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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총론 / 신채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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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上古史[조선상고사] 總論[총론] / 신채호

 

 

1. []定義[정의]朝鮮歷史[역사]의 범위

 

 

역사(歷史)란 무엇이냐. 인류사회의 ()’비아(非我)’의 투쟁

 

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心的)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

 

,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朝鮮

 

)라면 조선민족(朝鮮民族)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을 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냐.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

 

라 하나니,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

 

(() 등을 비아라 하지만, ···……등은 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은 비아라 하며, 무산계급(無産階級)은 무산계급을 아라 하

 

, 지주(地主)나 자본가(資本家) 등을 비아라 하지만, 지주나 자본가 등은

 

각기 제 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계급을 비아라 하며,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 밖에 무엇에든지, 반드시 본위인 아가 있으

 

, 따라서 아와 대치한 비아가 있고, 아의 중에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중에도 또 아와 비아가 있어,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번극(

 

)할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휴

 

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前途)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역

 

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아나 아와 상대되는 비아의 아도 역사적인 아가 되려면 반드시 양개(兩個)

 

의 속성을 요하나니, 상속성(相續性)이니, 시간에 있어서 생명의 부절

 

(不絶)함을 일컬음이요, 보편성(普遍性)이니, 공간에 있어 영향의 파급

 

됨을 일컬음이라.

 

그러므로 인류말고 다른 생물(生物)의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으나,

 

그러나 그 의 의식이 너무 미약(絶無[절무] 原註[원주])하여

 

상속적·보편적이 못되므로, 마침내 역사의 조작을 인류에만 양()함이다.

 

사회를 떠나서 개인적인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으나, 그러나 그 아의

 

범위가 너무 약소(弱小)하여 또한 상속적·보편적이 못 되므로, 인류로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됨이다. 동일한 사건으로 양성(兩性) 상속·

 

보편 의 강약을 보아 역사의 재료될 만한 분량의 대소를 정하나니, 이를

 

테면 김석문(金錫文)3백 년 전에 지원설(地圓說)을 창도(唱道)한 조선의

 

학자지만, 이를 브루노의 지원설과 같은 동양(同樣)의 역사적 가치를 쳐주

 

지 못할 것은, ([])는 그 학설로 인하여 구주 각국의 탐험열(探險熱)

 

이 광등(狂騰)한다, 아메리카의 신대륙을 발견한다 하였지만, 이는 그런 결

 

과를 가지지 못함이다. 정여립(鄭汝立)4백 년 전에 군신강상설(君臣綱常

 

)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이지만, 이를 민약론(民約論)을 저작한

 

루소와 동등되는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없음은, 당시에 다소간 정설(鄭說)

 

의 영향을 입은 검계(劍契)나 양반살육계(兩班殺戮契) 등의 전광일섬(電光

 

一閃)의 거동이 없지 않으나 마침내 루소 이후의 파도 장활(壯濶)한 프랑스

 

혁명에 비길 수 없는 까닭이다.

 

비아(非我)를 정복하여 아()를 표창(表彰)하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

 

래 역사의 생명을 이으며, 아를 소멸하여 비아에 공헌하는 자는 투쟁의 패

 

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진적(陳跡)만 끼치나니, 이는 고금 역사에 바꾸지

 

못할 원칙이다.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의 통

 

(通性)이거늘, 매양 예기(豫期)와 위반(違反)되어 승리자가 아니 되고 실

 

패자가 됨은 무슨 까닭이냐. 무릇 선천적 실질(實質)부터 말하면, 아가 생

 

긴 뒤에 비아가 생긴 것이지만, 후천적 형식부터 말하면 비아가 있은 뒤에

 

아가 있나니, 말하자면 조선민족 즉 아 이 출현한 뒤에 조선민족과

 

상대되는 묘족(苗族지나족(支那族) 비아 이 있었으리니, 이는

 

선천적인 것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묘족·지나족 등 비아 의 상대자가 없었더면 조선이란

 

국명(國名)을 세운다, 삼경(三京)을 만든다, 오군(五軍)을 둔다 하는 등

 

의 작용이 생기지 못하였으리니, 이는 후천적인 것에 속한 것이다.

 

정신의 확립으로 선천적인 것을 호위하며, 환경의 순응으로 후천적인 것을

 

유지하되, 양자의 1이 부족하면 패망의 임()에 귀()하는 고로, 유태(

 

)의 종교나 돌궐(突厥)의 무력으로도 침륜(沈淪)의 화를 면치 못함은 후

 

자가 부족한 까닭이며, 남미의 공화(共和)와 애급 말세의 흥학(興學)으로도

 

쇠퇴의 환()을 구()치 못함은 전자가 부족한 까닭이다.

 

이제 조선사를 서술하려 하매,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잡고,

 

(1) 아의 생장 발달의 상태를 서술의 제1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최초

 

문명의 기원이 어디서 된 것, 역대 강역(疆域)의 신축이 어떠하였던 것,

 

각 시대 사상의 변천이 어떻게 되어온 것, 민족적 의식이 어느 때에

 

가장 왕성하고, 어느 때에 가장 쇠퇴한 것, 여진(女眞선비(鮮卑

 

(蒙古흉노(匈奴) 등이 본디 아의 동족으로 어느 때에 분리되며, 분리

 

된 뒤의 영향이 어떠한 것, 아의 현재의 지위와 흥복(興復) 문제의 성부

 

(成否)가 어떠할 것인가의 등을 분서(分敍)하며,

 

(2) 아와의 상대자인 사린 각족의 관계를 서술의 제2의 요건으로 하고,

 

리하여 아에서 분리한 흉노·선비·여진·몽고며, 아의 문화의 강보(

 

)에서 자라온 일본이, 아의 거(×)이 되던, 아니 되어 있는 사실이

 

, 인도는 간접으로, 지나는 직접으로 아가 그 문화를 수입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수입의 분량을 따라 민족의 활기가 여위어 강토의 범위가 줄어

 

졌나, 오늘 이후는 서구의 문화와 북구의 사상이 세계사의 중심이 된바,

 

우리 조선은 그 문화사상(文化思想)의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 것인가?

 

는 그를 저작(詛嚼)하며 소화하여 신문화(新文化)를 건설한 것인가 등을 분

 

서하여 위의 (1) (2) 양자로 본사(本史)의 기초를 삼고,

 

(3) 언어·문자 등 아의 사상을 표시하는 연장의 그 이둔(利鈍)은 어떠하

 

, 그 변화는 어떻게 되었으며,

 

(4) 종교가 오늘 이후에는 거의 가치 없는 폐물이 되었지만, 고대에는 확

 

실히 일민족의 존망성쇠(存亡盛衰)의 관건이었으니, 아의 신앙에 관한 추세

 

가 어떠하였으며,

 

(5) 학술·기예 등 아의 천재(天才)를 발휘한 부분이 어떠하였으며,

 

(6) 의식주의 정황과 농상공의 발달과 전토의 분배와, 화폐의 제도와,

 

타 경제조직 등이 어떠하였으며,

 

(7) 인민(人民)의 천동(遷動)과 번식과, 또 강토의 신축을 따라 인구의 가

 

감이 어떻게 된 것이며,

 

(8) 정치제도의 변천이며,

 

(9) 북벌진취(北伐進取)의 사상이 시대를 따라 진퇴(進退)된 것이며,

 

(10) 귀천·빈부 각 계급의 압제하며 대항한 사실과, 그 성쇠소장(盛衰消

 

)의 대세며,

 

(11) 지방자치제가 태고부터 발생하여, 근세에 와서는 형식만 남기고 정신

 

이 소망(消亡)한 인과며,

 

(12) 자래(自來) 외력(外力)의 침입에서 받은 거대의 손실과 그 반면에 끼

 

친 다소의 이익과,

 

(13) 흉노·여진 등의 1차 아와 분리한 뒤에 다시 합하지 못한 의문이며,

 

(14) 종고(從古) 문화상 아의 창작이 불소하나, 매양 고립적·단편적(斷片

 

)이 되고, 계속적이 되지 못한 괴인(怪因) 등을 힘써 참고하며 논렬(

 

)하여 위의 (3) (4) 이하 각종 문제로 본사(本史)의 요목(要目)을 삼아,

 

일반 독사자(讀史者)로 하여금 거의 조선 면목의 만분의 1이라도 알게 될까

 

하노라.

 

 

2. []三大元素[삼대원소]朝鮮舊史[조선구사]의 결점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으란 것이다.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다. 상언(詳言)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

 

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을 따

 

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첨부 혹 변개하라는 것이 아니니, 화사(畫師)

 

인상(人象)을 화()할새,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그리려면 상모괴걸(狀貎魁

 

)한 연개소문을 그릴지며, 강감찬(姜邯贊)을 그리려면 형구 왜루(形軀矮

 

)한 강감찬을 그릴지니, 만일 피차 억양의 심으로 호리(毫釐)라도 상환

 

(相換)하면, 화사의 직분에 어길뿐더러 본인의 면목도 아니리니, 이와 같이

 

영국사(英國史)를 지으면 영국사가 되며, 노국사(露國史)를 지으면 노국사

 

가 되며, 조선사(朝鮮史)를 지으면 조선사가 되어야 하겠거늘, 유래(由來)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더냐 하면 수긍하기 어렵다.

 

안정복(安鼎福)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짓다가 개연히 내란(內亂)

 

빈번과 외구(外寇)의 출몰이 동국의 고사(古史)를 탕잔(蕩殘)케 함을 비탄

 

하였으나, 나로써 보건대, 조선사는 내란(內亂)이나 외구(外寇)의 병화(

 

)에서보다, 곧 조선사를 저작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서 더 탕잔(蕩殘)되었

 

다 하노라.

 

어찌하여 그러하냐 하면,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계속과 공간적 발전

 

으로 되어오는 사회활동 상태의 기록인 고로, ((() 삼자

 

는 역사를 구성하는 삼대 원소다. 일례를 들자면, 신라(新羅)가 신라 됨은

 

((() 삼성(三姓)과 돌산고허(突山高墟) 등 육부(六部)

 

()’으로써일 뿐이 아니라, 또한 경상도인 그 ()’와 고구려

 

(高句麗백제(百濟)의 동시인 그 ()’로써 신라가 됨이니, 만일 그

 

보다 진()하여 2천년 이전의 왕검(王儉)과 같은 연대거나 강()하여 2

 

년 이후 금일의 우리와 같은 시국이면, 비록 혁거세(赫居世)의 성지(聖智)

 

6부인의 질직(質直)에 계림(鷄林)의 본강(本疆)을 가질지라도, 당시에

 

되던 신라와 꼭같은 신라가 될 수 없으며, 또 신라의 위치가 구라파에 놓이

 

었거나 아프리카에 있었을지라도, 또한 다른 면목(面目)의 나라는 될지언정

 

신라는 되지 않았으리니, 이는 지명(至明)한 이()거늘, 이왕의 조선의 사

 

(史家)들은 매양 그 짓는 바 역사를 자가 목적의 희생에 공()하여,

 

깨비도 뜨지 못한다던 땅 뜨는 재주를 부리어, 졸본(卒本)을 떠다가 성천

 

(成川) 혹 영변(寧邊)에 놓으며, 안시성(安市城)을 떠다가 용강(龍岡)

 

안주(安州)에 놓으며, 아사산(阿斯山)을 떠다가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

 

만들며, 가슬라(迦瑟羅)를 떠다가 강원도의 강릉군(江陵郡)을 만들어, 이와

 

같은 허다한 지()의 빙자(憑藉)가 없는 역사를 지어,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아라 한, 압록강 이내의 이상적 강역(疆域:我邦彊域考[아방강역

 

][] 不大不小[불대불소] 克符帝心[극부제심] 原註[원주])을 획

 

정하려 하며, 무극(無亟) 일연(一然) 등 불자(佛子)의 지은 사책(史冊)에는

 

불법(佛法)1자도 유입하지 않은 왕검시대부터 인도의 범어(梵語)로 만든

 

지명·인명이 충만하며, 김부식(金富軾) 등 유가(儒家)의 적은 문자에는,

 

공맹(孔孟)의 인의(仁義)를 막시(漠視)하는 삼국 무사(武士)의 구중에서 경

 

(經傳)의 사구(辭句)가 관용어같이 전송(傳誦)되며, 삼국사(三國史)

 

열전(列傳)에 누백년간 조선의 전토의 인심을 지배하던 영((

 

((:永郞[영랑述郞[술랑安郞[안랑南郞[남랑]原註[

 

]) 사대성(四大聖)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지나 유학(留學)의 일 학생인

 

최치원(崔致遠)만 진진(津津)히 서술하였으며, 여사제강(麗史提綱)

 

원효(元曉의상(義湘) 제 거철(巨哲)의 불학(佛學)에 영향된 고려 일대의

 

사상계의 어떠함은 볼 수 없고, 왕태조(王太祖)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

 

)이 그 통일 이후에 올린 간불소(諫佛疏)만 적히어, 이와 같은 허다

 

()’의 구속을 받지 않은 역사를 지어, 자가의 편벽한 신앙의 주

 

관적 심리에 부합하려하며, 심한 경우에는 ()’까지 무()하여,

 

라의 김왕(金王)을 인도의 찰제리(刹帝利:크샤트리아 原註[원주])

 

(三國遺事[삼국유사]』─ 原註[원주]이라 하며, 고구려의 추모왕(鄒牟王)

 

을 고신씨(高辛氏) ()(三國史記[삼국사기]』─ 原註[원주])라 하며,

 

게다가 조선 전민족을 진한유민(秦漢遺民:東國通鑑[동국통감]』『三國史

 

[삼국사기]原註[원주]) 혹 한인지동래자(韓人地東來者:東史綱

 

[동사강목]』─ 原註[원주])라 하기까지 하였다.

