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테스 / 토머스 하디 / 줄거리 및 해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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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1891) / 토머스 하디

  해설


  하디는 영국 소설계에서 조지 메러디스(George Meredith, 1828-1909)와 더불어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존재였다. 4편의 장편 소설과 4권의 단편집 8권의
시집(918편의 시 수록)과 2편의 서사극시를 남겼으며 하디 문학의 금자탑을 이룩한
"테스"로 이름을 떨쳤다. "테스"가 많은 애독자를 가지게 된 까닭은 인생의 비극적인 
실상을 직시하는 하디의 페시미즘 사상이 불안과 동요의 도가니 속에서 허덕이는
현대의 시류와 일맥 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은 후 영국인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기장 즐겨 읽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여기서 "테스"가 발표되었던 빅토리아 시대를 잠깐 살펴보자 이 때는 치기와
위선의 시대였다. 민주적 경향과 과학 정신으로 조성된 물질 문명의 세례를 받은
속물주의와 체면주의가 판을 치던 속된 분위기였다. 이런 시대는 윤리관이나 도덕관이 
지극히 편협해지기 마련이어서 인간성을 자연스럽게 묘사할 수 있는 문화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하디는 편협한 윤리 도덕관에 반기를 들고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통해 윤리 
도덕 정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도하였다. 


  하디는 "테스"에서 두 개의 순결성을 보여 준다. 나아가 육체의 순결성보다 정신의 
순결성을 위에 두고 있다. 테스가 알렉에게 빼앗긴 육체의 정조는 한낱 외형의
순결성을 상실했기 따름이지 본연의 순결성은 여전히 테스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기본 골격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결국은 알렉 살해의 책임은 테스를 
둘러싼 환경의 편협함의 결과로 돌리는 것이다. 테스가 놓여 있는 환경이란 야수적인 
알렉과 이기적이고 결벽증인 에인젤의 횡포에 의해 초래된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이 테스의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다. 테스의 불행은 스스로의 성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의 희생자인 것이다. 하디는 인생을 하나의 비극으로 인식한다. 
우주에는 인간사에 무심한 맹목적 대의지가 있고, 지상의 인격들 제각기의 소의지가
있다. 인간의 소의지는 우주의 대의지에 휩쓸려 결국 자멸이란 비극을 치르게
마련이라는 것이 하디의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테스"가 발표되었을 때 타임즈는 "테스"에 대하여 인습적 관념을 다루는 데
대담하고 애틋한 비애감을 서리게 하여 지극히 감동적인 비극감을 자아냈다고 평했다. 
시인 윌리엄 윗슨 경(Sir William Wastson)은 테스는 인간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경험의 폭을 항상 넓혀 준다고 했으며 웨스트민스터의 평론가는 조지엘리가 별세한
뒤의 최고 역량의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테스"는 출판된 지 3년 만에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그 후 전문적인 연구 서적과
논문도 많이 발표되었다. 또한 영화와 연극으로 상연되었다

  작가 약전


  하디는 1840년 6월2일 영국 남부 지방 웨섹스의 중심지 도셋의 하디북햄프턴이란
삼림 지대와 황무지 사이의 두메 초가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산된 순간
사산인 줄 알고 한구석에 내버렸던 것을 이웃의 거들던 아낙네가 의사에게 "죽다니요! 
가만 계세요 꼭 숨을 쉴 테니!"하고 외치는 바람에 다행히 소생했다. 


  7, 8세 때에 친구들은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될까 하며 신나게 이야기했지만 하디는
어른이 되고 싶지도, 무엇을 갖고 싶지도 않았으며, 지금 그 자리에 그냥 남아 있고
싶을 따름이었다. 야심이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하디를 목사로 만들고자 했으나 하디가 원하지 않으므로 건축가로
출세시키려 했다. 18세 때에는 도체스터의 교회 건축가 조힉스의 제자가 되어 5년 동안 
건축에 관한 경험을 쌓는 한편 친구의 지도를 받아 고전 중에서도 특히 희랍 비극과
영문학을 탐독하여 차츰 글을 쓰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일리아드를
읽고 낮에는 건축 일에 시달리고 일이 끝나면 바이올린을 들고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에 바빴다. 


  21세 때는 당대 굴지의 건축가인 부룸 후일드의 조수로 런던으로 오게 되어 10년간 
과학적 사회적 문학적 사조를 접하였다


  1865년에 시를 쓰기 시작 이듬해 잡지상에 투고했으나 반환되는 바람에 시작의 붓을 
꺾고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865년에 "내가 집을 지은 이야기"라는 단편을 발표했으며 1871년 "궁여지책",
1872년 "푸른 숲 그늘에서", 1873년 "푸른 눈동자"를 각각 발표했고 1874년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를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874년 엠마 라비니아 깁후드 양과 결혼했다. 1878년 하디의 4대 걸작의 하나인
"귀향"을 발표 그 후 "케스터브리지 시장", "웨섹스 이야기", "귀부인들", "테스",
"아내를 위하여" 등을 발표하였다. "테스"가 간행되자 에인젤과 같은 과거가 있는
아내를 가진 남편들로부터 그리고 테스와 같은 과거를 지닌 아내들로부터 하디에게
많은 서신이 쇄도하였다


  1928년 1월11일 88세로 세상을 떠날 떄까지 14편의 장편 소설과 4권의 단편집과 
8권의 시집과 2편의 서사극시를 냈다


  생전에 이미 그의 문학적 공헌이 인정되어 애버딘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옥스퍼드 대학 등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 받고 70세에는 국왕으로부터 유공 훈장을 
받았다

  줄거리


  5월 어느 날, 저녁 세스톤에서 블랙모어의 말로트 마을로 한 중년의 사나이가 길을 
가고 있다. 사나이는 두 다리를 비척거리며 똑바로 걷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몰락한 
귀족의 자제로 지금은 무식하고 가난하여 그 자신이 더버빌 가의 피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술에 취해 집으로 향했다. 그는 옆구리에 빈 달걀 광주리를 들고
있었다. 귀족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안다한들 달라질 것은 없으나 집으로 향하던 도중 
그는 목사로부터 그가 몰락한 귀족의 자제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말로트 마을은
아름다운 분지의 동북쪽에 파도처럼 굽이친 산줄기 한복판에 자리한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외진 고장이다. 런던은 네 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나
아직도 유람객들이나 풍경화가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고장이었다. 


