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한국 문학의 미의식과 '멋'의 개념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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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미의식과 '멋'의 개념

 본문

  '아름다움'은 '고움' 과 '멋' 의 바탕으로써 한국적 미의식을 대표하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한국적 미개념의 표상인 동시에 미개념의 보편적 원리에 통용되는 말이다. 영어의 beauty 나 불어의 beaute를 한국어로 번역할수 있는 말은 '아름다움'말뿐이다. '고움'이라든가 '멋' 으로써 그것을 대치할 수는 없다. 이는 곧 '고움'이라든가 '멋'이 '아름다움' 보다 더 특수적이요, 한국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고움'이야 말로 한국적 미의식 곧 '아름다움'정통면을 대표하는 것이다. '고움'은 '아름다움'의 협의로써 아름다움의 개념보다 소규모의 구체적인 개념이다. 역사적으로도 고움이란 말은 아름다움이라는 말과 동시에 사용되었고 그것은 현행어의 미려(美麗)와 같은 뜻으로 쓰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움'의 정당미(正當美) 또는 규격성으로써의 아려미를 뛰어넘는 변형미 또는 초규격성의 풍류미가 멋이다. '멋'은 한국 미의식의 그 본래의 정당성을 데포르메(deforme,변형)해서 체득한 또하나의 고유미 이다. 그러므로 '고움'의 개념은 세계일반의 우아미에 통하는 것으로서 다른 민족의 미의식과 근사치를 찾기가 쉬운 데 비하서, '멋'은 좀더 한국적인 것으서 번역할수 없는 한국사람 만이 공통으로 느끼는 미(美)가치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적 미의식의 구명은 이 '멋' 의 특질을 찾는 것으로 시종(始終)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멋은 단순한 세련과 치밀과 청신(淸新)의 규격만으로는 성립되지 않고, 그것들이 일단 변화의 묘(妙)에서 찾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신미(精神美)의 양상이지만. 멋은 근본적으로 형식작용이다. 정신미로서의 멋의 현현 은 제작또는 행동의 형식화작용에 매여있기 때문에, 이형식 작용을 떠나서는 멋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문제거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멋은 먼저 형식상의 격식을 바탕으로 한다. 즉 격(格)에 맞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격식에 맞는다는 것만으로 멋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격삭에는 빈틈이 없이 맞으면서도 멋이 없는 예술과 행위를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본다면 멋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 거기서 멋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초격미(超格美)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변격이합격(變格而合格)'이요 '격(格)에 들어가서 다시 격(格)에서나오는 격(格)'이라 할 수 있다.〈조지훈,「멋의연구」〉

 

 

한국 문학의 범위 설정

 본문

 지금까지의 국문학사는 거의 국문 문학의 문학사였다. 한문학은 배제한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대강 다루는 데 그쳤고, 구비 문학에는 관심을 갖지 않기 일쑤였다. 이 점에서 비판을 해야 하겠으나, 비판에 앞서서 고려해야 할 사정이 있다. 국문학 연구를 시작해 국문학사를 내놓기 전에는 문학이라면 으레 한문학 중심으로 이해되었고, 구문 문학을 평가하자는 주장이 널리 인정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맞서서 민족 문학으로서의 국문학을 인식하고 평가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한문학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스스로 청산하고, 국문으로 된 것만 국문학이라는 극단론까지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잃은 것도 많다 하겠으나, 국문 문학에 정통성을 부여하게 된 전환은 정당한 것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국문학의 우수성을 부각시키자는 의도가 작용해 구비 문학을 무엇인가 모자라는 문학으로 보아 민속학의 소관이라고 한 것도 당시 상황에 말미암은 처사였다.

 

 또한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 수가 아주 한정되어 있었던 기간 동안에는 우선 국문 문학이라도 전후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는 것이 급선무였다는 점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전 시가 분야부터 어느 정도 정리해 놓고 고전 산문으로 관심을 돌리다가, 현대 문학도 연구의 대상으로 끌어들인 그 동안의 과정이 기본 방향에서 그릇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사정이 달라졌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못이다. 국문 문학이 정통임은 재론의 여자가 없이 분명해졌으니, 구비 문학이나 한문학을 국문 문학과 같은 비중으로까지 다루어도 혼란이 생길 염려가 없다. 연구 인력도 부족한대로 재배치를 할 수 있을 만큼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한문학 해독 능력을 전수하고 구비 문학 자료를 제대로 조사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시기를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는 사정 또한 긴박하다.

 

 그뿐만 아니라, 민족 문학을 이해하는 관점의 변화 또한 깊이 의식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  동안 일제에 맞서고 서구의 경우와 대비하면서 우리 민족 문학을 찾자고 했지만, 민족 문학을 보는 틀은 서구 문학의 전래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국문학 자체가 지닌 폭과 깊이를 두루 드러내서 그것대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과 함께 동양 전래의 문학에 대한 재평가를 하면서 한문학을 재인식하고, 제3세계 민족문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우리 구비 문학도 무언가 모자라는 문학이 아니며 새로운 창조의 자랑스러운 원천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국문학이 구비 문학, 한문학, 국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문화적 축적과 변모의 결과이며,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전통의 폭이 그만큼 넓다는 증거이다. <조동일, 「한국 문학 통사」>

 

 

한국문학의 특질에 대한 제 견해

 본문

1.조운제의 견해


(1)은근과 끈기
  조윤제는 한국 문학은 우리민족 생활의 표현이요, 민족마음의 거울이라고 본다. 따라서 은근하고 끈기 있는 우리민족의 생활이 한국문학에 그대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한국문학의 특질에 하나로 은근과 끈기를 들었다. 생활관이 은근하고 끈기 있기 때문에 자연관(自然觀)도 그렇다고 했다. 대표적인 예가 국화(國化)를 '무궁화(蕪躬化)로 삼은 점을 들 수 있다.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은근하고 또 끈기있게 피기 때문이다.

