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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 개성(個性)과 다양성(多樣性)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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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개성(個性)과 다양성(多樣性)
김치수 

  

 

어느 작가에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흔히 말하는 70년대 소설의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서 최인호의 소설 세계를 한 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70년대>라는 수식어를 통해서 그에게 보내지는 보이지 않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최인호가 한국 소설의 역사에서 차지하게 될 공간 자체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만큼 자기시대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특성을 드러낸 작가이며, 동시에 소설적 재능을 인정받은 작가이다.

  최인호의 소설은 우선 네 가지 계열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술꾼」「모범동화」「처세술개론」등의 단편들로서 주인공이 대부분 어린이인 경우이고, 두 번째는 이 작가 자신을 70년대의 선두주자로 불리게 한「별들의 고향」등의 장편소설들이고, 세 번째는 「타인(他人)의 방(房)」「견습환자(見習患者)」「순례자(巡禮者)」등의 단편소설들로서 오늘의 도시적 삶의 공간 속에서 개인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소설들이고, 네 번째는 「미개인(未開人)」「다시 만날 때까지」등의 단편소설들로서 우리가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현실의 단면을 서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정면으로 규명하고자 한 소설들이다. 이 네 가지 계열 가운데에서 작가 개인의 이름에 부당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두 번째 계열의 작품들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네 가지 계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검토를 하는 것이 작가의 세계에 보다 정직하게 접근하는 길이라 믿는다.

  첫 번째 계열인 「술꾼」「모범동화」「처세술개론」등의 소설은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어린이가, 그리고 그 어린이가 우리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진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성장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순진한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들의 좋지 못한 제도에 피해를 입고 있는 어린이도 아니며, 자신의 정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가치관 사이에 있는 차이 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함으로써 성장하는 어린이도 아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아직 어린 상태에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늙어버린 어린이라고 말해야 좋을 것이다. 밤마다 <아버지>를 찾는다는 구실 아래 고아원을 빠져 나와 술집을 찾아다니며 술을 마시는 「술꾼」의 주인공은 거의 알코올 중독상태에 빠져 있는 어른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고, 학교 앞 노상에서 뺑뺑이판을 벌이고 있는 야바위꾼 어른들을 골탕먹이는 「모범동화」의 주인공은 어른보다 더 많은 주름살을 이마에 지니고서 그 방면에 일생을 바친 사람처럼 야바위의 비밀을 꿰뚫고 있으며, 늙은 할머니의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서 놀라운 연극을 해내는 「처세술개론」의 주인공의 탐욕의 덩어리인 어른들보다 더욱 간교한 재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들 어린 주인공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어린이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을 띠고 잇다. 그러한 점에서 첫 번째 계열의 소설은 알레고리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어른의 세계를 어린이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보다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법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면 지각의 자동화로 인해 부재화되어 버린 일상적 생활을 존재화시키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의식의 잠을 깨워 주는 이러한 기법은, 한편으로는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일상의 허위를 보다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절망의 요소들을 의식화시키고 잇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열의 소설을 읽으면 허무주의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으면서도 그 다음에 오는 정체 모를 아픔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계절의 작품은 필자가 이미 「문학과 문학사회학(文學社會學)」이라는 글과 「여성해방과 소설」이라는 글에서 분석을 하여 그 의미와 한계에 대해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계열의 작품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소설의 베스트셀러의 개념을 대단히 확대시켰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그 아류(亞流)들을 대단히 많이 태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문제로서 제기된 여성의 사랑이 성의 소비라는 보편적 현상으로서 영향을 미친 이 계열의 작품들은, 우리 사회가 이른바 소비사회의 미덕을 처음으로 부르짖던 70년대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서 꼽힐 만하다. 여기에서 <대중사회>와 <대중문학>이 문학의 문제로서 제기되고 여러 방향에서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이 작가의 사회사적 위치와 그의 소설세계의 문학사적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는 데 도달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사회의 현상으로서, 그리고 어느 시기의 특성으로서 나타난 소설 속에서의 성의 소비는 그것 자체만이 목적이 되었느냐, 혹은 삶의 어떤 양상의 상징적인 표현수단이었느냐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어야 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수용 양상도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 그 정체를 파악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러한 방면에서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검토가 진행되지 않고 거기에 대한 성급한 도덕적 비난이 여러 가지 표현으로 성행되어 버림으로써 문제의 초점이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 버렸던 것이다.

