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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부 (秋聲賦) / 구양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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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부 (秋聲賦) / 구양수

歐陽子方夜讀書, 聞有聲自西南來者, 悚然而聽之, 曰:"異哉!"

구양자방야독서, 원유성자서남래자, 송연이청지, 왈 : "이재"

 

구양자가 밤에 책을 읽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찟 놀라 귀기울이며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初淅瀝以蕭颯, 忽奔騰而(石+平)湃;如波濤夜驚, 風雨驟至.

초석역이소삽, 홀분등이팽배. 여파도야경, 풍우취지.

 

처음에는 바스락 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其觸於物也,(金+從)錚錚, 金鐵皆鳴;又如赴敵之兵, 銜枚疾走,

不聞號令, 但聞人馬之行聲.

기촉어물야, 총총쟁쟁, 금철개명. 우여부적지병, 함매질주,

불문호령, 단문인마지행성.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予謂童子:"此何聲也?汝出視之." 童子曰:"星月皎潔, 明河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

여위동자, 차하성야, 여출시지. 동자왈, 성월교결, 명하재천, 사무인성, 성재수간.

 

내가 동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달과 별이 밝게 빛나며,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予曰:"噫(口+喜), 悲哉!此秋聲也, 胡爲而來哉?蓋夫秋之爲狀也;其色慘淡, 煙(雨+非)云斂;

여왈, 희희, 비재. 차추성야, 호위이래재. 개부추지위상야, 기색참담, 연비운염.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은 암담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其容淸明, 天高日晶;其氣慄冽, (石+乏)人肌骨;

其意蕭條, 山川寂寥.

기용청명, 천고일정. 기가율렬, 폄인기골.

기의소조, 산천적요.

 

가을의 모양은 청명하며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 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故其爲也, 凄凄切切, 呼號憤發.

豊草綠縟而爭茂, 佳木蔥籠而可悅;

고기위야, 처처절절. 호호분발.

풍초녹욕이쟁무, 가목총농이가열.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것이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 만하더니,

 

 

草拂之而色變, 木遭之而葉脫;其所以(才+崔)敗零落者,

乃其一氣之餘烈.

초불지이색변,목조지이엽탈. 기소이최패영낙자,

내기일기지여열.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여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한 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夫秋, 刑官也, 於時爲陰;又兵象也, 於行爲金,

是謂天地之義氣, 常以肅殺而爲心.

부추, 형관야, 어시위음. 우병상야, 어행위금,

시위천지지의기, 상이숙살이위심.

 

가을은 형관이요, 때로 치면 음의 때요, 전재의 상이요, 오행의 금에 속한다.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니, 항상 냉엄하게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天之於物, 春生秋實. 故其在樂也.

商聲主西方之音, 夷則爲七月之律.

천지어물, 춘생추실. 고기재낙야.

상성주서방지음, 이칙위칠월지율.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으로, 서방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으로 칠월의 음률에 해당한다.

 

商, 傷也;物旣老而悲傷. 夷, 戮也;物過盛而當殺.

상, 상야. 물기노이비상. 이, 육야. 물과성이당살.

 

'상(商)'은 '상(傷)'의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륙(戮)'의 뜻이니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이게 되는 것이다.

嗟乎, 草木無情, 有時飄零. 人爲動物, 惟物之靈.

百憂感其心, 萬事勞其形. 有動於中, 必搖其精.

차호, 초목무정, 유시표령. 인위동물, 유물지령.

백우감기심, 만사노기형. 유동어중, 필요기정.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마음 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而況思其力之所不及, 憂其智之所不能;

宜其渥然丹者爲槁木,(黑+多)然黑者爲星星.

이황사기력지소불급, 우기지지소불능.

의기악연단자위고목,이연흑자위성성.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마땅히 홍안이 어느 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奈何以非金石之質, 欲與草木而爭榮?

念誰爲之( )賊, 亦何恨乎秋聲!"

나하이비금석지질, 욕여초목이쟁영.

염수위지장적, 역하한호추성.

 

금석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생각건대 누가 저들을 죽이고 해하고 있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하는가?"

童子莫對, 垂頭而睡. 但聞四壁蟲聲(口+卽), 如助余之歎息.

동자막대, 수두이수. 단문사벽충성즐즐, 여조여지탄식.

