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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 소설 / 문학기행 / 여순사건 / 조정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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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태백산맥 소개

  「태백산맥」은 소설의 서막부터 묽은 어둠의 장막에 가려진 새벽 풍경을 묘사함으로써 수많은 죽음과 희생을 예고하는 한편으로 사멸의 결말을 암시하면서 벌교라고 하는 자그마한 지역을 중심으로 270여명의 등장인물들이 이념의 대립과 다양한 모습으로 불행했던 한 시기를 헤쳐 나가는 모습을 그렸다. 


  원고지 1만 5천 7백 여 매, 한의 모닥불, 민중의 불꽃, 분단과 전쟁, 전쟁과 분단 등 4부작 10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1983년 9월부터 월간지 현대문학에 연재되기 시작해 1986년 제1부 3권을 단행본으로 출간한데 이어 1987년 제2부 2권이 출간되었고 1988년 제3부 2권, 1989년 제4부 3권이 출간됨으로써 전 10권이 완간 되었다.


  『태백산맥』은 발표 당시 문단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내용상 용공적인 작품성향을 띄고 있다고 작가와 출판사를 대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 고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런 논란 와중에도 완간된 지 2년도 못 되어 2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태백산맥』이 그러한 사회적 화제 거리가 된 것은 이전의 분단문학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백산맥」이라는 제목이 갖는 의미는 한반도의 척추로써 남북으로 잘린 허리를 말하며 곧 민족분단을 한마디로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소설 태백산맥의 고향이 바로 보성의 벌교읍이다. 보성읍에서 국도2호선을 따라 순천방면으로 가다보면 30㎞지점에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인 벌교읍에 도착한다.(순천에서도 약 30분 거리에 벌교는 위치해 있다.)


  「태백산맥」은 벌교에서 시작하여 만주, 서울, 부산, 강원도까지 배경이 넓혀지지만 소설의 중심공간은 항상 제한된 공간에 두고 있고 결국 벌교라는 작은 공간에서 염상진, 김범우, 염상구, 소화, 서민영, 외서댁, 안창민, 이지숙, 들몰댁 등 많은 등장인물들이 크고 작은 사건들을 걸쭉한 육담과 전라도 방언으로 리얼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태백산맥」은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지만 작가가 생활했던 벌교를 소설속의 무대로 삼은 관계로 현실의 벌교에는 소설속의 사건들이 펼쳐졌던 이런 저런 장소들이 소설과 똑같은 위치에 있어 사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소설을 열어가는 현부자집, "그 성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엇간디라"로 방죽 쌓던 일의 어렵고 힘들었음이 잘 묘사된 중도방죽, 포구의 양안을 이어주는 소화다리, 염상구가 희한한 결투를 벌였던 철다리, 벌교의 이름이 비롯된 홍교,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회정리, 돌담교회, 좌우로 첩첩 산줄기들이 뻗어 내려오다 문득 만들어낸 커다란 물사발 같은 율어의 지세 등.......


  최근 들어 소설을 읽고 소설무대를 체험하기 위해 벌교를 찾는 문학기행과 현장답사를 하는 관광객들이 날로 늘어나는 추세에 있으며, 소설 「태백산맥」 무대의 문학기행과 함께 벌교옹기, 천연염색, 차, 용문석 등 전통문화 체험과 채동선생가, 나철선생 유적지, 부용산 공원, 낙안읍성민속마을 등을 연계 관광할 수 있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남도문학기행 사이트에서 인용)


태백산맥 문학기행

  [태백산맥] 기행은 순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순천 자체가 무대의 중요한 한 부분인데다가, 주무대인 벌교와 바로 맞붙어 있으며, 전국 어디서나 접근하기 좋게 교통편이 두루 발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순천까지는 항공편(여수공항은 이름과는 달리 여수와 순천의 중간 어름에 있다), 철도편(서울서 하루 3회 새마을. 5시간 남짓), 고속도로(서울 강남터미널에서 고속버스 30분 간격. 4시간 남짓)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순천에서 벌교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오금재와 진트재. 두 고개가 모두 작품에서도 중요한 곳인데다가 같은 길을 두 번 볼 까닭이야 없을테니, 갈 때 올 때 서로 다른 고개를 통하는 것이 좋겠다. 단, 순천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라면(강진 해남 광주 목포 등 방면으로 들러볼 코스는 많다), 오금재길을 권한다. 진트재는 벌교에서 가까우니 읍내에 들어간 뒤에라도 5분쯤만 가면 볼 수 있다. 


