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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 몽유의 형식과 의식의 고고학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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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 웃음소리
몽유의 형식과 의식의 고고학 - 최인훈 문학의 재인식
이광호

 

 

1.최인훈론의 반성

그를 <전후 최대의 작가>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러한 비평적 수사는 공허하다. 우리는 왜 최인훈이 <전후 최대의 작가>인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평적 해명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는 아직도 <전후 최대의 작가>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 글 역시 그 안타까움 안에 머물러 있다. 나는 단지 최인훈론에 대한 반성과 최인훈 문학의 현재성에 대한 재인식이라는 입장에서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해보려 한다.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최인훈 문학의 영토는 쉽게 측량하기 어렵다. 그의 문학은 다양한 영역과 층위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의 문학 전체에 대한 비평적 규정은 용이하지 않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의 최인훈에 관한 비평과 연구들은 최인훈 문학의 한 국면을 나름대로 짚어내고 있으면서도 그의 문학 전체에 대한 장악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것은 물론 최인훈 문학의 가늠하기 힘든 폭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최인훈 문학을 보는 관점의 편협성 혹은 편향성에도 관련된다. 여기에는 우선 현대소설을 이해하는 틀로서의 리얼리즘에 대한 경지된 이해, 그리고 편내용주의적 해석체계가 작동하고 있다.

최인훈 문학을 분류하는 기준으로 흔히 제시되는 사실주의 계열 작품과 비사실주의 혹은 실험소설 계열 작품이라는 이분법 역시 최인훈 문학에 대한 이해보다는 오해를 가중시킬 우려를 낳는다. 특히 이러한 분류는 최인훈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의 한 고리가 되고 있게 때문에 면밀한 검토를 요구한다. 그의 소설의 관념성과 난해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 역시 이러한 분류법과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은 분류법은 <소설이 현실세계를 다루는가 아니면 환상세계를 다루는가>라는 단순한 기계적 도식에 근거한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고 사실주의와 비사실주의를 가치평가적으로 구별하는 데서 최인훈 문학에 대한 총제적인 조망은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최인훈 문학에는 오히려 실제와 환상, 구체와 관념이 어떻게 맞물려 인간적 현실을 구성하는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여러 편의 최인훈 문학을 경험한 독자들은 아마도 한 작가가 그토록 다양한 형식과 문체를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는 한 작품에서도 다층적인 양식과 문체를 선보이거나, 상황과 문체 사이의 배반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공간을 다원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비극적 상황의 설정 속에서 작용하는 그의 요설적 문체, 시적 문체, 희극적 문체, 혹은 에세이적 문체는 독특한 울림을 부여한다. 이러한 측면은 작가 최인훈의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가 얼마나 서사양식에 대한 치열한 자의식의 소유자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최인훈의 문학에서는 담론의 형식과 방법론 자체가 세계에 대한 증언과 발언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최인훈은 문학의 형식이 문학의 내용이라는 명제, 내용이 퇴적된 것으로서의 형식이라는 명제, 작가의 직접적인 표현을 빌리면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되고 내용은 결과적으로 그런 형식에 유인되어> 간다는 명제에 대한 우리 현대문학사의 빛나는 사례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인훈 문학의 형식과 양식을 문제삼지 않고 그 안에 담겨 있는 현실경험과 메시지만을 문제삼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령, 최인훈 문학의 중심에서 항상 논의되는 「광장」과 같은 작품 역시 그것이 분단현실에 대한 비판이라는 비평적 이해의 수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광장」은 단순히 분단현실에 대한 최초의 객관적인 비판이라는 정도에서 의미 있는 문학작품은 아니다. 「광장」에는 남북한의 체제가 비슷한 강도로 비판되고 있다는 그 점에 있어서의 객관성을 문제삼는다면, 이러한 객관성은 현시점에 있어 크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층위에서 그러한 의의는 부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광장」에서 작가의 시선의 주된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당대의 물질세계나 풍속과 체제도 아니다. 작가의 시선에는 이명준으로 대표되는 분단시대의 지식인의 내면의식이 문제된다. 이 소설에는 중요한 것은 분단이 고착화되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한 불우한 지식인의 자의식과 심리적 현실을 그려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에서 이명준의 의식은 분단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실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광장」 분단상황에 대한 개념적인 비판이상의 문학적 증언과 전망을 포함한다. 물론 그러한 증언과 전망이 충분한 현재성을 갖고 있다. 분단체제가 극복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은 그 체제가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한 문학적 탐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인훈의 초기작인 「광장」은 문학형식과 문학언어에 대한 탐구와 자각이라는 측면에서 그 이후에 쓰여진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다. 「광장」의 개작 역시 단순히 작품의 메시지를 가다듬는 것으로 이해할 수만은 없다. 우리는 「광장」의 개작도 문학형식에 대한 자의식의 심화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2. 환각과 환청의 경험