 

동자는 아무 대답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 다만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리는데,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다.


구양자(歐陽子)가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찟 놀라 귀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바스락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또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동자(童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말했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色)은 암담(暗淡)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가을의 모양은 청명(淸明)하여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 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것이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 만하더니,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여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한 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가을은 형관(刑官)이요, 때로 치면 음(陰)의 때요, 전쟁의 상(象)이요. 오행(五行)의 금(金)에 속한다.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니, 항상 냉엄하게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商聲)으로, 서방(西方)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으로 칠월(七月)의 음률에 해당한다. 상(商)은 상(傷)의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傷)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육(戮)의 뜻이다.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이게 되는 것이다.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마음 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마땅히 홍안이 어느 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금석(金石) 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생각건대 누가 저들을 죽이고 해하고 하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하는가?"

 

동자는 아무 대답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필자와 동자의 관점의 차이거나, 삶에 대한 진지성의 다름이라고 볼 수 있다.)단지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리는데,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다.

요점 정리

지은이 : 구양수(歐陽修)/김학주 옮김

갈래 : 수필, 부

성격 : 허무적, 사색적,

제재 : 가을

주제 : 가을 바람에서 느끼는 인생의 덧없음(자연의 순리를 인정하는 측면에서는 허무주의의 극복이 주가 되고, 자연의 순리를 거부할 때는 상심과 탄식이 주가 됨)

줄거리 : 구양수가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무슨 소리를 듣고 귀를 기울인다. 처음엔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했다. 또 사람이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동자에게 물으니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가을 소리라는 것을 알고 마음이 적막해진다.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여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동자는 아무 대답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 단지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리는데,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다.

출전 : <고문진보>

내용 연구

 

구양자(歐陽子 : 작자 자신을 가리킴)가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찟 놀라 귀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바스락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또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가을의 소리를 절묘하게 묘사한 부분)

 

내가 동자(童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말했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문답의 형식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효과를 준다.)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色)은 암담(暗淡)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가을의 모양은 청명(淸明)하여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 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것이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 만하더니,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여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한 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가을은 형관(刑官 : 주례에 의하면 관제를 여섯으로 나누어 天地春夏秋冬이라 하였으며, 그 중 추관은 刑을 관장하였다. 가을을 형관이라 한 것은 가을이 만물을 말려 죽이기 때문임.)이요, 때로 치면 음(陰 : 사계절을 음양으로 따지면 봄 여름은 양에 속하고 가을 겨울은 음에 속함)의 때요, 전쟁의 상(象 : 병기의 형상. 가을 기운이 만물을 말려 죽이는 것이 병기가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렇게 말한 것임 )이요. 오행[五行 :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를 이른다. 오행의 원리를 통하여 인생과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였음 ]의 금(金)에 속한다.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니, 항상 냉엄하게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商聲)으로, 서방(西方)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夷則 : 1옥타브의 음역을 12개의 음정으로 구분하여 각 음 사이를 반음 정도의 음정차로 율을 정한 것으로,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사용되었다. 이 12음계는 저음으로부터 황종(黃鐘:C) ·대려(大呂:C) ·태주(太簇:D) ·협종(夾鐘:D) ·고선(姑洗:E) ·중려(仲呂:F) ·유빈(萊賓:F) ·임종(林鐘:G) ·이칙(夷則:G) ·남려(南呂:A) ·무역(無射:A) ·응종(應鐘:B)의 순으로 되어 있다. 각 율은 황종을 기본음으로 하여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으로써 음정을 구한다. 십이율은 음양(陰陽)의 원리에 따라 양을 상징하는 황종 ·태주 ·고선 ·유빈 ·이칙 ·무역 등 홀수의 여섯을 육률(六律)이라 하고 이를 양성(陽聲) ·양률(陽律) ·육시(六始) ·육간(六間)이라고도 한다. 또 음을 상징하는 대려 ·협종 ·중려 ·임종 ·남려 ·응종 등 짝수의 여섯을 육려(六呂)라 하고, 음성(陰聲) ·음려(陰呂) ·육동이라고도 한다. 이 십이월을 십이개월에 각각 배치하여 이칙은 칠월, 곧 가을에 해당한다.]으로 칠월(七月)의 음률에 해당한다. 상[商 : ① 동양 음악에서, 오음계((궁, 상, 각, 치, 우) 가운데 궁에서 둘째 음. ② 동양 음악에서, 칠음계(궁, 상, 각, 변치, 치, 우, 변궁) 가운데 궁에서 둘째 음.]은 상(傷)의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傷)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육(戮)의 뜻이다.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이게 되는 것이다.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마음 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마땅히 홍안이 어느 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금석(金石) 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허무함의 정서를 잘 드러내고 있음)생각건대 누가 저들을 죽이고 해하고 하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하는가?"