예: 〈은근〉
나비야 청산(靑山) 가자 범나비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테들어 자고 가자.
꽃테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예: 〈끈기〉
 이골 물이 주루루룩 저골 물이 솰솰 열에 열골물이 한데 합수(合水)하야 천방져 지방져 소코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건너 병풍석(屛風石)으로 으르르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유산가(遊山歌)〉

(2) 애처로움과 가냘품
  이것은 선(線)의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미의식의 발로이다. 특히 고려 문학이 애처럽고 가냘픈 것은 불교의 영향이라고 본다. 현실에 대한 무상감(無常感)에서 비관적 어조가 생겼고 이것이 애처로움과 가냘픔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애처로움은 슬픔이 아니다. 또 가냘픔은 섬세함과 청초함을 내포하고 있다.

예:

  설월이(雪月)이 만정(滿庭)한데 바람아 부지마라.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은 번연히 알것만은
  그립고 아쉬운 마음에 행(幸)혀 긴가 하노라.

(3)'두어라'와 '노새'
  '두어라'와 '노새'는 일종의 데카당스(퇴페주의)인데 현실에 절망하고 구원책이 없을 때 생기는 기분이다. 고려문학만이 아니라 조선문학에서도 이 기분이 농후한 것은 조선시대가 내세(來世)를 약속하는 종교를 갖지 못했고 당쟁으로 화를 많이 입었던 사회적 환경 때문이다. 그러나 도피, 향락, 취흥하는 생활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이 '두어라'와 '노세'는 한국문학의 참된 특질이라기보다는 조선시대의 정치 상태와 사화 환경에 따라 농후하게 나타났을 따름이라고 본다.


예: 

    옥분(玉盆)에 심은 매화(梅化) 한가지 꺾어내니
    꽃도 조커니와 암향(暗香)이 더욱 좋다.
    두어라 꺾은 꽃이니 버릴 줄이 이시랴.   〈감성기의 시조〉

2.조지훈의 견해


(1)아름다움: 미(美) 일반을 가리키는 말
(2)고움: 한국적인 미의식의 정통면(正統面)을 대표하는 것. 규격미(規格美), 우아미(優雅美), 아려미(雅麗美). 세계 일반의 우아미에 해당하는 것.
(3)멋: 변형미(變形美), 초규격성(超規格性)의 풍류미(風流美)
   한국의 미의식이 그 본래의 정당성을 변형해서 체득한 고유미이다. 즉 멋은 격식에 맞으면서 격식을 뛰어넘는 초격미(超格美) 이다.

3.정병욱의 견해
  '멋'은 '데포르마씨옹(변형)' 의 미의식에서 그 본질이 설명될 수 있으리라 본다. 무릇 이 '멋'이란 개념은 대개 다음에 두는 두 가지의 경우에 파악된다. 즉, 하나는 여러 가지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한데 엉키어 새로운 조화를 이루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멋'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져 나간 약간의 기곡(技曲)이 형성되어 전체적인 조화를 손상시키지 않을 때에 우리 또한 '멋지다'고 감탄한다. 이같이 '멋'은 조화를 기거로 하면서 원상이 약간 변형되었을 때에 느껴지는 일종의 미의식을 뜻함이다.(출처 : 구인환, 김흥규, 김윤식, 김종철 저 한샘출판사) 

 

 

한문 문학 포용론의 시각

 본문

 우리 문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한문 문학의 포용에 대해 상당한 신축성을 두는 절충적 입장이 나타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대체로 1940∼1950년대에 부각된 입장은 한국 문학의 범위를 확정하는 기본 전제에서 '우리 말과 글로 된 문학'을 중심으로 삼되, 일부 한문 문학을 그 주변 영역으로 인정함으로써 위의 난점들을 완화하려 하였다. 그 결과 국문 문학과 이의 주변에 속하는 영역을 구분하여 한국 문학의 영역 구성을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논리가 출현하였다.

