는 큰 소리로 외쳤어요.


4. 온몸의 순금 조각을

왕자는 말했습니다.

"제비야, 제비야, 꼬마 제비야. 하룻밤만 더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겠니?"

"벌써 겨울이 다 됐어요." 제비는 말했습니다. "이제 곧 있으면 차디찬 눈이 내릴 거예요.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따뜻한 태양이 푸른 야자나무를 비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진흙탕 속에는 악어가 느긋하게 드러누워 주위를 둘러보고 있지요. 제 친구들은 아마 '바알벡'의 신전 처마에 집을 짓고 있겠지요. 하얀 비둘기, 핑크빛 비둘기들이 그걸 구경하면서 구구구구 목청을 울리며 뭐라고 떠들어대겠지요.

제발, 왕자님... 아무래도 저는 이제 떠나지 않을 수 없답니다. 하지만 왕자님을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내년 봄이 되면 왕자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그 보석 대신 아주 아름다운 보석을 두 개 가져다 드릴게요. 붉은 장미보다 더 붉은 루비, 그리고 저 넓은 대양처럼 푸르른 에메랄드를 가져오겠어요."

"저 아래쪽 교차로에 말이야..." 왕자는 말했습니다.

"아주 어린 성냥팔이 소녀가 서 있단다. 아까 성냥을 그만 하수구에 빠뜨려서 전부 못쓰게 되어버렸어. 조금이라도 돈을 갖고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한테 매를 맞을 수밖에 없단다. 그래서 저 아이는 지금 울고 있어. 신발도 없고, 양말도 신지 않았어. 그 작은 머리에는 아무 것도 쓴 게 없어. 내 나머지 눈알 하나를 뽑아서 저 아이에게 갖다주렴. 그러면 아버지한테 얻어맞지 않을 거야."

"하룻밤만 더 왕자님 곁에 남아 있기로 하죠. 하지만 왕자님 눈을 뽑는 건 정말 싫어요. 그러면 왕자님은 이제 장님이 되어,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잖아요." 제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비야, 제비야, 꼬마 제비야. 내가 말한 대로 해 주렴." 왕자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는 왕자의 눈알 또 한 개를 뽑아서 화살처럼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 옆을 휙 날아 지나가면서 손바닥 위에 그 보석을 떨어뜨렸어요.

"어머나, 너무 예쁜 보석이구나!" 소녀는 이렇게 소리치면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제비는 왕자에게 돌아가서 말했습니다.

"드디어 왕자님은 이제 장님이 되어버렸군요. 그러니 이제 제가 언제까지나 왕자님 곁에 있겠어요."

"아니야, 제비야. 넌 그래도 이집트로 날아가야 한단다." 가엾게도 장님이 된 왕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언제까지나 여기 남아 있겠어요." 제비는 이렇게 말하고 왕자의 발 밑에서 잠을 잤습니다.

제비는 그 다음날 하루 종일 왕자의 어깨 위에 앉아서 그 동안 갔던 먼 나라들에서 보고 들었던 얘기를 왕자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부리로 황금빛 물고기를 잡아먹는 따오기라는 새의 얘기, 나이가 이 지구와 거의 비슷하고 사막에서 살면서 하나도 모르는 게 없는 스핑크스의 얘기 등을 해주었습니다.

그밖에 낙타 떼를 몰고 천천히 사막을 걸어다니면서 호박(琥珀) 따위 보물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상인들의 얘기, 달의 산에 올라가 커다란 수정으로 제사를 올리는 새까만 임금님의 얘기, 20명의 사제들이 꿀 과자로 먹여 키우는 커다란 초록색 뱀이 야자나무 아래 또아리를 틀고 있는 얘기도 했어요. 크고 넓은 나뭇잎을 타고 다니면서 넓은 호수 위를 스치듯 날아다니고 언제나 나비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난쟁이 요정들 얘기도 했답니다.

왕자는 말했습니다.

"귀여운 꼬마 제비야. 네 얘기는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구나. 하지만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남자와 여자들의 슬픔이란다. 슬픔보다 더 신비한 것은 없단다. 꼬마 제비야, 나의 이 도시를 날아다니면서 여기서 보고 들은 얘기를 좀더 들려주렴."

그래서 제비는 이 커다란 도시 위를 빙빙 날아다니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아름답게 꾸민 실내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때 그 문 앞에는 거지가 서서 떨고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 집 옆 골목에는 굶주려 창백해진 어린아이들이 멍한 눈길로 어두운 거리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아름다운 아치형 다리 아래에는 조그마한 두 남자가 추위를 달래려고 서로 꼭 끌어안고 누워 있었습니다.

