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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恨中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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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恨中錄)

그 날 나를 덕성합으로 오라 하오시니, 그 때 오정 즈음이나 되는데, 홀연(忽然) 까치가 수(數)를 모르게 경춘전을 에워싸고 우니, 그는 어인 증조런고? 고이하여, 그 때 세손이 환경전에 겨오신지라, 내 마음이 황황(遑遑)한 중, 세손 몸이 어찌 될 줄 몰라 그리 나려가, 세손다려 아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 천만당부하고 아모리 할 줄을 모르더니, 거동이 지체하야 미시(未時) 후나 휘령전으로 오오시는 말이 있더니,

그리할 제, 소조(小朝)에서 나를 덕성합으로 오라 재촉하오시기가 뵈오니, 그 장하신 기운과 부호(扶護)하신 언사도 아니 겨오시고, 고개를 숙여 침사상량(沈思商量)하야 벽에 의지하야 앉아 겨오신데, 안색을 나오사 혈기 감하오시고 나를 보오시니, 응당 화중을 내오셔 오작지 아니하실 듯, 내 명이 그날 마치일 줄 스스로 염려하야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더니. 사기(辭氣) 생각과 다르오셔 날다려 하시대, "아마도 고이하니, 자네는 좋이 살겠네. 그 뜻들이 무서외."

하시기 내 눈물을 드리워 말없이 허황하야 손을 비비이고 앉았더니,

휘령전으로 오시고 소조를 부르오시다 하니, 이상할손 어이 피차 말도, 돌아나자 말도 아니 하시고, 좌우를 치도 아니 하시고, 조금도 화증 내신 기색없이 썩 용포(龍袍)를 달라 하야 입으시며 하시되,

"내가 학질을 앓는다 하려 하니, 세손의 휘항(揮項)을 가져오라."

하시거늘, 내가 그 휘항은 작으니 당신 휘항을 쓰시고저 하야, 내인다려, 당신 휘황을 가져오라 하니, 몽매(夢寐)밖에 썩 하시기를,

"자네가 아뭏거나 무섭고 흉한 사람이로세. 자네는 세손 다리고 오래 살랴하기, 내사 오날 죽게 하였기 사외로와, 세손의 휘황을 아니 쓰이랴 하는 심술(心術)을 알게 하얐다네."

하시니, 내 마음은 당신이 그 날 그 지경에 이르실 줄 모르고 이 끝이 어찌 될꼬? 사람이 다 죽을 일이요, 우리의 모자의 목숨이 어떠할런고? 아모라타 없었지.

천만 의외에 말씀을 하시니, 내 더욱 설워 다시 세손 휘항을 갖다 드리며,

" 그 말씀이 하 마음의 없는 말이시니, 이를 쓰소서."

하니,

"슬희, 사외하는 것을 써 무엇할꼬?"

하시니, 이런 말씀이 어이 병환(病患)이 든 이 같으시며, 어이 공순히 나가랴 하시던고? 다 하늘이니, 원통 원통이요.

다 그리 할 제 날이 늦고 재촉하야 나가시니, 대조(大朝)께서 휘령전에 좌하시고, 칼을 안으시고 두다리오시며 그 처분을 하시게 되니, 차마 차마 망극하니, 이 경상(景狀)을 내 차마 기록하리오? 섧고 섧도다.

나가시며, 즉시 대조께서는 엄노(嚴怒)하신 성음(聲音)이 들리오니, 휘령전이 덕성합과 머지 아니하니, 담 밑에 사람을 보내어 보니, 벌써 용포를 벗고 엎대어 겨오시더라 하니, 대처분(大處分)이 오신 줄 알고, 천지 망극하야 흉장(胸腸)이 붕렬(崩裂)하는지라.

