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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 / 초서(Geoffrey Chaucer)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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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 / 초서(Geoffrey Chaucer) / 김진만 옮김

 

전시(全詩)와 서시(序詩)

4월의 감미로운 소나기가

3월의 가뭄을 속속들이 꿰뚫고

꽃을 피게 하는 습기로

온 세상 나뭇가지의 힘줄을 적시어 주면

서녘바람 또한 달콤한 입김을

산나무 밭 애송이 가지의 끝과 끝 속에 불어 넣어 준다.

나 어린 태양은 백양궁의 반 행정(멀리 가는 길)을 마쳤을 뿐이며

작은 날짐승들은 저마다 노래를 부르고……

자연이 하도 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해서……

밤이면, 온통 뜬 눈으로 잠을 잔다.

사람들이 순례를 갈망하는 것은 이 때,

성지 순례자들은 낯선 나라들에 마음이 쏠리고,

먼 나라

고장마다 널리 칭송되는 여러 성인들의 묘소를 찾으려 한다.

특히 영국에서는 고을마다 앞을 다투어

캔터베리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병들어 고생할 때, 그들을 도와 준

거룩하고 복된 순교자를 찾아간다.

이 계절의 어느 날,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켄터베리로의

순례를 작정하고,

싸자크의 타바트 여관에 투숙했다.

밤이 되자 그 여인숙에는

스물하고 아홉 사람의 한 떼가 들었다.

우연히 동행이 된 형형색색의 이 사람들은

모두 순례자들이었고,

찾아가는 곳은 캔터베리.

객실과 마굿간은 모두 널찍널찍하고,

우리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해가 져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나는 그들이 하나 하나와 인사를 나누고,

곧 동행자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 일찍 일어나,

캔터베리를 향하여 출발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너무 진행해서

때를 놓치기 전에

나는 동행자들의 각자의 외양이며,

생업, 지위,

그리고 그들의 옷차림 등을

눈에 띈 대로 미리 알려 두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 같다.

그러면 기사(騎士)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일행 중에 으뜸인 기사는 그 위인이 훌륭하고

싸움터에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기사도를 사랑하고,

줄곧 진실과 명예, 너그러움과 예절을 아껴 지켰다.

국왕의 싸움에서는 언제나 뛰어나게 큰 공을 세웠고,

거기에다, 기독교의 나라나 이교의 나라를 가릴 것 없이

그의 무사로서의 역량은 언제나 큰 칭송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가 함락했을 때, 그곳에 있었고

프러시아에 가면, 딴 나라 기사들을 누르고,

으레 식탁의 상좌에 자리 잡았다.

리투아니아와 러시아에 원정했으며,

그와 같은 지위의 교인치고 그처럼 자주 원정을 간 사람은 없었다.

알제시라스의 포위전 때에는 그라나아다에 있었고,

벨마리에도 출전했다.

리에이스와 사탈리아의 공략전에 참가했으며,

지중해 지역에서의

많은 성스러운 원정에도 끼었다.

생사를 건 격전에 참가한 것만도 열다섯 번,

트라미센에서는 우리의 신앙(기독교)을 수호하기 위해서

세 번이나 마상(馬上) 시합(試合)에 나갔으며 번번이 적수를 무찔렀다.

또한 이 갸륵한 기사는

한때 팔라티아의 임금 편에서

터키의 이교들과 싸웠다.

어느 때고 그를 따를 무사가 없는 일등 기사였다.

이렇게도 훌륭한 기사이기는 했지만, 남달리 생각이 깊고

그의 거동으로 말하면 마치 처녀와도 같이 유순했다.

그는 평생 누구한테고 상소리를 해 본 적이 없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실하고 완전하고 가문 좋은 기사였다.

 

(중략)

 

혈기차고 장난 좋아하는 탁발승(托鉢僧)이 있었는데,

한지(限地) 탁발승이었으며 매우 존대한 인물이었다.

네 개의 교단(敎團)을 다 뒤져 보아도

그처럼 희롱 잘하고 언변 좋은 중은 한 사람도 없었다.

데리고 살다가 싫증이 나면

제 돈을 내서 시집보내 주곤 한 여자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스님은 그의 교단의 큰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자기 구역의 지주며 유지들,

그리고 마을의 이렇다 하는 부인들하고는

이를 데 없이 친숙하고 또 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그 까닭은, 본당 신부보다 더 큰 고해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또 그것은 제 말로는, 자기가 그의 교단에서

면허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럴런지.

고해를 들어주는 모습은 인자하기 이를 데 없고,

죄장(죄) 소멸을 선언하는 태도는 천진난만했다.

좋은 보수와 선물이 있을 법한 자리에서는

그가 명하는 보속(補贖)은 얼마든지 경미한 것이 될 수 있었다.

가난한 교단에 금품을 희사한다는 것은,

죄진 교인으로서는 깊은 참회의 정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중이 희사를 받기만 하면, 그대가 과연 그대의 죄를 뉘우침을

내가 알고 있노라 하는 식으로 선언을 하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은 심장이 굳을 대로 굳어서,

뉘우침에 마음이 쓰리고 아파도 좀체로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울고불고 하거나, 억지 기도를 올리는 대신에

가난한 탁발승에게 동전 몇 푼 던져 주면 만사형통이다.

어깨까지 덮은 그의 두건 끝에는 언제나 칼과

핀을 차고 다니면서 예쁜 여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곤 했다.

목소리가 또한 일색이어서

노래를 잘하고, 현악기를 잘 뜯고, 민요나 잡가를 부르는 데는

남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목덜미는 백합처럼 새하얗지만

힘은 씨름꾼 못지 않은 장사였다.

가는 마을마다 모르는 술집이 없고,

주막집 주인과 작부를

문둥병 환자나 거지들보다 더 가까이했다.

그렇게도 훌륭한 사람의

높은 지위로 보아서

병든 문둥병 환자나 거지들과 사귄다는 것과,

가난뱅이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점잖치 못하고 이득도 없는 일이며, 돈 많은

유지들이나 요식업자들과 친해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이문(利文)이 생길 것을 눈치채기만 하면,

금세 공손하고 아양이 볼 만했으니,

그렇게도 얌전한 위인을 따로 찾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 탁발승이 속한 승원에는 그보다 더 잘 구걸하는 중이 없었다.

구걸하는 구역을 독점하기 위해 적잖은 권리금을 냈기 때문에,

딴 동료 탁발승은 감히 그의 구역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신 한 짝 제대로 신지 못하는 가난뱅이 과부를 위해서도,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In principio).' 하는 주문을

기꺼이 외고 나서는, 반드시 돈을 받고서야 놓아 주곤 했다.

그러니, 그의 정규 보수보다 더 많은 잡수입을 차지할 수밖에.

그리고 사방팔방을 쏘다니는 꼴이라, 마치 삽살개.

사랑날이 오면 한바탕 큰 역할을 하곤 했는데,

차린 모습이 다 떨어진 외투를 걸친 수도승이나

가난한 학생같지 않고

박사님이 아니면 교황(敎皇)같이 당당했기 때문이다.

마치, 주형(鑄型)에서 갓 뽑아낸 종과 같이 동그랗게,

겹으로 진, 짧은 털 외투를 입고 있었다.

혓바닥 위에서 영어를 아름답게 굴려 내려는 심산으로

멋을 부리다 못해 말을 어린애처럼 약간 더듬었고,

노래를 부르고 난 다음, 양금(하프)을 치노라면,

그의 두 눈알이 마치 서리 내린 밤하늘의 별인 양 두리번거렸다.

이 갸륵한 한지(限地) 탁발승의 성함은 휴버드라고 했다.