  이 지방은 지형상 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도 매우 흥미 깊은 곳이었다. 헨리 3세
시기의 기묘한 전설 때문에 이곳 분지는 일찌기 '휜 사슴의 숲'이라 불리웠다. 
지금도 얼마간 옛 풍습이 남아 있는데 5월의 무도회 같은 것이 그 한 예였다. 
이 무도회는 여자들의 친목 모임으로서 수백 년 전부터 해마다 같은 행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5월은 기쁨의 계절이라고 하여 회원들은 하나같이 흰 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저마다 
껍질을 벗긴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왼손에는 한아름 흰 꽃을 들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춤을 추고 행진을 했다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면 곧 춤놀이가 시작되는데 회원은 여자들 뿐이므로 여자들끼리 
춤을 추었다. 그러나 하루의 일이 끝날 무렵이 되면 마을 사나이들이며 도보
여행자들이 모여들어 함께 춤을 추는 향연이 벌어졌다. 그 날도 역시 이 마을에서
모임을 하는 날이었다. 


  어깨에 작은 바랑을 메고 손에는 지팡이를 든 상류 계층의 젊은이 셋이 여인들의
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지간이었다. 맏이는 흰 넥타이에다 목까지 닿는
조끼와 좁다란 차양이 달린 모자를 쓴 부목사의 정복 차림이었고 둘째,는 보통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셋째는 얼른 보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들 삼
형제는 성령 강림절 휴가를 이용하여 도보 여행 중으로 동북쪽에 있는 세스톤 마을을 
떠나 서남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두 형은 오래 지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으나 셋째는 
남자 상대자 없이 여자들끼리 춤을 추고 있는 광경에 흥미가 끌렸다. 그는 이윽고
바랑과 지팡이를 생울타리 위에다 걸어 놓고 잔디밭으로 들어갔다. 두 형은 에인젤에게 
곧 뒤따라오도록 당부를 하고는 먼저 떠났다


  여자들은 에인젤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하였고 에인젤에 뒤이어 마을 청년들도 일을 
끝마치고 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들과 함께 춤추는 아가씨와 아낙네들은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그가 춤 한 곡을 끝내고 나올 때 수줍은 표정의 어여쁜 처녀가 눈에 띄었다. 
테스 더버빌이었다. 처녀의 큼직한 눈동자는 자기를 택해 주지 않은 에인젤에게
원망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젊은이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나 곧 형들의
뒤를 따라야 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테스는 언덕 위로 사라져 가는 젊은이가 저녁 햇살 속에 모습을 감출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테스는 감정이 드러나기 쉬운 작약과 같이 어여쁜
입술과 순진한 매력이 넘쳐 흐르는 커다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머리에는 리본을
달고 단 한 벌의 외출복인 린네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시골 학교를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청초한 처녀였다


  향연은 끝나고 다시 살기 힘든 생활이 반복되었다. 
  뒤늦게 밝혀진 몰락한 귀족 신분이 가난하기만 한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테스의 부모는 허황한 공상을 하였다. 테스는 많은 동생과
어머니가 좀더 편히 살 수 있도록 이것저것 돈 되는 일을 찾아 나섰다. 테스는 귀족의 
혈통이므로 신사에게 시집을 가서 편히 잘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공상을
무시하고 어려워져 가는 집안 사정 때문에 얼마 후 집을 떠나 양계장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테스는 그 집의 관리인이요, 사료 조달인이요, 간호인이요, 외과 의사요, 친구가 
되어야 했다. 아직 육십이 안 된 여주인인 알렉의 어머니와 하녀의 틈에서 테스는 모든 
일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닭을 기르는 데는 휘파람도 잘 불어야 했다. 도착한
이튿날은 오랫동안 안 불었던 휘파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안뜰의 담장의
가지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장 꼭대기에서 한량꾼인 알렉 더버빌이 
테스를 엿보다가 담장에서 뛰어 내렸다. 알렉은 그 전날 테스가 살고 있는 오두막의
문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자연 속에도 예술 속에도 당신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어 내 사촌 누이 테스!"
  그리고 그는 휘파람 연습을 시켜 주겠다고 하며 계속 추근거렸다. 테스는 웬지
이 사람이 싫었다
  "싫어요"
  "바보. 누가 저를 만지기라도 한데나?"
  알렉은 이 집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자기에게 얘기하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이 트란트리지 일대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지루하며 단조로운 마을에서 힘겨운 일을 하는 그들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여자들도
여기에 가담하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이면 으레 2,3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볼품없는
장터 체이조바라로 나가서 술을 마시고 놀다 이튿날 새벽 한두 시 경에야 돌아왔다. 
테스는 처음 매주마다. 한 번씩 있는 이 행차에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노동의 휴식을 위해 자기와 별로 나이 차이가 없는 동네 부인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일 주일 내내 갑갑한 양계장 일에서 나와 보니 자기도 덩달아 즐거웠다. 그 후로도
테스는 종종 동행하게 되었고 원래 미인이고 매력이 있는 데다 나이 열 일곱의 한창인
아가씨였기 때문에 사나이들의 능글맞은 시선을 끌었다  


  한두 달이 지나고 명절과 장날이 겹친 9월 어느 토요일 트란트리지에서 놀러 나온 
패들은 다른 때보다 더 신이 났다.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트란트리지와 이곳은
워낙 떨어져 있는 곳이라 밤 늦은 시간에 홀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므로 테스는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이미 취기가 오른 알렉이 테스에게 손짓을 했다. 
  "테스, 난 오늘 말을 타고 왔으니 주막으로 와요. 마차를 불러 데려다 줄 테니"
  테스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가겠노라면서 이를 거절했다. 열한 시가 훨씬 넘은
후에야 몇 사람씩 떼를 지어 돌아가게 되고 테스도 그 안에 끼었다. 그날 밤 유난히
밝은 달빛이 밤길을 훤히 비치고 있었다. 


  술에 취한 남녀들은 비틀거리면서 노래를 부르며 떠들어댔다. 테스는 이런 경우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테스는 여자들의 수다를 들으며 묵묵히 걷고 있었다. 
이 때 동행자 중에 카아라는 여자가 물건이 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있었는데 꿀이
쏟아져 머리카락에 붙어 마치 뱀처럼 꿈틀거렸다. 모두가 이 모양을 보고 큰 소리로
웃었을 때 테스도 아무 생각없이 같이 웃고 말았다. 카아는 화를 내면서 테스에게
달려들었다. 


