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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 / 해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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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  



노자(老子)는 천지 자연의 도에서 무위(無爲)의 도덕을 이끌어내었다.
그에 비해 공자는 주로 형이하(形而下)의 일을 대상으로 하여 일생생활 속의 인륜의 교(敎)를 설명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상이 노장(老莊)에 비해 어딘가 심오하지 못한 듯한 느낌을 준다. 자사는 이를 우려하였다. 그는 도학(道學)에 심원한 기초를 세우고자 독자적 철학을 창조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사상이다.

중용도 원래는 예기 중의 1편이었다. 중용이 크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두 정자(二程子)가 논어, 맹자, 대학과 나란히 사서(四書)로 다루면서 부터이며, 특 히 주자가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지으면서 더욱 알렸다.

중용은 한 마디로 성(誠)의 도를 밝힌 것이다. 나의 성(性)은 우주의 본체인 성(誠)의 표현이며, 바로 또 하나의 작은 우주라는 것이다. 송의 주자는 중(中)은 불편(不偏), 용(庸)은 불역(不易)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당의 안사고(顔師古)는 하늘 과 사람 사이의 심오한 원리를 설명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읽어보기]

자사는 하늘과 사람은 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보고 도덕의 근원을 하늘에 두었다.
그는 천도(天道)가 곧 인도(人道)라고 생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근본사상은 우주의 본체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체가 되는 성(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이란 무엇인가? 자사는, 정성이 있으면 선(善)에 밝아지는데 그것이 '성'이라고 한다. '성'은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준 것으로 천지의 법칙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항구불변한 것이다. 지극한 정성이다. 지극한 정성은 멈춤이 없고, 멈추지 않으면 영원하고, 영원한 것은 곧 징험(徵驗)되며, 징험한 것은 또 유원(悠遠) 해지고, 유원해지면 넓고 두터워지며, 넓고 두터워지면 곧 높고 밝아지는데, 그것이 바로 '성'이다. '성'은 우주간의 원리이기 때문에 바로 인간과 만물의 본성이 된다는 것이 다.

자사는 말한다.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 그의 '성'을 다할 수 있다. 그의 성을 다하면 곧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다.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곧 만물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며, 만물의 성을 다하면 하늘과 땅과 더불어 참여할 수 있다. 자사의 말은 곧 물아일체(物我一體), 천지합일(天地合一)을 말한 것이다.

자사는 또 말한다. 성이란 스스로 이루는 것이며,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이다.

정성이란 것은 하늘의 도이며, 정성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라는 것이다.

자사는 말한다. '성'은 하늘의 도인 동시에 사람의 도이다. '성'은 자연의 원리인 동시에 도덕의 원리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근본사상이다.

중용의 윤리사상

중용의 윤리설은 중용의 근본사상인 '성'의 철학에 입각해있다. '성'은 자아실현 에서 말하는 절대아(絶對我)와도 같다. 하늘이 준 성을 다할때 자연도덕의 완성을 보 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성(性), 도(道), 교(敎) 등의 개념을 분명히 파악해 보자.

'성(性)'

중용에 의하면, 성(性)은 성(誠)이다. 즉, 물(物)의 본성이다. 인간이나 만물은 천 지의 원리인 성(誠)을 그 본성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性)을 좇아서 활동하는 것은 바로 도에 합하는 것이니 도덕이란 이 성(性)을 실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도(道)'

그러므로, 도는 성(性)을 따르는 일이다. 성(誠)이 나타난 것이 바로 성(性)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성심을 다하고(忠) 남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怒)이 바로 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역은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일이 있다. 천도(天道)와ㅐ琯?人度)가 어떻 게 다른가이다. 천도 즉 성(誠)은 만물에 두루 통하는 하늘의 이치로서 넓은 뜻 의 도이며, 인도 즉 성(性)은 좁은 뜻의 도로서 자기의 마음을 성(誠)되게 할 때 비로소 얻 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자사는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람에게는 욕심이 있 기 때문에, 성인이 아닌 이상에는, 마음을 성되게 하려는 노력을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고.

(교(敎))

따라서 교는 도를 닦는 일이다. 주자의 주석에 따르면 도는 객관적이다. 왜냐하면 예악형 정(禮樂形政) 따위를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바로 덕을 쌓고 덕 을 편다는 말로 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객관적인 이 도가 성(性) 즉 본성과 다른 것 은 아니다. 본성이 객관적으로 나타난 것이 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본성을 따르면 저절로 도덕이 행해지고, 또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성(誠)이 있다 면, 수양이나 교육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자사는 말한다. 본성에도 3품(三品)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성, 배워서 깨닫는 성, 곤란을 당한 후에 알게 되는 성으로 나뉜다. 공자가 말한 상지(上知), 중인(中人), 하우(下愚)와 같은 설명이다. 어쨌건, 교육이 필요없는 상품은 성인에게나 해당된다. 중품이나 하품 자의 성은 투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사의 (교)는 공자에 비하면 진일보한 개념인 듯하다. 공자는 하우불이(下愚不移)라 하여 하품자의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중용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중용론(中庸論))