 

(하략)


요점 정리

작자 : 초서(Geoffrey Chaucer) / 김진만 옮김

갈래 : 장편 서사시

성격 : 서사적. 풍자적

어조 : 풍자적. 반어적

표현 : 묘사적. 서술적

제재 : 탁발승

주제 : 교회의 타락과 종교의 세속화 경향 풍자, 중세 영국의 풍속과 부조리에 가득 찬 인간의 현실을 풍자

특징 : 탁월한 묘사력과 풍자 정신, 언어의 음악성과 운율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냄. 다양한 계층의 등장 인물을 통해 당시 영국의 풍속과 사상을 잘 나타냄. 영시의 새형식을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함,

내용 연구

캔터베리(영국 남부 지방의 유명한 순례지)

전시(全詩)와 서시(序詩)

4월의 감미로운 소나기가

3월의 가뭄을 속속들이 꿰뚫고

꽃을 피게 하는 습기로

온 세상 나뭇가지의 힘줄을 적시어 주면

서녘바람 또한 달콤한 입김을

산나무 밭 애송이 가지의 끝과 끝 속에 불어 넣어 준다.

나 어린 태양은 백양궁[황도 12궁의 첫째(황도상의 경도 0도에서 3도까지의 이름)]의 반 행정(멀리 가는 길)을 마쳤을 뿐이며

작은 날짐승들은 저마다 노래를 부르고……

자연이 하도 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해서……

밤이면, 온통 뜬 눈으로 잠을 잔다.

사람들이 순례를 갈망하는 것은 이 때,

성지 순례자들은 낯선 나라들에 마음이 쏠리고,

먼 나라

고장마다 널리 칭송되는 여러 성인들의 묘소를 찾으려 한다.

특히 영국에서는 고을마다 앞을 다투어

캔터베리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병들어 고생할 때, 그들을 도와 준

거룩하고 복된 순교자를 찾아간다.(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토마스 베켓. 1170년에 죽었으며, 1173년에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이 계절의 어느 날,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켄터베리로의

순례를 작정하고,

싸자크(14세기의 템즈 강가 남쪽에 있던 런던의 거주지)의 타바트 여관에 투숙했다.

밤이 되자 그 여인숙에는

스물하고 아홉 사람[착오인 듯함. 실제로 '전시의 서시'에 등장하는 순례자는 '나(초서)'와 '여관 주인을 빼면 서른 명이다.]의 한 떼가 들었다.

우연히 동행이 된 형형색색의 이 사람들은

모두 순례자들이었고,

찾아가는 곳은 캔터베리.

객실과 마굿간은 모두 널찍널찍하고,

우리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 한 마디의 말로써 그 뜻을 다함)하고 해가 져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나는 그들이 하나 하나와 인사를 나누고,

곧 동행자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 일찍 일어나,

캔터베리를 향하여 출발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너무 진행해서

때를 놓치기 전에

나는 동행자들의 각자의 외양이며,

생업, 지위,

그리고 그들의 옷차림 등을

눈에 띈 대로 미리 알려 두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 같다.

그러면 기사(騎士)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일행 중에 으뜸인 기사는 그 위인이 훌륭하고

싸움터에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기사도를 사랑하고,

줄곧 진실과 명예, 너그러움과 예절을 아껴 지켰다.

국왕의 싸움에서는 언제나 뛰어나게 큰 공을 세웠고,

거기에다, 기독교의 나라나 이교의 나라를 가릴 것 없이

그의 무사로서의 역량은 언제나 큰 칭송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가 함락했을 때, 그곳에 있었고

프러시아에 가면, 딴 나라 기사들을 누르고,

으레 식탁의 상좌에 자리 잡았다.(러시아로 원정을 가기 전에, 기사들은 프러시아에 모여 파티를 벌이곤 했다.)

리투아니아와 러시아에 원정했으며,

그와 같은 지위의 교인치고 그처럼 자주 원정을 간 사람은 없었다.

알제시라스의 포위전 때에는 그라나아다에 있었고,

벨마리에도 출전했다.

리에이스와 사탈리아의 공략전에 참가했으며,

지중해 지역에서의

많은 성스러운 원정에도 끼었다.

생사를 건 격전에 참가한 것만도 열다섯 번,

트라미센에서는 우리의 신앙(기독교)을 수호하기 위해서

세 번이나 마상(馬上) 시합(試合)에 나갔으며 번번이 적수를 무찔렀다.

또한 이 갸륵한 기사는

한때 팔라티아의 임금 편에서

터키의 이교들과 싸웠다.

어느 때고 그를 따를 무사가 없는 일등 기사였다.

이렇게도 훌륭한 기사이기는 했지만, 남달리 생각이 깊고

그의 거동으로 말하면 마치 처녀와도 같이 유순했다.

그는 평생 누구한테고 상소리를 해 본 적이 없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실하고 완전하고 가문 좋은 기사였다.

 

(중략)

 

혈기차고 장난 좋아하는 탁발승(托鉢僧 : 동냥하며 수도하던 승려, 경문을 외면서 집집마다 동냥하며 수도하는 중)이 있었는데,

한지(限地 : 한정된 지역) 탁발승이었으며 매우 존대한 인물이었다.

네 개의 교단(敎團)을 다 뒤져 보아도

그처럼 희롱 잘하고 언변(말솜씨. 말재주) 좋은 중은 한 사람도 없었다.

데리고 살다가 싫증이 나면

제 돈을 내서 시집보내 주곤 한 여자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 데리고 살다가 -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처럼 수도승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호색한과 같은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 이로 미루어 앞에서 탁발승을 매우 존대한 인물이라고 한 것은 일종의 반어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스님은 그의 교단의 큰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자기 구역의 지주며 유지들,

그리고 마을의 이렇다 하는 부인들하고는

이를 데 없이 친숙하고 또 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그 까닭은, 본당 신부(가톨릭 교회를 이루는 지역적인 단위 교회에서 신도를 통한 지도하는 일을 맡은 신부)보다 더 큰 고해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또 그것은 제 말로는, 자기가 그의 교단에서

면허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럴런지. [그 까닭은, - 과연 그럴런지. : 본당 신부보다 더 큰 고해 권한을 가진 것은 교단에서 면허를 해 준 때문이라는 탁발승의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없다는 표현. 혹시 언변과 야합으로 신도들의 욕구를 쉽게 충족시켜 주어서 신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작가의 숨은 생각이 들어 있고, 이를 소설에 대입하면 편집자적 논평, 작자의 개입이라 하겠다.]

고해를 들어주는 모습은 인자하기 이를 데 없고,

죄장(罪 : 죄) 소멸을 선언하는 태도는 천진난만했다.

좋은 보수와 선물이 있을 법한 자리에서는

그가 명하는 보속(補贖 : 죄로 인한 나쁜 결과를 보상함)은 얼마든지 경미한 것이 될 수 있었다.

가난한 교단에 금품을 희사(즐겁게 재물을 기부함)한다는 것은,

죄진 교인으로서는 깊은 참회의 정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중이 희사를 받기만 하면, 그대가 과연 그대의 죄를 뉘우침을

내가 알고 있노라 하는 식으로 선언을 하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은 심장이 굳을 대로 굳어서(종교적, 도덕적 타락을 의미함),

뉘우침에 마음이 쓰리고 아파도 좀체로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울고불고 하거나, 억지 기도를 올리는 대신에

가난한 탁발승에게 동전 몇 푼 던져 주면 만사형통이다. [많은 사람들은 - 만사형통이다. : 중세 교회의 타락은 일부 탁발승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평신도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임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어깨까지 덮은 그의 두건 끝에는 언제나 칼과

핀을 차고 다니면서 예쁜 여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곤 했다.

목소리가 또한 일색이어서

노래를 잘하고, 현악기를 잘 뜯고, 민요나 잡가를 부르는 데는

남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목덜미는 백합처럼 새하얗지만

힘은 씨름꾼 못지 않은 장사였다.

