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최일남 - 풍속(風俗)의 갈등과 풍자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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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風俗)의 갈등과 풍자
 金炳翼

  

 

최일남의 창작 이력에는 두 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그 하나는 그의 작품 발표가 초기에 극히 완만히 진행되다가 근년에 부쩍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1953년 <쑥 이야기>로 첫 추천을 받고 그보다 3년 후에야 <파양(爬痒)>으로 문단에 정식 데뷔, 이후 그의 창작은 1년에 한 편 미만의 과작(寡作)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70년대 중반기에 들면서 매해 10여 편을 생산했다. 따라서 불과 몇 편으로 촉망받는 50년대 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그가 이제까지 창작한 50여 편의 3분의 2 이상을 최근 몇 년 동안에 써낸 셈이다. 그의 이러한 경과가 잡지 또는 신문의 일선 편집자로 근무해 온 경력에서 연유한 것인지 혹은 내면의 어떤 변화를 통해서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여하튼 초기에 작품을 남발하다가 중년대에 들어 질량(質量)의 저조를 면치 못하는 대부분의 작가들과 상반된 현상을 보여 준다. 우리가 이런 경위, 그리고 그 작품들의 질적 분석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연령에 비례하는 그의 작품 활동이 인간적인 원숙성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만큼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그 관찰에서 얻어진 문학적 형상화 능력이 깊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조로(早老)의 문단 풍토에서 확실히 귀중한 범례를 이룬다. 두 번째의 그의 특이점은 창작 생활 30년 동안 그는 한결같이 단편 문학만을 고수해 왔다는 점이다. 그는 모든 작가들이 어렵지 않게 집필하는 장편 소설은커녕 중편에도 유혹되지 않고 단편으로만 만족해 온 것이다. 이런 그의 고집이 어디에 연원하고 있는지 역시 알 수 없지만 그의 이 같은 견고한 자세는 단편 중심의 우리 문학사에 더욱 꿋꿋한 자산이 되고 있다. 한 작가가 장편 소설을 통해 자신의 창작을 확대하지 않는다면, 그 작가의 세계가 그만큼 좁아질 수 있다는 약점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며 최일남에게도 그 약점은 또한 적용되겠지만 그 대가로 그는 삶의 단면에 대한 통렬한 해부라는 문학적 성과를 얻는 것이다.

  그의 문학 세계, 그것이 우리에게 가하는‘삶에 대한 통렬한 해부’라는 의미는 뿌리뽑힌 인간의 심상(心相)과 형식 잃은 이 사회에 대한 풍속적 고찰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두 데뷔작과 <진달래>등 초기작에서 드러나는 가난에의 관심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고향을 잃고 정신적 지주도 없이 좌절된 허황감 속에 떠도는 오늘의 일상인(日常人)들에 대한 가차없는 풍자 정신을 발휘한다. 그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농촌을 떠나 서울에 뿌리를 박으려 하거나 아니면 여전히 시골에 살면서도 도시적 생활 풍속에 물들거나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드러내 보여 주는 형태는 이들의 생활 거점이 어디이든 지간에 시골‘촌놈성’과 도시의‘하이 칼러성’이 불연속적으로 공서(共棲)함으로써 빚어지는 희화(戱畵)스러운 몸짓이다. 단편 작가로서의 최일남이 이들에게 보이는 태도는 애수 어린 야유일 정도이며 그 묘사가 일상적 삶의 형태에 대한 해학적 비판으로 응결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 작가가 집중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도시민(都市民) 속의 농촌성(農村性)과 농촌민(農村民) 속의 도시성을 우리는 한계인간적(限界人間的) 심상(心相) 혹은 비동시적(非同詩的)인 것의 공존 현상이라는 사회학적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문학의 입장에서도 진지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다.