  오금재를 통하면(857번 도로) 수줍은 고찰 선암사(특히 '해우소'를 놓치지 말 것), 절 옆의 조정래 생가터를 보고 낙안민속마을을 한바퀴 돈 뒤에 벌교로 가면 된다. 진트재를 통하면(2번 국도) 고개 위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벌교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고, 작품 속에서 빨치산들이 군용열차를 습격한 현장으로 설정된 진트재터널도 볼 수 있다. 


  벌교에 들어가서 배가 출출하면 홍교 부근의 벌교우렁집((061-857-7613), 또는 역전 부근에 있는 조정래선생의 단골집 역전식당(061-857-2073)과 강남식당(061-857-7528)을 추천한다. 우렁탕집은 우렁회에 밥을 비벼먹는 맛이 일품이고, 다른 식당들에서는 5천원짜리 백반만 시켜도 벌교의 명물 꼬막이 딸려 나온다(물론 꼬막이 나지 않는 한여름엔 어렵지만). 또한 남도의 별미인 짱뚱이탕을 맛보는 것도 좋다. 이 세 식당은 50~7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으며 벌교에서는 가장 큰 편이다(저개발지역임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단체관광객이라면 이 식당들로 분산해야 한다.


  벌교의 모든 곳이 다 [태백산맥]의 무대이다. 그러니 무대기행 역시 한도 끝도 없지만, 사람의 시간과 인내심에는 늘 한계가 있다. 꼭 들러보아야 할 곳들은 현부자네 별장(소화의 집터), 야학교회, 중도방죽(철교), 소화다리, M1고지(벌교공원), 홍교, 김범우의 집, 진트재, 오금재 등이다. 이 책에서는 숱한 무대들 중에서 이 곳들만 떼어내서 둘러보기로 한다. 이곳들만 둘러보아도 4~5시간은 잡아야 하고 눈과 다리의 피로가 상당할 것이다. 


  빨치산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 [부용산 ] 정도를 CD로 준비하면 더 좋다. 안치환의 것이 원곡과는 좀 달라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정돈된 느낌이 들어 괜찮다. 망원경도 미리 준비하면 진트재, 오금재, 벌교공원 등에서 벌교읍내 전체를 조망하기에 좋다. 


  벌교는 작은 읍이다. 호텔은 물론 없으며 '장급 여관'들 뿐이다.(숙박정보 클릭) 비교적 깨끗하기는 하지만 벌교에서 숙박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순천으로 다시 나오거나 보성 강진 등으로 가서 다음 일정을 준비한다. 뜻이 있는 사람들은 벌교에서 묵으면서 천연염색장 한광석의 작업장, 옹기장, 용문석 공장 등을 찾아보면 색다른 체험이 될 것이다. 물론 모든 분들이 자기 일정을 지닌 예술인들이니, 미리 전화로 방문 허락을 받아야 한다. 


