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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숙 - 장인(匠人)의식과 구원(救援)의 주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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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장인(匠人)의식과 구원(救援)의 주제
具仲書

  

 

 

작가 한무숙은 1918년 서울에서 출생. 어려서 부산으로 이사 가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부산고녀(釜山高女)를 졸업했다. 여고 재학 중에 서양화 공부를 했고, 1935년에는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김말봉의 장편 소설<밀림(密林)>의 삽화를 맡아 242회 분을 그린 일도 있다.

  일제 말엽인 1942년에 장편 <등불 드는 여인>이 《신시대(新時代)》의 현상 모집에 당선된 것을 계기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해방 후에는 1948년에 장편 <역사는 흐른다>가 국제 신보 현상 모집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가 생활에 나섰다. 그 뒤 월간 《문예(文藝)》《문학 예술》등에 계속 작품을 발표했고 다작(多作)은 아니지만 꾸준한 노작(勞作)으로 일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한무숙의 소설이 문단에 예리한 충격을 준 것은 1957년에 발표한 단편 <감정이 있는 심연(深淵)>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으로 한무숙은 자유 문학상(自由文學賞)을 받기도 했다.

  한무숙의 소설 세계에서 돋보이는 일련의 요소들을 보면 장인 의식, 전아한 문체, 애련(哀憐), 허무, 아픔, 빛, 이런 것들이다. 이런 여러 요소요소들을 드는 것은 실제로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이런 요소들이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있는 심연> <유수암(流水庵)> <어둠에 갇힌 불꽃들> 등은 이 작가의 대표작급에 드는 작품들인데, 이 작품들 속에서 위 요소들은 하나의 의미 체계, 하나의 가치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감정이 있는 심연>에서 여중인공 '전아'는 지극히 연약한 정신 기질을 지니고 있다. 이 연약함은 유서 깊고 완고했던 집안 분위기의 중압 탓도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용한 분위기 이면에 추문도 많이 얽혀 내려 온다는 사실에서는 전아가 충격을 받으며 자랐다. 이 집안 최대의 추문은 아리따운 용모를 지닌 전아의 작은고모가 '행실이 부정해서, 욕된 씨를 지으려다가 철창 신세까지 졌다는 사건'이다. 과부가 되어 친정에 살고 있는 큰고모는 자기 동생인 이 작은고모에 죄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여 집안을 온통 죄의식에 잠기게 한다. 죄의식에 민감한 기독교 집안이란 점이 분위기를 더욱 그렇게 만든다.

  죄의 결과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열 한 살 난 소녀 전아를 재판정에 끌고 가서, 작은고모가 푸른 죄수복에 수갑을 차고 재판 받으러 나오는 것을 본 전아는 '연한 나비처럼, 하늘하늘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이성(異性), 사랑, 죄의식, 충격, 이런 것들을 전아가 성장하여 청년 '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다시 충격이 된다, 이 때 전아가 생각한 사랑은 단순한 본능적 사랑이 아니고, 어떤 의미, 어떤 가치였다.

    "나두 어떤 의미가 되고 싶었는데---선생님헌테"

  "나헌테? 그야말로 무슨 의미지?"

  "글세. 사랑일 것이라구 생각해 봤어요."

  이렇게 된 두 남녀는 무엇에 씌우기나 한 것처럼 청년의 하숙을 향해서 걸었다. 그 길이 끝난 곳에서 그들은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보았다.' 그런데 사랑을 바칠 때에도 전아는 '그런데, 다아 지나가 버리구 마는 거지요, 사람두, 의미까지두' 했었으며, 돌아나오던 길에서 전아가 여자 죄수들을 태운 차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죄가 무서워'하며 청년에게로 쓰려졌다

  이 두 번째 충격 속에 이 소설의 매듭이 잇다. 전아의 사랑과 사랑의 의미와, 허무와, 환경이 준 상처가 입은 재차의 타격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 유학길의 비자라는 것이 무용(無用)의 것이 되고 만다. 전아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므로 그것이 쓸데없어졌고 청년도 빈천한 가정 출신으로서의 콤플렉스와 허영이 필요로 해서 얻어냈던 그 비자가 전아의 좌절을 보고 나서 역시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전아의 섬약한 기질은 병적일 정도이지만 그로 인해서 발동되는 감수성은 순도가 짙다. 그리고 사랑하는 전아의 좌절로 인해, 자신이 전에 전아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어떤 상승된 신분의 표시격인 비자 또한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작품 전체를 통해 말수가 적고 차갑고 신비한 분위기가 일렁이는 그 뒤쪽과 또는 깊이에 숨겨져 암투하는 인간의 마음들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그리고 섬약한 젊은 전아가 쓰러지지만 그 쓰러짐은 인습의 억압과 사랑의 가치사이의 갈등이었으며, 이 아픔을 통해 '비자'라는 일종의 허영의 표상이 힘없이 스러져 버린다는 점에 의미의 짙은 여운이 있다.

