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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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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 개념

 

철학이란 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헤라클레이토스와 헤로도토스가 처음으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는 말을 쓰면서 생겨났다. 이 말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뜻이다. 이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철학은 사물의 궁극 원리를 추구하는 이론 작업이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철학은 오랫동안 유일하고 포괄적인 학문으로 군림했다. 물론 중세 시대의 철학은 신학의 시녀가 되어야 했지만, 신학 역시 세계의 궁극 원리로서의 신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철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철학이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7, 18세기 무렵 자연 과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들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였다. 철학은 물질에 대한 부분을 물리학에 넘겨야 했다. 나누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과학에 분배했다. 그렇다면 이제 철학은 껍데기만 남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철학은 사물의 궁극적 원리에 대한 추구를 여러 과학들에 나누어줌으로써 이제 비로소 철학다운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철학의 판도라 상자에는 어떤 다른 과학도 다룰 수 없는 철학만의 문제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첫째, 세계의 존재 방식에 대한 탐구, 즉 존재론의 문제와 둘째, 인간의 인식 능력을 다루는 인식론, 셋째, 사고의 형식적 원리와 법칙에 대한 탐구, 즉 논리학이라는 세 가지 분야로서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해 오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의 철학

 

흔히 철학이라는 말은 일상 생활과는 동떨어진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으로 생각한다. 이런 오해의 극단은 동양 철학은 일상 생활의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 생활과 무관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철학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1) 세계관이란 뜻

 

세계관이란 세계, 즉 자연, 사회, 인간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아마 한번쯤은 환경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생태론이란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생태론은 자연과 사회, 인간의 관계를 서로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조화로운 전체로 이해한다. 환경주의자들의 세계관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반대로 인간주의라는 관점은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해 가장 우선하고 중심이 되는 것으로 파악하다는 관점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시민들을 사로잡았던 이념이었고 현재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2) 인생관이란 뜻

 

철학은 인생의 의미, 목적을 어디에 두는가 하는 인생관의 뜻으로도 자주 쓰인다. 좀 점잖지 못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흔히 개똥 철학이라는 말을 잘 쓴다. 누가 혹시 여러분에게 "네 생각은 개똥 철학이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의 의미는 인생의 의미, 목적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천박하다는 비난인 것이다. 따라서 인생관이란 인생의 의미, 목적을 부귀 영화에서 찾을 것인가, 명예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것으로 인생관의 차이는 인생의 방향을 규정하게 된다.

 

(3) 가치관이라는 뜻

 

철학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본적인 태도를 뜻하는 가치관이라는 의미로도 많이 쓰인다. 미국 유학을 보냈더니 도박으로 빚지고 돌아와 부모를 살해했던 모 군의 사건으로 한동안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철학계에서는 중, 고등 학교의 철학 교육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학생들이 입시 위주의 공부 속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윤리적 기초를 배우지 못한 것이 근본 원인의 하나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철학이 세계관, 인식론, 논리학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는 철학이 너무나 추상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라는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철학에 대한 그림이 좀더 선명히 머리 속에 들어온다. 철학은 삶의 근본적인 관점을 제공해 준다. 철학이 튼튼한 사람은 세상사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서양 철학사나 수수께끼 같은 동양 철학을 많이 공부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삶의 경험과 이에 대한 깊은 성찰만 있다면 어느 철학자보다도 훌륭한 철학적 관점을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철학의 의의

 

철학의 필요성과 의의를 사례 하나를 통해 들어보자.

 

바다를 향해 배가 갑자기 요란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벨이 울리고 모든 승객들이 모인 가운데 선장이 말을 시작했다. "이 배는 현재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종합적으로 상황을 판단한 결과 해결책은 단 하나, 누군가 한 사람이 바다에 빠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승객들은 혼란에 빠졌다. 아니 도대체 누구를 죽인다는 말인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섰다. 그는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선장이 빠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지만 곧 강력한 반론에 부딪쳤다. 물론 선장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그가 죽고 나면 누가 뒷일을 책임질 것인가라는, 격렬한 토론 끝에 자발적 희생자가 없다면 가장 덜 억울할 사람을 뽑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이 나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을 뽑기로 했다. 그러나 승객 명부에서 찾아낸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은 암 치료에 획기적 진전을 가져와 인류에 커다란 공헌을 했던 의학 박사였다. 사람들은 또 혼란에 빠졌다. 배는 점점 더 기울고 있었다. 그때 명부를 뒤적이던 한 사람이 다급하게 외쳤다. "여러분, 여기 우리 배 안에 전과자가 한 사람 타고 있습니다. , 배가 곧 침몰할지도 모릅니다. 이젠 망설일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것이 가장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는가? 전과자가 빠져야 할까? 아니면 억울한 한 명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모든 승객이 죽어야 할까? 이미 배가 기울고 있어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게 되었을 때, 즉 선택할 수 있는 결론이 단 하나뿐일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학이나 사회학, 혹은 경제학, 물리학, 생물학 등 어느 과학도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답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철학은 이런 난감한 문제에 답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 상황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어떤 대답을 던질지 한번 생각해 보자.

 

공리주의자인 벤담은 전과자를 선택하자는 주장에 동조할지도 모른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인데 이것은 사회의 계약에 의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기본 원리로 한다. 전부가 죽는 길과 한 명의 죽음에 의해 나머지의 안전이 보장되는 길이 있다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전과자는 사회의 계약을 위반함으로써 사회의 효율성을 떨어뜨린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선택되어야 한다면 전과자가 가장 적합하다.

 

칸트 같으면 차라리 같이 죽자고 말할 것이다. 그에 의하면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정언 명령은 언제 어느 때 보아도 타당해야 하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 대한 요구는 자신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 때만 정당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므로 타인에게도 죽음을 요구할 수 없다. 결론은 단 하나,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함께 천국으로 가는 것뿐이다.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라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반대로 도구에서는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 실존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실존 자체의 의미를 부정하는 이러한 질문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부조리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질문을 듣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지도 모른다. 솔로몬의 재판처럼 기발한 명답을 기대했던 여러분들에게는 다소 실망을 주어 미안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철학적 관점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1) 형이상학적 성격

 

형이상학적 특징이라고 해서 그렇게 어려운 말은 아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철학은 경험적 사실에 대한 지식의 추구가 아니라 그 경험을 평가하는 관점을 추구하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양심의 본질 같은 것을 연구하는 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고유한 몫이다.

 

(2) 검증 불가능성

 

벤담이나 칸트, 또는 사르트르가 서로를 설득했다고 치자. 아무도 서로를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것이 옳은지 검증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경험 과학은 현실의 구체적 실례를 통해 주장을 입증하고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설득한다. 하지만 철학에서는 근본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하다.

 

(3) 관점들 사이의 갈등과 조화

 

다시 세 철학자와 함께 배 위로 올라가 보면 결국 최후에는 주먹으로 치고 받게 되지 않을까? 싸움의 결과 가장 힘 약한 사람이 바다에 빠지고 난 다음 홀연히 등장한 니체가 "보라, 생의 의지가 모든 것을 주관하나니!"라고 읊조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철학적 관점은 그 형이상학적 성격과 검증 불가능성으로 인해 항상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다. 더욱이 그것이 생존의 문제에 관한 것일 때, 갈등은 정말 생존을 건 투쟁이 되기도 한다.

 

생각해 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서로 다른 철학적 관점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다른 철학적 관점이라고 해서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철학적 관점도 현실의 반영이기 마련이라 다양한 현실이 존재하는 한 다양한 철학적 관점의 존재 또한 필연적이다. 세상을 하나의 관점으로만 해석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정신적 폭력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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