가는 마을마다 모르는 술집이 없고,

주막집 주인과 작부(술집에서 손님에게 술을 따라 주는 여자)

문둥병 환자나 거지들보다 더 가까이했다.

그렇게도 훌륭한 사람의

높은 지위로 보아서 (반어적 표현)

병든 문둥병 환자나 거지들과 사귄다는 것과,

가난뱅이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점잖치 못하고 이득도 없는 일이며, 돈 많은

유지들이나 요식업자(요리와 음식을 파는 사람)들과 친해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게도 훌륭한 사람의 -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 '그렇게도 훌륭한 사람'이라는 어구, 또 이 문장 자체가 반어를 통한 풍자이다. 병든 문둥이와 가난뱅이의 편에서 서서 정의를 실천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돈 많은 유지들이나 요식업자와 친하게 지내며 치부하는 탁발승의 행위를 마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나, 그러한 탁발승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독자의 판단력을 믿으며 던지는 반어적 표현 기교라 하겠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 한 마디의 말로써 그 뜻을 다함)하고, 이문(利文)이 생길 것을 눈치채기만 하면,

금세 공손하고 아양이 볼 만했으니,

그렇게도 얌전한 위인을 따로 찾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일언이폐지하고, - 어려울 지경이었다. : 공적인 자리에서는 성직자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가도 자신에게 돌아올 금전상의 이익이 눈앞에 보일 때에는 굽실굽실 아양을 떠는 탁발승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모습을 풍자한 표현이다.]

이 탁발승이 속한 승원(사원. 절)에는 그보다 더 잘 구걸하는 중이 없었다.

구걸하는 구역을 독점하기 위해 적잖은 권리금을 냈기 때문에,

딴 동료 탁발승은 감히 그의 구역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신 한 짝 제대로 신지 못하는 가난뱅이 과부를 위해서도,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In principio).' 하는 주문을

기꺼이 외고 나서는, 반드시 돈을 받고서야 놓아 주곤 했다. [이 탁발승이 속한 승원에는 - 놓아 주곤 했다. : 구걸이 본업이고 수도는 부업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주객이 전도된 생활을 독점한다든지, 가난뱅이 과부에게 무성의한 주문 하나를 외어 주고는 무엇보다 앞서는 삶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는 요한 복음의 첫 시작 부분이다.]

그러니, 그의 정규 보수보다 더 많은 잡수입을 차지할 수밖에.

그리고 사방팔방을 쏘다니는 꼴이라, 마치 삽살개. [그리고 사방팔방을 쏘 다니는 꼴이란, 마치 삽살개. : 세속에 찌든 수도승의 모습을 삽살개에 비유하여 대상을 희화화시키는 표현. 독자에게 희극미를 제공하고 공감을 유발하는 효과를 지닌다. 이러한 풍자는 우리의 전통극에서 노장이난 양반을 향한 풍자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귀족 문학과 대립되는 의미의 민중 문학은 자국어(自國語)를 통해 귀족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풍자의 표현은 독자에게 희극미를 제공하고 독자의 공감을 유발하는 효과를 지닌다]

사랑날이 오면 한바탕 큰 역할을 하곤 했는데,

차린 모습이 다 떨어진 외투를 걸친 수도승이나

가난한 학생같지 않고

박사님이 아니면 교황(敎皇)같이 당당했기 때문이다.

마치, 주형(鑄型)에서 갓 뽑아낸 종과 같이 동그랗게,

겹으로 진, 짧은 털 외투를 입고 있었다.

혓바닥 위에서 영어를 아름답게 굴려 내려는 심산으로

멋을 부리다 못해 말을 어린애처럼 약간 더듬었고,

노래를 부르고 난 다음, 양금(하프)을 치노라면,

그의 두 눈알이 마치 서리 내린 밤하늘의 별인 양 두리번거렸다. [혓바닥 위에서 - 두리번거렸다. : 대상이 되는 인물을 자세히 묘사한 구절이지만 이 구절도 자세히 읽어 보면 탁발승의 모습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뭔가 꾸며 내기 위한 가식 어린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 갸륵한 한지(限地) 탁발승의 성함은 휴버드라고 했다.

 

(하략)

 

 

캔터베리 : 영국 남부 지방의 유명한 순례지

백양궁(白羊宮) : 황도 12궁의 첫째(황도상의 경도 0도에서 3도까지의 이름)

행정(行程) : 멀리 가는 길

싸자크 : 14세기의 템즈 강가 남쪽에 있던 런던의 거주지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 한 마디의 말로써 그 뜻을 다함

탁발승(托鉢僧) : 경문을 외면서 집집마다 동냥하며 수도하는 중

한지(限地) : 한정된 지역

언변(言辯) : 말솜씨. 말재주

본당 신부(本堂神父) : 가톨릭 교회를 이루는 지역적인 단위 교회에서 신도를 통한 지도하는 일을 맡은 신부

죄장 : 죄(罪)

보속(補贖) : 죄로 인한 나쁜 결과를 보상함

희사(喜捨) : 즐겁게 재물을 기부함

작부(酌婦) : 술집에서 손님에게 술을 따라 주는 여자

요식업자(料食業者) : 요리와 음식을 파는 사람

승원(僧院) : 사원. 절

데리고 살다가 -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처럼 수도승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호색한과 같은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 이로 미루어 앞에서 탁발승을 매우 존대한 인물이라고 한 것은 일종의 반어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 과연 그럴는지. : 본당 신부보다 더 큰 고해 권한을 가진 것은 교단에서 면허를 해 준 때문이라는 탁발승의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없다는 표현. 혹시 언변과 야합으로 신도들의 욕구를 쉽게 충족시켜 주어서 신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작가의 숨은 생각이 들어 있고, 이를 소설에 대입하면 편집자적 논평, 작자의 개입이라 하겠다.

많은 사람들은 - 만사형통이다. : 중세 교회의 타락은 일부 탁발승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평신도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임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렇게도 훌륭한 사람의 -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 '그렇게도 훌륭한 사람'이라는 어구, 또 이 문장 자체가 반어를 통한 풍자이다. 병든 문둥이와 가난뱅이의 편에서 서서 정의를 실천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돈 많은 유지들이나 요식업자와 친하게 지내며 치부하는 탁발승의 행위를 마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나, 그러한 탁발승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독자의 판단력을 믿으며 던지는 반어적 표현 기교라 하겠다.

일언이폐지하고, - 어려울 지경이었다. : 공적인 자리에서는 성직자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가도 자신에게 돌아올 금전상의 이익이 눈앞에 보일 때에는 굽실굽실 아양을 떠는 탁발승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모습을 풍자한 표현이다.

이 탁발승이 속한 승원에는 - 놓아 주곤 했다. : 구걸이 본업이고 수도는 부업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주객이 전도된 생활을 독점한다든지, 가난뱅이 과부에게 무성의한 주문 하나를 외어 주고는 무엇보다 앞서는 삶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는 요한 복음의 첫 시작 부분이다.

그리고 사방팔방을 쏘 다니는 꼴이란, 마치 삽살개. : 세속에 찌든 수도승의 모습을 삽살개에 비유하여 대상을 희화화시키는 표현. 독자에게 희극미를 제공하고 공감을 유발하는 효과를 지닌다. 이러한 풍자는 우리의 전통극에서 노장이난 양반을 향한 풍자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귀족 문학과 대립되는 의미의 민중 문학은 자국어(自國語)를 통해 귀족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경향이 있다.