 이와 같은 절충안은 국문 문학만이 한국 문학이라는 완강한 규정에 비하여 여러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으나, 절충의 기준과 타당성에 관한 문제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못했다. 우선 우리는 한문 문학 중에서 '국문학적 가치'가 있는 갈래(양식), 혹은 작품들을 가려내는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는 일정하지 않으며, 하나하나의 기준 안에서도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구분상의 난점이 발견된다. 예컨대, 한문 문학 중에서 설화·소설류만을 한국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19세기까지의 국문 시가(國文詩歌) 역시 사대부층의 한문 문학적 교양 및 한시의 세계와 상당한 관련을 맺어 왔다는 점에서 불균형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1446) 이전과 이후의 한문 문학을 자격상으로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은 원칙론적으로 이해할 만하다, 한글 창제 이후에도 사대부층의 문자 생활과 문학 활동에서 한문의 압도를 수정할 만한 사회·문화적 조건의 변혁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구분도 역사의 실상에 따른 것이기보다는 규범적 분할의 논리에 속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국문학적 가치'가 있는 부분을 가려낸 나머지의 한문 문학을 과연 한국 문학의 영역에서 제외할 수 있는 있는가는 의문이다. 이 경우에도 앞서 지적한 바의 난점, 즉 우리 역사에서 생성된 여러 층위의 문학 사이의 다면적 관련과 전체상을 온전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은 기본적으로 존속한다. 국문학적 가치가 희박한 부분을 가려 낸다 해도 그것이 문학사의 당대적 맥락 속에서 일정한 의미·기능을 가지고 다른 문학 행위와 상보적, 혹은 대립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인 한, 이를 도외시하고는 그 밖의 영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제약될 수밖에 없다. 손쉬운 예로 박지원(朴趾源)의 경우를 들어 본다면, 「허생전(許生傳)」·「호질(虎叱)」·「양반전(兩班傳)」등의 작품 세계는 그의 문학 의식을 담은 비평적 저작이나「열하일기(熱河日記)」등과 떼어 놓고는 깊이 있게 해명하기 어려우며, 이들 전체는 또한 18세기의 유학(儒學) 사상과 정통 한문 문학이 당면하였던 내부적 갈등의 얽힘에 비추어짐으로써 그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귀결은 19세기 말까지의 우리 역사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 한문 문학을 그 귀속 자격에 관한 한 아무런 차등 없이 한국 문학의 범위에 포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출처 : 김홍규, 한국 문학의 이해)

 

 

한국 시가의 전통적 율격

 본문

밭 잃고 / 집 잃은 / 동무들아 //
어디로 / 가야만 / 좋을가 보냐 //
괴나리 / 봇짐을 / 짊어지고 //
아리랑 / 고개로 / 넘어간다 // 〈「신아리랑」중에서〉

 한국인들에게 위의 시행들은 /와 //로 구분된 마디의 연쇄로 읽힌다. 여기에 /표로 구획된 소리 마디가 곧 음보(音步)로서 한국 시가 율격의 기본 구성 단위가 된다. 즉 음보란 통사적 분절과 율격상의 분절에 의하여 뚜렷한 경계 표지를 가지는 '호흡상의 실체적 단위'이다.


 전통적으로 한국 시가가 기본으로 삼는 율격 형태로는 2음보격, 4음보격, 3음보격의 세 가지가 있다.
 2음보격은 두 개의 음보로써 한 행을 구성해야 한다는 요건으로 인해 표현상의 제약이 많아 그다지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2음보격은 시행의 끝마다 약화되어 2음보격행이 둘씩 이어지면 4음보격이 된다.


 4음보격은 네 개의 음보로써 하나의 시행을 이루는 율격으로, 균형 잡힌 틀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며 유장하게 읊조리기에 적합하다. 4음보격은 시조와 가사, 상당수의 민요에도 쓰였으며, 판소리 등에서도 기본적인 율격형으로 활용되었다.


 3음보격은 대체로 선율적 표현성이 강한 서정 민요류에 많으며, 특히 「악장가사(樂章歌詞)」, 「악학궤범(樂學軌範)」,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등의 문헌에 실린 고려 속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 시대 시가의 지배적인 율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신라 시대 향가의 경우에는 3음보격이 우세하다는 설과 4음보격의 흔적이 더 강하다는 설이 공존하는 형편이다. / 김흥규,「한국 문학의 이해」

 

 

 

해방 공간의 문학에 대한 시각

 본문

  해방은 잃어버린 조국의 회복과 잃어버린 언어의 회복을 의미한다. 광복이라는 말 자체가 '빛의 회복'을 뜻할진대, 암흑의 극복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도 또한 이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 감격적인 의미는 이미 역사적인 가치로 인정되고 있다. 문제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강요했던 의식의 굴레가 벗겨지는 순간의 충격과 공백이 해방의 감격 못지 않은 커다란 정신적 부담으로 남게 되고, 그것이 해방 직후의 민족적 생활의 위기뿐만 아니라 민족적 주체의 위기까지도 초래하기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적 위기를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주체적으로 극복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민족적 주체의 확립이 더욱 강렬하게 요청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민족과 국가가 어떻게 재건된 것인가 하는 점이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면, 이러한 현실적 과제를 이루기 위한 정신적 기반의 확립이 하나의 전제적 요건이 되었음은 당연한 논리라고 하겠다.

