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철학 에세이 - 모든 것은 변화한다

by 송화은율
반응형

 

모든 것은 변화한다  

                                               1.

  우리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화분에 심어진 꽃나무에 꽃이 피어 있는 걸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봉오리로 있던 것이 피어서 꽃이 된 것입니다. 봉오리가 막 터져서 꽃으로 피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립니다. 봉오리가 터져서 꽃으로 되는 동안 그 봉오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움직임을  눈으로 보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천천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면 봉오리는 터져서 꽃이 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몇 시간 동안 봉오리는 조금씩 움직이면서 꽃으로 변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확실히 알고 싶다면 카메라로 봉오리를 고속 촬영해 보면 됩니다. 그러면 텔레비젼이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봉오리가 터져 꽃잎이 활짝활짝 펴지는 것을 수초 내에 볼 수 있습니다. 이 화면을 보면 눈으로 직접 보아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꽃잎이 사실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시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시계를 보면 초침은 빨리 돌기 때문에 시간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침은 분명히 가기는 가는데 그 움직이는 것을 직접 눈으로 느끼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만약 이것도 고속 촬영을 한다면 그 움직이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물이 사실은 움직여 변화하고 있는 데도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보건 못 보건, 알건 모르건 간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우주는 먼 옛날 있던 그대로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어떤 별은 탄생하고 어떤 별은 없어지는 등 끊임없는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별은 있는 그대로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해서 성장하고 그리고 사멸해 갑니다.


그러므로 우주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지구에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대륙의 6대륙이 있고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등의 바다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륙이나 바다는 본래부터 이렇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먼 옛날에는 육지와 바다의 모습이 지금과 달라 에리아, 앙가라, 곤드와나 대륙이라는 3대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고 세계 지도를 자세히 보면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서쪽 해안과 남아메리카 동쪽 해안이 거의 서로 맞물리는 모양으로 되어 있고, 또한 북아메리카 대륙의 동쪽과 유럽도 거의 서로 맞물리는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거에는 이것들이 붙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이처럼 지구는 변해 왔으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같은 나라는 지금도 땅이 바다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고 있고,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서해안이 조금씩 가라앉는 반면 동해안은 조금씩 융기(올라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지구도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지금도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생물의 경우에도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이 먼 옛날부터 그대로 존재해 왔던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물과는 다른 과거의 생물이 환경에 때라 변화함으로써 오늘날의 생물로 된 것입니다.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생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차 진화하여 공룡과 같은 커다란 생물로 되었습니다. 공룡과 같은 파충류 중에서 어떤 것은 시조새라는 것으로 변화하였는데 이것이 새(조류)의 조상입니다. 시조새는 파충류에서 변화한 것이기 때문에 3개의 발가락과 날카로운 발톱, 긴 꼬리, 얄팍한 가슴뼈 등 파충류와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변화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은 새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은 모두 변화(진화)의 산물이며 이런 변화는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본래 육식 동물이던 고양이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잡식성으로 변해 밥과 같은 식물성 음식도 먹게 된 것이 그 일례입니다.

                                                           2.  

  그럼 인간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인간은 먼 옛날부터 현재의 모습과 같은 인간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라고 합니다. 고도로 발달한 일종의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라는 것이죠. 이 원숭이는 몸과 얼굴이 털로 덮여 있었고 나무 위에서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이 원숭이가 인간으로 변화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직립 보행, 즉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걷게 된 일입니다. 두 발로 걷게 되었다는 것은 앞발, 즉 두 손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손은 인간이 자연에 대항하는 과정, 즉 노동 속에서 생긴 것입니다. 또 함께 모여 노동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의사 소통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즉 언어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의 발달과 함께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점차 뇌도 발달하게 되고 감각 기관도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인간은 이런 변화의 산물입니다. 먼 옛날부터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원숭이가 점차 진화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 옛날에는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원시 공산제 사회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변화하여 노예 소유주와 노예라는 두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노예제 사회가 되었고, 또 이것은 봉건 영주와 농노라는 두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제 사회로 변화했습니다. 봉건제 사회는 다시 자본주의 사회로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에 대해서도 앞의 경우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즉 현재의 사회는 과거의 변화의 산물이며 현재의 사회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우주, 지구, 생물, 사회뿐만 아니라 잠깐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더라도 모든 사물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밤에 우리가 자고 아침에 일하러 나가는 집도 밤새 어딘가 한 부분은 조금이나마 변화하는 것이고,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타는 버스도 어제보다는 조금 낡은 것입니다. 또한 회사에 출근해서 만나는 동료도 어제의 그가 아니라 조금이나마 변화해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아주 작은 변화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무시하고 지내지만, 아주 조금씩이나마 변화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앞에서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 것처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현재는 과거와 똑같고 미래도 현재와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새로운 사물이 발생거나 본래 있던 사물이 변화하여 다른 것으로 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까지 본 것처럼 "모든 사물은 변화·동하고 있다"라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물에는 정지 상태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있습니다. 달걀은 부화해서 병아리로 변화하는데 달걀이 병아리로 변화하기 전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달걀입니다. 사물은 끊임없이 운동·변화하지만 동시에 일정한 단계에서는 근본적 성격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즉 질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지요.


