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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막대 잡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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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막대 잡고

 

 

한 손에 막대를 쥐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는구나.

요점 정리

지은이 : 우탁

연대 : 고려말

종류 : 평시조, 단형 시조

표현 : 의인법, 대구법, 과장법, 대조법

성격 : 탄로가, 직서적, 해학적

제재 : 늙음

주제 : 탄로(늙음을 한탄함), 늙음에 대한 한탄

내용 연구

한 손에 막대를 쥐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 추상적인 늙음을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길로 전환시켜 표현하였다. 세월의 흐름을 가시와 막대기로 막아 보겠다는 발상이 흥미롭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늙음에 대한 깊은 탄식이 배어 있다.

막대 : 막다히> 막다이>막대

늙난 : 늙은 '난'은 현재관사형

가싀 : 가시

치려터니 : 치려고 했더니

졔 : 저가

몬져 : 먼저 (단모음화)

즈럼길 : 지름길(전설모음화)

오더라 : 오는구나. 오(동사 어간)+ 더(회상시제선어말어미)+ 라(감탄형어미)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는구나 : 백발[늙음 / 의인화]이 나의 속셈을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의인법을 사용하였고,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고, 세월에 거역하려는 인간의 한계를 익살스럽게 표현하였다.

위의 시적 화자는 가는 세월을 막아 보려 했지만 결국 나이가 들고 늙어 버린 어떤이로, 화자는 백발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막대로 치려하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화자는 늙어 버린 자신의 모습에 한탄한다. 이 시조는 늙음에 대한 한탄이 지배적인 정서를 이루고 있으며, 이 시조의 주제는 늙음에 대한 한탄이다.

이해와 감상

 

'탄로가(嘆老歌)' 2수 가운데 한 수로 '늙음' 이라는 추상적인 인생길을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길로 전환시키고, 인생 무상을 느끼게 하고 인간이 세월을 거역하려는 것에 대한 익살스런 표현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인간의 한계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세월(늙는 길)과 늙음(백발)을 구상화한 공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늙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춘향전에 나오는 백발까에 '오는 백발 막으려고 우수에 도끼들고, 좌수에 가시들고, 오는 백발 뚜드리며, ……가는 홍안 절로 가고 백발은 스스로 돌아와, 귀 밑에 살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되니……'라는 구절은 이 시조가 잡가화한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해와 감상1

 

고려 말에 우탁(禹倬)이 지은 시조. ‘歎老歌(탄로가)’로 표기하기도 한다. 모두 3수로 늙음을 한탄한 주제를 담고 있다. 작자가 충선왕의 패륜을 극간하다가 진노를 입어 예안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며, 새로 들어온 주자학을 연구하다 보니 어느덧 백발이 되어 인생의 늙음을 안타까워하여 읊은 것이다.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로 시작되는 작품은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처절하게 노래하였고, “춘산에 눈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없다.”로 시작되는 작품은 자연의 힘을 빌려 인간의 삶을 변화시켜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봄바람이 눈덮인 산을 녹이듯 자연의 위대한 힘을 빌려 인간에게 찾아오는 백발을 없애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았다.

“늙지 말려이고 다시 젊어 보려터니”로 시작되는 작품은 늙지 않고 젊어보려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찾아드는 백발은 어쩌지 못하고 젊은 여인을 탐하는 자신의 인간적 욕구를 “이따금 꽃밭을 지날 제면 죄지은 듯 하여라.”라고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죄책감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늙음을 가져오는 자연의 질서에 맞서보려는 안간힘과 죄책감이 인간미를 더해주고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우탁 (禹倬)

 

1263(원종 4)∼1342(충혜왕 복위 3). 고려 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현(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천규(天珪)의 아들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름하는 신사(神祠)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 (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정이(程蓬)가 주석한 ≪역경≫의 〈정전 程傳〉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만에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또한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당했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또 다른 서원인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華海師全(申賢), 東國遺史, 新增東國輿地勝覽, 양촌집(權近), 휴診淺集(黃宗海), 易東 禹倬先生의 學問과 人品(李完栽, 安東文化 3, 安東學會, 1973), 易東 禹倬先生 思想의 硏究(吳錫源, 安東文化 5, 安東學會, 198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탁 설화

 

고려 말의 유학자 우탁(禹倬)에 관한 설화. 우탁은 유학에서 인정할 수 없는 민간신앙 행사인 음사(淫祀)를 타파하는 데 아주 강경한 자세를 보였기에 거기 따른 설화가 일찍부터 문헌에 올랐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우탁이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하였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이 팔령신(八鈴神)을 섬기는 것을 보고 방울을 부수어서 바다에 빠뜨렸다 하였으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문헌에도 이따금 보인다.

그런데 영해 현지에서의 구전은 더욱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을 갖추고 있다. 우탁이 팔령신 중에서 일곱을 없애자 나머지 하나는 살려 달라고 빌어서 남겨 두었는데, 그 신이 지금 당고개 서낭이라고 한다. 여덟 번째 신은 눈이 멀어서 동정을 얻었다고 하고,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신세가 가련한 할미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우탁은 ≪주역≫의 이치를 깊이 공부하여 도술을 지녔다고 한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자, 계속 그러면 멸종을 시키겠다고 글로 써서 보내니 개구리들이 동헌에 모여들어 살려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할 때에도 같은 방법을 썼다고 한다.

첫 번째 설화는 영웅이 요물을 퇴치하였다는 유형의 변형으로서 영웅 대신에 지방 관장이 등장하고, 요물퇴치의 이유가 민간신앙을 누르고 유학에 의한 통치를 확립하고자 한 형태이다. 제주도 김녕사굴(金寧蛇窟)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런데 팔령신을 다 없애지 않고 하나는 남겨 두어서 제한된 범위 안에서 관습을 용인한 데 특징이 있다.

두 번째 설화는 도술을 익힌 도인은 개구리나 호랑이 같은 동물까지 지배할 수 있다는 유형인데, 우탁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흥미롭다. 유학에서도 도술을 얻을 수 있다는 민간 전승적 사고를 나타낸다.

≪참고문헌≫ 人物傳說의 意味와 機能(趙東一,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7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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