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죽어라 달린다 / 한홍구
by 송화은율조선은 죽어라 달린다
[벼락출세의 밑천이 됐던 조선인의 두 다리…김구는 왜 손기정 때문에 세번 울었는가]
조선시대에 양반은 절대로 뛰지 않았다. 그냥 뛰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뛰어다니는 사람을 경멸했다. 테니스가 처음 들어왔을 때 미국 영사가 시범을 보이자 신기선(申箕善)이라는 대신이 아니, 아랫것들 시키시지 왜 영감이 직접 뛰어다니시오라고 책망투로 말했다고 한다. 신기선이 꼴보수 수구파였느냐고 천만에, 그는 갑신정변 뒤 개화당의 삼일천하에서 이조판서에 임명될 만큼 갑신정변의 주역들과 가까운 사이였다. 자기들은 달리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양반들은 자기들이 부리는 아랫것들이 빨리 달리는 것은 좋아했다. 그래서 급한 편지 같은 것을 전할 때면 잘 뛰는 종의 팔을 피가 통하지 않도록 꽉 동여매고, 봉인을 한 다음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에야 풀 수 있도록 했다. 전보도, 전화도, 이메일, 오토바이 퀵서비스도 없는 시절, 사람이 죽어라 달려가 급한 기별을 전해야 한 시절, 아랫것들을 함부로 다룬 윗것들의 잔인함이 물씬 배어난다.
[다리가 짧아야 양반, 길면 상놈]
잘 뛰려면 당연히 다리가 길어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다리가 짧아야 양반이고, 다리가 길면 상놈 취급을 받았다. 하루 종일 좌정하고 글을 읽는 것이 기본임무인 양반들은 걸을 일도 적었고, 여러 대에 걸쳐 그러다 보니 다리가 퇴화해 짧아졌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인지야 알 수 없지만,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이 종종 계셨고, 다리가 짧은 아니 앉은키가 큰 필자도 이런 말에 위안을 얻었다. 조선시대의 양반사회에는 오늘날의 롱다리․숏다리와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됐다. 긴 도폿자락이 온몸을 감싸 어디가 다리고, 어디가 허리인지 구분이 안 가는 판에 누가 롱다리고, 누가 숏다리인지는 구분하기도 힘들었고,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다.
개항 이후 세상이 바뀌면서 잘 뛰는 것이 출세의 수단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명성황후로 추존된 민씨가 장호원을 거쳐 충주로 피신해 있을 때 충주-서울의 먼 거리를 하루에 주파하면서 민씨 일족과 왕비 사이의 연락을 담당한 이용익(李容翊)은 한갓 등짐장수에서 일약 고향 인근의 단천부사(端川府使)로 발탁됐다. 이용익만이 아니었다. 왕비 민씨의 가마꾼이던 김성택도 장흥부사가 되었으니, 튼튼한 두 다리가 벼락출세의 밑천이 된 것이다. 그 뒤 이용익은 고종의 측근 가운데 최측근이 되어 고종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내장원경(內藏院卿)으로 당대의 세도가가 됐을 뿐 아니라, 오늘날 고려대학교로 발전한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가 됐으니 아무튼 잘 뛰고 볼 일이다. 군대에서 선착순해본 사람은 다 안다. 잘 뛰는 게 얼마나 복받은 일인지.
이렇게 이용익처럼 잘 뛰어서 출세한 사람이 나오기도 했지만, 여전히 우리 할머니들이나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막 뛰어노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배꺼진다, 뛰지 말아라는 말엔 우리의 가난이, 그리고 달리기는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이용익 같은 등짐장수 출신이 잘 달린 것처럼 몇 가지 특수한 직업은 내내 달려야 했다. 물장수․인력거꾼․신문배달부 등이 그런 직업인데, 일제강점기 초기의 육상대회에서는 이들이 자주 입상했고, 그 때문에 이들은 달리기가 직업인 프로이므로 아마추어 정신에 입각한 스포츠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는 규정이 채택되기도 했다. 근대의 스포츠가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발전해 노동하는 인간들은 아마추어가 아니라는 계급적․귀족적․배타적인 아마추어 정신이 빚어낸 우화였다. 1929년의 조선신궁대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마라톤 영웅 김은배(金恩培)를 따돌리고 우승한 이성근(李成根)도 인력거꾼 출신이었는데, 그 역시 인력거꾼을 그만두고 백마구락부라는 육상동호인 단체에 들어갔기 때문에 간신히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한편 해외로 나간 젊은이들도 달리기를 통해 나라 잃은 섦움을 달랬다. <아리랑>의 김산이 도산 안창호의 주선으로 다른 한국청년 다섯명과 함께 톈진의 난카이(南開)대학에 진학했을 때 일이다. 한국 학생 한 사람이 달리기 시합에 출전했는데, 그는 뛰어난 주자인지라 다른 선수들을 월등히 앞질러 선두를 달렸다. 그가 한국인인 것을 안 한 중국인이 그를 보고 관중석에서 왜놈의 주구(走狗․running dog)는 과연 잘 뛴다라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들은 그는 코스를 바꿔 관중석으로 달려가 그 중국인을 후려쳤다. 때문에 난장판이 됐고, 이 사건의 처리에 항의해 그와 김산 등 한국 청년들은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주구라는 소리에 화가 나 민족을 멸시하는 말을 한 중국인을 후려친 불 같은 성격의 젊은이는 뒤에 중국 영화계의 황제가 된 당대의 미남배우 김염(金焰)이었다.
