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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기 - 통도사 가는 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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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기 - 통도사 가는 길
조성기의 자성소설에 대해서
김경수

 

 

 


소설이 인간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의사 소통의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점은 한 편의 소설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작가와 독자의 우회적인 대화의 양상에서도 확인되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설론에서 이야기되는 바 이야기의 전달주체로서의 서술자와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피화자 사이의 관계에서도 확인된다. 이렇게 보면 한 편의 소설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과 소설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독서행위 속에서의 서술자와 피화자 사이의 의사소통의 체계는 그 자체로 병행성을 지니며 또한 그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의 확장이거나 축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속해 있는 실제 세계와 그의 대변인격인 서술자가 이끌어 가는 소설 내적인 세계는 엄밀한 의미에서 별개의 세계로 인식되어 왔다. 즉, 그 두 세계는 허구와 실제라는 개념의 차이만큼이나 확연히 구별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 소설의 소설적 관례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들어 우리 소설은 이러한 소설적 관습 자체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하는 징후를 보여주는데, 이른바 자성적인 소설의 대두가 바로 그것이다. 『저문날의 삽화』에 수록된 박완서의 일련의 작품들과 「숨은 꽃」을 비롯한 양귀자의 일련의 소설, 그리고 『천하무적』에 수록된 김남일의 일련의 작품들이 그 단적인 예들이 된다. 이러한 작품들을 일견하면, 독자는 이 작품의 내적인 이야기가 작가의 실제 삶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고 있는 점을 알게 되는데, 그런 까닭에 쉽사리 고백소설이라고까지 부를 만한 징후를 담고 있음도 알게 된다. 고백적인 성향이라는 말에서도 확인되듯, 이들 소설에서는 작가에게 속한 세계와 서술자에 속한 두 세계가 더 이상 닫혀져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침투하거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더 부연하면 이 소설들은 이야기의 주체로서의 서술자와 실제 창작자로서의 작가의 구별 따위를 별로 문제삼지 않고, 마치 독자가 앞에 있는 듯이, 아니면 작가가 그 작품을 읽는 독자 한 사람만을 위해 서술하는 듯이 이야기를 직접 건네는 듯한 화법을 구사하여 소설을 쓰거나 읽는 행위 자체가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작가와 독자의 직접적인 대화와 별로 다름이 없는 것이 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이들 소설이 플롯과 이야기의 배치 등에서 작의에 따른 선별성을 극도로 회피한 채, 시간의 순서대로, 또는 기억에 떠오르는 삽화의 중요도에 따라 자유롭게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조성기의 일련의 작품에서도 우리는 방금 위에서 말한 그러한 자성적인 소설의 면모를 쉽게 읽어낼 수 있다. 「통도사 가는 길」과 「우리 시대의 법정」을 비롯해 1980년 후반에 그가 발표한 소설에서 우리는 소설적 인물 또는 서술자가 실제 작가로 상정되어 있거나 아니면 실제 작가로 유추해도 좋을 만큼 작가의 자전적인 삶의 실상과 친연성을 드러내 보이는 예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작품집 『통도사 가는 길』의 여러 국면에서 우리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 작품 속에서 스스로가 소설을 쓰는 작가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더러는 주저없이 자신의 소설쓰기의 괴로움이라든가 소설에 얽힌 사소한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실, 내가 판사나 변호사가 되지 않고 목사가 되지 않고 작가가 된 것은, 바로 이 여행의 자유를 위함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디 여행의 자유뿐이겠습니까.

나는 배낭 속의 세면도구들과 함께 굴원(原)의 시집이라 할 수 있는 『초사(楚辭)』제1권과 제2권을 넣고 떠났습니다. 명지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책으로, 송정희 교수가 번역을 하였더군요. 일전에 태종출판사에서 하정옥 교수 번역으로 내놓은 굴원 시집은 이미 다 읽었는데, 이번에 또 『초사』를 가지고 간 것은 번역의 차이로 인한 묘미를 느껴보려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번 시집이 더 많은 분량의 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아마 굴원이 지었다고 하는 시는 다 실은 모양입니다.

