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한국어에 관한 인식의 깊이와 한국문화

by 송화은율
반응형

한국어에 관한 인식의 깊이와 한국문화 / 이 상 태 (경북대 문법론)

 

1. 들 머 리

 

오래 전 일이다. 남들이 조상의 무덤치장을 한다, 빗돌을 큼지막히 놓는다 해 쌓길레 나는 돌아가신 어른들의 행적을 찾아 글로 엮어 일가 아이들에게 돌려 읽어 보게 하려고 옛 문서들이 든 궤짝을 뒤져 보았다. 그 속에서 내 국민학교 때 상장이 하나 나왔다. 두꺼운 종이에 세로로 노란 줄을 긋고 그 곳에 세로로 賞狀 / 優等賞 / 000 / 右者 品行 ···’ 라고 씌어 있었는데 왜정 때 받은 작은아버지의 것과 어쩌면 그 글의 틀이나 글자가 그리도 닮았는지. ‘-, - 따위 토만 일본 글자에서 우리 글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광복이 되고 우리 말을 되찾게 되었다든지 정치·사회적 여건이 변했다든지 해서 왜정 때와는 크게 달랐을 테지만, 십년 가까이 지나도 글로 적은 문화의 틀은 말끝 ‘-, - 정도로 바뀌는데 그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못 착잡했었다.

여덟살짜리 아이에게 주는 정보체 치고는 포장이 너무 딱딱하여 그걸 뜯어 볼 수는 도저히 없었을 터이다. 광복 후 반세기가 된 지금은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 개인이나 사회의 여러 부면을 두고 볼 때, 말과 글이 백성에게 썩 다가간 쪽도 있고, 과거로부터 진 빚이 많아서 아직 백성에게 덜 다가선 쪽도 있다. 또 우리의 시야도 많이 넓어져서 연변을 비롯한 중국이나 옛 소련 지역, 미국과 일본 지역에 우리 겨레가 많이 살고 있고, 이들 모두를 싸잡는 정보 공동체를 위한 말과 글의 통로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인식을 사회의 각 부면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더욱 질 좋은 문화를 이룩할 터전을 다지는 일이 될 것이다.

 

2. 겨 레 와 겨 레 말

 

말은 개인과 겨레에게 여러 가지 구실을 한다. 말은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도구이며, 생각과 느낌을 형성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말에 의해서 생각과 느낌이 구체적으로 고정되기 때문이다. 또 말은 겨레를 겨레답게 덩이지우고, 겨레의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겨레란 일반적으로 피로써 연결되고 삶의 방식과 가치가 통하며 이에 관한 상호소통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동아리를 말하는데 이것은 주로 그가 쓰는 말에 의해 다른 무리와 구분된다.

 

가장 자연스런 상태를 두고 볼 때 누가 어느 겨레에 속하는가를 나타내는 본질적 징표는 그가 쓰는 말이다. 왜냐하면 특정의 겨레말 속에는 삶의 방식과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과 태도가 녹아 있고, 아이는 그 말을 익히는 과정에서 그런 것들을 은연중에 습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말이 개인의 겨레됨의 표상인 또 다른 이유는 모국어를 선택하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마치 아비를 선택하고 태어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후자에 의해 육체적 삶의 조건을 부여받고, 전자에 의해 정신적 삶의 조건을 부여받는다. 보통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모국어가 잡아 놓은 만큼의 터전 위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전문적인 학자나 문인들은 모국어가 마련한 삶의 터전을 더욱 넓히고, 주춧돌을 더욱 든든하고 바르게 놓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마치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버릴 수 없듯이 학자나 작가가 모국어의 한계를 영 저버릴 수는 없다. 오히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로 낼 수 있는 소리폭과 소리 특성에 더욱 충실함으로써 그가 더욱 위대한 악기의 질난이[마에스트로]가 되듯이, 작가나 학자도 모국어의 한계를 가능성으로 바꾸어서 그 특성에 충실하여야 도구의 주인됨(to master)과 숙달됨(to command)에 이를 수 있다.

 

