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한국말과 한국인의 마음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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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과 한국인의 마음 / 조 명 한(서울대 심리학)

 

1. 사람에게는 사람만의 고유한 삶의 울타리가 있다. 바깥 세계와 접촉할 때에 우리는 바깥 세상을 사진을 찍듯이 그대로 베껴서 지각하지 않는다. 앞에 있는 책을 바로 앞에서 보면 그것은 우리 눈의 망막에 네모로 비친다. 그러나 비스듬히 보면 그것은 사다리 꼴로 비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늘 네모꼴로 지각한다. 이렇게 사람은 수동적으로 바깥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창조적으로 다시 엮어 지각한다.

 

2. 우리의 개념 세계에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은 바깥의 대상을 지각하고 그것을 어떤 틀에 따라 갈라서 인지한다. 이를테면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하나의 틀로 묶어 개념화한다. 전보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편지와 같은 개념으로 짤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지의 특성은 종족마다 특수하다고 한다. 사람은 박태기 나무와 도라지를 다른 묶음으로 개념화할 수가 있으리라. 말하자면 환경에서 얻어진 감각 재료를 엮어 짜는 방식에 사람과 개가 서로 다르다.

 

3.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만의 고유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됨의 신비이기도 하고 제약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사람의 울타리는 대개 말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이다. 사람만이 말을 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로 서로 뜻을 통할 수 있는 동물도 있기는 하다. 침팬지에게는 몇 마디 낱말을 가르칠 수도 있고, 이들은 터득한 낱말들을 두세 개 엮어 낼 줄도 안다. 그러나 침팬지가 낱말들을 엮는 방식은 마구잡이이지 거기에 무슨 규칙이 있지는 않다. 이와는 달리 사람은 끝없이 긴 문장을 들을 때에도 그것을 엮어 내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말과 동물의 말은 그 구조가 다르다고 하여야 옳다. 차라리, 동물의 말은 말이 아니고 한낱 감정의 표현일 뿐이며 행위를 이끌어 내는 신호의 구실을 할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4. 무엇보다 사람 말의 특징은 그것이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삶의 방식과 생각에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에 있다. 말이 없다고 생각 자체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 없는 생각은 마치 모양이 없는 그림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빛깔의 뒤범벅을 보고 구조를 갖추었다고 할 수가 없듯이 말이 없는 생각은 테두리도, 목표도 길도 없다고 할 수가 있다. 그것은 뜻이 있는 생각이 아니라 느낌만이 있는 생각이다.

 

5. 말과 생각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어린이를 관찰해 보면 쉽사리 알 수가 있다. 어린이는 두세 살쯤이 되면 자기 나라의 말을 거의 완전하게 터득한다. 과학자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침팬지에게 말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이는 봉오리에서 꽃이 터지듯이 말을 하게 된다. 이 때의 어린이들에게는 말이 곧 생각이며 생각이 곧 말이다. 혼자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린다. 그 또래의 동무들이 모여 있을 때에는 저마다 무슨 이야기든지 해 대며 법석을 떤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생각을 남에게 이해시키려는 태도가 아니라 마치 연극에서 독백을 하는 배우와 같은 태도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어린이의 말을 자아 중심의 말이라고 한다.

 

6. 자라서 일곱 살쯤이 되면 어린이의 말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어려운 문제나 난처한 상황에 부딪치면 말을 머금고 곰곰이 궁리할 줄을 알게 된다. 말이 밖에서 속으로 들어가서 작용하게 된다. 속에서 말로 생각하여 그것을 바깥 말로 표현한다. 바깥 말은 생각의 전달 수단이 되어 객체가 되고 속내말은 생각의 길잡이가 되어 주체가 된다.

 

7. 속내말에서야 비로소 생각과 말은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다. , 말은 생각이 없이는 죽은 물건이며, 생각은 말로 모습이 주어지지 않고서는 그늘에 묻혀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의 신비는 바깥 세계를 인식하고 개념화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영어나 러시아어가 아닌 한국어를 쓰며 산다. 따라서 우리의 우리됨을 우리는 우리말의 특성에 찾아야 한다.

 

8. 가장 흔히 들추어지는 우리말의 특징은 주어가 생략되고 서술부가 중심이 된다는 데에 있다. 주어 가운데서도 특히   1 2인칭이 쓰이지 않는 보기는 아주 잦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따위의 표현에서처럼  를 돋보이면 오히려 우리로서는 거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반드시 1인칭과 2인칭에서만 생기지는 않는다.