  "왜 날 비웃는 거야. 요 악마 같은 것"
  카아는 알렉의 정부였다. 알렉이 요즘 테스에게 눈이 팔려 쫓아다닌다는 것을
시기한 카아는 공연히 테스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가슴에 쌓였던 연적에 대한 분노가 
일시에 폭발한 듯이 갖은 욕을 퍼부어가며 대들었다. 같이 가는 사람들이 말리려고
했으나 술에 취한 카아는 좀체로 진정하지 않고 점점 더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때 말을 타고 달려오던 멋쟁이 알렉이 이 광경을 보고 테스 곁으로 가서 몸을
굽히며 말을 했다. 


  "그런 것 하고 싸울 필요 없어. 자, 내 말에 같이 타요"
  테스는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카아의 욕설을 듣자 그녀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가벼운 심술이 발동했던 것이다. 평상시 알렉을 경계했던 테스는 보란 듯이 알렉의
말 위에 올라탔다
  테스는 말을 타고 밤길을 알렉과 함께 간다는 사실에 은근히 불안해졌다. 알렉은
유쾌하게 말을 몰면서 테스에게 말을 걸었다. 
  "왜 테스는 내가 키스하려고 하면 싫어하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키스한다는 건 싫은 일이지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말 내가 싫어?"
  테스는 아무 말 없이 알렉의 등을 꼭 붙들고 있었다. 
  테스는 이 젊은 주인이 추근거리는 것이 몹시 싫었다. 지금도 말 위에서 알렉은
말을 걸었다. 골짜기에서 자욱이 드리웠던 안개는 차츰 사방으로 퍼져 두 사람을 감싸 
버렸다


  안개는 달빛을 가로막아 활짝 갰을 때보다도 한결 더 골고루 빛을 퍼지게 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몽롱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인지 혹은 졸리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큰 길에서 트란트리지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난 지가 꽤 오래 되었는 데도 사나이가
트란트리지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테스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테스는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한 주일 동안 아침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온종일 서서 지냈고 더구나 이 날 저녁에는 체이조바라까지 3마일이나 걸어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느라고 1마일의 길을 걸으면서 그 야단법석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기진 맥진했다  벌써 새벽 한 시가 가까웠다. 피곤한 나머지 정신없이 잠든 순간
테스는 사내에게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알렉은 말을 세우고 등자에서 발을 빼어 안장 
위에 옆으로 돌아앉아 테스를 부축할 양으로 허리에다 두 팔을 감았다. 그 순간 테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불현 듯 치미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알렉을 떠밀었다. 
하마터면 사나이는 떨어질 뻔했다


  "이런 욕을 당하다니 내 꼴이 뭐야? 근 석 달 동안이나 남의 감정을 희롱하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골탕 먹이기가 일쑤니 이젠 참을 수가 없어!"
  "전 내일 떠나겠어요"
  "안 되지, 그러지 말고 내 팔에 안겨 줘. 자 어서. 당신과 나와 단 두 사람 뿐
아무도 없어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
  테스는 안장 위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알렉은 소원대로 테스를 두 팔로 껴안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죠?"
  "체이조 숲의 한 귀퉁이야. 잉글랜드에서도 제일 오래된 숲이지. 밤도 아름답고
하니 좀더 오래 말을 타요"
  "내려 주세요. 전 집까지 걸어가겠어요"
  "내가 당신을 이런 외딴 곳으로 데리고 왔으니 당신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난 
당신을 집까지 무사히 보내 줄 책임이 있어 아무튼 여기가 어디쯤인가를 내가 보고
올 테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말 곁에서 기다리겠다고 약속한다면 여기다 내려 주지"
  그는 말고삐를 나무에 매놓고 낙엽을 모아 자리를 만들었다. 


  "자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그런데 이렇게 옷이 얇아서 춥겠군 그래"
  알렉은 자기 코트를 벗어 테스의 어깨를 감싸고 단추를 끼워 준 다음 비탈로
올라갔다  달도 져서 푸른 빛마저 사라져 혼자 남아 낙엽 위에서 꿈길을 더듬는
테스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테스는 힘없이 앉아서 쉬고 있는 동안 어느 사이에 
잠이 들고 말았다


  알렉은 일부러 엉뚱한 길로 말을 몬 나머지 지금 그들이 접어든 곳이 체이조 숲의 
어디쯤 되는지 분간을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듬더듬 산마루를 넘어 낯익은 신작로를 
발견하고 위치를 짐작했다  그리고는 겨우 테스와 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사방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알렉은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 테스를 살펴보았다. 
여자의 입김이 느껴졌다. 테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속눈썹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엷은 비단결처럼 감촉이 부드럽고 티없는 눈과도 같이 새하얀 테스의 살은
알렉에게 더 없는 유혹이었다. 알렉은 테스를 이렇게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색색거리는 나른한 숨소리와 어렴풋한 테스의 얼굴 살내음은 알렉의 자제력을 몽땅
앗아갔다. 


