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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 천구교 박해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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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구교 박해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해미읍성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116)

 

땅과 바다가 두루 넓은 서산은 서해로 삐죽이 튀어나와 밖으로는 서해와 맞닿아 있고 안으로는 좁고 긴 천수만을 안고 있다. 때문에 이 곳에는 수산 자원도 풍부하고 천수만을 막아 만든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쌀 등 농산물도 풍부하여 흔히 이 곳을 가리켜 "한 해 농사를 지어 세 해 먹고 사는 곳"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서산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해미는 풍부한 물자들을 노략질하러 오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로 영()을 두고 성()을 쌓았던 곳이다.

 

서산에서 홍성으로 가는 29호 국도를 따라 15 분 쯤 평탄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조선시대의 해미현 자리인 해미읍에 이르게 된다. 이 곳에 들어서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성이 기다리고 있다. 놀랍게도 제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닌 이 성은 해미면의 한 가운데 땅 이만평 정도를 안고 있어 해미읍성이 해미면의 전부인 듯한 인상을 준다.

 

해미읍성은 본래 조선시대 태종 때인 1407년에 토성으로 쌓았던 것을 80년 후인 1491(성종 22)에 돌로 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높이가 4 미터쯤 되고 둘레가 2 킬로미터쯤 되며 동쪽, 서쪽, 남쪽에 문을 한 개씩 달고 서해로 들어오는 왜구를 감시할 수 있는 정자도 세웠다. 성벽은 길이 1.5km, 높이 45m , 윗너비 1.5m 의 둥그런 모습인데 성안의 면적은 약 2만평 정도로 알려져 있다.

 

성이 세워졌을 무렵에는 세 개의 대문과 많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일제시대에 남문인 진남루만이 남아 있었고 남문과 동문의 누각이 없어졌다. 그리고 성안에 있던 건물들은 면사무소나 학교 교실로 쓰였다. 그러나 1960년에 사적 ll6호로 지정되고 1973년부더 시작된 이른바 복원 정화 사업으로 동문과 서문, 성벽, 성루 등을 다시 세웠다.

 

이 읍성은 대부분의 성이 그랬듯이 성 안에 관가를 두어 고을을 다스리는 행정 기능도 겸 했는데 지금은 그 관아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면사무소, 우체국 같은 행정 부서 몇 개와 초등학교 그리고 민가 160채 정도 있었으나 이제는 거의 성 밖으로 옮겨졌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군사 훈련장으로도 쓰였는데 소속 군졸이 보통 1,500명쯤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1579년에 이 순신도 이곳에서 훈련원 봉사로 열 달 동안 근무를 했다.

 

읍성의 뒤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자가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해미읍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일제시대 때 민간의 신앙지를 없애려고 신사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 해미읍성에는 정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동문, 서문, 2개의 포문(砲門)이 있고 성안에는 동헌(東軒)과 아문(衙門)이 남아 있다. 진남루와 아문 사이에는 대원군 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곳이 있는데 그곳에 순교 기념비가 있다.

 

해미는 대원군 때 병인박해 (1866) 때문에 신자들이 처형당하고 생매장 당한 아픈 과거가 있는 곳으로 '생매장 순교지'와 해미 순교탑이 있다.

 

해미읍성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한 번 둘러보고 싶은 역사의 뜻이 배인 곳으로 손꼽히는 것은 원형을 그대로 지닌 성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천주교 박해가 한창 심했던 l866년에 천주 교인 천 명 쯤이 이곳에서 처형되어 천주교 수난 역사의 현장으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당시 고종의 아버지이자 당대의 실질적인 세도가였던 대원군의 명으로 읍성의 감옥으로 잡혀온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특히 이들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했던 병인년(1866)에는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채를 묶어서 감옥 앞의 호야나무에 달아놓거나, 성 안팎에서 하루에도 수십명씩 끔찍한 방법으로 공개 처형을 하기도 했었다. 해미읍성의 옛 감옥터 앞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호야나무는 이같은 연유로 해서 현재 순교목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때에 친주교인들을 잡아들며 열 명에서 열 다섯 명씩을 밧줄로 묶어 큰 구덩이 세 개를 파고 생매장을 시켰는데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 마음이 변할 것을 걱정한 많은 교인들이 남보다 먼저 스스로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고 한다.

 

1935년에 베드로라는 신부가 유해를 발굴했는데 뼈들이 몇 가마니에 이르렸다고 한다. 이 유골은 줄곧 음암면 상홍리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l975 년에 신부 이 규남 씨가 해미 읍성에서 1 킬로 미터쯤 떨어진 곳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면서 그리로 옮겼다.

 

몇 백년을 자란 담장이 덩굴이 돌 성벽을 기어오르고, 문화재 관리국의 보수가 시작되어 민가도 내쫓고 관리 사무소를 차려 놓기는 했으나 아직 성 안은 잡초로 뒤덮여 있다. 그러기는 하지만 순례지로 천주 교인들만이 아니라 여느 유람객도 꼭 한번쯤 들러봄직한 곳이다. 해미읍성 안에 있는 호야나무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아픈 상처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해미 순교탑과 생매장 순교지는 해미읍성에서 해미천을 따라 서쪽으로 1.1km 쯤 간 곳에 있는데 75년에 세워졌다.

한편 벚꽃이 일품인 부석사, 보원사지, 규모는 작지만 월척 포인트가 많은 석포지가 명소로 꼽힌다. 해미에서 운산면의 개심사에 이르는 7km 남짓의 길은 하이킹 코스로 적당하다.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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