- 한만수 교수(문학평론가, 순천대 국어교육과), 남도문학기행 사이트에서


소설 <태백산맥> 작품과 관련한 여순 사건 자료 모음

 여순사건의 배경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제1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친일관료와 우익 청년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협소한 지지기반과 이후 각료선임과정에서 한민당과의 갈등, 좌익세력의 격렬한 저항, 심화되는 민생문제 등으로 출범 직후부터 휘청거리고 있었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2.7구국투쟁, 제주 4.3민중항쟁, 5.10단독선거 반대투쟁 등의 좌절을 겪으면서 새로운 투쟁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의 일반적인 정세 속에서 여수, 순천, 여천, 승주, 보성, 구례, 광양, 곡성, 고흥 등 전남 동부지역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가 온건하였고, 1948년 초까지도 도내 다른 지방에 비해 좌우익이 어느 정도 공존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5.10단독선거 저지투쟁'과정에서 나타난 군중들의 투쟁의 파고가 그 밖의 다른 지역보다 그다지 높지 않았던 까닭에 해방 이후 인민위원회와 그와 연관된 조직이 파괴되지 않고 계속 온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5.10선거 직전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다른 지방에 비해 매우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참여 양상을 보였다. 이 당시 여수 중학생들의 동맹휴학은 여순사건 폭발 시 봉기군인들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을 맺은 집단이 학생이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즉 1948년 전반기의 정치투쟁과정에서 여순 지역은 전남도내 다른 지방에 비해 온건좌익과 동조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남로당의 입김은 미약했다. 하지만 이 지역은 5.10선거 후 남로당이 7월 15일부터 실시한 '지하선거'와 9월 이후부터 본격화된 '인공기 게양투쟁'과 '미소 양군 철수 요구투쟁'을 통해 상대적으로 급진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1948년 5월 초, 확군작업의 일환으로 광주의 국방경비대 제4연대 1대대를 근간으로 한 여수 제14연대가 창설되었다. 이 부대의 창설은 여순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다.


 그 이유는 첫째, 기간요원 가운데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지창수 상사(인사계)를 비롯하여 김지회 중위(대전차포 중대장), 홍순석 중위(순천 주둔 중대장) 등 좌익계 간부들이 연대 내에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사병의 모병작업이 전남 일원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신원조회 없이 실시됐던 까닭에 경찰의 수배를 받는 좌익계열이 다수 입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14연대는 전남 지방 좌익들의 은둔처로 변했고 좌익의 선동에 쉽게 동조할 수 있는 계층 출신의 사병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요컨대 당시의 상황은 이승만 정권이 불안정하게 출범한 가운데 좌익세력이 단선단정 반대투쟁의 좌절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순 지역 좌익들의 조직보존과 학생들의 상대적인 급진화, 그리고 결정적으로 14연대의 여수 주둔 등은 여순사건을 발발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사건의 발발과 확산

  1948년 제주 4.3 민중항쟁 발발 이후 10월에 들어서면서 제주도의 유격대는 재차 공세를 강화하면서 각처에서 토벌대를 위협했으며, 이에 대해 이승만 정군은 계속적인 병력투입으로 그 위협을 극복하려 했다. 이런 와중에서 갑자기 10월 15일경, 국방경비대 사령부로부터 제14연대에 10월 19일 오후 8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갑작스런 제주도 출동명령은 제 14연대내 좌익계 사병들에게 동족상잔과 반란 중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다.


 10월 19일 밤, 제주도로 출발하는 해군 상륙정에 몸을 실어야 하는 순간, 이 연대의 좌익 세포 책임자 지창수 상사 등 핵심 세포 40여 명은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었다. 1대대 사병전원이 연병장에 집결한 가운데 지창수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 반대, 경찰타도'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 민중의 군대로 행동할 것'을 호소하였고, 대다수 사병들이 이에 적극 동조하였다. 이리하여 출동부대는 반란군으로 돌변하였고, 여기에 나머지 2개 대대도 합류하여 반란군은 2천5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곧이어 인민군 편성을 마치고 그 날 밤 11시 30분경 여수 읍내로 진격하였다. 
  20일 새벽 1시 20분경 여수 읍내로 진입한 반란군은 읍내 좌익단체와 학생단체원 6백여 명에게 무기를 지급하였고, 이들 반란군과 좌익청년들은 오전 3시경 여수경찰서를 접수하고 5시경 여수 읍내 각 관공서와 중요기관을 점거하여 날이 밝아오기 전에 이미 여수읍은 그들 치하에 들어갔다. 이어 10시경부터 보안서와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좌익청년들의 주도 아래 피신한 경찰, 우익 주요인사와 청년단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여수를 점령한 반란군 가운데 2천여 명이 당일 오전 열차와 차량을 이용하여 순천으로 향했다. 한편 20일 새벽의 상황을 무선으로 접한 순천경찰은 인접 군 경찰병력의 지원을 받아 반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 지역은 여순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홍순석 중위를 중심으로 하는 제14연대 2개 중대와 20일 새벽 광주에서 파견된 제4연대 1개 중대 병력이 방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 9시 30분경 반란군 선발부대 7백여 명이 기차로 도착하자,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 2개 중대가 반란군에 전격 합류하여 함께 순천읍을 공격하였다. 이내 제4연대 1개 중대도 사병들이 폭동을 일으켜 반란군에 합류하여 12시경 순천읍을 포위하였다. 한편 순천읍을 방어하던 군이 반란군에 합류한 가운데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피신하는 데 급급하였고, 오후 3시경 순천은 반란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다. 순천이 점령되자 좌익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무기가 지급되었고 그들은 경찰과 우익들을 색출하는 데 앞장섰다. 