  시월 그믐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테스가 한밤중에 말을 타고 체이조 숲 속에서 난생 처음 무서운 경험을 겪은 지
몇 주일이 지난 뒤였다. 아직 이른 아침 테스는 무거운 짐을 들고 더버빌의 양계장을 
나왔다. 등 뒤의 지평선을 노랗게 물들인 빛은 테스의 눈 앞에 보이는 산마루를 환히 
비쳐 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테스는 걱정하는 어머니의 목에 매달려 눈물을 흘리며 숲 속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가난에 시달린 더버빌 부인은 
  "그래, 그러고도 넌 그 사람더러 결혼하자구 말을 안했단 말이냐? 그대로 바보처럼 
집으로 돌아오다니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일단 그런 일이 일어난 이상 넌 버젓하게 
그 사람에게 결혼 신청을 할 수 있지 뭐냐?"
  "어머니도 참, 결혼이라니요. 전 그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걸 어떻게 해요"
  "사랑하지 않는다구..."
  어머니는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계속 책망을 했다. 
  "여자란 건 그렇게 되고 나면, 어떠한 남자한테라도 따라가게 마련이란다. 더구나
알렉 같은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 남자 치고 그만하면 훌륭하고 게다가
부자가 아니냔 말이다"
  알렉 같은 남자의 성질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테스는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어머니를 테스는 슬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에겐 그 남자를 사랑할 마음이 도무지 없었어요. 저쪽에선 여러 가지로 
말해 왔지만"
  "아내가 될 생각이 없었다면 좀더 정신을 차렸어야 할 게 아니냐?"
  테스는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남자라는 건 정말
징그럽고 무서운 것이라고 왜 진작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테스의 아름다운 큰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려내렸다. 그러나 이미 도리가
없었다. 자기는 이제 처녀가 아니다. 비록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속절없이
정조를 빼앗긴 여자였다
  테스에게 심신이 모두 괴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해가 바뀌고 봄이 왔다. 그리고 불행을 안은 채 숙명의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테스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 운명을 중오했으나 일단 태어난
생명에 대해서는 애정을 느껴 아이를 안고 기도했다
  "오, 자비로우신 주님이시여! 이 가련한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에게는
어떠한 벌을 주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만은 부디 많은 복을 
주시옵소서"
  아이는 사생아였으므로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아이는 튼튼하지 못했다. 
테스는 어느 날 밤 동생들을 불러 자신이 신부를 대신하여 아이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말했다. 테스의 얼굴은 맑고도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테스는 이 가련한 아이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확고히 생각했다. 자신이 세례를 주어도 이 아이는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순박한 믿음이었다
  테스는 어린아이를 안고 물이 담긴 그릇 곁에 서고 동생은 교회에서 하듯이 기도서를 
펴들고 언니 앞에 섰다
  "이름을 뭐라고 지을 테야?" 하고 동생이 물었다. 
  테스는 구약 성경의 소로우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자기의 자식을 위한
신성한 생각으로 선언했다. 
  "소로우, 아버지이신 주님과 주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을 
받들어 나는 너에게 세례를 주노라"
  테스는 아이의 머리에 물을 뿌렸다. 
  "우리들은 이 아이를 받아 십자가의 표시를 너에게 하노라"
  테스는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이 소로우라고 이름지은 갓난아이는 곧 죽고 말았다. 함부로 이 세상에
뛰어든 자 사회의 법도 모르는 염치 없는 자연이 준 사생아는 불과 며칠이라는 시간을 
영원한 때로 알고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테스는 변했다.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성숙해진 그녀의 눈은 깊었으며 차분해진 표정이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트란트리지에서 돌아온 지 2년 남짓한 5월 어느 날 아침 테스는 어느 목장에
취직하여 집을 떠났다. 모든 기억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연의 딸로서만 살아가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전세 마차에 몸을 싣고 스타워카슬이란 조그만 읍내를 향했다. 이번 길은 첫번째
집을 떠나던 때와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스타워카슬에서 마차를 갈아 타고 웨터베리를 거쳐 아름다운 탈보나이조의 낙농장에 
이르렀다. 한없이 뻗은 녹색의 초원 희고 검고 붉은 무늬가 아롱진 소의 무리가
장미빛처럼 빛나는 낙조 속에서 노닐고 있는 곳 젖 짜는 곳에서는 여러 남녀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고 있었다.


  테스는 2년 동안 고민에 찬 세월을 고향에서 보낸 뒤 꿈을 꾸며 맑고 즐거운 생활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이었다. 젖 짜는 여인으로서 테스는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이
건강한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슬픈 추억으로 고통에 잠겼던 침울한 눈은 다시 이 
맑은 태양 속에서 빛났으며 창백한 볼에도 처녀 시절의 아리따운 장미빛이 감돌았다
  이 목장에는 다른 일꾼들과 달리 기품이 있고 상당한 교육을 받은 청년 하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에민스터의 유명한 목사의 막내 아들인 
에인젤로 학교를 나온 후 목장의 견습생으로 여기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이한 존재였으므로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청년이었으나 그는
여자들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목장 주인도 이 청년에게는 젊은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경의를 표했다


  테스는 이 청년을 보았을 때 전에 본 일이 있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테스가 아직 철모르는 소녀였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동네 처녀들과 같이 부인회의 무도회에 갔을 때 끝내 자기와는 춤을 춘 일이 없이
총총히 떠나가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테스는 에인젤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얀 능금꽃이 떨어지는 초여름의 황혼 아래 테스는 공기가 맑고 고요한 정원에
나와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았다. 모든 생각을 떠나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보다
차라리 이렇게 홀로 조용히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더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 때 뒷집 지붕 밑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그 구슬픈 음조는
테스의 마음을 꿈 같은 세계로 끌어들였다. 잠시 후에 바이올린 소리는 그쳤으나
테스는 다시 들려오기를 기다리며 황혼에 비치는 흰 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바이올린을 켜던 사람은 에인젤이었다. 그는 악기를 치우고서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왔다. 담 주위를 한 바퀴 돌다가 우연히도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테스를 만났다. 
사실 에인젤은 테스에게 끌렸으므로 간단한 음악을 연주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테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면서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에인젤은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도망가다시피 하세요? 제가 두려우신가요?"
  "아녜요"
  테스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무서운 건 없어요. 별이 이렇게도 아름답게 비치는 걸요"
  "그럼 뭐가 두렵습니까? 아니 당신 눈에 눈물이 고였군요"
  에인젤은 유심히 테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테스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별을 보고 있노라니까 인간의 행동이 흙탕물같이 더럽게 여겨져서 갑자기
쓸쓸해졌어요"
  "슬퍼한다는 것은 때로는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맑게
씻어 주니까요"
  에인젤은 테스가 이 목장에 왔을 때부터 용모가 아름다운 그녀에게 끌렸다. 또한
지금은 그녀가 영리한 여인임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목장 한 모퉁이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에인젤의
마음에서는 테스의 얘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들은 아침 일찍 젖 짜는 곳에서 자주 만났다. 젖을 짜기
위해서는 다들 이른 아침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에인젤과 테스가 
제일 빨랐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얘기하며 명랑하게 웃기도 하고 아침 햇살에 빛나는 
목장을 같이 산책하기도 했다. 아침 해의 장미빛에 비치는 테스의 모습은 에인젤에게는 
자연의 여왕과도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무더운 여름철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다음 날 테스는 오랜만에 이 마을에서
2, 3마일 떨어진 교회로 세 명의 처녀들과 함께 예배를 보러 갔다. 길은 질퍽했다. 한참 
가다 보니 언제나 뛰어 넘을 수 있었던 작은 냇물이 불어서 신을 벗고 건너가도 물이 
무릎까지 닿을 것만 같았다. 네 명의 처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냇물을 건너지 않는다면 훨씬 먼 곳에 있는 큰 길로 돌아가야 했다


  에인젤은 일꾼들이 교회에 가는 날이면 언제나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들판을 
거니는 습관이 있었다. 멀리 네 처녀가 소나기에 넘친 개울가에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본 에인젤은 그들을 못본 척하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 중에 테스도 끼어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인젤은 네 처녀가 몰래
사모하는 대상이었으므로 그가 점점 가까이 오자 아가씨들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청년은 가까이 와서 친절히 한 사람씩 안아서 냇물을 건네 주었다. 물 깊이는 그의 
장화를 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테스를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다. 