혓바닥 위에서 - 두리번거렸다. : 대상이 되는 인물을 자세히 묘사한 구절이지만 이 구절도 자세히 읽어 보면 탁발승의 모습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뭔가 꾸며 내기 위한 가식 어린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해와 감상

영국의 시인 제프리 초서가 대부분 1387년 직후에 운문으로 쓴 이야기집으로 초서의 작품은 이야기의 화자가 다양하고, 화자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며, 이야기와 화자의 관계가 발전적이라는 점에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Decameron〉 같은 다른 이야기집과 다르다. 초서는 처음에 시인 자신을 포함한 30명의 순례자들이 사우스워크의 타바드 여관을 출발하여 런던 교외를 지나 캔터베리 성당에 있는 유명한 성 토머스 베켓의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오는 과정을 그리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각 순례자는 가는 길에 2편, 오는 길에 2편씩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 책에는 24편만 실려 있고 그중 일부는 미완성이다.

마지막에 중세문학 특유의 팔리노드(취소문)를 붙여 이 이야기집을 일단 완성시켰다. 순례자 집단에는 국왕과 거지를 제외한 각 사회 계층의 다양한 인물 즉 기사·방앗간주인·농장책임자·요리사·법률가·수도사·관리·신학생·상인·향사(鄕士)·의사·면죄부장사치·여수도원장·탁발수도사·신부 등이 등장하고, 자신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등장한다. 내용은 로맨스·설교문학·해학담·성자전 및 그 밖에 유럽에서 유행한 문예의 모든 장르를 싣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제1화 <기사 이야기>는 궁정의 장중·정아한 로맨스이며, 제2화 해학담 <방앗간주인 이야기>는 제1화에 대한 패러디 즉 희작으로 되어 있다. 이야기는 서로 연관되게 진행되어 종래의 소설과는 다른 구성을 지녔다. 지은이는 종종 날카로운 풍자를 발휘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관용과 유머가 넘치며 인간의 사상과 행동의 가치를 겸손하게 인식하고 있다. 마지막의 팔리노드는 지은이의 현세부정 사상을 나타내고 있으나, 작품세계에서는 오히려 현세에 깊은 즐거움을 느낀 시인의 인간성이 발랄하고 생기 있게 표현되어 있다. 성(聖)·속(俗) 두 세계를 그대로 용인하는 작자의 정신이 중세의 <인간 희극>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을 창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가장 원숙기에 쓴 이 작품은 날카롭고 넓은 인간성의 통찰, 풍부한 해학, 온정적인 필력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컨터베리를 무대로 해서 당시 순례자들을 통한 그의 신분·직업·용모·복장·성격 등과 각 방면의 인물들이 고루 등장해서 그 당시 영국 사회의 풍속이 잘 나타나 있다.

이해와 감상1

1387년 집필에 착수, 1400년 작가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남부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을 참배하는 사회 각층의 대표 31명의 순례자가 런던 템스강변의 한 여관에서 여관 주인의 제의로 번갈아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미완성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23편의 이야기가 실렸다. 중세기 설화 문학의 모든 장르가 이 한 권에 집약되었다.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순례자들은 기사와 그의 종자(從者)인 젊은 무사, 여자 수도원 원장과 그 사제(司祭), 법률가ㆍ시골 사제ㆍ탁발수도사(托鉢修道士)ㆍ면죄부(免罪符)팔이ㆍ의사ㆍ옥스퍼드 대학의 학생, 바스 시(市)의 여자 직조공, 선원ㆍ상인ㆍ요리사ㆍ방앗간 주인, 목수를 겸한 농장 주인 등, 당시 영국의 각종 직업ㆍ계층에 속한 인물들이며, 작가 자신도 이야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각각 그들의 성격을 이야기 속에 여실히 반영시키고 있는 점은 극히 근대적 전개법이다. 특히 서두는 순례자들의 용모ㆍ성격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하나의 풍속도이다.

첫 번째 '기사의 이야기'는 포로인 파라몬과 아사이트가 여왕의 동생인 이미리아를 사랑하여 서로 연적이 되는데, 사랑을 위한 무술 시합에서 아사이트가 이기지만 마지막 순간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파라몬과 이미리아는 수년의 복상(服喪)을 마치고 결혼한다는 고상 전아(高尙典雅)한 궁정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 다음으로 계속되는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 나 '목수의 이야기'는 비속한 서민의 익살담이며 '기사의 이야기'의 세계에서 전개된 궁정풍 연애에 대한 희화( 畵)라고 할수 있는 성격의 이야기들이다.

이와 같이 이야기들이 각각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고, 작품 전체의 긴밀한 구성에 의거하여 진행된다. 또한 이 작품은 '천일야화'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존 가워의 '여인의 고해(告解)' 등에서와 같은 종래의 단순한 형식과는 다른 독특한 구성을 가졌다. 이야기를 하는 순례자들이 각각 그들의 신분ㆍ처지ㆍ취미ㆍ성격에 부합된 이야기를 하게 한 작가의 기발한 구상은 개개의 이야기를 대사로 하는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를 만들어 내다. 동시에 다양한 이야기에서 전개되는 세계는 당시의 영국의 종교ㆍ세계관ㆍ인생관ㆍ사회 제도ㆍ인정ㆍ풍속ㆍ습관 등을 선명하게 묘사한 중세의 파노라마라고도 할 수 있다. (출처 : 김병국 외 4인 공저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심화 자료

구성상의 특징

"캔테베리 이야기"는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일관된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이 각기 다른 24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또 하나의 작품 속에 묶느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고안된 것이 '순례 여행'이라는 '이야기 틀'이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도 이와 유사하다. 순례 여행은 일정한 인원의 순례자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이야기꾼으로 등장시키면서 이야기 순서나 규칙을 정하면 여러 이야기들이 하나의 전체로 묶여지는, '순례 여행'이라는 이야기 틀을 통해 초서는 24개의 이야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었다. 우선 전체 서시(序詩)에서 등장 인물들, 즉 본시에서 이야기꾼이 될 순례객들의 성격을 일일이 묘사해 둔다.

그런 다음 각자의 성격에 맞는 이야기를 차례대로 전개시키되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순례객들끼의 갈등을 조장하여 각각의 이야기가 그냥 이어지지 않고 흥미진진한 극적 긴장 속에 연결되도록 했다. 물론 사회자인 여관 주인의 세련된 비평이나 청중(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는 모든 순례자들이 청중이다)의 감상도 끼어든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여러 순례자들에 의해 소개 되기 때문에 각각의 이야기 중에는 초서의 창작이 아니고 다른 곳에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출처 : 김윤식 김종철 저 한샘 문학교과서)

박지원의 '옥갑야화'와 '컨테베리 이야기'와 전개 방식의 차이점

옥갑야화는 조선 후기에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소설로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수록되어 있다. 열하로부터 북경으로 돌아오던 중에 옥갑이란 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저자가 일행인 여러 비장(裨將)들과 주고 받은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다. 형식상 설화를 기록한 야담에 가깝다. 뛰어난 표현력과 사상성에서 독립된 한 편의 소설로 볼 수 있다. 〈옥갑야화〉는 조선 후기 역관(譯官)들의 중국 무역과 관련된 일화들과 허생이라는 일사(逸士)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후자가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허생전(許生傳)’이라 불리기도 한다. 〈옥갑야화〉는 중국 상인을 속여 치부한 어느 역관이 결국은 패가망신한 일화, 역관 이추(李樞)는 그러한 시류에 초연하여 군자다운 풍모가 있었다는 일화,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창기로 팔린 여인을 구해준 의협적인 행동으로 중국인의 신망을 모은 일화, 북경의 한 부상(富商)이 죽은 뒤에 예전에 그의 고용인이던 상인 하나가 영락한 그 손자를 돌보아 준 일화, 중국 상인들의 신용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일화, 국중의 갑부로 유명했던 역관 변승업(卞承業)에 관한 일화 등이 실려 있다. 〈옥갑야화〉는 역관들이 밀무역으로 축재하여 종종 거부가 되기도 했던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신의에 바탕을 둔 해외 통상의 발달을 긍정하는 실학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러한 일화들은 허생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펴기 위한 도입부의 구실을 한다.

