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좋은 나라'에 대한 또 하나의 그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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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라'에 대한 또 하나의 그림  /  표정훈

  
좋은 삼각형은 어떤 삼각형일까. 보통 좋은 사람하면 착한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삼각형이라는 기하학적 도형이 착할 수는 없다. 착한 삼각형은 없는 것이다. 요컨데 좋은 삼각형에서 '좋은'이라는 말은 영어의 '웰(well)'에 해당한다. 결코 '굳(good)'의 뜻을 지닌 것이 아니다. 결론을 이야기하면 좋은 삼각형이란 내각의 합이 180도에 보다 근접한 삼각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좋은 삼각형, 곧 완전한 삼각형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듯 싶다. 그것은 당연히 내각의 합이 완전히 180도인 삼각형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런 삼각형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다만 머리로 생각하고 말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제 아무리 정확한 삼각형이라도 그 내각의 합이 180도가 되지는 못한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삼각형인 이상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종 도형들로 가득 찬 수학책을 덮어버려야 하는 것일까. 불완전한 도형들을 '보면서도' 머리로는 그것이 마치 완전한 양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 불편 없이 수학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이성이라 부른다.

완전한 삼각형과 완전한 나라

  플라톤은 삼각형뿐 아니라 국가에 대해서도 그것의 완전한 형태를 찾기를 갈망한다. 곧, 좋은 나라, 더 나아가 가장 좋은 나라, 완전한 나라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자신의 『국가』에서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현실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불완전한 국가들은 별반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는 이미 수학책에 나오는 불완전한 삼각형을 보고서도 이성의 힘으로 거뜬히 삼각형에 관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플라톤이 생각한 완전한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우선 그가 생각한 완전한 나라에는 세 계층이 있다. 첫째로 물질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 계층이 있다. 이들은 주로 농민, 수공업자들이 될 것이다. 둘째로 국가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고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아내는 수호자 계층이다. 요즘의 경찰과 군인 정도가 될 것이다. 셋째로 각고의 훈련과 오랜 교육을 거친 가장 현명한 이들인 통치자들이 있다.


  요컨데 이들 세 계층이 각기 맡은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해 나가는 국가야말로 완전한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자 계층은 철학자이면서 통치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요즘의 철학 교수들과 정치인들을 적당히 섞어놓은 모양새를 지닌 이들은 절대 아니다.


  이들은 사유 재산도, 가정을 꾸미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오르지 공공의 이익만을 위해서자신의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대신에 수호자 계층과 생산자 계층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는 절대로 참여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맡은 일만을 열심히 하면 된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야말로 전체주의 독재국가를 꿈꾼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완전한 나라를 이렇게 생각했을까. 무엇보다도 자신의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이유로 들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권력을 탐하는 정치가들에게 선동당한 어리석은 대중들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가장 지혜로운 이를 무고하게 죽여버리고만 어리석은 대중들에 의해 정치가 좌지우지되는 아테네는 결국 또 하나의 불완전한 나라였을 뿐이다.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이 지금껏 믿어온 신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소크라테스에게 자신들의 독선을 강요했다.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신들의 욕망에 방해가 되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정치가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종교적인 독선과 정치 권력에 대한 욕망이 합세하여 오르지 이성의 힘으로 보고 말하고 행동했던 소크라테스를 죽여버린 것이다.


이러한 스승의 죽음을 제자로서 지켜보았던 플라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모르긴 해도 아테네가 아주 심하게 뒤틀려버린 삼각형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각의 합이 180도에 가깝기는 커녕, 거의 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을 지닌 그런 삼각형 말이다. 사각형같은 삼각형, 이것은 곧 모순이다. 둥그런 삼각형이라는 말이 모순이듯이. 플라톤이 보기에 아테네는 바로 그런 모순을 간직한 나라였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하면 제거해 버릴 수 있을까. 우선 개인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정치를 뜯어 고쳐야 한다. 그것을 위해 가족도 재산도 없는 가장 지혜로운 이들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어리석은 대중들은 정치에서 배제시켜야 한다. 다만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재산의 사유도 철저히 제한되어야 한다. 가장 지혜로운 이들의 지도 아래 각 계층이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나라. 이야말로 철학적인 지혜와 통찰력으로 온갖 모순을 다 제거해 버린, 완전한 삼각형과도 같은 나라가 아닐까.