 반란군 점령 지역

  전남 동부지역의 교통 중심인 순천을 점령한 반란군의 주력은 구례, 곡성, 남원방면으로, 일부는 반란군 점령하의 여수, 순천 그리고 그 밖의 주변 군에서는 경찰, 우익인사와 청년 등의 색출과 즉결처분, 인민위원회의 행정장악, 대규모 군중참여라는 공통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여수의 경우 반란군이 좌익청년과 학생들을 앞세우고 본격적으로 경찰, 우익인사와 청년들을 색출하기 시작한 것은 반란 시작 14시간 후인 20일 오전 10시부터였다. 경찰은 색출 즉시 대부분 살해되었고 극우분자들은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넘겨졌다. 반란군의 여수 점령기간 중 즉결처분이나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된 인원수는 2백여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경찰이 74명이었다. 순천의 경우는 사건의 진원지가 아니었음에도 4백여 명이 피살되었으며 그 중 경찰은 186명이었다. 한편 여수․순천을 제외한 나머지 군들에서 경찰과 우익은 반란군에 의한 처형 소식을 듣고 대부분 도주하였으므로 그만큼 피살자가 적었다.


  한편 사건 발발 지역 중에서 보안서와 인민위원회의 행정이 대체로 견실하게 이루어진 곳은 여수와 순천뿐이었다. 그 밖의 지역은 반란군의 점령기간이 짧았고 토착좌익의 조직력의 미비로 인해 인민위원회의 틀이 거의 갖춰지지 않았다. 


  여수 지역만을 살펴보면, 20일 반란군에 의해 전시내가 점령되자 인민위원회 간판이 나붙고 오후 3시 반경 중앙동 광장에서는 반란군과 지하에서 활동하던 각 단체의 주도 아래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인민대회가 열려 북한에 대한 충성맹세, 토지개혁 등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21일에는 인민위원회가 기능을 시작하여 친일파 등에 대한 재산 몰수령이 내려지고 우익 청년단원들에 대한 문초가 시작되었다. 22일에는 곡물창고를 개방하여 쌀을 배급하였고, 23일 오후 2시에는 중요 처단대상 반역자에 대한 사형집행이 보안서 앞에서 집행되었다. 이 날 처형된 사람은 김영준(한민당 여수지부장), 박귀환(대한노총 여수지구 위원장), 이광선(미군방첩대 여수주재원), 박창길(사찰계 형사) 등 9명이었다. 24일 이후에는 토벌군의 공격에 대한 대응이 중심을 이루었다. 


  여순반란에 대한 여수, 순천지역민들의 태도는 이에 적극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예컨대 10월 20일 오후의 인민대회 참여자의 수, 인민위원회의 행정에 대한 적극적 참여 등에서 이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의 지방 군들에서는 여수와 순천에 비해 도시지역이 아닌 관계로 인한 군중동원의 어려움, 지방좌익들의 상대적 약화 등으로 인해 지역민들의 참여가 미약했다.


 여순사건의 진압

  여순사건에 접한 이승만 정권은 10월 21일 반군토벌 총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고 총 10개 대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포위하고 여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진압작전의 1단계는 순천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진압군은 23일 아침 7시 81밀리 박격포 사격과 L-4정찰기의 공중지원을 받으며 장갑차 부대를 선두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진압군의 총공격으로 김지회 등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 방면과 인근 산악 지대로 후퇴했으며, 읍내는 경무장한 좌익청년과 학생들이 치열한 시가전으로 맞서고 있었다. 결국 처참한 살육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오전 11시경 순천은 진압군에게 점령되었다.