  사물이 자체 운동의 일정한 단계에서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며 질적 안정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사물을 인식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사물을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물이 정지 상태를 갖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한다면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구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물의 이러한 정지 상태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물 운동의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절대적인 정지 상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달걀의 경우에도 그것이 병아리로 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달걀 내부에는 여러 가지 변화와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아직 달걀이하는 질적 상태를 변화시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땅 위에 서서 가만히 있다고 해봅시다. 그는 정지해 있는 것일까요? 설령 그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다 하더라도 그가 딛고 서 있는 지구는 자체 회전(자전)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또 지구가 속한 태양계는 자신이 속한 은하계 중심 주의를 초당 230km의 속도로 회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물은 자체 운동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 질적 안정성을 가지면서 정지 상태를 유지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일 뿐 절대적으로는 끊임없이 운동·변화 속에 있습니다.


  사실 운동이나 변화는 사물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일단 사물이 있고 거기에 운동이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고 변화인 것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완전히 만들어진, 변화가 없이 정지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은 운동이고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물이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왔고 현재도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때라서 우리는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참고/변증법과 형이상학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모든 사물은 관련되어 있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 선 철학적 견해를 '변증법(Dialetics) '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사물의 상호 관련성을 부인하여 사물을 고립적으로 보고, 사물의 운동· 변화를 부인하여 고정적·정지적으로 보는 철학적 견해가 있습니다. 바로 '형이상학(Metaphysics)'입니다.

  변증법과 형이상학을 비교해 볼 때 형이상학의 한계나 오류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철학사를 돌이켜 보면,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당시 인간의 인식이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주위 사물과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 장기간에 걸친 변화(진화)과정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을 갖지 못했던 과거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생물을 관찰·연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위의 생물을 각각 분리시키고 정지된 모습을 개별적으로 관찰·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즉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식물,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은 동물 하는 식으로 1차 분류하고, 동물은 다시 어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포유류로, 포유류는 다시 개, 소, 말, 토끼, 인간 등으로 나누어 각각의 구조와 특성을 연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어떤 운동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가 능숙한 몸동작을 익히기 위해 먼저 운동에 필요한 동작을 몇 개로 세분하고, 그것을 정지상태에서 반복 훈련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인식이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인간이 외계의 사물을 인식·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변화하고 운동하는 과정에 있는 것을 고정시켜서, 그리고 상호 연관 속에 뒤엉켜 있는 것을 분리시켜서 보아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적인 사고 방식·연구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형이상학적인 사고 방식·연구 방법은 인간의 인식이 낮은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또한 -- 그 한계와 오류가 분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 인간 인식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인식과 지식이 사물의 연관성과 변화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기까지 형이상학은 철학상의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를 잡았던 것입니다.

  물론 옛날 사람이라고 해서 세계의 연관, 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약 B.C 530∼470)같은 사람은 만물 유전(萬物流轉)의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만물은 변화하는데, 그 변화는 불로부터 비롯되어 물과 흙으로, 다시 흙에서 물로, 물에서 불로 변화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고대 동양에서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 나와, 세계는 음과 양이라는 대립물의 투쟁·갈등·조화에 의해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라는 다섯 가지 형태의 변화를 겪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소박하고 유치한 변증법으로는형이상학을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이 유치하고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세계의 변화와 연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가 매우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변증법이 그 체계를 확립하고 형이상학에 대해 우위를 확보한 것은 헤겔(1770∼1831), 마르크스(1818∼1883)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철학에세이(동녁 刊) 중에서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