왜 하필 굴원의 시집을 들고 갔느냐구요. 요즈음 내가 굴원의 생애를 소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의 상태 때문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위 인용문은 그의 작품 「통도사 가는 길」의 도입 부분이다. 인용문이 보여 주듯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스스로를 작가라고 분명하게 내세우고 있고, 더 나아가 자신이 현재 <굴원의 생애를 소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조성기의 연보를 조금이라도 아는 독자라면, 실제로 조성기가 굴원의 생애를 소설화한 『굴원의 노래』를 집필한 적이 있음을 알 것이고, 따라서 이 부분의 진술에서 소설의 주인공을 작가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우리 시대의 법전」이라든가 「우리 시대의 무당」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따라서 조성기의 이런 유형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라도 자신이 읽고 있는 작품이 어떤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일상의 한 모습이라든가 의식의 추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확신을 가질 법하다. 따라서 이런 자성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이 소설이 애초부터 살아 있는 허구적 인물의 창조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통도사 가는 길」과 「우리 시대의 법정」에 등장하는 남성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결코 총체적이기를 지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파편적인 사실들을 그때그때 제시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작가가 소설에서 살아 있는 인물의 모습을 형성하기를 포기했다면 그것은 작가 스스로가 소설 내의 인물을 적어도 자신에게서만큼은 자명한 것으로, 그래서 별다른 인물화의 기법이 요구되지 않는 인물로 설정했음을 알려주는 징표일 텐데, 이러한 징표는 사실상 위의 조성기의 소설의 특징적인 국면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성소설의 이러한 국면에서 또 하나 우리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은 역시 소설적 리얼리티에 대한 고정관념의 배제다. 「통도사 가는 길」의 경우 전체 이야기는 소설가인 화자가 통도사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인데, 이 경우 부분 부분 작가의 과거의 경험이 산재되어 제시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자신이 <통도사(通道寺)>라고 믿었던 절 이름이 실제로는 通度寺였다는 것을 자각하는 과정이 그 모티브가 되어 있다. 사실상 이 같은 소설의 전개과정은 그것 자체를 주제로 하기에는 뼈대가 약한 이야기의 전개다. 그러나 조성기는 그것에 만족한다. 모티프의 주제로의 연장이라는 말이 여기서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의 소설에서 작가의 관심이 더 이상 이야기의 구축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어떤 언어에 대한 자신의 경험내용, 또는 개인의 의식 자체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철저히 주관적인 경험내용이며, 그래서 작가 자신도 그것의 리얼리티를 수용될 만한 리얼리티로 형상화하고자 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에서 보자면 이것은 개연성 없는 이야기로 폄하될 만하지만, 그러나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구축의 의의를 따지자면, 그것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고 비난할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문의 맨 마지막 진술도 보여주듯이, 인물로 설정된 작가 스스로도 자신이 통도사로 가는 여행길에 굴원의 시집을 가지고 가게 된 그 심리적 동인(動因)에 대해서 <무엇보다 내 마음의 상태 때문>이라는 답변 외에는 마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소설 전편을 통해 결코 밝혀지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인 소설의 플롯 구축의 필요성에 준하자면 오히려 위와 같은 진술은 작품 자체의 구조적 완결성을 스스로 해치는 발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성기는 그러한 약점을 알면서도 굳이 그러한 진술을 끼워 넣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하나의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 「영화구경」이라든가 「공습경보」「여자의 눈」과 같은 작품들이다. 「영화구경」은 제목 그대로 주인공 화자가 자신이 본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념을 별다른 형식의 구애 없이 풀어 적고 있는 작품이다. 아니 오히려 소설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영화 에세이라고 해도 무방한 작품이다. 작품에서 독자들은 화자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다. 그의 나이라든가 외모 등은 철저히 괄호 속에 넣어져 있고 그의 성향마저도 파악하지 못한다. 단지 가능한 것이라고는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의 내용과 그에 대한 그의 사념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말 그대로 에세이일 따름이다. 이야기의 형태 자체가 최소한의 허구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경우는 다소 다르지만, 거기에 그려져 있는 내용의 도입과 전개의 맥락을 보면 「공습경보」와 「여자의 눈」또한 에세이풍의 자유로운 서술의 연장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분을 보자.