세계에는 삼천이 넘는 겨레말이 있다고 하는데 각 겨레가 그 말을 쓰는 데에는 많은 차이와 등급이 있다. 이는 겨레가 그 말을 얼마나 일찍 인식했는가, 얼마나 철저히 총체적으로 부려쓰고 사랑해 왔는가에 따라서 생기는 등급이다. 말이 그 겨레에게 온전히 봉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글자가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하여 문학과 역사의 기록이 정착되고 계승되어야 새로운 창조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말이 겨레에 봉사하는 최상급은 고유의 글자로 삶의 역사와 앎의 터를 종교 경전으로 응축시켜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몇몇 언어에서 보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글자의 제작이 500여 년 전으로 일본과 몽고와 만주에 뒤떨어져 있고, 문학과 역사의 기록도 역시 그러하다. 고유의 종교 경전이 없음은 물론, 외국의 종교도 그 경전의 한글로의 번역은 극히 최근의 일인 바, 불교와 기독교를 놓고 볼 때 종교 신자의 해당 종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도는 그 경전 번역의 순서와 완성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온 겨레가 대중 가요를 즐겨 가요무대라는 프로그램이 교포가 있는 곳마다 불티나게 팔린다고 하는데, 고유의 종교가 없는 곳에 이것이 겨레의 시편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 고유의 글자를 만들어 지닌 지는 500여년에 불과하고, 통치의 통로로 고유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반만년 역사에 이십 년이 채 못 되지만 현재 우리말과 그것을 가장 과학적으로 표현하는 한글은 겨레 문화의 계승, 번역, 생산에 현저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짧은 동안에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매우 괄목할 만한데, 그 방향은 민주사회에 걸맞도록 모든 사람이 문화생산에 참여하는 길을 열기 위해서 겨레의 총기억 부담량을 줄여가는 쪽으로 바르게 잡혀가고 있다.

 

여기서는 사회의 몇몇 부면에 걸쳐 말글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따져봄으로써 우리 말글의 발전 방향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3. 한글의 인식과 의사소통의 통로

 

말과 글은 겨레의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여기서는 정부의 국민에 대한 의사소통과 국민 사이의 의사소통 통로로 쓰이는 한글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살펴 보겠다.

 

지금 다시 글자 문제를 들먹이는 것은 매우 쑥스러운 일이나 아직도 한자를 쓰는 신문들이 많으므로, 또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기에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베이컨이 지적했듯이 지식은 통치의 정당한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글자는 지식을 저장하고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글자는 통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일찌기 최현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옳게 지적했다. “인류 사회의 글자의 구실은 그 처음에는 다스리는 계급이 다스림을 받는 계급을 지배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모든 살아가는 도리와 다수 사람을 휘둘리는 방법을 그 글 속에 간직해 두고, 소수의 사람만이 이를 배워 지위와 권력과 명예와 이익을 독차지했다. 이런 현상은 어느 나라, 어느 글자를 막론하고 봉건 사회에서 공통된 일이었다.”

 

한글을 만든 세종도 이를 통치의 직접 통로로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백성을 순치하고 교화하기 위해서 훈민정음을 쓰고, 왕조실록이나 국가 경영의 본들은 모두 한문을 썼는데 봉건사회에 걸맞게 훈민정음의 통로와 경국정자(經國正字)’이라 할 한문 통로가 2원적으로 쓰였다.

 

백성의 의식이 깸에 따라 이에 비례하여 한글의 쓰임이 넓혀졌다. 연산군 시대에는 백성이 한글 대자보도 붙였고, 다급한 문제가 생기면 왕도 한글 담화문을 발표했음이 드러났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붙어 정보를 주고 힘을 빌려 준 우리 백성이 많아서 골치꺼리였다. 이들을 귀순시키기 위해서 만든 한글 윤음(綸音)이 커다란 임금도장이 찍힌 채 경주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말이 부드럽고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해방뒤 정부의 담화문과 크게 대조가 되므로 아래 이를 소개한다.(맞춤법과 띄어쓰기만 고쳤음)

 

백성에게 이르는 글이다.

임금이 이르시되, 너희 처음에 왜에게 후리어서 인하여 (함께) 다니는 것은 네 본 마음이 아니라, 나오다가 왜에게 들려 죽을까도 여기며, 도로 의심하되, 왜에게 들었었으니 나라이 죽일까도 두려하여 이제까지 나오지 아니하니, 이제는 그런 의심을 먹지 말고 서로 권하여 다 나오면 너희를 각별히 죄주지 아니할 뿐아니라, 그 중에 왜를 잡아 나오거나 왜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 나오거나 후리인 사람 많이 더불어 나오거나 아무런 공 있으면 양천을 논하여 벼슬도 하일 것이니, 너희 생심도 전에 먹던 마음을 먹지 말고 빨리 나오라.

 

이 뜻을 각처 장수에게 다 알렸으니 모두 나오라. 너희 설마 다 어버이 처자 없는 사람일따! 예 살던 데 돌아와 예대로 도로 살면 우연하랴.

 

이제 곧 아니 나오면 왜에게도 죽을 것이요, 나라이 평정한 뒤면 너흰들 아니 뉘우치랴. 하물며 당병(唐兵:중국군) (온 나라에) 가득 있어, 왜 곧 빨리 제 땅에 아니 건너가면 합병하여 부산 동래 왜들을 다 칠 뿐아니라, 강남 배와 우리 배를 합하여 바로 왜나라에 들어가 다 분탕할 것이니 그적이면 너희조차 쓸려 죽을 것이니 너희 서로 일러 그 전으로 쉬 나오라.

< 만력 21 9 >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서 고종은 1895년쯤 통치의 통로를 한문과 한자 섞어쓴 글과 순한글의 셋으로 잡았는데, 이는 백성의 힘이 그만큼 커졌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왕조의 멸망과 함께 흐지부지되었다.