"아, 배가 고프다!"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들 여기서 잠을 자서는 안돼!" 갑자기 경비원이 나타나 이렇게 소리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거기서도 있지 못하고 빗속을 걸어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제비는 다시 왕자에게 돌아와서 자기가 보고들은 것을 모두 말했습니다.

"내 몸은 얇은 순금 조각으로 덮여 있단다. 네가 그걸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서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렴.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그래서 제비는 왕자 몸에 덮여 있던 순금을 한 조각 한 조각씩 떼어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왕자는 보기 흉한 잿빛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제비는 그 순금 조각을 하나씩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린아이들의 얼굴은 점점 장미빛으로 보기 좋게 변했고,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길거리에 나와 뛰어 놀게 되었습니다.

"야, 이제 우리도 빵을 먹을 수 있단다!" 아이들은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에는 눈이 내리고 그 뒤에는 다시 차가운 서리도 내렸습니다. 길거리는 마치 은을 깔아놓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집들의 처마에는 긴 고드름이 마치 수정으로 만든 칼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털가죽 외투를 입고 걸어다녔고, 아이들은 빨간 모자를 쓰고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탔답니다.


5. 천국의 찬양

불쌍한 꼬마 제비는 이제 너무 추워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제비는 왕자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왕자가 무척 좋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빵집 입구 근처 골목길에서 제비는 틈을 보아서 땅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곤 했습니다. 그리고 애써 날개를 파닥거려서 조금이나마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죽을 수밖에 없겠구나... 이런 생각을 제비도 하게 됐습니다. 제비는 이제 거의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왕자의 어깨에 날아 올라갈 힘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내 왕자님, 안녕! 왕자님의 손에 이별의 키스를 하게 해 주세요..." 제비는 가느다란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자는 말했습니다.

"제비야, 이제야 너도 겨우 이집트로 갈 마음이 생긴 모양이구나. 반가운 일이야. 너는 너무 오랫동안 여기 있었단다. 내 입술에 키스해다오. 나도 네가 무척 좋단다."

제비는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 가는 곳은 이집트가 아니에요. 저는 '죽음의 나라'로 가는 거랍니다. 죽는 것은 결국 잠자는 것과 형제간 아닌가요, 그렇죠?"

그러고 나서 제비는 왕자의 입에 키스하고, 그 발 밑에 툭 하고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순간, 왕자의 조각상 속에서 이상한,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습니다. 무언가 부숴진 것 같았어요.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사실 납으로 만들어진 왕자의 심장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터지는 소리였답니다.

그날은 무섭도록 추운 날씨였거든요.

다음날 아침 일찍 그 도시의 시장은 시 의원들과 함께 아래쪽 교차로를 걸어오고 있었어요. 돌로 만든 둥근 조각상 받침대 가까이 걸어오자 시장은 조각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니 이런! 행복한 왕자의 조각상이 어쩌다 저렇게 흉물스러운 꼴이 되었담!" 시장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말 보기 흉한 모습이군요!" 언제나 시장의 말에 찬성만 하는 시 의원들도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조각상 있는 곳으로 올라가 조사를 했습니다.

"칼 자루의 루비가 떨어져 달아났고... 눈알도 누군가 파내 버렸어. 게다가 몸을 감쌌던 순금판도 모조리 사라졌고! 이건 사실 거지 모습이나 마찬가지잖아!" 시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거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시 의원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조각상 발 밑에 있는 이 죽은 새는 도대체 뭐야? 포고령을 만들어서, 앞으로는 새가 이런 데서 죽어서는 안 된다고 발표해야겠어." 시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시청의 서기가 그 말을 받아서 종이에 적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행복한 왕자'의 조각상을 부서 버렸습니다.

"이 조각상은 이제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아. 그러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대학의 미술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조각상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녹였습니다. 시장은 위원회를 열어, 조각상을 녹인 그 쇳덩어리를 어디에 쓸 것인지 의논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장은 말했어요. "당연히 이 쇳덩어리로는 새로운 조각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오. 그리고 그 조각상은 바로 나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어야 하겠지..."

"아니, 바로 나의 모습을 만들어야 합니다!" 시 의원들마다 나서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러다 보니 싸움이 벌어졌어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사람들은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계속 싸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거 참 이상하군!" 용광로 공장의 공장장이 말했습니다.

"이 부서진 심장 조각이 아무리 해도 용광로에서 녹지 않는걸. 결국 이건 내버려야 하겠군..."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쓰레기장에다 버렸답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두 개 이곳으로 가져오너라." 하나님이 한 천사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납으로 만들어진 심장과 죽은 제비를 하나님께로 가져왔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잘 골랐구나. 이 작은 새는 언제까지나 천국의 정원에서 노래하도록 하자. 그리고 '행복한 왕자'는 내 황금의 도시에서 영원히 내 이름을 찬양하도록 할 지어다!"  <끝>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