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최재서 평론가 / 친일 행적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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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서 崔載瑞 1908-1964 영문학자. 호는 석경우(石耕牛) .필명은 학수리(鶴首里) 상수시(尙壽施). 창씨명은 석경우인(石耕牛人). 황해도 해주출생. 2고보를 거쳐 1931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 1933년 동대학 연구실을 거쳐 런던대학을 수료했다. 그후 곧 교수 야마모코의 후임으로 동교 졸업생으로는 처음으로 강사로 발탁되고 일본의 고급사상지 <개조> 및 일본 영문학지에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첫 논문은 앤드류 세실 브레들리의 시론을 소개한 미숙한 문학으로 알려져 있다. 1933<구미현대문단 총관-영국편>, 휴우 월포올의 <영국현대소설의 동향> <현대주주주의 문학이론의 건설- 영국평단의 주류><비평과 과학-현재주주주의 문학이론의 건설속편>등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소개 및 해설을 가지고 이향하 ,김기림과 같이 프로문학과 인상주의 비평이 퇴조할 시기에 등장했다. 이 무렵 밀턴 우울드맨의 <미국현대소설의 동향><제임스 조이스의 <반종일> 등의 번역을 비롯, <문학발견시대><문예수감-단상> <조선문학과 비평의 임구><풍자문학론><비평의 형태화 기능><고전부흥의 사회적 필연성> 등을 발표했다. 이들 중 번역 및 평문의 주조는 토마스 어네스트 홈의 신고전주의문학론이 기초이다.이것이 바로 이미지즘 시론이며 , 당시 한국에서는 모더니즘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주지주의문학론이란 것도 이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토마스 스턴즈 에리어트의 <전통과 개인적 재능>,허버트 리드의 <정신분석과 비평>,아이버 암스트롱 리처즈의 <시와 과학>을 소개하여 비평의 아카데미화를 우리 문학사상 처음으로 보여 주었다. 즉 한국평단에 행글로 색슨적인 모터니티를 원전에 입각하여 도입한 것이다. 이같은 소개에 머물지 않고 한국문학에 적극 참여,문단의 속도조절에 이바지했다. ‘비평가란 작가와 독자와의 중개인 노릇밖에 할 것이 없겠다, <문학발견시대>가운데서 비평의 해석학적인 소이연을 밝힌 근본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학문적 배경을 지닌 강단비평의 일종으로,그에 있어서는 이 아카데미즘이 모더니즘이라는 강점을 띠고 있다.올머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풍자적 방법, 엘리어트와 리처즈의 방법론 자체가 당시로서는 모더니티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호적없는 외국문학연구가>,<현대시의 생리와 성격-장편시>,<기상도에 대한 소고찰>,<영국의 전통과 자유 작가회의-에드워드 모르간 포스터의 연설을 중심으로>,<리아리즘의 확대와 심화-‘천변풍경과 날개에 관하야’>,<디레탄티즘을 축출하자>,<해감의 일언> 등을 발표했다.

 

이들 평론이 내세운 모더니티가 적중할수 있게된 것은 , 1930년대 중반기 이후의 한국문학이 저널리즘의 대중화에 더불어 여러 조류의 전형기에 처해졌다는 조건이 있다. 아울러 그것은 독자의 수준향상과 결부된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9인회및 다다이즘.이미지즘<모더니즘> 등의 실험이 비롯되어, 김기림의 <태양의 풍속>,이상의 <날개>,박태원의 <천변풍경>이 등장한다. 당시 이같은 작품은 일종의 방법론상의 문제였을 따름이지만,난해성을 가지고 군림했다. 그러나 이런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최재서에서 비로서 가능했다. <기상도> 의 해설은 <현대시의 생리와 해설>에서, <날개><천변풍경><리아리즘의 확대와 심화>에서 그 바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후자에서 우리 문단에 보이기 시작한 주지적 경향의 결실에 대해, 독자의 곤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환영해야 할 rudggidd라고 주장했다. 이 지성을 말하는 점이 아카데미즘과 모더니티의 결함을 가능케 했다.

