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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기도 / 헤르만 헤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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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기도 / 헤르만 헤세


사랑하는 벗이여! 알 수 없는 약속과 위협을 가지고 새해는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지금은 새해의 한밤중, 이 시간은 우리들이 언제나 생활하고 있는 시간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제전(祭典)처럼 축하하고, 그것도 엄숙한 제전으로서 축하하고 있다. 이렇게 축하한다는 것은 올바른 것이다. 왜냐 하면, 한 시간이나마 속된 일상 생활에서 물러나서 반성, 자기 비판, 청산이나 명상의 기회를 얻는 다는 것은 소란스럽고 빈곤한 생활에 있어서 혜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은 유수처럼 흐르고 인생은 허무하며, 인간의 사업이란 무상하기 짝이 없다. 그 점을 생각해 볼 때, 가령 슬픔에 잠겨서 고민하든지, 또는 대담무쌍하게 기쁨에 날뛰며 생각하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들에게 정화(淨化)와 시련을 준다. 그것은 오늘날 이러한 혼란 속에서 마치 음차(音叉)를 때려 진동시킬 때처럼 용서없이 맑고 쟁쟁하게 울릴 것이다. 동시에 우리들 마음은 깨끗한 마음의 속삭임을 통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세계의 조화를 위하여 지켜야 할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가끔 음차를 울린다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그 소리를 듣고 우리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자존심을 손상당하는 것도 역시 좋은 일이다.

그리고 이번에 맞이하는 즐겁고, 아직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새해는 특별히 중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전투와 파괴의 긴 세월이 흐른 다음, 처음으로 맞이하는 새해의 밤이 우리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들은 지금 '평화'라는 말을 아직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다. 또, 물론 우리들은 아직도 익숙하지 못한 정온(靜穩)에 대해서 불신을 가득 품고 있다. 그러나 이 평화의 허무성과 위험성에 대한 우리들의 모든 불신과 우려는 세계와 우리들 자신에게 반성의 눈길을 모아서 이 아름답고 불안스러운 시대의 제단에 우리들의 희생을 바치는 일을 도와 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우리들은 몇해 동안이나 항상 정다운 개인으로서의 세월, 사람다운 시대, 인간의 생활을 체험하지 못하고 '세계 역사'를 체험하는 데에만 익숙해 왔다. 그리고 소위 '위대한' 시대가 지나간 뒤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이 세계 역사에 대해서 커다란 전율과 구역질을 참을 수 없다. 우리들이 어린 초등 학교 아동이나 소년이었을 때, 세계 역사라는 말은 언제나 화력하고 믿음직스러운 의미로 들렸는가. 교과과정에 따른 교과서나 그림만을 보고 알고 있었던 이 훌륭한 세계 역사를 진정으로 자기도 체험하고, 함께 참여해 보려고 얼마나 동경했었던가! 아아, 그런 것을 동경하는 사람은 이제 한 사람도 없다.

우리들은 비참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실의 세계 역사라는 것은 결코 학교 교과서나 삽화가들의 화련한 그림이 아니며, 위대한 행동을 연결한 진주(眞珠)구슬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고뇌의 홍수이며 큰 바다이다. 얼마나 우리들은 저 위대한 시대라든지, 또 모든 세기를 두고 이루어진 최대의 해전(海戰)·육전·공중전이며, 그리고 이 무서운 사건에 대한 기록의 요괴적 선동으로 말미암아 지긋지긋하게 시달렸던가!

그러나 세계 역사도 인생이나 인도주의의 경우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세계 역사 속에서 우리들은, 대체로 세계 역사라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않는 시대를 가장 아름다운 시대라고 배운 것처럼, 누구나 사적인 생활에 대해서도 폭풍처럼 거친 생활보다도 조용하고 조화를 갖춘 생활을 더 달갑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차츰차츰 깨닫게 되었다. 다만 그런 경우에 있어서, 우리들이 사물을 측정 평가하는 표준이 되는 것은 어떤 철학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우리들 개인의 행복관이다. 이것은 비영웅적이며 평범하고 통속적이지만, 그것으로써 어떤 뜻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그것은 정당한 일이다.

