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지사의 길, 시인의 길 / 이육사의 삶과 문학 / 양왕용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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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의 길, 시인의 길 / 양왕용

 

1

 

1927118일 오전, 조선 은행 대구 지점에 신문지에 싸인 우편물 하나가 배달되었다. 신문지를 벗기던 은행 직원이 깜짝 놀라 우편물을 밖으로 내놓자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물의 유리창이 깨졌다. 폭발하였다. 일본 경찰과 은행원 여럿이 중상을 입고 쓰러지고 건물의 유리창이 깨어졌다. 오늘날, 이 사건을 장진홍 의사 의거(義擧)’로 부르는데, 의거의 주인공 장진홍 의사는 현장을 벗어나 무사히 피하였다. 일본 경찰은 주동 인물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급기야 인근 지역에서 애국 활동을 하는 청년 지사(志士)를 모조리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육사를 비롯하여 그의 형 원기, 동생 원일, 원조 등 4형제가 투옥(投獄)되었다. 일본 경찰은 사건을 조작하여, 검거한 청년들에게 혐의를 씌우고자 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들은 육사 형제를 주모자로 만들기 위하여 갖은 방법으로 고문을 가하였다. 감옥에서 육사 형제는 일본 경찰에게 서로 나를 고문하라고 대들며 돈독한 우애를 보여 주었다. 맏형 원기는 한 달 만에 석방되고, 원조도 학생임이 참작되어 곧 석방되었나. 육사와 원일은 미결수 상태로 감옥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의거가 일어난 지 두 해가 지난 2월의 어느 날, 장진홍 의사가 일본 오사카에서 체포되어 육사 형제들의 투옥이 일본의 조작극임이 드러났지만, 이 사건은 육사가 일본 경찰의 눈에 주모자로 혐의를 받을 정도로 일찌감치 지사의 길을 걷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일은 그의 40년 생애동안 17차례나 감옥을 드나드는 최초의 사건이 되었고, 그가 이육사라는 이름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의 죄수 번호가 264였다.

 

2

 

육사는 1904, 경상 북도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6 형제 가운데의 둘째로 태어났다. 육사는 5세 때부터 형제들과 더불어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그 수준이 매우 높았다. 그의 할아버지 이중직은 학식(學識)이 뛰어나고 성품이 겸손한 선비였으므로, 이중직이 거쳐하는 사랑방에는 늘 선비들이 머물러 나라의 현실과 선비의 도리를 함께 토론하기를 즐겼다. 육사는 그런 조부 밑에서 성현의 말씀을 배워 가며 자라났다. 그러다가 12세부터는 보문 의숙, 백학 서원을 거쳐 일본 유학길에 올라 새로운 학문을 익히는데 힘썼다.

 

육사가 새로운 학문을 익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그의 나이 16세 되던 1919, 그는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어를 먼저 깨쳐야 한다는 생각에 일본어 교본을 구하러 들렀다가, 눈이 흉하게 짓무른 여자 아이를 보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다래끼가 났는데, 어머니가 선인장을 찧어 바르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하였다가, 선인장의 독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했다. 육사는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팠다. 부모가 무지해서 딸을 끔찍한 몰골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가 일본에 건너 간 때는 간토(關東) 대지진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로, 일본이 대지진으로 어수선해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인 학살이라는 만행을 일으킨 뒤였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에 체류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육사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3

 

그는 일본 생활에서 얻은 생각을 바탕으로, 귀국하자마자 형, 동생과 함께 항일 단체인 정의부(正義府), 군정서(軍政暑),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달성 공원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던 조양 회관(朝陽會館)에서 벌이는 문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양 회관은 당시 대구와 그 인근 지역의 문화 운동의 거점이었다. 여기에서 육사는 자신과 정신적으로 뜻이 통하는 많은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이들과 힘을 합하여 청년들을 교육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한편, 그는 1925년 말부터 중국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육사의 빈번한 중국행은, 그가 문화 활동으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항일 독립 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 준다. 중국에서 육사는 자금을 모아 중국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 하는 몇몇의 독립 운동가들과 만날 수 있었다. 육사는 이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는 한편 베이징(北京)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리고 1926년 후학기부터 1927년 전학기까지 광뚱(廣東)의 중산 대학(中山大學)을 다녔다. 이 무렵, 광뚱은 혁명적 분위기가 충만하였고, 한국 독립 지사가 대거 몰려드는 도시여서, 이 곳에서 육사는 여러 독립 지사들을 만났고, 더욱 깊숙이 독립 운동에 관여하였다.