  <유수암>은 1963년에 발표된 중편으로서 이른바 화류항(花柳巷)을 소재로 하고 있다. 즉 노기(老妓)들의 세계를 다룬 것이다. 소재로 보아 얼핏 대중 소설일 법한 인상이 들지만 역시 무게 있는 노작(勞作)으로서 작가가 인생을 보는 원숙한 경지가 나타나 있다.

  서울 변두리 풍치 좋은 계곡에 자리잡은 청수암과 유수암이라는 두 집, 이 중의 하나는 불제자로서 니승(尼僧)들이 도를 닦는 암자이고, 유수암은 불가(佛家)와 반대되는 집이라 할 수 있는 화류가(花柳家)이다.

  그런데 청수암을 향해 올라가는 두 노파의 귀에 혼란이 오니 유수암 쪽에서 독경 소리가 나는 것이다. 이제는 노기(老妓)의 집에 불과한 지난날의 그 환락가에서 실제로 관음경을 읊조리는 노기가 있다. 집 주인이며 역시 노기인 진경의 친구인 홍화가 경과 함께 지내며 수시로 흥얼거리는 소리다.

  발심(發心)하여 삭발 입산했다가는 얼마가 못 가서 환속에서 다시 화류에 놀곤, 또 마음이 움직여 이번에는 일도(一到) 신심(信心)인 것 같은 인상을 주다간, 다시 젊은 남자에 혹하여 망측한 몰골이 되곤 하는 홍화의 삶이 슬프기만 하였다. ……느닷없는 발심도 잡스러운 행동도 한 가지로 그의 삶의 거짓 없는 표현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관음경과 잡가가 한 입으로부터 엇갈려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손자를 안을 나이에 자나깨나 '사랑 타령'을 하는 홍화와 환속까지 하여 기껏 정했다는 기둥서방이 열 세 살이나 손아래이므로 딸 같은 본체에서 알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가장 허무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을, 오직 육체로 확인하려고 하는 그녀의 추행은 오히려 여심(女心)의 극한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량을 가지고 인간과 인생을 이해하는 데에 이 소설의 원숙한 차원이 있다

  실상 기생들은 전제적으로 불운했다는 한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랑'도 안정되고 항구한 것이 되기 힘들다. 기생이 되기까지의 사연은 각자의 경우가 형형색색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비슷비슷하다. '가난이 원수'라는 한 마디가 공통된 이유가 된다.

  아편쟁이가 되어 버린 전라도 기생 산월이는 열 살 때 광대 집에 팔려가 잔뼈가 가무 익히는 데 굵어졌다. 가난이 원인이었다. 아직도 주름을 분으로 메우고 술자리에 앉은 경상도에서 온 청향이는 긴 병에 가물거리는 아배의 목숨을 보다 못 해, 제 발로 기생 조합 서사네 아낙을 찾았다. 역시 가난 까닭이다. 명기의 이름이 높았던 계월이를 비롯해서 평양 기생은 직업으로 기도(妓道)를 택했지만 대개는 가난으로 말미암은 곡절이 있다. 홍화만 하더라도 가난뱅이 미장이 딸이 기생 삯바느질을 맡아 하던 어머니의 손에서 고객인 기생 손에 넘어갔던 것이다. 유혹에 끌려드는 수도 있다. 경의 경우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바닥에 깔린 것은 역시 가난이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본성과 품격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있는 것이므로 기생들 속에도 지조 높은 삶이 모습이 나타나는 수가 있다. 원래 '유흥'이란 기명(妓名)을 지녔던 '우이동 아주머니'가 그런 사람이다.

  나이 서른에 정을 깊인 우국지사 고산 선생을 도와, 만주로 북경으로 망명한 일이 있는 파란도 겪었다. 고산 선생이 광복을 눈앞에 두고 옥사한 후의 그녀의 생활은 유발니(有髮尼)의 그것이었다. 정인(情人)이 세상을 버린 것이 갓 마흔 되던 해니 청상(靑孀)은 아니었다. 그러나 용색에 남은 아리띠움이 청상으로 보였다. 그 아름다움으로 유발니의 삶을 보낸 것이다. 가난한 민족 운동자가 남긴 것이 있을 리 없어, 생고(生苦)를 겪어야만 했던 그녀는 거문고 타던 손에 바늘을 익혔다. 삼십 년을 줄곧 바느질품으로 늙어 왔던 것이다. 낙탁한 사대부집 수절(守節) 부인이 흔히 하듯이.