  세 처녀는 마음을 조이며 에인젤이 테스를 데리러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젯밤에 에인젤과 같은 훌륭한 남자는 없으며 에인젤이라면 언제라도 결혼하겠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에인젤은 테스를 좋아하고 있다고 하며 풀이 죽어 있었다. 테스는
괴로운 심정이었다. 자신도 에인젤을 사랑하고 있으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용없이 그분은 테스를 좋아하고 있는걸"
  테스는 에인젤에게 안겨 건널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동요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에인젤이 가까이 왔을 때 테스는 말했다. 
  "전 저쪽 국도로 돌아가겠어요. 세 사람이나 건네 줘서 퍽 피곤하시잖아요 
에인젤 씨"
  "아니 조금도 사실 당신을 건네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겁니다"
  테스의 부드러운 몸은 에인젤의 가슴에 끌리듯 안겼다. 에인젤은 아름다운
꽃다발이라도 안은 듯이 여인을 안고 내를 건넜다
  "무겁죠?"
  "무겁다뇨. 당신이 입고 있는 모슬린처럼 가볍습니다"
  테스를 건네다 주자 에인젤은 물에 젖은 길을 저벅거리며 혼자 돌아갔다. 네
처녀들이 다시 교회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한 처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틀렸어, 우린 이제 기권이야"
  "그게 무슨 말이니?"
  테스가 물었다.
  "그분은 널 제일 좋아해 그분이 널 안고 건널 때 우린 확실히 알았어 만일 네가
조금이라도 유혹만 했다면 그분은 네게 키스를 했을 거야"
  "얘가, 별말을 다 하네"
  테스는 이렇게 부정하면서도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 후 긴 여름 해가 질 무렵 테스는 목장에 남아서 젖을 짜고 있었다. 석양빛을
받으며 하얀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쓰고 젖을 짜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었다. 테스를 찾아 목장에 나온 에인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테스를 보자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그는 테스에 대한 애정이 날이 갈수록 타오르는 곳을
느꼈다. 에인젤은 테스의 모습에서 자신의 이상형을 본 것이다. 진흙 속에 박혀 있는 
보물처럼 테스도 자신에게서 교육을 받는다면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인이 되리라 
에인젤은 지독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자연으로 끌리는 두 사람의 애정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어쩌면 테스의 거부보다도 에인젤에게 있는 이성 때문이 아닐까?
  이성적이고 사리 분별이 뛰어난 에인젤은 어느덧 테스를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에인젤은 들의 여신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테스를
보자 테스를 두 팔로 힘껏 끌어안고 말았다
  "용서하십시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테스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 참, 소가 다 놀라서 젖통을 차고 말았어요"
  "테스, 나와 결혼해 주오"
  "아아 에인젤 씨,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난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는 여자가 
아녜요"
  "그건 왜요? 테스 당신은 날 사랑할 수 없다는 건가요?"
  에인젤은 더욱 세게 테스를 감쌌다
  테스의 얼굴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사랑하고 있어요. 진정으로 사랑해요. 그렇지만 당신하고 결혼을 할 수는 없어요"
  "무엇 때문에? 다른 남자와 약혼이라도..."
  "아녜요"
  테스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게는 그런 자격이 없어요. 당신하곤 신분도 다르고 또 저는..."
  테스는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얘기가 있다. 그러나 그 말의 내용은
무거운 화석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깊은 밤에 일어난 그 숲의 사건 자기는 이미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 사실을 말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사랑하지만 절대로 결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토록 에인젤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몸과 
마음을 다해 오직 에인젤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자신을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에인젤은 또 다시 테스를 포옹하며 
  "그럼 내 말을 듣고서 대답해 줘요. 난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당신의 훌륭한 성품을 
이해하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당신도 날 사랑해 주겠지?"
  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을 승낙하겠소?"
  에인젤의 말을 들으면서 테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아, 나는 이 진실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질 수는 
없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테스, 분명히 대답해 주오"
  "만일 내가 당신의 아내로서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만 있다면-그리고 나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테스! 결국 승낙해 주었구려"
  테스는 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인젤의 손등에 뜨거운 키스를 했다
  테스와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집에 돌아간 에인젤은 저녁에 가족 예배를 
마친 후에 아버지께 말을 했다. 학벌이 없고 집안도 가난하지만 순결하고 정숙하며
독실한 종교 신자이고 농장 생활에 있어서는 월등한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규수는 네가 결혼할 만한 훌륭한 가문이니? 정말 정숙한 숙녀이구?"
  어머니가 불쑥 말을 했다
  "그 규수는 농부의 딸이지만 보통 숙녀 정도가 아니에요. 감정이나 성품이나
몸가짐이나... 가문만 좋으면 뭘 합니까. 장래 제가 하는 일에 협조자가 되어야죠"
  "마시는 정말 가문 좋고 예쁘고 교양 있고 남 주기는 아깝지"
  어머니는 안경 너머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외면상으로 좋은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테스의 생활과 행동은 시
그것입니다"
  얼마 후 테스는 어머니에게 이 목장에서 신분이 좋고 교육을 받은 에인젤과
결혼하게 됐다는 편지를 냈다. 어머니로부터는 곧 테스의 결혼을 기뻐하는 회답이 왔다
  '사랑하는 테스, 네가 훌륭한 사람과 결혼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전에 있었던 그 일을 결코 남편될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말을 하고 나면
불행이 오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네가 나빴던 것이 아니라 구차한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란다
  네가 50번을 물어도 나는 똑같은 대답을 하겠다. 너는 마음 속에 있는 일을
털어놓고 무슨 일이건 말해 버리는 정직한 성품이기 때문에 나는 걱정이다. 너의
행복을 비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 내 말을 꿈에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네 결혼에 대해서는 아직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 네 아버지는 술김에
