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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 철학과 일상생활과의 관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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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과 일상생활의 관계

 

 

우리의 일상생활의 체험 속에는 그 외에 많은 철학적 진리가 단편적이나마 번뜩이면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뿐입니다. 또한 철학적 사고를 함으로써 일상 생활의 의미나 인식을 좀더 깊이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철학은 우리의 일상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어려운 것, 골치 아픈 것, 나와는 관계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대해서 멀리 생각합니다. 사춘기 때, 즉 인생에 대해서 고민을 할 때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인생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도 하고, 친구와 밤을 새워 토론을 하기도하고, 이에 관한 책을 사서 탐독을 하기도 하지만 점차 생활을 해나가면서 생활에 빠져버리고 난 뒤에는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그쳐버립니다. 그리고는 인생의 의미라든지 철학이라든지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이 생활해 나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고민을 할 때에는 철학과 가까이 있는 것이고, 그 후 생활에 빠져 버렸을 때는 철학과 멀리 있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이라고 하면 심각 하게 고민하는 것, 철학자 하면 일은 하지 않고 땅도 보지 않고 하늘만 쳐다 보며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철학 중에는 머리로만 생각 하고 우리의 실제 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것도 있고, 또 철학자 중에는 인간의 구체적인 생활과는 관계없이 하늘만 바라보면서 허공에서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허우적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우리의 생활은 철학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나갑니다. 우리들 주변의 일상생활로부터 철학을 떼어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해 봅시다.

사람들은 흔히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부분만을 보아서는 안되며 전체적인 면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그리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교훈, 즉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면을 파악하라는 말은 체험을 통해 나온 것이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매우 유용한 나침반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커다란 눈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사물을 보는 경우 부분만을 볼 때에는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예를 통해 알아 봅시다.

 

물에 열을 가하여 끓이면 물이 없어집니다. 푸른 하늘에는 구름이 흘러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현상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는 또 공중에서 냉각되어 조그마 한 물방울이 되며 이것이 모인 것이 바로 구름입니다. 그리하여 구름은 다시 눈이나 비로 되어 지상으로 떨어져서 다시 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커다란 눈을 가지고 이러한 현상 사이의 연관성을 보는 경우 우리는 쉽게 사물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앞의 두 현상, 즉 물과 구름의 연관성을 생각하지 않고 물과 구름을 분리하여 그 일부분만을 놓고 생각하는 경우 우리는 올바른 인식을 갖기 어렵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풀기 어려운 문제에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닭이 먼저인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알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아마 한 번쯤은 이 문제를 풀려고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닭이나 알은 모두 영원한 옛날부터, 즉 세상이 있으면서부터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닭이나 알은 모두 생물진화의 어떤 단계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생물이라는 커다란 관점에서 보면 답은 간단히 나옵니다. 먼저 알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생겨 알을 낳는 여러가지 동물이 나타나고 그 뒤에 닭이 생긴 것입니다. 알을 생각할 때, 닭의 알이라는 식으로 스스로 좁게 한정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답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파리도 알에서 생겨나고 물고기도 알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커다란 눈으로 파악한다면 문제가 쉽게 해결됩니 다. 알이 먼저라는 것이 올바른 답입니다.

 