 

광복 뒤 백성이 주인됨을 표방한 체제에 걸맞게 통치의 통로를 한글로 정하는 법이 일찍이(법률 제6, 1948 10 9) 정해졌으나 그것을 만든 국회나 그것을 지켜야 할 정부나 오래동안 지키지 않았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글 맞춤법 파동을 일으킨 장본인인 이승만 대통령은 한글 통로의 정착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여러 차례 한글 통로만 쓰자고 권한 이분은 1957년에 국무회의 의결로 한글전용 실천요강을 만들어서 공문서나 간행물은 한글로 쓰라, 기관의 현판과 모든 표지를 한글로 고치고, 관청의 도장도 한글로 새기라고 지시했으나 왜정교육의 골을 겨레의 물로 씻지 못한 지식인들이 신문을 앞세워 심한 반대를 폈다.

 

10년이 지난 1968년에 다시 한글 전용 촉진 7개 사항을 박정희 정부에서 발표하는데, “1970년 첫날부터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문서와 민원서류에 한글을 전용하라, 언론 출판계에 한글만 쓰기를 적극 권장하라, 1948년의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그 단서 조항을 빼자, 각급 학교 교과서에서 한자를 없애라, 고전의 한글 번역을 서두르라고 지시했고, 비로소 정부의 한글 전용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최고 통치자의 한글 전용에 대한 의지는 매우 강했으나, 백성의 삶과 직접 관계가 있는 중간 관리나 백성의 삶에 터를 두고서 문화를 발전시켜야 할 지식인들이 그 일에 훼방을 놓거나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왜정시대에 한자를 일본어로 익힌 이들이 보인 한계라 할 것이다.

 

몰래 술 담가 먹지 마라는 정부의 담화나, 물이 깊으니 들어가 헤엄놀이를 하지 마라는 경고 따위를 모두 한자로 적어서 그걸 읽지 못하는 어른이나 아이에게 보라고 붙여 놓았으니, 쇠 귀에 경 읽기도 아니고 무슨 코메디를 하는 것도 아닌 담화 행위를 우리는 한참이나 했었다. 이 시대 행정부가 담화 행위에 많이 쓴 말은 무슨 法 第   하여 嚴重 處罰한다는 살벌한 문귀였다. 은행에 예금한 제 돈을 찾을 때도 이만원 貳萬이라고 적지 않으면 안되었던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대를 우리는 겪었다.

 

단순히 글자만 한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해방 30년 뒤에야 들었다. 그래서 정부나 여러 기관에서 일본식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여 지금은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

 

한글은 세계 글자들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글자라고 하면서도 한글만 쓰기를 반대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런 이중성은 신문이 한술 더 뜨고 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을 신문의 날로 잡아 놓은 것은 그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자는 뜻일 것이다. 그토록 정부가 한글만 쓰기를 권해도, 독립신문의 창간호가 밝힌 우리 신문이 ······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의 정신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신문들은 그 체제의 번잡함으로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쓰고 있고, 신문의 기사와 아래 광고의 판짜기가 다르며, 속에 어느 면은 또 가로짜기가 되어 있다. 세로로 왼쪽으로 읽는 원칙이 가로로 걸린 제목에 이르러는 거꾸로다. 예전 신문은 한 원칙뿐이어서 본문이나 광고나 가로 제목이나 모두 세로로 왼쪽으로원칙만 지켜졌다. ‘김일성 사망이란 가로 제목은 왜정 때나 해방 직후 같으면 亡死 成日金으로 썼을 것이다.

 

한국인 2, 3세나 한국학을 공부하는 외국인이 우리 신문을 읽으려면 골치 아픈 일이 한둘이 아니다. 가로로 읽을까 세로로 읽을까가 면마다 다르고 위치마다 다르며, 한국어를 힘들여 배워도 한자를 다시 익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다 불필요한 일이요 괜한 기억 부담량의 증가일 뿐이다.

 

신문에 나는 내용을 방송으로 들을 때, 아나운서의 말이 한자로 바뀌어 듣는이의 눈에 박히지 않아도 우리는 잘들 이해한다. 이런 괜한 기억 부담량의 증가, 또는 접근상의 어려움을 조장해 놓으니 세계에 퍼져 있는 교포 2세나 한국학도에게도 우리 문화에의 접근을 더디게 하고 못 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1996 4 7일은 독립신문이 태어난지 백 돌이 된다.  신문의 날 이전에 우리 신문들은 독립신문의 정신을 깊이 새겨 이런 잡스러움을 벗겨 내어야 할 것이다.

 

4. 여러 학문에서의 고유어 인식

 

인간 생활과 자연 현상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규칙을 찾아내는 학문은 말을 통하여 그 과정과 결과가 표현된다. 학문들은 저마다의 개념 체계가 있고, 그것은 그에 상응하는 단어로 표현된다.