1) 일 분 동안 평판하게 울려야 하는 경계경보였다. 나는 그 경계경보가 울리고 있을 때 사당동 대로의 인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사이렌은 아마 오디세이아의 항해에 나오는 그 세이렌(Seiren)에서 따온 말일 것이다. 오디세이아는 태양의 소들이 살고 있는 섬으로 가는 도중에 사이렌의 섬을 지나가게 되었다. 사이렌은 상반신은 여자요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한 바다의 인어들이었다. 그 인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정신이 홀려 바다로 뛰어들고 마는 것이었다. 바다로 뛰어든 자들은 모두 익사하고 말았고 사이렌들은 그 시체의 해골로 둑을 쌓아나갔다.

2)아무튼 그 청량리 극장에서 만난 여자를 떠올리면, 시시각각 다른 분위기로 바뀌던 동그란 눈망울이 맨 먼저 떠오른다. 어쩌면 여자들은 어떤 종류의 여자이든 눈망울로 추상화하면, 창녀이든 수녀이든 내 의식 속에서는 분위기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종류에 있어선 아무런 구별이 없게 된다.

얼마 전 에이에프케이엔 미군 방송에서 에이즈 문제로 긴급토론 프로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그 프로는 미국 본토에서 제작된 것을 복사해 와서 방영해 주는 것으로 거기에 나온 사람들은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인물들이었다.