최인훈의 소설에서는 인물이 처한 시대적 환경과 외적 경험 그리고 인물의 내적인 경험이 모두 중시된다. 오히려 이러한 두 가지 층위의 경험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최인훈 문학에 나타난 환상적인 요소들을 검토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최인훈 문학에서 환상적인 요소가 개입하지 않는 작품은 거의 없다. 주인공은 환각과 환청을 경험하기도 하며, 소설 전체가 일종의 몽유로 구성된 경우도 있다. 상대적으로 덜 환상적인 「광장」을 다시 검토해 보자.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이 메시지를 이해하는 고리라는 측면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고, 작가의 개작 작업이 이루어진 곳 중의 하나이다.

자기가 무엇에 흘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 넉넉한 뱃길에 여태것 알아보지 못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피하려 하고 총으로 쏘려고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무엇에 씌었던 게 틀림없다. 큰일날 뻔 했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 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되돌아오면서, 바다와 놀고 있다. 무덤일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씨들이,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옛날, 그 어느 벌판에서 겪은 신내림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자, 언젠가 전에, 이렇게 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벌판을 지금처럼 떠올린 일이, 그리고 딸을 부르던 일이, 이렇게 마음이 놓이던 일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활짝 웃고 있다.

-「광장」(1976)

우리는 여기서 이명준의 심정적 자각이 어떤 환각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의 예문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갈매기를 단순히 갈매기로 보지 않고 거기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딸의 영상을 보는 것은 일종의 환각이다. 위에서 갈매기를 총으로 쏘려 했던 자신을 무엇에 씌었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갈매기를 자신의 여자와 딸로 보는 것이야말로 무엇에 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전도가 있다. 갈매기를 갈매기로 보는 것이 착란이며, 갈매기를 그의 여자와 딸로 보는 것이 그 착란을 벗어나는 일이 된다. 이러한 주인공의 이러한 환각은 그의 소설에서 문학적 상징성을 심화하는 계기가 된다.

최인훈 문학에서 이러한 환각과 환청은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를 이룬다. 그의 초기 단편인 「웃음소리」를 보자. 이 작품에서 애인과 사랑을 나누던 곳을 죽을 장소로 선택하여 찾아간 주인공은 남녀 한 쌍이 그곳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것을 듣고 목격한다. 그녀는 다음날도 이러한 장면을 목격하고 그들의 자신과 자신의 애인으로 동일시하는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환각이고 환청이었음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드러난다. 그 연인들은 죽은 지 일주일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각과 환청은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내면적 현실을 드러내준다.

빈터에 정답게 누운 남녀를 보는 순간 그녀는 환각이라고 의심하였다. 자기와 <그>가 거기 누워 있었으므로, 그것은 기쁨의 환각이었고 그 환각과 죽음은 맞먹었다. 바로 다음 순간에 환각은 깨어지고 그녀는 허망하게 떨어졌다. 그때 그녀는 그 떨어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다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분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환하였다. 그녀는 사랑했던 것이다.

-「웃음소리」

그녀는 환각과 꿈을 통해 자기 내부의 한 숨은 장면을 발견한다. 그녀에게 환각과 환청은 자신의 내면적 진실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녀는 꿈을 통해 자기 간에 웅크리고 있던 심리적 진실을 만나는 것이다. 환청으로 들은 죽은 여자의 웃음소리가 바로 그녀 자신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깨닫은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의 하나로 일컫어지는 「총독의 소리」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어떤 사건이 없이 한 가상적인 인물의 담화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에는 현재 한국 내부에 조선총독부의 비밀조직이 남아 있고 이 단체에서 총독의 담화를 방송하는 상황이 설정된다. 소설은 바로 총독의 담화를 기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독특한 양식은 물론 실제의 역사상황과 배치된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총독의 담화를 통해 역설적으로 비판되는 한국의 정치현실이지만, 우리는 이 소설 전체가 하나의 환청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환청은 물론 실제 현실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것은 은폐된 현실의 모순을 일깨우는 진실의 계기를 담고 있다.