 

1937<고둔이상의 예술>,<이상의 예술>,<빈곤과 문학>,<현대적지성에 관하야>,<문화기여자로서> 등의 평론을 발표했다. 이같은 실천적 비평에서 해설한 지적 방법은 풍자성에 대한 것이며,헉슬리의 방법론에 평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10개를 알고 그 반만을 드러낼 때 가능한 논리성인 것이다. 이 무렵에 발표된 기타 평문은 <시와 도덕과 생활>,<센티메탈리즘론>,<이상적 인간에 대한 규정-지적협력국제협회 담화회보고>,>적수공권시대-단평>,<사실의 훈련> 등이 있으며 , 홍기문.채만식과의 ,리얼리즘>논의 및 임홍석. 백철과의 문장문체에 대하야> 등의 좌담회가 <조선일보>를 통해 있었다. 김문집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기의 평단에서 쌍벽을 이룬 그는, 김문집이 <동아일보>화돈문예춘추란과 탁목조란에 삼족조란 필명으로 활약하자,여기에 맞서 <조선일보>고기도란에 학수리.석경우.상수시 등의 필명으로 단평을 썼다.

 

1938<현대작가와 고독>,<현대와 비평정신>,<취미와 이론의 괴리>,<인텔리작가 헉슬리>,<비평의 행패와 내용>,<세계문학의 동향>,<문학.작가.지성 -지성의 본질과 그 효용성> 등을 발표,그의 <리얼리즘.로맨티시즘.휴먼이즘 논의>를 박영희 . 김문집. 김남천. 임화. 서항석.정인섭 등과 <장래 할 사조와 경향>을 김문집.임화.김광섭.김상용.유치진.이헌구.모윤숙 등과 <조선일보>를 통해 좌담회를 가졌다. 또한 이태준과 더불어 장편소설에 대한 <평론가 대 작가문답><조선일보>지상에 갖고, 우리 문학의 현대 적성격을 과학적 방법에 의거하여 논리적인 뒷받침을 세우고 또 논리적인 면에서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천황제군국주의가 가열될 때,구미류의 생활을 자처했다고 고백했었다.

 

1929<인문평론>을 경영하면서 <건설과 문학><국책과 문학><문학의 자숙> 등의 권두언을 싣고 차차 황도문학을 위한 신체제문학에 야합하여 <인문평론><전형기의 문화이론> 등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국민문학을 창간하고 조선문인회1943년의 제 2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일본문으로 평론 및 창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비평정신으로 평론 및 창작을 하게 된다.그리고 비평정신의 상실을 국민적 입장에서 고구할수밖에 없고 , 비평기준이 결국은 연구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와 신념의 문제라고 <국민문학> 창간호에서 선언했다. 이것이 곧 논리를 생명으로 한 그의 비평이 종말을 고한 경위이다.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평론가, 영문학자. 호 석경우(石耕牛). 황해도 해주 출생. 최재서는

경성제대 영문과를 나와 영국 런던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경성제대

강사, 보성전문학교와 법학전문학교 교수 등을 지내면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문학평론을 썼다. 그는 종래의 경향문학 비평이나 인상주의적 비평에 대하여

주지주의적 비평을 시도, 우리 문학에 과학적 비평방법을 제시하였다. 광복

후 연세대, 한양대 등에서 교수를 지내는 동안 문단과의 관계를 끊고

문학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이상은 어문각에서 출판한 {한국문예사전}에 나와 있는 최재서 항목의

설명이다. 일제 말기 문학가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던 그의 경력에 친일부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8.15 후 그가

친일경력 때문에 문단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강단에 설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이 그냥 '문단과의 관계를 끊고

문학연구에만 전념'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마치 그가 어떤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집념이 있어서 그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일 소지를 남겨 주고 있다.

 

후세의 사람들도 애써 감추고자 했던 그의 친일경력은 그가 비평가였던 만큼

심정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기반을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친일의 문학논리를 구체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특히

19404월에 독일이 파리를 침공할 때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그는 불안한

세계정세에 대해서 오히려 우려하고 있었고 그러한 데서 파생한 문화적

위기를 지성적 관점에서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에 그는 다소 혼란된 모습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다가,

그 자신이 주간으로 있었던 {인문평론}을 창간한 193910월부터는 잡지

권두언에서 친일적 발언을 조금씩 하기 시작하였다.

