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정연희 - 반항과 고독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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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반항(反抗)과 좌절(挫折)과 그 극복(克服)
金  宇  鍾

반항과 고독

  

 

정연희가 1957년에 단편<파류상(波流狀)>으로 신춘 문예를 통해서 데뷔할 때는 대학생이었다. 그 이듬해 이대를 졸업하고 그는 단편은 물론 장편도 끊임없이 발표해 나갔다. 그리고 한때 대학의 강단에도 섰었고 세계 각국에 나들이도 꽤 많았다. 그만한 나이. 그리고 여류 작가로 볼 때 한국 문단에서 그만큼 분주한 사람도 드물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처럼 분주한 삶 속에서 정연희에겐 수난도 많았다. 70년대 이후엔 특히 신앙 생활에 더욱 뜨거운 정열을 쏟고 작품은 이를 통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다가 교통 사고까지 겪었다. 교회로 가는 길에 겪은 것이다.

  내가 처음 병원에 찾아갔을 때 그는 간신히 눈을  뜨고 오히려 그 같은 시련으로 자신을 더욱 가까이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하며 기운 없는 목소리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잘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짐작할 수는 있었으며 시련을 통해서 이 작가가 또 한 번 한 계단을 밟고 변모하며 자기의 문학 세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변모와 발전은 아마도 이 작가가 처음에 데뷔한 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런데 그처럼 끊임없이 계속된 변모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작가 생활 속에서 정연희가 추구해 나간 목표는 거의 단 한가지로 집약된다.

  그리고 이 같은 목표에 대한 집념은 아주 강하고 끈덕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집념이 아무리 강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어떤 과욕, 또는 더 나아가서 허욕에 해당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소망치고는 가장 소박하고 겸손하고 작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같은 작은 소망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그가 그토록 많은 아픔과 기나긴 세월을 모두 바쳐야 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하는 것일까?

  정연희의 문학은 인간 존재의 숙명적인 고독에서부터 출발한다. 남들이 흔히 관념적으로 또는 얄팍한 감상적 유희로 다루기 쉬운 그것을 이 작가는 극명한 논리와 밝은 혜안과 정직성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결과 이방인의 뫼르소의 경우처럼 비극적인 반항과 좌절의 길을 겪었었다.

  모든 인간은 고독한 존재다. 그 운명은 이 작가의 글에 나오는 '기적도 주님의 은총도' 그 무엇도 어쩔 수 없는 것이요, 누구나 자기 운명은 자기 혼자 감당하며 살아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남의 운명에 개입할 필요가 없고  개입할 권리도 전연 없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울든 말든 그것이 고인이나 고인의 친구나 어는 누구의 운명과도 완벽하게 단절된 뫼르소만의 것인 이상 그것은 절대적인 자유여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자유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무 데도 없다. 전쟁, 도덕적인 편견, 집단의 권력,

또는 어떤 가장 가까운 동료까지도 이것을 방해한다. 모든 인간은 고독한 자기 운명을 살고 있지만 아무도 그 같은 고독 속에서 진실한 자유를 누구에게도 용납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반항이 시작된다. 남의 것을 앗으려는 반항이 아니라 다만 자기 것을 앗기지 않으려는 반항일 뿐이다.

  즉, 에고를 지키기 위한 정당 방위의 반항이다. 그리고 그 에고[自我]에 대한 부당한 침해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에고는 더욱 단단하게 응결되고 빛깔이 선명해질 수밖에 없다.

  정연희 초기작은 거의가 이 같은 에고를 지키기 위한 고독한 싸움으로 집약 될 수 있지 않을까?

  <백조의 행진>에서 보면 발레리나를 꿈꾸는 소녀 영이를 통해서 작가는 이류 사회의 잔인한 죄악을 고발한다. 영이의 경우로 보자면 그녀의 소망은 어느 누구를 침해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소망은 오직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꿈을 키우는 것이요, 거기서 영이의 에고는 전적으로 순수하고 순결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같은 의미의 에고의 확충은 전쟁의 도발자에 의해서 비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영이는 병원에서 적군의 장교를 만난다. 그는 비록 적군이지만 꽃을 사랑하고 노래를 좋아하며 소녀를 좋아하고 이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 전쟁이 누구에 의해서 도발된 것이든 이 인물의 인간적 순수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처럼 가혹하고 비정한 전쟁 속에서도 이 같은 인물을 통해서 나타나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꿈은 사라질 수 없다. 그런데 결국 그는 병원에서 죽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영이 역시 그 후에 천신 만고하여 겨우 어머니를 만나지만 그들 역시 만남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폭격으로 죽게되고 마는 것이다.

