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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에 비 뿌리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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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에 비 뿌리고

 

 

연못에 비 뿌리고 버드나무에 안개 끼었는데

사공은 어디 가고 빈배만 매어 있는고

해질 무렵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하는구나

요점 정리

작자 : 조헌( 1544∼ 1592)

종류 : 평시조

성격 : 한정가(閑情歌), 자연과 인정(人情)을 노래

제재 : 池塘(지당)의 春景(춘경)

주제 : 寂寞(적막)과 孤獨(고독), 봄의 정취와 외로움

심상 : 시각적

정서 : 외로움

특징 : 정서의 표출 없이 정경 묘사만 하였음에도 작자의 외로운 심정이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 감정 이입.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외로움과 쓸쓸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이별의 정서는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빈 배'와 '짝 잃은 갈매기'등의 소재와 석양 무렵의 비 내린 풍경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출전 : <진본 청구영언>

 

내용 연구

 

연못에 비 뿌리고 버드나무에 안개 끼었는데

사공은 어디 가고 빈배[화자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소재 / 객관적 상관물]만 매어 있는고

해질 무렵[석양은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시간적 배경임]에 짝 잃은 갈매기[화자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소재 / 객관적 상관물]는 오락가락하는구나[풍경 묘사를 통한 화자의 내면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자연 풍경

정서

봄 비 내리는 연못가

자연물을 통해 화자의 쓸쓸함과 외로움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냄

안개가 낀 버드나무

사공이 없는 빈 배(객관적 상관물) - 사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홀로 매여 있는 모습

짝 잃은 갈매기(객관적 상관물) - 짝을 잃고 오락가락하고 있는 모습

이해와 감상

 

봄은 우리에게 설렘으로 다가온다. 봄은 무언가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봄은 온세상을 달뜨게 한다. 그런데 이런 날 비가 오다니! 비가 오는 날은 사람이 더 그리워지고 외로워지는가? 그런데 이 시조는 한 폭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담긴 산수화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시적 화자는 '사공(沙工)이 없는 빈배'로 외로움을 말하더니 해질 무렵의 짝잃은 기러기로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을 감정이입해 고독하고 외로운 분위기를 더 심화하고 있지 않는가?

붓이 단지 몇 번만 오고 갔을 산수화 같은 그림이지만 그 속에는 자연으로 인해 인간이 더 외롭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안보이면 그대는 비오는 날 술 한잔을 마시고 밖을 보라. 외로운 이가 보이지 않는가? 짝 잃은 갈매기는 바로 다름 아닌 당신이다.

심화 자료

조헌(趙憲)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의병장.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경기도 김포 출생. 황(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우(世佑)이고,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다.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 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전라도도사·종묘서영(宗廟署令)을 역임하였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보은현감을 자청하여 나갔는데,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다. 그러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군 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 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榜目, 重峯集, 亂中雜錄, 寄齋雜記, 尤庵集, 宋子大全, 愼獨齋遺稿, 淸陰集, 重峰集, 月沙集, 抗義新編, 澤堂史草, 壬辰亂中 湖西地方의 義兵活動과 地方士民의 動態(金鎭鳳, 史學硏究 34,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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