주책없이 네 결혼을 사방에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쌍한 줏대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단다
  사랑하는 테스야, 생기에 넘치는 마음으로 결혼해 다오. 결혼 선물로는 사이다를
한 독 보내겠다. 에인젤에게 안부를 전하도록'
  에인젤에게 아직 말을 하지 못한 괴로운 비밀을 어머니는 이렇듯 간단히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표리를 잘 알고 있는 어머니 생각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만일 에인젤과의 애정이 무너지게 된다면
테스는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12월 31일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식은 테스가 즐겨
다니는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신랑 신부는 목장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신혼 여행을 떠났다. 젖 짜는 아가씨들은 부러운 마음으로 신혼 부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부가 된 테스도 명랑한 웃음으로 사람들의 축복에 대답했다. 에인젤이 선사한
아름다운 신부 옷을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웰브리지라는 시골에 가서 조용히 며칠을 
보내기로 했다. 그곳은 몰락하기 전의 더버빌 저택이었는데 에인젤은 테스의 혈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징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에인젤이 기존의 사상과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고 진보적이라 해도 그 역시 인습을 어느 사이엔가 인정하고
있었다. 결국 생활로 돌아갈 때에는 인습이 우선인 것이었다
  신혼 초야의 잠자리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을 때 테스는 난로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시시각각으로 테스의 양심에 육박해 
오는 것이 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순결한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편을
바라보자 테스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가슴을 찔렀다. 마음은 점점 
더 긴장해졌다
 모든 일을 말해 버리려고 에인젤을 바라보았을 때 에인젤은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테스, 내 말 좀 들어 줘 난 당신한테 고백할 일이 있어"
  테스는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어쩌면 에인젤도 나와
같은 일이 있었는지도...
  "여보, 당신의 천사와도 같은 순결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숨길 수가 없소"
  에인젤은 이어 대학 시절에 방탕하고 창녀와 함께 몇 밤이나 지냈던 일을 고백했다
  "테스, 이 더러운 내 과거를 용서해 주겠어?"
  에인젤은 부들부들 떨면서 테스의 고운 손을 꼭 쥐었다
  마치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은 불안한 생각에 싸였던 테스는 남편의
말을 이어 자신의 일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깨끗이 과거를 먼저 얘기해 주셨어요. 내게는 그보다 더 무서운
과거가..."
  "쓸데없이 무슨 말을...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라니 당신에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에인젤은 자기의 가슴에 뭉쳐 있던 고백을 마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테스는 더욱 괴롭기만 했다. 칼을 들고 가슴을 에이는 듯한 생각으로 분명히
말했다
  "이대로 나를 기만할 수 없어요. 내 얘기를 다 들어 줘요"
  테스는 창백한 얼굴에 단호한 결심의 빛을 띄우며 그 검은 숲 속에서 알렉
더버빌에게 당했던 무서운 일과 어린애까지 낳았다가 죽고 만 얘기를 다 털어 놓았다
  아내의 고백을 듣고 난 에인젤은 파랗게 질렸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앞에서 벌겋게 타오르던 난로 불마저 꺼져 가고 있었다. 
  "테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에요.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나는 괴로워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막상 말을
하려니 당신이 나를 버릴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에요"
  에인젤은 머리를 움켜 쥐고 미칠 듯이 쥐어 뜯으며 소리쳤다
  "무서워, 정말 무서운 일이야. 여보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오. 당신한테 그런
끔직한 일이 있다니. 테스, 부디 거짓말로 그래 본 거라고 말해 주오"
  테스는 오히려 담담히 대답했다
  "모두가 사실이에요. 지금에 와서 당신을 추호라도 속이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주님 앞에 나간다 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울 게 없어요. 여보 에인젤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내 이 과거를 용서해 줘요"
  "아아, 무서워. 용서고 뭐고 그럴 수가 없어. 당신이 이렇게 고운 당신이 딴
남자한테 몸을 맡기고 아이까지 낳다니. 아아 무서운 일이야. 내 꿈은 깨졌어.
저주받은 결혼..."
  테스는 엎드려서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다시 얼굴을 들어 한사코 호소했다
  "여보 에인젤, 용서해 줘요. 난 당신 이외의 사람을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일이 있을 땐 난 아직 어린애였어요.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어린애였어요"
  "당신이 죄를 지은 건 아냐. 피해를 당했을 뿐이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동기야 어쨌든, 난 괴로워. 이런 일을 알고 나서 당신과 같이 있을 순 없어. 당신에
대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난 더욱 괴로워 당신과 같이 있지 못해"
  이처럼 엄격해 남편의 마음이 아주 풀리리라는 희망은 전혀 없어 보였으므로 테스는 
이미 이혼을 각오했다. 그들 사이에 금이 간 지 사흘째 되는 날 테스가 먼저 제안을
했다. 
  "난 불평은 안하겠어. 어쨌든 내일이라도 곧 친정으로 돌아가겠어요"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역시 헤어지는 게 상책일 것 같소. 적어도 얼마간은,
지금까지의 사유를 좀더 뚜렷이 알게 되고 내가 당신한테 편지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당신은 법률상으로 나의 아내요"
  에인젤은 테스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 그의 속마음은 그녀를 애타게 갈구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해진 에인젤은 에인젤 자신이라기보다 지금까지
인습의 안에서 성장했던 가짜 에인젤인 것이다. 그는 그가 얼마나 테스를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 날로 두 사람은 각각 짐을 꾸렸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마차에 몸을 싣고 우선 
낙농장으로 돌아갔다. 농장주 클리크 씨 부처와 만나서 일처리를 마친 다음 그들은
다시 마차를 몰아 나즐베리에 이르러 헤어지게 됐다
  "난 참을 수 없는 것도 되도록이면 참도록 노력하겠소. 내가 자리를 잡으면 곧
당신한테 그 주소를 전하지. 그리고 그 일을 참을 수 있는 심경에 이르면 그 땐 당신
곁으로 돌아가려오. 하지만 내가 당신을 찾아가기 전에 당신이 날 찾아오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이 준엄한 선고를 테스는 순순히 받아들인 채 고향으로 향하는 다른 마차를 탔다. 
마차가 언덕을 기어오르고 차츰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에인젤 클레어는 다음과 같은 
시의 한 귀절을 읊조렸다


