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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헌기(慟哭軒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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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헌기(慟哭軒記)

내 조카 친(親)이란 자가 자신의 서실(書室)을 짓고 편액을 통곡헌(慟哭軒)이라 달았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으며,

“세상에 즐거울 일이 무척 많은데 어째서 통곡으로써 집의 편액을 삼는단 말이오? 하물며 통곡하는 이란 아버지를 여읜 자식이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부녀자인 것이며,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데, 그대만 혼자 사람들이 꺼리는 바를 범하여 거처에다 걸어 놓는 것은 어째서인가?”

했다. 친은,

“나는 시속의 기호를 위배한 자다. 시류가 기쁨을 즐기므로 나는 슬픔을 좋아하고, 세속 사람들이 흔쾌해하므로 나는 근심해 마지않는 것이다. 심지어 부귀와 영화에 있어서도 세상이 기뻐하는 바이지만, 나는 몸을 더럽히는 것인 양 여겨 내버리고, 오직 빈천하고 검약한 것을 본받아 이에 처하며, 반드시 일마다 어긋나고 자 한다. 그래서 세상이 항상 가장 싫어하는 바를 택하고 보면 통곡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나는 그것으로 써 내 집의 편액을 삼는 것이다.”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비웃던 여러 사람들에게,

 

“무릇 곡하는 데도 역시 도(道)가 있소. 대체로 사람의 칠정(七情) 중에서 쉽게 움직여 감발(感發)하는 것은 슬픔만한 것이 없소. 슬픔이 일면 반드시 곡을 하는 것인데, 슬픔이 일어나는 것도 역시 단서가 여러 가지이지요. 그러므로 시사(時事)를 행할 수 없는 것에 상심하여 통곡한 이는 가태부(賈太傅)요, 흰 실이 그 바탕을 잃은 것을 슬퍼하여 곡을 한 이는 묵적(墨翟)이요, 갈림길이 동서로 나뉜 것을 싫어하여 운 것은 양주(楊朱)요, 길이 막혀서 운 것은 완보병(阮步兵)이었으며, 운명이 불우함을 슬퍼하여 자기를 세상 밖으로 내쳐 정을 곡(哭)에 부친 자는 당구(唐衢)입니다. 이들은 모두 품은 생각이 있어서 운 것이지, 이별에 상심하고 억울한 마음을 품으며 하찮은 일로 해서 아녀자의 통곡을 흉내 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그들의 시대에 비해 더욱 말세요, 국사는 날로 그릇되고, 선비들의 행실도 날로 야박해져서 친구들 사이에 배치되는 것도 갈림길이 나뉜 것보다 더하며, 어진 선비가 고생을 겪는 것도 비단 길이 막힌 것뿐만 아니어서, 모두 인간 세상 밖으로 도망해 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만약 저 몇 분의 군자로 하여금 이 시대를 목격하게 한다면 어떤 생각을 품게 될는지 모르겠소. 아마도 통곡할 겨를도 없이, 모두 팽함(彭咸)이나 굴대부(屈大夫)처럼 돌을 끌어안거나 모래를 품고 투신자살하고자 할 것이오. 친이 서실 편액을 통곡이라 한 것도 역시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여러분은 그 통곡을 비웃지 않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비웃는 자가 알아듣고 물러가므로 인하여 기(記)를 만들어 뭇 의심을 풀게 하는 바이다.

- 허균,「통곡헌기(慟哭軒記)」

 

 

요점 정리

지은이 : 허균

갈래 : 한문 수필, 기

성격 : 비판적, 교훈적

제재 : 통곡의 의미

구성 :

처음 : 서실의 이름을‘통곡헌’으로 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비웃음과 물음

중간 1 : 친의 대답(세상에 대한 거부감)

중간 2 : ‘나’의 부연 설명(통곡의 진정한 의미와 친이‘통 곡헌’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

끝 : ‘통곡헌기’를 짓게 된 동기를 밝힘.

주제 : 통곡헌의 내력과 시대에 대한 비판

특징 : 문답법의 구성을 통해 집의 편액을 통곡헌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내력을 밝히고, ‘통곡’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통념[일반 사회에 널리 통하는 개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고,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부각하고 있다.

내용 연구

 

통곡헌기(慟哭軒記)[작가는 불우한 시대적 상황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다양한 인물들을 예로 들면서, 집의 편액을 ‘통곡헌’이라고 이름 붙인 허 친의 행위를 옹호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으로 인해 통곡을 한 인물들이다. 허 균은 이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오늘날이 훨씬 더 말세에 가깝다며, 이러한 시절을 맞아 ‘통곡헌’이라는 편액을 달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 조카 친(親)이란 자가 자신의 서실(書室)[서재 : 책을 갖추어 두고 글을 읽고 쓰는 방. 문방. 서각(書閣)]을 짓고 편액[종이·비단 또는 널빤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편제]을 통곡헌(慟哭軒)[불우한 시대적 상황에서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 담겨 있는 집]이라 달았다. 사람들[세상 사람들이 꺼린다는 이유로 ‘통곡헌’이라는 이름을 비웃음]이 모두 크게 웃으며,[허 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편액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지은 것을 비웃는 사람들의 모습]