  작자는 이렇게<백조의 행진>에서 그 같은 평화에의 꿈, 그리고 어느 누구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는 순수한 인간의 욕망을 모조리 파괴해 버리는 전쟁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전쟁의 고발은 그가 이 작품 이전에 발표한 <파류상> <나선 계단> <정점> <어느 하늘 밑> <소리 치는 깃발> 등 여러 단편 또는 중편과 함께 볼 때 여기서는 중요한 하나의 무제가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전후파적인 20대 여성이든 아니든 간에 자기 자신의 삶의 목표를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그것은 외부적 환경 속에서 장벽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장벽은 낡은 도덕적 관념일 수도 있고 제도일 수도 있고 위선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같은 것이 존재하는 이상 이에 대한 반항은 <소리 치는 깃발>에서 십대의 이유 없는 반항처럼 성인 사회로부터 단죄당하는 것이 되고 <파류상>의 경우엔 한 수녀의 반항으로서 파계라는 죄명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녀는 비극적 운명에 말려들게 된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삶의 목표를 지니고, 그 같은 목표를 추구할 자유가 있고 권리가 있으며, 그것이 어느 누구의 이익도 침해하지 않는 순수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같은 에고의 발견과 확충은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백조의 행진>의 주인공 영이가 그녀의 순수한 소망이 비참하게 짓밟히고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에고의 발견과 그 확충이 그처럼 비극적인 것이다. 그리고 에고의 발견과 그 확충이 이 같이 숙명적인 비극성을 띠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비록 그만큼 정직성과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양식을 발견한 것일 수는 있어도 보다 더 바람직한 차원으로서의 인간 영혼의 구원의 단계는 아니다. 왜냐면 자기 자신의 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강한 집념으로 추구해 나갈수록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완강한 도전에 부딪쳐 오히려 종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인종과 구조

  그런데 이 같은 반항은 60년대 후반기부터 의미와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에고를 침해하는 상대가 보다 넓게 사회적인 것으로 집약됨으로써 그만큼 문제 파악이 근원적인 것으로 심화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변화는 에고에 대한 집념이 에고의 양보로 나타난 것이다. 반항 형태가 역전해 버린 셈이다.

  반항의 역(逆)이라면 그것은 굴복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경우는 결코 굴복은 아니다. <겨울 새와 개나리>에서 우리 모두의 '봄'을 기다리는 착한 새는 '봄'의 눈[芽]을 쪼아 먹는 새를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감싸 준다. 그래서 참회하며 죽어 간 그 새의 무덤엔 영원한 생명의 봄이 다시 싹트게 된다. 사랑과 양보와 인종(忍從)으로 주인공은 보다 더 큰 자아를, 자시 혼자만의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의 그것을 찾아 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닫음이 아니라 열어 줌으로써, 또는 거부함이 아니라 내어 줌으로써, 또는 손을 오므림이 아니라 펼쳐 줌으로써 더 많이 자기 것을 얻노라는 신념과 그 논리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꽃을 먹는 하얀 소>에서도 그렇다. 들판에 여러 마리의 소들이 있다. 검정 소, 하얀 소, 얼룩 소, 누런 소 등 가지 각색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얀 소만은 딴 소들과 다르다. 그는 비쩍 말라  있다. 그는 꽃만 따먹는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일만 하는 황소를 만나서 인간 사회의 만행을 듣게 된다. 혹독하게 부려먹고 죽일 때는 거꾸로 매달고 물을 먹이며 매질해서 근수를 불리는 악독하고 잔인한 인간들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하얀 소는 눈물을 흘린다.

  '하나님, 저 황소를 그런 운명의 길에서 비켜나게 해주세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저 누런 소가 그런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얀 소는 울면서 이렇게 누런 소를 위해 기도까지 한다.