  세 번째 계열의 작품으로 들 수 있는「타인의 방」「견습환자」등은 현대인의 도시적 삶에 대한 자각을 우화적인 수법으로 보여 주고 잇다. 그의 데뷔작인「견습환자」에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기능적인 측면만이 강조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서 병원의 입원실을 들고 있다. 주인공이 어느 날 각 입원실의 명찰을 바꿔 놓는다는 우화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60년대 이후 공업화와 근대화로 가고 있던 사회가 기능 제일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것을 풍자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환자 자신이 병의 치료라는 한 가지 목표에 의해 자신의 삶이 완전히 재단되고 있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한편으로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삶이 그러한 기능적 측면에서 움직이는 것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병실의 명찰을 바꿔 끼우는 장난을 하게되는데,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결과는 대단히 심각할 것이다. 여기에서 기능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입원실에서 중요한 것이 입원실의 번호와 환자의 이름이며, 그밖에 환자의 인격체에 관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입원실의 번호와 환자의 이름이란 그 병원이라는 조직 속에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품에 주어진 상황으로서의 입원실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아야 할 근거는 그 다음에 나온 「타인의 방」과 같은 아파트 생활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느 날 자기 스스로 가장 확실하다고 믿어 온 것들로부터 무너지는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아파트의 소유권을 옆집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신호로 해서 자기 스스로를 타인으로 느끼는 상황으로 빠져 버리게 된다. 주인공의 앞 세대가 대가족제도의 삶을 영위한 세대라면 주인공의 세대를 핵가족제도의 삶을 시작한 세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작품에서 제일 먼저 제기하고 있는 것이 주인공의 자기 소외감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소유하고 잇는 집, 자신의 아내, 자기의 생활을 이루고 있는 가재도구들을 갑자기 낯설게 느끼기 시작함으로써 현실 속에서의 고립감에 사로잡힐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낯설어지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대단히 비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된 주인공이 결국 스스로를 집안의 사물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물 전체가 움직이고 교미하고 활동하는 데 반하여 자기 자신이 더욱더 작아지는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른바 <집>이라는 개념을 거주라는 기능의 측면에서만 확대시킨 아파트 생활에서 개인의 왜소화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카프카의 주인공처럼 어느 날 인간적인 모든 능력을 상실해 버린 자기 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주인공을 통해서 도시의 삶을 우화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존재에 대한 질문이 가지고 있는 가장 확실한 관계들이 무너짐으로 인해서 개인의 정신 속에 허무주의가 나타나는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계열의 작품과 세 번째 계열의 작품들이 서로 같은 문맥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계열은 우화법과 과장법이라는 두 가지 소설적 기법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 계열의 작품으로는 「미개인」「다시 만날 때까지」「돌의 초상(肖像)」등이 있는데, 이 계열의 작품들은 우리 사회의 어떤 현상을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앞의 여러 작품들과는 달리 여기에서는 현실 속의 구체적인 사실을 문학 속에 수용함으로써 그 개별적인 사건으로부터 오늘날의 보편적인 삶의 문제를 추적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개인」에서는 미감아의 문제와 도시건설의 문제, 「다시 만날 때까지」에서는 고아들의 해외 입양 문제,「돌의 초상」에서는 대가족제도 붕괴 이후 도시에서는 노인의 문제 등 우리가 현실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사회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을 주제로 삼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를 어떻게 이야기했느냐에 있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최인호가 사용하고 있는 정공법은 작가 자신이 주제에 따라 그 기법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기법은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하는, 내적인 요구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며, 동시에 어떤 기법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도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개인」에서 작가는 파월 부상병 출신의 주인공이 서울 변두리 지역 국민학교 교사로서 체험하는 것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할 정신의 문제를 찾아가고 있다. 