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몽(占夢)
by 송화은율점몽(占夢)
옛날에 유생 세 사람이 있었다. 장차 과거 시험을 보러 가고자 하는데, 한 사람은 꿈에 거울이 땅에 떨어졌고, 한 사람은 쑥으로 만든 사람〔애부(艾夫) : 쑥으로 만든 인형]을 문 위에 달아 놓았으며, 또 한 사람은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 세 유생이 꿈을 꿈
모두 함께 꿈을 점치는 사람의 집을 찾아갔다. 꿈점 치는 사람은 없고 그의 아들만이 있었다. 세 사람이 꿈의 길흉을 물으니 그 아들이 점을 치면서,
" 세 가지 꿈이 다 상서롭지 않습니다.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 점술가 아들의 해몽
조금 후에 꿈점 치는 사람이 와서 자기 이들을 꾸짖고는 시를 지어 주기를,
艾夫人所望 (애부인소망)
鏡落豈無聲 (경락기무성)
花落應有實 (화락응유실)
三子共成名 (삼자공성명)
쑥 인형은 사람이 우러르는 것이요.
거울이 떨어지니 어찌 소리가 없을꼬.
꽃이 떨어지면 응당 열매가 있을 것이니,
세 분은 함께 이름을 이루리라.
라고 하였다." 과연 그 세 사람은 모두 과거 시험에 급제하였다."
- 점술가의 해몽과 세 유생의 급제
요점 정리
연대 : 조선 성종 때
작자 : 미상
갈래 : 설화, 패관 문학
구성 : 3단 구성 (기-서-결)
표현 : 열거법, 설의법
제재 : 꿈풀이
주제 : 꿈속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용기를 줌. 긍정적인 해몽이 가져다 준 힘.
출전 : 용재총화
내용 연구
유생 : 유학을 닦는 선비
애부 : 쑥으로 만든 인형. 단오 때 문 위에 걸어두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 함
상서 : 복되고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
인소망 : 사람들이 우러를 것이다.
경락 : 거울이 떨어지다.
기무성 : 어찌 소리가 없겠는가.
화락 : 꽃이 떨어지다.
응유실 : 응당 열매가 있다.
삼자 : 세 사람.
공성명 : 함께 출세할 것이다.
세가지 꿈이∼ 못하겠습니다. : 점술가 아들의 부정적인 해몽. 인생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이 같은 해석은 긍정적인 가치관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대조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과연 그∼ 시험에 급제하였다. : 꿈속의 가능성을 찾아내어 용기를 준 점술가의 해몽이 가져다 준 결과이다.
이해와 감상
용재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서 발췌한 꿈을 소재로 한 설화이다. 같은 문제를 앞에 놓고 그것을 풀이할 때, 그 방법과 결과가 다를 수 있듯 점술가와 그 아들의 해석결과가 다르다.
부정적으로 풀이해 준 아들과는 달리 긍정적으로 풀이해 준 점술가 덕분에 꿈을 풀이하러 왔던 유생 3인은 과거 시험에 모두 급제하였다 긍정적인 꿈풀이 덕분에 용기를 얻었음이 분명하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가능성을 찾아 힘써야 한다는, 평범한 듯 보이는 깊은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내용에서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속담을 떠올릴 수 있다. 한편, 춘향전의 옥중 꿈풀이는 이 설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화락(花落)하니 능성실(能成實)이요
파경(破鏡)하니 기무성(豈無聲)가.
문상(門上)에 현우인(懸偶人)하니
만인(萬人)이 개앙시(皆仰視)라.
해갈(海渴)하니 용안견(龍顔見)이요,
산붕(山崩)하니 지택평(地澤平)이라.
꽃이 떨어져야 능히 열매가 열고
거울이 떨어질 때 소리가 없을 것인가
문위의 허수아비가 달렸으면
사람마다 우러러 볼 것이오.
바다가 마르면 용의 얼굴을 능히 볼 것이오
산이 무너지면 평지가 될 것이라.
심화 자료
성현(成俔/1439~1504)
조선 전기의 명신·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경숙(磬叔). 호 용재(齋)·허백당(虛白堂). 시호 문대(文戴). 1462년(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박사(博士)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록(司錄) 등을 거쳐 68년(예종 즉위) 예문관(藝文館) 수찬(修撰)을 지냈다. 형 임(任)을 따라 명(明)나라에 가는 도중 기행시를 지어 《관광록(觀光錄)》을 엮었다. 75년 다시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때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88년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 해 유자광(柳子光) 등과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했으며 관상감(觀象監) 등의 중요성을 역설, 격상시켰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죽은 지 수개월 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왕명에 따라 유자광 등과 《쌍화점(雙花店)》 등 고려가사(高麗歌詞)를 바로잡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 문집 《용재총화(齋叢話)》는 조선 전기의 정치·사회·제도·문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허백당집(虛白堂集)》 《풍아록(風雅錄)》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주의패설(奏議稗說)》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많은 저서가 있다.