서울 남산골 선비 허생은 변승업의 조부인 변씨로부터 빌린 돈으로 상품을 매점매석(買占賣惜)하여 거금을 마련한다. 그리고, 군도(群盜)를 회유하여 무인도에 이상촌을 건설한다. 이로 인하여 허생이 비범한 인물임을 깨달은 부자 변씨는 북벌(北伐)에 대비하여 인재를 찾고 있던 어영대장 이완(李浣)에게 그를 천거한다. 허생은 자신이 제시한 북벌책에 대하여 이완이 난색을 표하자 사대부의 무사안일을 질타한 뒤 종적을 감추고 만다. 〈허생전〉은 국내외적으로 상품교역이 활발해지던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도고(都賈) 상업의 성행, 군도(群盜)의 창궐, 북벌론의 허구성 등 당대의 사회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허생전〉은 경세제민의 실학(實學)을 갖춘 이상적인 선비상을 제시한 점에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탁월한 성과를 거둔 작품이다. 옥갑야화는 이야기에 어떤 순서를 정하거나 이야기를 일정 기간 동안 거듭한 것은 아니다. 단 여행 과정에 일행이 돌아가며 이야기 한 것의 기록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세 문학의 특징

중세 문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두 요인은 '보편 종교의 출현'과 '공동 문어의 사용'이다. 유럽 문학의 경우는 기독교와 라틴어가 그에 해당하며, 동아시아의 문학은 유교와 한자가 그에 해당한다. 이러한 중세 문학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특징을 지닌다. 첫째, 문학의 발달이 상층 문학과 하층 문학으로 이원화되어 발전하게 된다는 점이다. 한국 문학, 즉 고려 시대의 문학도 이와 같은 공통점을 지닌다. 상층 문학은 그 문명권의 공동 문어에 의한 기록 문학으로 창작, 전승되고 하층 문학은 각 민족 및 지방의 토착어에 의한 구비 문학으로 존재하였다. 둘째, 이에 따라 각 계층의 문학들이 대립적 성향을 보여 주는데, 보편 지향적 문학과 토착적 문학의 성격적 대립이 그것이다. 공동 문어에 의한 상층 문학은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서 공통된 고전(古典)과 미의식을 함께 나누는 쪽으로 나아간 반면, 하층 문학은 각 지역의 풍토와 토착어로 표현하는 지방적 문학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출처 : 존 웨이시(박준황 역), <세계문학사> (종로서적, 1992)]

1. 이 작품에서 자연물의 의인화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교수ㆍ학습 방법 :

작품에 나타난 자연물들 중에서 의인화된 것들을 모두 찾아, 어떤 방식으로 의인화되었는지 파악하여 발표하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이 작품에서 자연물이 의인화된 사례들로, '소나기가 ~ 나뭇가지의 힘줄을 적시어 주면', '서녘 바람 또한 달콤한 입김을 ~ 불어 넣어 준다.', '나 어린 태양은~', '작은 날짐슴들은 ~ 뜬눈으로 잠을 잔다.' 등이 있다. 주로 1행~10행에 있다. 이 작품에서 자연물의 의인화는 자연물이 감정을 지닌 채 서로 교감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2.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가 동행자의 외양 등을 미리 알리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 같다고 판단한 이유를 말해 보자.

교수ㆍ학습 방법 :

이 작품이 서사시에 속한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서술자가 왜 동행자들의 외양을 설명하려 할지 추리해 보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서사시는 율문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서사 문학의 하나이다. 특히 유럽 문학은 서사시에서 소설로 서사 문학이 발전하였다. 이런 까닭에 인물의 외양을 묘사하면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서사 문학으로서 자연스럽다. 또한 외양이 그 인물의 성격 및 배경과 유관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외양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3. 이 작품 전체인 24편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조사해 보자.

교수ㆍ학습 방법 :

작품 전편을 찾아 읽어보거나 줄거리를 참고하여 24편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조사해 보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이 작품은 29명의 순례자들이 공교롭게 같은 여관에 모이게 되면서부터 이야기의 발단이 가능해진다. 여관 주인은 투숙객들인 29명의 사람들에게 번갈아 이야기를 하기를 부탁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차례로 하게 된다.

4. 이 작품에 나타난 기사의 행적을 중심으로, 이 시기 영국 사회를 추리ㆍ상상하여 말해 보자.

교수ㆍ학습 방법 :

기사의 행적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정리하여, 어떤 사회적 배경 때문에 기사가 그처럼 출병을 자주 하게 되었는지 추리하여 발표하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이 작품이 쓰여진 14세기는 백년 전쟁이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 간의 무역 경쟁 및 봉건제의 몰락 등 사회적 격변기에 해당한다. 기사 신분은 당시 무신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그가 출병을 많이 했다는 것은 각 나라 간의 경쟁이 격화, 전쟁으로까지 비화되던 혼란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확장하기

 

1. 이 작품과 같은 이야기 문학의 의미를 말해 보고, 이와 유사한 문학 작품의 예를 우리 문학사에서 찾아보자.

 

교수 ·학습 방법 :

이 작품이 장편 서사시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그것의 의미와 또 우리 문학사에서 그 같은 형식의 작품이 있었는지 찾아 발표해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이런 형태를 지닌 작품이 우리 문학사에는 그리 많지 않으나, 이규보의 '동명왕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동명왕편'은 그 주인공이 영웅 1인이고 세속적인 각계각층의 인물군상이 나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캔터베리 이야기'와는 다르다. 다만, 현대에 와서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다양한 인물군상이 묘사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서사 문학의 현대적 형태란 점에서, 아직도 율문적 형식을 취하고 있는 '캔터베리 이야기'와는 다르다 하겠다.

2. 우리나라의 각계 각층 사람들을 모아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에 참배한다고 가정하고, 다음 활동을 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은 국조(國祖)인 '단군'에 대해 제사 지내는 곳으로 우리 민족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모두 포함시켜, 우리 시대의 풍속과 세태, 성격을 형상화할 수 있는 이야기 문학을 만들어 보도록 지도한다. 이야기를 구성할 때, '캔터베리 이야기'처럼 시민 생활, 가정 생활, 사생활과 같이 큰 범주를 잡고 각계각층의 인물군상을 묶어 이야기를 꾸미는 방법 등을 고려하게 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1) 참배객에 포함할 계층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토론해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목사, 변호사, 대학생, 청소부, 요리사, 교사, 영화 배우, 농부, 장애인 등

 

(2) 참배객에 포함될 계층 중에서 한 계층의 사람을 택하여 그의 출신, 교양, 성격, 복장, 형태, 지식 등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토론해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유능한 직장인이었으나 급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중증 장애인이 된 사람, 그는 자신의 절망을 극복한 다음, 다른 장애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행사에 참여한다.

 

(3) (2)의 활동 결과를 토대로, 한 인물의 이야기를 써서 발표해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험한 등산을 하는 장애인을 돕기 위해 여러 사람이 참여한다. 장애인을 위한 신문의 한 기자가 참석한 다음,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기사를 쓴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 장애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마무리하기

초서(Geoffrey Chaucer)

1342/43경 런던(?)~1400. 10. 25 런던.