  6·25사변과 그 이후의 급격한 사회적 변모는 우리의 전통적 사회 구조와 풍속에 그 근원부터 충격을 가하여 혼란의 한 도가니로 만들어 놓았다. 서구 문명의 급속한 유입과 현대적 생활이기(利器)의 사용, 대가족 제도의 핵가족 체제로의 분해, 농촌 인구의 대량적인 도시 이주, 급진전하는 개발과 소득 수준 향상 등은 인간 그 자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또는 개인과 집단 간의 관계에서 마땅히 지녀야 할 가치관과 그 질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그리하여 현대적인 것과 전근대적인 것, 전래적인 것과 박래적인 것, 명분주의적인 것과 실용주의적인 것 등 서로 다른 체계의 문화적 항목들이 한 시대의 평민에 뒤죽박죽으로 혼란을 일으키며 공존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서로 맥락 없이, 중심을 잃고 뒤섞이며 떠돌아서 형식에 의해 정렬되어야 할 행태와 풍속을 교란시키고 있다. 그것은 최일남의 표현을 빌면,‘자동차가 뿡빵거리는 대로에 연탄 배달을 하는 노새’와‘막소주 한 잔에 멸치 댓 마리 놓고 하던 배추밭 흥정을 지금은 다방에서 하게 되는 모습’과 같은‘양복 입고 갓 쓴 격의 도무지 우스운’양상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최일남의 이런 관찰은 풍속적 범주이지만 그 풍속의 근원은 이런 사회적 급변이 조성한 가치관과 삶의 양식의 급변, 나아가 혼란에 있으며 우리가 그에 대해 그리고 그의 단편이 지닌 풍자성에 대해 주목하는 것도 이런 핵심적인 주제로 소급할 수 있는 그의 관심의 중요성 때문이다. 그가 즐겨 그리는 인간들의 소심한 허황성이나 속물 근성으로의 귀속은 이런 각도에서 한 시대사의 부정적 측면으로 지적되는 것이다. 이 같은 점들을 좀더 자세히 추적해 보자.

  <쑥 이야기> <진달래> 등 빼어난 초기의 작품들을 통해 결코 목가적 풍경일 수 없는 농촌의 굶주림과 괴로움을 묘사한 최일남은 그의 새로운 정력적 창작기가 시작되는 70년 이후의 단편들을,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지만 아직 정착하지 못한 사람들과 서울에서 그 나름으로 안정되어‘서울 사람’의 눈으로 다시 돌아보는 고향 풍속 등의 두 갈래로 진전시킨다. 물론 작가는 도농민(都農民)간의 괴리에 직접 관련이 없는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여기서도 그는 상이한 문화권이 예리하게 충돌하는 인간간의 심리적 갈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한 여인을 유산시키려는 아들과 그의 50대 아버지 사이의 윤리적 사회적 태도간의 엄청난 거리를 그리는 <빼앗긴 자리>, 22년 만에 재회한 가족과 딸 사이에 벌어지는 생활과 심리의 갈등을 묘사하는 <이런 해후>가 그런 예다. 세대적 혹은 시간적 상거(相距)가 공간적 거리로 환치될 때 우리는 도시와 농촌 또는 도시 속의 농촌성과 농촌 속의 도시가 빚어내는 균형 잃은 인간의 희화―비동시적인 것의 공존이라는 문화적 갈등을 발견한다.

  그것은 <쑥 이야기>나 <진달래>에서 보는 것 같은 기아 체험(饑餓體驗)과 더불어 성장하여 서울로 이주한 최일남의 주인공들에게 소시민적 무기력과 소심한 허황성을 우선 부여한다. 바걸 또는 술집 작부가 등장하는 <여행>이나 <순결교육>, 궁색한 월급쟁이와 그의 무직자 친구들이 나타나는 <참패> <갈구> <노란 봉투> 등‘상경(上京)한 서울 사람들’의 전반적인 색조가 그렇다. 예컨대 상준이 찾아올 때마다 넉넉지 못한 월급에서 용돈을 떼어 주며 그로부터‘부담만 주는 우정’을 감수해야 하는 <참패>의 철규, 술을 마시곤 술값이 없으면서도 계산하는 척 나서는 상준, 버스에서 거스름돈을 못 받고 항의하다가 운전사로부터 핀잔을 받자 머쓱해 하는 <갈구>의 진섭, 자기가 다니지도 않는 대기업체의 이름 박힌 노란 봉투를 과시하듯 은근히 보여 주는 <노란 봉투>의 광순이 등은 작가의 초기작 <파양(爬痒)>에서의 아버지처럼 눈치 보며 주눅 들린 무기력의 표본들이다. 이 무기력은 결국 허황함의 또 다른 표현이다. 최일남의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무기력을 은폐하기 위해 과장스런 제스처를 쓴다. 상준은 오히려 친구들에게 돈을 헤프게 주어 버리기 때문에 가난한 것으로 그의 아내에게 거짓말하고 진섭은 버스 안에서 자기 발에 밟힌 남자와 싸움이 붙어‘사정없이 내리갈겼다’고 허언하며‘친구들이 너무 범속해서 사귈 생각이 없다’는 광순은 허황한 계획으로 자신의 초연을 가장한다.