 

자생적으로 학문을 발전시킨 겨레는 학문의 말과 일상의 말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일상의 젖소와 학문의 젖소가 다를 수 없고, 농부의 벼농사와 농학의 벼농사가 틀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이 남의 나라에서 수입될 때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농부는 벼농사를 짓고, 농학자는 稻作을 연구한다고 하며, 실제 생활에서는 젓소를 기르고 있지만 축산학과의 교과서에서는 乳牛 飼養한다고 하여 같은 일과 사물을 두고 말이 겹으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말 어휘의 가장 큰 특징은 이런 다중 체계에 있다. ‘아버지 부친’ ‘자네 아버님 자네 춘부장에서부터 혀뿌리 설근(舌根)’에 이르기까지 한 개념에 말이 두 겹, 세 겹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겨레에게 불필요한 기억 부담량을 크게 늘려 창조적 문화생산을 가로막고 있다.

 

일상의 말이건, 학문의 말이건 간에 담론은 어휘로 이루어진다. 어휘는 담론을 이루는 원소인데 이것이 겹으로 되어 있으니 일상의 담론은 의사 소통에 큰 장애가 되고, 학문의 담론은 그 들머리인 술어 익히기 단계에서 모든 힘을 다 빼고 만다.

어느 학문이든지 술어는 그 학문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놓인 연장이면서 그 연구를 마무르는 결정체이기도 하다. 학문은 대상을 쪼개고 합치고 하여 개념(뜻의 넓이)을 정확히 잡은 뒤에 그것으로 대상이 되는 세계를 기술하고 규칙을 찾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의 들머리와 마무리의 술어들을 겨레의 말로 쓰지 않으면 학문의 본질에 접근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이런 데 대한 반성이 몇몇 분야에서 이루어져서 큰 성과를 얻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한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식물이름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박만규님의 덕으로 린네식 분류에 미나리과니 꽃상추과니 하는 고유어 이름이 실리게 되었다.

 

박물관은 어린이나 어른이 자주 가서 공부하는 곳이다. 옛날에 조상들이 쓰던 물건들을 진열해 놓았는데 그 이름을 高杯, , 長頸壺, 耳餌로 써 놓았으니, 대다수의 겨레가 알 턱이 없었다. 도대체 이런 물건들을 사용한 이들이 그렇게 불렀을까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1980년대에 이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이들의 이름을 굽잔, 뒤꽂이, 항아리, 귀걸이로 바꾸어 (원래대로) 달기로 결의하였다.

 

이를 본받아 서양글을 쓰는 학문들도 그 술어를 고유어로 바꾸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한화학회는 1987년 술어를 바꾸는 모임을 만들어 ‘blind test' 어림시험으로, ’product ion' 딸이온으로, ‘accepter' 받개로 고치는 등 그 학문에 접근을 더 쉽게 해 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는 크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이 땅의 대학교육 역사로 볼 때 상당히 일찍 시작된 농학이나 의학, 지리학 계통 등에서는 그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 그 학문들의 겨레삶과 가까운 정도를 고려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반면에 최근에 셈틀(컴퓨터) 계통의 술어들은 고유어로의 번역에 관한 논의가 매우 활발하고 그 성과 또한 상당한데, 이들 두 양상, 즉 한 쪽은 늦게 들어와 겨레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한 쪽은 일찍 들어왔으나 겨레에게 멀리 동떨어진 채 있는 상반된 두 모습을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꼭 싸잡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왜정시대에 들어와 안정된 체계를 이룬 학문들은 대개 그 때의 술어체계를 고집하고 있다. 농학 계통이 그렇고 의학에 쓰이는 신체나 뼈 이름이 그렇고 지리학과 경제학 계통의 용어들이 그렇다. 그 때의 교육의 분위기는 지금과 달라서 학문의 말은 겨레 일반의 말과 달라야 한다든지, 그런 개념 익히기를 학문지체와 혼동하는 수준에 학자가 머무르고 말았다든지, 더 나아가서 일반 겨레는 무지몽매하므로 이를 끌어올려야 한다든지 하는 등 가르침과 배움의 마당에 덮씌워진 이데올로기가 있었고,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익혀서는 이로부터 벗어나지 못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70년대 후반기에 그 때 내가 가르치던 학교의 식품가공학과 교수 한 분이 서울의 어느 대학에 박사학위논문을 내었다. 지도교수가 그 논문을 보고서 하는 말이 자네 논문은 한자가 많다. 누가 번역해 주지도 않을 것이고 하니 국문과에 가서 말을 좀 다듬어 보라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지고 왔는데 보니, 우리 간장의 맛 분석에 관한 것이었다.‘甘味, 鹽味, 苦味 따위의 말도 있어서 그는 이를 감미, 염미, 고미 등으로 고치자니 이상하다는 것이다. 내가 단 맛, 짠 맛, 쓴 맛으로 고치면 다 해결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의 말이 가관이었다. “어찌 일반인이 쓰는 말을 논문에 써서 학문의 품격을 떨어뜨리려느냐 ? ”고 하면서 내가 나쁜 마음을 지닌듯이 감정적으로 대드는 것이었다. 남의 학문 분야의 두 얼굴을 보고서 내 마음이 매우 착잡했었다.