영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셰익스피어 이전의 탁월한 작가이다. 14세기 후반에 궁정대신·외교관·공무원으로서 공사(公事)를 경영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연이은 에드워드 3세, 리처드 2세, 헨리 4세의 치하에서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취미였던 시작(詩作) 때문에 기억된다. 초서 작품의 주된 특징은 소재·장르·어조·문체 및 분별 있는 존재양식을 찾는 인간의 다양성과 복잡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또한 중요한 철학적 질문들을 진지하고 꾸준하게 성찰한 것과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폭넓은 유머를 반영한다. 그의 저술을 보면 초서는 지상적이든 천상적이든 사랑의 시인으로 간주되며 그의 사랑의 표현은 정염에 의한 애정편력에서부터 신과의 영적인 결합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다양하다. 작품의 이런 특징으로 인해 독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나 인간과 신의 관계를 명상하면서 동시에 인류의 고귀함뿐 아니라 나약함과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선조와 젊은시절

 

최소한 4세대에 걸쳐 초서의 선조들은 영국의 중산층으로 런던이나 궁정과의 관계를 점차 증진시켰다. 런던의 중요한 포도주 상인으로 왕의 부집사였던 아버지 존 초서는 1338년 에드워드 3세가 지금의 벨기에 일부인 플랑드르의 안트웨르펜을 공략할 때 참여했고, 입스위치·서퍽 지방과 런던에 부동산을 마련했으며 53세의 나이로 1366(또는 1367)년에 죽었다. 초서라는 이름은 신발 제조업자라는 뜻의 프랑스어 '소시에르'(chaussier)에서 유래되었다. 가족의 경제적 성공은 술과 가죽 때문에 생겼다고 할 수 있다. 흔히 1340년에 초서가 태어났다고 하지만 1342년이나 1343년이 아마 더 옳을 것이다. 그가 그당시의 중세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도 유창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유년기 교육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혀 없다. 또한 라틴어와 이탈리아어에도 능숙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당시나 그 이전의 중요 서적들과 상당히 친숙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서는 1357년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 라이오넬의 부인인 얼스터 백작 부인 엘리자베스의 가족 중 한 사람으로 처음 기록에 나타난다. 제프리의 아버지가 아마도 왕가에 봉사하는 젊은 남녀집단에 아들을 가입시킬 수 있었던 것 같으며, 이것은 자녀들에게 필요한 왕실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출세할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1359년 초서는 프랑스에서 에드워드 3세의 군대에서 복무하다 르앙 전투에서 체포되었다. 왕이 그의 몸값을 지불했고 1360년 평화협정 동안 초서는 칼레에서 영국까지 메신저로서 활동했다. 초서는 1361~65년의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왕을 보필했던 것 같으나, 당시 공직에 대비하는 흔한 방법인 법률을 공부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16세기 기록에 따르면 그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런던 거리에서 그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승을 때린 것 때문에 벌금을 징수당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1366년 2월 22일 나바르 왕은 초서와 3명의 동행인 및 그들의 시종이 스페인에 들어와도 좋다는 신변안전보증서를 발급해주었다. 이 사건이 다음 10년 이상 유럽 대륙에 외교적 임무를 띠고 떠났던 일의 시초가 되었고, 그 문서의 기록에 따르면 초서는 '사절단장'으로 일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초서는 1366년경 결혼했다. 아내는 필리파 팬으로 얼스터 백작 부인을 모시다가 1363년 엘리자베스가 죽자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하이노트의 필리파를 모시기 시작했다. 1366년 필리파 초서는 연금을 받았고 후의 연금들은 그녀의 남편을 통해 그녀에게 지불되었다. 이런저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초서는 결혼을 잘했던 것 같다. 1367년 초서는 왕의 시종으로서 종신연금을 받았으며 다음 해 그는 왕의 기사로 등록되었다. 그러한 직위를 가진 사람은 궁정에 살면서 상당히 중요한 관직의 임무를 수행했다. 1368년 초서는 외교상 임무로 국외로 나갔고, 1369년 프랑스에서 군복무를 했다. 또한 1369년 그와 아내는 필리파 왕비의 죽음에 공식 조문객이었다. 분명히 초서의 경력은 화려했고 그의 최초의 중요한 시 〈공작부인의 책 Book of the Duchess〉은 고위직 인사들과 그의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1369년 후반이나 1370년초에 씌어진 1,300행이 넘는 이 시는 곤트의 존의 첫 부인인 랭카스터 공작부인 블랑시를 위한 애가였다. 블랑시는 1369년 9월 역병으로 죽었다. 초서와 존의 친밀한 관계는 평생 동안 지속되었으며, 대강 나이가 비슷했던 그들이 일찍이 요크셔에 있는 얼스터 백작부인의 저택에 머물렀던 1357년 크리스마스부터 교제가 시작되었던 듯싶다. 중요한 시로서는 첫 작품인 이 글에서 초서는 13세기의 매우 영향력 있던 프랑스의 궁정 연애시 〈장미 이야기 Roman de la rose〉 때문에 널리 퍼지게 된 꿈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몽상형식(dreamvision)을 따르고 있다. 초서는 최초의 문학작업으로 최소한의 부분이긴 하지만 〈장미 이야기〉를 영역했으며 자신의 모든 작품에 이것을 차용했다. 〈공작부인의 책〉은 또한 당대 프랑스 시와 초서가 애독했던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차용했다고 해서 존에 대한 위로와 블랑시를 위한 애가 및 찬가를 몽상형식으로 엮어낸 그의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여기에서 시인 자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닐 수도 있는 1인칭 화자를 기교있고 미묘하게 사용하는 것에 주목할 만한데, 이는 후기 시로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해지는 기법이다. 이 기법을 사용하면 하급 궁정대신으로서 이런 작품을 고위 귀족들 앞에서 낭독하는 경우에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에 덧붙여 〈공작부인의 책〉은 중세 영어 운문의 한계 내에서 자연스런 대화의 리듬을 제시하고 궁정시의 관습 내에서 사실적인 인물을 창출해내는 초서의 재능을 드러내 보여준다. 또한 여기에서 초서는 굿 페어 화이트에 대한 블랙 나이트의 사랑을 이야기함으로써 연애시인으로서의 그의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 사랑의 일시적인 면과 영원한 면 둘다와 관련이 있는 인간 상황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종교적 질문을 중세 후기 방식으로 탐색해나갔다.

 

외교관·공무원 활동

 

1370년대의 10년 동안 초서는 플랑드르·프랑스·이탈리아에 외교상 임무로 여러 차례 방문했다. 아마 그의 첫 이탈리아 여행(1372. 12~1373. 5)은 제노바 사람들과 교역할 수 있는 영국 항구도시에 대한 협상을 하고, 피렌체 지방 사람들과 에드워드 3세를 위해 대부를 얻기 위한 협상으로 떠났던 것 같다. 그의 다음 이탈리아 여행은 1378년 5월 28일부터 9월 19일까지였으며 그때 그는 군사상의 문제로 밀라노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1370년대 동안 초서와 그의 아내는 왕과 곤트의 존으로부터 상당한 하사금을 받았다. 1374년 5월 10일 그는 런던 알드게이트에 무상으로 집을 얻었고, 그해 6월 8일 런던 항의 관세 및 양모, 가죽, 무두질한 가죽 등의 보조금 회계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제 처음으로 초서는 궁정을 떠나 직위를 갖게 되었고, 그와 아내는 사무실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곳에 그들만의 가정을 이루었다. 1375년 그는 2번의 후견권을 수락하여 꽤 많은 돈을 받게 되었고 1376년 상납금 가운데 상당한 금액을 받았다. 1377년 6월 리처드 2세가 왕이 되자 초서의 회계검사관 직위를 다시 인정해주었고, 후에는 에드워드 3세가 제프리와 필리파에게 수여한 연금도 인정되었다. 확실히 1370년대 내내 행운의 여신은 초서 부부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공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감과 활동이 많아져 이 10년 동안 초서가 글을 쓸 수 있을 만한 시간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동안 나중에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보카치오·단테·페트라르카의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은 그에게 문화적으로 대단히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370년대 초서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2,000행 이상으로 씌어진 몽상형식의 〈명예의 전당 Hous of Fame〉인데 어떤 면으로는 그 작품은 실패였다. 미완성작인 데다가 주제도 불분명하고 분야가 너무 다양해서 어떤 통일된 목적성이 희미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초서가 시인으로서 진보된 기교를 보여준 상당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8음절 보격이 상당히 유연하게 다루어져 있고, 나중에 초서의 특징이 된 놀림조의 다소 역설적인 가벼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소재도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후에 기억할 만한 인물을 창조해내는 능숙한 솜씨가 여기에서는 놀라운 황금독수리를 그리는 데서 발휘되고 있는데, 이 독수리는 '제프리'라는 놀란 화자를 지상 위로 데리고 날라와 명성과 소문의 전당까지 데려와서 그의 작품과 연구의 보상으로 연애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 풍조'를 배울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는 또한 그 자신의 가공적 인물에 대한 초서의 기준이 될 만한 윤곽이 드러나는데 이때의 모습은 다소 둔하고 사랑에 대해 표현하려고 애쓰지만 개인적으로 성공한 경험이 없는 시인의 모습이다. 현학적인 독수리가 제프리를 교화시키기 위해 소리의 속성에 관한 학식 있는 연설을 늘어놓는 부분에서 이 시의 희극적인 면이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희극적인 면에 덧붙여 그 시는 모든 세속적인 것처럼 명성도 일시적이며 변덕스럽다는 진지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같다.