  이렇게 남을 위해 눈물까지 흘리고 기도를 올리는 하얀 소는 이미 자기만의 욕망을 위해서 사는 존재는 아니다. 그에게는 자기보다 남이 더 소중하고 그 같은 삶 때문에 남들이 끌려가는 도수장 길을 면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는 우연히 얻은 그 같은 행운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욱 슬퍼지며 불행한 친구들을 위하여 회오의 눈물마저 흘리는 것이다.

  이런 스토리를 통해서 이 작품 역시 이 작가의 초기작들과는 정반대로 나 보다는 우리를, 나보다는 남을 위해 자기의 욕망을 내던진 상태가 더욱 고귀한 삶의 형태를 지닌 것으로 미화되고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아마도 <대합실>에서 더욱 폭넓게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상징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가장 테마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의 인종과 미래에의 신념이다. 그리고 그 같은 절망적 상황으로써 작자는 상징적인 의미의 대합실을 무대로 삼고 있다. 어떤 뜻에서는 모든 인간은 대합실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론가 목표를 향해서 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차를 타고 달리고 있다 하더라도 목표에의 도달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는 대합실의 인간이나 다름없으니까.

  이 작품 속의 대합실엔 온갖 인물들이 모여 있다. 무식한 자이든 유식한 자이든 대개 그들은 남을 속이고 남을 헐뜯고 자시만의 욕망을 위해서 산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절망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기 위한 차를 기다리기 위해서 정거장의 대합실에 모여 들었지만 게시판에 적혀 있는 열차는 시간이 되더라도 한번도 도착한 일이 없으며 언제나 연발만을 알려 오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그 같은 열차가 오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또 그만큼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대합실은 그것이 어떤 특정 사회이든 또는 인간 사회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든 하여간 미래의 희망을 상실해 버린 절망적인 사회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래도 그 같은 열차가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여인이 있고 또 그녀에게 그것을 믿도록 격려해 주는 노인이 있다.

  "그 기차는 있는 거죠?  틀림없죠?  저는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기다릴 거예요."

  " 아암, 있고 말고. 있어요, 있어.  그것만 타면 어디든지 갈 수 있지.  어디든지 가고 싶은 대로 그것만 타면 색시가 가고자 하는 데를 갈 수 있고 말고."

  "그런데 나는 기차표를 살 돈이 없는 걸요."

  "그거야 동행을 만나면 될 일 아니겠나."

  "제가 동행을 만날 수 있을까요?"

  "믿어 보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지."

  이 같은 대화와 함께 나타나는 인종과 기다림은 초기작에서 나타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자아의 발견과 그것을 고수하려는 의지가 외부적 환경에 부딪쳐 좌절하게 되던 인물들과 달리 이들은 모든 시대적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내일이라는 시간은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같은 인종과 기다림의 철학은 어떤 의미에선 신앙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밖에 70년대에 나타난 정연희의 작품들은 꽤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남을 가둔 자와 남에 의해 갇힌 자의 문제를 다룬 <갇힌 자유>는 꽤 시니컬한 아이러니까지 풍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을 가둠으로써 더욱 자유롭고 즐거워 할 사람이 오히려 불안과 공포로 전전긍긍하고 심리적 압박감에 짓눌려 있는데 반하여 남에 의해서 갇힌 자는 오히려 그 같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역시 인정과 기다림의 철학, 또는 자기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자기 것을 내 줌으로써 오히려 더 큰 보상을 얻는 여러 작품들과 같은 맥락에 연결된다. 그리고 <이천 년의 독백>은 오늘의 비정하고 메마른 문명을 비판하면서 인간 회복을 절규하며 역시 그 바탕엔 그 같은 넓은 의미의 인종과 사랑과 구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70년대의 우화와 풍자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주로 정 연희의 작품들에 나타난 주제의 변모와 발전 과정이다.

  그런데 60년대 후반기 특히 70년대부터 나타난 그의 작품엔 테마가 지니는 중요성 이외에 떠 하나의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이 곧 70년대 초기의 외부적 상황과 관련된 풍자와 우화의 기교적인 변화인 셈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70년대 초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문학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딪친 것이다. 정치적 체제의 급변을 말미암아 문인들은 새로 제정된 법의 테두리 안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 셈이다. 물론 정치적 문제, 사회적 제도의 문제, 또는 그것과 관련된 경제적 문제 등 특히 새로운 질서의 정착을 위해서 요구된 금기 사항에 해당하지 않는 것만을 말해 나가는 문학이라면 이 같은 변화는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형태가 그 같은 온갖 문제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좌우되는 것이 사실이고 또 문학은 항상 그 시대의 증언이라고 할 때 그 같은 문학이 부딪친 당혹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70년대 초기엔 비록 잠시나마 우리 문학이 위축되는 사태마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 일부 작가는 대번에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곧 우화의 형태요 또는 기타의 풍자적인 형태의 문학이며, 정연희는 그 중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크게 주목을 끌게 된 셈이다.