 

후진국에 선진국의 새 물결이 들어갈 때는 그 물건의 이름도 따라 들어 가기가 쉽다. 마찬가지로 후진국에 선진국의 학문이 들어갈 때도 그러하다. 그러나 물론 두 경우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 텔레비젼이 들어올 때는 그 말도 따라 들어오기가 더 쉽다. 그러나 우리가 草地學을 외국에서 배워 연구할 때는 그것이 풀밭이나 쇠꼴 연구이며, 애기머슴이 봄에 쇠꼴 베러 가서 어느 풀은 소가 잘 먹고, 어느 풀은 소가 잘 먹지 않는다는 생각(인식)을 더 발전시키는 연장선에서 쇠꼴이 연구되는 것이 더욱 좋은 것이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참비름이요 소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쇠비름이며, 그러나 이것은 물기가 많아 쇠죽을 쑬 때 이것을 넣으면 녹아버리므로 다른 풀을 뜯어와야 주인에게 야단을 맞지 않는다는 소박한 생각을 시골 접머슴이면 누구나 하는데, 이 생각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학문과 겨레를 연결시킨 연구이고, 겨레의 삶에 터를 둔 연구일 것이다.

 

소가 잘 먹으면 쇠꼴이요 말이 잘 먹으면 말꼴인데, 그에 따라 말의 항열을 맞추어 돼지가 잘 먹으면 /돼지꼴이라 하고, 이들을 싸잡아 짐승이 잘 먹는 풀을 이라 부르면 사람이 잘 먹는 나물과 항열이 같아진다. 이렇게 사리를 따져서 낱말의 항열을 정하면 이미 학문의 들머리로 들어선 것이다.

 

농수산부 양정국장인가를 지낸 김민환님을 잊을 수 없다. 낱말 하나를 겨레에게 보태어 주기 위해 오래도록 애쓴 분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에 이분이 우리말의 식품에 관한 낱말 항열에 빈자리가 있음을 절감했다. ‘식량, 양곡, 곡식 등 어디에도 아이스크림이나 요구르트, 술 등이 포함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모든 먹을 것을 싸잡는 (이들 말의 윗항열에 속하는) 낱말을 먹거리로 만들어서 국어관계의 여러 학회와 개인에게 물어 보았다. 어느 곳에서는 말이 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사전에 없으니 안 된다고 하고, 어떤이는 무슨 조어법에 어긋난다고 하여 이분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개념의 그런 뭉치가 필요해진 것을 그가 처음 발견했으니 사전에 있을 턱이 없고, 조어법이란 것도 단군 할아버지가 미리 정해 놓고 한국말을 정한 것이 아니며, 필요에 따라 말을 뭉쳐 만들어 놓고서 학자가 뒤따라 정리해 놓은 것이 조어법이며,  먹거리란 말이 그에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서 이를 널리 펴 왔다. 10년 가까이 이를 펴서 지금은 누구나 그 말에 익숙해져서 , ,  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먹거리라는 말을 쓴다. 더구나 , , 를 모두 ‘-거리항열에 맞추어 입거리, 먹거리, 살거리라고 할 수도 있다.

 

어느 말이건 다 그러하지만, 우리말의 접사들은 사물이나 행위나 모습에 관한 인식의 방식을 나타낸다.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 따로 없을 때는 관련되는 명사에 ‘-을 붙여 방망이질, 도둑질, 바느질 하면서 개념의 빈 터를 매꾸어 넣는다. 빛깔은 자연 그대로 (대상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때, 스팩트럼 사진의 띠에서 보듯이 연속적이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한다. ‘노랑, 파랑 따위의 말은 그 연속적 점진적 변화를 마치 비연속적 칸을 막아 놓은 듯이 재단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에 더 가깝게 말하면 표준적인(원형적인) ‘노랑이 있고 주변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말은 -, -스름-’으로 달리 표현하여 사실세계에 가깝게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샛노랗고, 노르스름하고, 누렇고, 누르스름한 것은 모두 다르다)

 

말에 대한 인식과 사랑이 깊었던 중국은 일찍이 사전을 만들었다. ‘이아, 설문해자, 석명 등은 한나라 때나 그 이전에 만들어진 말뜻사전이거나 글자사전이었다. 라틴어에 눌려 지내던 유럽의 각 겨레가 사전을 만든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프랑스의 아카데미가 제 사전을 처음 만든 것은 1694년이었고, 영국은 1623년에 영어사전이라는 것을 만들었으나 쓸 만한 사전이 1721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사전을 가지게 된 것은 1880년쯤이었는데,  한불자전은 프랑스 선교사가 우리말을 익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조선어학회가 1929년에 우리말 사전을 만들려고 준비를 시작했으나 왜정시대의 어려움 때문에 큰 사전이 나온 것은 1947년이었다. 이백 년의 차이가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다. 지금 우리가 하기 나름인 것이다.

