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은 누구인가?
by 송화은율처용은 누구인가?
1. 불교적 측면
1) 설화에 언급된 관용적 행동으로 보아 처용을 佛子로 보는 견해 - 황패강
이 관점은 "중생홍화(衆生弘化)에 나선 호법(護法)의 龍子 곧 佛子"로 보는 것인데, 이는 처용이 佛法弘化의 覺月 아래에서 衆生敎化의 가무를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범처(犯妻)의 현장을 목격한 후 이욕무사(離欲無私)의 심경으로 춤을 추며 물러 나와 역신을 교화시켜 물러나게 만들었다고 본 견해이다. 그의 가무는 세속적인 감정 처리의 위장이 아니며, 자학적인 代償행위는 더욱 아니다. 그에게 비애가 있었다면, ‘빼앗긴’ 그것에가 아니고, ‘빼앗고 빼앗기는’ 인간 존재의 허무에 향해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특히 '달'의 이미지는 佛經에서 佛身이나 覺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처용의 가무를 無我의 상황으로 보았다. 그래서 처용을 영생과 구원의 희망을 내용으로 하는 天上的 이미지로 표현하고, 疫神은 죽음과 질병과 고통을 내용으로 하는 지옥의 이미지로 그려냈다. 그리고 처용처는 그 양 이미지 사이에서 어느 편이든 될 수 있는 방황하는 인간적 존재로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
따라서 처용가는 불교에서 말하는 ‘내 것’이라는 ‘집(執)’을 버린 상태, 즉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佛歌로 해석한 것이다.
@ 이런 불교적인 견해는 많은 사람들이 처용의 '歌舞而退'한 것에서 승려적인 관용의 면을 고려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을 볼 때 승려와 승려가 아닌 사람의 구분이 분명하게 나와 있으며, 처용의 경지가 거기에 이르렀다면 <삼국유사> 속에 이미 명기해 두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有氣音 無氣音 연구에서 시작하여 처용을 중(승려)이나 용으로 보는 견해 - 강신항
처용의 語源論的 의미를 살펴보는 데 있어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하더라도 音借만 한 것이 아니므로 완전을 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그대로 믿고 계림유사의 ‘龍曰稱’을 근거 있는 표기로 본다면 ‘龍 = 處容 = 稱’으로 고대국어에서는 동일어를 1자 또는 2자의 한자로 사음(寫音)한 예가 많으므로 고대국어에서 ‘龍’을 뜻하는 단어로서 ‘치용’ 또는 이와 유사한 1음절의 단어를 가정하고 싶다.
다만 이 경우에도 오늘날 무격(巫覡)사회에서 ‘제용’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고대 국어에서의 유기음(有氣音)과 무기음(無氣音)의 대립 문제가 숙제로 남지만 ‘즁’과 ‘츙(稱의 당시 추측음)’은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처용이 ‘즁’을 기록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견강부회에 가깝다면, 대신에 계림유사의 기록에 ‘龍曰稱’을 그대로 해석하여 ‘용 자체의 명칭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어 처용을 ‘용’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 ‘처용’의 뜻이 샤머니즘에서 사제자(司祭者)를 ‘즁’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이상 처용을 중으로 볼 수 없으며, 당시 국어에서 有氣子音과 無氣子音의 구별이 없었다는 전제가 반드시 있어야 이 이론은 성립할 수 있다.
2. 무속적 측면
이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으로서 처용을 용신제의(龍神祭儀)의 한 사제자인 巫男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로는,
1) 제웅으로 보는 관점 - 양주동, 이두현
한국인으로 최초로 향가를 연구한 양주동 님은 “인형(人形) 혹은 가면이 나타나기 전에 처용이라는 인물명(人物名)이 있었다고 보고, 처용은 한자어가 아닌 우리말의 음차(音借)로 ‘제웅’이다”고 했으나 무엇인지는 해결하지 못했다.
그 뒤 이두현이 “처용의 한자 借字 표기의 語義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현대음은 ‘제웅’이다. ‘제웅’은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고, 제웅직성이 괸 사람이나 앓는 사람을 위하여 길가에 대신 버려져서 액을 막거나 산 영장(永葬)을 지내는 데 쓰여지는 대속양(代贖羊)과 같은 주술인형이다. 따라서 처용은 ‘문첩처용지형(門帖處容之形)’으로 사악을 물리치는 ‘辟邪’의 주력을 가질뿐더러 일면 ‘제웅’으로서 사악을 짊어지고 대신 버려짐으로써 선을 맞이하게 하는 ‘進慶’의 힘을 갖는 복합적 신격이며, 이 양면성은 현재 전하는 문신(門神)신앙과 제웅신앙의 민간전승의 공존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2) 의무주술사(醫巫呪術師)로 보는 관점 - 김열규
처용 전승(傳承)은 종교적 행사와 주술행위에 관련된 神聖傳說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창찰(創刹)의 연기설화(緣起傳說)이고 역신 퇴치 기능을 지닌 門神의 由源에 관한 전설이며 여기에 더하여 처용가를 아울러 고려한다면 熱病大神을 구축(驅逐)하는 의무주술(醫巫呪術)의 기원에 관한 전설이다.