  홍화와 우이동 아주머니, 즉 탕녀와 수절 부인은 진경의 유수암에 모여 앉을 때 모두 다정한 형제 사이가 된다. 이들 속에서 유수암 주인 '경'은 늘그막의 정인인 한 정객(政客)을 그리며 산다. 그 정객이 옥살이를 하고 나왔는데 '경'에게는 안부 한 번 전해 오지 않음이 시름이 된다, '저것 보세요. 저 물가의 버들이 시들었지요. 물은 변함 없이 흐르구 있는데, 허지만 예전 흐르던 그 물이 아니군요.' 이것이 <유수암>의 허무이다. 그러나 '경'에게는 허무로만 끝나지 않은 또 하나의 사연이 있다. '경'이 젊었던 시절에 별로 깊은 정도 없는 사내의 아이를 배서 낳은 후 홀로 된 언니에게 맡겨 키워 왔다. 그 아이가 이제는 장성하여 대학을 나오고 군대에 나가게 된 대장부가 되었다 이 아들은 어쩌다 유수암으로 어머니를 찾아와도 '어머니'라고 부르지를 못한다.

  "이녀석아, 그래 에미란 말이 그렇게두 하기 싫으냐?"

   그러나 아들이 똑바로 경을 쳐다보았다.

  "난 아무튼 어머니라구 불렀죠. 이모는 애초부터 어머니였지만, 식모두 어머니라구 불렀어요. 친구들의 어머니두 모두 어머니라구 불렀구요. 내겐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가 어머닐 수 있었어요, 어머니란 말을 그렇게 헤프게 쓰구 보니, 여기 와서 쓸 말이 없어졌군요."

  아들의 눈이 번득거리는 것을 경은 보았다. 그녀는

  "찬호야!"

  한마디 부르고 누운 채 한 손을 눈 위에 얹었다.

    소설 <유수암>에는 입산, 환속, 우국지사에 대한 절개, 정인에 대한 끝없는 기다림, 아들이라는 혈육이 일깨우는 질긴 인륜의 정 등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하나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를 그림에 있어 작가는 능란한 장인의 솜씨를 보였다. 마치 이 소설 속에도 나오는 풍류 예인(藝人)의 솜씨를 느끼게 한다.

  '슬기둥 둥 당--뜰, 가야금 소리는 호소하는 사람의 육성처럼 절원을 담고 구슬픈 계면조로 시작되었다 느린 그 곡조는 퉁기면 음이 끓어져서 종처럼 여운을 남긴다. 풍류란 동양의 음악관이다. 바람과 시냇물--- 자연의 현상으로 보았기에 음악을 풍류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소설 속의 이런 대목처럼 한무숙의 소설이야말로 동양적 인정의 자연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리되 전문적 소양들을 끌어들이고 치밀하고 섬세한 솜씨를 보인다. 한편의 소설을 위한 이 작가의 취재의 깊이는 한 장인의 자세를 입증해 주고 있다.

  <어둠에 갇힌 불꽃들> 또한 특수 소재를 다루어 낸 장인 의식의 성과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몇 해 동안의 침묵기를 가진 후 6백 장 분량의 중편으로 엮어 1976년에 발표한 노작이다.  한무숙의 장인 의식은 다른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기법면(技法面)을 가리키는 것이다. 기법 외의 주제 의식은 별도의 진지성을 지닌다. <어둠에 갇힌 불꽃들>은 실명한 소경들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특수 소재인만큼 이색적 생활묘사를 하고 있다는 단계에서 멀리 더 나아가서 이 소설이 지닌 주제 의식은 다분히 종교적인 깊이에 이르러 있다. 교회의 기도문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연속하는 것이 있지만, 과연 진실로 불쌍한 처지에서 깨닫는 '행복의 실체'란 사람을 경건케 하고 숙연케 하는 힘이 있다. 눈 먼 소녀 안나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도 불평이 있느냐?'고 묻는 그 물음에 그런 힘이 들어 있다.

  어느 날 고아원 앞길에서 큰 싸움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싸우는 사람들은 서로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험한 말을 구정물처럼 퍼부어 가며 마구 치고 때리고 차고 밀었다. 눈 먼 고아들은 공포로 떨며 그 모양을 듣고 있었다.