3. 패러디와 몽유의 형식

최인훈 문학은 현대문학에서 패러디 기법의 한 문제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패러디는 고전에 대한 단순한 모방과 풍자가 아니다. 여기에는 예술 형식과 기법 그리고 예술의 사회적 존재양식에 대한 미적 자의식이 개입한다. 그래서 보다 적극적인 패러디는 동일화보다는 차별화, 모방보다는 창조의 작업이다. 때문에 성공적인 패러디는 고전보다도 오히려 예각적인 현재성을 가지고 보다 풍요로운 의미공간을 구성할 수 있다. 고전에 대한 최인훈의 패러디는 그의 희곡 작업에서도 나타나듯이 고전이 가지고 있는 초월적 화해의 가능성을 뒤집어서 그것을 탈신화화함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더욱 날카롭게 부각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최인훈이 고전이 가진 원형적인 동일성에 기대기보다는 현재 상황에서의 그것의 좌절과 분열을 더욱 북각시킨다. 이러한 측면은 작가가 오늘의 사회 상황에 얼마나 예민한 촉수를 드리우고 있는가를 예증하는 것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박태원의 작품에 대한 패러디이다. 물론 이 작품은 1930년대가 아닌 최인훈이 처한 1970년대의 소설가 구보의 내적 의식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최인훈은 박태원보다 다양하고 유연한 소설쓰기를 보여준다. 작가가 경험하는 세속세계에 대한 관찰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소설에 대한 관념을 삽입하고 꿈과 환상을 개입시켜 메타적인 성격을 심화시킨다. 이 연작은 소설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의 하루를 기술하고 그 내면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이기 때문에, 소설에 대한 자의식 자체가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자기반영적 형식을 보여준다. 구보씨의 하루에 대한 자잘한 기록에는 그의 내면적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작가는 삶과 문학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끊임없이 노출시킨다. 작가는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 살아가는 실존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존재의미를 묻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한 작가의 일상을 통해 한 시대를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우울한 자의식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 연작에서도 물론 주인공의 의식의 내부와 그가 경험하는 환상은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1) 이층 시멘트 집의 뒷 모습이 보이고 작은 창고 같은 집이 있고, 느릅나무 큰 그루가 몇 서 있었다. 구보가 놀란 것은 그 풍경이 그의 북한 고향의 그가 다니던 국민학교 뒷뜰과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옆으로 여러 번 사람이 지나갔지만 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 많은 세월을 사이에 두고 문득 마술처럼 눈앞에 나타난 풍경에 구보씨는 홀렸던 것이다.

2) <아저씨> 누가 옆에 와 선다. 그는 돌아보았다. 머리끝이 쭈뼜했다. 정말 헐벗은 한 여자가 그에게, 밤처럼 캄캄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쩐 일이었던지, 그 여자의 얼굴에서, 벌써 옛날에 갈라진 한 여자를 보았다고 헛갈린 것이다.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

마술처럼 나타난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은 피난민으로의 자신의 처지를 환기시켜 주고 상황을 어렵게 견디며 소설쓰기를 밀고 나가야 하는 자신의 초상과 동일시된다. 갑자기 나타난 헐벗은 여자 역시 과거에 대한 환각을 보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환각은 상황과 개인의 문제, 그리고 개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상기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최인훈 문학에서 환상적인 기법이 보다 깊게 동원된 것은 「가면고」, 「구운몽」, 「열하일기」,「회색인」,「서유기」등의 작품들이다. 그러한 소설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평가가 소원한 것은 소박한 리얼리즘의 잣대로 볼 때 이 작품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인훈 문학의 관념성과 난해성이라는 오해는 많은 부분 이러한 작품군에 대한 소극적인 이해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군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비평작업은 이들 작품에 나타나는 환상적인 요소의 문제를 초현실주의 기법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최인훈 문학의 환상적인 요소와 내면 심리에 대한 묘사를 단지 초현실주의라는 특정 문예사조와 문학기법에 한정하는 것은 최인훈 문학에 대한 이해를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에게는 최인훈 문학에서 왜 환상적인 요소가 도입되고 있는가의 문제를 그의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련 속에서 해명하려는 작업이 필요하다.