 

이조(李朝) 태종(太宗)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들 맹목파(盲目派)의 급선봉

 

(急先鋒)이 되어, 조선사상의 근원되는 서운관(書雲觀)의 문적(文籍)을 공

 

(孔子)의 도()에 위배된다 하여 일거(一炬)의 화()에 던졌다. 이두형

 

(李斗馨:李朝[이조] 正祖詩人[정조시인]? 原註[원주])이 가로되 근일

 

의 어느 행장(行狀)과 묘지명(墓誌銘)을 보든지, 그 서중(書中)의 주인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端嚴)하며 덕성은 충후(忠厚)하며 학문은 정주(程朱)

 

()하며 문장은 한(:韓愈[한유] 原註[원주])·(:柳宗元[유종

 

] 原註[원주])를 상()하여, 거의 천편일률이니, 이는 기인을 무()

 

할 뿐 아니라 기문(其文)도 가치가 없다하였으니, 이는 개인 전기(傳記)

 

의 실실(失實)에 대한 개탄뿐이나, 이제 존군천민(尊君賤民)의 춘추 부월하

 

(春秋斧鉞下)에서 자라난 후인들이 그 심습(心習)으로 삼국 풍속을 이야기

 

하며, 문약(文弱) 편소(偏小)로 자안(自安)하는 이조 당대의 인신들이 그

 

주관으로 상고 지리를 그릴새, 이에 조선(檀君[단군] 原註[원주])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동북국(東北國)이나 고려나 이조 오천년 이래 전조선이

 

거의 한 도가니로 부어낸 것같이 지면의 창축(漲縮)을 따라 민족 활동의 승

 

(昇降)한 점이나, 시대의 고금을 좇아 국민사상의 갈린 금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코롬웰은 화사(畫師)가 자기의 상()을 그릴 때에 그 좌목상(左目上)

 

을 뺌을 불허하여 가로되,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면대로 그리라

 

하였으니, 이 말은 화사의 납첨(納諂)함만 가척(呵斥)함이 아니라 곧 자기

 

의 진상(眞像)을 잃을까 함이거늘, 조선사를 지은 이왕의 조선의 사가들은

 

매양 조선의 혹을 베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의 쓴 안경

 

이 너무 철면(凸面)인 고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

 

라 하여 베어버리고, 어디서 무수한 혹을 가져다가 붙이었다. 혹 붙인 조선

 

사도 이왕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대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물으면,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고로, 참괴(慚愧)한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 있도다. 그러나 조

 

선인이 읽은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이왕에 있는 기록이 그와 같이 다 틀리었으면, 무엇에 거()하여 바른 조

 

선사를 짓겠느냐. 사금(沙金)을 이는 자가 1(一斗)의 모래를 일면 1(

 

)의 금()을 얻거나 혹 얻지 못하거나 하나니, 우리의 문적(文籍)에서

 

사료(史料)를 구함이 이같이 어려운 바이다. 혹자는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의 지중(地中)을 발굴하여 허다한 발견이 있어야 하

 

리라, 금석학(金石學고전학(古錢學지리학(地理學미술학(美術學

 

계보학(系譜學) 등의 학자가 쏟아져야 하리라 하는 말이 많으나, 이도 그러

 

하거니와, 현금에는 우선 구급의 방법으로 존재한 사책(史冊)을 가지고 득

 

실을 평하며 진위(眞僞)를 교()하여 조선사의 전도(前途)를 개척함이 급

 

무인가 하노라.

 

 

3. 舊史[구사]의 종류와 그 得失[득실]略評[략평]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류(書類)를 치자면 신지(神誌)부터 비로소였나

 

, 신지(神誌)는 권람(權擥) 응제시(應製詩)에서 단군시(檀君時) 사관

 

(史官)이라 한 자이다. 그러나 나로서 보건대, 단군(檀君)은 곧 수두(

 

)임금이요. 신지는 인명이 아니라 곧 수두임금의 수좌(首佐)인 관

 

(官名)신치’(臣智)(‘蘇塗[수두]’臣智[신치]’詳說[

 

]思想史[사상사]에 보임 原註[원주]), 역대의 신치들이 매양 10

 

수두대제(大祭)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

 

)과 후인의 감계(鑑戒)할 일을 들어 노래하더니, 후세의 문사(文士)들이

 

그 노래를 혹 이두문(吏讀文)으로 이를 편집하며 혹 한자의 오언시(五言詩)

 

로 이를 역등(譯謄)하여 왕궁에 비장(祕藏)한 고로, 신지비사(神誌祕

 

)해동비록(海東祕錄)등 명칭이 있었더라. 그 적은 바가 사실

 

보다 잠언(箴言)이 많아서 석인(昔人)이 왕왕 예언의 한 종류로 보았었으

 

, 이조 태종이 유학(儒學)을 중심하고 그밖에 일체를 배척하여 이단시 하

 

는 문자를 모두 소화(燒火)할 때, 신지도 그 때에 액운을 면치 못하여,

 

겨우 고려사(高麗史)김위제전(金謂磾傳)에 적힌 如秤錘極器[여칭추

 

극기] 秤幹扶疎樑[칭간부소량] 錘者五德地[추자오덕지] 極器百牙岡[극기백

 

아강] 朝降七十國[조항칠십국] 賴德護神精[뢰덕호신정] 首尾均平位[수미균

 

평위] 興邦保太平[흥방보태평] 若廢三諭地[약폐삼유지] 王業有衰傾[왕업유

 

쇠경]”이라 한 것 열 짝만 전하였다. 만일 그 전부가 다 남아 있으면 우리

 

의 고사 연구에 얼마나 대력(大力)을 주리요.

 

북부여(北扶餘)는 왕검(王儉) 이후 그 자손들이 서로 그 보장(寶藏)을 지

 

키어 태평(太平) 은부(殷富)로써 자랑하여(晋書[진서]扶餘傳[부여전]

 

其國殷富[기국은부] 自先世以來[자선세이래] 未嘗破壞[미상파괴]”

 

[원주]) 가관(可觀)할 사료(史料)가 많았으나, 모용외(慕容廆)의 난()

 

에 그 국명과 함께 망실하고, 고구려(高句麗)는 동명성제(東明聖帝대무

 

신왕(大武神王)의 제()에 사관이 조선 상고부터 고구려 초엽까지의 정치

 

상 사실을 기재하여 유기(留記)라 이름한 것이 100권이었더니, 위장(

 

) 관구검(毌丘儉)의 난에 피탈(被奪)하였으나, 단군왕검의 명()과 삼한

 

(三韓부여(扶餘)의 약사(略史)위서(魏書)에 구재(具載)함은 위인

 

(魏人)유기에서 주워간 바며, 그 뒤에 백제(百濟) 중엽에 고흥 박사

 

(高興博士)서기(書記)를 지으며, 고구려 말엽에 이문진(李文眞)

 

사가 신집(新集)을 지으며, 신라는 진흥대왕(眞興大王)의 전성시대에

 

거칠부(居柒夫)가 신라 고사를 저술하여, 삼국이 다 일대의 전고(典故)

 

()하였으나, 금일에 그 편언척자(片言隻字)도 끼친 자가 없으니, 이는

 

천하 만국에 없는 일이다. 역사의 영()이 있다 하면 처참의 누()를 뿌

 

리리라.

 

이상에 말한 바는 다 일종의 정치사이거니와, (() 망후에 신라

 

는 무()를 언()하고 문()을 수()하여 상당한 저사(著史)가 간출(

 

)하였으니, 무명씨의 선사(仙史)는 종교사(宗敎史)로 볼 것이며,

 

(魏弘)향가집(鄕歌集)은 문학사(文學史)로 볼 것이며, 김대문(

 

大問)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紀)는 학술사(學術史)

 

볼 것이니, 사학(史學)이 얼마큼 진보되었다 할 것이나 이것들도 모두 몰자

 

(沒字)의 비()가 되었다.

 

고려(高麗)에 와서는, 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등과 김부식(金富軾)삼국

 

사기(三國史記)와 일연(一然)삼국유사(三國遺事)가 있었으나, 오늘

 

에 전하는 자는 삼국사기삼국유사뿐인데, 그 전·부전의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金富軾일연(一然) 양인만의 저작이 우승하여 이것만

 

전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평양에 정도하고 진()하여 북부의

 

고강(故疆)을 회복하자는 화랑(花郞)의 무사(武士)가 일파가 되며, 사대(

 

)로 국시(國是)를 삼아 압록강 이내의 편안(偏安)을 주장하는 유교도가

 

일파가 되어, 양파가 논봉(論鋒)을 마()하여 대치한 지 수백년 만에 불자

 

묘청(妙淸)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陰陽家)의 미신(迷信)을 보태어,

 

평양에 거병하여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도(儒徒)의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부식이 이에 그 사대주의를 근본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다. 고로

 

·북 양부여를 빼어 조선문학의 소자출(所自出)을 진토(塵土)에 묻으며,

 

발해(渤海)를 버리어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의 초개(草芥)에 던지며, 이문

 

(吏文)과 한역(漢譯)의 구별에 어두워 일인이 수인 되고 일지(一地)가 수지

 

(數地) 된 자가 많으며, 내사(內史)나 외적(外籍)의 취사에 흐려서 전후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한 자가 많아 거의 사적(史的) 가치가 없다 할 것이

 

, 불행히 그 뒤 미기(未幾)에 고려가 몽고에 패하여 홀필렬(忽必烈:쿠빌

 

라이)의 위풍(威風)이 전국을 진경(震驚)하여, ‘황경(皇京)’‘제궁(

 

)’ 등의 명사(名詞)가 철폐되며, 해동천자(海東天子)의 팔관악부(八關樂

 

)가 금지되고, 유래(由來) 문헌에 만일 독립자존에 관한 자 있으면 일체

 

로 기휘(忌諱)가 될 때에, 역사도 허다의 저작 중에 유일한 사대사상의 고

 

취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 부용(附庸)삼국유사가 전할밖에

 

없게 되었다.

 

고려 당대의 사승(史乘)을 말하면, 고려 말세에 군신들이 고종(高宗) 이전

 

의 국세 강성하던 때의 기록은 더욱 몽고의 기오(忌惡)를 촉()할까 공

 

()하여, 산삭(刪削)하며 혹 도개(塗改)하고, 오직 비사후폐(卑辭厚幣)

 

북방강국 등에게 복사(服事)하던 사실을 부연 혹 위조하여 민간에 전포하더

 

, 이들 기록이 곧 이조 정인지(鄭麟趾)가 찬술한 고려사(高麗史)

 

남본(藍本)이 되었고, 이조 세종(世宗)이 비상히 사책에 유의하였으나,

 

만 그 한아비인 태조(太祖)와 아비인 태종이 호두재상(虎頭宰相) 최영(

 

)의 북벌군중에 반()하여, 사대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운 고

 

, 자신이 권근(權近정인지 등을 명하여 조선사략(朝鮮史略)』 『

 

려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을 편찬할새, 몽고의 압박을 받던 고

 

려 말엽 이전의 조선의 각종 실기(實記)에 의거하여 사를 짓지 못하고,

 

고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의 첨미(諂媚)한 문자와 위조한 고사(故事)

 

의거하여 사를 지어 구차히 업을 졸()하고, 정작 전대의 실록(實錄)은 민

 

간에 전포됨을 불허하고 규장각(奎章閣) 내에 비장(祕藏)으로 두었다가,

 

진왜란 병화에 몰소(沒燒)하였고, 그 뒤에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위를

 

()하고 만주 침략의 몽()을 포()하여 강계(江界)의 둔병(屯兵)

 

경영하다가, 자가 태조의 존명건국(尊明建國)의 주의에 충돌되어 제신의

 

간쟁(諫爭)이 분망(紛忙)하며, 지나대륙의 용무음지(用武陰識)한 명주

 

(明主) 성조(成祖)가 있어, 조선에 대한 정찰이 엄밀하며, 마침내 명사

 

(明使) 장영(張寧)이 엄중히 둔병의 이유를 힐문하므로, 세조가 그 상무희

 

(尙武喜功)의 심이 운소(雲消)하고 조선 문헌의 정리로 자임하여, 불경

 

(佛經)을 인()하며 유학(留學)을 장()하는 이외에 사료 수집에도 전력

 

하여,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東國兵鑑)과 조선 풍토사(風土史)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을 편술하고, 그 이외에도 허다한 서적

 

을 간행하니, 비록 대다(大多)한 공헌은 없으나 미소한 노적(勞績)은 있다

 

할 것이며, 선조(宣祖인조(仁祖)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문학의 거자

 

(巨子)가 배출하며 사계(史界)도 차차 진보되어, 허목(許穆)의 단군(

 

신라(新羅) 등 각 세기(世紀)가 너무 간략하나 왕왕 독득(獨得)의 견

 

이 있으며, 유형원(柳馨遠)이 비록 사에 관한 전저(專著)가 없으나 역대 정

 

치제도를 논술한 반계수록(磻溪隨錄)이 또한 사계(史界)에 비익(裨益)

 

이 작지 않으며, 한백겸(韓百謙)동국지리설(東國地理說)이 비록 수

 

십행에 불과한 간단한 논문이나 일반 사학계에 대광명을 열어, 후래 정약용

 

(丁若鏞)강역고(疆域考), 한진서(韓鎭書)지리지(地理志)

 

, 안정복(安鼎福)동사강목(東史綱目)에 부재(附載)한 강역론(疆域

 

)이나, 그 외에 각가의 조선 역사·지리를 설하는 자, 모두 한선생의 그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하였을 뿐이다.

 

나로서 보건대, 그 지리설 중에 삼한(三韓)과 조선(朝鮮)을 분개(分開)

 

이 범엽(范曄)의 전한 동이열전(東夷列傳)의 지리를 설명함에는 족하나,

 

로써 조선 고대 3천년 간의 지리를 단정하여 東國[동국] 自古[자고] 漢江

 

以南[한강이남] 爲三韓[위삼한] 漢江以北[한강이북] 爲朝鮮[위조선]”이란

 

결론을 내림은 너무 맹장적(盲杖的)이요 무단적(武斷的)이라 하노라, 이는

 

선생이 삼신(三神삼경(三京삼한(三韓삼조선(三朝鮮)의 연락적(

 

絡的) 관계와 발조선(發朝鮮발숙신(發肅愼부여조선(扶餘朝鮮예맥

 

조선(濊貊朝鮮진국(辰國진국(震國진번조선(眞番朝鮮진한(

 

마립간(麻立干마한(馬韓모한(慕韓) 등의 동음이역(同音異譯)

 

을 모르므로 이같은 대착오가 있음이나, 그러나 동이열전에 보인 삼한의 위

 

치는 선생으로부터 비로소 간명히 부석(剖釋)하여, 이왕에 사의 기록만 있

 

고 사의 연구가 없었다고 할 만한 조선사계에서 선생이 처음 사학(史學)

 

단서를 열었다 하여도 가할 것이다.