게 있어 부질없어, 세손 겨신 데로 와 서로 붙들고 아모리 할 줄을 모르더니, 신시(申時) 전후 즈음에 내관(內官)이 들어와 밧소주방[外所廚房:외소주방]에 쌀담는 궤를 내라 한다 하니, 어찐 말인고? 황황하야 내지 못하고, 세손궁이 망극한 거조(擧措)가 있는 줄 알고 문정전에 들어가,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하니, 대조께서 나가라 엄히 하오시니, 나와 왕자 재실(齋室)에 앉아 겨시니, 내 그 때 정경이야 고금 천지 간에 없으니, 세손을 내어 보내고 일월이 회색(晦塞)하니, 내 일시나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으리요? 칼을 들어 명을 결단하랴 하더니, 방인(傍人)의 앗음을 인하야 뜻같지 못하고, 다시 죽고저 하되 촌철(寸鐵)이 없으니 못하고, 숭문당으로 말매암아 휘령전 나가는 건복문이라 하는 문 밑에를 가니, 아모것도 뵈지 아니코, 다만 대조께서 칼 두다리오시는 소리와, 소조에서,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얐사오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오소서."

하시는 소래가 들리니, 간장이 촌촌(寸寸)이 끊어지고 앞이 막히니, 가슴을 두다려 아모리 한들 어찌하리요? 당신 용력(勇力)과 장기(壯氣)로 게를 들라 하신들 아모쪼록 아니 드오시지, 어이 필경에 들어 겨시던고? 처음은 뛰어 나가랴 하시옵다가, 이기지 못하야 그 지경에 밋사오시니, 하늘이 어찌 이대도록 하신고?

만고에 없는 설움뿐이며, 내 문 밑에서 호곡하되, 응하오심이 아니겨신지라, 소조 벌써 폐위(廢位)하야 겨시니, 그 처자가 안연(晏然)히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요, 세손을 밖에 두어시니 어떠할꼬?

요점 정리

작자 :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 1735 ~ 1815)

연대 : 조선 순조 5년(1805년) 작자 71세 때, 정조 19년(1796)

갈래 : 한글 수필, 궁정 수필, 수기형식의 자전적 회고 수필록

문체 : 궁중의 비극적 사건을 극적이고, 서사적으로 그린 내간체 문장의 전형

구성

작품

시기

집필동기

내용

작품 1

(61세 작)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과 세자빈이 된 이후 50년 간 궁궐에서 지낸 이야기를 하는데, 사도 세자의 비극은 말하지 않고 넘어간다.

회갑때 친정 조카 홍수영의 요청으로 친정을 중심으로 기록해 준 것

작품 2

(67세 작)

친정쪽의 누명이 억울함을 말하는 내용

친정 몰락에 대한 자탄의 독백체로 기록한 것

작품 3

(68세 작)

어린 손자 순조에게 보이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친정이 입었던 화가 모두 무고임을 밝히기 위해 기록함

순조에게 바치느라고 쓴 것

작품 4

(71세 작)

비로소 사도 세자 참변의 진상이 기록되었다. 영조는 그가 사랑하던 화평 옹주의 죽음으로 세자에 무관심해지고, 그 사이 세자는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 놀이를 즐기는가 하면,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하였으나 성격 차이로 부자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마침내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여기에 영조 38년(1762)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유폐시켜 9일 만에 절명하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친정 아버지인 홍봉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 여기 실은 것은 사도 세자가 뒤주에 들어 절명하는 처분이 내리는 과정과, 그 이후 자신의 처지를 기록한 부분이다

며느리 가순궁의 요청으로 순조에게 보이려고 쓴 것

제재 : 사도세자의 죽음과 혜경궁 홍씨의 기구한 운명

주제 : 남편이 뒤주 속에 갇히는 사도세자의 참변을 중심으로 한 파란만장한 인생 회고

표현 : 우아하고 품위 있는 표현으로 전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 비극적인 내용을 절실하고도 간곡한 묘사를 통해 형상화하여 한 편의 소설에 비길 만하다.

의의

1. 계축일기, 인현왕후전과 함께 3대 궁정 수필의 하나이다.

2. 궁중 귀인의 고상하고도 우아한 표현, 절실하고 간곡한 묘사, 품위있는 궁중 문학의 백미이다.