  <겨울 새와 개나리> <꽃을 먹는 하얀 소> <대합실> <갇힌 자유> <혼자 서있는 나무> 등이 모두 그렇다. 이 중의 몇 작품들 속엔 새와 소와 나무가 등장하고 이들이 의인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특정 현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이 아니며, 비록 일반적인 소설 형태가 대개 상징이라 하더라도 이는 특히 우회적이다. 그리고 <대합실>은 우화적인 기법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실로 어디에도 그 같은 형태의 대합실이 실제로 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그것 역시 매우 우회적인 기법으로 우리들의 인간 사회를 상징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어떤 특정 시대 특정 현실일 수도 있고 또는 그 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본질적인 인간 사회의 영원한  상징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갇힌 자유>에서도 그것은 의처증에 걸린 남편이 아내를 아파트에 가둬 놓고 출근하는 것이지만 그 아파트나 그 속에 갇힌 아내, 또는 아내를 가둔 남편은 딴 의미의 상징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이 같은 작품들은 풍자적으로 작가의 비판 의식이나 시대적 증언을 나타내는 양식이 된다.

  그런데 이 같은 풍자나 우화적인 기법은 과거의 문학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하나의 궁색한 방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우리는 정연희의 작품에서 오히려 더 높은 문학적 발전을 찾아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같은 방법에 의해서 더욱 높은 상징적 형태에 도달하고, 그럼으로써 더욱 깊고 넓은 의미의 풍요성과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로써 우리 문학의 기교적 변화와 그 발전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 같은 방법에 의해서 더욱 이 시대의 아픔과 그 진실에 접근하고, 동시에 문학은 인류의 구원에 참여한다는 훌륭한 기능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정 연희의 작품들은 70년대 문학사에서 새로운 장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지(理智)로 그린 인간학

張  伯  逸

1

  여류 작가 박 순녀는 함남 함흥(咸興) 태생으로, 1928년 9월 1일에 세상에 태어 났다. 함남 고등 여학교를 거쳐(1944), 원산 여자 사범 학교 강습과를 수료(1945)한 후 월남, 서울대학교 사범 대학 영문과를 졸업(1950)했다. 서울 중앙 방송국 문예계(1955~58), 성루 동명 여고 교사(1956~59), 이후 작가 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단편 <케이스워카>(1960)가 조선 일보 신문 문예 현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중편 <스꼴까 장수>, 단편 <아이 러브유>, <외인촌 입구>, <임금의 시>, <로렐라이의 기억>, <정조>, <영어열(英語熱)>, <잃어버린 과거>, <고독한 방관자> 등의 역작을 발표했다.

    <임금의 귀>는 한 여성의 생활상을 그린 작품으로 높이 평가 되고 있다. 줄거리살펴보면 주인공 명화는 자기의 작품을 읽었다면서 세계 역사 연표하는 소사전을 보내 준 지숙이라는 동년배의 여성을 알게 된다. 자기의 내면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말과움직임을 찾아 헤명화는 지숙이에게서 좋은 자극과 격려를 받으면서도 지숙은 졍제에 이바지한 공으로 딸을 프랑스까지 보낼 수 있느 재산가의 딸이라는 것을 통감한다. 교육에 이바지 한다는 말이 즉 학교 재벌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현실에서, 그러나 명화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고, 또 않을 자기를 다짐한다. 피의 자국이 임리(淋 )했던 자기의 발자국, 그것은 맨발로 자기처럼 뛰어본 자가 아니고는 도저히 알수 없는, 있는 힘을 다한 작업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이 밖에 장편 <난(蘭)>은 여자 사번 학교 기숙사에 든 네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그린작품이다. 단편 <어떤 파리(巴里)>로 현대 문학사 신인 문학상을 받았으며, 일본 아사히 신문사 (朝日新聞社)의 <아시아 리뷰>지의 아시아 문학 특집호에 전역 게재되었다.