 

중년기

 

1380년 5월 1일 기록에서 세실리 송파뉴라는 사람이 '나의 강간과 어떤 다른 문제나 이유로 인한' 법적 행위로부터 초서를 방면했다. 강간이라는 것은 그당시 성적 폭력이나 유괴를 의미할 수 있었다. 학자들은 이 경우에 어떤 의미가 해당되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어느 경우든 풀려났다는 것을 보면 초서가 기소된대로 유죄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계속 관세청에서 일했고, 1382년 주류 및 기타 상품에 대한 소액 관세의 회계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386년 10월 그의 런던 거주지가 다른 사람에게 임대되었고, 그해 12월 관세청에 있는 그의 두 검사관 자리에 후임자가 임명되었다. 그가 사임했는지 혹은 그 자리에서 면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382~ 86년에 그는 관세청에서 의원들을 위해 일했다. 1385년 10월 켄트의 치안판사가 되었고 1386년 8월 켄트 주 기사가 되어 10월에 의회에 참석했다. 1385년 그는 아마 그리니치로 이사했다가 켄트로 옮겨 살았던 듯하다. 이런 상황을 보면 1386년 얼마 전에 그가 런던에서 이사하고 관세청을 떠날 계획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리파 초서는 1387년에 죽은 것이 분명하다. 죽기 전 얼마 동안 그녀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면 그러한 상황이 이사할 결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의 정치상황이 초서에게는 별로 우호적이지 못해 이사를 결심했을 수도 있다. 1386년에 이르러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이끈 귀족들이 리처드 2세와, 초서가 오랫동안 교제해온 곤트의 존을 기만하여 국왕의 권위와 행정력을 찬탈했다. 초서처럼 왕이 임명했던 수많은 공직자들이 해임되었고 초서도 비슷하게 고생을 했던 것 같다. 초서는 정치기류가 어떻게 바뀔지를 알고 일찍이 필요할 때 움직일 준비를 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1386~89년은 초서에게 어려운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1387년 치안판사로 재임되기는 했으나 1386년 이후 그는 의회에 복귀하지 않았다. 1387년에 1년간 프랑스의 칼레에 가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아내가 죽어 가지 못한 것 같다. 1388년 다시 채무로 인한 일련의 소송 시비에 걸려들었고 빚 때문에 왕실연금을 팔았다. 또한 1388년 2월 3일부터 6월 4일까지 귀족들이 다스렸던 잔혹의회는 초서의 절친한 친구들을 포함하여 많은 왕당파의 주요한 의원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1389년 5월 23세의 리처드 2세가 다시 왕권을 회복하여 정적들을 추방했으며 그의 지지자들을 공직에 임명하기 시작했다. 초서의 다음 공직이 이러한 정치변화 때문에 생겼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다. 1389년 7월 12일 그는 런던 탑과 웨스트민스터 궁전과 같은 왕실 건물의 보수·유지에 운영 책임을 맡은 국왕의 보좌관이 되어 충분한 봉급을 받았다.

 

1381년 농민폭동으로부터 1388년 잔혹의회에 이르기까지 1380년대의 정치적 사건은 계속 초서를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이 10년 동안 그는 상당한 작품을 발표했고, 그중 어떤 것은 매우 뛰어난 수준에 달했다. 이 작품들이 어떤 식으로든 긴장된 정치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 놀랍다. 참으로 이 기간에 초서는 공직생활의 곤경으로부터의 도피처로 그의 작품세계에 전념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 발렌타인 축제를 위해 쓴 몽상형식으로 된 699행의 시 〈새들의 의회 Parlement of Foules〉는 매년 그날 새들이 자연의 여신 앞에서 그들의 짝을 고르기 위해 모인다는 신화를 이용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장난스럽게 흥취 있는 분위기 저변에 키케로의 〈스키피오의 꿈 Somnium Scipionis〉 중 서문에 제기된 '공유이익'과 관련지어 다양한 사랑의 가치를 탐색해보려고 했다. 작중화자는 어떤 대답을 찾아보지만 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여 다른 책에서 계속 탐색하겠다고 다짐한다. 이 책에서 초서는 보카치오와 단테를 광범위하게 차용하고 있지만 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활발한 새들의 토론은 거의 독창적이다. 시는 자주 궁정의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특히 1382년 리처드 2세와 보헤미아의 앤의 결혼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새들의 의회〉는 초서의 초기 작품 중 걸작임이 분명하다.

 

6세기초 로마 철학자이며 그리스도교도인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은 중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었다. 그 책에 나타난 자유의지에 관한 논의, 신의 예지, 운명, 행운, 진실되고 거짓된 행복 등 사실상 올바른 사람이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그의 생각과 행동을 인도해야 하는 모든 방식은 초서의 사상과 예술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는 〈철학의 위안〉을 조심스럽게 산문으로 번역했고 다음 시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 Troilus and Criseyde〉에는 보이티우스 작품의 영향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초서는 이 8,239행 시의 기본 골격을 보카치오의 〈일 필로스트라토 Il Filostrato〉(1338경)에서 얻었다. 어떤 평자들은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를, 초서의 최고작이며 훨씬 더 널리 읽히는 〈캔터베리 이야기 The Canterbury Tales〉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작품은 아주 다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교하기는 무익한 일인 것 같다.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의 남아 있는 필사본의 상태를 보면 초서가 이 시를 수정하는 데 세세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전설적인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 트로일로스와 유배된 사제 칼카스의 딸로 과부인 크레시다 간의 사랑이 다시 그려진다. 시는 내적 성찰과 심리학적 통찰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느슨한 구성으로 진행된다. 크레시다의 삼촌 판다로스의 도움을 받아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는 시의 중간쯤에서 사랑으로 결속된다. 그러나 그녀는 트로이 밖 그리스 진영에 있는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떠나게 되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리스인 디오메데스와 사랑을 나누고, 절망에 빠진 트로일로스는 전쟁중에 죽고 만다. 이 사건들 사이에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한 보이티우스의 논의가 끼어든다. 시의 마지막에 트로일로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성적인 사랑 속에 완전히 몰입하는 어리석음이 신의 영원한 사랑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연인, 특히 크레시다에 대한 동정심이 드러나 있는 작중화자의 직접적인 논평에 의해 작품 전체에 걸쳐 시의 이러한 효과가 억제되고 있다.

