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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벽계수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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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벽계수야

 

청산 속에 흐르는 푸른 시냇물아, 빨리 흘러간다고 자랑 마라.

한 번 넓은 바다에 다다르면 다시 청산으로 돌아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이 산에 가득 차 있는, 이 좋은 밤에 나와 같이 쉬어감이 어떠냐?

요점 정리

지은이 : 황진이(黃眞伊)

갈래 : 평시조

성격 : 감상적, 낭만적

제재 : 벽계수, 달

주제 : 인생의 덧없음과 향락의 권유 / 인생무상과 향락의 권유

표현 : 의인법, 중의법, 설의법, 대조법, 자연물을 통해 화자의 정서를 드러냄.

출전 : 청구영언(靑丘永言)

내용 연구

 

청산리[靑山裏(청산리) : 푸른 산 속] 벽계수야[벽계수(碧溪水)ㅣ야 : 푸른 시냇물아. 당시 종실(宗室)이던 벽계수(碧溪水)란 사람을 중의적(重意的)으로 표현한 말] 수이[쉬이. 쉽게, 순간성, 일회성, 흐르는 물의 속도, 인생의 짧고 덧없음.] 감을 자랑 마라 - '청산'은 영원한 자연을, '벽계수'는 덧없는 인생을, '수이 감'은 순간적인 인생의 삶을 비유적(중의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도창해하면[(一到蒼海)하면 : 한 번 넓은 바다에 다다르면, 한번 늙어 죽음에 이른다면 / 중의법 ] 다시 오기 어려우니 - 한번 넓은 바다에 이르면 / 한 번 늙거나 죽으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올 수 없으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 : 적막한 산에 가득 참]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명월'은 밝은 달 혹은 지은이 자신(황진이)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현세적 애정관이 들어 있다. '만공산에 쉬어간들 어떠리'는 즐기기에 좋은 순간으로 젊은 시절을 자기와 함께 보내자는 권유

 

창작 배경 :

 

당시 종친의 한 사람인 벽계수(李渾源)라는 사람이 하도 근엄하여 여자를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높았다고 합니다. 왕족인 벽계수는 '자기는 다른 사람들처럼 황진이를 보더라도 유혹받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마침 그 때 벽계수가 개성에 와서 달밤에 나귀를 타고 만월대를 산책할 때에, 소복 차림을 한 황진이가 이를 시험해 보려고 그에게 다가가 이 노래를 건넸더니, 이런 황당한 일이 발생하다니. 그토록 큰소리치던 벽계수는 황진이의 시재(詩才)와 미모에 끌려 자신도 모르게 나귀 등에서 내려와서는 하룻밤을 당대 미모의 기생이자 여류시인 황진이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시흥을 즐겼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해와 감상

 

황진이가 지향하는 문학적 가치관의 일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초중장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전제한 뒤, 종장에서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자고 호소하고 있는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창되는 이 작품은 황진이가 왕족인 벽계수를 유혹하고자 불렀다고 한다. 한 번 바다로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논리로 벽계수를 유혹하면서 종장에서 밝은 달과 자신으로 시상(詩想)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기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세월은 빠르고 인생은 덧없는 것이니,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자는 시조로 교훈적이고 유교적인 인습에 젖어 있던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작품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중의법으로 쓰인 '벽계수'는 흐르는 물과 왕족인 벽계수(碧溪水)를, '명월'은 달과 황진이 자신을 동시에 의미한다.

심화 자료

여류 시조의 문학사적 의의

 

여류 시조는 그 작자가 대부분 기녀들이었다. 비록 천민에 속하는 계급이었지만, 그들의 교양은 선비들에 견주어 어느 면에서도 손색이 없었다. 이들의 시조는 여성만이 지닌 섬세한 감정으로 진실하면서도 절실하게 사랑을 노래한 까닭에 더욱 감동적이다. 특히 재도지기(載道之器)의 역할을 했던 사대부들의 시조와는 달리 여성 특유의 우아한 정서를 전달하고 있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들 작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시조에 얽힌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어 그들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기생(妓生)

 

전통사회에서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춤 및 풍류로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여자. 일종의 사치노예(奢侈奴隷)라고 할 수 있으며, ‘기녀(妓女)’,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 또는 ‘화류계 여자(花柳界女子)’라고도 하였다.

〔유 래〕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기생이 양수척(揚水尺)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양수척은 곧 유기장(柳器匠)으로서, 고려가 후백제를 칠 때 가장 다스리기 힘들었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원래 소속도 없고 부역에 종사하지도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버드나무로 키·소쿠리 등을 만들어 팔고 다녔다.