  이 외에도 단편 <싸움의 날의 동포>, <단절>, <남자 친구>, <전시대적 이야기>, <장갑을 벗는 여자>, <빨간 한복의 여인>, <고색 찬란>, <검비 아내의 소녀>, <이웃 돕기>,<꿈 많은 손>, <잘못 온 청년>,<감사합니다>, <밤에서 밤으로>, <사에서 만난 사람>, <생명 안치소>, <센티멘털져니>, <별 같은 아이>, <우리는 대열(隊列)., 중편 소설 <영가(靈歌)>, 장편 소설 <강(姜)바위돌씨(氏)>, <눈 속에 가슴속에>, <어느 계절과 함께>, <먼 나라의 강> 등 괄목할 만한 문학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2

  박 순녀의 대부분의 작품 세계는 여인의 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국민 학교 학생에서 중학생, 고등 학생들의 학창 생활을 다루고 있으며, 디자이너 같은 직업 여성 또는 가정 주부 등 여인들의 얼굴도 다양하다. 여학생들의 주소를 살피면 거의가 이북 함흥쯤이 고향이고. 해방 후 월남,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결혼 생활에 실패한 여인도 있으며, 그 후 대혼한 얼굴도 보인다.

  그녀들의 성격은 한결같이 여성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 말 그대로 마음씨가 아름답고 사랑을 대인 관계의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자유와 이지적 생활을 찾는 얼굴들이다.

  임 작가의 성장 계보에서 엿보이듯 작품 주인공들은 박 순녀 자신의 얼굴과 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어느 의미에서 주인공들은 작가 자신의 분신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기 자신을 통한 인생의 해석과 이해임을 짐작케 한다.

  어느 작품에서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애이다. 인간 옹호에의 사랑이 작품 배후에서 스스로 우러나옴을 읽는다. 무한한 애정으로 감싸면서도 사리를 분명하게 밝히려는 이지적 인격을 버리지 않는다.

  사건의 전개나 그 처리에 있어서도 그의 이지적인 사고는 도처에서 엿보인다. 하나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그리되, 그로부터 인간적 삶을 제시하면서 문제 해결에의 이지적 태도를 잊지 않는다. 곧 현실 속에서 생활이라는 일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생활에의 길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는 본 전집의 여러 소설에서도 엿보인다.

  먼저 단편 <아이 러브 유>를 본다. 이 소설은 작가의 여학생 시절을 엿보세 하는, 학창 시절이 그 무대로 등장하고 있다. 여학교 때란 여성의 일생을 통해 가장 꿈이 많은 동경에서의 시절일 것이다. 엄한 학칙에 순응하면서도 그로부터 벗어나 엉뚱한 모험을 즐기려는 나이요, 신비스러운 이성에 눈을 뜨는 사춘기의 꿈이 그들에겐 있다. 작품 <아이 러브 유>도 바로 이런 여학생들의 꿈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일제 때의 여학교란 오늘의 그것과는 다르다. 교칙이 엄하기란 오늘이나 그때나 다를 바 없겠지만 교육 방법이 오늘과는 달랐다. 일제하이고 보면 여학교 교육 또한 식민지 교육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여학생들도 이른바 근로 동원이라는 미명하에 노력 봉사에 동원되었고, 간호원 지원을 독촉하는 등 한마디로 일제의 제물, 그것을 강요 하는 교육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이 러브 유>는 바로 그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 일제하의 교육이었으면서도 여학생으로서의 호기심과 티없는 장난을 펼쳐 보여 준 것이 걷 이 작품일 것이다.

  어느 날. 이 학교에 야마끼라는 일어와 작문을 가르치는 선생이 부임해 왔다, 선생의 이름 대신에 별명짓기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은 야마끼 선생에세 '브라운씨'라는 별명을 증정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나온 소문인지 '브라운씨'의 발가락이 여섯 개인 육발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여학생들은 어떻게 하든지 그 발가락을 보겠다고 후작을 부린다. 이를테면 '브라운씨'의 양말을 벗겨 보겠다는 것이 하나의 과제라면 과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심기의 근로 동원이 있었다. 드디어 좋은 찬스가 왔다고 학생들은 반겼다. 모를 심으려면 어차피 양말을 벗어야 하고, 그 사이에 확인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 그 기회를 노렸지만 '브아운씨'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모심기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학생들은 더 의심이 가는 것이었다. 분명 육발이기 때문에 감추기 위한 꾀병으로 여겼다.