행복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그러나 허무하게 시들어 버리기 쉬운 꽃이다. 아마도 세계 역사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정말로 태평 무사하고 선망의 목표가 된다고 생각되는 희유(稀有)의 절박한 시대는 세계 역사라는 고민을 통하여, 그 피와 눈물의 큰 흐름을 걸고서 쟁취되지 않으면 안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영웅적인 죽음의 지옥과 역사에서 버림받은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 이 두 가지밖에는 선택할 것이 없다면 대체 우리들은 무엇을 가지려고 원할 것인가?

이런 일은 아무리 오랜 동안 생각해 보아도 결국 아무런 해답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인류의 위대한 사도들이 발견하고 가르쳐 준 것을 이제 완전히 잊어버렸다. 사도들은 몇천 년 이래 모두 똑같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모든 신학자, 모든 인도주의적인 교양을 갖춘 사람들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뚜렷하게 단언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가령. 그가 소크라테스나 노자(老子)에게, 또는 고민을 억누르고 오히려 미소를 띠고 있는 불타(佛陀)에게, 또는 가시관을 쓴 예수에게 더 많이 기울어지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사도들, 모든 현자들, 인도주의의 각성자, 광채를 띤 사람, 참다운 지식인, 그리고 교사들은 모두 같은 교훈을 주었다. 즉, 인간은 결코 위대한 것, 행복, 영웅적인 것, 감미로운 평화까지도 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들은 아무것도 소원해서는 안 된다. 단지 맑고 각성된 정신, 대담한 마음, 성실성과 인내의 지혜를 갖도록 원하는 것이 좋다. 왜냐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행복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정온(靜穩)과 동시에 소란까지도 참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런 좋은 천성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발생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신에게서 나왔다. 그것들은 우리 모두 속에 뿌려진 신의 불꽃, 바로 그것이다. 우리들은 그 불꽃을 매일같이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그것을 오랜 동안 느끼지 않을 때가 종종 있으며, 완전히 잊어버릴 때도 있다. 그러나 우연한 한 순간이 갑자기 그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준다. 때로는 공포와 절망의 찰나. 때로는 한없이 행복하고 조용한 순간이 그렇다. 또, 꽃받침 속을 들여다보는 눈초리. 단지 한두 박자 귀에 들린 음악의 멜로디. 완전히 신뢰하고 우리들의 얼굴을 쳐다보는 어린이의 시선이 그렇다. 이런 찰나 속에 그 숭고한 생명의 필연성과 그 계발된 조용한 존재 속에 우리들은, 가령 그것을 말로 모두 표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지혜, 모든 행복의 신비, 통일성의 신비가 숨어있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평화를 우리들 자신이나, 또 모든 사람들이 갖도록 원한다. 지금 이 순간에 안전한 자기 집에서 살고 취침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나. 또 몸을 담고 사는 집과 침대도 없어서 불행과 재난의 쓰라린 맛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주어지기를 원한다. 우리들은 그들의 승리가 그들을 교만하게 또는 맹목적으로 되지 않도록 마음의 평화가 승리자에게도 주어지기를 원한다. 또, 우리들은 자기네들이 부닥친 고난을 나무라거나, 다름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없이 솔직하게 그 고통을 꾹 참고 그 고통 속에서 신의 소리를 들을 만한 마음씨를 갖도록 패전(敗戰) 국민에게도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 또 다시 전쟁, 인종 박해, 모든 인류 동포끼리의 불화라는, 말하자면 정신 상태의 열병에 사로잡힌 것 같은 악몽 속에 완전히 빠져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해마다 이 이상 더 견디어 낼 수 없을 만큼 소름이 끼치는 사건을 종종 목격해 왔다. 또, 우리들만큼도 복을 타고 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무서운 사건을 몸소 또는 쓰라린 마음으로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

언젠가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에 ―잠이 안 온 것은 히틀러 지배 아래 감행 되었던 잔인무도한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고 비분 강개하였기 때문인데―시를 한 수 지었다. 나는 그 시 속에서, 그 공포에 저항하면서 신념을 고백하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렇다, 과오를 범한 우리 형제들에게도 사랑은 가능하다. 사이가 나쁘더라도 결코 심판이나 증오가 아닌, 단지 인종(忍從)의 사랑만이 우리들을 성스러운 목표로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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