「구운몽」의 경우를 보자.  이 소설은 동명의 몽자류 소설을 패러디했다. 이 소설은 그 환상적인 요소와 인과율을 벗어난 플롯의 전개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의식과 소설구성은 해체된 채 파편화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상황은 주인공을 끊임없이 당황하게 만들고 주인공을 몰아댄다. 상황은 주인공에게 일종의 폭력이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그것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고 닫힌 상황에 봉착한다. 주인공은 이 상황을 타개할 주체적인 노력을 봉쇄당한 채 끊임없이 쫓기고 그 과정에서 이질적인 여러 집단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은 현실의 여러 단면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소설은 혼돈의 상황과 경험의 도착을 동시에 보여준다.

관 속에 누워 있다.  미이라. 관 속은 태(胎)집보다 어둡다. 그리고 춥다. 그는 할 일 없이 뻔히 알면서 눈을 뜨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몸을 비틀어 돌아 눕는다. 벌써 얼마를 소리없이 기다려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몇 해가 되는지 혹은 몇 시간인지 벌써 가리지 못한다. 혹은 몇 분밖에 안 된 것인지도 모른다. 똑 똑, 누군가 관 두껑을 두드리고 있다.

-「구운몽」

주인공의 의식은 소설의 출발부터 이미 몽롱한 상태에 있다. 서술자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불투명한 환상의 공간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이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의 구분은 애초에 지워져 있다. 이 소설 전체는 일종의 몽유의 경험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소설을 콘텍스트를 고려하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소설은 1960년대 초반의 한국의 정치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4·19의 좌절과 5·16으로 인한 권력구도의 변화는 개인의 주체적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회의하게 만드는 상황이다. 역사경험의 진실이라는 문제 역시 혼돈 속에 내던져져 있다. 역사의 혼돈은 개인의 분열을 조건짓는다. 그래서 현실은 악몽과도 같다. 이 때 소설쓰기란 이러한 몽염의 현실에 대한 탐색일 뿐이다. 이 탐색은 그러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그 현실의 극복도 아니다. 이러한 글쓰기는 그 악몽을 살아내는 방식으로서의 글쓰기이다.

4. 글쓰기의 자의식과 의식의 고고학

최인훈의 소설에서 환상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어떤 심리적·정신적 자각에 이르는 계기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황의 맥락과 절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인공들의 환상은 실존적·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다. 김인환의 최인훈론의 적절한 분석을 빌리면, 최인훈 소설은 내외공간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작가의식에서 비롯된다. 외적 모순이 한국인의 주체적 대응 능력을 파괴해 놓은 분단상황 등의 역사적 불공정성이 외공간의 균형을 파괴한 데서 기인한다면, 내적 모순은 허용과 금기가 얼크러진 가운데 환상과 규범을 통어 못하는 인간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에서 최인훈 문학의 환상적 요소는 이러한 외적 모순이 내면화된 형태로서의 내적 모순의 한 국면을 예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환상과 꿈은 현실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순된 현실경험이 중요한 일부이다. 물론 이러한 환상의 경험은 닫힌 세계에서의 좌절된 개인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환상은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의 깊은 체험이다. 그래서 소설 속의 인물들의 몽유는 현실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서늘한 현실성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최인훈 문학의 이러한 경험과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작가의식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형식은 작가의 글쓰기 자체에 대한 질문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문학에서 자의식의 과잉과 나르시즘을 비판적으로 보는 논의들이 있지만, 그것이 그의 문학의 한계를 결정짓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자의식과 나르시즘이란 현대문학의 중요한 특성이며, 많은 경우 현대문학의 실패는 문학적 자의식의 미달과 방법적 탐구의 누락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속적 지위라는 것이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는, 사실과 상상 사이의 그와 같은 구별은 있을 수 없지. 20세기 문학의 상징적 경향은 그것이 결과적으로 폐단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 단단한 것은 없다는 세계관의 표현으로서, 사람이 늘 거기에서 출발하고 거기로 돌아가야 할 발판이 아닐까. 아니 <발판 없음의 인식>이 아닐까.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