[왜놈의 주구(走狗)라는 멸시를 뚫고…]
조선인들은 잘 달렸다. 중국인들에게는 왜놈의 주구니까 잘 뛴다라는 편견과 멸시에 가득 찬 소리를 들었지만, 조선인들은 달리기로 일본의 기를 꺾어놓았다. 당시 일본에서 인기를 끈 한신(阪神)중등역전경주대회에서 양정고보는 3연패를 이룩했다. 3연패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김은배는 이어 1932년 LA올림픽에 출전, 6위로 입상해 올림픽 영웅이 되었다. 이 대회에는 혜성 같이 등장한 권태하(權泰夏)도 같이 출전해 9위로 들어왔는데, 권태하는 이 대회가 세 번째 풀코스 완주였다. 청주의 부잣집 출신에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권태하는 처음으로 마라톤에 도전한 LA올림픽 파견 선발 조선예선에서 우승했고, 이어 일본대표 선발에서도 우승해 두번 뛴 마라톤을 모두 우승한 진기록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LA올림픽에 마라톤 코치 겸 선수로 출전한 츠다의 횡포에 불만을 품고 미국에 주저앉아 공부를 계속함으로써 4개월간 3차례 완주로 짧은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이 대회에서 츠다는 5위를 차지했는데, 김은배와 권태하를 페이스 메이커로 삼으며, 절대로 자신을 앞질러 나가지 못하게 했다. 사회 경험이 많은 권태하는 츠다의 말을 무시하고 치고나갔다가 오버페이스를 했고, 나이 어린 김은배는 당시 비공인 세계기록을 갖고 있었지만, 츠다의 강압에 위축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김은배가 아쉽게 6위에 그쳤지만, 당시 신문들은 김은배의 입상과 권태하의 비장한 완주를 대서특필했고, 이들의 상위권 입상은 억눌린 우리 민족에게 민족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작용했다.
1932년 올림픽에서 김은배의 6위 입상은 우리나라가 화려한 마라톤 왕국으로 도약하는 것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1936년의 올림픽을 독일의 베를린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된 것은 나치가 집권하기 전인 1931년이었다. 다음해 집권한 히틀러는 처음에는 올림픽은 유대인들이 지배하는 추악한 잔치라고 비난했으나, 곧 방침을 바꿔 이 대회를 1차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의 중흥과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1936년의 베를린올림픽은 정부가 직접 올림픽 준비의 모든 것을 떠맡아 추진한 것으로, 올림픽의 정치화나 국가의 스포츠를 이용한 정치에서 중대한 분수령을 이루는 대회였다. 이렇게 정치색이 강한 올림픽에서 모든 경기의 꽃이라는 마라톤에는 각국이 모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이 우리의 영원한 영웅 손기정. 그러나 공식기록에 그의 이름은 손기테이이고, 그의 국적은 일본이며, 그의 가슴에는 히노마루가 달려 있었다.