 

(1) . 추워요. . 날씨가 추워요. . 내가 추워요.

 

이와 같이 삼인칭 주어도 곧잘 빠진다. 이 때문에 흔히 우리말이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9. 그런데, 대개의 문법 연구자들은 우리 말에서 주어가 겉으로 씌어지지 않았을 따름이지 본디는 주어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변형문법 이론에 기대면, 우리가 실제로 쓰는 말이나 글은 겉으로 떠오른 표면구조일 따름이다. 그 밑바닥에는 심층구조가 있어서 여기에는 반드시 주어가 있다는 주장이다. 다만, 심층구조에서 표면구조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지워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박 창해는 한국어가 논리의 바탕에 어긋난다는 비판에 맞서, 심층구조에서는 그대로 주어가 있으므로 이러한 비판은 맞지 않다고 하였다.

 

10. 그러나 문장의 심층 구조에서조차 반드시 주어가 있어야만 한다는 가정은 그 가정 자체가 매우 의심스럽다. 분트(Wundt)의 언어 심리학에서는 문장을 전체 표상이라고 뜻매긴다. 보기를 들면, “추워요.”라는 문장의 표상은 춥다라는 느낌이 그 모두이다. 이것에 구태여 내가 춥다이든지 날씨가 춥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논리의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 때에 나의 심리적인 현실에는 춥다라는 느낌의 표상만이 있을 뿐이다. 구태여 내가 추워요.”, “날씨가 추워요.”처럼 표현하는 것은 나의 심리적인 현실에 주어진 것을 다시 형식 논리로 판단하여 정리한 결과일 따름이다.

11. 말을 갓 익히기 시작한 어린이들은 곧잘 주어를 쓰지 않는다. 이 현상은 어느 나라의 어린이 말에서나 두루 보인다. 대체로 어린이 말은 심층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에는 반드시 주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말의 심리적인 현실에는 주어가 없는 경우가 흔한 듯하다.

 

12. 우리말이 술어 중심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자주 주어가 쓰이지 않고 서술부만이 말하여 진다는 뜻 말고도 몇 가지 다른 중요한 특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선 의성어와 의태어가 풍부하다.

 

(2) 밴둥밴둥 거리지만, 제할 일은 다하는 사람이야.

 

13.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음성상징성이라고 일컫는다. 소리 속에 대상이 지닌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말하자면 소리와 뜻이 하나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14. 음성상징성은 대체로 입안의 혀의 위치로 말미암아 소리가 뜻을 지닐 수 있음을 말한다.  반둥반둥, ”핀둥핀둥의 소리를 낼 때에 입을 벌린 모양의 크기와 소리의 여림과 강함이 갖다 주는 뜻이다. 이것은 곧 근육운동의 의미이기도 하고 공감각의 의미이기도 하다. 한쪽으로는 몸의 움직임 자체가 뜻을 지녀 가짐이요, 다른 쪽으로는 촉각을 거친 감각 내용을 귀로도 더불어 들을 수 있고 혀로도 맛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부드럽다는 촉각 내용을 소리로서도 들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야말로 말과 뜻이, 그리고 형식과 내용이 함께 어울린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다.

 

15. 서술부 중심의 우리말이 가진 이 밖의 특징은 문장 안에서 낱말들이 놓이는 차례가 자유롭다는 점과 토씨나 다른 접미사가 다양하게 쓰인다는 점에서 찾을 수가 있다. 이러한 특징은 실제로 모든 첨가어에서 보이는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영어에서는 낱말의 차례가 문장의 뜻을 크게 결정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말하는 이가 자기 속마음으로 무엇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낱말들의 자리를 자유롭게 바꿀 수가 있다. 여기에 토씨나 접미사가 덧붙기 때문에 뜻은 더 미묘해지고 장황해지게 된다.

 

16. 이것은 박 창해는 첨가적 우회형이라고 일컬었다. 말하자면 밴둥밴둥 거리지만, 제할 일은 다하는 사람이야.” 라는 말에서 지만이 덧붙여지고 그 다음에 다른 구절이 뒤를 이음으로써 생각을 엉뚱하게 돌린다는 뜻이다. 이 규호는 이것을 현상을 바뀌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여기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려는 사고방식이라고 하였다. 지 준모는 특히 음성 상징성을 들추어내어 시적이고 예술적이라고까지 특징지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무엇보다 우리 말이 사람의 심리적인 현실을 가장 잘 비추는 말임을 집어내고 싶다.

