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한수산 - 시간(時間)과 사랑의 역학(力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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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시간(時間)과 사랑의 역학(力學)
李泰東

  

 

작가 한수산은 《세계의 문학》에 그의 대표 장편 <부초(浮草)>를 발표한 이래, 최연소 신예 작가로서 우리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그는 오늘날 어느 중견작가 못지 않게 많은 독자를 가지고서 80년대를 향해 의욕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하며 특수한 그의 <소설의 집>을 지어 가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 소설>을 아끼고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부초>의 한 수산을 즐겨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문학적 성공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의식과 사회 비평을 중심으로 한 리얼리즘이 지배적인 오늘날 우리 문학 풍토에서 존재론적인 주제를 추구한 작품을 쓰면서 그만큼 주목을 끌고 있다는 사실로써 충분히 증명될 수 있다. 그의 작품의 매력은 산문시와도 같은 부드러운 그의 언어에서 온다. 비록 몇몇 사람들은 그의 언어가 너무나 감각적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들이 그의 작품을 읽을 때 그것이 마치 물빛 새벽 하늘이나, 조춘에 뻗어나는 덩굴손처럼, 혹은 어둠 속에 비치는 수은 등불처럼 가슴에 와 닿는 부드러움에 저항감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배운 언어는 공허한 추상적 언어가 아니라, <쇠에 녹이 슬듯 시간 속에서 마멸되어 가는 육체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언어의 사용을 통해 탐색하려는 인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관심이다. 다시 말하면, 대부분의 <그의 작품의 주제는 시간과 생명과의 상관관계 및 생명의 가치에 대한 집요한 물음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 경향은 그의 처녀작이며 문단 데뷔 작품인 <사월의 끝>외에 <대설부(大雪賦)>에서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형식과 주제가 탁월한 조화를 이룩하고 있는 <사월의 끝>은 생의 현실에 대한 주인공의 <이니시에이션>을 신비의 베일 속에서 취급하고 있으나, 이것은 또한 작품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생명을 담고 있는 시간의 힘이 무엇이며, 또 그것이 생명을 어떻게 녹슬게 하고 마멸시키는가를 뛰어난 상징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죽음과 삶을 상징하는 봄비가 축축히 내리는 어느 날 주인공은 코너에 몰린 권투 선수처럼 불치의 병에 대한 확증 진단을 받기 위해 입원을 하려는 형수와 더불어 16층 대학병원 앞 어느 찻집에서 형을 기다리며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다. 그는 이러한 짧은 시간 동안 형수와의 대화와 회상을 통해 자신이 유년 시절에 경험했던 무서운 시간의 힘과 비극적이고 처절했던 생의 현실에 대한 이니시에이션을 이야기하며, 죽음의 시간과 대결해 싸우면서 그가 무엇을 믿었던가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어릴 때 횟배앓이에서부터 파괴적인 자연의 신비를 지각했던 주인공은 <강물에 비친 산 속에 누나의 나신(裸身)>을 본 후, 누나가 병들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또 영구차를 타고 무덤으로 가며 썩어서 냄새가 나고 노란 물이 흐르는 할아버지의 시체로부터 <시간을 전지(剪枝)해 버린 애정의 얼굴>을 보았다는 사실을 언어로써 재현시켜, 자연의 순환 법칙이 얼마나 가혹하며 시간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우리에게 인식시켜 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렇게 참담하고 비극적인 인간 상황(人間狀況)을 표현하고 고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어둠과 대결하며 살아 남기 위해서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또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제시해 주었다는 데에 있다. 작가 한수산이 <어둠 속>에서 밝은 불빛으로 생각한 것은 사랑이고 또 시간의 힘에 부식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것은 원시 종교의 우상에 형상화된 인간의 생명력이다. 주인공이 생에 있어서 죽음을 <할인>하는 이야기를 할 때, 형수가 천하 대장군의 목각을 사서 탁자 위에 놓은 것은 생명력이 영원하리라는 그의 믿음에 대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 민족적인 목각은 <장승>에 관한 근친상간의 신화와 더불어 생명력, 즉 <성의 샤머니즘>의 상징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대설부>에 나타난 기본적인 주제 역시 <사월의 끝>에서 보인 바와 같은 죽음의 시간과 그것을 초월하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 작품 가운데서 주인공이 죽은 형의 애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이 사랑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은, 젊은 건축가였던 그의 형이 현장에서 실족하여 수술을 받다가 죽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죽음을 강렬하게 의식하게 된다.