 

 해방 직후 새로운 민족 문화의 건설에 대한 요청과 더불어 가장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문화현상의 하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학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이전의 문학은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정신적 극복을 그 중심과제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지만 민족의 해방은 문학적인 측면에서 본격적인 민족문학의 전개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의 움직임을 보면, 식민지하에서의 문학적 성과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과 함께 새로운 민족문학으로서의 우리 문학의 진로에 대한 확실한 전망을 설계하는 데에 그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 문학은 민족의 삶의 현실을 진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실의 세계, 말하자면 어떤 독단적인 견해나 왜곡된 편견이나 급변하는 사조 등에 전혀 방해당하지 않는 포괄적이고도 깊이있는 문학의 세계를 스스로 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진정한 민족 문학의 수립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식민지 시대의 문화적 유산을 청산하고 그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보색하는 첫 단계의 의미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팽배해 있던 정치의식에 기반을 둔 사회적 견해가 문화의 영역을 지배하면서 문학의 정신적 방향마저 좌우했기 때문에, 실제적인 측면에서 문학이 사회적 혼란과 문화 전반을 휩쓸던 격정을 조화롭게 형상화시켜 나갈 수 있었으리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문학은 특히 해방된 조국의 건설과 민족의 새로운 삶의 가치를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상상의 언어를 필요로 하였고, 심미적이면서도 동시에 도덕적인 용기를 지닌 참신한 상상의 힘을 재생 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힘을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문학의 시계에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는 두 가지의 어려움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하나는 당시 정치사회의 불안과 혼란 등의 상황적 위압감에서 야기된 상상력의 위축을 극복하고 이념의 논쟁에서 벗어나는 일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문학 자체 내에서 문학의 정신을 끊임없이 갱신시켜 나가는 생명력과 상상력의 초점을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에 고정시켜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권영민, 「한국 근대 문학과 시대 정신」에서

 

 

 

해방 이후의 문학

 본문

 1965년 8월 15일의 해방은 한국의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이룬다. 많은 식자들에 의해서 지적된 대로 그것이 비록 독립이 아니라 해방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문학적 조건은 그 이전의 문학적 조건과 판이하게 다르다. 제일 큰 문학적 조건의 변화는 한글로 사고하고 한글로 글을 쓰는 권리와 의무가 한국 문학인에게 부과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조선후기에서부터 서서히 진행된, 민족에너지의 문학적 분출을 결정적으로 문학인들에게 확인시킨 사건이다. 그 사건은 1948년 대한민국의 수립에 의해서, 국민 문학의 형태로 그 응전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1945년 이후의 문학은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1945년의 해방은 그것이 자주 독립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단을 아무 저항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것은 작가의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여, 국가 단위의 문학을 전면적으로 수락하게 작가를 만들지 못하고,민족 단위로 문학을 생각하게 만든다. 분단은 문학인들로 하여금 식민지 시대 문학인들이 느끼지 못한 새로운 억압체를 느끼게 한다. 둘째 분단은 사고를 경직화된 상태로 몰고 간다. 해방 이후 1950년의 6·25 전쟁까지의 좌우익 논쟁과 전쟁 이후의 공산주의 혐오 증세는 역사를 총체적으로 관찰하는 데 많은 장애를 일으키게 한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한 원초적인 고찰없는 이데올로기 싸움은 국가가 그 구성원을 인간답게 살게 만드는 터전이라는 사실의 확인에서 오는 비평과 반성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생존하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샤머니즘적인 생존사상으로 그 구성원들은 이끈다. 해방의 의미가 식민지하에서 살아남은 몇몇 작가들, 특히 채만식·황순원 같은 작가들에 의해 천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계속적인 탐구의 결과를 보이지 못한 것도 거기에서 연유한다. 그것은 4·19이후에 특히 최인훈의 고독한 작업에 의해 그 전모를 드러낸다. 셋째, 경직된 이데올로기는 동족 상잔의 전쟁을 통해 감정의 차원에 폭넓게 정착한다. 그것을 더욱 조장한 것이 미국식의 실용주의 교육인데, 그것을 통해 반성보다는 암기가, 사고보다는 순응이 이해보다는 지식이 더욱 중요시된다. 자기가 속한 국가에 대한 어려운 고통은 사상된다.  

 

 4·19이후의 이상주의적 경향은 그러한 것에 대한 문화적 응전이다 1945년 이후의 문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로 사고하고,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일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확인시켜 준 문학이다.

 

김윤식·김현, 「한국 문학사」에서

 

 

 

 

향가와 경기체가

 본문

 경기체가(景幾體歌)라는 명칭은 노래의 말미가 예외없이 '景 긔 어떠하니잇고' 또는 '景幾體歌'라는 문구로 맺고 있어서 '경기체가(景幾體歌)',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 '여하가(如何歌)' 등으로 불린다. 경기체가는 고려 가요를 대표하는 속요와, 후렴이 있고 분장식(分場式)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저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향가 문학의 계승면으로 따진다면 경기체가가 향가의 정통적 발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경기체가와 향가는 시대적 조건을 달리함에 따라 여러모로 다른 성격을 가졌다. 첫째, 향가는 불교도·화랑도의 소산임에 대하여 경기체가는 관료·유학자의 문학이며, 둘째, 향가는 상대인(上代人)의 절실한 종교 생활에 터잡은 민요적인 생활시임에 비하여 경기체가는 상층 지식인 사이에서 이루어진 풍류 문학이었고, 셋째, 향가는 비록 한자를 차용한 것이지만 순전히 우리말을 기사(記寫)하였는데 비하여 경기체가는 한문구의 나열이 그 대부분이고 끝에 가서 약간 우리말이 붙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양자(兩者)가 다 각기 당대의 상층 지식인의 소작(所作)이라는 것, 향가의 낙구에 해당하는 첩구(疊句)를 경기체가도 갖추고 있다는 것과, 부분적이나마 경기체가도 향가와 한 가지로 이두 (향찰)을 쓰고 있다는 것 등의 유사점으로 인해 경기체가는 향가의 정통 후계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구인환 외, 「한국 문학 신강」)