이런 맥락에서 그는 근대세계에서의 문학과 예술의 존재방식에 대해 누구보다도 치열한 탐구를 보여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근대세계를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 날아가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이 세상에 단단한 것은 없다는 세계관>이야말로 근대적 경험이 가져다준 것이 아닌가. 모순으로 가득찬 유동적인 삶으로서의 근대적 경험은 최인훈 문학의 한 중심을 이루며, 그의 소설의 환상적인 요소들은 우리의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의 길을 열어준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가늠할 수 없는 사태는 삶의 불확정성의 경험이다. 작가는 이미 주어진 현실을 재현하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글쓰기의 모험을 통해 재구성해 나간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어떤 특정한 명제로 환원될 수 없는 다층적인 의미공간과 문학적 모순을 포함한다. 때문에 그의 문학에서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스스로 정당성의 근거를 마련할 수 없다. 이러한 탈중심화된 형식은 삶의 준거가 상실된 시대의 소설쓰기의 한 중요한 가능성을 타진한다. 「구운몽」에서 작가가 던진 질문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와 같은 일의 테두리를 넓힌다면 개인의 유일성과 동일성이 뿌리에서 다시 살펴져야 한다. A는 A이면서 A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현재>와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의 두 축으로 완고하게 자리매겨진 좌표로부터, 허의 진공 속으로 내놓음을 말한다. 그리고 개인은 시공에 매임 없이, 인류가 겪은 얼마인지도 모를 기억의 두께 속에 가라앉아, 급기야 그 개인성을 잃고 만다.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처럼, 그것은 미궁 속에 빠진 몽유병자 같은 상태일 거다. 그 속에서 끝까지 개체의 통일성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구운몽」

개인의 유일성과 동일성에 대한 회의는 근대세계의 도래 이후 인간에 대한 질문의 한 중요한 일부였지만, 근대세계의 모순이 누적된 지금에도 그 질문은 새삼스러운 절실함을 얻고 있다. 여기에는 확정적인 시공간 속에 현존하는 개인성에 대한 회의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주체와 그 정체성에 대한 질문 역시 포함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이 현존의 신화와 주체의 형이상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포함한다. 문학과 예술의 현대성에 대한 깊은 자각을 통해 그는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심화시키고 근대소설 이후의 가능성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다루는 작업. 목숨의 궤적을 더듬는 작업. 그것이 고고학입니다. 우리들의 작업대 위에 놓이는 것은 시체가 아니면 시체의 조각입니다.(중략) 우리들의 작품을 가리켜 생명이 넘쳤다느니, 창조적이라느니, 허구의 진실이라느니 하고 칭찬할 때는 사실 낯간지러집니다. 고고학자란 목숨이 아니라 죽음을, 창조가 아니라 발굴, 예언이 아니라 독해를 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중략) 역사란, 신이, 시간과 공간에 접하여 일으킨 열상(裂傷)의 무한한 연속입니다. 상처가 아물면 결절(結節)한 자리를 시대 혹은 지층이라고 부릅니다. 이 속에 신의 사생아들이 묻혀 있습니다. 신은 배게 할 뿐. 아이들의 양육을 한번도 맡은 일 없이 늘 내깔렸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이 지층 깊이 묻힌 신의 사생아들의 굳은 돌을 파내는 일입니다. 캐어낸 화석들은 기형아가 대부분입니다. 그것도 토막토막난.

-「구운몽」

우리는  이 고고학에 대한 진술을 당대에 대한 소설적 작업의 비유로 읽을 수 있다. 최인훈 문학을 통해 한국 근대소설은 의식의 고고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단계를 성취한다. 고고학이란 무엇인가? 푸코적인 의미에서 말할 때, 그것은 동일성이 지배하는 공식적인 역사의 뒷면을 발굴하는 작업이다. 역사는 어떤 지배적인 의미화를 제시하지 못하는 행위와 담화를 비이성이라는 죄목으로 배제하는 결정 위에 기초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설명되지 않는 환상과 착란적 언어는 역사의 지평에서 거부될 수 있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역사보다도 더욱 중요한 문학적 증언일 수 있다. 최인훈의 소설 즉 주인공들의 환각, 환청 혹은 몽유의 경험과 착란적인 언어는 바로 시대의 지층에서 발굴해 낸 조각난 화석이다. 그는 탈중심화된 글쓰기를 통해 리얼리즘이라는 틀로 전체화되지 않는 당대의 정신의 유적을 발굴하고 현실의 모순을 탐사한다. 더불어 그는 담화적인 영역이 어떻게 당대의 사회상황과 관련맺고 있는지를 글쓰기의 모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를 통해 우리는 현대 한국사회 속의 인간의 내적 경험을 보다 깊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문학은 아도르노가 말한 <무의식적 역사서술>의 한 중요한 사례가 아닐까. 어쩌면 한국소설은 최인훈이 경험한 몽유의 의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최인훈의 인물들이 체험한 모순과 혼돈의 세계는 분단과 근대화 과정에서의 개인의 운명을 생생하게 양각한다. 여기에 최인훈 문학의 무시무시한 현재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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