 

안정복(安鼎福)은 종신을 역사 일문에 노력한 5백년래 유일한 사학전문가

 

(史學專門家)라 할지나, 그러나 다만 산야의 한유(寒儒)로서 서적의 열람이

 

부족하여, 삼국사기같은 것도 그 만년에야 겨우 인가(人家)의 수서(

 

)한 책의 오자 많은 것을 얻어보았으므로, 그 저술한 동사강목에 궁

 

(弓裔)의 국호를 마진기(摩震紀)라 한 소화(笑話)를 썼으며, 지나 서적

 

중에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魏略)이나 남제서(南齊書)같은 것이

 

존재함을 몰라서 고루한 언구(言句)가 적지 않으며,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

 

는 공구(孔丘) 춘추(春秋), 주희(朱熹) 강목(綱目)의 과구(科具)

 

빠져, 기자본기(箕子本紀) 밑에 단군(檀君)과 부여(扶餘)를 부용(附庸)으로

 

하며, 신라 종국 끝에 궁예(弓裔)와 왕건(王建)을 참주(僭主)로 한 망발도

 

있고, 너무 황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여 정작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함

 

이 많았다. 그러나 연구의 정밀은 선생의 이상 될 이 없는 고로 지지(地志)

 

와오(訛誤)의 교정(校正)과 사실 모순의 변증(辨證)에 가장 공이 많다 하여

 

도 가할 것이다.

 

유혜풍(柳惠風)발해고(渤海考)는 대씨(大氏) 3백년간 문치·무공의

 

사업을 수록하여 천여년 사가의 압록강 이북 창기(創棄)한 결실(缺失)을 추

 

(追補)하며, 이종휘(李鍾徽)수산집(修山集)은 단군 이래 조선 고

 

유한 독립적 문화를 영가(詠歌)하여 김부식 이후 사가의 노예사상을 갈파

 

(喝破)하여, 특유한 발명과 채집은 없다 하여도, 다만 이 한가지로도 또한

 

불후(不朽)에 수()할 것이다.

 

한치윤(韓致奫)해동역사(海東繹史)는 오직 지나·일본 등 서적 중

 

에 보인 본사(本史)에 관한 문자를 수집하여 거연(居然)히 거질(巨帙)을 만

 

들었을 뿐 아니라, 삼국사기에 빠진 부여·발해·가락·숙신 등도 모두

 

일편의 세기(世紀)가 있으며, 동국통감에 없는 저근(姐瑾사법명(

 

法名혜자(慧慈왕인(王仁) 등도 각기 기행(幾行)의 전기(傳記)가 있으

 

, 궁어(宮語문자(文字풍속(風俗) 등의 분문(分門)이 있고, 게다가

 

그 조카 진서(鎭書)씨의 지리속(地理續)이 있어 후인 고증의 노를 덜 뿐 아

 

니라, 또한 사학(史學)에 두뇌가 있다 할 것이나, 다만 너무 자국간에서

 

조선에 관한 사실을 찾다가 민족 대세의 관계를 잃어, 곧 부루(夫婁)와 하

 

(夏禹)의 국제 대교제로 볼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주신(州愼)의 창수

 

사자(蒼水使者), 2천년간 흉노(匈奴)와 연()과 삼조선(三朝鮮)과 혹화

 

(或和) 혹전(或戰)한 전후 대사를 다 궐루(闕漏)하며, 유교의 위력에 눌

 

리어 고죽국(孤竹國)이 조선족의 분계(分系)됨을 발견치 못하는 동시에 백

 

(伯夷숙제(叔齊)의 성명을 탈락하며, 서적 선택의 부정(不精)이니,

 

진서(晋書)속석전(束晳傳)으로 보면 禹殺伯益[우쇄백익] 太甲殺伊尹

 

[태갑쇄이윤]” 등을 기()죽서기년(竹書紀年)이 진본(眞本)이요

 

현존한 죽서기년은 위서(僞書)이거늘, 이제 그 위서를 논박 없이 그대

 

로 기재하며, 사마상여(司馬相如)무릉서(茂陵書)는 당인(唐人)의 위

 

(僞造)이거늘 그대로 신용하며, 이밖에 지나인이나 일본이 없는 사적을

 

만들어 본국을 무욕(誣辱)한 자를 많이 그대로 수입한 것이 해서(該書)

 

결감(缺憾)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일대의 사()를 적은 역사로 말하면, 내가 일찍 정종조(正宗朝)

 

때에 기록을 만든 수서(修書)라는 승두세자(蠅頭細字)로 쓴 2백권의 거

 

(巨帙)을 보았었다. 만일 관서(官書)국조보감(國朝寶鑑)』 『조야첨

 

(朝野僉載)등을 비롯하여 허다한 사가 저술(私家著述)한 사서까지 치

 

면 몇백의 차축(車軸)을 절()할 것이다. 나는 일찍 고려 이전 역사의 쌓

 

인 의문부터 결정하려 하여, 이태조 이하 사실을 적은 역사로는 조야집요

 

(朝野輯要)』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등 몇몇 책을 대강 우목(寓目)

 

이외에는 자세히 독람(讀覽)한 것이 없으므로, 아직 그 장단 득실을 말하지

 

못하거니와, 대개 십지칠팔(十之七八)이 사색 당쟁사 됨은 단언할 것이니,

 

차부(嗟夫), 이조 이래 수백년 조선인의 문화사업은 이에 그치었도다.

 

이상에 열거한 역사의 서류(書類)를 재론하자면, 대개가 정치사들이요,

 

화사에 상당한 자는 몇 못 됨이 일감(一憾)’이요, 정치사 중에도 동국

 

통감』 『동사강목이외에는 고금을 회통(會通)한 저작이 없고, 모두 일

 

왕조의 흥망 전말로 글의 수미(首尾)를 삼았음이 이감(二憾)’이요, 공구

 

(孔丘)춘추를 사의 극칙(極則)으로 알아 그 의례(義例)를 효빈(

 

)하여, 존군억신(尊君抑臣)을 주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으며, 숭화양이

 

(崇華攘夷)를 주하다가 말내(末乃)에 자국(自國)까지 양()하는 벽론(

 

)에까지 이름이 삼감(三憾)’이요, 국민의 자감(資鑑)에 공하려 함보다

 

외인에게 첨미(諂媚)하려 한 의사가 더 많아(李修山[이수산] 一派[일파]

 

[]하고 原註[원주]), 자가의 강토를 촌촌척척(寸寸尺尺)이 할양(

 

)하여, 끝내 건국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하였음이 사감(四憾)’이다.

 

우리의 사학계가 이와 같이 맹롱피벽(盲聾跛躄)의 각병을 모두 가지어,

 

당한 발달을 얻지 못함이 무슨 까닭이냐? 너무 빈번한 내란·외환(비교적

 

久安[구안]한 이조 일대는 제하고 原註[원주]]) 등 천연화재(天然禍災)

 

에 계()한 자는 그만두고라도, 인위(人爲)의 장초(障礎)를 이룬 자로 들

 

건대,

 

(1) 신지(神誌) 이래 역사를 비장(祕藏)하던 버릇이 역사의 고질이 되어,

 

이조(李朝)에서도 중엽 이전에는 동국통감(東國通鑑)』 『고려사(高麗

 

)등 수종 관행본(官行本) 이외에는 사사(私史)를 금하였으므로, 이수

 

(李睟光)이 내각(內閣:奎章閣[규장각])에 들어가서 고려 이전의 비사(

 

)를 많이 보았다 함이며, 이언적(李彦迪)사벌국전(沙伐國傳)을 지

 

어 붕우에게 보임을 꺼림이라. 현대 왕조의 득실을 기록하지 못하게 함은

 

타국에도 혹 있거니와, 왕고사(往古史)의 사저(私著)나 사람(私覽)까지 금

 

함은 아국에 독유(獨有)하였었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은 이가 결하였으며,

 

(2) 송도(松都)를 지나다가 만월대(滿月臺)를 쳐다보아라. 반조각의 기와

 

가 끼쳤더냐. 일개 초()가 남았더냐. 막막한 전토(田土)에 이름만 만월대

 

라 할 뿐 아니더냐. 차부(嗟夫), 만월대는 이조의 부항(父行[부행])되어

 

멀지 않은 고려조의 궁궐로, 무슨 병화에 탔다는 전설도 없는데 어찌 이와

 

같이 무정한 유허(遺墟)만 남았느냐. 이와 동일한 예로 부여(扶餘)에서 백

 

(百濟)의 유물을 찾을 수 없으며, 평양(平壤)에서 고구려의 구형(舊型)

 

볼 수 없도다. 이에서 나서는 결론은, 뒤에 일어난 왕조가 전조(前朝)를 미

 

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며 소탕(燒蕩)시키

 

기를 위주하므로, 신라(新羅)가 일어나매 여(() 양국사가 볼 것이

 

없게 되며, 고려가 작()하매 신라사가 볼 것 없게 되며, 이조(李朝)가 대

 

()하매 고려사가 볼 것 없게 되어, 매양 현재로써 과거를 계속하려 아니

 

하고 말살하려 하였도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재료가 박약하였으며,

 

(3) 현종(顯宗)조총(鳥銃)의 길이가 얼마냐?” 하자 유혁연(柳赫然)

 

이 두 손을 들어 요만하다형용하였다. 기주관(記注官)이 그 문답의 정

 

형을 받아 쓰지 못하여 붓방아만 찧었다. 유혁연이 돌아보며 “‘上問鳥銃

 

之長於柳赫然[상문조총지장어유혁연] 然擧手尺餘[연거수척여] 以對曰如是

 

[이대왈여시]’라 쓰지 못하느냐고 질책하였다. 숙종(肅宗)이 박태보(

 

泰輔)를 국문(鞫問)할새,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 돌로 때려라

 

하매 주서(注書) 고사직(高司直)이 서슴없이 必字形縛之[필자형박지]

 

隅石擊之[무우석격지]”라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의 칭상(稱賞)을 받았다

 

한다. 이것들이 궁정의 가화(佳話)로 전하는 이야기지만, 반면에 남의 글대

 

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 것이다. 국문(國文)이 나기도 늦게 났지

 

마는, 나온 뒤에도 한문(漢文) 저술의 역사만 있음이 또한 기괴하도다.

 

는 역사전술(歷史傳述)의 기구가 부적함이며,

 

(4) 회재(晦齋)나 퇴계(退溪)더러 원효(元曉)나 의상(義湘)의 학술사상 위

 

치를 물으면 일구의 대답을 못할 것이며, 원효와 의상에게 소도(蘇塗)나 내

 

(柰乙)의 신앙적 가치를 말하면 반분의 이해를 못할 것이며, 이와 비례로

 

이조의 인사들이 고려시대 생활의 취미를 모르며, 고려나 삼국의 인사들은

 

또 삼한(三韓) 이전 생활의 취미를 모를 만큼, 반식(飯食거처(居處

 

(信仰교육(敎育) 등 일반사회의 형식과 정신이 모두 격변하여, 금일

 

아메리카 사람으로 명일 러시아 사람 됨과 같은 현격이 있으니, 이는 역사

 

사상(歷史思想)의 연락이 단절함이다. 어디서 과거를 소구(溯究)할 동기가

 

생기리요. 위 수종의 원인으로 사학(史學)이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3백년간 사색의 당전(黨戰)이 거대하게 국가에 해를 끼쳤다 하나, 당론(

 

)이 극렬(極烈)할수록 각기 아시피비(我是彼非)를 전파하기 위하여 사가

 

(私家)의 기술이 성행하며, 당의 시비가 매양 국정에 관계되므로 따라서 조

 

정의 득실을 논술하게 되어, 부지중 역사 사저(私著)의 금이 타파되어,

 

침내 한백겸(韓百謙안정복(安鼎福이종휘(李鍾徽한치윤(韓致奫)

 

사학계 몇개 인물들을 산출함도 그 결과이다. 혹은 사색(四色) 이후의 사

 

()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분석할 수 없어, 가장 사

 

()의 난관이 된다하나, 그러나 그들의 시비가 무엇이냐 하면, 모당(

 

)이 이조의 충신이니 역적이니, 모 선생이 주학(朱學)의 정통이니 위통

 

(僞統)이니 하는 문제들뿐이니,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상인(霜刃)을 휘

 

둘러 군왕의 시체를 두 동강이로 낸 개소문(蓋蘇文)을 쾌남(快男)이라 할

 

것이며, 기견(己見)을 주장하여 명륜당(明倫堂) 기둥에 공자(孔子) 기평(

 

)한 글제를 붙인 윤백호(尹白湖:[])를 걸물(傑物)이라 할지니, 고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두뇌로써 회재·화담(花潭퇴계·율곡(栗谷)의 학술

 

상 공헌의 다과나 알지니, 주자(朱子)의 정통 되는 여부는 희담(戱談)이 될

 

뿐이며,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분쟁이 정치상

 

미친 영향의 좋고 나쁨을 물을지니, 이조의 충노(忠奴) 되는 여부는 몽예

 

(夢囈)가 될 뿐이다.

 

심지어 개인 사덕(私德)의 결점을 지적하여 남의 명예를 더럽히며 혹 애매

 

한 사실로 남의 구함(構陷)하여 죽인 허다한 의안(疑案)은 그 반면에서 당

 

시 사회 경알(傾軋)의 악습으로 민()과 국()을 해친 일종 가통(可痛)

 

사료 됨을 볼 뿐이니, 만일 시어미의 역정과 며느리의 푸닥거리 동류에 불

 

과한 일에, 일일이 재판관을 불러 그 곡직(曲直)을 판결하려 하면, 이는 스

 

펜서의 이른바 이웃집 고양이 새끼 낳았다는 보고같아 도리어 이로써

 

역사계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한각(閑却)할 염려가 있으니 던져둠이 옳다하

 

, 빨리 지리(地理)의 관계라든지 사상계의 변동이라든지 국민생활의 관계

 

라든지 민족 성쇠 소장이라든지 등 대문제에 주의하여 와()를 정()하며

 

()을 구하여 조선사학(朝鮮史學)의 표준을 세움이 급무의 급무라 하노

 

.

 

 

4. 史料[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대한 商榷[상각]

 

 

만일 한걸음을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

 

야 되겠느냐 하면 그 답안이 매우 곤란하지만, 나의 경과부터 말하고자 한

 

.

 

거금 16년 전에 국치(國恥)에 발분(發憤)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

 

(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지어 대

 

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발포(發布)하며, 이어서 수십 학생의 청

 

구에 의하여 지나식의 연의(演義)를 본받은 비역사·비소설인 대동사천년

 

(大東四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양역(兩役)이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

 

고 말았었다.