 

동자는 아무 대답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 단지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리는데,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다. <고문진보>

이해와 감상

 

이 글은 구양수가 52세 때의 가을에 쓸쓸한 바람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감홍을, 직서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동자(童子)와의 대화 형식을 빌려 써낸 것이다. 가을 바람의 처량함과 만물이 조락(凋落)하는 경치를 보고, 자연 현상의 변화와 인간의 생활을 연관시켜 인생(人生)의 덧없음을 안타까운 탄식조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그의 문장이 쉬우면서도 유창하고, 서술이 섬세한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출처 : 박갑수 외 2인 공저 지학사 문학)

이해와 감상1

 

송(宋) 구양수 지음. 산문. 구공(歐公) 52세 때의 작품이다. 추성부(秋聲賦)는 아방궁부(阿房宮賦) 로부터 비롯된 '문부(文賦)'를 발전시켜,송대의 賦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산문적인 賦의 양식을 확립한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賦가 물상(物象)을 형용하는 서사(敍事).서경(敍景) 의 문학이라 한다면, 이 추성부(秋聲賦)야말로 참으로 그 특색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는 글이라 하겠다. 소리, 색깔, 경치, 감정 등 몇 가지 면에서 묘사와 비유를 가하여 변화가 다양한 가을 경치가 지면에서 배어 나올 듯하다. 작가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감개라는 면에 착안하여 이를 가을소리, 가을풍경의 통일과 조화 속에 짜 넣었다. 가을소리를 빌려 우주 만물의 쇠락에서 짧은 인생의 비애를 연상한다. 이 부는 산문 같기도 하고 시와 같기도 하다. 늘어놓는 수법, 서정적 필치, 형상적 비유를 통해 가을소리의 묘사는 다채롭고 그윽하게 전개된다. 그 사이에 동자와의 대화를 끼워 넣어 독자로 하여금 걷잡을 수 없는 신비로운 흥취와 무한한 감개를 느끼게 한다.

심화 자료

구양수(歐陽脩) (병)Ouyang Xiu (웨)Ouyang Hsiu. 1007 중국 쓰촨[四川] 몐양[綿陽]~1072 허난[河南].

 

중국 북송(北宋) 때의 시인·사학자·정치가.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 송대 문학에 ' 고문'(古文)을 다시 도입했고 유교원리를 통해 정계(政界)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구양수는 쓰촨 성 몐양의 지방관이었던 아버지 구양관(歐陽觀)을 3세에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후베이[湖北]에 살고 있던 숙부 구양엽(歐陽曄)의 집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자랐다. 집안이 너무나 가난해서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쓰는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것인지 모르지만 집안이 궁색한 형편에 놓여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1030년 진사(進士)시험에 장원급제하여 서쪽의 수도였던 뤄양[洛陽]의 유수추관(留守推官)을 제수받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문인으로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던 구양수는 뤄양에서 유명한 시인 매요신(梅堯臣) 등과 사귀었다. 이들과의 친분으로 인해 구양수의 문학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이를 계기로 고문의 간결성·명료성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다. 구양수는 몇 해 전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의 작품을 읽고 케케묵은 은유와 고전문구의 인용을 일절 배제한, 평이하고 간결한 고문체에 크게 감명받았다. 이후 고문체 부흥의 지지자·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새로운 문학운동의 전기를 마련했다.