 

매우 늦게 자각한 만큼 그 사이에 한 일도 많고 앞으로 할 일도 많다. 최근에 우리말 갈래사전, 역순(逆順)사전, 동의어·반의어사전, 속담사전, 발음사전 등이 나왔고, 연변 등지에서 의성어·의태어사전도 나왔다. 그러나 제대로 철들지 못한 이들이 만든 많은 국어사전들이 일본어사전과 한자사전을 베껴서 결과적으로 그들의 말을 옮겼다는 지적을 받곤했다.

 

앞으로 더 많은 학문분야들이 고유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고유어에 숨은 뜻을 해당 학문마다 캐어갈 것을 기대한다.

 

5. 철학과 문법학에서의 문법인식

 

미국 맥밀란사에서 나온 철학사전에는 영어의 일상어 'matter, must' 등이 많이 나오며 그에 대한 철학적 성찰들이 담뿍 담겨 있음을 본다. 여기서 철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말의 일상적 여러 쓰임을 조리있게 검토하고, 비슷하거나 반대가 되는 말과의 의미 관련을 잘 따졌다는 뜻이다.

 

낱말들은 겨레의 인식의 소산이다. 대상물이 있다고 그에 상응하는 단어가 다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계의 모든 말에는 태초부터 원자, 분자, 우라늄 등 모든 낱말이 다 있었어야 한다. 세종임금의 몸에도 목밑샘이란 홀몬샘이 있었을테지만, 그가 그 낱말을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대상물이 없어도 인식이나 생각 속에 개념이 잡히면 낱말로 태어나게 된다. 가까운 예가 선녀,  따위이다. 따라서 인식에 관한 연구를 하는 철학이 모국어나 말을 주목하게 된 것은 근세의 일인데 이는 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영어 ‘matter'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인바 우리말에서 이 말은 일상적으로 쓸 때 홀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 그 의미상 내포가 극히 적고 외연이 너무 넓은데, 보통 한정된 외연을 두고 말하는 일상어에서는 늘 한정어와 함께 쓰여야 말의 외연이 한정되기 때문이다. ‘흰 것이라고 하면 모든 질료 가운데 흰 속성을 지닌 질료로 한정되고 게다가 담론에 등장하는 사물은 미리 제시되어 있기 마련이므로, 그 담론에서 이전에 등장한 ’(질료, 사물) 가운데서  속성을 띤 몇 개를 지시하기가 쉽다.

 

이렇게 일상어로서 담론 속에 묶인 낱말을 따로 떼어 인식상의 대상물로 취급해 주는 것이 철학이다. 배달말의 철학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어에 든 이 철학사전에는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는 명제는 두 명제 제비가 낮게 날-’ 비가 온다는 명제가 조건 관계로 묶여 있다. ‘관계란 일상적 표현으로는 그 관계에 있는 여러 사실들과 함께 쓰이는 것이 정상이다. 이 일상적 쓰임에 숨은 관계라는 것을 따로 떼어 인식적 대상으로 삼으면 그것이 철학이 된다. ‘제비가 낮게 날고, 비가 온다 제비가 낮게 나니까 비가 온다 제비가 낮게 날아도 비가 온다 등에 등장하는 ‘-,-니까, -어도 뿐만 아니라, ‘-을수록, -는데, -거나 등 수 많은 이음씨끝들을 사유(생각)의 대상으로 두고 그 앞뒤 명제의 엮임관계들을 따져보고, 그 의미상의 관련들을 객관적 도표로 만들어 보는 일이 바로 관계개념에 대한 철학적 연구일 터이다.

 

철학에서 양상’(modality)의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영어 단어인 ‘must'를 우리말로는 일단 관계개념으로 나타낸다. ‘네가 가야 되겠다는 표현에서 ‘-어야는 앞과 뒤의 두 명제를 이어주고 있다. 이것을 더 자세히 표현하면 상황에 따라 네가 가야 일이 진척되겠다’, ‘네가 가야 그가 흡족해 하게 되겠다 등 뒷명제로써 더 구체적 상황을 얼마든지 의미할 수 있다.

 

여기에 우리 생각의 틀이 하나 발견된다. ‘필연성이라고 하는 것은 필연적 조건관계로 표현되고 그 뒷명제는 상황 의존성이 매우 높다. 그 뒷명제가 없다면 절대적 필연성의 표현이 되겠는데 영어와 같은 말에서조차 과연 절대적 필연성이 존재하는가 어떤가를 논의해 쌓는 것을 보면 우리말의 ‘-어야는 한국철학자들이 연구해 봄직한 주제가 아닌가 한다.