 

최재서가 쓴 것으로 보이는 {인문평론} 창간호 권두언인 [건설과 문학]에는

"세계의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독파(獨波:독일과 포르투갈----인용자)

간에는 벌써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구주의 위기를 고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에는 동양으로서의 사태가 있고 동양민족에게는 동양민족으로서의 사명이

있다. 그것은 동양 신질서의 건설이다. 지나를 구라파적 질곡으로부터

해방하여 동양에 새로운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함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명백한 일본의 중국침략을 서구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행위라고

비호하는 얼토당토 않은 친일적 주장이며, 서양과는 다른 일본 중심의

신체제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친일 논리이다. 이 무렵 그는 일본

총독부의 공작으로 만들어진 친일문학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조직(1939.

10)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영문학을 전공했고 주지주의와 같은 모더니즘을 옹호했던 최재서에게

현실인식 전환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은 동아시아에서 벌어졌던

중일전쟁보다는 유럽에서 벌어졌던 제2차 세계대전, 특히 19404월에

있었던 독일의 침공으로 인한 파리의 함락이었다. 파리의 함락은

최재서에게는 바로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의 근대가 몰락하고 새로운 질서,

독일 전체주의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로 재편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누구보다도 서구의 근대에 관심이 많았던 최재서에게 서구 근대의 몰락처럼

보였던 파리의 함락은 새로운 현실 인식을 요구하였고, 그것은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대결이라는 정세 판단 대신에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와 문화주의의

부패 및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성장이라는 극히 잘못된 현실인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된 생각이 가장 먼저 드러난 글은 19406{인문평론}에 실린

[전쟁문학]이다. 그는 이 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반전적 관점에서 쓴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비판하고 그 당시 참전하였던 독일학생들의 편지를

묶은 책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호전적 지향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그는

조선에도 중일전쟁을 다룬 전쟁문학이 나와 온 조선 사람이 전쟁에

참여하기를 바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오늘날 전쟁문학이라고 할 때 그것은 후세에 영구히 남아질 예술적

작품보다는 차라리 생생한 전장의 체험을 그대로 전할 만한 보고적인 작품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병대(兵隊)가 전장에서 어떠한 고생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전장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런 것을 아는 것이 현재의 우리로선 더 절실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들이 멀리 총후에 남아서 병대들과 더불어 전쟁의

감정을 나누고 그들과 매한가지로 국민의식에 연결되려면 이러한 전쟁문학이

가장 손쉽고 또 현재 가질 수 있는 유일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전쟁문학], {인문평론}, 1940. 6)

 

당시 벌어지고 있던 중일전쟁을 옹호하는 전쟁문학을 기대하던 그가 좀더

논리적으로 자신의 전환을 이야기한 것은 [전환기의 문화이론][문학정신의

전환]이라는 글에서다. 그는 이 글에서 개인주의와 문화주의의 절멸과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발흥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조선은 이런 현실에

맞추어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가 이러한

현실 인식 위에서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국민문학이었다. 아직

국민문학론의 구체적 내용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대체적인 흐름이

국민문학으로 모아져야 할 것임을 명백하게 주장하고 있다.

 

[전환기의 문화이론]에서는 "국민적인 분열과 항쟁의 의식을 고취하는 문화는

다만 그것만의 이유로서 국가적 입장에선 거부될 것이다. 계급적 분열을

고취하는 좌익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의식의 분열을 유일의 주제로 삼는

심리주의 소설이나 가족간 특히 부자간의 분열항쟁을 폭로하는 가정

비극소설이 오늘 백안시되는 것은 여상의 이유로써라도 해석된다. 여하튼

국민문화는 국민 전체에 통일을 주고 국민적 단결을 더욱 공고케 하게 만드는

문화가 아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국민문화를 주장하였다.

 

또한 [문학정신의 전환]이라는 글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때 금번 전쟁은

우리가 즉시적인 전환을 행해야 할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 그 전환의 목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해득할 수 있다. 전환에 대한 경고란,

위기에 선 현대문화가 부패한 맹장으로서 절단되느냐 또는 신문화 창조의

배아로서 조장되느냐 하는 실로 결정적인 판단에 대응할 것을

의미한다.현대문화가 취할 바, 전환의 목표란 거지반 자명에

속한 일이 되고 만다. 문화의 국민화, 이 이외에 길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문학정신의 전환도 이 전체적인 전환과 방향을 같이하게 된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로써 신중하게 모색하던 새로운 문학론의 출구는 결국 친일문학론인

국민문학론으로 귀결되게 되었다.