  서울 사람들이 이처럼 무기력과 허황함 사이에‘아슬아슬한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가장 평균적인 속물 근성’(<빼앗긴 자리>)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 적당히 사리 분별을 할 줄 알고 약간씩은 찌들기 시작한(<노란 봉투>)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 서울의 풍속, 도시의 문화에 정착하지 못한 채 정서적으로 성격적으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들은 자기 고향이 시골임을 확인하고 있고 이제는‘서울 사람들’이 되었다고 자부하더라도 그 확인과 자부가 여전히 근거 없이 뿌리뽑힌 상태의 허상이란 사실을 <가을 나들이>와 <서울 사람들>은 인식시켜 준다. 서울의 식모살이에서 모처럼 세 처녀가 귀향을 했지만 이미 이들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핸드백을 들었으며, 텔레비전의 연속극을 아쉬워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만난 시골 청년들은 서울의 유행가를 부르며 고고를 추고 있었다.

  향순이도 어렸을 땐 불을 놓는 오빠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시시덕거렸다, 그런 오빠도 지금은 많이 달라지고 자기 자신도 불과 삼년 동안에 퍽 달라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냥 쓸쓸한 들판일 뿐 서울서 마음속에 간직해 오던 어떤 훈훈한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렇고 마을의 산야까지도 삭막한 것 같았다.―<가을 나들이>

  그리 넓지 않은 들판에 섰을 때는 그렇게도 속이 시원했었는데, 이틀째가 되면서부터는 들판은 그냥 들판일 뿐 별다른 감흥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산천이 마음속에 있을 때는 그렇게 좋았는데 막상 그 속에 파묻혀 보니까 갑갑하기만 하다고 윤경수도 말했다.―<서울 사람들>

 ‘맨날 서울 바닥에 비비적거리며’‘그저 그렇고 그런 정도로’정착한‘서울사람들’이‘우리들 키워 준 고향’을 찾아갔지만‘불과 이틀 밤을 보내면서’코피 생각이 나고 남폿불의 매캐한 냄새가 역겨워진다.‘오래 잃었던 자연의 미각을 되찾고 단 공기와 그런 저런 정경에 몸을 다그자’는 것이‘얼마나 얄팍하고 배부른 여담’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이미 초동 시절의 노루 새끼 같은 잽싼 동작이 없고 창백한 월급쟁이의 허우적거림’으로 퇴화했을 뿐 아니라 이 한적한 시골에‘도시의 술집 여자 같은’여자들의 퇴폐적 형태를 만났기 때문이다. 전통적이며 전근대적인 풍속의 양산 속에 지켜져 오던 농촌이 어떤 과정으로 변모하며 도시로부터의 침윤된 새 풍속들이 어떻게 허황한 형태로 받아들여지는가는 <장미 다방(薔薇茶房)>과 <어디로 가시나요>에 극히 사실적인 수법으로 그러나 다분히 풍자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정면에 초라한 대로 이른바 다방이란 것이 처음 생기자 먼저 동네 사람들에게는‘큰 얘깃거리가 되고 인근 마을에까지 소문’이 퍼지지만 사람들은‘선뜻 접근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이상한‘친근감’이 생기고‘면님의 자랑거리’로 발전하면서 단골손님도 생기고 시골 처녀들이 호기심으로 기웃거린다. 드디어 사람들은‘정씨네 집에서 막소주 한잔에 멸치 댓 마리 놓고 하던 배추밭 흥정을 지금은 다방에서 하게 되고’‘그들의 생활 속에 배어 있지 않은 어떤 분위기를 새로이 익히려고’노력하며 마침내 차를 안 마시는 사람들을‘우습게 보는 풍조’가 생긴다. 우세한 문화가 수세의 문화를 어떻게 공략하는가를 보여 주는 탁월한 사회학적 보고서인 이 <장미 다방>은‘가장 도시적이고 어떤 점에서는 자기들의 생활과는 이질적인’악성 풍속이 시골 사람들에게 커피가 ‘인박히듯’ 인박혀 가며 그들을 마비시켜 가는 과정을 극명하게 추적한다. <어디로 가시나요>는 도시 사회의 또 하나의 명예가 이 농촌 사람들을 어떻게 왜곡시키는가를 잘 보여 준다.‘변화라곤 요만큼도 없는 나날’을 보내며 착실히 터전을 잡은 권기달이 우연한 기회에 국민 학교 후원회 부회장이 되자‘우선 낯설고 거부반응 같은 것이 꿈틀거리기도 하는 대신 좀 짜릿한 흥분도 느끼’면서 먼저 걸음걸이가 달라지고 늘 보는 이웃들에 해한 인사의 태도가 달라지며 차츰 외식 외박하며 상대하는 사람들도 달라진다. 산림보호회장의 감투를 쓰고 나아가 면의 번영회장이 되어 이권에까지 간여하던 그는 마침내 부정이 탄로되고 구속된다. 작가는 도시적 풍물에 젖어들어 가는 인간들의 허황한 변모를 날카롭게 관찰하면서 인간들이 중심을 잃어가 마침내 인격적인 파탄에 이를 것을 예고하고 있다. 여하간 도시적인 것은 악이었다.

