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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존자전(竹尊者傳)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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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존자전(竹尊者傳)

죽존자는 위수나 소상강가에 노닐면서 서리나 눈에 단련되어 기골이 청신하였다. 존자의사진인 사군자의 대나무 그림을, 세상에서 보배로 여긴다. 존자의 덕이 뛰어남을 다 말할 수 없지만, 대략 열 가지가 있다.

① 나자마자 우뚝 자라고,

② 늙을수록 굳세고,

③ 조리가 곧고

④ 성품이 맑고 싸늘하며

⑤ 소리가 사랑스럽고

⑥ 외모가 볼 만하고

⑦ 마음이 비어 사물에 잘 대응하고

⑧ 절개를 지켜 추위를 잘 참고,

⑨ 맛이 좋아 사람의 입맛을 기르고

⑩ 재질이 좋아 세상에 이로움이 된다

고 하여 이 대의 속성과 성의 이치를 대비하면서 작자는 선문답으로 서술하였다.

예를 들면 해안의 외로운 곳 보타락가산에서 무슨 불사를 돕느라고 바위 사이에서 있느냐 하니 대답하되, 날마다 감로에 젖고 때때로 범음(梵音)을 내어 속세를 떠나 자연을 돕고 큰 자비의 마음을 돕는다고 하였다.

끝에 실린 찬시에서는

내가 죽존자를 사랑함은

추위와 더위를 용납하지 않음이라

시간이 갈수록 절개 굳세지고

세월 깊을수록 마음은 비는구나.

달 아래맑은 그림자 노닐고

바람에 불리는 부처의 말씀

하얗게 눈을 머리에 이고는

뛰어난 운치 총림에 났도다.

내가 죽존자를 아끼는 것은

추위와 더위를 물리치고,

해가 갈수록 절개 굳세며,

날이 지날수록 마음 비우고,

달빛 아래 맑은 그림자 만들어내며,

부처님의 말씀 바람에 전하고,

백설을 머리 위에 휘날리며,

숲속에 빼어난 자태 드러내기 때문이라

 

我愛竹尊者 아애죽존자

不容寒暑侵 불용한서침

年多彌勵節 연다미려절

日久益虛心 일구익허심

月下弄淸影 월하롱청영

風前送梵音 풍전송범음

晧然頭戴雪 호연두대설

標致生叢林 표치생총림

라고 하였다.

요점 정리

연대 : 고려시대(불분명)

작자 : 혜심

성격 : 교훈적, 불교적, 예찬적

주제 : 대의 기품을 예찬

내용 연구

 

가전체 작품의 일반적인 특징처럼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대나무의 높은 기품과 비교,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들을 풍자한 것으로, 고명한 선사의 작품답게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와 선문답이 색다른 흥미를 자아낸다.

이해와 감상

 

고려시대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彗諶)이 지은 가전체 작품으로 창작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작품의 끝에 찬시(讚詩)를 덧붙이면서 '기축년 겨울'에 찬시를 짓는다고 하였으므로 기축년인 1229년에 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가전체 작품을 남긴 고려의 대표적 문인 임춘(林椿)·이규보(李奎報) 등의 활동 시기와 비슷하다. 이 작품은 1940년 월정사(月精寺)에서 간행된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에 부록되어 세상에 알려졌는데 권상로(權相老)가 수집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끝에 찬시를 붙여 가전문학의 단순한 풍자성을 초월하여 자연사물에서도 불교의 법리를 깨달으려는 선사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죽존자전

 

고려 중기에 혜심(彗諶, 眞覺國師)이 지은 가전체소설. 대나무를 의인화한 것이다. 작자는 당시에 선종(禪宗)인 조계종의 제2세로 이름 높은 선사였다. 대나무의 고결한 성격을 사랑하여 작품을 선사들의 선(禪) 문답으로 구성하고 있다.

〈죽존자전〉의 창작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혜심은 임춘(林椿)이나 이규보(李奎報)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 그러므로 임춘의 〈국순전 麴醇傳〉·〈공방전 孔方傳〉과 이규보의 〈국선생전 麴先生傳〉·〈청강사자현부전 淸江使者玄夫傳〉과 함께 가전체문학 형성기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작품의 끝에 기축년 겨울에 찬시를 짓는다 하였다. 그러므로 기축년(1229)으로 짐작할 수 있다. 1940년 월정사(月精寺)에서 간행한 활자본 ≪진각국사어록 眞覺國師語錄≫에 부록되어 있으며 권상로(權相老)의 수집으로 되어 있다.

〈죽존자전〉의 죽존자는 위수(渭水)나 소상강(瀟湘江)가에 노닐면서 서리나 눈에 단련되어 기골이 청신하였다. 존자의 사진인 사군자의 대나무 그림을 세상에서 보배로 여긴다.