 

17. 물음에 따른  아니오의 대답이 한국어와 인도 - 유럽에서 서로 다름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말에서의  아니오의 대답은 물음의 형식에 그대로 따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보통 결정된다. 다시 박 창해의 글에서 보기를 끄집어내겠다.

 

(3)

. “이것이 연필입니까?”, “.”

. “이것이 연필입니까?”, “아니오.”

. “이것이 연필이 아닙니까?”, “.”

. “이것이 연필이 아닙니까?”, “아니오.”

 

가와 나에서는 우리말과 인도-유럽 말과의 사이에 차이가 없다. 그런데 다의 완전한 대답은 , 연필이 아닙니다.” 이고, 라의 그것은 아니오,연필입니다.”이다. “와 부정이 또 아니오와 긍정이 함께 있을 뿐더러 형태가 영어에서와는 반대이다. 영어에서는 대답하는 사람이 객관적인 처지에서 판단한 사실에 따라서  아니오를 말한다.

18. 박 창해는 앞의 보기에 따라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묻고 대답하는 꼴을 구조적 상승형 이라고 특징지었다. 그러나 사실은 반드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것을 장 석진이 보기로 명료하게 보이고 있다.

 

(4) 어제 내가 김 사장한테 말하지 않았오?

(5) . , 회장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아니요, 저에게 회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6) 

. , 말씀 안하셨습니다.

. 아니오, 말씀 안하셨습니다.

 

앞에서 우리말에서는 묻고 대답하는 방식이 질문을 주로 하여 결정된다고 하였는데 이 규칙에 맞는 대답은 (5)의 나와 (6가이다. (5가와 (6나는 이 규칙에 어긋난다. 이들 뒷것은 묻는 이가 (4)의 물음을 중립의 태도로써 사실을 알고파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했다.”라는 것을 앞세워 물을 때에 나오는 대답이다. 또는 듣는 이가 말하는 이의 물음이 말했음을 앞세우고 있다고 판단할 때에 나오는 대답이다.

 

19. 우리는 말하는 이와 듣는이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본다. 그런데 인도-유럽 말을 쓰는 사람들은 이 관계를 떠나서, 마치 제 삼자의 처지에서는 것처럼 가정하고 묻고 답한다. 서로가 남이라는 것을 억지로라도 지켜서 되도록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결코 서로 남남이 아니다. 이 두 사람의 사이는 온전히 우리의 관계이다. 나아가서 말이 통하고 정이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전부 우리가 된다. 심지어 무남독녀도 자기 어머니를 우리 엄마 라고 하고 꽁생원도 자기 부인을 우리 여편네라고 말한다.

 

20. 그러므로 우리들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들 사이의 마음이요, 우리가 있는 상황이요, 말이 오고가는 문맥이다. 대화에서의 문맥의 중요성은 국어의 말의 수준과 서법에서 더욱 돋보인다.

 

21. 다시 장 석진의 보기를 들어보자.

 

(7) 

. 미아는 매일 가 -,<>

. 지금 비가 오고 있 -<>, <>

. 미아는 자고 있 -<>, <>

. 미아는 그 돈을 갚아주 - 겠어, , 

 

여기에서는 말할이와 듣는이의 관계에 따라 단정, 의문, 명령, 권유의 서법을 공손, 추측, 감탄, 회상, 약속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말하는 이가 듣는 이를 어떻게 대접하는지를 표시하며, 더불어 듣는 이의 감정과 반응을 결정하게 된다.

 

22. 이규호가 국어를 술어 중심의 말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말의 수준과 서법이 여러 가지임에 그 까닭이 있다. 마틴이라는 서양 학자는 한국말과 일본말의 경어법에서 한국말의 이 특성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 분야에서의 경어법의 연구는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최현배는 우리 말본에서 경어법의 수준을 (1) 아주높힘(합쇼꼴), (2)예사높임(하오 꼴), (3)예사낮춤(하게 꼴) (4)아주낮춤(하로 꼴)으로 나누고 이밖에 (5)반말꼴을 따로 마련하였다. 한창기는 우리말 경어법의 역사를 따로 훑으면서 한국말이 알타이 말에서 떨어져 나온 뒤로 독자적으로 발전된 것이며, 사회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분석하였다.