3. 한글로 된 산문 문학으로서 국문학사상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

출전 : 필사본 한중만록

참고 : 한문본도 전해지는데 '읍혈록(泣血錄)'이라 함

특징

1 사실적인 입장에서 친정과 궁중에 대해 쓴글로, 과장이나 가식이 없는 수필체의 글이다.

2 자신의 기구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사실 그대로가 소설처럼 극적이고 입체적이어서 역사소설과 같은 흥미를 일으키는 글이다.

3 인생 무상의 관조를 자아내게 되어 인생의 파노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내용 연구

 

그 날[영조 38년(1762) 5월 23일] 나를 덕성합[창경궁 안에 있던 전각 이름]으로 오라 하오시니, 그 때 오정 즈음이나 되는데, 홀연(忽然)[문득, 갑자기] 까치가 수(數)를 모르게 경춘전[창덕궁 안의 수령전 북쪽에 있는 내전]을 에워싸고 우니(불길한 예감), 그는 어인 증조(미리 보이는 조짐. 징조)런고? 고이하여[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때 세손[왕세자의 맏아들 여기서는 정조를 말함]이 환경전[창경궁의 경춘전 동쪽에 있던 전]에 겨오신지라, 내 마음이 황황(遑遑)한 중[마음이 급하여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세손 몸이 어찌 될 줄 몰라 그리 나려가, 세손다려 아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 천만당부하고 아모리 할 줄[어찌할 줄]을 모르더니, 거동이 지체하야 미시(未時)[오후 1시부터 3시까지] 후나 휘령전[영조의 원비였던 정성왕후의 혼전 전호]으로 오오시는 말이 있더니, - 혜경궁 홍씨의 불안한 예감

그리할 제, 소조(小朝)[왕세자로 여기서는 사도세자]에서 나를 덕성합으로 오라 재촉하오시기가 뵈오니, 그 장하신 기운과 부호(扶護)하신[풍부하고 호걸스러운] 언사[말. 말씨]도 아니 겨오시고, 고개를 숙여 침사상량(沈思商量)[정신을 한 곳으로 모아서 깊이 생각함. '침사'와 '상량'은 비슷한 뜻을 가진 말]하야 벽에 의지하야 앉아 겨오신데, 안색을 나오사[좋게 고치시어] 혈기[불평한 기색] 감하오시고 나를 보오시니, 응당 화증[(火症) :걸핏하면 벌컥 화를 내는 증세]을 내오셔 오작지[오죽하지] 아니하실 듯, 내 명이 그날 마치일 줄 스스로 염려하야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더니. 사기(辭氣)[말씀과 얼굴 표정] 생각과 다르오셔 날다려 하시대, "아마도 고이하니, 자네는 좋이 살겠네. 그 뜻(자기를 죽이려는 뜻)들이 무서외."

하시기 내 눈물을 드리워 말없이 허황[마음이 들떠서 당황함]하야 손을 비비이고 앉았더니,- 사도 세자의 예감과 체념

휘령전으로 오시고 소조를 부르오시다 하니, 이상할손 어이 피차 말도, 돌아나자 말도 아니 하시고[(자주 말씀하신) 피하자거나 달아나자고 말하지 않으시고], 좌우를 치도 아니 하시고[주위에 시중드는 사람을 물리치시지도 않고], 조금도 화증 내신 기색없이 썩 용포(龍袍)[임금이 입던 정복. '곤룡포'의 준말]를 달라 하야 입으시며 하시되,

"내가 학질[말라리아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발작적 고열의 전염병]을 앓는다 하려 하니, 세손의 휘항(揮項)을 가져오라."