  '주님은 천국에 계시지 않고
  세상은 온통 잘못 투성이'

 


  테스가 언덕 마루를 넘어간 뒤에야 에인젤은 자기 갈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디를 
가도 마음의 고통을 풀 도리가 없었다. 그는 십자가와 같은 번뇌를 등에 지고 마침내
고국을 떠나 멀리 브라질로 가버렸다. 고국이라도 아득히 떠나 있으면 마음의 고통이 
풀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블랙모어 분지로 마차가 접어들자 어릴 적 눈익은 풍경이 사방에 전개되어 테스는 
혼미한 상태에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부모님의 
얼굴을 대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손에 든 보따리는 가벼워도 마음 속에는 무거운 짐을 진 테스는 지금 온 세상에
갈 곳이란 여기 만한 데도 없다는 듯 친정집 문간을 찾아들고 있었다. 시집 간 딸이
소식도 없이 찾아 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어머니는 테스를 보자 깜짝 놀라 말을 했다
  "아니, 테스 아니냐. 그래 네 신랑은 어디 있니?"
  어머니는 놀라움과 불안이 섞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테스는 흐느껴 울면서 대강을 
얘기했다. 
  "그렇게까지 주의를 했는데도 넌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바보지 뭐냐"
  더버빌 부인은 흥분을 이기지 못해 테스에게도 자기 몸에도 물을 마구 뿌리면서
고함쳤다
  주정뱅이 아버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문을 퍼뜨려 부러워하던 테스의 결혼이
도리어 동네 사람들의 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테스는 괴로웠다. 그러나 그 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한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지금도 테스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진심으로 사랑하던 그 사람은 그 때문에 자기를 떠나 멀리 브라질까지 가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스의 앞길은 암담했다. 게다가 집은 가난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찌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내내 바보라고 꾸짖기만 했다. 테스는 눈물을 감추고
되도록 열심히 일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집안 식구들에게 에인젤이
다시 자기를 찾는다고 말하고 일자리를 얻어 집을 떠났다. 테스는 맡은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동생 리자루의 기별이 와서 급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죽게 되고 
아버지 역시 중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회복되었으나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한편 알렉은 그 동안 개심을 하고 캠프나 기타 종교 회합에서 설교를 하며 시골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회합에서 그는 우연히 테스를 보았다. 그리고 또 뒤를 따라
다녔다. 테스에 대한 연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처녀의 징조를 유린하고 그로 인해서 평생을 파멸시키고 있는 
알렉의 손길이 다시 테스에게 뻗쳐 왔다. 그는 종교 순회를 집어치우고 
플린트콤애쉬로 테스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알렉은 자기가 테스의 진짜 남편이며
에인젤 클레어는 결코 테스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결혼을 요구했다
  테스는 에인젤에게 호소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는 회답이 오지 않고 알렉의 구혼은 점점 더 집요해졌다. 
게다가 가난에 시달린 더버빌 가에 대한 알렉의 친절과 클레어의 이해할 수 없는
무소식이 겹쳐 차츰 테스를 궁지에 빠뜨렸다. 테스의 어머니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알렉의 집안은 너도 알다시피 이 근처에서 제일 가는 부자다. 사실 또 네게
처음으로 남자란 걸 알게 해 준 인연도 있지 않니 그러니 이런 얘기가 나온 건 아주
다행한 일이다"
  테스는 이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 걸음 더 파고 들며
얘기했다
  "생각해 보렴. 네가 그만큼 솔직하게 과거를 말했는데 그렇다고 널 버리고 타국에 
간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매정한 사람이지 뭐냐. 그런 박정한 남자한테 의리를
지키다니 넌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니?"
  "그이는 반드시 돌아올 거에요"
  "참 딱하기도 하지. 글쎄 돌아올 리가 있겠니. 첫날 밤에 신부를 안아보지도 않은 
남자가 어떻게 돌아온단 말이냐. 거기 비하면 알렉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네게 대한 책임을 느끼고 청혼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알렉과 결혼을 하면 우리는 이 
집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동생을 학교에 보내게 되며 남부럽지 않게 살게 아니냐. 내
말만 들으면 틀림이 없다"


  테스는 무척 괴로웠다. 브라질에 있는 에인젤에게 또 편지를 썼다


  '그리운 남편에게 당신을 이렇게 부르게 해 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이
세상에 정녕 당신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에인젤! 저는 지금 무서운 유혹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상대가 누구라는 것도 너무도 지겨워 차마 말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다시 한 번 지난 날의 목장 시절과 같이 저를 사랑해 주실 수 있다면 
곧 돌아와 주세요. 그렇게 안 되면 저를 당신 곁으로 데려가 주세요. 저를 당신의
아내로 하실 수 없다면 하녀라도 좋습니다. 당신이 오든지 아니면 제가 당신 곁으로
가지 않으면 저는 죽을 도리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정 당신을 위해서는
깨끗이 죽을 것이며 또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살겠어요. 입 밖에 내고 싶지도 않은
알렉과 결혼을 강요당하고 있고 어머니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와
결혼을 한다면 우리 집은 가난으로부터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당신을
무정하고 모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코 당신은 저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런 일은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구하러 돌아와
주세요. 곧 돌아오실 형편이 못된다면 얼마 후에 돌아온다는 편지를 보내 주세요 
저는 아무래도 올가미에 걸려서 영원한 함정 속에 빠지고 말 것 같습니다. 빨리 저를 
만나 주세요. 당신의 테스는 주님께 맹세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신께만 순정을 바치는 
애타는 테스 올림'


  이러한 편지를 발송한 테스는 에인젤의 회답을 받은 뒤에 자기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어머니께 약속했다. 테스는 편지가 가고 올 날짜를 계산하며 남편의 답장을 고대했다. 
그러나 답장이 올 날짜가 훨씬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알렉도 어머니도 그것 보라는 듯이 테스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알렉은 때로는
에인젤이 영국에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친구에게 써 보내온 편지를 보고 왔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테스는 이제부터 석 달만 더 기다려 보아 회답이 없을 경우에 
결혼하겠다고 말하며 승낙하지 않았다. 어느덧 3개월도 흘러갔건만 에인젤로부터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매일 문간에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소식이 온 것이 아닌가 그이가 돌아온
것이나 아닌가 하고 가슴을 죄며 기다리던 보람도 없이 공허한 날만 지나갔다. 테스는 
절망과 자포 자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빈곤한 살림이 테스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더욱 꾸짖기만 했다. 테스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알렉의 청혼을 수락하여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에인젤에게는 마지막 원망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테스의 애통함을 보다 못하여 옛 목장 시절의 두 처녀는 에인젤에게 편지를 보냈다
  '선생님 부인이 선생님을 사랑하는 만큼 선생님도 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부디 
부인을 돌보아 주세요. 그 이유는 부인은 지금 친구의 탈을 쓴 원수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멀리 쫓아 버려야 할 사람이 도리어 부인 곁을 추근추근
따라다니고 있어요. 여자에게 자기 힘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을 주어서는 안 될
거에요.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이라도 아니 그 이상의 다이아몬드라도 뚫어
없애고야 말 거에요. 테스의 행복을 비는 두 친구로부터'