 

23. 국어에서는 너와 나의 관계가 우리의 우리됨에 가장 큰 구실을 하는 듯하다. 생활하면서 우리는 말에서 빚어지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자주 보게 된다. 말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으며,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면서도 잡수세요.”하지 않고 먹거라.”했다고 뺨을 맞는 수도 있다. 우리 대화에서는 아예 너와 나의 만남의 문맥을 바로 보지 못하고서는 말의 잔치에 끼일 수조차 없다.

 

24. 오우프의 언어상대성 이론은 인디언 언어를 연구하여 인도-유럽 말과 비교하여 얻어진 업적이다. 그는 시간과 수개념 및 시간개념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봤다. 유럽 말에서는 복수의 표현이 실수와 허수로 나누어진다. , “열 사람이라는 복수 개념은 사람 열명을 객관적으로 지각한 내용이다. 그런데 열 날들(열흘)”이라는 표현은 상상에 따라서 짜인 것이다. 본디 시간은 수레바퀴가 돌 듯이 돌고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서구인들은 시간을 양으로 셀 수 있는 개념으로 객관화하거나 대상화한다.

 

(9) 그들은 열 날들 머물렀다.

(10) 그들은 열 한째 날이 오기까지 머물렀다.

(11) 그들은 열흘 머물렀다.

 

위에서 (9)는 영어에서 있을 수 있는 표현이고, (10)은 호피-인디언 말을 억지로 국어로 옮긴 것이다. 호피 말에서는 허수의 복수 표현이 없다고 한다. 우리말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나 (11)의 글월은 우리말인데도 오히려 (10)과 비슷하다. 시간이란 흐르는 물과 같다는 것이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이다. 그런데도, 서구인은 시간과 날짜를 달력에서처럼 하나하나 줄을 긋듯이 대상화하여 말로 표현한다. , 말의 굴레 때문에 시간을 토막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25. 따라서, 인도-유럽 말의 때매김은 세 갈래로 나눠졌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시간이 갈라져 객체화되어 있다. 오우프의 분석에 따르면, 호피 말에는 때매김이 세 갈래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우리말에서도 이것이 맞지 않다는 이들이 많다. 박창해는,

 

(12) 

. 그이가 일을 다 마치었다.

. 그이는 내일도 오겠지.

. 이제는 그 일을 다 마치었겠다.

. 그이가 내일도 오시었으면 좋겠다.

 

이와 같은 보기를 들고 “-은 과거, “-은 미래, “-았겠은 미래 완료의 시제라는 나눔에 반대하고 위의 것들이 저마다 완료, 추정, 완료 추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규호도 생각이 같아서,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억과 이룩된 전승으로서 현재에 살아 있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 아니라 희망, 기대, 또는 계획으로서 현재에 살아 있다는 주장을 폈다.

 

26. 오우프는 명사의 유목도 이와 비슷한 성질로 분석하였다. 인도-유럽 말에서는 명사를 개체 명사 또는 보통명사와 집합명사로 나눈다. 앞것은 나무나 사람 따위이며, 뒷것은 물이나 모래 따위이다. 그런데 유럽 말에서는 이 모든 사물들을 한정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으며 얼마만한 크기의 몸뚱이를 갖춘 것으로 친다. 이를테면 물 한 그릇”, “커피 두 잔이라는 표현을 쓴다. 물의 양뿐이 아니라 물의 모양까지 말로 표현한다. 오우프가 들추고 있는 재미난 보기가 서구인의 몸짓이다. 우리에게 의태어가 많듯이 서구인에게는 몸짓이 풍부하다. 눈앞에 있는 사물이 아니고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에 부딪치면 이것이 더욱 두드러진다. ,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표현할 때에 두 팔을 모두 휘두르면서 이렇게 굉장하게, 그리고 어떠 어떠한 모양으로 사랑한다는 표시를 한다.

 

27. 오우프는 이들 표현을 미국 인디언 언어와 비교하고 있으나, 한국말과 비교하여도 좋을 것이다. 우리 말에서 들춰지고 있는 특징 가운데의 하나가 복수 개념이 모자람이다. “물이 많다.”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가 많다.”라고 표현한다. “그 집 정원의 나무가 좋아.”라고 할 때에 어떤 한 그루의 나무가 좋다는 것인지 또는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모두 좋다는 것인지를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다. 여러 그루의 나무들도 하나의 범주로서의 나무이고 어떤 양의 덩어리로서의 물도 하나의 범주로서의 물이다. 모두 집합적으로 친다.