 

그 논평의 독단(獨斷)임과 행동의 대담임을 지금까지 자괴(自愧)하거니와,

 

그 이후 얼마큼 분면(奮勉)한 적도 없지 않으나 나아간 것이 촌보쯤도 못된

 

원인을 오늘의 국내 일반 독사계(讀史界)에 앙소(仰訴)코자 하노라.

 

 

(1) 古碑[고비]의 참조에 대하여

 

 

일찍 서곽잡록(西郭雜錄)(著者[저자] 失名[실명] 原註[원주])을 보

 

다가 신립(申砬)이 선춘령(先春嶺) 아래에 고구려 구비(高句麗舊碑)가 있

 

다는 말을 듣고, 몰래 사람을 시켜 두만강을 건너가서 모본(摸本)을 해가지

 

고 오게 했는데, 알아 볼 만한 글자가 3백여 자에 불과했다. 그것에 따르

 

, ‘황제(皇帝)’는 고구려 왕()의 자칭(自稱)이다. 상가(相加)’

 

는 고구려 대신(大臣)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甲砬聞[갑립문] 先春嶺下

 

[선춘령하] 有高句麗舊碑[유고구려구비] 潛遣人渡豆滿江[잠견인도두만강]

 

摸本而來[모본이래] 所可辨識者[소가변식자] 不過三百餘字[불과삼백여자]

 

其曰皇帝[기왈황제] 高句麗王自稱也[고구려왕자칭야] 其曰相加[기왈상가]

 

高句麗大臣之稱也[고구려대신지칭야])”는 일절이 있음을 보고 크게 기뻐

 

, 만주 심산(深山)에 천고 고사(千古故事)의 결()을 보()할 만한 단

 

(斷碑)가 이것 하나뿐이 아니라 하고, 해외에 나오던 날부터 고구려·

 

(渤海)의 구강(舊疆)을 답사하리라는 회포가 가장 깊었었다. 그러나 블라

 

지보스토크(海蔘威[해삼위])에서 하바로프스크로 왕래하는 선객들에게,

 

해로(海路) 중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석혁산악(錫赫山嶽)에 흘립(屹立)한 윤

 

(尹瓘:혹은 蓋蘇文[개소문] 原註[원주])의 기공비(紀功碑)를 바라보았

 

다는 말이며, 봉천성성(奉天省城)에서 간접으로 이통주(伊通州) 유람하였다

 

는 내인(來人)에게, 해읍 동편 70리에 유존(遺存)한 해부루(解夫婁)의 송덕

 

비를 보았노라는 이야기며, 발해 고도로부터 오는 친우가 폭광(幅廣) 30

 

인 경박호(鏡泊湖:故事[고사]忽汗海[홀한해] 原註[원주])의 전면에

 

미국 나이애가라 폭포와 겨룰 만한 만장비폭(萬丈飛瀑)을 구경하였다 하며,

 

해룡현(海龍縣)으로 나오는 과객에게,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 미시마(

 

[삼도])를 함몰하겠노라한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유묘(遺廟)를 첨배

 

(瞻拜)하였다는 등이 나에게는 귀로 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다.

 

일차 4, 5의 우인(友人)과 동행하여 압록강상의 집안현(輯安縣) 곧 제이환

 

도성(第二丸都城)을 별람(瞥覽)함이 나의 일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노비 단핍(短乏)으로 능묘(陵墓)가 모두 몇인가 세어 볼 여

 

가도 없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일만 장 내외라는 억단을 하

 

였을 뿐이다. 촌인이 주운 죽엽(竹葉) 그린 금척(金尺), 해지 주거하는

 

일인이 박아 파는 광개토비문(廣開土碑文)을 가격만을 물어보았으며 잔파

 

(殘破:地上[지상][]部分[부분]原註[원주])한 수백의 왕

 

릉 가운데 천행으로 유존한 팔층석탑(八層石塔) 사면 방형의 광개토왕릉과

 

그 우변의 제천단(祭天壇)을 붓으로 대강 모본(摸本)하여 사진을 대신하며,

 

그 왕릉의 광()과 고()를 발로 밟아 신체로 견주어 측척(測尺)을 대신

 

하였을 뿐이다.([] 10장 가량이요 하층의 주위는 80발이니, 다른 왕릉

 

은 상층이 잔파하여 []는 알 수 없으나, 그 하층의 주위는 대개 廣開土

 

[광개토왕][]과 동일 原註[원주]) 왕릉의 상층에 올라가 석주

 

(石柱)의 섰던 자취와 복와(覆瓦)의 남은 파편과 드문드문 서 있는 송백(

 

)을 보고, 후한서(後漢書)고구려에서는 ……·은 등의 재물을

 

모두 다 두텁게 묻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며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무

 

덤 주위에 심는다(高句麗[고구려]……金銀財幣[금은재폐] 盡於原葬[진어원

 

] 積石爲封[적석위봉] 亦種松栢[역종송백])고 한 간단한 문구를 비로소

 

충분한 해석을 얻고, “수백 원이 있으면 묘() 한 장을 파볼 것이요,

 

천 원 혹 수만 원이면 능() 한 개를 파볼 것이다. 그리하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活寫眞)을 보리라하는 상상만 하였었다.

 

차부(嗟夫),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祕史)의 보고를 만나서 소득이 무

 

엇이었던가. 인재(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일일지간, 그 외부에 대한 조천(粗淺)한 관찰만

 

이지만, 고구려의 종교·예술·경제력 등의 여하가 눈앞에 활현(活現)하여

 

당지(當地)에 집안현(輯安縣)의 일람(一覽)이 김부식(金富軾)의 고구려사

 

를 만독(萬讀)함보다 낫다는 단안을 내리었다. 후래에 항주(杭州) 도서관

 

에서 우리나라 금석학자(金石學者) 김정희(金正喜:秋史[추사] 原註[

 

])의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

 

)을 보니, 나말·여초의 사조와 속상(俗尙)에 참고될 것이 많으며,

 

성 일 우인이 보낸 총독부 발행에 계()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

 

), 그 조사한 동기의 여하나 주해(註解)의 견강(牽强)한 몇 부분을

 

제하면, 또한 우리 고사 연구에 보조될 것이 많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서생배(寒書生輩)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치 못한 사료임을 자각하

 

겠다.

 

 

(2) 各書[각서]互證[호증]에 대하여

 

 

일찍 고려사최영전(崔瑩傳)에 의거한즉, 최영이 가로되 당이 30

 

만병으로 고구려를 침범하매, 고구려 승군(僧軍) 3만을 발하여 이를 대파하

 

하였으나 삼국사기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인 곳이 없으며, 그러

 

승군이 무엇이냐 하면, 서긍(徐兢)고려도경(高麗圖經)에 말

 

하되, “재가화상(在家和尙)은 가사(袈裟)도 입지 않으며, 계율(戒律)도 행

 

치 않으며, 조백(皀帛)으로 허리를 묶고 도선(徒跣)하여 걸으며, 처를 취

 

()하며 자식을 기르며, 기용(器用)의 부대(負戴)와 도로의 소제와 구혁

 

(溝洫)의 개치(開治)와 성실(成室)의 수축 등 공사에 복역하며, 변수(邊陲)

 

에 적경(賊警)이 있으면 스스로 단결하여 부전(赴戰)하는데, 중간에 거란

 

(契丹)도 이들에게 패하니, 기실은 형여(刑餘)의 역인(役人)인데, 이인(

 

)이 그 수발(鬚髮)을 곤삭(髡削)한 고로 화상(和尙)이라 이름함이라

 

, 이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

 

롯하였느냐의 의문이 없지 않다. 이에서 통전(通典)』 『신당서(新唐

 

)등 각서에 의거하면, ‘조의(皀衣:或曰[혹왈] 帛衣[백의] 原註[

 

])선인이란 관명(官名)이 있고, 고구려사에 명림답부(明臨答夫)

 

나조의(掾那皀衣)’라 하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조의선인(皀衣先

 

)’예속선인(翳屬仙人)’이라 하였으니, ‘선인(先人)’ ‘선인(

 

)’은 다 국어의 선인을 한자로 음역(音譯)함이요, ‘조의(皀衣)’

 

백의(帛衣)’하 함은 도경이 이른바 조백(皀帛)’으로 허리를

 

묶으므로 이름함이니, ‘선인은 신라고사(新羅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군은 국선의 수하에 속한 단병

 

(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화상이라 함은 후인이 가한 별명이니,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아국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동을 서술할새,

 

근원을 모르므로, ‘형여(刑餘)의 역인(役人)’이라는 천측(揣測)의 명사를

 

올림이다. 이에 고려사로 인하여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며, 고려도경으로 인하여 고려사에 자세치 않은 승군을 알게

 

되며, 통전』 『신당서』 『후주서·신라고사 등을 인하여 승군

 

선인(先人)’재가화상의 동일한 단체의 당도(黨徒) 됨을 알게 되

 

, 다시 말하면 당의 침입하는 30만 대병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에게 대패하였다는 몇십자의 약사(略史)6, 7종 서적 수천 권

 

을 섭렵한 결과에서 비로소 안출(按出)함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범하다가 안시성(安市城)에서 활에 맞아 눈을 상

 

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후인이 매양 사()에 올리며 이색(李穡)정관음

 

(貞觀(당태종의 연호)[])에도 那知玄花[나지현화] 落白羽[낙백

 

]”라 하여 그 실연(實然)함을 증명하였으나,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

 

와 지나인의 신·당서에 보인 데가 없음은 하고(何故)이냐.

 

일 사실의 진위를 불문하고 일은 취하고 일은 버리다가는 역사상의 위증죄

 

(僞證罪)를 범할지라. 고로 다만 당 태종의 눈 상한 사실을 지나의 사관

 

이 국치를 꺼리어 당서(唐書)에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더니, 종래의 명인(明人) 진정(陳霆)양산묵담(兩山墨

 

)에 의거한즉, 송 태종이 거란을 치다가 유시(流矢)에 상하여 둔귀(

 

)하여 수년여에 필경 그 시창(矢瘡)이 발하여 붕()하였다 하니, 이것이

 

송사(宋史)요사(遼史)에 보이지 않음은, 사건이 누백년 후 진정

 

의 고증에 발견된 바라. 이에 지나인은 그 군신(君臣)이 외족에게 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이를 국치(國恥)라 하여 사()에 휘닉(諱匿)하는 실

 

증을 얻어 나의 가설을 성립하였다. 그러나 지나인의 국치 휘닉하는 버릇이

 

있다 하여, 드디어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활에 상함이 확실하다는 실증이

 

못 되므로, 다시 신·당서를 취하여 상열(詳閱)한즉, 태종본기(太宗

 

本紀)당 태종이 정관 19(644) 9월에 안시성에서 회군하였다하고,

 

유계전(劉洎傳)그 동년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박이 심히

 

비구(悲懼)하였다하고 본기(本紀)에 정관 20년에 상의 병이 전유(

 

)치 못하여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다하고, 정관 23(648) 5상이

 

붕하였다하였는데, 그 붕락(崩落)의 원인은 강목(綱目)에는 이질

 

이 다시 증극(增劇)함이라하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요동서부

 

病癰[병옹]의 환 있었다." 하니, 대개 존자(尊者)와 친자(親者)의 피욕

 

(被辱)을 꺼리어 주천자(周天子) 정후(鄭侯)의 활에 상함과 노() 은공(

 

소공(昭公) 등의 피살함과 피축(被逐)함을 춘추(春秋)에 쓰지 않

 

은 공구(孔丘)의 벽견(僻見)이 지나 역사가의 습심(習心)이 되어, 당 태종

 

의 이미 빠진 눈을 유리편(琉璃片)으로 가리며 그 임상병록(臨床病錄)의 보

 

고를 모두 딴 말로 바꾸어 전창(箭瘡)이 내종(內腫)이 되며, 안통(眼痛)

 

항문병(肛門病)이 되어, 전쟁의 부상으로 죽는 자가 이질이나 늑막염의 환

 

병에 죽은 기록을 하였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여·

 

제 양국을 미워하여 그 명예의 역사를 소탕하여, 위병(魏兵)을 깨친 사법명

 

(沙法名)과 수군(隋軍)을 물린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다 도리어 지나사로

 

인하여 그 성명을 전케 됨이니, (을지문덕의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보

 

임은 곧 김부식이 支那史[지나사]에 채용한 고로 그 논평에 乙支文德[

 

지문덕]中國史[중국사]가 아니면 알 리가 없다原註[원주])

 

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남이 고구려 전사에 특기할 명예인즉, 나인(羅人)

 

발거(拔去)함이 또한 사실 당유(當有)할 일이다.

 

그런즉 우리가 당 태종의 눈 빠진 일을, 처음 전설과 목은집(牧隱集)

 

에서 의희(依稀)하게 안출(按出)하여 신·당서삼국사기에 이

 

것을 기재치 않은 의문을 깨칠새, 진정(陳霆)양산묵담에서 동류의

 

사항을 발견하며, 공구의 춘추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

 

당서』 『통감』 『강목등을 가져 그 모호 은미한 문구 속에서, 첫째

 

로 당 태종 병록(이질 등 原註[원주]) 보고의 실실(失實)임을 갈파(

 

)하며, 둘째로 목은 정관음(貞觀吟)(당 태종의 눈 맞은 사실로 지은

 

原註[원주])의 신용할 만함을 증실하며, 셋째로 신라인이 고구려 승

 

리의 역사를 훼멸(毁滅)함으로, 당 태종의 전패(戰敗) 부상한 사실이

 

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한 결론을 얻으니,

 

른바 당 태종이 보장왕(寶藏王) 3(644)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

 

하여 돌아가서, 당지의 외과의료(外科醫療)가 불완전하므로 거의 30개월을

 

규통(叫痛)하다가, 보장왕 5(646)에 붕서(崩逝)하였다의 수십자러라.

 

이 수십 자를 얻기에도 5, 6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며 출입하여, 혹은 무

 

의중에서 획득하며, 혹은 유의중에서 안출(按出)하여 얻은 결과이니, 그 노

 

역이 또한 적지 않다.