“세상에 즐거울 일이 무척 많은데 어째서 통곡으로써 집의 편액을 삼는단 말이오?[통곡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 관념] 하물며 통곡하는 이란 아버지를 여읜 자식이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부녀자인 것이며,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데, 그대만 혼자 사람들이 꺼리는 바를 범하여[범하다 : ① 법률·규칙·도덕 등을 어기다. ┈┈• 계율을 ∼. ② 잘못을 저지르다. ┈┈• 과오를 ∼ ┈┈• 실수를 ∼. ③ 남의 권리·정조·재산 등을 무시하거나 짓밟거나 빼앗다. ┈┈• 유부녀를 ∼ ┈┈• 그는 어딘지 범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④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경계나 지역 따위를 넘어 들어가다. ┈┈• 국경을 ∼.] 거처에다 걸어 놓는 것은 어째서인가?”[남들이 꺼려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한 의아함]했다. - 허친이 ‘통곡헌’이라는 편액을 지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비웃음

친은,

“나는 시속[그 당시의 풍속]의 기호를 위배한 자다. 시류[그 시대의 풍조나 경향]가 기쁨을 즐기므로[부귀영화(富貴榮華)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의미함] 나는 슬픔을 좋아하고, 세속 사람들이 흔쾌해하므로 나는 근심해 마지않는 것이다. 심지어 부귀와 영화에 있어서도 세상이 기뻐하는 바이지만, 나는 몸을 더럽히는 것인 양 여겨 내버리고, 오직 빈천하고 검약한 것[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의미]을 본받아 이에 처[‘곳’·‘장소’의 뜻]하며, 반드시 일마다 어긋나고 자 한다. 그래서 세상이 항상 가장 싫어하는 바를 택하고 보면[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허 친의 삶의 태도] 통곡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나는 그것으로 써 내 집의 편액을 삼는 것이다.” 했다 - 허친이 ‘통곡헌’이라는 편액을 지은 까닭

 

나[허 균]는 그 이야기[‘친’이 편액을 ‘통곡헌’이라고 명한 이유]를 듣고, 비웃던 여러 사람들[그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나’는 ‘통곡헌’과 관련한 ‘친’의 의견을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다.]

 

“무릇 곡하는 데도 역시 도(道)가 있소[통곡의 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나’]. 대체로 사람의 칠정(七情)[①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 기쁨(喜)·노여움(怒)·슬픔(哀)·즐거움(樂)·사랑(愛)·미움(惡)·욕심(欲). 또는 기쁨·노여움·근심(憂)·생각(思)·슬픔(悲)·놀람(驚)·두려움(恐). ② ⦗불⦘ 기쁨·성냄·근심·두려움(懼)·사랑·미움(憎)·욕심.] 중에서 쉽게 움직여 감발(感發)[감동하여 분발함]하는 것은 슬픔만한 것이 없소. 슬픔이 일면 반드시 곡을 하는 것인데, 슬픔이 일어나는 것도 역시 단서[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의 첫 부분]가 여러 가지이지요. 그러므로 시사(時事)[그 당시에 생긴 여러 가지 세상일 / 사회적 사건.]를 행할 수 없는 것에 상심[슬픔이나 걱정 따위로 마음을 상함]하여 통곡한 이는 가태부(賈太傅)[가의라고도 함 / 중국 전한 때의 학자로 오행설에 기초한 새로운 제도의 시행을 주장하다가 고관들의 시기로 좌천된 인물]요, 흰 실이 그 바탕을 잃은 것을 슬퍼하여 곡을 한 이는 묵적(墨翟)[노나라의 철학자로 무차별적 박애의 겸애 정신을 설파하고 평화를 주장함]이요[묵적은 하얀 실이 푸르게 물들이면 푸르게 되고 노랗게 물들이면 노랗게 되는 것처럼, 사람도 착한 데 물들면 착하게 되고 악한 데 물들면 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갈림길이 동서로 나뉜 것을 싫어하여 운 것은 양주(楊朱)[전국 시대의 학자로 노자 사상의 명맥을 이음]요[양주가 갈림길 앞에서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한탄하였다.], 길이 막혀서 운 것은 완보병(阮步兵)[완적이라고도 함. 위나라의 사상가로 노장 학문을 연구함 /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마음 내기는 대로 수레를 몰다가 막다른 길에 이르면 통곡을 하고 왔다는 일화가 있다.]이었으며, 운명이 불우함을 슬퍼하여 자기를 세상 밖으로 내쳐 정을 곡(哭)에 부친 자는 당구(唐衢)[당나라의 시인으로 비통한 내용의 시문을 보면 반드시 곡을 하였다고 함]입니다. 이들은 모두 품은 생각[군자들이 통곡했던 까닭]이 있어서 운 것이지, 이별에 상심하고 억울한 마음을 품으며 하찮은 일로 해서 아녀자의 통곡을 흉내 낸 사람들이 아닙니다[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운 것이 아님]. 오늘날의 시대는 그들의 시대에 비해 더욱 말세요[시대 상황에 대한 부정적 인식], 국사는 날로 그릇되고, 선비들의 행실도 날로 야박해져서 친구들 사이에 배치되는 것도 갈림길이 나뉜 것보다 더하며[남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이 심했던 시기에 살았던 허균의 삶이 반영됨], 어진 선비가 고생을 겪는 것도 비단[부사로 ‘다만’의 뜻. 부정의 경우에 씀.] 길이 막힌 것뿐만 아니어서, 모두 인간 세상 밖으로 도망해 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속세와 등지고 은일지사 혹은 포의지사의 삶을 산다는 말] 만약 저 몇 분의 군자로 하여금 이 시대를 목격하게 한다면 어떤 생각을 품게 될는지 모르겠소. 아마도 통곡할 겨를도 없이, 모두 팽함(彭咸)[은나라 때의 충신으로 임금에게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결하였음]이나 굴대부(屈大夫)[초나라 때의 충신으로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슬퍼하며 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음.]처럼 돌을 끌어안거나 모래를 품고 투신자살하고자 할 것이오.