 

 

향찰과 향가

 본문

 향찰

 한자의 음과 석(釋)을 빌려 국어 문장 전체를 적은, 신라시대의 발달한 표기법. 가요 특히 향가의 표기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향가식 표기법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고유 명사 표기법이나 이두와 구별하여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향찰이 명사·동사를 비롯한 국어 문장 전체를 표기하였다고는 하여도 차자(借字) 방법에 있어서 의미부는 새김[釋]을, 형태부는 음을 비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두와 원리적으로 같다. 향찰이란 명칭은 「균여전(均如傳)」(1075) 역가공덕분(譯歌功德分)의 최행귀(崔行歸)의 서문에 비로소 나타난다. 이 서문은 균여 대사와 같은 시대의 최행귀가 균여 대사가 지은「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한시로 번역하면서 쓴 것으로 향찰은 문맥상으로 보아 향언, 즉 신라어로 적은 문장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국어의 전면적 표기인 향찰로서 현존 향가 중 오랜 것은「혜성가(彗星歌)」로 진평왕 대(579∼632)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향찰은 6∼7세기 전후에 발달하여「찬기파랑가」,「제망매가」,「도천수관음가」,「안민가」,「도솔가」등 향가 14수 가운데 5수가 지어진 경덕왕 대(742∼765) 무렵에 그 전성기에 달했으며, 균여대사의「보현십원가」11수로 그 명맥이 고려에 이어졌으나 점차 쇠퇴하였다. 고려 예종의「도이장가」는 그 마지막 일례가 된다.

  향가

전래 문헌에 의하면 향가 명칭에는 도솔가·사뇌가·향가 등의 용례가 보인다. 향가란, 광의로는 중국 시에 대한 우리 나라의 독특한 시가를 뜻한다 하겠으나, 협의로는 신라 시대로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는 사이에 제작된 이두식 문자로 표기된 시가를 이름이라 하겠다. 따라서 향가라 하면 도솔가나 사뇌가를 포함한 총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남아 있는 향가는「삼국유사」14수,「균여전」소재에 11수로 모두 25수이다. 시대적으로 보면 6세기말 7세기초인 신라 진평왕 때의「서동요」·「혜성가」가 처음이고, 10세기 균여의 마지막 작품인「보현십원가」가 그 마지막 작품이다.


 향가의 형식은 4구체·8구체·10구체로 구분된다. 4구체가 4수, 8구체가 2수, 10구체가 19수 있다. 이 중에서 4구체가 가장 오랜 형식이었으리라고 본다. 처음 민요의 단계에서 시작된 서정시는 현존하는 한역가(漢譯歌)나 일부의 향가 형식으로 미루어 볼 때 4구체 혹은 6구체라는 단형이었을 것이다. 이같이 성립한 서정시 형식은 인간의 감정이 점점 복잡하여짐에 따라 차차 정형화하려는 경향을 이루어 삼국 통일에 들어서자 과거에 4구체·6구체·8구체·10구체 사이를 방황하던 시형이 10구체로 된 사뇌가 형식으로 응결하여 완전무결한 하나의 서정시형을 완성시켰던 것이 아닐까 한다. 10구체로 된 사뇌가 형식은 전편 3장으로 되어 있으며 제1·2장은 각 4행으로, 제3장은 2행으로 되어 있다. 제1장만으로는 4구체와 같은 형식이고 제2장까지만 보면 8구체와 같은 형식이라 하겠다. 제3장은 낙구(落句)라고 부르며, 그 첫머리에 '아야(阿耶)' 또는 그 밖의 감탄사를 쓰게 되어 있다. 제1장의 첫 구절은 다른 구절에 비하여 대개의 경우 그 길이가 짧은 것도 특징이다.

 

 

현대문학 비평의 경향

 본문

 19세기에 왕성한 근대문학에 대한 반항에서 출발한 현대문학은 방관의 문학에서 인사이더의 문학으로 변모하였다. 어디까지나 있는 그대로 현실을 그려낸다든가, 인생을 해부하고 폭로하는 '바라보는 문학'에서 현실에 파고 들어가 몸부림치는 새 인간을 찾고 창조하는 '행동의 문학'으로 전환하여, 이 20세기의 불안과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광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간형의 탐구라든지, 메카니즘과 권력에 희생되는 인간의 옹호를 절규하는 휴머니티를 고조하고 또는 기성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영토와 모럴을 찾아 방황하는 등 현대 문학의 과제는 자못 무거운 것이다. 이러한 부과된 문제의 해결은 창작에만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창작과 우선 문학 비평이 공동적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은 문학비평도 창작과 같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현대문학비평이 교차되어 있는 착잡한 비평의 상황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평 문학의 이해를 위하여 근대와 현대비평의 계보와 그 양상을 살펴 보기로 한다.

