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최상규 - 탐색과 자기 완성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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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탐색과 자기 완성
金炳旭

  

 

1956년 《문학예술》에 <포인트>를 발표하면서 최상규는 그의 멀고먼 창작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끝없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점이 다른 작가하고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한 작가가 자기의 작품 세계를 일찍 구축하고 나서 그 길로 일로 매진하는 것도 바람직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외고집스러워 보이고, 상상력의 문을 일찍 닫아 버리는 경우를 생각할 때 최상규처럼 자유 분방한 실험을 하는 것도 우리 소설의 다양성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란 원래 인간의 다양성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 온 나무에 비유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한 작가가 자기의 확고한 세계를 확정 짓지 못하고 하나의 과정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두 가지 면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는 변신하는 그 과정이 그의 작품 세계라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방황하는 미아(迷兒)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실로 최상규의 작품을 대할 때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가 아직도 신인처럼 부단한 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그의 자세를 불안하게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의 과정을 하나의 탐색이며 자기 완성의 실천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의 문학 전집에 실린 그의 작품을 놓고 볼 때도 작품 전체의 일관성이 없는 것같이 보인다. 가령 <건곤(乾坤)은 <동춘> <대합실> <밤의 끝에서>등과 비교할 때 일견하여 동일한 작가의 것으로 보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전자는 현실에 바탕을 둔 그런 작품 세계이지만 후자는 환상에 바탕을 둔 그런 작품들이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읽고 나면 뭐라 확연하게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최상규의 체취가 풍기고 있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체취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문체와 톤이다. 그는 우리 나라 어떤 작가보다도 단문(短文)과 명사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그의 작품을 읽고 가면서 문장과 문장 사이에 과감히 생략한 그의 생각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빚어내는 작품의 톤은 전체적으로 환상적이며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실 그의 작품 세계--즉 그의 상황 선정 같은 것은 그렇게 밝은 것만도 아닌데 읽고 나면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은 위와 같은 그의 문체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장편 소설에서 그와 같은 문체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자아내 준다. 그러나 그는 그의 가능성을 <형성기>에서 훌륭하게 제시해 주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전집에서 작품을 내놓게 될 때 그 근본적 취지가 단행본으로 내놓는 창작집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작가 자신이 일차적으로 많은 작품 중에서 골라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학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이 최상의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작품의 질보다는 작가의 취향에 따라 그의 작품 세계가 결정될 그런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여러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역시 우리의 흥미와 관심을 끌기엔 족한 많은 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법이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1965년에서부터 1971년 사이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자기의 창작 생활 중에서 제일 힘들인 작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꿩 한 마리>는 쥐약을 먹고 죽은 꿩 한 마리를 놓고 인간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오는가 하는 심리 상태에 작품의 초점이 놓여져 있다. 이 작품은 작중 인물의 설정이 적절했고 그들의 심리 묘사가 간략하게 처리되었지만 인간 삶의 진실한 한 면을 적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작품의 배경이 농촌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엔 농촌의 삶의 비참한 현실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사실 이런 문제는 작가의 관심권 밖이다. 그리고 오직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가에 작가의 관심이 놓여 있다. 이런 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에 접하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본 것과 같은 자기 확인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작가는 배경을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 대한 하나의 확인을 한 셈이다. 어떻게 보면 약을 놓아 꿩 한 마리를 잡았다는 사건 그 자체는 단편 소설의 소재로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먹느냐 안 먹느냐를 놓고 벌이는 인간들의 심리 변화는 충분한 단편 소설의 소재가 된다. 그리고 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페이소스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삶의 한 양상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작품의 내용이 사뭇 달라지는 예를 여기서 다시 느끼게 된다. 최상규의 작품 배경은 농촌보다는 월등히 도시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그렇지만 그는<꿩 한 마리>에서 어떤 곳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그 구조상 하나의 완벽한 작품을 창작하는 능력의 다양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건곤>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서두 부분의 자연 묘사는 그의 문체의 특징에 비추어 본다면 변종이라 할 정도로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 역시 소재의 성격에 따라 문장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우리의 농촌 현실을 사실적 수법으로 잘 나타낸 좋은 작품이다. 팔 남매의 장남인 기호는 대위로 제대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는다. 그런데 가물이 극심하여 물을 찾는 작업을 계속한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죽는 날 그렇게 바랐던 비가 쏟아진다. 물론 이러한 줄거리는 실은 무의미하다. 다만 우리가 이 작품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자연과 인간의 갈등, 또 가족 내의 여러 형제들과의 갈등, 그리고 진지한 인간성의 표현인 것이다. 간간이 복선으로 깔아 놓은 천등산의 용마루에 암장하면 거이 작품엔 그 점이 잘 드러나 있고 마지막 장면은 극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타고니스트인 기수의 성격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은 '병주노인'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미스테리를 안고 있으며 동시에 비가 오게 하는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죽음은 양면성을 가진다. 즉, 살해와 희생의 복합이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온 억수 같은 비는 천벌과 희생에 대한 재생으로 해석된다. 우리가 한마디를 속단할 수 없지만 이러한 죽음의 처리를 통하여 작가는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이 비록 기호 내외의 인간적 진실성에 상당한 역점을 두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한갖 인간적 속사(俗事)에 지나지 않고 거대한 자연의 질서 속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작품의 결미 부분의 불행은 결국 인간이 자연 앞에 너무나 작은 존재로 남는다는 사실을 절감케 해준다. 그러나 인간은 부단히 자연을 거역하려 하지만 자연은 의연한 자세로 인간의 그런 도발을 슬그머니 밀어 내곤 한다. 이 작품은 농촌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동시에 보편적 삶의 전형을 제시해 주고 있다. 물을 찾는 인간의 진실성과 거기에 보답하려 하는 자연의 조화--어떤 면에서 인간은 너무 근시안적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순간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정성을 바치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 작품은 갈등과 그것의 해소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는 점과 더불어 최상규 문학의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도록 운명 지웠으면서도 무한한 삶을 희구하고, 땅을 밟고 걸으면서도 하늘을 비상하는 꿈을 꾸는 아이러니 투성이다. 문학은 이러한 근본적인 인간 문제를 예술로 승화시켜 인간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환상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참다운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그렇기 때문에 허구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보다 더욱 진지한 인간의 시험장이 되고 그걸 통하여 무한한 인간의 가능성은 점쳐질 수 있다. 물론 문학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는 의미없는 장난이라고까지 매도될 수 있을지 모르나 원래 인간이란 꿈을 간직하고 그 꿈을 키워 나가며 사는 묘한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 세계에 침잠되어 있는 그 꿈은 삶의 영원한 원천이다.