하시거늘, 내가 그 휘항은 작으니 당신 휘항을 쓰시고저 하야, 내인다려, 당신 휘황[옛날에 쓰던 방한모의 한 가지]을 가져오라 하니, 몽매(夢寐)밖에 썩 하시기를[천만 뜻밖에 대뜸 말씀하시기를],

"자네가 아뭏거나 무섭고 흉한 사람이로세. 자네는 세손 다리고 오래 살랴하기, 내사 오날 죽게 하였기 사외로와[사위스러워, 미신적으로 마음에 꺼림칙하여], 세손의 휘황을 아니 쓰이랴 하는 심술(心術)을 알게 하얐다네."(사도 세자는 아내인 혜경궁 홍씨에게 난폭한 짓을 했고, 혜경궁 홍씨는 늘 사도 세자를 두려워하고 있음)

하시니, 내 마음은 당신이 그 날 그 지경에 이르실 줄 모르고 이 끝이 어찌 될꼬? 사람이 다 죽을 일이요, 우리의 모자의 목숨이 어떠할런고? 아모라타[아무 일도] 없었지. - 영조의 부르심과 휘향에 얽힌 사연

천만 의외에 말씀을 하시니, 내 더욱 설워 다시 세손 휘항을 갖다 드리며,

" 그 말씀이 하(전혀) 마음의 없는 말이시니, 이를 쓰소서."

하니,

"슬희[싫네], 사외하는[마음에 꺼림칙한 재앙이 올까 두려운] 것을 써 무엇할꼬?"

하시니, 이런 말씀이 어이 병환(病患)이 든 이 같으시며, 어이 공순히 나가랴 하시던고? 다 하늘이니, 원통 원통이요(숙명론, 운명론).

다 그리 할 제 날이 늦고 재촉하야 나가시니, 대조(大朝)[임금, 여기서는 '영조'를 가리킴]께서 휘령전에 좌하시고, 칼을 안으시고 두다리오시며 그 처분을 하시게 되니, 차마 차마 망극하니, 이 경상(景狀)[광경]을 내 차마 기록하리오? 섧고 섧도다. - 영조의 부르심과 휘향에 얽힌 사연

나가시며[사도세자가 나가자], 즉시 대조[영조]께서는 엄노(嚴怒)[준엄하게 성이 남]하신 성음(聲音)이 들리오니, 휘령전이 덕성합과 머지 아니하니, 담 밑에 사람을 보내어 보니, 벌써 용포를 벗고[사도 세자가 폐위를 당함] 엎대어 겨오시더라 하니, 대처분(大處分 :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일 / 사도 세자가 음모를 꾸몄다 하여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이 오신 줄 알고, 천지 망극하야 흉장(胸腸)[가슴과 속]이 붕렬(崩裂)[무너지고 찢어짐]하는지라.

게[거기에] 있어 부질없어, 세손 겨신 데로 와 서로 붙들고 아모리 할 줄을 모르더니[좌불안석], 신시(申時 :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전후 즈음에 내관(內官)이 들어와 밧소주방[外所廚房 : 외소주방 /바깥 소주방, 대궐 안에서 음식을 만드는 곳]에 쌀담는 궤를 내라 한다 하니, 어찐 말인고? 황황하야[마음이 급해 허둥거리며 정신이 없다] 내지 못하고, 세손궁이 망극한 거조(擧措)[행동거지. 몸을 움직이는 모든 것. 조처]가 있는 줄 알고 문정전[창경궁 안에 있는 건물의 하나]에 들어가,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 쌀궤를 내오라는 영조의 지시와 영조를 만류하는 세손

하니, 대조께서 나가라 엄히 하오시니, 나와 왕자 재실(齋室)[왕자가 공부하던 집]에 앉아 겨시니, 내 그 때 정경이야 고금 천지 간에 없으니, 세손을 내어 보내고 일월이 회색(晦塞)하니[깜깜하게 아주 꽉 막히니], 내 일시나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으리요?(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칼을 들어 명을 결단하랴(스스로 목숨을 끊음 / 목숨을 끊으려) 하더니, 방인(傍人)[옆의 사람]의 앗음을 인하야[빼앗아서] 뜻같지 못하고(죽지 못하고), 다시 죽고저 하되 촌철(寸鐵)[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나 무기]이 없으니 못하고, 숭문당[창경궁 명정전 북쪽에 있는 집]으로 말매암아 [거쳐서]휘령전 나가는 건복문이라 하는 문 밑에를 가니, 아모것도 뵈지 아니코, 다만 대조께서 칼 두다리오시는 소리와, 소조에서,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얐사오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오소서."(사도 세자의 간곡한 호소)