 제2단계 진압작전은 광양방면의 봉기군 주력을 섬멸하는 것과 여수를 탈환하는 것이었는데, 여수 진압작전은 24일 여수만을 포위한 상태에서 개시되었다. 이 때 여수의 초입인 미평 근처에서 매복 중이던 봉기군의 기습으로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반군토벌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철모에 총탄을 맞고 장갑차에서 떨어졌다. 그는 고막이 터지고 허리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이 매복 기습으로 3연대 병력 270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틈에 반란군의 주력 일부는 벌교와 지리산 방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가운데 여수 시내는 14연대 반란군 2백여 명과 약 천 명의 청년학생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25일 진압부대가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가지에 박격포 사격을 퍼부으며 연 이틀 공격을 계속하였고, 이에 대항한 저항세력은 시가전의 와중에서 다수의 희생자를 낳았다. 진압군은 27일 오후에야 여수를 완전 점령할 수 있었다. 진압된 여수 시내에는 희생된 반란군과 청년 학생의 시체가 즐비했고, 무자비한 박격포 사격으로 대형 화재들이 발생하여 시내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진압군의 여수 점령을 마지막으로 여순 봉기는 일단 매듭지어졌고, 경찰과 공공기관이 업무를 재개하였다.
 한편 여순 지역을 평정한 정부는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내린 후 가정 먼저 봉기군과 동조자를 철저하게 색출, 처벌하는 작업에 나섰다. 진압군의 가혹한 처벌정책은 동족에 대한 아량이나 연민의 정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즉 누가 부역자인지 판단의 객관적 근거가 부재한 상태에서 경찰, 우익인사, 청년단원 등 봉기군 치하에서 가장 피해를 본 세력들에 의해 민간인 참여자의 색출작업이 진행되었고, 그것은 보복 테러와 무차별적인 학살로 귀결되었다. 무고한 청년들이 단지 학생복을 입은 죄, 흰 운동화를 신은 죄, 국방색 런닝셔츠를 입은 죄, 머리를 짧게 깎은 죄, 과거에 좌익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다는 죄, 가족과 친구 가운데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죄 아닌 죄로 젊음을 마감해야 했다. 


  11월 말, 봉기로 인한 사상자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진압군 측 군인 141명이 사망하고 263명이 실종되었으며, 391명이 봉기군에 합류했다. 한편 봉기군 측에서는 821명이 사망하고 2,860명이 사로잡혔다. 민간인 사상자에 대한 총계는 찾아볼 수 없지만, 순천에서만 5백여 명이 사망한 것을 볼 때 여수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수가 사망했을 것이다. 또한 1,714명의 봉기 참여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여기에서 866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순사건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그것은 제14연대 내의 좌익조직과 그 동조세력이 제주 출병에 반대하며 자연발생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었다. 한편 이 사건의 확산은 기본적으로 반란군의 무장력과 지역 토착좌익의 조직력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강력한 진압에 의해 저지되면서 엄청난 민중의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나 사건은 그 자체로 마무리되지 않고 많은 파장을 몰고 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대한(對韓)군사원조를 재검토하여 군사지원을 강화하였으며 주한미군의 철수를 1949년 6월로 연기시켰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군내 좌익세력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숙군이 시작되었다. 무려 전군의 약 9%에 달하는 4,749명이 처벌됨으로써 숙군은 남로당세력들뿐만 아니라 광복군계를 포함한 대부분의 반이승만 성향의 군관계 인물들을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숙군으로 정권안정의 발판이 마련된 이승만 정권은 계속해서 군대와 경찰의 증강, 국가보안법, 국군조직법, 임시우편단속법 등의 입법, 우익 청년단체의 통폐합, 호국군과 향토호국단 창설 등을 통해 반공국가를 강화시켜 나갔다. 


  한편 좌익세력에게 여순사건은 남한에서 무장유격투쟁이 가시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의 진압과정에서 김지회 중위 등 반란군 1천여 명이 지리산과 광양 백운산으로 들어가 장기 항전을 시작한 것이 남한 무장유격투쟁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었고 그것은 한국전쟁발발 이전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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