갑자기 서울시에 편입되고 새로운 시가지가 조성되고 있는 변두리 마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벼락부자가 된 개인의 사회적 변동이 아니라, 자기가 문명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과학적으로 전염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미감아들을 원시인으로 취급하고 그들과 격리된 삶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폭력>과 <광기>와 신분적 상승으로 할 수 있었던 주장의 관철을 위한 <폭력>을 근대화를 지향하는 사회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것은 파월 부상병 출신의 주인공이 국민학교 교사로서 미감아라는 구체적인 문제와 부딪쳐서 고민하고 싸우고 절망하는 과정 때문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는 「다시 만날 때까지」의 주인공이 해외 입양의 고아를 실제로 데리고 가는 이야기나, 「돌의 초상」의 주인공이 공원에 버려진 노인을 데려왔다가 다시 버리고는 또 찾아가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 작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사회 문제를 도덕적인 단죄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문학이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도덕적으로 단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상을 열어 놓은 상태로 탐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공법으로 다루어진 사회문제가 최인호에게 있어서는 고발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어떤 중요한 실마리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네 계열의 작품들과 관련 아래「깊고 푸른 밤」을 살펴본다면 이 작품은 네 번째 계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에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작가 자신의 이야기냐 아니냐 하는 것이 여기에선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70년대의 두 예술가의 미국에서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삶의 의미를 반성하고 있다는 것은 감안한다면 그것이 개인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70년대라는 한 시대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두 인물 가운데 <준호>는 인기 절정에서 소위 대마초를 피운 죄로 지난 4년간 무대를 빼앗긴 불운한 과거를 가진 가수로서 미국 여행을 떠나온 뒤 미국에 눌러 살고자 결심한 경우이고, <화자>의 시점을 택하고 있는 <그>는 <지난 십여 년 동안 한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혹사한> 인기작가로서 몇 달 동안 미국 여행을 떠나온 것에서 <자유>를 느끼고 있고, 미국에서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했고, 그 여행 기간 동안에는 행복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마리화나를 피우게 된 준호는 갈수록 경제적 빈털터리가 되어갈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황폐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준호의 말대로 그것은 술보다 더 해독이 적은 단순한 풀잎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번도 그것을 피워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그것은 단지 조그만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풀잎 같은 것으로 우울하거나 절실하게 고독할 때, 심리적인 위안을 만족시켜 주는 약의 효능을 지닌 순한 약초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의 공포를 달래주는 유일한 풀잎이었다. 왜 그것을 빼앗았을까. 무엇엔가 조금이라도 마취되어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저 엄청난 고독 속에서 그가 가질 수 있는 심리적 위안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빼앗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떠나온 것을 <분노>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준호>나 마찬가지로 스스로 망명해 온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마음은 준호가 집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주인공과 준호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근원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미국 대륙을 방황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소모시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미국의 풍요가 내게 무엇이란 말인가. 미국의 자유가 내게 무엇이란 말인가. 미국의 병정인형과 아름다운 정원이, 웅장한 저택과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이, 사막과 설원이 내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가슴속에는 터질 듯한 분노 이상의 아무런 감정도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 소설의 중요성은 이들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패배감과 절망감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밝혀 주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절망과 패배의 감정과 싸우고 있는 개인의 처절한 의식을 단순히 70년대라는 과거의 사실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으로 인식시켜 주는 데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의식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그것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끝없는 갈등과 치열한 싸움을 전개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최인호 소설의 새로운 모습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이들 주인공들의 정신의 황폐감과 절망은 70년대 정신의 중요한 양상 가운데 하나였으면서도 우리가 지각하기에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인호의 개성과 그 개성 속에 있는 다양한 재능을 이 작품은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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