 

승군의 내력을 모르면 무엇이 해되며, 당 태종 부상한 사실을 안들 무엇이

 

이롭기에, 이런 사실을 힘써서 탐색하느냐 하는 이가 있겠지마는, 그러나

 

사학(史學)이란 것은 개별을 수집하며 오전(誤傳)을 교정(校正)하여 과거

 

인류의 행동을 활화(活畫)하여 후인에게 끼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물며 승

 

군 곧 선인군(先人軍)의 내력을 모르면, 다만 고구려가 당병 30만을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곧 이 앞에 명림답부(明臨答夫)의 혁명군의 중심과 강감

 

(姜邯贊)의 거란을 깨친 군대의 주력을 다 무엇인지 모르며, 따라서 삼국

 

부터 고려까지의 천여 년 군제상(軍制上) 중요한 부분을 모를지며, 당 태종

 

이 안통(眼痛)으로 죽은 줄 모른다면, 안시성 전국(戰局)의 속결(速結)

 

원인을 모를 뿐 아니라, 신라와 당의 연맹(聯盟)된 공안(公案)이며, 당 고

 

종의 군신(君臣)이 일체의 희생을 불고하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룬 전제며,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휴수(携手)하게 된 동기인 것들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바는 그 한둘의 예뿐이다. 이 밖에도 이 같은 일이 얼

 

마인지 모를 것이니, 고로 조선사의 황무(荒蕪)를 개척하자면 도저히 한 두

 

사람 몇개년의 힘으로 완결할 바 아님을 요해(了解)하였다.

 

 

(3) 각종 명사의 해석에 대하여

 

 

아국이 고대에 페니키아인이 이집트의 상형자(象形字)를 가져다가 알파벳

 

을 만든 것같이 한자(漢字)를 가져다가 이두문(吏讀文)을 만들 때, 그 초창

 

(草創)하던 처음에는 한자의 자음을 취한 것도 있고 혹 자의(字義)를 취한

 

것도 있으니, 삼국사기에 보인 바 인명으로 보면, “炤智[소지] 一名

 

[일명] 비처[毗處]”라 함은 의 뜻이 炤智[소지]’가 됨이며, 음이

 

비처[毗處]’ 됨이요, “素那[소나] 一名[일명] 金川[금천]”이라 함은

 

쇠내의 뜻이 金川[금천]’이 됨이며 음이 素那[소나]’가 됨이요,

 

居柒夫[거칠부] 一名[일명] 荒宗[황종]”이라 함은 거칠우의 음이

 

居柒夫[거칠부]’가 됨이며 뜻이 荒宗[황종]’이 됨이요, “蓋蘇文[

 

소문] 一名[일명] 蓋金[개김]”의 음이 蘇文[소문]’이 됨이며

 

뜻이 []’이 됨이요, “異斯夫[이사부] 一名[일명] 苔宗[태종]”

 

잇우의 음이 異斯夫[이사부]]’가 됨이며 뜻이 苔宗[태종]’(訓蒙

 

字會[훈몽자회][]으로 [])이 됨이요, 지명으로 보

 

, “密城[밀성] 일운[一云] 推火[추화]”라 함은 밀무의 음이 密城

 

[밀성]’이 되며 뜻이 推火[추화]’가 됨이요, ‘熊山[웅산] 一云[일운]

 

公木達[공목달]”이라 함은 곰대의 뜻이 熊山[웅산]’이 됨이며 음이

 

公木達이 됨이요, “雞立嶺[계립영] 一名[일명] 麻木嶺[마목령]”이라

 

함은 저름의 음이 雞立[계립]’이 됨이며 뜻이 麻木[마목]’이 됨

 

이요, “母城[모성] 一云[일운] 阿莫城[아막성]”이라 함은 어미의 뜻

 

[]’가 됨이며 음이 阿莫[아막]’이 됨이요, “黑壤[흑양] 一云

 

[일운] 今勿奴[금물노]”라 함은 거물라거물의 뜻이 []’

 

이 됨이며 음이 今勿[금물]’이 됨이며 []’[]’는 다

 

의 음을 취함이요, 관명(官名)으로 보면, ‘角干[각간]’을 혹

 

[발한]’이라 함은 의 뜻이 []’이 되고 음이 []’

 

되며 []’[]’은 다 의 음을 취함이니 불한은 군

 

왕의 명칭이요, ‘耨薩[누살]’을 혹 道使[도사]’라 함은 의 뜻이

 

[]’가 되고 음이 []’가 되며 의 뜻이 使[]’가 되

 

고 음이 []’이 됨이니, ‘라살은 지방장관의 명칭이요, ‘말한·

 

불한·신한은 삼신(三神)에서 기원한 것인데 뜻으로서 天一[천일

 

[지일太一[태일]’이 되고 음으로서 馬韓[마한下韓[하한辰韓

 

[진한]’이 됨이며, ‘도가·개가·크가·소가·말가는 오대신(五大臣)

 

칭호인데 ····등은 뜻으로 는 음으로서 猪加

 

[저가狗加[구가大加[대가牛加[우가馬加[마가]’가 됨이다.

 

이 같은 세쇄(細瑣)한 고증이 무슨 역사상의 대사가 되느냐. 이것은 세쇄

 

한 듯하나 지지(地誌)의 잘못도 이로써 교정(校正)할 수 있으며, 사료(

 

)의 의문도 이로써 첨보(添補)할 수 있으며, 고대의 문학부터 일체 생활

 

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가 될 것이니, 예를 들자면 해모수(解慕漱)와 유화

 

왕후(柳花王后)의 만나던 압록강(鴨綠江)이 어디냐. 금 압록이라 하면 당시

 

부여(扶餘) 서울인 합이빈(哈爾濱)과 너무 멀고, 다른 곳이라면 다른 곳에

 

압록이 없어, 그 의문을 깨치지 못하였더니, 1보에 광대토경호태왕(廣開

 

土境好太王)의 비()에 압록강을 阿利水[아리수]’라 함을 보고, 압록의

 

이름이 아리阿利[아리]’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2보에

 

의 요() 흥종(興宗)鴨子河[압자하]’를 혼동강(混同江)이라 개

 

명한 것을 보고, ‘鴨子[압자]’가 곧 아리인즉, 혼동강 松花江

 

[송화강]이 고대의 북압록강(北鴨綠江)인가의 가설을 얻었고, 3보에

 

동사강목고이(考異)삼국유사遼河[요하] 一名[일명] 鴨綠

 

[압록]”과 주희(朱熹)여진족은 압록강에서 일어나고 의거하였다.(

 

眞起據鴨綠江[여진기거압록강])을 인()하여 삼압록(三鴨綠)이 있다

 

함을 보고, 송화(松花)의 고대 일압록 됨을 알고, 따라서 해모수 부처의 만

 

나던 압록이 곧 송화강임을 정하였다.

 

마한전(馬韓傳)卑離[비리]’를 건륭제(乾隆帝:滿洲源流考[만주원류

 

]』 ─ 原註[원주])三韓訂謬[삼한정류]’에는 만주의 貝勒([]

 

패리 原註[원주])’와 같아 관명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나는 써 하되,

 

삼한의 鬼離[귀리]’삼국사기지리지의 백제의 夫里[부리]’,

 

卑離[비리]’ ‘夫里[부리]’는 다 의 취음이요 도회의 뜻이니,

 

한의 卑離[비리]’와 백제의 夫里[부리]’를 참조하면, 마한의 辟卑

 

[벽비리]’는 백제의 波夫里[파부리]’如來卑離[여래비리]’

 

爾陵夫里[이릉부리]’, ‘牟盧卑離[모로비리]’毛良夫里[모량부

 

]’, ‘監奚鬼離[감해귀리]’古莫夫里[고막부리]’, ‘山塗卑離

 

[산도비리]’未冬夫里[미동부리]’, ‘古臘卑離[고납비리]’

 

莫夫里[고막부리]’, 비록 매양 차음(此音) 피의(彼義)의 이역(異譯)

 

있으나 그 대략을 얻을지며, 인하여 조선이 관중(管仲)과 싸우던 때에 산서

 

(山西省)이나 영평부(永平府)卑耳[비이]’의 계(谿)를 둔바 卑耳

 

[비이]’卑離[비리] ’ 의 역()이다. 이에서 조선 고대의

 

이 곧 산해관(山海關) 이서까지에 있었음을 알지라.

 

고로 세쇄한 고증이 역사상의 대사가 아니나, 도리어 역사상의 대사를 발

 

견하는 연장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만일 다시 일보를 나아가 훈몽자회

 

(訓蒙字會)』 「처용가(處容歌)훈민정음(訓民正音) 등에서 고어를 연구

 

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쓰인 향가(鄕歌)에서 이두문(吏頭文)의 용

 

법을 연구하면, 역사상의 허다한 발견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일찍이 이에

 

유의한 바 있었으나, 해외에 나온 뒤부터 일권의 서적을 사기가 심난(甚難)

 

하여,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하였으나 또한 불가득이었

 

.

 

 

(4) 僞書[위서]辨別[변별]選擇[선택]에 대하여

 

 

아국은 고대에 진서(珍書)를 분기(焚棄)한 때(李朝[이조] 太宗[태종]

 

[분서] 같은 原註[원주])는 있었으나 위서(僞書)를 조작한 일은 없었

 

. 근일에 와서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등이 처음 출

 

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이 없이 고서로 신인할 이가 없게 된 것이

 

. 그러므로 아국 서적은 각씨(各氏)의 족보 중 그 조선의 사적을 혹 위조

 

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리 진위(眞僞)의 변별에 애쓸 것이 없거니와,

 

음 접양(接壤)된 인국(隣國)인 지나·일본 양국은 종고(從古)로 교제가 빈

 

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 될 서적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위서 많기로

 

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위서를 변인(辨認)치 못하면, 인증(

 

)치 않을 기록을 아사(我史)에 인증하는 착오가 있다. 그렇지마는 그 거

 

짓이 분량이 있다.

 

첫째는 위중(僞中)의 위()이니, 예를 들면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진

 

본이 망하고 위작(僞作)이 출하였음은 전자에 이미 진술한 바이거니와,

 

사가(舊史家)들이 늘 고기(古記)檀君[단군] 與堯並立[여요병립] 於戊

 

[어무진]”의 글을 의지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

 

()의 연대에 비교코자 하며, 요의 연대를 찾는 이는 속강목(續綱目)

 

(金仁山[김인산] 著一原註[저일원주])에 고준(考準)하나, 그러나 주소(

 

:[] 厲王代[여왕대]周公[주공召公[소공] 原註[원주]) 공화

 

(共和:紀元前[기원전] 841原註[원주]) 이전의 연대는 지나사가의 대

 

(大祖)라 할 만한 사마천(司馬遷)도 알지 못하여 그 사기(史記)연표

 

에 쓰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그보다 요원한 요의 연대리요. 고로 속강

 

은 다만 거짓 죽서기년에서 의거하여 적은 연대거늘, 이제 속강

 

을 의거하여 고대의 연대를 찾으려 함은 도리어 연대를 흐림이며, 공안

 

(孔安國)상서전(尙書傳)駒麗[구려扶餘[부여[

 

[]”의 구를 인용하여, 고구려와 삼한이 주 무왕(周武王)과 교통하였음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사기공자세가(孔子世家)安國[안국] 僞今

 

[위금황] 帝博士[제박사] 蚤卒[조졸]”이라 하였는데, ‘금황제는 무제

 

(武帝)이니, 무제를 금황제라 함은 사마천이 무제가 죽어 시호([])

 

받음을 못본 까닭이요, 안국을 [][][]’이라 함은 사마

 

천의 생전에 안국의 죽음을 본 고로 적음일지라. 그러면 안국은 사마천보다

 

먼저 죽고, 사마천은 무제보다 먼저 죽음이 명백하거늘, 상서전(尙書

 

)중에 무제의 아들인 소제시대(昭帝時代)에 창설한 금성군(金城郡)

 

름이 있으니, 안국이 그 사후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 만한 복자(卜者)라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상서대전(尙書大傳)의 위서(

 

) 됨이 또한 적확하고, 거기에 기록한 [[駒麗[구려]’

 

등의 위증임은 자연 명백할 것이다.

 

둘째는 진중(眞中)의 위()이니, 이것을 또 둘로 나누면, 은 본서의 위

 

(僞證)이니만치, 초학집(初學集)』 『유학집(有學集)등은 전겸익(

 

謙益)이 지은 실유(實有)한 글이지만, 그 집중에 쓴 아국에 관한 일은 대개

 

전겸익의 위조요 실유한 것 아닌 것이 많은 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

 

(我史)에 그 반박할 확증들이 있거니와, 만일 아사에 반박할 재료는 민멸

 

(泯滅)하고 피사(彼史)의 무안(誣案)만 유전(遺傳)된 자가 있으면, 다만 가

 

(假設)의 부인으로는 안되리니, 어찌하면 옳을까.

 

석자(昔者)에 장유(張維)사기武王[무왕]……乃封箕子於朝鮮

 

[내봉기자어조선]”을 변정(辨正)할새, 첫째 상서아망위신복(我罔

 

爲臣僕)”을 들어, 기자가 이미 남의 신복(臣僕)이 되지 아니할 줄로 자서

 

(自誓)하였은즉 무왕의 봉작(封爵)을 받을 리가 없다는 전제를 세우며,

 

, 한서기자피지우조선(箕子避地于朝鮮)”을 들어 반고(班固)

 

사기(史記)지은 사마천보다 충실하며 정밀한 역사가로서 천사(遷史)

 

쓴 바 기자봉작설(箕子封爵說)을 빼었은즉 봉작은 사실 아니라고 단언을 내

 

리었으니, 이는 인증(人證)’이요, 삼국 이후 고려 말엽 이전(蒙古[몽고]

 

入冦[입구] 原註[원주])에 우리 국세(國勢)가 강성하여 지나에 대하여

 

간과(干戈)로 상견한 때에도, 피국(彼國)에 보낸 국서(國書)에 비사(卑辭)

 

가 많았으나 그러나 첫째 타국이 견사(遣使)하면 반드시 내조(來朝)’

 

씀은 지나인 병리적 자존성이니, 이는 근세 청조(淸朝)가 처음 서양과 통할

 

때에 영·로 제국의 통상한 사실을 모두 모국 칭신봉공(某國 稱臣奉貢)”

 

이라 씀을 보아도 알 수 있으니 그 기록을 낭신(浪信)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지나인이 만든 열조시집(列朝詩集)』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등 시화(詩話) 가운데 조선 사람의 시를 가져다가 게재할 때에 늘 대담하게

 

일구 일련(一句一聯)을 도개(塗改)하였음을 보니, 우리 역사 등록(謄錄)

 

때에도 자구를 고쳤음을 알 것이며, 셋째 몽고의 세력이 아국을 진습(震慴)

 

할 때에 우리의 악부(樂府사책(史冊) 등을 갖다가 황도(皇都)’ ‘

 

(帝京)’ ‘해동천자(海東天子)’ 등 자구를 모두 고친 사실이 고려

 

에 보이었으니, 그 고친 기록을 다 이정(釐正)치 못한 삼국사기

 

고려사등도 지나와의 관계된 문자는 실록(實錄)이 아님을 알 것이니

 

이는 사증(事證)’이요, 연전 김택영(金澤榮)역사집략(歷史輯略)

 

과 장지연(張志淵)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에 신공여주(神功女主) 18

 

년에 신라 정복과 수인주(垂仁主), 2년에 임나부(任那府) 설치 등을 모두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채입(採入)하여 그 굉박(宏博)을 자랑하였으

 

, 그러나 신공 18년은 신라 내해(奈解)4(199)이요 내해 당년에는 신

 

라가 압록강을 구경한 이도 적을 터인데, 이제 내해가 아리나례(阿利那禮:

 

鴨綠江[압록강] 原註[원주])를 가리켜 중서(中誓)하였다 함은 무슨 말이

 

, 수인(垂仁)은 백제와 교통하기 이전의 일본 황제인즉, 백제의 봉직(

 

)도 수입이 못된 때이니, 수인 2년에 임나국인에게 적견(赤絹) 200필을

 

주었다 함은 어떤 말이냐? 후 양개의 의문을 답하기 전에 그 양건의 기사가

 

자연히 부정되리니, 이는 이증(理證)’이다.