 

1. 근대 비평의 경향

현대는 비평의 시대라고 일컬어진다. 근대 이후에 왕성해진 비평의식은 19세기에 자못 그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흄이 휴머니즘 사상에 대한 일격을 가할 무렵을 전후하여 제각기 새로운 비평방법에 의한 현대적인 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반세기 동안에 두 번이나 겪어야 했던 대전은 스펜글러의 예견대로 서구 문화에 대한 의구와 불신을 가져와 비평가들은 안이하게 근대 비평의 유산을 씹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모두가 근대비평을 비판, 섭취하면서, 변모해 가는 문학의 조류와 작품 세계를 투시하여 새로운 비평방법을 실험하여 현대적인 비평과제의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 말하자면 엘리어트가 말한 '비평에 있어서의  실험'을 행하여, 위기와 불안의 시대라고 불리워지는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탐구하려는 20세기적 모험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비평은 시대 사조, 상황 등의 변천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면서, 문학의 이론과 방법을 전개하고 작품을 평가하여 그 가치와 효용을 비평하면서도 현대의 모든 정신분야와 관련을 지어 비평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비평을 문학적인 입장에 한하려 하던 - 아놀드는 그렇지도 않지만 - 것에 비해서 비평의 영역이 넓어져 다른 여러 과학에서 얻은 방법으로 비펴을 실험하여 여러 가지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 착잡한 현대비평의 조류를 현대비평의 이론가인 웰렉은 ① 마르크스 비평 ② 정신분석학적 비평 ③ 언어학적 비평 및 문체론적 비평 ④ 신유기주의적 형식주의적 비평 ⑤ 신화 비평 ⑥ 실존주의 비평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현대비평가가 내세우는 소론이 동일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비평의 시대라 하는 현대비평의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현대 비평의 함성이 일어나기 전의 근대의 찬란했던 비평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근대비평은 객관적 비평과 주관적 비평으로 대별할 수 있는 비평의 다채로운 향연이었다. 곧 셍트 뵈부, 브륀띠에르, 테느, 톨스토이 등의 객관적 비평과 프랑스, 르메트르, 구루몽, 러스킨, 칼라일, 아놀드, 페이퍼, 와일드 등의 주관적 비평이 그것이다. 이 두 비평의 논쟁은 치열하여 비평사상에서 에폭(epoch)을 긋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 '박물지'를 만들기 위해서 실증적 과학적인 비평에 끌린 셍트 뵈부, 비평에 있어서 개인적인 인상을 중요시하지 않고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한 브륀띠에르는 다윈과 스펜서의 진화론적인 방법을 문학비평에 도입하여 문학의 장르는 발생, 발전하고, 진화, 변화한다고 문학의 장르의 진화를 주장하였으며, 또 '예술철학'과 '영문학사'를 저술한 테느는 민족, 환경, 시대로써 비평의 객관적인 기준을 삼았다.

 

이에 반하여 "작품이 주는 쾌변이야말로 그 작품의 우열을 측정하는 유일한 척도다."라고 말한 프랑스는 훌륭한 비평가는 걸작 사이를 걸어가는 자기의 혼의 모험을 얘기하는 것이며, 비평이란 작품을 통하여 자기에 대해서 얘기하는 예술작품이라고 - 르메트로도 프랑스와 의견을 같이 한다. - 비평에 있어서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인상비평을 주장했다. 또한 '시는 인생의 비평'이라고 한 아놀드는 비평은 우선 "대상을 실재하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몰이해'에 의한 인상비평을 주장했으며, 페이터는 예술작품이 주는 쾌락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이 왜 그러한 쾌락을 주는가를 밝혀야 한다고 쾌락비평을 말하고, 와일드는 "최고의 비평은 자기의 혼의 기록이다."라고 창조비평을 확립하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일은 현대비평의 연원이 되는 아놀드의 비평태도인데, 그가 러스킨, 칼라일과 같이 문학비평을 문학비평에까지 그 시야를 넓혔다는 사실은 현대문학비평의 중요한 일면을 개척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객관적 비평에 반발한 주관적인 비평의 활동은 20세기초의 랑송, 루카스, 센츠베리, 브레들리 등의 강단비평에까지 계속된다.

 

2. 현대비평의 양상

이러한 근대비평에 대하여 다시 반발한 몰톤의 귀납적 비평, 흄의 반휴머니즘에 의하여 현대비평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곧, "문학작품을 상대로 하는 것 이외의 어떠한 가치평가의 방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주관적 비평에 반대하여 귀납적 방법에 의한 비평을 말한 몰톤이나, 흄이 문예부흥 이후로 성장해 온 휴머니즘은 의범주라고 하고, 낭만주의는 휴머니즘의 극점이라고 하여 고전주의를 주장하여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1차대전을 겪고 나서 기성 문화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비평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대비평의 태동이 있기 전에 여러 평론지중심의 활동이 현대비평 나아가서는 현대문학의 기틀을 마련하였음을 주시해야 한다. 곧 독일'신평론', '프랑스 신평론', 엘리어트가 주간한 'Criterion', 랜섬, 테이트, 브룩스 등의 동인지인 '더 푸기티브' 등을 중심으로한 문학운동과 새로운 비평의 실험은 현대문학의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문학과 예술과의 왕국에, 참으로 솔직한 작품의 개화를 가능하게 한 것같은 순수한 하나의 국토를 만들기'를 꿈꾼 '엔 알 에프'는 지드, 디보테, 발레리, 렘보 등이 이 지상에 작품을 발표하고, 릴케, 카프카, 프르스트, 사르트르 등 중요작가가 이 '엔 알 알프'를 통하여 등장하였으며, 만, 쇼, 엘리어트, 조이스, 헤밍웨이, 포크너 등의 유럽과 미국의 대가들이 참가하여 전위적인 문학을 담당했다. '신평론'은 토마스만,헤세, 하우프트만, 슈니츠라, 릴케, 카프카 등이 참가하여 신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대륙과 미국에 있어서 같은 타이프의 다른 문학잡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런던에 국제적 사상의 국지적 토론장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 '크라이터리온Criterion'은 리드, 파운드, 스펜더, 오덴 등의 활동무대이었으며, 외국의 문학의 동향을 주시하며 또한 수 많은 외국작가의 활동지가 되었다. 그 창간호에서 시작된 엘리어트의 장시 '황무지'는 문학의 새로운 전환을 제시했다.