이러한 복합성은 다시 말하면 龍神의 아들로서 표상되는 神異로운 출현에서 비롯된 처용의 생이 마침내 역신을 퇴치하는 의무주술사 및 문신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 관한 얘기로 영웅설화 유형에 관련하여 생각할 때 통일성을 얻는다. 영웅설화의 주인공이 그를 둘러 야기된 서사적인 갈등을 神力에 의해 극복하고 드디어 그에 어울리는 지위, 명성을 얻었듯이 처용은 처용가와 도무(蹈舞)가 가진 주력(呪力)으로 갈등을 이김으로써 의무주술사가 되고 문신(門神)이 된 것이다.
3) 김용구
삼한 시대 또는 그 이전에 발생한 원시가면무가 신라에 계승되어 여기에 불교적인 교리와 용신사상이 결합하여 신라시대의 처용무를 형성했는데, 이 의전(儀典)의 합리화를 위한 의전설명설화로 나타난 것이 처용설화라고 봄,
4) 김동욱
처용은 그 지방에서 행해 오던 용신제(龍神祭)의 사제자(司祭者)로서 무당이다. 그리고 그 처의 간통은 이객관대(異客寬待)와 결부된 악신을 和樂하게 보내려는 뒷전풀이(서울 지방에 유행하던 열두 거리의 하나)로 볼 수 있고, 처용설화는 무조(巫祖)인 처용의 본풀이 곧 무조전설이라 추정했다. 또한 <삼국사기> 권1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조에 나오는 ‘慈充’을 처용의 본체로 보고 ‘慈充’의 반절인 ‘즁․츙’으로 해석하였다. 곧 ‘慈充’은 방언에 ‘巫’라는 말이고, 이는 존장자(尊長者)였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였다.
5) 서대석
처용은 용과 인간의 양면성을 지니면서 동해용신을 주신으로 모시는 강신무이며 역신은 역병을 주는 귀신, 그의 간통은 처용처가 역신에 걸린 상태를, 처용의 가무는 역신구축의 주력행사 곧 무당의 치병굿이며, 처용설화는 처용의 가정수호신으로 정립되기까지의 과정을 기술한 무속설화, 처용가는 서사무가 중에 삽입된 주술의 기능을 가진 단편무가로 정리할 수 있다.
6) 김택규
삼국유사 소재 「처용랑 망해사조」의 기록은 개운포의 처용도를 중심으로 관습적으로 행하여져 온 龍神祭儀의 전설로 이해하고, 동해 용신과 그 일곱 아들은 처용도 일대의 사제집단으로 본다. 따라서 처용은 동해용신으로 분장한 主巫에 종속한 助巫로서 가무에 뛰어난 倡夫巫의 한 사람이다.
3. 역사적․사회적 측면
처용의 정체에 대하여 역사, 사회적 관점에서 보는 견해는 크게 둘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하나는 처용을 이슬람상인의 도래로 보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처용을 신라 동변에 있는 反中央的 호족(豪族)의 子로 보고 있는 경우이다.
1) 처용을 이슬람세계와의 교역관계를 주도한 이슬람상인으로 보는 견해 - 이용범
처용의 신라 출현을 전하는 것은 <삼국유사>만이 아니고 <삼국유사> 11권에도 바로 ‘처용’으로는 밝히지 않았으나 헌강왕의 東巡時에 어디선지는 모르지만 용모와 의건(衣巾)이 괴상한 네 명이 어가(御駕) 앞에 나타나 가무하였기에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山海精靈’이라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렇게 출현한 처용을 신비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자연인으로 보고자 한다.