 

이렇게 고인의 위증을 드러낼 것이다. 사람으로 일로 또 이치로 증명하여

 

부합치 않으면 위록(僞錄)임을 알 것이며, 는 후인의 위증이니, 본서에는

 

원래 위증이 없는데 후인이 문구로 증가하여 위증한 것이니, 마치 당 태종

 

이 고구려를 치려 하여,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

 

』 『남사』 『북사등에 보인 조선에 관한 사실을 가져다가 자가에 유

 

익하도록 꾸밀 때, 안사고(顔師古) 등을 시키어 곡필(曲筆)을 잡아 도개(

 

)하며 첨보(添補)하여 변역(變易)하고 억주(臆註)하여, 사군(四郡)의 연

 

혁이 가짜로써 진짜가 되며, 역대 양국의 국서가 더욱 본문대로 유전(流傳)

 

된 것이 없게 되었다.(이러한 증거는 본편 제2장 지리 연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原註[원주])

 

셋째는 위중(僞中)에 진짜이니, 마치 관자같은 것은, 관중(管仲)

 

작은 아니나 지나 육국시대의 저작으로, 조선과 제()의 전쟁은 도리어 그

 

실을 전한 자이니, 위서로도 진서(眞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할 것

 

이다.

 

 

(5) [滿[[] 諸族[제족]言語[언어]風俗[풍속]의 연

 

 

 

김부식(金富軾)은 김춘추(金春秋최치원(崔致遠) 이래의 모화주의(慕華

 

主義)의 결정이니, 그 지은 삼국사기에 고주몽(高朱蒙)은 고신씨(高辛

 

)의 후예라, 김수로(金首露)는 김천씨(金天氏)의 후예라, 진한(辰韓)

 

진인(秦人)의 동래자(東來者)라 하여, 말이나 피나 뼈나 종교나 풍속이 한

 

가지도 같은 데가 없는 지나족을 동종(同宗)으로 보아, ([]) 살에 쇠

 

([]) 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뒤로, 그 벽견(僻見)을 갈파한 이

 

가 없었으니, 우리 부여의 족계(族系)가 분명치 못하여 드디어는 조선사의

 

위치를 어두운 구석에 둔 지가 오래였다.

 

언제인가 필자가 사기흉노전(匈奴傳)을 보니, 삼성(三姓)의 귀족 있

 

음이 신라 같으며, ·우현왕이 있음이 고구려나 백제 같으며, 5월의 제천

 

(祭天)이 마한(馬韓)과 같으며, ·기일(·己日)을 숭상함이 고구려 같

 

, 왕공을 한()이라 함이 삼국의 ()’과 같으며, 관명 말자(末字)

 

([])’라는 음이 있음이 신지(臣智)()’와 한지(旱支)

 

()’와 같으며, ()알씨(閼氏)’라 함이 곧 아씨

 

()이 아닌가의 가설이 일며, 인축 회계의 처를 첨림(詹林)’ 혹은

 

첩림(蝶林)이라 함이 살임의 뜻이 아닌가의 의문이 나고, ‘휴도(

 

)’소도(蘇塗)’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국중에 대휴도(代休屠)’

 

를 둔 휴도국(休屠國)이 있고 각처에 또 소휴도(小休屠)’가 있어,

 

욱 삼한의 소도(蘇塗)와 틀림이 없는지라, 이에 조선과 흉노가 3천년 전에

 

는 한 실내(室內)에 형제이었다는 의안(疑案)을 가지고 그 해결을 구하였더

 

, 그 뒤에 건륭제(乾隆帝)의 흠정(欽定)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삼사국어해(三史國語解)를 가져 비교하여 보

 

, 비록 그중에 부여의 대신 칭호인 ()’를 음으로 풀이하여, 조선

 

말에 김’·라는 와 동의(同義)라 하지 않고 뜻으로 주

 

()하여 ()’의 잘못이라 하며, 금사의 발극렬(勃極列)을 음으

 

로 만든 신라의 불구내(弗矩內)’에 상당한 것이라 하지 않고 청조의 패

 

(貝勒:패리 原註[원주])의 동류라 한 것 등에 실이 없지 않으나, ‘

 

(朱蒙)’의 만주어 주림물곧 선사(善射)의 뜻이라 하며, 옥저(沃沮)

 

가 만주어의 와지곧 삼림(森林)의 뜻이라 하며, 삼한 관명 말자(末字)

 

()’가 곧 몽고어에 마관(馬官)말치’, 양관(羊官)

 

라는 의 유라 하며, 삼한의 ()’은 가한(可汗)

 

()’과 같이 왕의 명칭이요 나라의 호가 아니라 한 다수한 고증거리를 얻

 

, 또 그 뒤에 동몽고승(東蒙古僧)을 만나 동몽고(東蒙古) 말의 동서남북

 

을 물으매 연나·준나·우진나·회차라 하여 고구려사(高句麗史)

 

東部曰順那[동부왈순나] 西部曰涓那[서부왈연나] 南部曰觀那[남부왈관나]

 

北部曰絶那[북부왈절나]”와 같음을 알았으며, 또 그 뒤 일인 조거용장(

 

居龍藏)의 조사 발표한바, 조선·만주·몽고·토이기(土耳其) 4족의 현행하

 

는 같은 말이 수십 종(이제 나의 기억하는 바는, 오직 貴子[귀자]

 

, 乾漿[건장]메주라는 1,2마디뿐 原註[원주])이 있음을 보

 

, 제일보에 조···4어는 동어계(同語系)라는 억단을 내리며,

 

시 지나 이십사사의 선비(鮮卑흉노(匈奴몽고(蒙古) 등에 관한 기

 

록을 가져 그 종교와 풍속의 동이(同異)를 참조하며, 서양사로서 흉노의 유

 

(遺種)이 토이기·헝가리(匈牙利[흉아리]) 등지로 이주한 사실을 고열(

 

)하여, 제이보에 조선·만주·몽고·토이기 4족은 동혈족이라는 억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억단의 정부(正否)는 고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조선의 고어(古語)

 

뿐 아니라 만·몽 등어를 연구하여, 고대의 지명·관명의 의의를 깨닫는 동

 

시에, 이주 교통의 자취며 공전(攻戰) 침탈(侵奪)의 허()이며 풍속 동이

 

의 차이며 문야(文野) 고하(高下)의 까닭이며, 기타 허다한 사적의 탐구와

 

오록(誤錄)의 교정(校正)에도 이익됨이라 하겠다.

 

이상의 5자는 재료의 수집과 선택 등 노고에서 자가의 경력을 말한 것이

 

. 차부(嗟夫), 조선·지나·일본 등 동양문헌에 대한 대도서관(大圖書

 

)이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 십분 만족하다 할 도서관은 없다 하나 그러나 동양으로는 제일이며,

 

또 지금에 와서는 조선의 소유가 그 외부(外府)의 장()이 되며, 또 서적

 

의 구람(購覽)과 각종 사료(史料)의 수집이 우리같이 표박생활(漂泊生活)

 

중에 있는 한사(寒士)보다 나으리니, 게다가 상당한 신사학(新史學)에 소양

 

까지 있다고 자랑하나, 지금까지 동양학에 위걸(偉傑)이 나지 못함은 무슨

 

연고이냐. 가장 피중(彼中)에서 성예책책(聲譽嘖嘖)한 자가 백조고길(白鳥

 

庫吉)이라 하지만, 그 지은 바 신라사(新羅史)를 보면 배열 정리의 신식도

 

볼 수 없고, 1,2의 발명도 없음은 무슨 까닭이냐.(2행략:검열로 삭제된 듯

 

譯註[역주]) 협애(狹隘)한 천성이 조선을 속이기에만 급하여 공평을 결

 

함으로 인함인가. 조선 사람으로서 어찌 조선사학이 일본인으로부터 개단

 

(開端)하기를 바라리요마는, 조선의 보장(寶藏)을 남김없이 가져다가 암매

 

(暗昧) 중에 썩임은 탄석(歎惜)치 않을 수 없다.

 

 

5. []改造[개조]에 대한 愚見[우견]

 

 

역사재료에 대하여 그 망()을 보()하며 결()을 충()하며 위()

 

()하며 무()를 변()하여 완비를 구하는 방법의 대략을 이미 말하였

 

거니와, 편찬하며 정리하는 절차에 이르러도 구사(舊史)의 투를 고치지 않

 

으면 안될 것이다. 근일에 왕왕 신사(新史)의 체로 사()를 만들었다는

 

1,2종의 신저가 없지 않으나, 다만 신라사(新羅史)’고려사라 하

 

던 왕조단(王朝斷)으로의 식()을 고치여 '상세' '중세' 근세대'하며, '

 

지일'이라 권지이라 하던 통감(通鑑)분편(分編)의 이름을 고치어

 

1’ ‘2이라 하며, 그 내용을 보면 재기(才技)’이단

 

(異端)’이라 하던 것을 예술(藝術)’이라 학술(學術)’이라 하여 그

 

귀천의 위치가 바뀔 분이요, ‘근왕(勤王)’이라 한외(捍外)’라 하던 것

 

애국(愛國)’이라 민족적 자각이라 하여 그 신구의 명사가 다를

 

뿐이니, 털어놓고 말하자면 한장책(韓裝冊)을 양장책(洋裝冊)으로 고침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나의 우견으로 개조할 방법의 대강을 말해 보고자 한

 

.

 

 

(1) 系流[계류]을 구할 것

 

 

구사에는 갑 대왕이 을 대왕의 부요 정 대왕이 병 대왕의 제이니 하여,

 

실의 계통을 구하는 외에 다른 곳에서 거의 계통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슨 사건이든지 중천(中天)에서 거인(巨人)이 내려오고 평지에서 신산(神山)

 

이 솟아오른 듯하여 일편의 신괴록(神怪錄)을 읽는 것 같도다. 역사는 인과

 

관계로 청구하자는 것인데, 만일 이와 같은 인과 이외의 일이 있다 하면 역

 

사는 하여 무엇하랴마는, 그러나 이는 지은 사람의 부주의요 본실(本實)

 

그런 것은 아니다.

 

고로 구사에는 그 계통을 말하지 않았다 하여도 우리가 이를 찾을 수 있으

 

, 삼국사기신라사에 적힌 신라의 국선(國仙)’이 진흥대왕(眞興大

 

) 때부터 문무대왕(文武大王) 때까지 전성(全盛)하여, 사다함(斯多含)

 

은 이는 겨울 15,6세의 소년으로 그 제자의 수가 지나 대성 공구(孔丘)

 

겨루게 되었으며, 이밖에 현상(賢相양장(良將충신(忠臣용사(勇士)

 

가 모두 이 가운데서 났다(삼국사기에 인용한 金大問[김대문]의 설

 

原註[원주]) 하였으나, 그 동안이 수십년에 불과하여 성식(聲息)이 아주 그

 

, 국선 이전의 국선의 조()도 볼 수 없으며 국선 이후의 손()도 볼

 

수 없이 돌연히 왔다가 돌연히 간 국선이니, 이것이 이 신라 신괴록(神怪

 

)이 아니냐마는 고기(古記)에서 왕검(王儉)’이 국선의 비롯됨을 찾으

 

, 고구려사에서 조의선인(皀衣先人)’ 등이 국선의 하나 됨을 찾으며,

 

이에 국선의 내원(來源)을 알며, 고려사에서 이지백(李知白)선랑(

 

)을 중흥시키자던 쟁론과 예종(睿宗)사선(四仙) 유적을 가영(

 

)하라”, 의종(毅宗)국선 사로(仕路)를 중개(重開)하라는 등의 조

 

(詔書)를 보매, 고려까지도 오히려 국선의 유통(遺統) 있음을 볼지니,

 

로써 계통을 구하는 방법의 일례로 드노라.

 

 

(2) 會通[회통]을 구할 것

 

 

회통(會通)은 전후 피차의 관계를 유취(類聚)한다는 말이니, 구사에도 회

 

통이란 명칭은 있으나, 오직 예지(禮志과목지(科目志) 이것도 회

 

통의 방법이 완미하지 못하지만 이외에는 이 명칭은 응용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홀연히 모였다가 흩어지는 채운(彩雲)도 같고,

 

돌연히 불다가 그치는 선풍(旋風)과도 같아서, 도저히 모착(摸捉)할 수가

 

없다. 고려사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의 승려

 

로서 평양에 천도하며 금국(金國)을 치자 하매, 일시에 군왕 이하 다수 신

 

민의 동지를 얻어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의거하여 국호를

 

(大爲)’라 하며, 원년을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더러 대위국

 

황제의 위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인 상소를 올리더니, 반대당의 수령인 일개

 

유생 김부식(金富軾)이 왕사(王師)로서 와서 문죄하매 묘청이 변변히 일전

 

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풍광자(瘋狂者)라고 한 사평(史評)

 

도 있지만, 당시의 묘청을 이와 같이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일조에 이와 같이 졸패(卒敗)됨은 무슨 까닭이냐.