 

1034년 수도 카이펑[開封]에 있는 황실도서관 사서직을 맡게 되었다. 2년 뒤 고위관리인 범중엄(范仲淹)이 조정의 제도와 정책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재상(宰相) 여이간(呂夷簡)에 의해 좌천되었을 때 구양수는 서슴지 않고 여이간을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결과 그도 후베이 성, 후난 성[湖南省]의 하급관리직으로 강등·좌천되었다. 이곳에서 거의 1,000년에 이르는 정치적 혼란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오대사기 五代史記〉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엄격하고 공정한 사관(史觀)에 입각하여 정치적 소외세력인 순교자·반란자·매국노 등에 대해서도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그 전대(前代)의 역사가들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수도 카이펑으로 다시 돌아온 범중엄과 다른 고관들의 추천을 받은 구양수는 1043년에 카이펑으로 소환되어 지간원정(知諫院正)이 되었다. 범중엄과 기타 정치개혁가들이 사사로운 파당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자 구양수는 유명한 〈붕당론 朋黨論〉을 써서 사대부들의 개인적인 모임이 정치적으로 유익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용기와 직언에 감복한 인종(仁宗)은 구양수를 황제의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조칙(詔勅)의 초안을 작성하는 직책에 임명했다. 그는 직언과 엄정한 비평 때문에 적이 많았는데 1045년에는 여러 해 전에 조카딸과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탄핵을 받아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가 뤄양 시절에 여자관계가 문란했던 점을 미루어볼 때 이 탄핵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 보인다. 비록 무죄로 방면이 되기는 했지만 그의 명성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구양수는 다시 강등되어 안후이 성[安徽省]의 추저우[州] 지사(知事)로 좌천되었으나 이 고장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에 매혹되어 더욱 술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스스로 호를 취옹(醉翁)이라 지은 뒤, 취옹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취옹정기〉라는 수필을 썼다. 이 글은 중국문학에서 가장 이름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1050년 남쪽 수도인 허난 성 구이더[貴德]의 자사(刺史)를 거쳐 1054년에는 수도로 소환되어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가 되었다.

 

좌천된 지 거의 9년 만에 수도로 돌아와서 맡게 된 이 새로운 보직은 승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역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강직함과 직설적인 태도 때문에 동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의 첫번째 임무는 〈신당서 新唐書〉를 저술하는 것이었다. 1년 뒤 이 작업이 막 시작되던 때 구양수는 중국 북부의 대부분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만주 거란족에 송의 사절로 파견되었다. 1057년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 해의 과거시험에서 고문체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들은 합격시키는 한편, 문학적 수사를 많이 사용하는 태학체(太學體)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은 모두 불합격시켰다. 이렇게 하여 합격된 사람들 가운데는 후에 '당송 8대가'로 칭송되는 소식(蘇軾:蘇東坡)·소철(蘇轍) 형제와 증공(曾鞏)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자기 자신의 문학관을 전통적인 과거시험에 적용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은 낙방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변려문(騈儷文)보다 고문(古文)을 더 중시하는 결정적이고 획기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중국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왕안석(王安石)과 소식 같은 유능한 젊은 문인들을 칭찬하고 독려했다.

 

〈신당서〉가 완성된 1060년 그는 사회·재정·군사 등의 각 분야에서 많은 공적을 남기면서, 군정(軍政)을 담당하는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했고 그다음 해에는 부재상(副宰相)에 해당하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그러나 궁중에서 더이상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하여 60세에 그의 관운(官運)은 끝이 났다. 그는 며느리와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그로 인해 명성에 타격을 받아 수도에서 점점 더 고립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거듭하여 퇴관시켜줄 것을 건의했으나 새로 등극한 신종(神宗)은 이를 거부하고 그를 안후이·산둥·허난 등지의 지방관으로 내보냈다.

 