친이 서실 편액을 통곡이라 한 것도 역시 이런 생각[갈수록 부정해지는 세상에 대한 깊은 생각 / 우국지정(憂國之情)]에서 나온 것이니, 여러분은 그 통곡을 비웃지 않는 것이 옳겠소.”[역사 속 인물들(‘가태부’, ‘묵적’)의 고사를 열거하여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고 있다.] - 허친의 행위에 대한 ‘나’의 옹호

하였다[허 친의 뜻을 이해하여 옹호하는 작가의 행위 / 이 글에 의하면 ‘친’은 시속의 기호를 위배한 자이다. 글쓴이는 이 글을 통하여 ‘친’의 뜻을 옹호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시대’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쓴이에 의하면 오늘날의 시대는, 말세요, 국사는 날로 그릇되고, 선비들의 행실도 날로 야박해져서 친구들 사이에 배치되는 것도 갈림 길이 나뉜 것보다 더하며, 어진 선비가 고생을 겪는 것도 비단 길이 막힌 것뿐만 아니어서, 모두 인간 세상 밖으로 도망해 갈 생각을 하고’ 있는 때이다. 그래서 군자들로 하여금 ‘이 시대’를 목격하게 한다면 ‘돌을 끌어안거나 모래를 품고 투신자살’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는 통곡할 수밖에 없는 시대 현실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웃는 자가 알아듣고 물러가므로[‘나’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통곡헌’이라는 이름에 대한 오해를 풀고 있다.] 인하여 기(記)를 만들어[글로 써서] 뭇 의심을 풀게 하는 바이다. - 작품의 창작 동기

- 허균,「통곡헌기(慟哭軒記)」

 

 

이해와 감상

 

이 글은 허균이 자신의 조카가 서실 이름을‘통곡헌(慟哭軒)’이라 붙이게 된 이유를 말하고 있다.‘통곡헌(慟哭 軒)’이란, 말 그대로 통곡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즐길 일이 많은데 왜 통곡이라는 이름을 붙이냐며 친의 행위를 비웃었다. 친은 이에 대해 자신은 시속의 기호를 위배하는 자라서 세상이 좋아하는 부귀나 영예를 버리는 삶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를 들은 허균은 친은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로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 때문에 통곡하는 것이라며, 친을 비웃은 세상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고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심화 자료

허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엽(曄)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에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만에 파직되었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웠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에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다.

허균은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 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 주고 있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그가 지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 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 豪民論〉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 〈관론 官論〉·〈정론 政論〉·〈병론 兵論〉·〈유재론 遺才論〉 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다.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허균은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 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다. 그러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 점은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 國朝詩刪≫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허균의 저서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 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 古詩選≫·≪당시선 唐詩選≫·≪송오가시초 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 明四家詩選≫·≪사체성당 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 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 西邊備虜考〉·〈한년참기 旱年讖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허균의 생각(이이화, 뿌리깊은 나무, 1980)

≪참고문헌≫ 허균의 문학과 혁신사상(김동욱편, 새문社, 1981)

≪참고문헌≫ 許筠論(李能雨, 숙대논문집 5, 1965)

≪참고문헌≫ 許筠硏究(金鎭世, 국문학연구 2, 서울대학교, 1965)

≪참고문헌≫ 許筠論 再攷(車熔柱, 亞細亞硏究 48, 1972)

≪참고문헌≫ 蛟山許筠(金東旭, 한국의 사상가 12인, 현암사, 1975)

≪참고문헌≫ 許筠(조동일, 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1978)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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