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옹설(舟翁說)
by 송화은율주옹설(舟翁說)
손(客)이 주옹(舟翁)에게 묻기를,
"그대가 배에서 사는데, 고기를 잡는다 하자니 낚시가 없고, 장사를 한다 하자니 돈이 없고, 진리(津吏) 노릇을 한다 하자니 물 가운데만 있어 왕래(往來)가 없구려. 변화 불측(不測)한 물에 조각배 하나를 띄워 가없는 만경(萬頃)을 헤매다가, 바람 미치고 물결 놀라 돛대는 기울고 노까지 부러지면, 정신과 혼백(魂魄)이 흩어지고 두려움에 싸여 명(命)이 지척(咫尺)에 있게 될 것이로다. 이는 지극히 험한 데서 위태로움을 무릅쓰는 일이거늘, 그대는 도리어 이를 즐겨 오래오래 물에 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으니 무슨 재미인가?"
하니,
주옹이 말하기를,
"아아, 손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대개 사람의 마음이란 다잡기와 느슨해짐이 무상(無常)하니, 평탄한 땅을 디디면 태연하여 느긋해지고, 험한 지경에 처하면 두려워 서두르는 법이다. 두려워 서두르면 조심하여 든든하게 살지만, 태연하여 느긋하면 반드시 흐트러져 위태로이 죽나니, 내 차라리 위험을 딛고서 항상 조심할지언정, 편안한 데 살아 스스로 쓸모 없게 되지 않으려 한다.
하물며 내 배는 정해진 꼴이 없이 떠도는 것이니, 혹시 무게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 모습이 반드시 기울어지게 된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끔 내가 배 한가운데서 평형을 잡아야만 기울어지지도 뒤집히지도 않아 내 배의 평온을 지키게 되나니, 비록 풍랑이 거세게 인다 한들 편안한 내 마음을 어찌 흔들 수 있겠는가?
또, 무릇 인간 세상이란 한 거대한 물결이요, 인심이란 한바탕 큰 바람이니, 하잘것없는 내 한 몸이 아득한 그 가운데 떴다 잠겼다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한 잎 조각배로 만 리의 부슬비 속에 떠 있는 것이 낫지 않은가? 내가 배에서 사는 것으로 사람 한 세상 사는 것을 보건대, 안전할 때는 후환(後患)을 생각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느라 나중을 돌보지 못하다가, 마침내는 빠지고 뒤집혀 죽는 자가 많다. 손은 어찌 이로써 두려움을 삼지 않고 도리어 나를 위태하다 하는가?"
하고, 주옹은 뱃전을 두들기며 노래하기를,
"아득한 강바다여, 유유하여라.
빈 배를 띄웠네, 물 한가운데.
밝은 달 실어라, 홀로 떠 가리.
한가로이 지내다 세월 마치리."
하고는 손과 작별하고 간 뒤, 더는 말이 없었다.
요점 정리
연대 : 조선 초
갈래 : 한문 수필
작자 : 권근
성격 : 비유적, 교훈적, 계몽적, 역설적
제재 : 뱃사람의 삶
주제 :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삶의 태도, 늘 경계하며 사는 삶의 태도의 필요성, 조심하고 경계하는 삶의 태도의 중요성
구성 :
손의 물음
- 주옹이 배위에서 사는 까닭 - 주옹의 삶에 대한 의문
주옹의 대답
-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함- 자기 삶의 의미 설명
- 늘 경계하며 사는 삶의 자세 - 삶의 의미 확장
주옹의 대비 |
|
강물 위 |
평탄한 땅 |
위태로움 |
안일하고 편안함 |
늘 대비함 |
나태해짐 |
위험을 견딤 |
위험을 견디지 못함 |
특징 : 편안함에 젖어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삶에 대한 경계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 역설적 발상을 통해 일반적인 삶의 태도를 비판함. 허구적인 대리인을 설정하여 작가의 생각을 전달함.