 

육사는 1932, 난징(南京)에 있는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인 조선 군사 간부 학교에 군사 교육을 받으러 찾아간다. 교육을 받는 동안 육사는 항상 최우수의 성젇을 유지했으며, 권총 사격에 대단한 실력을 나타냈다. 육사를 포함한 1기생들은 오전 6시에 기상하여 밤 9시에 취침할 때까지 꽉 짜여진 교육 과정(敎育課程)을 밟아 나갔다. 마침내 6개월의 교육 고하정을 수료하고, 1933420, 한 명의 탈락자도 없이 모두 졸업하였다. 비장한 감회(感懷)가 흐르는 졸업식장에서 교장은 육사를 비롯한 졸업생들에게 조선의 절대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당부했다. 이 날 저녁, 여흥 무대에서 육사는 '지하단이라는 희곡을 창작하여 직접 연극 배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이후에 이육사가 의열단원으로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의열단은 철저한 비밀 결사로, 자료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 동지(同志)를 받아들일 때에도 정식 서류나 대화를 통해서 취해진 것이 아니라, 그 동지가 의식하지 못하게 술을 마시고 노는 가운데 철저한 검증을 하였다. 이름이나 고향, 출신 학교도 서로 묻지 않았으며, 대답하지도 않았다. 체포되어 고문당할 경우에 다른 동지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의열단의 이와 같은 수칙을 이육사는 철저하게 지켰다. 일본 헌병이 모진 고문을 할 때에 육사는 너희들이 나를 고문해서 내 육체를 으스러뜨릴 수 있을지라도 내 정신만은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는 문단 생활을 하면서 친형제 이상의 우애를 나누었던 신석초에게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본부의 부름을 받아 만주나 베이징에 갈 때에도 막연하게 안서처럼 술 마시러 가는 거지(안서 김억은 술을 마시러 만주 안둥으로 가곤 했다.).” 하든가, “반도란 지리적으로 답답한 곳이야.” 하며 훌쩍 떠났다. 그런 뒷면 언제나와 다름없이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단골 찻집에 나타났다. 그는 술집에 가 술을 마실 때에도 말을 크게 하지 않았다.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문학 얘기, 시정 잡담을 주고받았다. 어쩌다 고향인 안동에 돌아와서도 마을 사람이나 친척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여섯 형제들의 집이라고 해서 큰형이 명명한 육우당(六友堂)’에 머무르며 책을 읽거나 난을 쳤다. 이런 점들로 볼 때, 그는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선비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4

 

육사의 문필 활동은 그가 중국에서 귀국하기 전부터 다짐한 무력 봉기에 의한 독립 운동이 좌절되면서 활발해졌다. 처음에는 군사 간부 학교에서 배운 실력을 바탕으로 하여 주로 시사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하였다. 1934년에서 1936년까지 시 4, 수필 1편만 발표한 것과 대조적으로 시사 평론은 9편이나 발표하였다. 시사 평론의 관심은 주로 중국의 정치 동향과 농촌 문제였다.

 

1935년 봄, 육사는 위당 정인보가 주도한 신조선사(新朝鮮社)와 인연을 맺고, 석초와 함께 잡지 신조선(新朝鮮)’의 편집에 관여하다가 그 곳에다 시 7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가운데서도 군사 간부 학교 동기생이 체포되어 증인으로 조사를 받는 등 일본 경찰의 감시의 눈초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무렵, 육사는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그 때에 쓴 시 황혼에는 좌절된 독립 운동에 대한 열망과 외로움이 얼마나 컸는지 잘 나타나 있다. 시와 수필을 발표하고,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곤 하는 일은 육사에게 일상과 같은 일이 되었다.

 

그의 심신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는 쇠약해진 심신을 돌보기 위해 포항의 송도원으로 요양을 갔는데, 유명한 시 청포도는 바로 이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세상에 나온 시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라고 시작되는 이 시는, 청포도로 표상되는 고향을 떠올려 평화로운 삶과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내었다.

 

그런데 그의 대표작인 청포도’, ‘절정’, 그리고 광야등에는 독립 운동의 좌절로 인한 울분과 격앙된 감정이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울분을 삭이는 그의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고 항상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으며, 자기를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았다. 이러한 시의 경향과 그의 지사적(志士的) 성격은 어릴 때에 받은 한학 교육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5

 

19434, 봄볕이 따사로운 어느 날, 육사는 베이징으로 떠났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는 모친과 맏형의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떠난 지 3개월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고향 마을인 원촌에 내려가 있던 육사가 늦가을의 어느 날, 서울에 올라왔다. 시회(詩會)를 열기로 하고 날을 받아 석초의 집에 친구들이 모여 육사를 기다렸다. 그런데 밤이 늦어도 육사는 오지 않았다. 대신 육사의 아우가 와서 육사가 헌병대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갔다는 말을 전했다. 베이징으로 이송될 때, 그는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의 고사리 같은 손을, 포승에 묶인 채 어렵사리 한 번 쥐었다.

 

이듬해 116, 그토록 바라던 조국 광복을 1년 앞두고 육사는 이국의 머나먼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육사가 작고한 지 2년 뒤인 1946, 그의 아우 이원조가 육사 시집을 처음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았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시 전집의 출판이 이어지고 1964, 육사의 환갑을 맞아서는 육사의 시비 건립 운동이 추진되어, 1968년 어린이날에 낙동강변에다 광야를 새긴 시비를 제막하였다.

육사는 그의 에서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움직이며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라고 말했던 것처럼, 조국 광복(光復)이 틀림없이 올 것이라는 신념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 신념을 아름답고 단호하게 예언한 시인이었고, 직접 실천으로 옮기며 산 민족 지사(民族志士)였다. 이러한 그의 생애는 천고의 뒤에도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모습으로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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