한국 시각으로 1936년 8월9일 밤 11시에 시작된 마라톤의 결과를, 시민들은 신문사 속보판 앞에서 밤을 새우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새벽 2시가 다 돼 손기정의 우승 소식이 전해지고, 이어 남승룡이 3위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한밤중인데도 구름처럼 몰려나와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정작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역대 올림픽의 어느 금메달리스트도 이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시상대에 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의 시인 심훈(沈薰)은 <조선중앙일보>가 발행한 호외 뒷면에 실린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에서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을 울린 기쁜 소식을 듣고는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린 고토의 하늘이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라고 노래하며 이렇게 외쳤다.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이 신문은 사설에서 너무도 오랫동안 승리의 영예와는 연분이 멀어진 조선 민중이 최초의 망연한 경악에 빠지게 됐으며, 이 위대한 환희의 폭풍은 적막한 삼천리 강산을 범람하고 진감시킴에 충분하다고 감격해했다. <동아일보>도 이 사건이 조선의 피를 끓게 하고, 조선의 맥박을 뛰게 했다라고 쓰면서 우리들의 승리를 기뻐했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과 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오해가 있는데, 하나는 일장기 말소가 손기정 선수의 우승 소식이 처음 보도될 때 발생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건의 공로가 마치 <동아일보>에게만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점이다. 요즘이야 뉴욕의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우리의 안방으로 중계되는 세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국내의 신문사들은 변변한 사진 전송시설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올림픽 현장의 사진이 우리 신문에 실린 것은 손기정의 우승 이후 사흘이나 지난 8월13일이었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처음 지워버린 신문은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이 신문의 체육부장 유해붕(柳海鵬)은 양정고보 육상부 출신으로 손기정의 선배였다. 손기정이 처음 양정 유니폼을 입고 뛴 게이힌(京濱)역전경주에서 손기정에게 바톤을 이어받아 우승으로 이끈 마지막 주자가 유해붕이었다. 당시에는 요즘과는 달리 운동선수들도 다 공부를 제대로 해야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문사의 체육담당 기자 가운데는 운동선수 출신들이 많았다. 그는 손기정 선수가 시상받는 사진이 전송돼오자 그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그런데 전송사진이다 보니 원본 자체가 사진이 흐렸고, 인쇄기술도 열악하고, 종이 질도 좋지 않은 시절이라 일장기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손기정 선수의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사진이 흐렸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진에서 일장기가 지워진 것이 고의로 지운 것인지 모른 채 그냥 넘어갔다.
[손기정의 두 다리 사진만 내기도]
총독부 당국은 손기정의 우승에 바짝 긴장했다. 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출판경찰개요>를 보면 당시 언문 각 신문들이 광희난무(狂喜亂舞)하면서 우리들의 승리라고 보도하고, 이에 민중들이 자극되어 민족의식이 한층 대두했는데, 우려할 만한 일이지만 조선인들의 정서상 약간 짐작의 여지가 있다고 보아 관용의 태도를 취해 우리들의 승리 운운 같은 문구를 불문에 부쳤다고 돼 있다. 요컨대 칼을 들고 일제에 투쟁하라는 식이 아닌 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것을 단속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는 손기정 선수 우승에 대한 민족적 감정이 반일감정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각종 축하회도 금지하고, 기념체육관 설립 발기나 각종 연설회를 금지했다. 또 총독부 경무국장이나 도서과장도 하루 걸러끔씩 신문사 사장이나 편집국장을 불러다가 손기정 선수 보도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길용(李吉用)․현진건(玄鎭健) 등 <동아일보>의 몇몇 기자들은 뒤늦게 현장사진이 입수되자 이를 게재하기로 하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8월24일치 신문에서 총독부의 검열을 받는 1판에는 뚜렷이 일장기가 보이지만, 2판부터는 일장기가 사라졌다. 일본군 20사단 사령부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는 비상이 걸려 이길용을 비롯해 일장기 말소와 관련된 <동아일보> 기자와 사원 1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고, 같은 사진을 게재한 <신동아>의 관련자들도 체포됐다. 동아일보사가 간행한 여성지 <신가정>은 논개의 시인 변영로(卞榮魯)가 편집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일장기가 달린 사진을 내보내기 싫어서 손기정 선수의 두 다리를 클로즈업한 사진을 내보냈다. 일본 경찰은 이마저 문제삼았는데, 재치로 당대 최고인 변영로는 손 선수가 두 다리로 세계를 제패했기 때문에 두 다리를 클로즈업했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버텼다. 일제는 그래도 일장기를 잘라버린 게 아니냐며 난리를 쳤고 쓰레기통을 샅샅이 뒤져 잘린 사진을 찾아냈는데, 변영로가 쓴 사진은 일장기가 달린 사진이 아니라 양정고보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진이라 변영로는 화를 면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가 문제가 돼 <동아일보>에 무기정간 처분이 떨어지자,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도 문제가 됐다.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 등은 당국에 자수했지만, 유해붕과 사진부 기자 등 4명이 체포됐다. <조선중앙일보>는 9월4일치로 사고(社告)를 내고 다음날부터 자진휴간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형법에 외국 국기의 훼손에 대해서는 처벌 규정이 있었으나, 자국의 국기에 대한 처벌규정은 마련돼 있지 않았고, 일장기는 공식적으로 일본 국기로 채택된 바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장기 말소 관련자들을 처벌할 법규가 없어, 이들은 40여일 간 온갖 고문 등 고초를 겪은 뒤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언론계를 영영 떠나야 했다.