줄거리 : 손(客)과 뱃사람의 대화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의 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뱃사람은 물 위에 사는 것처럼 늘 조심스러운 생활 태도를 지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출전 : 동문선
내용 연구
손(客)[질문자, 주옹의 대답을 이끌어 내는 역할. 일반적인 상식을 갖고 있음]이 주옹(舟翁)[배에서 사는 사내, 뱃사람]에게 묻기를,
"그대[주옹]가 배에서 사는데, 고기를 잡는다 하자니 낚시가 없고, 장사를 한다 하자니 돈이 없고[경제 활동을 하기 위해 배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님], 진리(津吏)[나루터를 관리하는 벼슬아치] 노릇을 한다 하자니 물[위태로운 공간 ↔ 땅] 가운데만 있어 왕래(往來)가 없구려[고기를 잡는다 ~ 왕래가 없구려 : 고기를 잡는 것도 아니고,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니다.]. 변화 불측(不測)[끊임없이 달라져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음]한 물에 조각배 하나를 띄워 가없는[가이없다, 끝이 없다, 다함이 없다] 만경(萬頃)[만경창파(萬頃蒼波)의 준말로 끝없이 넓은 바다]을 헤매다가, 바람 미치고 물결 놀라 돛대는 기울고 노까지 부러지면[백척간두, 풍전등화, 누란지위], 정신과 혼백(魂魄)[넋]이 흩어지고[혼비백산] 두려움에 싸여 명(命)이 지척(咫尺)[가까운 거리]에 있게 될 것이로다[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될 것이다 / 명재경각]. 이는 지극히 험한 데[물, 배위에서의 삶]서 위태로움을 무릅쓰는 일이거늘[위태로운 것을 뻔히 알면서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거늘], 그대는 도리어 이를 즐겨 오래오래 물에 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으니 무슨 재미인가?"['주옹'이 위태로운 물에서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손'의 질문]
하니, - 손(客)이 뱃사람의 생활에 의문을 품고 질문함
주옹[답변자, 뱃사람, 작가의 생각을 전달하는 허구적 대리인]이 말하기를,
"아아, 손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대개 사람의 마음이란 다잡기[다그쳐 바로잡기]와 느슨해짐이[긴장과 이완] 무상(無常)하니[늘 변하니], 평탄한 땅[평안한 공간 ↔ 물, 배 위]을 디디면 태연하여 느긋해지고, 험한 지경에 처하면 두려워 서두르는 법이다. 두려워 서두르면 조심하여 든든하게 살지만[유비무환], 태연하여 느긋하면 반드시 흐트러져 위태로이 죽나니[안일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내 차라리 위험을 딛고서 항상 조심할지언정[주옹의 역설적 발상], 편안한 데 살아 스스로 쓸모 없게 되지 않으려 한다[편안한 생활만을 추구하는 세태 비판]. - 뱃사람이 지닌 삶의 태도
하물며 내 배[주옹과 동일시되는 대상]는 정해진 꼴이 없이 떠도는 것이니, 혹시 무게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 모습이 반드시 기울어지게 된다[중용을 지키지 못하면 위태로움에 빠지게 됨].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끔 내가 배 한가운데서 평형을 잡아야만[주옹의 중용의 덕] 기울어지지도 뒤집히지도 않아 내 배의 평온을 지키게 되나니[중용을 지키면 위태로움 속에서도 평온을 지킬 수 있음], 비록 풍랑이 거세게 인다 한들[위태로움이 온다해도] 편안한 내 마음을 어찌 흔들 수 있겠는가[내 마음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설의적 표현)]? - 늘 배의 평온을 지키려는 뱃사람의 삶
또[사고의 확장], 무릇 인간 세상[배 - 주옹 / 물결 - 인간 세상]이란 한 거대한 물결이요, 인심이란 한바탕 큰 바람[염량세태]이니[인간 세상이란 ~ 한바탕 큰 바람이니 :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큰 물결처럼 뒤흔들림이 많고, 사람의 마음이란 바람처럼 이렇게도 바뀌고 저렇게도 바뀌는 것이므로 / 변화불측, 변화무쌍], 하잘것없는 내 한 몸이 아득한 그 가운데 떴다 잠겼다 하는 것보다는[속세에 휩쓸려 살아가는 것], 오히려 한 잎 조각배로 만 리의 부슬비 속에 떠 있는 것이 낫지 않은가?[한 잎 조각배로 ~ 낫지 않은가 : 사람 사는 세상보다는 물위에 떠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뜻이다. 물 위에서는 배의 중심만 잘 잡으면 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자기만이 중심을 잡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 인간 세상에 대한 평가] 내가 배에서 사는 것으로 사람 한 세상 사는 것을 보건대, 안전할 때는 후환(後患)[뒷날의 걱정과 근심]을 생각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느라 나중을 돌보지 못하다가, 마침내는 빠지고 뒤집혀 죽는 자가 많다[안일함 속에서 준비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경계]. 손은 어찌 이로써 두려움을 삼지 않고[경계하지 않고] 도리어 나를 위태하다 하는가?"[주옹의 역설적인 답변 / 평정을 잃지 않고 스스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삶의 중요함] - 변화무쌍한 인간 세상이 배 위에서의 삶보다 위태로움
하고, 주옹은 뱃전을 두들기며 노래하기를,
"아득한 강바다여[인간의 한 평생 살아가는 공간], 유유하여라.