친일문학지 {국민문학}의 창간과 친일적 국민문학론의 수립

 

19408월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한 후에 일제 총독부는 용지 공급

문제를 공식적인 이유로 모든 문학잡지를 폐간시켰다. , 19414월에 그

동안 문학작품의 발표지로서 큰 역할을 차지했던 {문장}{인문평론}

폐간시킴으로써 더 이상 문학지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온 것이었다. 일제는

그 후 최재서와 상의하여 국민문학을 주도할 수 있는 잡지를 내기로 결정하고

그것의 주간을 최재서가 맡아 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협의 끝에 나온

것이 친일문학지 {국민문학}이다.

 

이 잡지는 '국체관념의 명징, 국민의식의 앙양, 국민사기의 진흥, 국책에의 협력,

지도적 문화이론의 수립, 내선문화의 종합, 국민문화의 건설 등을 내걸고

노골적인 친일활동을 벌였다. 이 잡지의 주간으로 있던 최재서는 이 시기

국민문학론을 주도하게 된다.

 

{국민문학} 창간호에 발표된 최재서의 [국민문화의 요건]은 이 점에서 친일적

국민문학론의 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논문이다. 이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도 국민문학론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의 글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혼란을 면치 못한 것들이었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국민문학이라

하면 근대 이후 각 민족이 통일된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온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국에서 세익스피어,

독일에서 괴테, 러시아에서 푸시킨 등은 바로 국민문학의 선구자에 해당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문학사적인 의미는 이 당시 일반적으로 말해지던

국민문학론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거나 혹은 병존하기 힘든 것이었다.

시기 일본 중심의 국민문학은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국민문학의 의미와

배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적 혼란을

바로잡아야 이른바 친일적 국민문학론이 성립될 수 있었다. 이것을 명시한

것이 바로 {국민문학} 창간호에 실린 최재서의 글 [국민문학론의 요건]이다.

 

최재서는 이 글에서 국민문학은 "단적으로 말하면 유럽의 전통에 뿌리 박은

이른바 근대문학의 한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일본 정신에 의하여 통일된

동서의 문화 종합을 터전으로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 국민의 이상을 담을

대표적인 문학으로서 금후의 동양을 이끌고 나갈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이전의 국민문학의 논리적 혼란을 교묘하게

얼버무려 버리고 독특한 친일적 국민문학론을 수립하게 된다. 이제

국민문학론은 통일된 민족국가의 시민계급에 의해 수립되는 근대적인 의미의

문학이 아니라 일본 정신을 담는 문학으로 폭력적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문화주의로부터 국가주의 및 전체주의로의 전환이라는 문학정신의 전환을

막연하게 부르짖던 단계에서 벗어나 국민문학의 성격을 나름대로 규정할

정도로 논리적인 친일문학론을 펼친 최재서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친일적

국민문학론에 입각하여 한층 더 그것을 정교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지방문학으로서의 조선문학'이라는 논리이다.

 

당시 조선어로 쓰여지던 문학이 차츰 사라져 가자 많은 사람들은 조선문학은

이제 끝났다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최재서는 과거 2000만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던 조선문학에 비해 이제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하기 때문에 1억의

전국민을 대상으로 할 수 있어 조선문학이 절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규모가

커졌다고 변호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문학만을 국민문학으로 삼고 조선문학을

그것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 분개하면서 '지방문학으로서의 조선문학을

일본인들이 인정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인은 달래고,

일본인에게는 구걸하고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 맺고 있다.

 

반도의 문화인들은 시대를 잘 깨닫고 대승적 문화의식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내지 동포가 또한 큰 도량을 갖고 신참 조선문학을

포용하며 너그럽게 그것을 길러 주는 이해와 열의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조선문학의 현단계], {국민문학}, 1942. 8, 일문)

 

천황숭배론자로의 전락

 

19406월의 파리 함락을 결정적 계기로 하여 문화주의로부터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로 전환하고, 194111월 친일문학잡지 {국민문학}을 창간하면서

'국민문학론''지방문학으로서의 조선문학'이라는 논리를 제시한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더 이상 친일문학론의 논리적 구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것은 수립되어 끝난 상태이고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체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부터는 이전의 비평뿐만 아니라 대중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소설을 통하여 자신의 견해를 풀어 보려고도 했다.