산둥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그는 전에 자신이 키워 준 왕안석이 제정한 신법(新法) 가운데 농민에게 낮은 이자로 대출해주는 청묘법(靑苗法)에 특히 반대하여, 그의 관할 지역에서 그 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무렵 그는 분명 신법의 시행에 실망을 느낀 보수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1071년 그는 태자소사(太子小師)가 되어 은퇴했다. 그는 취옹정이 있는 아름다운 안후이성의 영주(潁州:지금의 푸양 현[阜陽縣])에서 은퇴 후의 생활을 보낼 작정이었으나 그곳에서 몇 달 살지 못하고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구양수의 개인적 영향력과 여러 방면에 걸친 업적은 그가 죽은 후에도 지속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정치가로서는 유교원리를 통해 당시의 정계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 추천했다. 추천받은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그와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있었다. 구양수는 일찍이 한유의 작품에 심취하여 한유의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지지했으나, 한유보다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그는 맹자의 글처럼 간결명료한 한유의 고문체 문장을 좋아하여 당시 유행하던,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운율을 맞춘 태학체 문장을 멀리하고 고문체 문장을 즐겨 썼다. 고문체로 쓰여진 그의 문장은 이후 많은 문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는 산문시인 부(賦)의 형태를 여러 가지 제약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했고, 부와 사(詞)를 비롯한 다른 문학형태에서 모범이 되는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오대사기〉와 〈신당서〉에서는 전통 역사서의 형태와 범위를 확충했고 간결하지만 정확한 기술과 도덕적 판단을 통하여 그당시의 인물과 제도를 평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의식했으리라고 생각된다. 학자로서는 후대의 주석들을 무시하고 원전(原典)을 새롭게,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고고학연구에도 일조했고, 화가로서는 새로운 문인화(文人畵)화법을 창안했다. 그가 남긴 저서로 전해져 오는 것은 역사서 이외에도 시·정부문서·편지, 기타 소품들을 합쳐 150권이 넘는다. 그의 서재는 1만 권이 넘는 책과 고대로부터의 문학적 유품 및 고고학적 기록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李知玹 옮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부(賦)

 

한문문체의 하나. ‘부’는 본래 ≪시경≫의 표현방법의 하나로서,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는 것이다.

 

이후에 굴원(屈原)의 ≪초사 楚辭≫를 계승한 송옥(宋玉) 등에 의하여 하나의 문학 장르로 정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아름다운 글을 통한 풍유(諷諭)에 목적을 두고 있다.

 

한대(漢代)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내용과 형식이 ≪초사≫와는 달라진 ‘한부(漢賦)’라는 새로운 문체로 발전시켰다. 그 문체는 시(詩)적인 측면보다는 산문적인 성분이 늘어난 것이다. 내용 면에서는 개성이나 개인의 감정이 사라지고 일정한 일이나 물건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일 자체에 더욱 중점이 놓여지게 되었다.

 

한나라의 황실에서는 ≪초사≫를 애호하였다. 그래서 사마상여는 자기의 문재(文才)를 총동원하여 미사여구(美辭麗句)를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부는 듣는 이의 귀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려는 방향으로 형성,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유협(劉塢)이 ≪문심조룡 文心雕龍≫에서 “부란 펼친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채색을 펼치고 무늬를 이룩하여 사물을 묘사하고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부의 문체를 정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나라의 양웅(揚雄)은 부의 종류를 ‘시인(詩人)의 부’와 ‘소인(騷人)의 부’로 나누었다. 진(晉)나라 지우(摯虞)는 부의 종류를 고부(古賦)와 금부(今賦)로 나누고, 원(元)나라 축요(祝堯)는 ‘시인의 부’·‘소인의 부’·‘사인(詞人)의 부’로 나누었다.

시대적으로는 대체로 부의 종류를 ‘초사체(楚辭體)’·‘양한체(兩漢體)’·‘삼국육조체(三國六朝體)’·‘당체(唐體)’·‘송체(宋體)’로 분류한다. 그런데 명나라 서사증(徐師曾)의 ≪문체명변 文體明辨≫에서는 ‘초사체’와 ‘양한체’는 모두 고부(古賦)로 일괄하여 처리하였다.

 

다시 후대의 부들은 문체에 따라 배부(排賦)·율부(律賦)·문부(文賦)로 분류하고 있다. 부의 구성은 대체로 직서체(直敍體)와 문답체(問答體)로 나누어 진다., 한편의 부는 대개 서(序)·본문·결어의 3단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부는 꼭 3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구법(句法)은 ≪초사≫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산문화하여 ‘혜(兮)’자를 쓰지 않고 4자구를 쓰면서 중간에 3자구나 6자구를 섞어 변화를 일으키는 작품도 있다. 부의 형식과 내용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다.