빈 배를 띄웠네, 물 한가운데.
밝은 달[자연, 욕심 없는 마음] 실어라, 홀로 떠 가리.
한가로이 지내다 세월 마치리."[균형을 잃지 않고 스스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강조 / 안분지족(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함을 앎.), 무장무애(아무런 장애나 거리낌이 없음), 물심일여(사물과 마음이 구분 없이 하나의 근본으로 통합됨.), 유유자적(속세를 떠나 아무 속박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고 마음 편히 삶)하는 현실에 만족하는 삶의 태도를 지닌 시이다.]
하고는 손과 작별하고 간 뒤, 더는 말이 없었다. - 세상을 살아가는 달관적인 삶의 태도
|
손 |
주옹 |
땅에서의 삶 |
평탄하여 태연하고 느긋하므로 평안함 |
안일하고 방탕하게 살면 위태로움에 빠지게 됨 |
배(물) 위에서의 삶 |
물결이 험하며 지극히 위태로움 |
중용을 지키면 위태로움 속에서도 평온을 지킬 수 있음. |
사고의 방식 |
일반적 상식 |
역설적 발상 |
이해와 감상
짤막한 글이지만 삶의 태도에 관련한 깊은 뜻을 담고 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으면 이 작품의 이해·감상은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야기는 손과 주옹이 주고받는 말로 되어 있다. 여기서 손은 작자의 변형된 모습이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주옹이 누구인지는 알 수도 없고 또 굳이 알 필요도 없다. 그가 배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짐작하면 된다. 실제로 그런 생활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도 이 작품의 이해에는 부질없다. 그 까닭은 이것이 사실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두 가지 의미로 압축되는 요지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하나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로서, 산다는 것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배 같으니 항상 마음을 다잡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는, 거센 풍랑이 일어도 자신이 중심을 잡으면 배가 안전한 것처럼 언제나 자기 삶을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되 자기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문학의 언어는 일상어와 같으면서도 사실을 지시하는 언어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감상의 핵심이다. 배를 타고 물 위에 떠 있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조심할 일과 힘써야 할 일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글은 그것을 풀이해 주고 있어서 '설'이 된다.
심화 자료
평온과 풍랑의 관계
배를 타려면 중심을 잘 잡아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평형이 잘 유지된 다음에야 풍랑이 거세어도 배가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 다음 문장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가 요약적으로 제시된다.
권근(權近 )
1352(공민왕 1) ∼ 1409(태종 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 · 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 소오자(小烏子). 보(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희(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 · 성균관직강 · 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 ( 鄭夢周 ) · 정도전 ( 鄭道傳 )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 :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화친함)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 성균관대사성 · 지신사 ( 知申事 )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 동지공거 ( 同知貢擧 )가 되어 이은 ( 李垠 )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 ( 門下評理 ) 윤승순 ( 尹承順 )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 ( 都堂 )에 올리기 전에 몰래 뜯어본 죄로 우봉 ( 牛峯 )에 유배되었다.
그 뒤 영해 ( 寧海 ) · 흥해 ( 興海 )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 紛 ) ·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뒤에 다시 익주 ( 益州 )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 ( 行在所 )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 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다. 그런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 · 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 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 :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 · 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그리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 ( 應製詩 )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 ( 開國原從功臣 )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 ( 政堂文學 ) ·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 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 佐命功臣 )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 ( 贊成事 )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 ( 申曉 )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독권관 ( 讀卷官 )이 되어 변계량 ( 卞季良 ) 등 10인을 뽑았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 ( 口訣 )을 저정(著定 : 저술하여 정리함)하고, 하륜 ( 河崙 ) 등과 ≪ 동국사략 ≫ 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해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 ( 勸學事目 )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 ( 詞章 )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 ( 李穡 )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 · 김구용 ( 金九容 ) · 박상충 ( 朴尙衷 ) · 이숭인 ( 李崇仁 ) · 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학문적 업적은 주로 ≪ 입학도설 入學圖說 ≫ 과 ≪ 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 ≫ 으로 대표된다. ≪ 입학도설 ≫ 은 뒷 날 이황 ( 李滉 )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 오경천견록 ≫ 가운데 ≪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 ≫ 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 ( 鑄字 )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 ( 經筵 )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했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 불씨잡변 佛氏雜辨 ≫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 양촌집 ≫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설(說)
한문 문체의 하나. 설체는 ‘ 설 ’ 의 자의(글자의 뜻)가 말하듯이 해석과 서술을 주로 하는 문체이다. 다시 말하여 설체는 의리(뜻과 이치)를 해설하는 자기의 의사를 가지고, 종횡억양(縱橫抑揚 : 자유스럽고 분망하게 글을 짓는 것을 이름.)을 가하여 좀더 상세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논체와 크게 다른 점은 없다.