  <동춘>은 일상의 윤리를 거부하는 인간의 심리를 작품화하고 있다. 남의 아내를 사랑하는 한 사내와 그의 불륜을 응징하려는 그 남편과의 쫓고 쫓기는 상황 설정이 우리의 상식 밖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극히 일상적인 따분한 삶을 누리고 있으면서 거기에서 뛰쳐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회의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 이 작품은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려는 의도가 두드러진다. 일상적 삶으로의 복귀를 강요하는 세력과 거기에 항거하여 거부하는 의연한 태도를 보여 주려는 주인공과의 갈등이 처절하지만 설희라는 여자를 찾아나서는 집념이 진지하게 나타나 있다. 우리는 가끔 상식이라는 것이 어떤 국면에 다다를 때엔 걸리적거림을 느끼게 된다. 상식은 일상적 생활에서나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의 작중 세계를 놓고도 그런 강요를 하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엄격하게 얘기하면 문학의 세계와 일상적 삶의 세계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 다른 차원의 세계를 동일한 평면 위에 놓고 비교하려는 노력은 하나의 도로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정말 상식 이하의 생각들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정말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동춘>은 한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등가적 갈등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구체적인 작중의 배경을 통해 실재성을 부여하려 했지만 그것은 결국 우리 심리 내부에 잠재해 있는 근원적 갈등의 한 변주곡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모래성을 쌓다가 허물고, 다시 쌓아 올렸다가 허물곤 하는 그런 유희를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문득 떠오르는 하나의 영상에 구체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세계로 확대해 나가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이 작품도 따분한 일상성에서 탈출하고 싶은 잠재 의식의 충동을 창조적 상상력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환상은 생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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