 

28. 오로지 예외가 있다면 자기와 관계 있는 사람의 표현에서나 찾을 수가 있다. 우리는 올케를 그 여자라고 결코 부르지 않으며 자기 형제를 일반 사람의 유목에 웬만해서는 포함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나와 관계 있는 사람은 하나하나 관계를 특별히 갈라내어 가리켰다. 앞에서 들추었듯이 너와 나의 관계 또 우리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면 대체로 우리말은 사물을 잘게 나누는 데에 약하다. 오히려 이들을 종합으로 또 전체로 파악하는 데로 기울어진다.

 

29. 어떤 언어가 더욱 논리에 맞고 과학에 바탕을 둔 것이냐의 논의는 자칫 독단론에 빠지기 쉽다. 지나친 일반화는 과학을 미신으로 이끄는 악덕이다. 우리의 언어 표현은 두리뭉실해서 혼합 주의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인도-유럽 말에서도 또다른 논리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언어 상대성이란 이름은 언어가 인식에 대하여 상대적이란 뜻에서 붙여진 것이기도 하려니와 유럽 사람은 유럽 말 때문에 뉴톤의 개념 세계에서만 살 수가 있고 아인슈타인의 세계에서는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빗대어 붙인 이름이다. 인도-유럽 말에서는 몸뚱이와 테두리를 가진 사물과 몸뚱이가 없는 질료로 현실을 분석한다. 그러나 우리 말에서는 모든 것을 일원론으로 파악한다.

 

30. 깁슨 이라는 서양 학자는 시각장과 시각 세계를 나누어 놓았다. 우리가 기차 길을 바라보면 그것은 멀어질수록 두 선로의 폭이 좁아져서 끝내는 합쳐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두 선로가 서로 나란한 것을 지각한다. 앞의 개념적인 체험을 시각 세계라고 부른다. 깁슨에 따르면 시각장과 시각 세계는 사실의 두 가지 다른 모습이다. 그 둘이 다 우리의 현실이다. 마음가짐에 따라 이것도 체험할 수가 있고 저것도 체험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객관화와 주관화 사이의 이동이다.

 

31. 언어는 우리의 감각 재료를 우리의 체험이 되게 하는 역동적인 체험이다. 사람이 대상을 지각하고 개념화한 내용에 말이 딱지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말은 작용한다.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나무가 나무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말이 있음으로써 나무를 풀과 같은 개념으로 묶기도 하고 또는 나무와 풀이 저마다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도 있다. 나아가서 우리의 체험은 시각장으로 이끌기도 하고 시각 세계로 이끌기도 한다.

 

32. 이러한 관련 속에서 이 글은 다른 이들이 국어의 특성이라고 들추어낸 것들을 간추려 우리말이 우리 생각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를 살펴보았다.

 

33. 우리말은 심리적인 현실을 매우 잘 드러내는 말이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알맹이는 너와 나가 앞세우고 있는 문제이다. 우리말의 논리는 주관성에 있다. 주체의 체험에 직감적이고, 밖에 있는 사물이나 사건을 객관화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다.

 

34. 말하자면, 시각 세계에 알맞는 언어 체계이다. 따라서 자칫 우리의 개념 세계가 시각장에 소홀하거나 너와 나 사이에서 우리라는 의식이 행여 망가지면, 의사 소통에 큰 혼란을 빚을 가능성이 짙다. 이에 견주어서 인도-유럽 말은 시각장에 알맞게 그들의 생각을 이끌어 갈 가능성이 짙다. 이들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자기가 몸소 겪어 아는 눈 앞의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어 분석한 환원된 대치물을 보기가 십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어를 통해서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로 보고 안다. 그것이 소재와 책임이라든가 원인과 결과보다는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가 더 중요하게 체험된다. 한국말의 논리는 ㄱ이 ㄱ이지 ㄱ이 아닌 것이 아니라는 형식적이고 분석적인 논리가 아니라, 나와 너의 일원론적이고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논리이다.

 

35. 말과 생각을 서로 얽히어 바깥의 대상을 나누거나 바꾸어서 개념화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기도 하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제약이기도 하다.

 

36.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울타리가 있어야 하지만, 이 울타리 속에서만 사는 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의 삶이다. 하기야 사람은 사물 자체를 아예 알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럴수록 적어도 시각 세계와 시각장을 쉽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

37. 판에 박히는 것이야 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인 것 같다. 언어로 하여금 개념 세계를 어느 한쪽으로만 이끌도록 강요하면, 우리의 체험은 사실의 반쪽밖에 보지 못한다. (뿌리깊은 나무 1976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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