 

배부는 서진(西晉)의 반악(潘岳)과 육기(陸機) 등에게서 시작하여, 송나라 이후 육조시대(420∼589)에 성행하였던 문체이다. 반악과 육기는 부의 수사(修辭)에 더욱 공을 들이어 대구(對句)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뒤에 나타나는 변려문(騈儷文)의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를 변부(騈賦)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송나라 이후로는 시와 마찬가지로 부에 있어서도 더욱 형식적인 문장 수식에 노력하여 부의 음률효과까지도 중시하게 된다. 그 결과 아름다운 대구를 이루는 문사(文辭)를 늘어놓은 배부라는 형식주의적인 문체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율부는 당대에 이르러 과거(科擧)에 시부(詩賦)를 출제함으로써 생겨난 더욱 규식화(規式化)된 부체이다. 율부는 대구와 평측(平仄)의 음률까지도 중시하였다. 이것은 심약(沈約)의 사성(四聲)·팔병(八病)의 이론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시의 근체(近體)에 해당하는 부체라고 할 것이다. 다만 율부는 부의 내용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문장의 형식만을 중시했다. 이 점이 시와는 다르다. 율부는 송나라 초기에 과거에도 채용되었다.

 

문부는 송나라 구양수(歐陽修) 이후에 산문인 고문(古文)이 성행하면서 그 영향 하에서 이루어진 부체이다. 문부는 변려문을 배격하고 산문화한 것이 특징이다. 구양수의 〈추성부 秋聲賦〉와 소식(蘇軾)의 〈적벽부 赤壁賦〉 같은 명작들이 남아 있다.

 

문부는 형식적인 율부와는 달리 개성적인 창의(創意)가 담긴 새로운 부체이다. 구양수·소식 이후에는 그들의 작품을 뒤따를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영효부 半曉賦〉가 우리 나라의 첫 번째 부 작품이다. . 그 형식은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율부와 같이 대우(對偶)와 환운(換韻)을 쓰고 있다. 고려 때에는 부를 과거시험의 과목으로 정했다.

 

그에 따라 최충(崔食)의 사숙(私塾)인 구재(九齋) 같은 데에서도 부를 학습하였다. 그리고 ‘양경시부(良鏡詩賦)’라고 노래된 것을 보면 많은 작품을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령문(功令文)이어서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은 듯하다.

 

≪동문선≫에 전하는 최초의 작품은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의 〈중니봉부 仲尼鳳賦〉와 〈아계부 啞鷄賦〉이다. 앞의 것은 공자와 봉(鳳)의 덕을 읊었고, 뒤의 것은 닭을 빌려 특정인물을 풍유한 것이다. 형식은 고부에 가깝다.

 

이규보(李奎報)는 부에 있어서 다양한 문재를 발휘하여 훌륭한 작품을 남긴 작가이다. 기발한 우의(寓意)로 가탁된 〈외부 畏賦〉는 문부체이고, 허무한 인생의 달관을 주제로 한 〈몽비부 夢悲賦〉는 고부체이다.

 

물성(物性)을 통하여 인성(人性)을 풍유한 〈방선부 放蟬賦〉, 낙천지명(樂天知命)의 인생관을 담은 〈조강부 祖江賦〉, 인정의 감응상(感應相)을 논리적으로 편 〈춘망부 春望賦〉 등은 걸작이다.

 

부는 최자(崔滋)의 〈삼도부 三都賦〉를 비롯하여 작품은 인성(人性)이나 사리·물정, 혹은 역사사실을 논설한 설리적인 것이 많다. 고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부 작품 역시 형식과 체재 면에서 고려시대와 별로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근원적으로는 중국 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과거시험 과목으로 쓰인 과부(科賦)이다.

과부는 주로 중국의 역사사실이나 옛 시문의 한 구절을 주제로 삼아 1구6언으로 30구에서 60구까지 지었다. 일정한 압운도 없고 각 구 제3언 다음에 대개 허자를 써서 구의 호흡을 조절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율부처럼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여 문집에 전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과거 응시 이전에 습작하기 위하여 전인의 잘된 작품을 초록해두었던 것이 간혹 보일 뿐이다.

 

부는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귀족적 성향을 띠고 있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가 쉽다. 그러나 한문 문장의 다양한 표현 가능성을 개발하는 데는 큰 공헌을 하였다.

 

따라서 부의 발달을 통하여 한문 문장의 수사기교와 음운의 해화(諧和:조화)가 한층 더 발달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부는 중국과 어음이 달라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中國文學槪論(金學主, 新雅社, 1979), 辭賦의 定着과 樣相(宋寯鎬, 韓國文學硏究入門, 知識産業社, 1981), 中國文學總論(兒島獻吉郎著, 孫頭工譯, 臺灣 商務印書館, 197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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