 

19434{국민문학}에 발표된 최재서의 소설 [보도연습]은 그의 친일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확신에 찬 것인가를 잘 말해 주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19434월 무렵이면 이전의 친일문학단체였던 조선문인협회를

재조직하여 조선문인보국회라는, 더욱더 적극적인 친일단체가 수립되는

시기이다. 이 단체는 '조선에 세계 최고의 황도문학을 수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총독부와 친일문학인들에 의해 19434월에 만들어진 것이다. 최재서

역시 이 단체의 이사로 참가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친일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중국의 전쟁을 취재할

언론계 종사원들을 미리 연습시키기 위하여 그 쪽과 지형이 비슷한 평양

부근의 훈련소에서 미리 연습하는 주인공 송영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쓴

다분히 자전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의 나이가 서른여섯이라든가, 영문학을

전공했던 것이라든가, 출판사 사장이라든가 하는 점을 미루어볼 때 이 작품이

자전적 작품임은 쉽게 드러난다.

 

이 작품의 절정은, 마지막 부분에 이 훈련소에 나온 조선인 지원병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대목이다. , 지원병 중 한 사람이 자신이

고향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동네 친구 중 한 사람이 징병으로

끌려가기보다는 지원병이 되는 편이 낫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한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부분이다. 이 병사는

"뱃속까지 완전히 황국신민이 되지 않은 자는 군대에 들어가서도 비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물론 작중인물의 것이지만 표나게

내세우고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작가 최재서의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징용도 모자라 지원병을 종용하려고 이런 소설을 썼던 것을 볼 때 이 시기

최재서의 친일행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무렵 최재서의 친일활동은 글에서뿐만 아니라 문단활동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는 19438월에 열린 제2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고 [대동아의식에 눈뜨며]라는 일문으로 된 참관기를 19439

{국민문학}지에 발표하였다. 대동아문학자대회는 대동아의 문예부흥을 목표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내 각국의 문학자가 참가한 회의인데 이는

일본문인보국회 주최로 1942년 이후 매년 열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행한 '조선문학운동의 보고'라는 강연에서 징병제와 해군특별지원병제의

시행으로 조선은 전쟁방관자적 태도가 일소될 것이고 이는 조선문학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논리적인 차원을 떠나 심정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면서 그는 무조건적인

친일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것의 극적인 표현은 '천황'에 대한 무한한 숭배로

드러났다. 이는 [대동아의식에 눈뜨며]에서 시작되어 그 후 계속 이어져

[받들어 모시는 문학]이라는 글에 이르면 그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그는 이

글에서 '천황'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의 행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만세일계의 천황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의 행복은 새삼스럽게

어느 누구에 비길 수도 없이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다.

 

이 정도에 이르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심정의 문제로서 최재서의

친일활동이 어느 정도에 도달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최재서는 중일전쟁 이후 막연하게 동요하다가 파리 함락을 계기로 자신이

그나마 견지해 오던 모든 근대적 지성의 노력을 포기하고 전체주의와

국가주의로 전환하여 전쟁옹호론자로 바뀌었다. 그 후 일본의 국가주의에

맞는 '국민문학론'을 제창하고, 이어서 '지방문학으로서의 조선문학'

국민문학의 일부로서 규정 짓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논리로는 안

되는 문제, 즉 일본인이 되는 것을 스스로 실행하기 위해 いしろ로 창씨개명까지

하면서 천황숭배론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단활동 역시

비평가로서의 문학활동 못지 않게 그의 친일행각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상의 그의 글과 행적은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하는

것과 종류가 다름은 물론이고, 그 이후 그가 문단활동을 하지 않고 강단에서

학문활동을 했다는 것만으로 면제받을 수 없는 그런 성격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 김재용(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

 

참고문헌

 

최재서, [전쟁문학], {인문평론}, 1940. 6.

, [국민문학의 요건], {국민문학}, 1941. 11.

, [받들어 모시는 문학], {국민문학}, 194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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