 

이상의 세 문예지가 새로운 세대의 문학을 지향하면서 신예작가의 발굴과 외국작가에게 활동무대를 제공하여 현대문학의 공동적인 목표를 달성하기에 주력한데 비하여, 동인지로 출발한 '푸기티브'는 미국의 새로운 비평인 신비평이란 비평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문학지 중심의 거센 현대문학의 물결이 밀려올 때, 전기한 흄의 전시 중에 집필한 '사색록'에 의해 근대를 부정했고, 엘리어트가 그와 같이 했던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 있어서는 왕정주의자, 종교에 있어서는 앵글로케토리스'라고 자칭하는 엘리어트는 전통과 고정된 문학작품의 이상적인 질서와 법칙을 존중하려는 신고전주의를 주장하며 각 세대는 저마다의 비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초기에는 그는 소위 '제작비평'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리는 자기 지양에 의한 낭만주의의 문학을 고조하였다. 또한 리드는 주관적인 비평을 비난하고 심리분석에 의한  문학비평을 시도하였으며, 리차즈는 심리적인 언어의 분석에 의한 비평원리를 모색하였고, 엠프슨은 언어, 애매성을 분석하고, 스펜더와 오덴은 문학과 정치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는 마리, 스펜더, 오덴을 제외하곤 모두 흄과 같은 방향인 주지주의 테두리 안에 드는 것으로 미국에서 40년을 전후하여 등장하여 신비평과 계보를 같이하는 것이다. 또한 독일에서는 신낭만주의에서 표현주의로 또한 신즉물주의가 일어나 문학은 관념의 세계에서 현실세계에 복구하여야 한다고 하며, 프랑스에서는 창조적인 비평, 철학적인 비평으로 변모하고, 렌섬, 브룩스 등의 신비평주의 또는 스피체 등의 문체론적 비평이 등장하는 등 현대비평은 실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현대의 문학비평은 문학의 이론이나 작품에 한한 것이 아니고, 현대의 전체 상황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한다. 그리하여, 문학작품 그 자체에 대한 평가에 문학자로서 본, 또는 문학적 감수성에 의해서 느껴진 문화비평, 사회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기한 웰렉이 말한 비평의 조류와 관련지어 보면 현대비평의 다양성은 물론 조류가 얼마나 착잡하게 얽혀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불안과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창작의 과제를 공동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현대비평의 변증법적인 지향이 요구된다. 곧, 20세기적인 정신적인 빈곤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인간형을 탐구하여 그들에게 모럴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번번히 새로운 방식을 찾아서 위험을 무릅쓰고 문학으로서 비평에 주어진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현대의 문학비평은 또 그 연구방법에 따라 내부에서의 어푸로우치(approach)와 외부에서의 어푸로우치로 나눌 수 있다. 곧 작품을 '작품 자체의 조건'에 의하여 연구하려는, 말하자면 작품을 작자와 분리시켜, 그 구성, 문체, 심상이라든가, 언어적인 분석에 의하여 작품을 연구하는 것이 내부에서의 어푸로우치이며, 작품을 작자의 생활환경, 시대라든다 사회의 소산으로 보아 작가의 전기라든가 사회상황의 기능에 의해서 작품을 연구하며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의 면에 작품을 고찰하는 것이 외부에서의 어푸로우치다. 리차즈, 엠프슨은 물론 귀납적 비평의 몰톤, 문체론적 비평을 시도한 스피처나 렌섬, 브룩스 등에 의한 신비평주의의 분석적 비평 방법, 구조주의의 토도로프, 현상학의 마글리오라 등은 전자에 속하고, 아놀드, 스펜더, 사르트르, 문학사회학의 루카치, 수용미학의 야우스 등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기한 웰렉의 '20세기비평의 조류'에서, ① 맑스시트 비평 ② 신화적 비평 ③ 실존주의적 비평은 외부에서의 어푸로우치이며, ④ 정신분석학적 비평, ⑤ 언어학적 비평 및 문체론적 비평, ⑥ 신유기주의적 형식적 비평은 내부에서의 어푸로우치에 속한다.