  모심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봉숙 여학생은 '브라운씨' 뒤에서 뜻있는 노래를 던진다.

  "코는 하나요, 눈은 둘이요, 입도 하나요, 발가락은 여섯 개."

  '브라운씨'를 생각하고 하는 노래였지만 이런 노래에도 '브라운씨'로부터는 육발의 기미를 찾아볼수 없었다. 이에 실망한 학생들은 또 다른 익살을 부렸다.

  마침, 그들 옆을 도망병처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범 학생들을 향해 '아이 러브 유'를 장난 삼아 토해 버렸다. '브라운씨'의 육발을 확인하려다 실패한 봉숙이의 말이었다. 뒤를 따라오던 교장 선생이 이 말을 들었고, 교장 선생으로부터 심한 노여움을 사게 된다.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봉숙과 '나'는 교무실에 꿇어앉아 교장 선생과 훈육 선생으로부터 갖은 욕을 듣는다. 그것이 학생으로서 할 말이냐는 점에서 호된 꾸중을 듣는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일본군대로 입영해 가는 출정 병사들을 전송하기 위해 역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로 여학생들은 학교의 지시대로 역으로 나갔다. 일제의 간호원으로 지망해 가는 '그녀'를 전송하기 위해서이다. 학생들은 갓난아이를 떼 놓고 간호원으로 나가는 모자의 이별 장면을 목격하고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용기를 동경하게 된다. 이런 따분한 학교 생활보다는 차라리 적십자 간호원으로 지망해 보릴까 하고 장난삼아 하는 말을 교장이 듣곤 다음날부터 지망 독촉을 받는다. 갖은 잠언으로 지원서를 쓸 것을 종용하나, 학생들은 한결같이 이에 반대했고,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는 줄거리. 해방과 더불어 주인공들은 서울로 남하했고, 그토록 알고 싶어했던  '브라운씨'의 발가락이 육발이 아니더라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제하의 시대적 불행을 배경으로 깔면서 여학교 시절의 소녀적 낭만 속에 펼쳐지는 호기심과 그들 나름대로의 한 가닥 저항을 읽게 한다. 그러면서 그로부터 무한한 인간애의 휴머니즘에 젖게 한다.  

  한편 이러한 인간애의 휴머니즘은 소설 내용은 다르지만 <잘못 온 청년>에서도 접하게 된다. 정과정으로 이어가는 인간애가 무엇인가를 이로부터 실감한다.

  <잘못 온 청년>들은 홍섭, 익재, 기범 등의 월남민들이다. 이들은 북괴를 거역하는 함흥 학생 사건에 가담한 학생들이었고, 이를 계기로 월남한 사람들이다. 월남민으로서 이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다. 서울에서 이들의 유일한 빽이란  그들이 이북에서 듣던 것과는 딴판인 가난한 '나'밖에 없다. 방이라고 해야 두 개, 다다미방이 고작이다.

  어느 날 이 세 청년이 '나'를 찾아 왔다. 같은 또래이건만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반가운 정이야 어디에다 비하랴만 그들은 반기기엔 생활이 너무나도 구차하다. 또 남편이 어떻게 받아 줄는지 그걸 생각하면 차라리 찾아오지 않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갈 곳이 없으면 '누나'인 내 집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더니, 생계를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었다. 미군 부대에라도 쑤시고 들어가 목구멍에 풀칠할 곳을 찾기에 혈안이었지만 그런 속에서도 의지와 패기만은 만만했다. 하나만 떨어져도 못 살기라도 하듯 그들은 한 형제처럼 붙어 다녔고, 매사를 함께 해 나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외롭기 그지없는 그들, 외로움에 지쳐 '나'를 찾아와선 되레 나를 위로해 주는 그들, 플루트, 파곳, 호른 등을 어디서 구했는지 그것들을 연주하며 날 위로해 줄 땐 사랑으로 불타는 눈물이 솟아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온 그들의 옷은 군복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육군 사관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이었고, 6개월 후면 육군 소위가 된다는 것이었다. 군인으로의 패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고, 그 패기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 듯했다.