 

고려사의 세기(世紀)와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王建)

 

이 거란[]과 절교하고 북방의 고강(故疆)을 회복하려다가 거사치

 

못하고 붕서(崩逝)하므로, 그 후예 되는 제왕에 광종(光宗숙종(肅宗)

 

은 이는 다 그 유지를 성취하려 하였으며, 신하에도 이지백(李知白곽원

 

(郭元왕가도(王可道) 같은 이들이 있어 열렬하게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다 실행 못하고, 예종(睿宗)과 윤관(尹瓘)이 군신이 동심하여 두만강 이북

 

을 경영하려는 봉총(鋒銃)을 소시(少試)하다가, 반대자가 너무 많아 그 기

 

득 토지인 구성(九城)까지 금 태조에게 다시 양환(讓還)하니, 이는 당시 무

 

사들이 천고에 한사로 여기는 바이며, 그 뒤에 금 태조가 요()를 멸하고

 

지나 북방을 차지하여 황제라 칭하며 천하에 호시(虎視)하니, 금은 원래 백

 

두산 동북의 여진부락으로 아에 복역(服役)하던 노민(奴民:高麗圖經[고려도

 

]女眞奴事高麗[여진노사고려]”라 하고 고려사에 실린 []

 

景祖[경조]의 국서에도 女眞[여진] 以高麗爲父母之邦[이고려위부모지

 

]”이라 함 原註[원주])으로 일조에 강성하여 형제의 위치가 바뀌며

 

(고려사에 실린 금 태조의 국서에 兄大金皇帝[형대금황제] 致書于弟

 

高麗國王[치서우제고려국와]”이라 함 原註[원주]) 이에 국인 중 조금

 

혈기가 있는 자면 국치(國恥)에 쇄루(灑淚)할 날이다. 묘청이 이 틈을 타서

 

고려 초엽부터 전래하는 평양에 도읍을 정하면 36국이 조공한다(定都平壤

 

三十六國來朝[정도평양삼십육국래조])는 도참(圖讖)를 가져 부르짖으매,

 

대주의(事大主義)의 벽견(僻見)을 가진 김부식 등 약간인 이외에는 모두 묘

 

청을 향응(饗應)하여, 대문호인 정지상(鄭知常)이나 무장인 최봉심(崔逢深)

 

이나 문무 겸전한 윤언이(尹彦頤:尹瓘[윤관][] 原註[원주])가 일

 

치로 북벌론을 주창하므로, 묘청의 세력이 일시에 전성하였으며, 미구에 묘

 

청의 거조가 광망(狂妄)하여, 평양에서 왕명도 없이 국호를 고치며 거조(

 

)를 협박하매, 이에 정지상은 왕의 좌우에 있어서 묘청의 행동을 반대하

 

, 윤언이는 도리어 주의 다른 김부식과 동사하여 묘청 토벌의 선봉이 되

 

, 이는 묘청의 실패한 원인이다. 그러나 김부식이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

 

을 죽이고, 묘청을 토평(討平)한 후에 또 윤언이를 찬축(竄逐)하여 북벌론

 

자의 근저를 소탕하여버리었다. 김부식은 성공하였으나 조선 쇠약의 터는

 

이로부터 잡혔다고 하리라. 이렇게 참고하여 보면 묘청의 성패한 원인과 그

 

패한 뒤에 생긴 결과가 소연(昭然)하지 않은가. 이로써 회통(會通)을 구하

 

는 일례를 보였을 뿐이다.

 

 

(3) 心習[심습][]할 것

 

 

모년(연조를 잊어버렸으므로 後據[후거][]原註[원주]) 영국

 

해군성 보고에 세계 철갑선(鐵甲船)의 비조(鼻祖)1592년경 조선 해군

 

대장 이순신이라고 한 기재가 영국사에 오른바, 일인들은 모두, 당시 일

 

인의 선()이 철갑이요 이순신의 것은 철갑이 아니라 하여(일인의 이 말한

 

각종 朝鮮史[조선사]의 그 書名[서명]들을 잊었고 李朝五百年史[이조오백

 

년사]에도 이 말이 있으나 그 저작자의 성명을 잊었으므로 餘考[여고]

 

[]原註[원주]) 그 보고의 틀림을 변박(辨駁)하며, 조선의 집필자

 

들은 이를 과장하기 위하여 그 보고를 그대로 인용하여, 조선이나 일본의

 

하국(何國)이 먼저 철갑선을 제조하였는가를 암중(暗中)에 쟁론이 되었다.

 

일본인의 말은 아무 명증 없는 위안(僞案)이라 족변(足辨)할 것 없거니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그 설명한 귀선(龜船)의 제도를 보건대,

 

선을 목판으로 장()하고 철판으로 함이 아닌 듯하니, 이순신을 장갑선(

 

甲船)의 비조라 함은 옳으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불가할 것이다. 철갑선

 

의 창제자라 함이 장갑선의 창제자라 함보다 더 명예가 되지마는, 이것을

 

창제하지 않은 것을 창제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진화의 계급을 어지럽힐 뿐

 

아니라,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物理學)을 발

 

명하였다든지, 고려의 어떤 명장(名匠)이 증기선을 창제하였다는 문자가 발

 

견되었다 하여도 우리가 신용치 못할 것은, 속일 수 없음으로써 그럴 뿐 아

 

니라, 곧 자기(自欺)함도 불가한 까닭이겠다.

 

 

(4) 本色[본색][]할 것

 

 

대동운옥(大同韻玉)에 국선(國仙) 구산(瞿山)이 출렵(出獵)하여 금수

 

의 알 안은 놈이나 새끼 가진 놈을 낭자히 살육하였더니, 주인이 석반(

 

)에 자기 다리 살을 베어놓고 공은 인인(仁人)이 아니니 사람의 고기도

 

먹어보라하였다. 이는 대개 신라 당시에 술랑(述郞영랑(永郞) 등의

 

학설이 사회에 물들어 국선오계(國仙五戒)의 일조 되는살상유택(殺傷有

 

)’을 사람마다 봉행하던 때이므로, 이에 위반하는 자는 사람의 고기도

 

먹으리라는 반감으로 야점(野店)의 객주(客主)가 이같이 참혹하게 무안을

 

줌이니, 그것이 수십자뿐 되는 기록이지마는 신라 화랑사(花郞史)의 일부라

 

할 수 있으며, 고구려사 미천왕기(美川王紀)에 가로되 봉상왕(烽上王)

 

그 아우인 돌고(咄固)가 이심(異心)이 있다 하여 죽이니, 돌고의 아들인 을

 

(乙弗:미천왕의 이름 原註[원주])이 겁이 나서 출분(出奔)하여, 수실

 

촌인(水室村人) 음모(陰牟:당시 부호의 성명인 듯 原註[원주])의 집에서

 

품을 팔더니, 음모가 밤마다 와석(瓦石)을 던져 가측(家側) 초택(草擇)

 

와명(蛙鳴)을 금하게 하며, 낮이면 나무하라 하여 잠시의 휴식을 허락치 않

 

았다. 주년(周年) 만에 도거(逃去)하여, 동촌인(東村人)의 재모(再牟)와 소

 

금장수가 되어 압록강에 다다라 소금짐을 강동(江東) 사수촌(思收村)의 인

 

가에 부리었더니, 한 노구(老嫗)가 외상으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한 말쯤

 

주었더니, 그 후 또 달라고 함을 거절하였었다. 노구가 앙심을 품고 가만히

 

초리(草履) 한 켤레를 소금짐 속에 묻었다가 발정(發程)한 뒤에 쫓아와서

 

도적으로 압록재(鴨綠宰)에 고하여, 초리 한 켤레의 값으로 소금 한 짐을

 

다 빼앗고, 결태(結笞)까지 한 뒤에 방송(放送)하였다.” 이것도 불과 몇

 

줄의 기록이나 또한 봉상왕 시대에 부호의 포학과 시민과 수령의 사악(

 

)한 행위를 그린 약도(略圖)이니, 봉상왕 시대 풍속사(風俗史)의 일반(

 

)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고려사에만 없는 모왕 즉위’, ‘모대신

 

등의 연월이나 쓰며, 보기 싫은 견사모국(遣使某國)’, ‘모국내보

 

(某國來報)’ 등의 사실을 적은 것들이요, 위 양절과 같이 시대의 본색을

 

그린 문자는 보기 어렵다. 이는 유교도의 춘추필법과 외교주의가 편견을 드

 

러내, 전래하는 고기(古記) 문자(文字)를 마음대로 도개(塗改)하여 각 해당

 

시대에 상당한 사상을 흐리게 한 까닭이다. 옛적 서양의 어떠한 역사가가

 

격벽(隔璧)한 인가(隣家)에서 갑·을 양인의 논쟁하는 말을 역력히 들었다.

 

그러나 그 익일에 남들이 전하는 갑·을의 시비가 자기의 들은 바와는 모두

 

틀리었다. 이에 종고(從古) 역사 모두 갑·2인의 시비와 같이 오전(

 

)함을 적은 것이 아니냐?” 하고 자기의 지은 역사를 모두 불에 넣어버리

 

었다. 탐보원(探報員)이 들어다가 편집원이 교정하여 내고, 그 뒤에 또 잘

 

못하는 예까지 있는 신문·잡지의 기사도 오히려 그 진상과 대이(大異)

 

것이 허다할 뿐 아니라, 갑파 신문이 그러하다 하면 을파의 신문에는 이러

 

하다 하여 준신(遵信)할 수 없는 일이 많으니, 하물며 고대의 한두 사가가

 

자가의 호오(好惡)대로 아무 책임감이 없이 지은 것을 어떻게 준신할 수 있

 

으랴.

 

그리고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말왕 우()의 목을 베고 그 자리를 빼앗을

 

때 후인이 이신시군(以臣弑君)’의 죄를 가할까 하여 백방으로 우는 원

 

래 왕씨의 왕통을 잇지 못할 요승 신돈(辛旽)의 천첩 반야(般若)의 소출(

 

)”이라 하여 경효왕(敬孝王:恭愍王[공민왕])이 신돈의 집에서 어떻게

 

우를 데려왔다. 반야가 우가 궁인 한씨(韓氏)로 친모 정함을 보고 통한하여

 

일차 호곡하매 궁문도 그 원통함을 알고 무너졌다하여, 아무쪼록 우의

 

신씨(辛氏)임을 교증(巧證)하였다. 그러나 우는 오히려 송도 유신(遺臣)

 

이 있어 암혈(巖穴)에 숨어서라도 우의 피무(被誣)를 절규하였으므로, 금일

 

독사자(讀史者)들이 비록 확증은 없으나 오히려 우의 왕씨요 신씨 아님을

 

신인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왕건이 궁예(弓裔)의 제장(諸將)으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을

 

맡게 되매, 드디어 궁예를 쫓아 객사케 하고, 또한 이신시군(以臣弑君)’

 

의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궁예의 가주(可誅)할 죄를 구할새, “

 

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자식으로서, 왕이 그의 55일 생함을 미워하

 

여 버렸더니,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기병 토적하여 신라를 멸하려 하여 모

 

(某寺)에서 벽에 그린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다. 다시

 

적증(的證)을 만들새 궁예 난 뒤에 헌안왕이 엄명하사 궁예를 죽이려 한

 

, 궁녀가 누상에서 누하로 궁예를 던지니, 유모가 받다가 손가락이 그릇

 

그 눈을 찔러 한눈을 잃었다. 그 유모가 비밀히 길러내었더니 10여세가 되

 

어 유희가 심하거늘, 유모가 울어 가로되,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을 내가

 

차마 못하여 길렀더니, 이제 너의 광망(狂妄)이 이러하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내가 다 죽으리라하니, 궁예가 듣고 울며 낙발(落髮)하여 중이 되었

 

. 그 뒤에 신라 정치의 문란함을 보고, 병중(兵衆)만 모이면 대지(大志)

 

를 성취 하겠다 하고, 적괴(賊魁) 기훤(箕萱)에게 갔다가 불합(不合)하고,

 

다시 적괴 양길(梁吉)에게 선대(善待)를 받아, 병을 나누어 동으로 나와 지

 

()를 약()하였다하나, 가령 위의 소언(所言)을 다 참말이라 하면,

 

이는 궁예와 유모의 종생 비밀이리니, 듣고 전한 자 누구이며, 가령 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 형법 외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하면, 어찌

 

하여 그 말한 날짜나 처소는 적지 않는다 할지라도, 데리고 말한 사람을 어

 

찌 쓰지 않았느냐. 오늘의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생아(生我)

 

()을 위함이니, 만일 생아의 은()은 없고 살아(殺我)하려는 구()

 

있는 부모야 무슨 부모리요.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도, 만일 사관(史官)

 

의 말과 같이 그 낙지(落地)하던 날 누상에서 죽으라고 던진 날부터 부()

 

라는 명의(名義)가 끊어졌나니, 궁예가 헌안왕의 본신에 칼질하여도 시부

 

(弑父)의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왕의 능도(陵都)를 유린할지라도 모조

 

(侮祖)의 논이 될 것 없으려든, 하물며 왕의 등신을 치며 문란한 신라를 혁

 

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논이 되리요마는, 고대의 협애한 윤리관으로는

 

그 양사 헌안왕의 상과 신라국에 대한 불공으로만 하여도 궁예가 죽어도

 

죄가 남을지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불가하였으

 

.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져, 죽어도 태조 문성(文聖)의 존

 

(尊諡)를 받아도 추호의 참덕(慚德)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世達寺) 중에 일개 걸승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황궁의 왕자를 만듦인가 한다.