  테스는 알렉으로부터 선사받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맥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알렉은 테스를 데리고 샌드번으로 가 신혼 가정을 이루었다
  에인젤 클레어는 브라질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더구나 처음부터 몹시 건강을 해쳤기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귀국 길에 그는 어떤 영국 사람을 만나 그에게 
자기 결혼에 대한 얘기를 고백했다. 그 사람은 클레어에게 부인과 화해하라고 권고했다. 
클레어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 그는 테스를 찾기 시작했다. 에인젤은 테스가 샌드번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기차를 타고 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테스의 주소를 물었다
  알렉과 테스가 결혼한 지 며칠이 안되는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어떤 남자가
알렉 더버빌 부인을 만나러 왔다는 집 주인의 전갈을 듣고 테스가 아무런 생각없이
현관에 나갔을 때 안색이 나쁜 한 남자를 보았다
  "테스!"
  "에인젤..."
  에인젤은 두 팔을 내밀었으나 팔은 다시 양 옆으로 힘없이 내려갔다. 테스가 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한낱 황색 해골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 에인젤은 두 사람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느끼고 자기의 외양이 테스에게 불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겁하게 도망간 나를 용서해 주겠소? 테스!"
  "이제는 너무도 늦었어요"
  테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왜 당신은 좀더 빨리 돌아와 주시지 않았어요? 그처럼 저를 기다리게 해 놓고"
  "테스, 난 거기서 열병으로 누워 지냈고, 당신 편지는 5개월이나 늦게야 내 손에
들어왔던 거요"
  "정말 퍽 마르셨어요. 에인젤 지금은 저 알렉의 아내예요. 그인 지금 윗층에 있어요. 
이 옷도 그이가 입혀 준 거에요. 에인젤 제발 곧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오시지 
말아 주세요"
  "물론 내가 나빴어. 테스 용서하오. 내 딴에는 편지를 받아보자 곧 병석에서 일어나 
돌아오느라고 왔는데도, 결국 이미 늦었구려"
  에인젤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에인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거운 다리를 끌며 알렉의 동네에서 빠져 나왔다. 간밤에 묵은 여관에
들렀다가 곧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마치 테스가 신혼 여행 때의 여관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와 같은 고민이 에인젤을 사로잡았다. 그는 차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심정이 아니어서 다음 정거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신작로는 얼마 안 가서 내리막길이 되고 움푹한 골짜기가 뻗어 있었다. 이
골짜기를 가로질러서 서쪽의 오르막길을 가다가 숨을 돌리려고 발을 멈춰 무심히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걸어온 길 저쪽에 자기를 향해서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테스일까 싶어 기다려 보았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헐떡거리며 뛰어온 사람은 분명히 테스였다. 테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신이 정거장에서 나와 이리로 오는 걸 봤어요"
  에인젤은 여자의 손을 쥐어 겨드랑이 밑에 끼고 전나무 아래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에인젤! 왜 제가 당신 뒤를 쫓아왔는지 아시겠어요? 전 그 사람을 죽이고 왔어요. 
전 기어이 해치우고 말았어요. 제가 당신을 생각하고 울고 있을 때에 그는 당신을 마구 
욕하지 않겠어요. 전 벌써부터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들을 망쳐 놓은 거에요. 전 그 사람에게 짓밟히며 거짓 속에서 일생을
보낼 순 없어요. 에인젤 제가 당신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절 사랑한다고 
한 마디만 말해 주세요. 네 어서 절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에인젤 클레어는 파르스름한 입술로 테스에게 키스하고 여자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난 절대로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테야. 과거에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 말이야"
  두 사람은 아래로 한없이 걸어갔다. 그리하여 산 속에 있는 어느 나무꾼의 빈
움막에 들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안주할 곳을 발견한 듯 흐뭇한 마음으로 포옹했다. 
그들은 이 집에서 이틀을 묵었다. 생애를 건 지극한 사랑을 다만 이 자리와 이 한
순간에 기울여 테스는 에인젤에게 매달렸다. 에인젤도 테스를 사랑했다
  그들은 낮에는 숲 속에서 쉬다가, 밤이면 어둠을 타고 도망을 쳤다. 북쪽으로 가서 
항구로 빠져나가 도망하려는 것이 에인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비장한
사랑도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여보, 제가 죽더라도 제 동생 리자루를 돌봐 주세요. 만약 그 애가 당신 것이
된다면 제가 죽은 후에도 우리 사이가 멀어지지도 않을 거에요. 여보 에인젤, 우리는
저승에 가서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테스가 눈물을 머금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산에 들어온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수색대는 이들을 포위했다. 먼저 눈을 뜬 에인젤은 그들에게 낮은
소리를 냈다


  "테스가 잠이 깰 때까지 좀 참아 주십시오"
  그들은 말없이 석상처럼 서서 테스의 잠자는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테스는 에인젤에게 
  "이 행복이 언제까지 갈 리 없어요. 지금까지도 저에겐 과분했어요. 저는 마음껏
행복을 누린 셈이에요. 이젠 더 살면서 당신에게 멸시 당한 일도 없게
되었어요" 하고 일어서서 수색대원 앞으로 나가며 
  "포승줄로 묶으세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일찌기 웨섹스의 수도였던 아름다운 옛 도시 윈톤세스터 시에는 붉은 벽돌집 한
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은 테스가 갇혀 있는 감옥이었다. 이 건물에는 팔각형의 
높은 탑이 솟아 있고 그 탑 꼭대기에는 길다란 깃대가 서 있었다. 
  극도로 쇠약한 에인젤 클레어와 키가 후리후리하고 한창 피어나는 그의 처제
리자루는 언덕 위에 서서 이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가 여덟 시를 친 지 몇 분 후에 검정 깃발이 느릿느릿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것이 7월의 아침 바람에 펄럭거렸다. 검은 깃발은 사형을 집행했다는
표시였다


  드디어 심판은 끝났다. 여러 신들의 말을 빌리면 거느리는 자는 마침내 테스에 대한 
희롱을 끝마친 것이다. 그러나 더버빌 가의 옛 조상인 기사들이며 귀부인들은 무심히 
무덤 속에서 잠들고 있었다. 말없이 바라보고 섰던 에인젤과 리자루는 마치 기도를
올리듯 땅 위에 쓰러져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있었다. 검정 깃발은 말없이 바람결에 
나부끼고만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은 두 사람은 일어서더니 다시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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