  언젠가 남편과 이들 사이에 토론이 있었다. 남편은 북괴가 쳐내려 올 것을 예언했고, 그때 살려면 도망을 쳐야 하는데 뭣 때문에 군에 입대했느냐고 육사 입교의 반대론을 펴는 것이었다.

  이에 그들은 한결같이 반대 의사를 표명, 만일 북괴가 밀고 온다면 스스로 나아가 싸울 결의를 굳게 했고,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지키겠는가고 응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은 그들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었다.

  6개월 후 그들은 육군 소위에 임관되었고, 또 셋이 같은 사단에 배치되었다. 군인이 된 뒤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나'를 찾아주곤 했다. 남편은 그 후 나와의 이혼을 선언하고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 북괴의 남침이 있었다. 6.25가 일어난 것이다. 분명 세 청년들은 북괴를 맞아 용감한 싸움을 하였겠지만 6.25 후에도 영 소식이 없었다. 전사를 했는지 아니면 '나'를 잊어버렸는지 세월은 흐르건만 생사의 소식은 없었다.그런데 실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한 통이 편지가 월남으로부터 날아들었다. 그 편지로 홍섭과 익재가 전사한 것을 알게 되고 찾아오지 못한 까닭을 알게 된다. 그것은 기범이가 보낸 편지였다.

  그러나 홍섭이도, 익재도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저도 역시 언젠가는 목숨을 잃겠지요.

  우리가 동원된 과거의 싸움이나 현재의 싸움이 후세에 어떻게 평가될지 저는 모릅니다. 그 계산을 할 수 있었다면 군복을 입는 사람은 되지 않았겠지요.

  저는 저 나름의 욕구 불만으로 괴로워질 때면 제 군복을 한참씩 내려다 봅니다.····그 군복은 얼마나 무능한 청년들을 굴욕으로부터 건져 주고. 전사라는 사랑하는 사람들 가슴에 무한한 애석을 남겨 주는 영광된 죽음을 갖다 주곤 했을까요. 혹 식자( 者)들이 우리를 파멸의 언덕으로 굴러 떨어지는 조국의 제물이라 해도 저는 기꺼이 그 제물로 생애를 끝마치거 저의 몸 위로 시대의 목중한 차륜이 딛고 넘어 가는 것은 견디겠읍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보내 드리는 이 열매는 이전에 누님을 찾아가 세 명의 꼭 같이 무능한 청년이 시념으로 보내는 것이라 알고 어디엔가 심어 주십시오.

  이것은 월남에서 보낸 기범의 편지의 일부이다. 이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듯 전쟁을 통한 인간의 해석과 이해를 깨닫게 한다. 그러면서 삶의 의미를 심원으로부터 들여다보게도 한다. 그 심원을 들여다 보면서 조국의 제물이 됨에 목숨은 아끼지 않겠다는 굳은 인간의 신념을 읽는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의 신념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이지적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그 이지는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인간애로부터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캔다.

  기실, 어떻게 보면 인생이란 별것도 아니다. 그날그날 남이 살아가는 방법을 되풀이하며 일반적인 세강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본래적인 자기로서 산다기 보다는 퇴폐적인 세상 사람으로 풍설(風說), 호기심, 애매성 등으로 은폐시키면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적인 나로 돌아가 나를 찾는 자유로운 인간 존재의 존재 방식이라곤 할 수 없다. 일상적인 생활에 젖어 유용적(有用的)인 물건에 사로잡힌 나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영업이 있을 뿐이다. 생활에의 영업, 그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일상적인 입장에 수반되는 은폐적인 경향에 반항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홍섭, 익재, 기범의 세 청년은 그런 은폐적인 생활에 반항했던 생활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적어도 일반적 세상 사람과는 다른 생활신념 속에서 자아의 철학을 찾은 사람들이다. 자기의 현 존재에 있엇 하나의 형식을 꾀한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그 혁신으로부터 새로운 자아를 찾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기 현 존재의 혁신이 어떻게 가능하며, 본래적인 실존에의 결단적 돌진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바로 그것을 세 청년의 삶으로써 보여주고 잉T다 할 것이다.