그들이 출현한 울주(蔚州) 海上은 곧 당시의 국제항이었다. 당시 중국 明州 楊州까지 진출한 이슬람 상인들이 울산만(蔚山灣)에 신라와의 交易을 위하여 접근하였다. 이러한 점은 <삼국사기>에 보이듯 이슬람 상인을 통하여 수입되었을 物品名이 많이 나타난다는 점을 비롯하여 여러 서적을 통해 나타나는 수입물품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4인과 <삼국유사>의 일곱 아들 중 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이들은 신라로 향한 이슬람 상인의 무리이며, 신라 말의 사회 경제면의 모순의 개혁을 위해 탁월한 理財術을 지닌 그 이방인들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코자 헌강왕의 요청으로 入京한 그들 중 하나가 處容郞이라 할 수 있다. 이 이방인의 뒷소식은 전하지 않으나 그 심목고비(深目高鼻)의 괴이한 용모가 처용무의 가면이 되어 잡귀(雜鬼)를 몰아내는 것으로 믿어져 내려오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 외 이슬람인으로 보고 있는 학자들은 그 당시 신라의 국제교역이 활발했다는 것과 처용의 생김새가 기괴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헌강왕이 그들의 理財術을 높이 사 무너져가는 신라의 경제를 되살리려고 했다거나 또는 그들이 의술에 밝은 점을 보아 벽사신(辟邪神)으로 신격화된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특히 아랍 관계 전공 교수들은 아랍 문헌인 9세기 중엽 이븐 쿠르다드비에 의해 쓰여진 <키타브 알 마살릭 왈 마말릭>을 들어 처용을 아랍인이라고 하는데 동조하고 있다.
"중국의 건너편 콴수를 가로지르는 곳에 많은 산들과 금이 풍부한 '신라'라고 불리는 나라가 있었다. 우연히 그곳에 갔던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혹되어 영구히 그곳에 정착하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건너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 이 이론은 충분히 가능성을 지니고는 있지만 이들은 결국 '생김새나 의복의 기괴함'이라는 확실하지 못한 근거밖에 내세우지 못하고 있으며, 아라비아 상인들이 갖는 理財術과 결부시키는 것은 당시의 어떤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아 주장의 근거가 좀 박약(薄弱)하다고 본다.
2) 이우성
처용설화 그 자체에 보다 과학적인 해석을 주어보고, 이 설화의 분석을 통하여 그 속에 들어있는 역사적 사실을 발굴해 내려 하였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 … 설화를 현실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는 우리로서는 설화에 나오는 뭇 존재들이 역사적 실재 그것이 아니고 ‘그것’의 상징일 뿐임을 믿는다. 龍과 龍子는 실지의 용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어떤 그것의 상징일 따름이다. 우리는 처용설화에서 헌강왕의 開雲浦 행차에 雲霧로 作變한 동해 龍을 신라 동변에 있는 반중앙적호족의 상징으로 보았으며, 신라의 망국을 미리 경고한 서울 주위의 제신들을 신라하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육두품계층의 상징으로 보았고, 처용의 처를 간통한 ‘역신’은 타락한 화랑들의 행위로 ‘병든 도시’의 상징으로 보았다.
우리는 다시 그 다음의 목적을 위하여 처용설화 중에서 특히 처용이 「隨駕入京輔佐王政... 王以美女妻之欲留其意 又賜級干職」이라는 구절에 역점을 두고 추구하였다. 이 구절은 신라 하대의 대지방 포섭 견제책(對地方包攝牽制策)의 一端을 기록한 것으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매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하여 고려건국기의 왕건의 호족 포섭 견제책을 습용(襲用)한 것이라는 사실과 고려 기인제도의 기원을 신라 하대로 소급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이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처용이 그 처의 간음행위를 보고 아무런 미련 없이 歌舞하며 물러난 것은 어쩌면 신라의 政略에 대하여 보내지는 야유다. 우리는 이것을 손잡이로 하여 신라의 실패 원인을 중앙골품제 귀족의 생활에서 찾아보았고, 처용의 기질을 추출하기 위하여 당시 지방농촌에 있어서의 새로운 변혁적 에네르기의 축적과 호족의 지도적 위치의 구성양식을 부조시켜 놓았다.
그는 결국 동해룡을 신라 변방의 반중앙적인 지방대호족으로 보고 처용을 상수리제도에 의해 서라벌로 올라간 호족의 아들로, 역신을 그 당시 문란한 신라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 즉 타락한 화랑으로 보고 있다. 사실 그 당시의 신라는 지방호족들의 반란이 극심하던 때였고,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든 진무(鎭撫)하기 위해서든 왕이 직접 행차한 적이 분명히 많았었다. 또 고려의 기인제도와 비슷한 제도가 신라시대에도 상수리제도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놓고 봤을 때 개연성은 충분히 성립된다. -- 여기까지는 모든 가설이 충족시키고 있는 바이다. -- 그렇다면 우리가 처용을 반 중앙적인 강력한 지방호족의 아들로 보고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처용이 지방호족의 아들이 되려면 개운포(지금의 울산)으로 지방호족의 반란을 진압 또는 진무하기 위해 출정한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그러한 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강력하게 처용이 지방호족이라는 것을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거기에다 처용이 벽사신으로 추앙받은 이유가 규명이 되지 않고, 더 나아가 결정적으로 문학을 역사적으로 탐구해 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역사학의 자료로 원용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 논리를 비판한다.