 동굴의 비유                            

  그렇지만 플라톤이 이런 나라가 쉽게 이룩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 듯 싶다. 『국가』제 7장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보라. 동굴 바깥에 있는 눈부시게 밝은 빛의 세계를 보고 들어온 지혜로운 자는 동굴에 묶인 채 동굴 벽에 비치는 사물의 그림자들을 진실인 줄 알고 있는 죄수들에게 외친다.


"너희들이 보고 있는 것은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진실을 보았다. 그 찬란하게 빛나는 진실을!"


  하지만 죄수들은 합세하여 지혜로운 자를 죽여버린다. 그들이 바라본 동굴 밖은 너무나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그런 것이었을 뿐이다.「결국 진실을 외치는 자의 말은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다.」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야말로 죄수들에게 죽임 당한 지혜로운 자였다.


  진실을 끝끝내 외면하고자 하는 대중들을 눈부심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동굴 바깥으로까지 어떻게 끌고 나갈 수 있을까. 결국 끌고 나가려다가 죽는 것은 애꿎은 철학자들뿐이 아닌가. 차라리 동굴로 돌아오지 말고 홀로 진실의 찬란함을 즐기면 그뿐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바로 통치자와 철학자를 한데 묶어 버리고자한 플라톤 최대의 고뇌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플라톤 자신도 극복하지 못한 '철인(哲人) 통치자'라는 모순을 드러내는 질문이다. 철인이 통치자가 되려다가는 죽기 십상이고, 통치자가 철인이 되려다가는 통치권을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 이것이 현실이다. 철학과 정치, 이성과 현실, 완전한 삼각형과 불완전한 삼각형, 이러한 모든 불일치와 대립항들을 일거에 하나로 통합시켜 버리는, 요술램프에서 튀어나온 거인과도 같은 것이 철인왕이다. 그것은 곧, 눈으로 볼 수 있는 완전한 삼각형이라는 불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결국 플라톤의 '좋은 나라'도 그렇고 그런 불완전한 삼각형들 중의 하나일 뿐일까. 그런 것 같다. 가장 좋은 삼각형은 내각의 합이 180도라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나라가 어떤 나라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불완전한 그림 하나를 그려 보임으로써 대답할 수밖에 없겠기에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수학책에 쓰여진 삼각형의 정의는 어느 곳에서나 같은 데 비하여 좋은 나라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대답들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좋은 나라에 대한 끊임없는 그림 그리기 작업을 멈출 수는 없다. 왜일까? 잘못 그려진 삼각형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뒤틀리고 모순에 가득찬 나라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내 주위의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고통의 느낌 때문에 다시 한 번 좋은 나라의 그림을 그려보는 일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불완전한 나라를 불완전한 나라라고 느끼는 것일까? 곧 고통이라는 감수성을 어떻게 지니게 되었을까? 플라톤은 그것을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우리 인간이 잊어버린 완전한 선(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말한다.(독서와 논리)

『국가』제 7권 '동굴의 비유'란?                

    동굴의 비유는 잘 알려진 내용이다. "한상권의 세상쓰기"에서 소개한 시 '장미의 비유'도 동굴의 비유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그 원문이 길어서 여기에 요약하여 설명한 글을 함께 싣는다(한상권)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의하면, 철학을 알지 못하는 자는 동굴 속에 갇힌 죄수들에 비교되고 있다. 이 죄수는 다만 한 방향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쇠사슬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뒤쪽에는 불이 있고 앞쪽에는 담벽이 있다. 이 죄수들과 벽 사이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는 것은 다만 벽에 비치는 그들 자신의 '그림자'와 그들 뒤에서 움직이는 사물들의 '그림자'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그림자를 '실재(實在)'라고 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들에게 합당한 그 대상에 대한 '개념'을 그들이 가질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어떤 사람이 이 동굴에서 도망쳐 태양빛으로 나가는 데 성공한다. 그는 처음으로 실재의 사물을 보며 자기는 이제까지 그림자에 속아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그가 통치자가 되기에 합당한 종류의 철학자라면, 그는 그가 나온 동굴로 다시 들어가, 전에 함께 속박되었던 그 사람들을 만나 진리에 관해서 가르칠 책임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동굴에서 나오는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설복하기에 곤란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태양광선 속에서 갑자기 어둠 속으로 들어왔으므로 그림자를 그들보다 더 분명히 보지 못할 것이며, 그는 동굴에서 나오기 전보다 더 어리석어진 것처럼 그들에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B. 러셀. 『서양 철학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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