이처럼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라는 말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부분만을 보아서는 안되고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가 커다란 눈으로 사물을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사물들 사이에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연관이 없다면 커다란 눈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라는 말은 그 속에 사물은 연관되어 있다. 즉 물은 구름과 연관이 있고 알은 닭뿐만이 아니라 파리, 물고기와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물의 연관성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두 가지 예를 보았습니다만 우리의 일상생활의 체험 속에는 그 외에 많은 철학적 진리가 단편적이나마 번뜩이면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뿐입니다. 또한 철학적 사고를 함으로써 일상생활의 의미나 인식을 좀더 깊이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철학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하기를 철학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갖는 생각이 곧 철학적 생각일까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생각을 감상(感想)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앞의 물음은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 감상은 곧 철학적 생각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감상이 갖는 특징과 철학적 생각이 갖는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일상생활의 감상은 혼잡하고 철학적 생각은 체계적입니다.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생활 범위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세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이 지구의 모든 사람과 모든 곳을 항상 접할 수는 없는 것이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지구 밖의 우주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범위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일정한 범위 내의 사람들과 접촉하고 일정한 범위 내의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생각, 즉 감상은 우리의 한정된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한 어린이와 시골의 두메 산골에 살고 있는 한 어린이가 있다고 합시다. 지금은 그런 곳이 별로 없겠지만 하여튼 여기서 말하는 두메 산골에는 산이 많아 위로는 빼꼼히 하늘만 보일 뿐 외부와의 교통 사정이 나빠 기차도 들어오지 않고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이런 경우 서울의 어린이에게 4킬로미터를 가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어보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 걸어서 가면 약 1시간 걸리 고, 버스를 타면 약 10분 걸리고, 택시를 타면 이보다 빠를 것이다. 똑같은 질문을 두메 산골의 어린이에게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약 1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차가 없어서 이 어린이 의 경우 차를 탄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기 어렵고 오직 걷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누구의 대답이 옳고 누구의 대답이 그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활환경이 다른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즉 자기의 생활환경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은 자기의 생활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환경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든 예는 서로의 지역이 다르기 때문에, 즉 지역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동일한 지역에 산다 하더라도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 각자의 사회적 환경이 다름에 따라 동일한 사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서울에 사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서울의 중심가에 있는 고층 빌딩에서 일을 하면서 많은 월급을 받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을 길거리에서 리어카에 과일을 놓고 파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이 두 사람은 겨울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가질까요? 고층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은 사무실에 난방장치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 겨울이 추울 것이라는 기상예보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이번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휴가 때 아이들하고 스키장에나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사람은 이번 겨울이 춥지 말았으면, 눈이 오지 말았으면 하고 바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날씨가 추워지면 당장 장사하기도 힘들고, 집안에 연탄 걱정도 커지고, 또 눈이 오면 리어카를 끌고 다니기가 힘들게 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각자의 사회적 환경, 즉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어떠한 생활관계 속에서 생활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물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생각, 즉 감상은 각자의 생활 범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감상은 일관되지 않고 혼잡한 것입니다.하지만 철학은 체계적입니다. 모든 사물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원리를 찾아 내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자기의 생활범위에서 오는 제약을 뛰어넘어 세상의 모든 사물에 타당한 법칙, 원리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위에서 철학과 감상의 차이점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 철학은 체계적이고 보편적이며 감상은 혼잡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철학적 생각은 혼잡한 감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은 감상에 의존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감상이 없으면 철학적 생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의 혼잡한 감상이 모이고 거기서 일관된, 하나의 체계적인 생각을 끌어낸 것이 철학적 생각입니다.

 

앞에서 사물의 연관성이 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생각이라는 것을 말했 습니다.  `연관성'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 장에서 얘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어떻게 해서 이러한 생각이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왜 이러한 생각이 만들어졌을까요? 그것은 많은 사람이 그러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주위의 사물이 연관되어 있는 것을 경험해 왔고, 또한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러한 사물의 연관성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에 의해서 사물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만약 각각의 사람이 단편적이나마 주위의 사물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것은 아직 감상입니다.)을 하지 않았다면 `사물은 연관되어 있다'는 일관된 생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철학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생각, 즉 감상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철학이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철학과 일상생활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이제까지 얘기된 것은 철학과 일상생활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 철학적 생각은 체계적, 보편적이며 일상생활의 감상은 혼잡하다는 것, 그러나 철학은 일상생활의 감상에 의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얘기해 보기로 합시다.

광물학은 광물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생물학은 생물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법학은 법에 대해서 연구하고, 경제학은 경제에 대해서 연구하고, 역사학은 역사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학문의 이름을 들으면 그 학문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대략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무엇일까요? 철학이라는 말만 들어서 는 철학이 무엇을 다루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과연 철학이란 무엇을 다루는 학문일까요?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여러 명이나 배출한 고대 그리이스의 사람들은 철학을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고 불렀습니다. 이 필로소피아라는 말은 `필로스(philos) `소피아'(sophia)라는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필로스'란 사랑이라는 뜻이고 `소피아'란 지혜라는 뜻입니다. , `필로소피아'란 지혜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이 지혜를 사랑한다라고 말했을 때 그 뜻하는 바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방법을 탐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철학을 한다 하면 세계에 대한 인식을 탐구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학하면 세계에 대 한 근본인식과 근본태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때 말하는 `세계' 란 세계지도라고 말할 때의 그것과는 달리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철학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근본인식과 근본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속에는 자연도 포함되고 사회도 포함되고 인간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근본인식과 근본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에 대한 근본인식과 근본태도를 다른 말로 표현하여 세계관이 라고도 합니다. , 철학은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철학을 세계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계관은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습니 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에게 어떤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기에 우리들은 이 세계관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일까 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은 즐거운 것이며 이 세상은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즐거움을 맛보기 위한 것이며 세상의 골치 아픈 일은 덮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향락주의자라고 부릅니다만, 돈이 많고 여유가 있으며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내어 즐길 수 있는 사람 중에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은 슬픈 것이고 의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은 허무한 것이며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염세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실패만을 거듭할 때 이런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한편, 인생이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을 미약하다고 생각하고 전지전능한 절대자만이 우리의 운명과 장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절대자의 뜻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절대자에게 맡김으로써만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개척한다든지 해결하려고는 생각하지 않고 절대자가 해주기만을 기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숙명론자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 중에 이러한 사람이 많으며 또한 점을 쳐서 자기의 장래를 알아보려는 사람, 사업이 잘 되라고 고사를 지내는 사람들도 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떠한 문제가 닥쳤을 때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원인을 생각해 보고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현실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여러가지 태도와 생각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향락주의자, 염세주의자 등으로 명확하게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향락주의자, 염세주의자, 현실주의자등의 여러 요소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 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전형적인 향락주의자, 염세주의자, 숙명론자, 현실주의자에 대해 이야기 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 에게 하나의 공통적인 문제가 생겼다고 해봅시다. 예를 들어 `실업'이라는 문제가 생겼다고 해봅시다.