  최일남의 주제가 보다 강렬하게 응축되어 풍속적인 괴리가 삶의 파탄으로 접근한다는 경고적인 예를 그의 <노새 두 마리>와 <흔들리는 성(城)>에서 찾아보자. 이 두 단편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가족이란 틀의 안과 밖을 통해 도시의 문화와 풍속이 농촌의 그것과 정면으로 맞부닥치는 데서 야기되는,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뿌리뽑힌 한국인의 심상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미 도시에서는 종적을 감춘 노새가 연탄을 배달하는 기이한 풍경과 결말, 그리고 서울서 자수 성가하여 상류 생활을 하게 된 아들에게 얹혀 사는 시골 어머니의 열패(劣敗)에서 한국 사회의 불협화음적인 풍속의 괴리를 보여 준다.

  ……아, 우리 같은 노새는 어차피 이렇게 비행기가 붕붕거리고, 헬리콥터가 앵앵거리고,  자동차가 빵빵거리고, 자전거가 쌩쌩거리는 대처에서는 발붙이기 어려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남편이 택시 운전사인 칠수 어머니가 하던 말‘최소한도 자동차는 굴려야지 지금이 어느 땐데 노새를 부려.’했다는 말이 생각났다.―<노새 두 마리>

  그건 그렇고, 사투리야 어떻든 어머니가 우리집으로 올라오시면서부터 우리 집안의 어떤 생활의 리듬이랄까 하는 것이 다소 깨진 것은 확실합니다……지금까지 유지되어 오던,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 겉으로만의 것이든, 요즘 조금씩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미리 말씀드려 두지만 그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고부간의 그런 트러블이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아요. 눈 딱 감고 단언을 하자면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만남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흔들리는 성(城)>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시대 착오적인 풍속 속에서 우리의 어리둥절한 삶을 끌어가고 있고 그 새대 착오성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경제적 양 분파로 확대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문화적 충돌과 경제 구조의 양극화가 형식 없는 풍속의 괴리, 한계인적(限界人的) 정서와 심리의 갈등을 유도하고 있으며 그것은 가족 단위의 삶을 통해 예민하게 드러난다. <노새 두 마리>는 한 가족이 마땅히 뿌리박고 살아야 할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틈입해 들어왔을 때 파탄되고야마는 한 정황을, <흔들리는 성(城)>은 한 가족 내에서 일상의 정서적 실용적 배경이 다른 사람끼리 모임으로써 뿌리째 흔들리는 가정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정의 좌절과 동요를 한국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 읽어야 할 것이다.

  최일남의 두 단편집 ≪서울 사람들≫과 ≪타령≫, 그리고 그의 연작 에세이집 ≪O氏의 이야기≫가 한결같이 드러내고 있는 주제는 이처럼 흔들리는, 좌절하는 한국 사회의 소시민들이 누리는 삶의 허구이다. 그것은 도시 문화로 농촌 문화를, 혹은 좋든 나쁘든 하나의 체계와 질서 위에 서 있는 견고한 성(城)의 틀이 아니라 그 두 개의 문화가 지닌 나쁜 측면들만이 착종하여 혼잡되고 있는 떠도는 삶의 양상이다. 우리의 풍속적 구조가 이렇게 혼란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할 때 작가는 깊은 풍자적 시점을 작용하게 된다. 그의 음과 양의 탁월한 대조법, 작가의 관점을 짙게 드러내는 반전법(反轉法)은 이 같은 작가적 풍자 정신을 최대한으로 살려 주고 있다. 대조법과 반전수법(反轉手法)이 인물과 사태의 설정을 단순화시키며 그 때문에 그의 풍자가 세태 묘사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를 선명하게 밝힘으로써 단편 문학이 갖는 묘미와 완결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최일남의 문학이 꾸준히 지목되면서 그것이 지닌 의미를 고수해오는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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