후에 이들이 남녀노비로서 읍적(邑籍)에 오르게 될 때,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익히게 하여 기생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기(妓)와 비(婢)는 원래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 중 비가 기보다 먼저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비나 기는 한 사회의 계급 분화과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기생의 발생을 무녀(巫女)의 타락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즉, 고대 제정일치사회에서 사제(司祭)로서 군림하던 무녀가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생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원래부터 세습되어 내려온 기생 이외에도, 비적(婢籍)으로 떨어져내려와 기생이 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반역을 꾀한 역신(逆臣)의 부녀자들이다.

고려시대에 근친상간의 금기를 범한 상서예부시랑 이수(李需)의 조카며느리를 유녀(遊女)의 적에 올린 경우와, 조선 초기 사육신(死六臣)의 처자들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조선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친정어머니를 제주감영의 노비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신 분〕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생이 양민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속신(贖身)이라 하여, 양민부자나 양반의 소실이 되는 경우 재물로 그 대가를 치러줌으로써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한편, 기생이 병들어 제구실을 못하거나 늙어 퇴직할 때 그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나오는데, 이를 두고 대비정속(代婢定屬)이라 했다.

고전소설인 《추풍감별곡 秋風感別曲》에는 양반의 딸이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기녀가 되는 얘기도 있다. 이런 기생은 조선사회에서 양민도 못되는 이른바 팔천(八賤)의 하나였다.

다만 그들에게 위안이 있다면, 첫째 양반의 부녀자들과 같이 비단옷에 노리개를 찰 수 있었던 점이고, 둘째 직업적 특성에 따라 사대부들과의 자유연애가 가능했다는 점이며, 셋째 고관대작의 첩으로 들어가면 친정을 살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이별과 배신을 되풀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명 기〕

 

불후의 시조시인으로 꼽히는 송도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시조 뿐 아니라 한시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서경덕(徐敬德)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부안 명기 이매창(李梅窓)은 당시 문인과 명신들인 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중종 때는 선비들이 그녀의 시비를 세워주었다. 그 밖에 송이(松伊)·소춘풍(笑春風) 등 시조시인으로 이름을 남긴 시기(詩妓)들이 많다.

기녀들이 국문학에 끼친 영향 중 가장 큰 것은 고려가요의 전승이라 하겠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짙은 정한(情恨)의 고려가요는 대부분 그들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한편 진주 기생 논개(論介)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의기(義妓)로 꼽힌다.

〔변 화〕

 

조선 말기에 이르면 기생이 일패(一牌)·이패·삼패로 나뉜다. 일패기생은 관기(官妓)를 총칭하는 것으로, 예의범절에 밝고 대개 남편이 있는 유부기(有夫妓)로서 몸을 내맡기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우리 전통가무의 보존자이며 전승자로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다.

이패기생은 은근짜〔隱君子〕라고 불리며 밀매음녀(密賣淫女)에 가깝다. 삼패기생은 이른바 창녀(娼女)로서 몸을 파는 매춘부라고 할 수 있다.

민족항일기에 들어와서는 한말의 기생학교·기생조합이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 권번은 서울·평양·대구·부산 등 대도시에 있었고, 입학생들에게 교양·예기·일본어 학습을 시켜 요리집에 내보냈다. 일부 기생들은 권번의 부당한 화대(花代) 착취에 대항하여 동맹파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편, 어떤 친일파 인사가 거금을 주고 당시 이름난 요정인 서울 명월관(明月館)의 진주 기생 산홍(山紅)을 소실로 삼으려 하자, “기생에게 줄 돈이 있으면 나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며 단호히 거절하여 의기의 맥을 이었다. 그 밖에도 민족항일기에는 애국충정과 관련된 기생들의 일화가 많다.

광복 이후 권번이 사라지면서 기생 또한 없어지는 듯했으나, 요즈음에도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요정에서의 ‘기생파티’가 주요 관광상품으로 등장하여 사회문제로 대두된 적도 있다.

흔히 기생과 같은 여성들을 두고 필요악적 존재라고 하거나, 하나의 직업여성으로 다루려고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운동가들은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여성 자신의 분발과 남성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星湖僿說, 朝鮮解語花史(李能和, 漢城圖書株式會社, 1927), 妓女史序說(金東旭, 아세아여성연구 5, 淑明女子大學校, 196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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