위 인용 가운데 1)은 「공습경보」 도입 부분의 한 대목이고 2)는 「여자의 눈」의 중간 대목이다.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닥친 거리에서의 민방위훈련경보에 대한 반응을 토대로 이야기를 꾸며가고 있는 이 작품에서 화자는 사이렌 소리를 듣고 위와 같은 사념에 빠진다. 그리고 뒤이어 오디세이아와 사이렌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를 패러프레이즈하고 있는 이러한 이야기는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전체 이야기의 전개와 그다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따라서 전체 이야기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패러디한 것이면 모르되,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작가 개인이 스스럼없이 첨가시켜 놓은 부분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여자의 눈」또한 마찬가지이다. 인용 부분 중 강조된 단어들이 소설 속에서 하는 기능이 이른바 플롯의 요구로부터의 일탈로 지향하는 의도를 드러낸다는 것은 자명하며, 앞 두 사건의 연결의 방식 또한 어떤 소설적 완고함으로부터는 이미 벗어나 있는 상태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독자들에게는 어떠한 특성으로도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그(인물)가 언젠가 한번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는 것이고,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마련된 별개의 사건들을 소설적으로 <그럴듯하게> 연결지을 의사를 애써 감추지 않은 채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조성기 소설의 이러한 자연스러움, 즉 플롯의 요구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 여러 삽화들의 내연적 연쇄(이것은 작가가 소설을 쓸 때부터 이미 존재했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자유로운 구성이라도 그러한 구성의 저변에는 이야기를 그렇게 풀어 나갈 수밖에 없었던 무의식적 요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를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버리려는 작의 또한 이미 앞에서 말한 자성소설적 성향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측면이다. 이러한 자성소설의 면모가 엄격하고 완고한 플롯 구축을 통해 <제2의 현실>을 창조하려는 의도로부터 벗어나 아주 사소하거나 일상적인 리얼리티를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관의 산물인 것 또한 분명하다. 기존의 많은 소설들이 <살아 있는 인간> 또는 <대표성을 띤 총체적인 인간상>이라는 환상에 기대어 오히려 삶의 대표성을 간직한 작은 특성과 성향들을 애써 무시해 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성기의 소설이 내보이는 소설적 징후는 특히 인물 이해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소설을 이해하는 데 인물 이해는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독서의 관행상 소설 속의 인물 이해는 많은 경우 소설 속에 드러나 있는 정보의 총량으로만 설명되지, 몇몇 삽화와 화행, 또는 말실수와 같은 부분들의 저변 해석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깊이라든가 의식의 병적인 국면들을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리 활발하지 않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조성기의 소설은 최소한 자성적인 소설의 경우에, 인물에 대한 정보 제공의 수준을 작위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자연스런 심리적 추이에 대한 독자들의 적극적인 이해의 노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라도 되새겨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인물 의식의 자연스런 추이와 그것을 통한 대화의 시도라는 점에서 「통도사 가는 길」과 「우리 시대의 법정」과 같은 소설은 다시 한번 거론할 만하다. 그것은 많은 다른 자성소설들이 그러하듯, 조성기의 소설 또한 독자들도 이미 친숙한 많은 사회적 정황에 대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아니라 자신에게로 향하는 마음의 무늬를 재현하는 데에 스스럼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의 법정」에서 부천 성고문 사건의 법정 심리를 목격하고 난 후 주인공 소설가가 내보이는 아래와 같은 사념은, 주인공-소설가의 소설쓰기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까지를 단적으로 환기시켜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 아버지처럼 나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 있거나, 어머니처럼 친척이 재판을 받는 일이 있거나 하기 전에는 법정에 다시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우리 시대  법정에서의 방청이라는 것은, 단순히 보고 듣는 방청이 아니라 가슴 에이는 아픔으로 동참해야 하는 방청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똑똑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십자가를 끌지 않고 지게 될 날이 있을 때, 법정에 가득한 아픔과 분노에 함께 동참할 자신이 생겼을 때, 나는 진정한 방청객으로 방청석에 앉아 있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때는 피고석이나 증인석에 있게 되지 않을까.