설이라는 명칭은 본디 ≪ 주역 ≫ 설괘(說卦)에서 시작되었다. 한나라 때의 허신(許愼)의 ≪ 설문해자 說文解字 ≫ 도 그 명칭이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문체로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는 동안 설의 이름을 가진 것은 조식(曺植)의 문집 가운데의 2편뿐이다. 이로 인하여 ≪ 문선 文選 ≫ 에서는 설체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고문운동에 편승하여 설체가 새롭게 창안되었다.
한유(韓愈)의 〈 잡설 雜說 〉 · 〈 사설 師說 〉 을 비롯하여 유종원(柳宗元)의 〈 골설 結 說 〉 · 〈 포사자설 捕蛇者說 〉 · 〈 승부설 乘 辣 說 〉 · 〈 적룡설 謫龍說 〉 · 〈 웅설 熊說 〉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도 〈 사설 〉 과 같이 직유적인 것이 있으나 대체로 은유적인 것이 많다.
〈 잡설 〉 4에서는 지우의 어려움을 천리마와 백락(伯樂)의 관계로 다루었고, 〈 포사자설 〉 에서는 폭정의 혹독함을 뱀이나 범보다도 무서운 것으로 비유하였다. 그리하여 설체는 우의적인 작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송나라 때의 소순(蘇洵)에 이르러 이와는 약간의 성격을 달리하는 설체가 등장하였다.
이는 〈 명설 名說 〉 · 〈 자설 字說 〉 로서 〈 중형자문보설 仲兄字文甫說 〉 · 〈 명이자설 名二字說 〉 등이 그것이다. 이 문체는 그러한 이름이나 짓게 된 소이(所以; 이유)를 해설하여 고명사의(顧名思義 : 이름을 보며 그 뜻을 되새김.)를 은근히 강조하는 의미가 있었다. 대부분 문장이 간결한 것이 특색이다.
우리 나라에 〈 명설 名說 〉 · 〈 자설 字說 〉 두 가지 체가 어느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처음으로 우리 문헌에 보인 것은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에서이다. 여기에 〈 경설 鏡說 〉 · 〈 주뢰설 舟賂說 〉 · 〈 슬견설 芒 犬說 〉 · 〈 뇌설 雷說 〉 등 다수의 설체가 수록되었다. 모두 우의적인 작품이다.
〈 경설 〉 은 깨끗한 거울(똑똑함을 드러낸 사람)과 더러운 거울(똑똑함을 감추고 있는 사람)의 두 가지 중에 더러운 거울의 경우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결국 이 설체는 한유나 유종원을 배운 것이라 하겠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설작품이 많이 지어졌다. 강희맹 ( 姜希孟 )의 〈 훈자오설 訓子五說 〉 , 권호문 ( 權好文 )의 〈 축묘설 畜猫說 〉 , 이식 ( 李植 )의 〈 교송설 矯松說 〉 , 김매순(金邁淳)의 〈 작치설 鵲 悉 說 〉 , 이건창 ( 李建昌 )의 〈 응설 鷹說 〉 등이 명작으로 손꼽힌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순을 배운 명설 · 자설 · 호설도 계속 유행되었다. 분량으로 따지면 자설이 제일 많고 다음이 호설이다. 명설은 희귀한 편이다. 자설은 고려조 이곡 ( 李穀 )의 〈 경보설 敬父說 〉 · 〈 심보설 深父說 〉 에서 비롯되었고, 호설은 백문보 ( 白文寶 )의 〈 율정설 栗亭說 〉 · 〈 척약재설 洙 若齋說 〉 에서 비롯되었다.
명설은 조선초 하륜 ( 河崙 )의 〈 명자설 名子說 〉 에서 시작되었는데 설리적인 설체에 비하여 간결한 단편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