  이어 <어떤 파리>에 이르면 실존에의 각성을 대자(對自)보다는 대타(對他)적인 문제에서 각성시킨다. 대자가 자아에 관산 것이라면 대타는 사회에 관한 것이다. 자아에 관한 것은 바로 개인 윤리를 뜻하는 말이고, 사회에 관한 것은 사회 윤리를 가리킨다.

  작품 <어떤 파리>는 모든 사람들이 동경에의 도시라 할 수 있는 파리에서 간첩 혐의로 잡혀 온 진영이를 놓고 흥재와 지연간의 토론과 회상으로부터 전개된다.

  이들 세 남녀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이다. 이제 흥재는 시인이 되었거, 진영이는 남편으 따라 간첩 행위를 범했다. 과거의 성장 과정으로 보면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는 신분이건만 남편을 따라 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돼 버렸다. 지연은 현재 외과의사의 아내로서 평범란 주부에 불과하다. 지연은 진영의 소식을 듣고 진영의 구명을 위해 애를 쓴다. 누구보다도 그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는 흥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흥재는 증언할 것을 거부한다. 의용군으로 입대했다가 포로로 석방된 자신의 신분을 옹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언젠가 어떤 증언을 하러 갔다가 '검은 차'의 빛깔에 완전히 압도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빛의 마법'---그것은 사유를 혼란으로 모는 것이었다. 진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꾀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아와 진상의 충돌에서 도피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의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우리 선생을 돌려 달라'고 철없는 국민 학생들이 벌인 데모의 주동자를 찾기 위한 수사관들과 아홉 살짜리 아들과의 심야의 대담에서도 엿보게 된다.

  "B국민 학교 3학년 2반에서 오늘 데모가 있었지?"

  수첨의 사나이는 물었다. 아홉 살의 어린이를 놓고 순 직업적일 수는 없겠으나 그러나 그것은 사회 봉사 관념으로 굳어진 압력조의 목소리였다.

  "왜 데모했지?"

  "우리 선생님 도루 오시라구요."

  "어떻게 시작됐지?"

  "어떻게라니요?"

  명쾌하게 반문한다.

 "응, 말하자면 누가 하자고 해서 시작했냐 말이야."

  "우리들이요."

  "그런 생각을 누가 맨 먼저 했냐 말이다."

  "내 옆의 아이가여."

  "그 아이 이름이 뭐냐?"

  조서와 수첩의 두 사나이가 함께 흥분을 보인다.

  "몰라요."

  "왜?"

  "내 옆에 누가 있은지 모르겠는걸요."

  "잘 생각해봐. 누가 하라고 했지, 맨 먼저?"

  이것은 수사관과 아홉 살짜리 아들과의 대화이다. 수사관은 주동자를 찾아 내기 위한 유도 심문이고, 아이는 아이대로 대답이 후리다. 지연이가 진영의 구속에서 직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당국에서는 진영이를 간첩 활동의 협조자로 판단하지만 지연은 진영이가 남편의 사랑에 순(殉)한 것으로 짐작한다.

  결국, 이 작품은 대타적 관계에 있어서의 자아의 성실성을 찾아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극한 상황에서의 자아 발견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사회와의 충돌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대자와 대타와의 충돌이기도 하다. 이 충돌 속에서의 자기 발견인 것이다. 한계 정세에 놓인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소설로 제시하면서 대결하지 않을 수 없는 나, 그 대결로부터 진정한 나를 일깨우고 있다. 이것이 이 소설의 철학적 의미일 것이다.

 3

  이상에서 필자는 필자 나름대로 작가 박 순녀의 작품 세계를 찾아보았다.

  이미 말한 대로 그의 소설엔 인간애를 그리워 찾으면서도 그것을 찾음에 있어 이지적으로 추구한다. 한결같이 여성 중심의 세계요 여성 그것에의 이해와 이해를 촉구하면서도 휴머니즘적 애정으로써 옹호하고 이성으로써 사리를 판단한다. 바로 이것이 그의 소설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다.

  부드러운 필치로 전개해 가면서도 사건을 제시함에 리얼리티로 추구해 가는 섬세한 문장, 애정 속에서 이지로 판단하는 비평 정신은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의 해석과 이해를 불러일으킨다. 이 점에서도 그의 소설은  그만이 갖는 독창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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