죽존자의 덕이 뛰어남을 다 말할 수 없다. 대략 열 가지가 있다. ① 나자마자 우뚝 자랑다. ② 늙을수록 굳세다. ③조리(條理)가 곧다. ④ 성품이 맑고 싸늘하다. ⑤ 소리가 사랑스럽다. ⑥ 외모가 볼만하다. ⑦ 마음이 비어 사물에 잘 대응한다. ⑧ 절개를 지켜 추위를 참는다. ⑨ 맛이 좋아 사람의 입맛을 기른다. ⑩ 재질이 많아 세상에 이로움이 된다〈죽존자전〉은 대의 속성과 선의 이치를 대비하면서 선문답으로 서술하였다.

해안의 외로운 곳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에서 무슨 불사(佛事)를 돕느라고 바위 사이에 서 있느냐 물었다. 날마다 감로(甘露)에 젖고 때때로 범음(梵音)을 내어 속세를 떠나 자연을 돕고 큰 자비의 마음을 돕는다고 대답하였다.

〈죽존자전〉의 끝에 가서 혜심이 시로 대나무를 예찬하였다. “내가 죽존자를 사랑함은/추위와 더위를 용납하지 않음이라/시간이 갈수록 절개 굳세지고/세월 깊을수록 마음은 비는구나/달 아래 맑은 그림자 노닐고/바람에 불리는 부처의 말씀/하얗게 눈을 머리에 이고는/뛰어난 운치 총림에 났도다 (我愛竹尊者 不容寒暑侵 年多彌勵節 日久益虛心 月下弄淸影 風前送梵音 皓然頭戴雪 標致生叢林).”라고 하였다.

〈죽존자전〉은 작품 끝에 찬시를 붙여 가전문학의 단순한 풍자성을 초월하여 자연사물에서도 불교의 법리를 깨달으려는 선사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眞覺國師語錄, 無衣子詩集(韓國佛敎全書 6, 東國大學校韓國佛敎全書刊行委員會 編, 1984), 韓國의 禪詩-高麗篇-(李鍾燦, 二友出版社, 1985), 高麗時代 禪의 文學的 位置(李鍾燦, 李丙疇先生回甲紀念論叢,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혜심

 

1178(명종 8)∼1234(고종 21). 고려 후기의 승려. 성은 최씨(崔氏).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전라남도 나주 출신. 완(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어머니가 하늘의 문이 열리는 꿈을 꾸고 또 세 번이나 벼락 맞는 꿈을 꾼 다음 그를 낳았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출가하기를 청하였으나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고 유학(儒學)에 힘쓰라 하였다. 그러나 항상 불경을 생각하고 주문을 외워 힘을 얻었다. 무당집과 사당을 허물기를 좋아하고, 가끔 사람들의 병을 다스리면 효험이 있었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보(病報)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인척형인 배광한(裵光漢)의 집에서 시병(侍病)하였다. 그 때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었는데, 어머니는 그 꿈에 여러 부처와 보살들이 사방에 두루 나타나는 것을 보고 꿈을 깨자 병이 나았다.

그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당시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修禪社)를 만들어 사람들을 크게 교화시키고 있던 지눌(知訥)에게 나아가 재(齋)를 올려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빈 다음, 곧 머리를 깎고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전날 밤 지눌은 설두중현선사(雪竇重顯禪師)가 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상히 여겼는데 혜심이 찾아왔으므로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이 때부터 혜심은 힘써 정진하였다. 오산(蜈山)에 있을 때에는 어떤 바위 위에 앉아 밤낮으로 선경을 익혔고, 오경(五更)만 되면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소리가 매우 우렁차 10리 밖까지 들렸으며, 조금도 때를 어기지 않아 듣는 사람들이 그로써 아침이 된 줄을 알았다.

또,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에 있을 때 연좌대(宴坐臺) 위에서 좌선(坐禪)하고 있었는데, 눈이 내려 머리까지 쌓여도 꼼짝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죽었나 의심하여 흔들어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1205년(희종 1) 가을, 지눌이 억보산(億寶山)에 있을 때 혜심은 선객 몇 사람과 함께 지눌을 찾아가다가 그 산 밑에서 쉬었다.

그 때 1,000여 걸음 밖에 있는 암자에서 지눌이 시자(侍者)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혜심이, “아이 부르는 소리는 송라의 안개에 떨어지는데, 차 달이는 향기는 돌길의 바람에 풍겨오네(呼兒響落松蘿霧 煮茗香傳石徑風).”라는 게송을 지었다. 지눌을 만나 이 게송을 보였더니 지눌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중의 부채를 주었다.

혜심은 또 게송을 지었다. “전에는 스승의 손에 있더니 지금은 제자의 손 안에 있네. 만일 더위에 허덕이며 다닐 때면 맑은 바람 일으킨들 그 어떠하리(昔在師翁手裏 今在弟子掌中 若遇熱忙狂走 不妨打起淸風).” 지눌은 그 재능을 더욱 중히 여겼다.