우리는 조사중 이 논리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 사실은 울산이라는 지역의 위치가 신라말기 강력한 지방호족 반란의 근거지가 된 지역과 일치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주장을 받쳐주는 필연성을 획득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많은 가설들보다 한 발자욱 앞서는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처용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주장 중 확실히 바로 이거다하는 주장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아쉽게도 비판할 점을 많이 보이지만 그런 대로 근거 있는 지방호족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채택하기로 했다 ….”
3) 화랑도로 보는 주장
화랑도가 삼국통일 이전에는 치열한 전투를 통하여 視死如歸하던 기백과 정열을 지녔으나, 통일 이후 현란한 唐 문화와 사치 풍조의 침투 감염으로 유흥과 향락에 젖어들면서 名山大川에 遊娛하면서 음풍농월을 즐겨하게 되었다
설화를 살펴보건대 처용은 화랑도들과 같이 무예도 닦고 글공부도 열심히 하고, 또 유쾌하게 놀았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또 어느 가을 달 밝은 밤, 처용은 풍류를 즐기는 벗들과 같이 산으로 들로 내로 호수로 달을 찬미하며 놀았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처용은 처음에는 화랑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어떤 연유에선지 화랑이 되었고, 국선도의 무리처럼 행세했던 걸로 짐작된다.
4. 민속적 측면
(1) 가면극 배우로 보는 관점 - 이병도
처용을 동해용의 아들이라 하여 개운포와 망해사 창건의 연기(緣起)설화에 관련시켜 그 유래를 신비스럽게 하려는 작위에 불과하며, 처용에 관한 가무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내려오는 것을 보아 신라 하대의 저명한 가면극(假面劇)배우로써 그 당시 임금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다.
(2) ‘탈(가면 : 假面)’으로 보는 관점 - 엄원대
현재 이 지방에 사용되고 있는 방언을 조사하여 ‘처용’을 해석하려 했다. 즉 ‘철륭 백힌 놈’이나 ‘개(犬) 철륭 백혔나’ 등에서 이 ‘철륭’을 ‘탈’로 보고, ‘철륭 - 철융 - 처융 - 처용’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5. 기타 - 해의 신, 또는 까마귀로 보는 견해
처용설화를 바다의 신(神)인 용이 노하여 파도를 일으키고 구름과 안개를 일게 하는 일을 달래고 수로에 해가 나와 안전하게 다니기를 기도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왕래하는 동해안 울산 바닷가에 망해사을 짓게된 연고설화이며 또 처용랑을 해(日)의 신으로 보고 햇님의 넋인 가마귀(烏)라 하는 견해 (박시인)
처용은 일식신(日蝕神)인 라후(羅候)이며, 부처의 적자(嫡子)이며 수모를 견디고 참아 이겨내는 인욕행(忍辱行)을 상징하는 불교의 나후라(羅候羅)와 연관성이 있다. (이어령)
#. 향가 작자의 일반적인 명명법으로 살펴 본 견해 - 최철
향가의 작자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도천수관음가>의 희명(希明) - 5세 아이의 득명(得明)을 희원(希願)한 사람.
<찬기파랑가> <안민가>의 충담(忠談) - 신하로서 왕에게 충성(忠誠)스런 말(談)을 한 사람
<혜성가>의 융천(融天) - 혜성의 요괴를 없애고 천체(天體)의 운행을 융화(融和) 조절한 사람
<서동요>의 서동(薯童) - 마(署)를 캐어 팔아 생업을 유지한 아이(童)
<우적가>의 영재(永才) - 山中群盜를 만나 재치(才致)와 뛰어난(永) 설법으로 회개시킨 사람
<원가>의 신충(信忠) - 신하로서 왕과 맺은 신의(信義)를 지키고, 충성(忠誠)을 보인 사람
<원왕생가>의 광덕(廣德 또는 그의 처) - 친구 엄장에게까지 넓은(廣) 덕(德)을 베푼 사람
<도솔가> <제망매가>의 월명(月明) - 笛을 잘 불어 달(月)까지도 멈추게 해 훤하게(明) 만든 사람
<처용가>의 처용(處容) - 얼굴(容)이 나타나는 곳(處)에서는 역귀가 나타나지 못하게 만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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