  기다릴 것도 없는 결과를 기다리며 병원에 앉아 있었다. 불나비가 날아드는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거리에는 장마가 갠 후 아침처럼 차갑게 빛나는 가로등 사이로 차들이 달리고 있었지만, 밖의 소음들은 들리지 않았다. 이 정적이 방음이 된 유리문 때문이기보다는 실내의 밝음과 거리의 불빛 사이에 두텁게 내려진 어둠 속에 모든 소리들이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저 어둠 속에 내던져지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내가 아닐까.

  그래서 그는 유년 시절에 시간의 수레바퀴를 가진 자전거를 배울 때, 경쟁의 적으로만 느꼈던 형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대한 애정을 모래알처럼 씹고 있었다. 그 때 형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 여자가 찾아와서 형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었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동생은 형이 언제나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것이 싫어서 자전거의 폐달을 부러뜨리듯이 자살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확증을 찾으려고 한다. 형은 아무리 자기의 성을 견고하게 쌓더라도 교회 종소리와 시계 소리, 그리고 전화벨 소리 및 버스 속의 음악 소리 가운데서도 죽음의 시간을 의심한 나머지 그것에 대해 저항감을 느꼈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아우는 형이 살았던 시간들이 어디론가 <이장(里長)>해 가고 녹슬어 가지마, 그를 사랑한 여인을 통해 재생해서 자기에게로 영원처럼 뻗어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니, 처음에 모든 것이 견디기 어려웠어요. 지나간 일들이 캄캄하게 헝클어지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들, 어떤 허위가 보이는 듯했어요. 모든 것은 서로가 공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랬는데……얼마 전부터 그분과 지낸 하루하루가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어요. 온 몸 구석구석에서 빛나는 보석처럼 지난 일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떠오르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분은 또 하나의 저일 수도 있거든요.”

  열차에서 내린 그녀가 여미어 쓴 스카프가 그녀 머리 위로 내리는 죽음의 눈을 막아 주듯이 그녀의 사랑이 형을 망각의 시간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깨닫게 된다.

  작품 <부초>가 지닌 주제 또한 앞에서 논의한 그의 문학 세계와 연결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부초>는 위에서 말한 어두운 인간 상황을 보다 큰 시간과 공간의 무대에다 확대해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과 무대는 곡마단이지만 소설의 구성은 역시 계절이라는 시간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곡마단의 흥행이 계절에 따라 심한 기복을 보인다는 것이다. 봄, 가을이 되며 곡마단의 활동은 예술의 대제전을 벌이듯 활발해지나, 비가 내리는 여름철과 겨울이 되면 갖은 어려움을 다 겪게 된다. 또 윤재와 하명, 그리고 하명과 줄타기 소년 사이에 이어지는 곡예사라는 직업의 전수 관계 역시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초>의 집단을 무너지게 만든 것은 시간의 파괴적인 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간을 초월해서 그들을 얽어매고 있는 사랑과 도덕의 힘이 약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그들 나름대로 시정(詩情)과 즐거움이 있었던 부초라는 사회가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하명의 애인인 지혜가 규오에게 짓밟힌 후 그곳을 떠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돈만 아는 곡마단 단장이 새로 와서 단원들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을 저버림과 동시에 통을 돌리던 석이네가 여름마다 찾아오던 사내와 그의 아들 석이에게로부터 애정을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 곡마단은 완전히 무너져 화염 속에 잿더미로 변하게 된다. 무서운 세월을 견디며 살아 남은 사람들은 그들간에 우정과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하명과 칠룡이, 연회 그리고 덕보뿐이었다. 그들이 시간의 힘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사랑으로 살아 남은 생명의 힘 때문이었다.

  “어디엘 가 있든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무대가 아니겠어. 하늘이 천막이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목숨을 가지고 어디든 발을 붙여 볼란다. 어느 동네든 실수해서 떨어지면 죽고 다치기는 매일반일 테니까.”