철학하는 분들이 우리말을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단지 원론의 쳇바퀴만 헛돌리고 있는 점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박종홍은 1960년에 쓴 논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말은 존재의 집이라든가, ‘말 없이는 세계도 있을 수 없다든 가하는 식의 현대 철학적 표현도 일리는 있는 일이라 하겠다. ..... 그러므로 한국사상을 연구하려면 한국말부터 연구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어휘의 정리와 비교, 문법구조상의 차이 등이 밝혀질수록 우리의 사상적 특색도 밝혀질 것이다. 우리말의 특색을 알기 위해서도 여러 외국어를 배워 비교 연구함은 둘도 없이 중요한 일이다.”

 

(“한국사상연구의 구상”, 한국사상 1,2)

 

한국사상을 한국말에서 찾으려면 말이 존재의 집이라는 언어철학을 일리는 있다는 수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현대 유럽철학은 이규호(1968:말의 힘)으로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규호는 딴 곳에서 철학의 언어는 이미 철학의 관념을 구성하는 데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나 ‘ -어야를 문법학자들은 불완전 명사나 어미라고 부른다. 일상어 표현에 나타나는 불완전함 말꼬리됨의 이유를 철학에서 살펴보고, 이를 완전하고 독립된 인식적 대상으로 삼을 때 우리의 철학이 우리 사고방식이나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잘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원론의 바퀴를 한번 더 돌리는 한계를 이 글이 지닐 수 밖에 없다.

 

우리말은 말을 엮기 위해서 의존 형태소들을 쓰는 방식을 취하는데, 여기 참여하는 형태소의 수는 무척 많다. 이런 기능요소는 단순개념을 복합개념으로, 명제를 복합명제로 더 크게 묶어 주는 사고의 연산소(演算素)라 할 것이다. 이 연산소들 낱낱에 대한 기능을 문법학자들은 아직 다 밝히지 못했다는 점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 문법학자들 일부가 한때나마 교과서 팔기의 경쟁에 뛰어 든 일은 불행한 일이었다. 상품을 경쟁의 터에 내어 놓을 때에는 뭔가가 달라야 내 물건의 존재 이유가 서게 되니 애초에 공통적 토론의 터는 있을 수 없었다. ‘이름씨가 이미 존재하면 명사 꾸러미를 꾸며야 하고, 갯수가 열개 든 종합선물 꾸러미가 이미 팔리면 아홉이 든 꾸러미를 내 놓는 것은 시장 터에서 항용 쓰는 행태이다.

 

우리말의 어순이나 어휘나 말엮기에 쓰이는 사고의 연산자들의 기본을 다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정작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생각을 더욱 조리있게 나타내게 되고 뜻을 더욱 더 큰 덩이로 잡아내게 되며, 미세한 의미차이를  다르고  다른 수준까지 알아 차릴 수 있게 만들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으면, -니까, -기 때문에 따위의 연산소들을 가지고 훈련시키는 길일 터이요, ‘이를테면, 다시 말하면, 요컨대 따위를 가지고 훈련시키는 길 말고는 달리 길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철학자와 문법학자와 교육자가 만날 수 있다. 이들이 만나 이런 사고의 연산자들에 대한 다각적 기술을 해야 우리말의 문법이 정확히 규정되고 우리의 사고방법이 발견될 것이다.

 

6. 문학에서의 총체적 인식

 

백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표현하고, 민중의 생각과 느낌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문학작품들은 이들의 말과 글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문학은 우리의 문화 전반에서 우리 말글을 가장 앞서서 인식하는 분야가 아닌가 한다.

글자가 없던 시대에도 신라노래나 고려노래는 일부 그 원형에 가깝게 전해오고 있으며, 한글이 만들어진 뒤에 나온 소설로는 한문이나 한자를 섞어 쓴 작품이 드물다. 작품의 표현이나 전달의 매체가 한글로 굳어지게 된 것은 그 생산이나 수용의 계층이 부지불식간에 상하나 귀천없이 전체 겨레까지로 확산된 것과 맞물리면서 왜정시대에 와서 대개 완성된다.

 

어휘의 측면을 보아도 문학의 확산에 따라 한자어들이 꾸준히 줄어드는 확실한 경향을 알 수 있다. 조선조에 나온 작품에는 한자어나 한문구가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것이 줄고 고유어가 계속 늘고 있다. 한자어나 그 출처인 고서’(古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우리는 장끼전에서 볼 수 있다. 모두가 먹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고패 앞에 놓인 콩을 먹으려고 하는 장끼에게 말을 이렇게 시킨다. ‘콩 먹고 다 죽을까? 고서를 볼짝시면 콩 태()자 든 이마다 오래 살고 귀히 되느니라. 태고적 천황씨는 일만 팔천세를 살아 있고, 태호 복희씨는 풍성이 상승하여 십오대를 전해 있고, 한 태조, 당 태종은 풍자세계 창업지주 되었으니 오곡 백곡 잡곡 중에 콩 태자가 제일이라. 궁 팔십 강태공은 달 팔십 살아있고 시중 천자 이태백은 기경상천하여 있고, ... ...’ 이렇게 허풍을 떨다 고패에 걸려 죽게 되는 데 이르면 고서나 그 말들은 한낱 웃음거리로 내려 앉고 마는 것이다. 김삿갓이 나타나 앞시대까지 숭앙하여 마지않던 한문시를 가지고 말장난(게그)을 벌이는 것도 거의 같은 시대이다.