 

또한 문학을 통해서 본 현대문화 또는 정신상황을 비평하는 것 - 엘리어트, 스펜더 등 - 과 비펴을 문학에 국한시키는 두 경향으로 볼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스핑가른이 말한 셍트 뵈부를 정점으로 한 비평의 두 계열에서, 근대비평의 객관적 비평을 지나 흄에서 엘리어트, 리차즈, 릳, 엠프슨 또는 몰톤, 스피처를 거쳐 랜섬, 테이터에 연결되는 주관적인 평가를 배격하는 계열과 인상비평을 지나 머리, 스펜더, 스핑가른, 사르트르 등 개성적인 정감을 중요시하고 문학에서 주관적인 평가를 주안으로 삼고 새로운 모럴을 탐색하려는 계열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그밖에 바르트의 '라시느론'에서 비롯된 프랑스 신비평도 구조주의이론과 기호학 등을 원용해서 새로운 비평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바르트의 '라시느론'은 피카르의 반격을 받아 1965년경에 신·구비평논쟁을 치열하게 벌리게 된다. 피카르는 발트의 비평을 새로운 사기라 몰아부치고 이에 대해서 바르트는 '비평과 진실'을 써서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비평이란 작품이라는 기초언어에 대한 이차 언어이며, 비평의 임무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합당성'을 찾아내는 것이라 한다. 여기서 독자론의 확대에 의한 수용미학, 현상학적 방법 그리고 기호학적 방법이 시도되고 있어 현대문학 비평의 다양성이 더해지고 있다.

 

아무튼 현대는 비평의 시대다. 문학비평은 넓은 영역에 한하고, 다채로운 양상을 띠우면서 부과된 비평과제의 해결을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다.(출처 : 구인환, 구창환 공저 '신고문학개론'에서 )

 

 

 이해와 감상

 

 비평에 대한 미래적 전망

 21세기는 인문학의 존립이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인문학의 효용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문학은 도처에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상황이다. 속되게 말하면 인문학을 전공하려는 지원자들의 급감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인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비인문학관련자들은 그 효용성의 측면에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사실 인문학이라는 전공을 택하는 기초 단계인 고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인문학을 택하는 비율은 비참할 정도로 저급하고, 또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질적인 면에서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 시대는 인문학에 덜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지금과 같은 '인문학의 위기'라는 보편적인 상황에서 역시 문학 또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학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화두는 계속 진행되는 논의이기에 그 논의의 추이는 앞으로 연구 과제이다. 그리고 문학의 한 분야인 비평문학 역시 미래의 운명 또한 예측할 수는 없을 정도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만, 21세기의 인터넷 시대에는 어떤 면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가능성 가장 높다. 왜냐하면 인터넷 시대는 지난 시대의 매체적 특성이 일방적이었다면 인터넷은 쌍방향매체로 발전하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의 자기 표현 욕구가 이전과는 다르게 팽창하고 있고, 전자 민주주의시대라는 도래가 가능하기에 전자민주주의는 모든 면을 비판적 안목에서 접근해야 하기에 비판을 생명으로 하는 비평은 그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흔하디 흔하게 인터넷에 개설된 사이트들의 게시판은 비평이 살아남을 수 있는 희망을 제공하고 있다. 문제는 있지만 게시판에 올라 있는 그런 일회적이고 즉물적인 생각들이 비판과 비평이라는 개념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21세기는 인터넷 시대이고, 그 시대는 자기 표현의 시대이고, 그 표현의 핵심에 견해적 비판이 있으므로 비평은 어려운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계기와 도약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시의 시작

 본문

 첫째, 현대시란 서구의 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은 <태서 문예 신보>와, 동경 유학생들이 동경에서 창간호를 발행한 <창조>에서 발달되었다는 사실에서, 현대시란 서구적 지식이나 교양을 갖춘 20대의 젊은 사람들이 지은 시라는 점이다. 서구 문명을 접촉한 이들이 한국 문명의 대표자이고 독점한다는 사고 방식이 개념 속에서 은밀히 깔려 있다.

 

 둘째, 이들이 지향한 것은, 최남선·이광수에 의해 주도되어 온(이들 역시 서구 문명의 지식이 문화 전반의 독점을 가능케 해 준다고 믿고 있다.)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거부하면서 개인주의의 아성을 쌓은 것이다. 개인의 정서, 개인의 감정, 이것이야말로 이들이 작품으로 표현할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리하여 이들은 비실용적인 소위 순수시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의 19세기 문예 사조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상적이면서 권위가 있어 보인다. 넷째, 이들의 성장 기반이 일제하여서 전통적 문명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일본내지 서구 문명에 대한 선망적 태도 때문에, 한국문학의 전통적 시 형식이나 율격에 대해 무지했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기이한 산문시를 낳았던 것이다. 주요한의 「불놀이」가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 뒤 김억·김소월·김영랑에 의해 전통적 율격을 계승되면서 다소의 변화가 시도되었지만, 현대시 초기부터 생겨난, 전통적 율격을 계승되면서 다소의 변화가 시도되었지만, 현대시 초기부터 생겨난, 전통적 율격에 대한 무지와 무시는 고질화된 병으로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이상과 같이 현대시는 20세기 초엽 서구 문명을 배운 젊은 층이 개인적 정서를 전통적 율격에 무지하기 때문에 산문형식을 빌려서 쓴 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현대시란 20세기 초기부터 지금까지 있어온 다양한 내용과 형태를 가진 시를 지칭하는 아주 광범한 내포는 가진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출처 :김종택, 윤성근, '국어국문학 총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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