 

제왕이라 역적이라 함은 성패의 별명뿐이며, 정론(正論)이라 사론(邪論)

 

라 함은 다과의 차이뿐인데, 게다가 문견(聞見)의 와오(訛誤)와 집필자의

 

호오(好惡)가 섞이지 않았는가. 사실(事實)도 흘러가는 물결과 같이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나니, 이미 간 사실을 그리는 저사자(著史者)도 치

 

(痴人)이거니와, 그 그림을 가지고 앉아서 시비곡직을 가리려는 독사자

 

(讀史者)가 더욱 치인이 아닌가. 아니다, 아니다. 역사는 개인을 표준(

 

)하는 것이 아니요, 사회를 표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

 

성이 왕()인가 신()인가를 사교(査校)하느니보다, 다만 당시 지나에 대

 

하여 선전(宣戰)하고 요동 구강(舊疆)을 회복하려 함이 성공할 일인가 실패

 

할 일인가, 성패간 그 결과가 이로울까 해로울까부터 정한 후에, 이를 주장

 

한 우와 반대한 이성계(李成桂)의 시비를 말함이 옳을 것이며, 궁예(弓裔)

 

의 성이 궁()인가 김()인가를 변론하는 것보다, 신라 이래 존상(尊尙)

 

하던 불교를 개혁하여 조선에 신불교(新佛敎)를 성립하려 함이 궁예 패망의

 

도화선이니, 만일 왕건(王建)이 아니더면 궁예의 그 계획이 성취하였을까.

 

성취하였다 하면 그 결과가 어떠할까를 확인한 뒤에야 이를 계획하던 궁예

 

와 적대하던 왕건의 사정(邪正)을 말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로부터 개인을 만드느냐. 이는 고대부

 

터 역사학자의 쟁론하는 문제다.

 

이조(李朝) 전반기의 사상계는 세종대왕의 사상으로 지배되며, 후반기의

 

사상계는 퇴계산인(退溪山人)의 사상으로 지배되었다. 그러면 이조 5백년간

 

의 사회는 세종·퇴계 양인이 만든 바가 아닌가. 신라 하대(下代)부터 고려

 

중엽까지의 6백년 동안은 영랑(永郞원효(元曉)가 각기 사상계의 일방면

 

을 차지하여, 영랑의 사상이 성()하는 때에는 원효의 사상이 물러가고,

 

원효의 사상이 성하는 때에는 영랑의 사상이 물러가, 일진일퇴 일왕일래로

 

갈마들어 사상계의 패왕(覇王)이 되었으니, 6백년 동안의 사회는 그 양가

 

(兩家)가 만든 바 아닌가.

 

백제(百濟)의 치제(治制)를 온조대왕(溫祚大王)이 마련하여 고이대왕(古爾

 

大王)이 마치며, 발해(渤海)의 치제를 고제(高帝)가 마련하여 선제(宣帝)

 

마치었으니, 만일 온조와 고이왕이 아니면 백제의 정치가 무슨 형식으로 되

 

었을는지, 고제와 선제가 아니면 발해의 정치가 무슨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또한 모를 것이다. 삼경(三京) 오부(五部)의 제도가 왕검(王儉)과 부루(

 

)로부터 수천년 동안 정치의 모형이 되었으니, 왕검과 부루가 아니더면

 

조선의 국가사회가 어떻게 되었을는지 모를 것이니, 이로써 보면 일개 위대

 

한 인격자의 손끝에서 사회라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요, 사회의 자성(自性)

 

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일방으로 보자. 고려 말엽 불교의 부패가 극도에 달하여,

 

효종(元曉宗)은 이미 쇠미하고 임제종(臨濟宗)에도 또한 걸물(傑物)이 없

 

, 다만 10만인의 반승회(飯僧會)100만인의 팔관회(八關會)가 재곡(

 

)을 미비(靡費)하여 국민이 머리를 앓을 뿐이라, 사회는 벌써 불교 밖에

 

서 신생명을 찾기에 급급하므로, 안유(安裕)나 우탁(禹倬)이나 정몽주(鄭夢

 

) 들이 유교(儒敎)의 목탁(木鐸)을 든 지가 오래였다. 그 밑에서 세종(

 

)이 나고 퇴계(退溪)가 남이니, 그러면 세종의 세종이 되며 퇴계의 퇴계

 

됨은 세종이나 퇴계 자신이 아니요, 사회가 만듦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을

 

.

 

삼국 말엽 그 누백년간에 찬란히 발달한 문학(文學)과 미술(美術)의 영향

 

을 받아, 소도(蘇塗천군(天君)의 미신이나 율종(律宗소승(小乘)의 하

 

품 불교로는 영계(靈界)의 위안을 줄 수가 없어 사회가 그 신생명을 찾은

 

지가 또한 오래인 고로, 신라의 진흥대왕(眞興大王)이나 고구려의 연개소문

 

(淵蓋蘇文)이 피차 다 제교 통일의 신입안(新立案)을 내려 한 일이 있었다.

 

그럴 때에 영랑이 도령(徒領)의 노래를 부르며, 원효가 화엄(華嚴)의 자리

 

를 베풀며, 최치원(崔致遠)이 즘유(乍儒즘불(乍佛즘선(乍仙)의 신통

 

한 재주를 보이매, 이에 각계가 갈채하여 이 세 사람을 맞음이니, 영랑이나

 

원효·최치원이 모두 본인 자신으로 됨이 아니고 사회가 만듦이 아닌가.

 

이에 따라서 일개 의문이 생기(生起)한다. 원효는 신라 그때 났기에 원효

 

가 됨이요, 퇴계는 이조 그때에 났기에 퇴계가 됨이니, 만일 그들이 희랍

 

철학의 강단(講壇)에 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

 

. 법국(法國:프랑스)이나 덕국(德國:독일)의 현대에 났더라면 베르그송이

 

나 오이켄이 되지 않았을까. 나폴레옹(拿破崙[나파륜])의 웅재대략(雄才大

 

)으로도, 도포 입고 대학읽던 100년 전 도산서원(陶山書院) 부근에

 

서 났더라면, 물러가 송시열(宋時烈)이 되거나 나아가 홍경래(洪景來)가 되

 

었을 뿐 아니었을까. 대소의 분량이 그와 같이 되지는 않는다 하여도,

 

면목이 아주 달랐을 것은 단언할 수 있다.

 

논조가 이곳까지 미쳤으나, 개인은 사회 풀무에서 지어질 뿐이니 개인의

 

자성(自性)은 어디에 있느냐? 개인도 자성이 없고 사회도 자성이 없으면 역

 

사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느냐? 나는 이것을 볼 때 개인이나 사회의 자성은

 

없으나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성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나 만주나 몽고·터키(土耳其[토이기])·헝가리(匈牙利[흉아리])

 

폴란드(芬蘭[분란])3천년 이전에는 적확한 일 혈족이었다. 그러나 혹은

 

아세아에 잉거(仍居)하며 혹은 구라파로 이사하여 주()의 동서가 다르며,

 

혹은 반도로 혹은 대륙으로 혹은 사막 혹은 비토(肥土) 혹은 온대·한대로

 

분포하여 지()의 원근이 다르며, 목축·농업, 침략·보수 등 생활과 습속

 

이 해와 달을 지내어 더욱 현격이 생기어 각자의 자성을 가졌나니, 이것이

 

즉 환경을 따라 성립한 민족성이라 할 것이다. 같은 조선으로도, 이조시대

 

가 고려시대와 다르고, 고려시대는 또 동북국과 다르고, 동북시대는 삼국과

 

같지 않으며, 왕검·부루 시대와도 같지 아니하여, 멀먼 천년의 전후가 다

 

르며, 가까우면 백년 전후가 다르니, 종금(從今) 이후로는 문명 진보가 더

 

욱 속도로 되어, 10년 이전이 홍황(鴻荒)이 되고 1년 이전이 원고(遠古)

 

될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시대를 따라 성립한 사회성이다.

 

원효와 퇴계가 시대와 경우를 바꾸어 낳았다 하면, 원효는 유자(儒者)

 

되고 퇴계는 불자(佛者)가 되었을는지 모르거니와, 도량발달(跳揚發達)

 

원효더러 주자(朱子) 규구(規矩)만 근수(謹守)하는 퇴계가 되라 하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용졸(忠實庸拙)한 퇴계더러 불가(佛家)의 별종(別宗)

 

을 수립하는 원효가 되라 하면, 이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니, 하고(何故)

 

하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산출하는 원료 됨과 같으나, 인물이 시대와 환

 

경을 이용하는 능력이 다른 연고이니, 민족도 개인과 같이, 모지 모시에 갑

 

이라는 민족이 가서 그 성적이 여하하였으니, 을 민족이 갔더라도 꼭 이만

 

한 성적을 가졌으리라 하면, 너무 급속한 판단이다.

 

대개 개인이나 민족이 양개 성이 있으니, 은 항성(恒性)이고, 는 변성

 

(變性)이니, 항성은 제1 자성(自性)이요, 변성은 제2의 자성이니, 항성이

 

많고 변성이 적으면 환경에 순응하지 못하여 멸절(滅絶)할 것이며, 변성이

 

많으면 우자(優者)의 정복을 받고 열패(劣敗)할 것이니, 늘 역사에 회고하

 

여 양개 자성의 다과를 조제하며 경중을 평균히 하여, 그 생명이 천지와 같

 

이 장구하게 될 것은 오직 민족적 반성에 뇌()할 것이다.

 

이상에 의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양개 결론을 지었으니,

 

사회의 기정(旣定)한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매우 곤란하고, 사회의

 

미정(未定)한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아주 쉽다는 것이다.

 

정여립(鄭汝立)충신은 이군(二君)을 불사(不事)하며 열녀(烈女)는 이

 

(二夫)를 불경(不更)한다의 유가 윤리관을 일필로 말살하여, “인민에

 

해되는 군()은 시()함도 가하고 행의(行義) 부족한 부()는 거()

 

도 가하다하며, “천의(天意) 인심(人心)이 이미 주실(周室)에 거()

 

였는데 존주(尊周)가 무엇이며, 인중(人衆)과 토지가 벌써 조조(曹操)와 사

 

마의(司馬懿)에게 돌아갔는데 구구 일우 유현덕(劉玄德)의 정통(正統)이 다

 

무엇이냐하는 공구(孔丘주희(朱熹)의 역사필법(歷史筆法)을 반대하

 

, 그 제자 신극성(辛克成) 등은 이는 참 전성(前聖)의 미발(未發)한 말

 

씀이라하고, 재상과 학자들도 그 재기(才氣)와 학식에 경도(傾倒)하는

 

이가 많았으나, 세종대왕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부식(扶植)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선생의 존군모성(尊君慕聖)의 주의(主義)가 이미 집을 지어 전사

 

회가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 같은 돌비적(突飛的) 혁명적 학자를 용납하리

 

. 그러므로 애매한 일지(一紙)의 고변장(告變狀)에 신수(身首)가 이처(

 

)하고 전가가 구허(丘墟)하니, 평생 저술이 모두 화장(火葬)에 들어감이

 

, 이는 곧 에 속한 것이다.

 

최치원이 지나 유학생으로 발정(發程)할 때 그 아비가 “10년이 되어도 과

 

(科名)을 얻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라하여 일개의 한문(漢文)

 

업생 됨을 바랐을 뿐이다. 최치원이 돌아와서 巫峽重峰之歲[무협중봉지

 

] 絲入中原[사입중원] 銀河列宿之年[은하열숙지년] 錦還東國[금환동국]”

 

을 노래하여, 치원 자신도 또한 일개 한문 졸업생 됨을 남에게 자랑하였다.

 

그 사상은 한()이나 당()에만 있는 줄 알고 신라에 있는 줄은 모르며,

 

학식은 유서(儒書)나 불전(佛典)을 관통하였으나 본국의 고기(古記) 일편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순 지나화 하려는 것뿐이고,

 

그 예술은 청천(靑天)으로 백일(白日)을 대하며 황화(黃花)로 녹죽(綠竹)

 

대하는 4·6문에 능할 뿐이었다. 당시 영랑과 원효의 양파가 다 노후(老朽)

 

하여 사회의 중심되는 힘을 잃고, 신인물에 대한 수요가 마치 기자(飢者)

 

밥을 구함 같으니, 1보에 대선생 휘호(徽號)가 일개 한문 졸업생에게로

 

돌아가며, 2보에 천추혈식(千秋血食)의 예()까지 그에게 바치어, 고려

 

에 들어와서는 영랑과 원효의 양파가(兩派家)로 대석(對席)하게 됨이니,

 

때를 만나면 수자(竪子)도 성공한다함은 이를 두고 말함이니, 이는

 

에 속한 것이다.

 

어찌 학계뿐이랴. 모든 사업이 그러하니 기훤(箕萱)과 양길(梁吉)도 일시

 

에 웅장(雄張)함은 나말(羅末)의 미정한 국면에서 일어남이요, 이징옥(李澄

 

)이나 홍경래(洪景來)가 거연히 패망함이 이조의 기정한 국면으로서이다.

 

임백호(林白湖)가 말하기를 나도 중국의 육조나 오계시대를 만났더라면,

 

돌림천자는 얻어 하였겠다고 하였다. 임백호(林白湖) 같은 시인에게,

 

·오계의 유유(劉裕)나 주전충(朱全忠) 같은 홍호적(紅鬍賊) 괴수와 동등

 

이 되어 돌림천자나마 돌아오게 할 위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지나의 천자를 경영하려면 한·당의 치세보다 육조·오계의 난세(亂世)

 

쉬울 것은 자연한 이()일 것이다. 기정(旣定)한 사회의 인물은 늘 전인의

 

필법을 배워 이것을 부연(敷演)하여 이를 확장할 뿐이니, 인물 되기는 쉬우

 

나 그 공이나 죄 크지 못하며,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의 유 原註[

 

])은 매양 실패로 마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한질(恨嫉)하여 언론

 

이나 행사의 종적까지 소멸시키는 고로,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영도

 

(零度)가 되고, 오직 3백년이나 5백년 뒤에 1,2 지음(知音)이 있어 그 유음

 

(遺音)을 상()할 뿐이요, 미정한 사회의 인물은 반드시 창조적·혁명적

 

남아라야 될듯하나 어떤 때는 꼭 그렇지도 않아서, 소도세공(小刀細工)

 

하품재자(下品才子:최치원의 유 原註[원주])로서 외국인의 구문(口吻)

 

모방하여 언소가곡(言笑歌哭)의 핍진이 사람을 움직일 만하면 거연히 인물

 

의 지위를 소득하기도 하나, 인격적 자성(自性)의 표현(表顯)은 없고 노예

 

적 습성만 발휘되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매몰하고 변성(變性)만 조장하

 

는 악기계(惡機械)가 되고 마나니, 이는 사회를 위하여 공구(恐懼)하는 바

 

이며, 인물 되기에 뜻하는 자의 계신(戒愼)할 바라 하노라.

 

 

<朝鮮日報[조선일보] 1931.6.10~6.25, 14>

 

 

저작물명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저작(권)자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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