자사의 중용은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상태이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여기서 말하는 (중)은 수학이나 기하학에서의 가운데라는 뜻은 결코 아니 다. 수학이나 기하학에서의 가운데는 이미 정해진 성(性)이 있지만, 자사의 (중)에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또, 중용은 덕으로서는 지덕(至德)을 뜻한다. 어느 곳에서나 어떤 시간에서나 적중되지 않 는 경우가 없는 임기응변적인 적중이다. 시의적절하게 과불급이 없는 덕, 즉 시중(時中. 때, 환경, 처지에 맞게 행동하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화론(中和論))

자사는,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고 하고, 그것을 나타내었는데 절도에 아주 잘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이 세상의 근원이라면 화는 세상의 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용이 말하는 (중)은 그 내용에 있어서 성(性)과 다를 바가 없다.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란 천성(天性)이 혼연(渾然)하여 치우침이 없다는 뜻인데, 그것이 발휘되 면 이른바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화)는 무엇인가? 정(情)을 나타내었지만 그것이 모두 절도에 맞아 조금도 잘못이 없 는 것이다.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고 슬픈 자리에서 슬퍼하는 것이 바로 (화)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중화)는 실천의 극치라고 할 것이다.

수양의 방법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중용은 인성에 3품이 있다고 하였다. 3품 중 상품자는 곧 성 인을 가리킨다.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알기 때문에 수양이 필요없다. 그러나 중품이나 하품자는 크게 수양을 필요로 한다. 하나는 배워야 알고, 다른 하나는 곤란을 겪어보아야만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3품의 차이를 구분하고는 있으나 그 삼자가 다 교육을 받음으로써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중용은 언급한다. 교육으로써 도를 알고 성에 도 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양은 어떻게 쌓는가? 중용은 두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존덕성이고 다른 하나는 도문학(道問學)의 방법이다.

존덕성은 글자 그대로 각자가 자신의 덕성을 존중하는 일이다. 존양성찰(尊養省察)이다. 도 자체가 나의 성(性)에 있고, 성을 떠나서 달리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의 덕성(양심)을 존중하고 존양성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 속의 마귀 인 욕심을 막고, 신독(愼獨)해야 한다는 말이다.

존양성찰의 핵심은 (신독)이다. 신독이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바를 조심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바를 조심해야 하다. 남이 볼 때만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에 삼가는 것, 그것이 바로 군자의 도리인 것이다.

중용은 또 수양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문학(道問學) 즉 학문의 길로 들어서라고 말한다. 널 리 배우고, 남에게 묻고, 깊게 생각하고, 구분을 밝게 하는 일에 힘쓰고, 그렇게 알게 된 것 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라고(學知篤行) 말한다. 중용이 제시하는 학지독행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남이 한번 해서 어떤 것에 능숙하다면 나는 그것을 백번 행해야 하고, 남이 열번 해 서 능숙하다면 나는 천 번을 행해야 한다.

중용의 정치사상

중용의 정치사상은 대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덕치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유교의 기본적 특 색인 정교일치사상에서 연유되었다고 보겠다.

중용은, 큰덕(大德)이 있는 자는 반드시 하늘의 명을 받아 군주가 된다고 말한다. 뜻이 높 은 자는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펼쳐나가기 위해서 윗자리에 앉아야 하고, 그러려면 먼저 윗 분의 신임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상부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상 부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벗들의 신용을 얻어야 한다. 벗들의 신용을 얻으려면 어버이의 신용을 얻어야 한다. 어버이의 신용을 얻으려면 성실해야 한다. 자신을 성실하게 마드는 길은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선(善)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선을 똑똑히 모 르고서는 자신에 성실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용은 입신출세의 근본이 성(誠)에 있음을 강조한다. 덕이 있는 자만이 위정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기초로 한 표현이다.

또, 중용은 위정자의 도로 구경(九經)을 든다. 자신의 덕을 닦으면(修身) 도가 확립된다. 훌륭한 인재를 존중하면(尊賢) 현혹되지 않는다. 어버이를 어버이답게 받들면(親親)사람들이 원망하지 않는다. 낮은 신하들의 처지를 이해해주면(體群臣) 그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임금 의 은혜에 보답하려 한다. 서민을 자식과 같이 아끼면(子庶民) 백성들의 격려를 받는다. 기 술자들을 오게 만들면(來百工) 재정이 넉넉해진다. 먼곳의 사람들을 순하게 만들면(柔遠人) 사방에서 귀순해온다. 제후들이 따르도록 만들면( 諸候) 온 천하가 두려워한다.

중용은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아홉가지의 도가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행하게 하는 길은 하나라고 하였다. 그 하나가 성(誠)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성)을 갖추고서 (구경)을 행하면 천하정치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중용의 교육사상

중용의 교육사상은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요점만 말하기로 한다. 첫째, 중용은 교육의 의의가 (도를 닦는(修道之謂敎) 데에 있다고 하였다. 도는 곧 인도 (人道)로써 도덕을 말하는데, 이는 곧 중화(中和)를 이루고 성(誠)을 체득함이다. (성)은 도 덕의 궁극적 목적이며 교육수양의 표적인 것이다.

둘째, 수양의 방법으로 중용은 존덕성과 도문학을 들고 있다. 자신의 양심을 존중하고, 열 성으로 배우고 생각하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을 실제로 행동하면(先知後行) 도를 알게 되고 (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용은 또 거의 교육전능(敎育全能)의 사상을 보여준다. 언제 알게 되는가 하는 것은 사람 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 도달점은 모두 같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공자는 하우불이(下愚不移) 라 하였지만, 중용은 모두가 다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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