 

또 1380년대에 초서는 그의 4번째이자 마지막 몽상형식의 시 〈선녀들의 전설 Legend of Good Women〉을 썼는데 성공작은 아니었다. 그것은 2가지 판본이 남아 있는 '서곡'과 9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서곡에서 사랑의 신은 초서가 일찍이 남자를 배신한 여자들 이야기만 너무 많이 써서 화가 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참회로써 초서는 이제 착한 여인들에 대해 써야 했다. '서곡'은 작중화자의 자기조롱의 유쾌한 유머와 봄을 찬양하는 시구로 유명하다. 클레오파트라·디도·루크레티아를 비롯한 옛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간결하면서 다소 기계적으로, 사악한 남자들이 여인을 배신한다는 규칙적인 주제를 가지고 전개된다. 결과적으로 전체 이야기는 선량한 여인들 이야기라기보다는 나쁜 남자들 이야기처럼 되었다. 그러나 아마 〈선녀들의 전설〉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초서에게 하나의 하부구조 속에 이야기를 모음으로써 장시를 구성하는 기법을 가르쳐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선녀들의 전설〉의 체제 기법이 지닌 지루함과 단일 주제를 가진 이야기들의 반복적 특성 때문에 그는 이러한 작품기법을 형편없는 것으로 여겨 포기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실패가 대략 비슷한 때 〈캔터베리 이야기〉의 이야기를 모으는 골격이 될 만한 체제 기법으로 순례를 선택한다는 그의 뛰어난 발상에 도움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말년

 

국왕 보좌관으로서의 초서의 직위는 1389년 7월부터 1391년 6월까지만 지속되었다. 재직 당시 그는 여러 번 강도를 당했고 한번은 몰매를 맞았는데, 이는 직업을 바꿀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1391년 6월 그는 섬머싯의 노스 페서턴 왕실공원의 산림관리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이 직책에 있었다. 그는 켄트에 집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 왕실의 총애를 받아 1393~97년에 국왕 하사금과 선물을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1395~96년에 곤트의 존의 아들로 나중에 헨리 4세가 된 더비 백작과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나타난다. 1399년 2월 존이 죽자 리처드 왕은 존의 랭카스터 유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5월 왕은 아일랜드 폭동을 진압하러 떠났다. 결국 이 일을 함으로써 그는 그의 조국에서 모반을 준비할 기회를 준 셈이었다. 1398년 추방되었으나 이제 랭카스터 공작이 된 헨리는 영국에 돌아와 그의 권리를 주장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고 1399년 9월 30일 그는 왕위에 올랐다. 그는 초서가 리처드 2세로부터 받은 하사금을 인정했고, 10월에 더 많은 연봉을 내려주었다. 1399년 12월 초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의 정원에 있는 집을 임대했다. 1400년 10월 25일에 죽었고 그 대수도원에 묻혔는데, 이는 평민으로서는 보기 드문 명예였다.

 

1390년대 초서의 위대한 문학적 업적은 〈캔터베리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는 약 30명의 순례자가 런던에서 템스 강을 지나 서덕의 태바드 여인숙에 모여서 말을 타고 켄트 주 캔터베리의 토머스 아 베킷 사원까지 갔다오는 동안 이야기 시합을 하자고 합의한다. 태바드의 주인 해리 배일리가 그 시합의 운영책임자로 활동한다. 〈전체 서곡 General Prologue〉의 간결하고 생생한 묘사로 순례자들이 소개된다. 순례자들의 24편 이야기 사이에 결속부라 불리는 보통 주인과 한 사람 이상의 순례자가 나타나는 생생한 대화의 간단한 극적 장면이 끼어든다. 초서는 그 책을 전체 의도대로 완성하지는 못했다. 캔터베리에서 돌아오는 여행은 포함되지 않았고, 몇몇 순례자들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더욱이 남아 있는 필사본을 보면 어떤 부분에서 그 자료를 사용한 초서의 참의도에 대해 의심할 만한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미완의 단편모음이라기보다는 통일된 책으로 충분히 고려될 수 있다. 이야기 모음집의 체제 기법으로 순례를 사용함으로써 초서는 많은 생활로부터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다. 기사, 여수도원장, 수도승, 상인, 법률가, 소지주, 학식높은 서기, 방앗간 주인, 정원사, 면죄부 상인, 배스의 여장부 등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또한 순례와 이야기 시합은 대단히 다양한 문학 장르를 제시할 수 있게 만든다. 궁정의 연애담, 음탕한 파블리오, 성인전, 비유적인 이야기, 동물우화, 중세 설교, 비법 설명 등이 등장하고 때로는 이 장르들의 혼합형도 나타난다. 이 구조 때문에 묘사나 연결부, 전체 이야기가 모두 녹아서 순례자들의 복잡한 모습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이야기들은 2편의 산문에 덧붙여 운문으로 된 단편소설의 뛰어난 모범을 보여준다. 거기에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목적과 봄 나들이의 세속적인 양상을 결합시키게 되어 이 순례는 이승의 쾌락이나 악덕과 내세의 정신적 열망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숙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관계는 보이티우스나 다른 많은 중세 저술가들처럼 초서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이분법적 관계라 할 수 있다.

 

그의 30년 문필생활의 절정을 이룩하기 위해 초서는 많은 종류의 중세 서적들에 관한 넓고 깊은 연구를 했고 여러 수준에서 일상생활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그는 또한 인간행동에 영향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생각되는 중세 점성술과 보조 과학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섬세하게 그려진 이 극적 서사시의 모든 범위에 걸쳐 그는 시인으로서, 공무원으로서, 순례자로서 시에 임했다. 다소 명료하지 않은 입장에 서서 항상 인간의 나약함에 속으면서도 늘 인간 조건의 복잡성을 의심하고 그 조건의 유머와 비극성을 보면서, 이 지상에서의 올바른 존재양식을 찾으려고 애썼다. 마지막에 〈캔터베리 이야기〉를 끝맺는 〈작품을 철회함 Retraction〉에서 시인이며 순례자로서 초서는 내세를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은 그 의미가 희미해진다는 그의 결론을 말하고 있다. 〈교구목사의 이야기 The Parson's Tale〉의 훈계 내용대로 그는 '세상의 허영'에 관심을 기울인 그의 작품들을 용서하고 〈철학의 위안〉을 번역한 것과 다른 도덕적·종교적 헌신을 담은 책들을 기억해주기를 청하고 있다. 그러한 기조로 그는 자신의 최고의 작품과 시인으로서의 생애를 마쳤다.

 

후손과 사후명성

 

초서의 자손에 대해서는 정보가 확실하지 않다. 그와 필리파 사이에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던 것 같다. 아들 토머스 초서는 1434년에 죽었는데 넓은 토지와 노스 페서턴의 산림관리직을 포함하여 1420년대에 요직에 있었다. 그는 후에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초서의 집을 임대했고 2번 결혼했던 그의 딸 앨리스는 서퍽의 공작부인이 되었다. 1391년 초서는 그당시 10세이던 작은 아들 '어린 루이스'를 위한 〈애스트롤래브 소고 Treatise on the Astrolabe〉를 썼다. 시인의 딸로 짐작되는 엘리자베스 '초시'는 1381년 바킹에서 수녀가 되었다. 둘째 딸 애그네스 초서는 1399년 헨리 4세의 대관식 궁녀였다. 기록을 보면 곤트의 존이 이 아이들 중 1명 이상의 대부가 되었던 것 같다. 초서의 후손으로 15세기 이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초서의 저술에 대해 후세의 기록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기교를 찬양했고 15세기 초서 숭배자들은 그의 시를 모방했다. 16세기가 지나면서 그의 시, 특히 〈캔터베리 이야기〉는 널리 읽혀 근대영어로 번역되었고 19세기 중엽이래 그의 일생과 작품을 연구하고 학자와 비평가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R. M. Lumiansky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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