또, 어느날 지눌을 따라 길을 가는데, 지눌이 헌신짝을 가리키며 “신은 여기에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하자, 혜심은 “왜 그때에 보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또, 지눌이 조주(趙州)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話頭)와 대혜(大慧)의 ‘열 가지 병(十病)’을 들어 물었다.

대중이 모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혜심은 “세 가지 병을 앓는 이라야 그 뜻을 알 것입니다.” 하였다. 지눌이 다시 “세 가지 병을 앓는 사람은 어떤 곳으로 숨을 쉬는가?” 하고 묻자 혜심은 손으로 창을 한 번 내려쳤다.

지눌은 크게 웃으며 혜심을 남몰래 불러 다시 여러 가지를 점검한 다음,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그대는 불법(佛法)을 임무로 삼아 본래의 서원을 바꾸지 말라.” 하였다.

1208년 지눌이 그에게 수선사의 사주(社主) 자리를 물려주고 규봉산(圭峰山)으로 돌아가 쉬려 하였다. 그러나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여러 해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1210년 지눌이 입적(入寂)하자 문도들이 나라에 건의하여 혜심은 수선사를 계승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가 수선사로 돌아가 개당(開堂)하니 많은 수행자들이 모였고 강당은 비좁았다. 1212년 강종이 이 말을 듣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증축하게 하고, 여러 번 중사(中使)를 보내어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수선사를 넓혔다.

그리고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만수가사와 마납(磨衲:법복의 하나) 각 한 벌과 향·차·보병(寶甁) 등을 내리며, 또 법요(法要)를 구하였으므로 혜심은 ≪심요 心要≫를 지어올렸다.

 

그 뒤 그의 도(道)를 사모하여 문하로 모이는 수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당시 문하시중 최우(崔瑀)도 그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서울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두 아들을 보내어 그를 모시도록 하였다.

고종은 왕위에 올라 혜심에게 선사(禪師)를 제수하고 다시 대선사(大禪師)로 올렸는데, 시험을 치르지 않고 바로 승려의 벼슬에 오른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1219년(고종 6) 왕이 단속사(斷俗寺) 주지로 명하였을 때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이듬해 부임하였다.

1233년 겨울에 수선사에 있으면서 병이 나자 왕은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다. 이듬해 봄에 월등사(月燈寺)로 옮겼는데, 하루는 제자들에게 “나는 오늘 고통이 매우 심하다.”고 하였다.

그 까닭을 묻자 “어떠한 고통도 이르지 못하는 곳에 따로이 한 건곤이 있다. 묻노니 그곳은 어떠한 곳인가? 크게 고요한 열반의 문이니라(衆若不到處 別有一乾坤 且問是何處 大寂涅槃門).” 하며 얼마 뒤 열반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1234년 6월 26일에 문인들을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부탁한 뒤 마곡(麻谷)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 하였다. 마곡이 그 까닭을 묻자, 다시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 하였다.

마곡이 멍하니 있을 때 빙그레 웃으며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하였다. 나이 56세, 법랍 32세였다. 이튿날 월등사 북쪽 봉우리에서 화장하고 사리를 모아 수선사로 가져갔다.

왕은 매우 슬퍼하며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浮屠)의 이름을 원조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하였다. 부도는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이규보(李奎報)가 찬한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는 전라남도 강진군 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현재 비문은 잔비(殘碑)만이 전해 오고 있으며, ≪동국이상국집≫·≪동문선≫·≪조선금석총람≫ 등에 그 글이 수록되어 있다. 문인에는 몽여(夢如)·진훈(眞訓)·각운(覺雲)·마곡 등이 있다. 그는 지눌의 충실한 조술자(祖述者)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고려 선가(禪家)의 위치를 철저히 굳힌 인물이다.

한편으로 권력의 주위에 맴돌며 세속적 명예에 눈이 어두워 서로 헐뜯고 다투는 수라장 속에 뛰어든 많은 승려들의 잘못에 경종을 울렸으며, 한편으로는 주술적 타력의존(呪術的他力依存)의 폐습에 잠겨 불도(佛道)의 타락을 스스로 불러오던 고려왕실 주변의 그릇된 신앙풍조를 타파하는 중대한 교화의 구실을 하였다.

한번도 서울의 땅을 밟은 일이 없는 그가 한 나라의 존중을 받았던 사실은 그의 이러한 일면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혜심의 고원한 선문(禪門)이 많은 일반 백성들에게 알기 쉽도록 이해되었는지는 의문이나, 무인집권 당시와 몽고족의 고려지배 이전 시기에 있어 혜심과 그 제자들이 건재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민족정신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긍정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저서로는 ≪선문염송집 禪門拈頌集≫ 30권, ≪심요≫ 1편, ≪조계진각국사어록 曹溪眞覺國師語錄≫ 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 狗子無佛性話揀病論≫ 1편, ≪무의자시집 無衣子詩集≫ 2권, ≪금강경찬 金剛經贊≫ 1권, ≪선문강요 禪門綱要≫ 1권이 있다.

≪참고문헌≫ 曹溪眞覺國師語錄, 東文選, 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19),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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