  그래서 한수산은 가파르고 위험한 인생 무대에서 자연적인 사간과 싸우며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애정이란 것을 다음 작품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비늘>과 <침묵>과 같은 <부초>이후의 단편에서도 계속 확대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서는 시간의 힘에 대한 문제보다는 안일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황폐한 생활 방식과 물질 문명의 집단 사회가 비인간적인 자연과 대결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인간적 힘인, 생명력과 사랑을 어떻게 파괴시키고 있는가를 뛰어난 상징으로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품 <비늘>에서는 오늘날 여인들이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마치 물고기가 비늘을 하나 떼어 내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지만, 작가는 <비늘이 다 떨어진 고기>가 성긴 모래 위에 올려 놓여지면 얼마나 아프고 견디기 어렵게 될 것인가 하고 신랄하게 묻고 있다.

  <침묵>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적인 생명의 힘과 <집단과 그 집단에 응집되는 힘>이라는 비인간적인 힘의 갈등을 뛰어난 상징과 탄력성 있고 섬세한 언어를 사용해서 성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원래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 위해서 구성된 사회가 인구 팽창과 산업화 과정으로 말미암아 생활 공간을 지극히 좁히는 밀집 현상을 가져왔다. 그 결과 사회란 집단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의사를 짓밟아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집단 현상이 인간에게 미치는 그 힘이 얼마나 가공스러운가 하는 것을 아파트 단지에서 갇힌 듯이 사는 어린이들의 놀이를 통해서 리얼하게 파헤치며, 아울러 목가적인 자연 환경이 시멘트벽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그린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다시 말하면 강변 도시에 아파트 단지가 생겨난 후 사람들이 사는 형태는 다양성을 잃고 판에 박은 듯 기계화되어 버렸다. 그래서 개인의 주관적인 가치는 집단의 응집력에 흡수되어 그 개성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불행은 아파트 콘크리트 문화가 계절의 변화에도 눈을 닫아 버린 채, 감옥에 갇힌 듯이 살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전해진 현실이다. 마음대로 뛰어 놀고 싶어하는 어린이들은 자연의 공간을 잃어버렸는가 하며, 모래 먼지로 인해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마저 볼 수 없게 되었다. 성냥갑처럼 똑같은 아파트 속에 갇혀서 사는 어린이들은 어머니가 외출을 하고 나면 외로이 슬픈 얼굴을 하고 문에 기대 있다가 이웃집 아이들과 <금지된 장난>을 한다. 그것이 싫증나게 되었을 때, 아파트 단지에 병아리 장수가 찾아온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실로폰 소리를 내는 노란 병아리를 사서 가지고 논다. 사흘째 되던 날부터 병아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죽어 간다. 귀여운 생명체들이 죽어 가는 모습은 실로 참혹하다. 마지막 두 마리가 남았을 때, 아이들은 어느 병아리가 멀리 나는가 내기를 건다. 그리하여 병아리를 죽이고 마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자 한 아이가 <더 높은 데서 날리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또 한 아이는 날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 아이들은 두 패로 갈라져서 승부를 걸기 시작했다. 이미 병아리를 잃어버린 그들에게는 그 경기를 충동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못 가진 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는 그것만으로도 가진 자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가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남대문 시장에 가서 병아리를 사 가지고 와서 고층 건물에서 떨어뜨려 죽인다. 물론 병아리를 죽이기 위해 아파트에서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날 수 있는 것이라는 희망에서이리라. 그러나 그 가운데 섞여 있던 한 계집아이는 병아리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집단과 그 집단에 응집되는 힘, 그리고 집단이 가지는 폭력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모든 훌륭한 예술품이 다 그러하듯이 여러 개의 얼굴을 가졌다. 아파트에 갇혀서 죽어 가는 병아리들의 이미지를 어린아이들의 이미지와 일치시켜 볼 때, 이 작품은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인간이 모든 것을 녹슬게 하고 마멸시키는 시간의 힘을 초월해서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을 심원한 사랑과 생명력 가운데서 탐색하면서 자신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 온 그는, 최근에 와서 상징주의와 리얼리즘을 융합시켜 가면서, 생명을 파괴시키는 집단 사회와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그 방향을 바꾸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소설의 집>을 완성할 것인가는 명백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많은 세월 속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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