위 소설의 경우 주인공이 「통도사 가는 길」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설가로 제시되어 있고 또 그 이야기 전개가 별다른 소설적 구성 없는 소설가의 경험담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독자들은 위와 같은 인물의 의식을 소설 밖의 작가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내밀한 목소리로 간주해도 별 무리가 없다. 그리고 사실상 위와 같은 진술은 작가 개인의 대사회적 발언 자체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조성기의 자성적 소설의 경향이 궁극적으로는 스스로가 처한 현실의 특별한 조건 속에서 작가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문제 삼으려는 의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필자가 이미 다른 글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이러한 자성소설에서 추구되는 가장 소중한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설 밖의 세계와 소설 안의 세계를 경계없이 연관지으려는 이러한 글쓰기가 작가로 하여금 실제 자신을 향한 반성적 사유를 가능케 하고, 더 나아가서는 소설을 쓰는 작가의 행위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소설 자체에 대한 작가의 제반 의문까지도 하나의 시선 속에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들로부터 우리는 조성기의 일군의 소설이 허구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작가인 자기 스스로를 인물화하여, 허구의 맥락을 단지 <삽화> 정도로 최소화시키는 가운데 경험현실의 사실성(事實性)을 최대한도로 유지하면서, 그 속에서 작가라고 하는 자신의 사회적 실존을 전경화시키거나 아니면 글쓰기 자체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내는 자성소설의 면모에 적절하게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적 현실과 바깥 현실을 어느 모로든 연관지으려는 이러한 소설적 의도는 시대적인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법정」에서 상정된 것처럼, 마치 허구처럼 전개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자체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통도사 가는 길」에서처럼 그러한 현실 속에서 소설을 통해서 밖에 자신의 실존을 확인할 수 없는 작가로서의 자의식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조성기와 유사한 자성소설을 썼던 몇 작가들의 작품들을 검토해 보면 보다 소상하게 드러날 문제이지만, 최소한 조성기의 경우에 한정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의 이러한 글쓰기가 소설의 위기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타개책으로서 마련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전에 펴낸 그의 작품집 『통도사 가는 길』에서, 작가 자신이 그러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기 소설의 수필적 경항에 대해서 작가는 작품집의 말미에서, 자신의 소설이 드러내는 위와 같은 특징들을 수필기법 또는 에세이즘이라고 명명하면서 무질의 작품에 대한 페터 지마(Peter Zima)의 논의를 끌어들여 그러한 에세이즘의 소설의 위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프로파간다처럼 소설 속에서 오고 갔던 우리의 1980년대는 다름 아니라 우리 시대의 '소설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진술에서 확인된다. 물론 조성기가 소설의 위기를 방증하고 있는 자료인  지마의 논의가 1980년대 후반의 우리 소설을 둘러싼 정황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 없이 현상의 유사성만 가지고 지마의 견해를 그대로 적확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 말한 것처럼 조성기가 소설 속에 차용하고 있는 실제적 현실의 맥락이 지니는 공통점과 그것에 대해 작가가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태도가 다분히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일반적인 반응으로 채색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성기 소설의 그러한 변화가 작가 나름대로 궁지에 처한 소설의 타개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한 양식임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조성기가 최근에 발표한 소설 「모젤 강가의 마르크스」와 같은 작품 역시 여행가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내보이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서 수필적 경향의 글쓰기는 이제 조성기에게는 어느 정도 그만의 소설적 방법론으로 확립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행기라는 양식 또한 1990년대 초반의 우세한 양식으로 동시대 소설들과 변별되는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 테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적 순차와 공간적 순차를 따르면서 전개되는 여행기의 형식 또한 스스로에게 향하는 글쓰기의 전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성기의 소설적 방향이 그 하나로 귀착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책에 수록된 일군의 다른 소설들, 예를 들면 「불일폭포」라든가 「홍소령기」와 같은 작품이 드러내 보이는 실험성 때문이다. 시간 몽타주와 공간 몽타주의 기법을 차용하고 있는 이 몇 편의 소설이 추구하고 있는 세계는 앞서 살펴본 그의 자성소설들과는 또 판이하게 다르다. 이 두 세계가 어떤 긴밀한 상관성이 있는지는 이후의 작가론에서 천착되어야 할 테지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조성기라는 작가가 어떤 소설의 「정격(正格)」에 만족하지 않고 부단히 자기 갱신을 도모하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소설 자체가 항시 자기 갱신을 지향하는 장르인 것을 생각하면 조성기의 이러한 실험정신은 그 자체로 당연하면서도 또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조성기의 최근의 소설세계를 주로 자성소설이라는 각도에서 해명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 과정에서 그의 자성소설이 1980년대 후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군의 자성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동안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실제 세계와 소설 세계 사이의 구분을 문제삼고, 실제 삶의 현실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통해 소설과 삶을 연관지으려는 목적을 드러내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미적인 구조에 대한 해명은 다소 도외시되었지만, 이러한 조성기의 일군의 자성소설이 리얼리스틱한 핍진성을 목적으로 소설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자체의 미학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독자로서 이러한 작품의 독서과정에서 마주치게 마련인 주관적인 리얼리티를 수용하는 문제이다. 특히 그 수용의 태도에 따라 작품의 구조 및 주제적 의미가 큰 폭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자성소설과 더불어 행해지고 있는 조성기 소설의 여러 양상은 아주 주의 깊은 접근을 요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적어도 우리가 조성기의 자성적인 소설의 면모가 새로운 리얼리티를 추구하고자 하는 비관습적인 태도의 연장임을 똑바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1880년대 후반에 대두된 자성소설의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 와중에서 조성기의 소설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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