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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이 석거친 날에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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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이 석거친 날에

 

 

 

눈보라가 뒤섞여 몰아치는 날에 북쪽 심양에서 온 사신에게 묻노라.

(볼모로 끌려 가 계신) 왕세자의 낯빛이 얼마나 추워하시던가?

고국에서 죽지 못하여 살고 있는 외로운 신하는 (서럽고 안타까움에) 눈물을 금치 못하고 있노라.

요점 정리

지은이 : 이정환(李廷煥)

갈래 : 평시조, 연시조

성격 : 우국적

표현 : 도치법

제재 : 소해용안(小海容顔), 소현세자를 걱정하는 마음

주제 : 국치(國恥)에 대한 비분강개(悲憤慷慨), 볼모가 된 두 왕자에 대한 염려. 우국 충정

출전 : 송암유고(松巖遺稿)

내용 연구

풍셜 석거친 날에 : 바람과 서리가 뒤섞어치는 날에. 당시 병자호란을 겪은 뒤의 참담한 상황을 암시하고 있음

북래 사자(北來使者) : 왕세자 등이 볼모로 잡혀 가 있던 청(淸)나라의 심양에서 온 사자(使者)를 말함

소해용안(小海容顔) : '소해(小海)'는 왕세자를 뜻하며 '용안(容顔)'은 얼굴의 높임말

언매나 : 얼마나

치오신가 : 추우신고

이해와 감상

 

병자호란의 국치를 당하여 비분강개(悲憤慷慨)한 나머지 지은 '悲歌' 10수 중 둘째 수로, 볼모로 끌려 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의 신변 염려와, 비참한 국치(國恥)를 보고도 나라를 위해 죽지 못한 처지를 한탄하는 우국 충정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중장의 '小海'는 원래 우리 나라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두 왕자를 가리키며, '孤臣'은 자신을 가리킨다.

초장과 중장에서 작가는, 눈보라 치는 겨울에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에게, 청나라에서 소현세자가 추위에 얼마나 고생을 하고 계시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신하된 처지로서 세자의 이 같은 고생을 보면서도 차마 죽지 못하는 자신을 힐난하면서 비통한 감회를 표현했다.

심화 자료

이정환(李廷煥)

 

1619-1673 생몰, 효종, 현종 때의 학자. 시인. 호는 송암(松巖). 인조 11년(1633)에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병자호란의 국치(國恥)를 보고 벼슬을 단념하고,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비가(悲歌)' 10수가 한역시(漢譯詩)와 함께 그의 문집에 전한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광해군 4)∼1645(인조 23). 조선 후기의 왕자. 이름은 왕(搜). 인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領敦寧府事 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 (仁烈王后)이다.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했으며, 그 해에 참의(參議)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과 혼인하였다.

이원익(李元翼)·장유(張維) 등을 빈사(賓師 : 세자시강원의 1품관)로 맞아 왕자의 덕을 닦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겨 청나라에 항전하려 했으나, 청군의 빠른 남하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 3월과 1644년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의 그는 단순한 질자(質子)가 아니라 대사(大使) 이상의 외교관 소임을 하였다.

즉,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무리한 물자를 요구하면 그를 막으려 노력도 하였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일을 인조가 병중이라서 담판할 수 없다 하여 세자의 재량으로 처리하도록 강요를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세자는 본국에서는 무력한 존재이나, 심양관에서는 조청(朝淸)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였다. 때문에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격이 되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644년 9월에 북경(北京)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J.A., 일명 湯若望)과의 친교로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전래하는 등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집권과 함께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듯하다.

특히, 소현세자는 300명이 넘는 시강원 관원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과 영합하면서 막대한 경비만을 국고에 부담지웠다. 또 때로는 사무역(私貿易)을 자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위로 인조에게 친청적인 인물로 보였으며, 후계자로서 부적격하다고 간주된 듯하다.

게다가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 심양관에서 세자의 과도한 영리 추구는 잠도역위(潛圖易位 : 세자가 인조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공작) 또는 세자를 대신하여 인조를 청에 입조시키려는 공작이라고 모함하였다.

그리하여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을 보내 세자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세자는 9년 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환영보다는 냉대였으며, 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도 못하게 막아버렸다. 세자 일행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과 물자도 인조의 노여움을 가중시켰다.

그는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그 해 4월 23일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26일에 급서하였다. 이와 같은 세자의 급서는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책임이라 하여 엄벌을 요구하였다. 이형익은 조소용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한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은연 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그 하수인으로 이형익을 지목하고 있는 느낌을 주게 한다.

그 뒤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민회빈은 물론 두 아들과 그의 친정식구, 그리고 세자빈과 친했던 많은 궁녀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세자를 죽인 장본인은 바로 인조일 가능성이 높다.

사후 소현(昭顯)으로 증시(贈諡)되었으며, 이식(李植)이 그의 묘지(墓誌)를 썼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했으나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瀋陽狀啓, 瀋陽日記, 澤堂集, 典故大方, 昭顯世子硏究(金龍德, 朝鮮後期思想史硏究, 乙酉文化社, 1977), 朝鮮西學史硏究(李元淳, 一志社, 1986), 昭顯世子と湯若望-朝鮮基督敎史硏究 其四-(山口正之, 靑丘學叢 5, 1931), 瀋陽考(田川孝三, 小田頌壽記念 朝鮮史論集, 193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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