  안나가 오들오들 떨면서 병호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사람들 왜 싸워요."

  "글세 생각을 잘 못하는 사람들 같군."

  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선생님 저 사람들 눈 뜬 사람이에요? 못 보는 사람이에요?"

  병호는 어리둥절하며,

  "보는 사람이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왜 싸워요? 앞을 볼 수 있어도 불평이 있어요? 무슨 불평이 있어요. 앞을 볼 수 있는데……"

  맑고 고운 눈에 눈물이 피잉 돌았다. (안나는 소위 청맹으로서, 앞을 보는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면서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애처로워 병호는 그녀의 작은 몸을 꼭 껴안아 주었다.

  이것은 어린 소녀의 순진한 견해 속에 들어 있는 참으로 엄숙한 행복관이다. 인간은 불행이나 고통 앞에서 패배하고 마는 존재가 아니다. 불행의 고통 속에서 행복의 절실함을 알아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구원받는 조건이다. 실로 세상에 널려 있는 만상을 볼 수만이라도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고, 인식한다는 것은 소유하는 것으로 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볼 수가 없는 맹인의 경우에도 이 세상을 이 우주를 인식할 수 있을이만큼 위대하다.

  대학을 나온 인텔리 맹인 진수는 한 번도 눈으로 볼 수 없었던 하늘에 대해 지극히 풍부하게, 심오하게 인식한다.

  '큰 길이라 앞이 화안하게 틔여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을 위로 들었다. 여전한 암흑 속이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잔잔한 가을의 햇살만 느껴질 뿐 아무것도 없다. 파아란 하늘이라고 들었다. 파아란 색--어떤 것일까? 물색 같다고 하였다. 물색--종잡을 수 없다. 컵에 든 뜨거운 물, 수도에서 쏟아져 나오는 찬 물, 어머니가 세수를 시켜 주던 따뜻한 물, 대야 속에 담긴 물, 언젠가 잘못 만진 하수도의 끈적거리는 물, 친구들과 놀러가서 손을 씻은 일이 있는 급하게 흐르고 있던 계곡의 시원한 물--모두 촉감이 달랐다. 그러나 물은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아름답고 정답고 부드러웠다. 그렇다. 물은 어머니의 손길이었다. 물색--파아란 색--하늘색--어머니……아들아 내가 여기 있다. 여기 하늘이 있지 않느냐. 어머니의 인자한 음성이 들렸다. 파란 하늘이 조용히 움직이며 그의 가슴 속 가득히 흘러 들었다. 어머니--진수는 소리 없이 외치며 몇 발자국을 옮겼다.'

  진수는 이런 상태에서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어 죽는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장면이다. 그러나 슬프고 아팠다 하더라도 진수는 이런 마음의 경지에서라면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진수의 아내 정례가 화장품 행상을 하며 지내다가, 맹인의 아내인 신세를 한탄하고 한때, 가출하여 타락한 생활을 하지만, 텔레비전의 '인간만세' 프로에서 회심의 실마리를 찾는다.

  '쨍쨍하게 내리쪼이는 눈부신 빛은 은총에 넘치는 광명입니다. 그러나 먹구름 사이로 얼비치는 빛이 더 유난히 밝은 것처럼 불행이 없고 행복만 있다면 진정한 행복은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철상(鐵床) 위에서 쇠를 다루듯 시련을 겪어 나갈 때 인생은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례는 남의 첩 생활을 청산하고 고아가 된 자식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도 불평이 있느냐'는 맹인 소녀 안나의 물음은 한국 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종교적이고 절학적인 주제 의식이다. 오늘의 한국 소설들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때때로 회의하게 된다. 단순한 차원의 인정담(人情談), 신변잡기, 세태(世態) 고발, 사회 구조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 모두 소설의 한 단면이 될 수 있고, 특히 사회 구조를 문제삼는 데에서는 이른바 리얼리즘의 작업이 전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한 인간의 영혼의 구원이란 문제에까지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이것은 최선의 문학은 못될 것이다. 인간의 어떤 뿌리깊은 갈증을 해소해 주는 일은 되지 못할 것이다.

  한무숙의 <어둠에 갇힌 불꽃들>이 던진 영적 구원에의 메시지는 대체로 한국 문학에서 결여되어 있는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좋은 본보기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잇다. 이 작가의 장인 의식이 보여 주는 문체에 있어서는 성실성과, 인간 구원에의 주제 의식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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