 

향락주의자의 경우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는 생활에 여유가 있으며 직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유희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하더라도 생활에 전혀 지장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좋아할 지도 모릅니다. ,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실업이라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것의 해결을 위한 노력 역시 하지 않습니다.

 

염세주의자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그는 이 세상 자체가 괴로움 덩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업이나 해고라는 문제도 단지 그러한 괴로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해고를 당하든 안 당하든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이며 빨리 죽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경우도 실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숙명론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실업이란 아주 큰 문제이다. 실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따라서 실업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절대자의 뜻에 따르는 것이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절대자에게 기원하는 일이다." , 실업이라는 현실의 문제를 절대자에게 맡기고 자기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단지 절대자에 빌 뿐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 현실주의자는 실업이라는 문제가 닥쳤을 때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 실업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합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실업이란 우리에게 괴로운 것입니다. 실업을 당하면 당장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가족의 생활은 파탄에 빠집니다. 따라서 현실주의자는 "실업은 해결되어야 한다"라고 전제하고, 왜 실업이라는 문제가 생기는가를 생각해서 그 적당한 해결방법을 찾아 이의 해결을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까지 든 여러가지 경우의 예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입니다.

,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이 말을 우리가 앞에서 든 말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세계관에 따라 그의 행동이 달라진다.

이처럼 세계관은 우리의 머리 속 생각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우리의 행동까지도 결정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은 실천적 성격을 갖는다, 철학은 실천적 성격을 갖는다." 철학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 때문에 우리는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철학의 실천적 성격 때문에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철학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 때문에 올바른 철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잘못된 철학을 가진다면 우리의 행동도 잘못된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철학이란 어떠한 철학일까요? 이번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철학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이나 철학자만이 세계관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도 자기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에서 흔히 "이 세상에서 돈이 최고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이 옳든 그르든 간에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 동안 겪은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계관 중에는 이처럼 자기가 겪은 경험 속에서 우러나온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관을 상식적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상식적 세계관이란 어떠한 성격의 것일까요? 상식적 세계관은 한 개인 혹은 몇 사람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못합니다. 또한 충분히 생각하고 반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동일한 사람이 서로 상반된 행동을 하는 경우조차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스로의 힘으로 자수성가하여 재산을 모은 사람이 매년 사업이 잘되라고 고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 돈을 모은 것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였고, 자기자신도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신의 힘을 빌기 위해서 고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이처럼 상식적 세계관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까지 합니다.

철학은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나침반과 같은 구실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지역을 간다거나 조그만 산에 가는 경우, 또는 조그만 호수에서 배를 타는 경우에는 나침반이 없어도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모르는 지역, 아주 높고 험한 산, 또는 넓은 바다로 나가는 경우에는 나침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석의 N극이 어떤 때는 남쪽을 가리키다가 어떤 때는 동쪽을 가리키고 또 어떤 때는 북쪽을 가리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나침반은 있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석의 N극은 항상 북쪽을 가리키고 S극은 항상 남쪽을 가리킬 때 비로소 나침반은 그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상식적 세계관으로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상식적 세계관은 체계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금 생활하고 있는 생활범위에서 죽을 때까지 산다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새로운 생활을 한다거나 미지의 세계로 나갈 때, 또는 일관된 생활을 하고자 할 때는 상식적 세계관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그러므로 체계적 세계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체계적 세계관이면 무엇이나 다 좋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장 실감있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가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몇몇 신흥 종교의 경우일 것입니다. 이들 신흥 종교의 경우 대부분은 교의라는 형태로 체계적인 골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 종교의 세계관은 이러한 교의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종교는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우상에 의존해 있는 것이며, 결국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 있는 것입 니다. 그리고 이들 신흥 종교 역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 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 신흥 종교는 그 교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체계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홍 종교의 세계관은 초인간적인 우상을 기초로 한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철학의 경우에는 인간의 이성이 그 유일한 수단입니다. ,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철학은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세계관입니다.

 

 

개인별 탐구 과제

1. 철학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2. 필자가 강조하는 철학은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는가?

3. ‘감상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4. 철학이라는 말의 유래와 그 속에 담긴 의미, 그리고 대상으로 하고 있는 학문이 무엇인지 말해 보자.

5. 세계관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왜 중요한 것인지 말해 보자.

6. 상식적 세계관과 철학적 세계관은 어떻게 다른가?

 

모둠별 토의 과제

1. 각 모둠의 구성워들은 어떠한 세계관을 가졌는지 알아보고 그것이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세계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토의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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