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풍속-김기림
by 송화은율태양의 풍속
-김기림
태양아
다만 한 번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두루미의 목통을 빌려 오마. 나의 마음의 무너진 터를 닦고 나는 그 위에 너를 위한 작은 궁전(宮殿)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 속에 와서 살아라. 나는 너를 나의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 그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
태양아
너는 나의 가슴 속 작은 우주의 호수와 산과 푸른 잔디밭과 흰 방천(防川)에서 불결한 간밤의 서리를 핥아버려라. 나의 시냇물을 쓰다듬어 주며 나의 바다의 요람을 흔들어 주어라. 너는 나의 병실을 어족들의 아침을 다리고 유쾌한 손님처럼 찾아오너라.
태양보다도 이쁘지 못한 시. 태양일 수가 없는 서러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 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이 밤을 세워 가며 기다린다.
<기상도, (자가본), 1936>
작가 : 김기림(1908-?)
호는 편석촌(片石村). 함북 성진 출생. 니혼[日本]대 문학예술과와 도호쿠[東北]제대 영문과 졸업. 1933년에 이효석 등과 구인회를 창설하고, 1935년에는 장시 <기상도>를 발표.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의 조직활동 주도.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적 모더니즘 문학 운동을 선언하고, 자연발생적 시를 배격하고 주지성을 강조하였으며, 감상성(感傷性)의 거부하면서 문명 비평의 정신을 앙양하고자 하였다. 이론과 창작을 겸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로서 활약하였다.
시집으로 『태양(太陽)의 풍속(風俗)』(1939), 『바다와 나비』(1946), 『새노래』(1948) 등이 있고, 또한 시론집으로 {문학개론}(1946), {시론(詩論)}(1947), {시의 이해}(1950)가, 수필집으로는 {바다와 육체](1948)가 있다.
< 감상의 길잡이 >
이 시는 이론과 창작에서 두루 모더니즘 시의 새로운 풍조를 표방했던, 김기림의 대표작으로서 시집의 표제가 되기도 했다. `태양'은 밝고 희망에 찬 `광명세계'의 주인이며 그 원인(原因)이다. 화자는 `태양'을 소리 높여 부르면서 그를 곁에 데려오기 위한 자신의 애절한 각오를 피력하며, 그의 강림이 가져올 세상의 긍정적 변화를 꿈꾸고 또한 나열하고 있다. 태양을 부르기 위해 `두루미의 목통을 빌어오'겠다는 표현은 각별히 재미있다. 시인에게 두루미의 목통은 아마 힘차고 지치지 않는 절규의 화신이었던 모양이다. 시인은 태양을 불러와 궁전에 모시고, 그를 어머니, 고향, 사랑, 희망이라 부르겠다고 다짐한다. 두번째 연에 이르면, 시인이 믿는 태양의 밝은 역할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태양은 서리를 없애 버리고, 시냇물과 바다에 생명을 주며, 병을 앓고 있는 시인을 위로해 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태양은 오지 않아서 시인에게 어두운 갈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마지막의 짧은 연에 여실히 드러나 있기도 하다.
병을 앓고 있는 시인의 처지와, 서리로 표현되는 현실의 냉혹함, 그리고 어머니, 고향, 사랑, 희망의 부재 등의 질곡을 일거에 뒤바꿀 수 있는 태양은 아직도 시인의 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시의 힘은 주술적 연원에 여전히 닿아 있다. 부재하는 것을 있게 하려는 주술적 힘의 현대적 의미는, 부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막연하고 허탈한 공상을 뛰어넘어 새로운 노력의 씨앗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해설: 이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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