 

낱말들은 민중의 삶과 앎의 도구로 쓰이는데, 한낱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학자나 철학자나 아무도 거두어 주지 않았다. 홀로 문학에서 이 말들이 거두어져서 기록되고 계승되어 왔으며, 그것을 사전 편찬자들이 정리하게 되었으니 문학의 공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특히 최근에 와서 우리 문학이 광대나 객주 등 서민의 삶에 한발 더 다가서면서 이들의 말들이 겨레의 유산으로 등록됨을 본다.

 

7. 우리 문화의 내면화를 위하여

 

겨레라는 자연스런 삶의 동아리가 통시적으로 옛것을 잘 지니어 이제를 새로이 하고 공시적으로 소속 성원들 사이에 생각과 느낌을 더 잘 소통하면서 사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쉬운 글자, 쉬운 낱말을 찾아 쓰자는 것은 그것들로 이루어지는 문화적 유산에 전체 겨례가 더욱 쉽게 접근하도록 하는 데에 뜻이 있다. 번역된 난중일기를 읽고서 그것을 쓴 사람의 행적을 우리가 이해함은 물론, 조선시대의 무관의 사교가 어떠하였는지, 당시의 국경일은 어떠했는지, 당시의 관청근무는 어떻게 했는지 하는 삶의 보다 큰 테두리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국가 경영의 틀인 경국대전의 번역판을 읽으면 당시 국가를 경영한 테두리와 함께 나라 운영 전반 뿐 아니라 그 체제 속에 사신 내 할아버지의 삶이 어떠했으리라는 구체적 사실도 더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리 국민 모두가 내 겨레, 내 나라, 내 문화를 주체적으로 이해할 때, 각자 성원은 진정한 나라나 겨레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쉬운 글자와 쉬운 낱말을 쓰자는 것은 문화를 이루는 중간과정의 쓸데 없는 부담을 덜어서 더 큰 문화를 알차게 생산하는 곳에 쓰자는 데 뜻이 있다. 친구 부모의 회갑잔치에 가서 그분의 삶을 기리는 시조나 한 마리 지어 드리고 오는 생활을 우리 모두가 할 수는 없을까? 가족이나 친척의 죽음을 당하여 그 삶의 의의를 뜻매김하고 내 슬픔과 상실감을 글로 적어 올리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 겨레의 삶이 한층 더 가멸고 의미있게 될 터이다.

 

상례 때 고인을 보내는 마디마다 올리는 축문은 그것을 만들 때는 다 뜻이 있었을 터이고, 해마다 지내는 조상의 제사에 올리는 축문도 다 그러할 터인데 지금은 그 속에 들어있던 뜻은 죽고 한갖 의식의 껍질로 남아 있을 뿐이다.

 

개인의 삶의 여러 마디들, 태어나서 이름짓고, 혼인하고 회갑하고 죽고, 제사지내는 모든 일들에 삶의 의미들을 우리가 부여하고 부여받고 하면서 살면 한번뿐인 인생을 더 가치있게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식이 깬 문화인으로 살려고 하면 이렇게 개인 생활의 주변부터 글살이를 잘 해야 할 것이다.

 

다행이 가족신문이 많이 나오고 있고, 문중의 뿌리찾기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자신이 생기고 내 삶과 내 가족의 삶에 대한 자신과 의식이 커지는 증거가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은 해마다 육천 종에 이르는 잡지가 발행되고, 약 삼만 권의 신간 서적이 간행된다고 한다. 회사와 직장의 동아리들이 생각과 느낌을 활발하게 교환하게 되고, 새로운 문화가 활발하게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크게 볼 때, 우리 말글을 가장 일찍 찾아 써야 할 몇몇 전문분야를 빼고는 모두 구슬의 갈고 닦기를 거의 다 이룬 듯하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될 것이다. 우리 겨레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고, 교육의 조직 또한 막강한데, 나는 여기에 기대를 걸어 본다. 쉬운 낱말과 한글로 된 정보체들을 국민학교에서부터 중·고등학교나 대학에 이르기까지 그 난이도와 생활에의 접근도에 따라 구분지어 많이 읽히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게 하여야 될 것이고 이 일에 모든 교과가 다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의 이세들이 하나같이 가족사이의 삶의 자취 남기기와 참뜻 캐기를 더 잘 하게 될 것이고, 맡은 바 일을 적어 서로 정보와 정분을 깊이 맺으며 우리 문화를 크게 빛내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세계의 문학 73 (1994 가을)>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