하시는 소래가 들리니, 간장이 촌촌(寸寸)이 끊어지고[마디마디 끊어지듯 하고 / 혜경궁 홍씨의 참담한 심정] 앞이 막히니, 가슴을 두다려 아모리 한들 어찌하리요[속수무책의 상황]? 당신 용력(勇力)과 장기(壯氣)[건강한 원기]로 게(거기 / 뒤주)를 들라 하신들 아모쪼록 아니 드오시지, 어이 필경에 들어 겨시던고?[사도세자가 자신의 힘과 기운으로 뒤주로 들어가라던 영조의 명령을 어기고 들어가지 않았으면 했는데 결국 들어갔던 것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음] 처음은 뛰어 나가랴 하시옵다가, 이기지 못하야 그 지경[뒤주에 갇혀 있는]에 밋사오시니[미치었으니, 이르렀으니], 하늘이 어찌 이대도록 하신고? - 사도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둠

만고에 없는 설움뿐이며, 내 문 밑에서 호곡[목놓아 슬피 욺]하되, 응하오심이 아니겨신지라, 소조 벌써 폐위(廢位)하야 겨시니, 그 처자[작가와 아들인 세손]가 안연(晏然)히[마음이 편안하고 침착하게]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요, 세손을 밖에 두어시니 어떠할꼬?(사도 세자가 폐위됨으로 인해 자신과 세손마저 궁 밖으로 쫓겨날 것을 염려함) - 궁에서 쫓겨날 것을 염려하는 혜경궁 홍씨

이해와 감상

 

이 장면은 사도 세자의 화중을 두려워하고 있던 작자가 사도 세자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는 작자의 불안한 예감과 평소같지 않은 사도 세자의 태도를 통해 세자의 죽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죽음은 본인도 예감하고 있음을 '그 뜻들이 무서워', '내사 오날 나가 죽게 하얏기'에서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이러한 죽음을 앞두고 작자가 남편의 광중을 두려워하는 심리적 정황과 그에 대한 회한, 그리고 사도 세자의 행동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긴박한 작중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세자에게 대처분이 내리는 것과 그에 대한 작자의 감정이 제시된 부분이다. 이 장면의 중심 사건은 대조가 사도세자에게 대처분 - 쌀 담는 궤에 죽이는 것 -을 내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세손이 아버지를 살려 달라 애원하게 되나 거부당하는 것과 작자의 미어지는 슬픔이 드러나게 된다. 특히 이 장면에서는 작자 자신의 슬픔을 '흉장이 붕렬하는 지라.','내 일시나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으리요.' '간장이 촌촌이 끊어지고 ' 등으로 표현하고 있어 읽는이로 하여금 그 때의 절망적인 슬픔을 느낄 수 잇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작자는 이러한 사건 뒤에 장차 자신에게 어떤 일(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 닥칠까 염려하기도 하는 현실적 속내도 보이는 부분이다.

심화 자료

한중록(閑中錄)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 ∼ 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 한문본 · 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 洪樂任 )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 洪國榮 )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마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 을축 4월 일 ’ 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 ( 貞純王后 )가 돌아간 해이다. “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 ” 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 洪鳳漢 )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 ( 時派 )와 벽파 ( 僻派 )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 ” 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貞純王后)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 煉 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 한중록 〉 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 ( 貴人 )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 참고문헌 ≫ 한듕록(金東旭 · 李秉岐, 民衆書館, 1961), 朝鮮朝女流文學의 연구(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8), 閑中錄연구(金用淑, 한국연구원, 1983), 煉 藏 한듕록(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81).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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