[<동아일보>논조, 기기 시작하다]
1965년 동아일보사 출판부에서 발행한 <고하 송진우 선생전>을 보면 일장기 말소사건이 마치 당시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가 지시해 일어난 것으로 돼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송진우는 오히려 사건이 일어나자 격노해 이길용 등을 성냥개비로 고루거각(高樓巨閣)을 태워버렸다고 심하게 질책했다. 사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 전까지 몇 차례의 무기정간이 3~4개월 만에 해제된 데 비해 이때의 무기정간은 10개월간 지속돼 1937년 6월2일에야 해제됐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가 입은 물적 손실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10만여원에 이르렀고, 극심한 재정난 속에 <신동아> <신가정> 두 잡지는 폐간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큰 손실은 다른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사건을 끝으로 <동아일보> 논조는 완전히 일제에 굴복하게 된다. <동아일보>가 정간이 해제돼 복간할 때 낸 사고를 보면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해서 조선통치의 익찬을 기하려한다고 돼 있다. 이 구절은 물론 일제의 강압으로 들어간 것이지만, 실제로 이후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지면은 이런 구절을 충실히 이행했다.
한편 <조선중앙일보>는 외형상 자진휴간으로 <동아일보>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 같으나 실제로는 총독부가 재발간을 허용하지 않은데다가, 복간 조건으로 친일파를 사장으로 앉힐 것을 주주와 사원들이 거부했고, 여기에 재정문제를 둘러싸고 주주 사이의 분쟁이 겹쳐 영영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하여 3대 조선 신문의 시대는 끝이 나고, 동아와 조선이 양립하게 된다. <조선중앙일보>는 30년대에 들어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논조가 무뎌진 뒤에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며 일제의 논조를 비판해왔으며, 최린․박희도 등 친일의 길에 들어선 과거의 민족주의자들을 격렬히 비판하는 등 급속히 사세를 신장해왔다. 일장기 말소사건 직전의 발행부수를 보면 <조선중앙일보>가 3만2782부로 3만1666부인 <동아일보>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 선두를 차지했는데, 두 경쟁지가 발간되지 못하는 사이에 <조선일보>는 발행부수가 6만부로 급증해 일약 발행부수 1위가 됐다. 일장기 말소! 통쾌하기는 하나 우리가 치른 대가는 너무나 컸다.
당시 <동아일보> 경영진은 부득이 이길용 등의 사표를 받았으나, 1939년에는 현진건을 학예부장으로 슬그머니 복직시켰다가 총독부 당국의 압력으로 다시 해직했다.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이후 <동아일보> 경영진이 우수한 젊은 기자 100여명을 당국의 압력으로 해직한 이후, 그들의 복직을 절대 허용하지 않은 채 쇠락을 자초한 것과는 좋은 비교가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적 영웅, 손기정]
손기정! 하늘에 안창남이 있고, 사이클에 엄복동이 있었지만,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적 영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영웅들을 잡아다가 정치판에 앉혀놓는 일이 계속되는데, 손기정에게도 알게 모르게 여러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딴 데 한눈 팔지 않고 육상인으로 후진을 양성하는 데 주력해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우리 선수들이 1, 2, 3등을 휩쓰는 영광을 재현하는 등 육상인으로 시종일관했다. 백범 김구는 귀국 뒤 손기정을 만나 손기정 때문에 세번 울었다고 말했다. 한번은 올림픽 우승 소식에 감격해 울고, 또 한번은 손기정이 일제에 의해 필리핀 전선에 끌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쌍해서 울고, 그리고 귀국해 건강한 손기정을 만나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반가워서 울었다고 한다. 눈덮인 길에 흐트러짐 없는 발자국을 남기고 간 손기정 선수를 하늘에서 만난 백범은 또 한번 눈물을 흘리실까
<「한겨레21」[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2002년11월20일 제43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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