용재총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활자본. 3권 3책. 1525년(중종 20)에 경주에서 간행. 그 뒤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간행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책록되어 널리 알려졌다.이 책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의 이 책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의 풍속 지리 역사 문물 제도 음악 문학 인물 설화 등 문화전반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당시의 전반적인 문제를 살 필수 있는 저술이 내용 서술상의 특징 신분 지위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인정세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유려한 산문을 구사한 점이다. 특히 잔치음식의 종류와 맛의 특징, 나례 등을 수록하고 유명인의 일화 일반 대중이나 천인들의 소화 등 다양한 설화를 수록하고 있어서 민속학 및 구비 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이용되고 있다.내용은 문담(文談)·시화(詩話)·서화(書畵)에 대한 이야기와 인물평(人物評)·사화(史話)·실력담(實歷談) 등을 모아 엮은 것으로, 문장이 아름다운 조선시대 수필문학의 백미편(白眉篇)이다. 전편이 《대동야승》에 실려 있고, 시화(詩話) 부분은 《시화총림(詩話叢林)》에도 들어 있다. 1934년 계유출판사(癸酉出版社)에서 간행한 《조선야사전집(朝鮮野史全集)》에 한글로 토를 달아 실었다. 64년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국역하여 《파한집(破閑集)》과 합본(合本)으로 간행한 바 있다. 고려에서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형성·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물제도·문화·역사·종교·예술 등 문화발전을 다루고 있어 민속학이나 구비문학 연구의 자료로서 중요하다.
점복(占卜)
미래에 대한 어떤 징조를 미리 판단하고자 하는 기술. 단순히 점(占)이라고도 한다. 자연현상이나 생리적 현상을 판단하는 것과 인위적(人爲的)으로 어떤 현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판단한 결과로써 장래를 점치는 것 등이 있다. 이같은 속신(俗信)에는 점복과 함께 예조(豫兆)·금기(禁忌)·주술(呪術) 등이 있어 이들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으며, 이 밖에 귀신·도깨비·부적(符籍)까지도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조나 점복은 미래를 사전에 예지(豫知)하는 지식과 기술이며 금기와 주술은 불측(不測)의 결과를 예방하고 처리하는 기술이다.
점복의 역사는 인류생활과 더불어 찾아볼 수 있고, 점복의 발달과 더불어 인류의 문명도 발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점을 치는 목적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기에서 진실이란 신의(神意)를 말하는 것으로, 고대인들은 신의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면 곧 신의 벌을 받는 것으로 믿었으며 그 신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는 먼저 신의를 정확히 파악하여 그 신의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점복이 필요했을 것이며, 이러한 목적은 점차 확대되어 나중에는 점복이 범인(犯人)의 방향이나 실물(失物)의 행방을 추측하여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까지 이용되었다.
둘째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하여 점복이 생겼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지욕(豫知欲)은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이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아왔을 때, 새해에 전개될 일들을 미리 알고자 하는 것도 인간의 기본심리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예지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점복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긴 점복은 동서양에서 문화정도의 고저(高低)와 상관없이 일찍부터 어느 민족에게나 있어왔다. 유럽에서는 바빌로니아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성술(占星術)과 동물의 간 등에 의하여 점치는 내장점(內臟占)이 일찍이 발달하였고, 점장(占杖)에 의하여 지하수나 광맥을 찾아내는 점법이 있는가 하면, 무심히 책을 폈을 때 먼저 눈에 띄는 문장으로 점을 치는 개전점(開典占) 등도 있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서로써 개전점을 쳤는데, 이것을 성서점이라 하였다. 또 트럼프로 점치는 가루다점도 유명하였으며 몽점(夢占)도 있었다. 동양에서는 인도의 점성술, 중국의 복서(卜筮)가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특히 중국의 점복은 한국과 일본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대표적인 점복은 복서로서, 복(卜)은 수골(獸骨)이나 귀갑(龜甲)을 사용하여 행하는 점이며 서(筮)는 서죽(筮竹)과 산목(算木)을 사용하는 점이다. 수골은 견갑골(肩胛骨), 귀갑은 거북의 복부(腹部) 껍질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불에 구워 트는 모양으로 길흉을 점쳤다. 이 점의 뜻을 판단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점자(占者)를 두기도 하였다. 서는 《주역(周易)》을 전거(典據)로 삼아 음양의 산목과 서죽의 산술적 조작으로 괘를 얻어 판단하는 점으로, 민간에서 크게 발전하여 오행설(五行說)과 간지설(干支說)을 받아들이면서 몇 개의 유파가 생겼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서죽이나 산목 대신 동전 등을 이용하는 역점이 일반화되었다. 이들 점법 이외에도 중국에서는 각종 점성술이 발달하여 중국의 역사는 실로 점성술사에 의하여 발달되었다고도 한다.
한국의 점복도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미 상고시대부터 복, 즉 수골이나 귀갑을 이용하는 점이 있었다. 그 예로서 부여의 점속(占俗)을 보면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톱을 보고 전쟁의 승패를 미리 점쳤다. 즉 소의 발톱이 벌어져 있으면 흉(凶)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했다. 이것은 분리와 결합을 뜻하는 것으로 결합하면 이긴다는 진리를 나타낸다. 점복은 상대(上代)로 소급할수록 정치와 밀착되었고 그 결과를 믿는 경향도 강하였다. 점의 결과를 판단하는 기술은 원래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것이어서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에 민심을 통합하기 위하여는 몇 개의 결과가 나와서는 곤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점을 치는 과정도 비밀에 싸여 있었고 그 점복자는 권력과 밀착된 전문가가 관장하였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점복은 크게 나누어 자연적인 점복과 인위적인 점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어떤 특이한 자연현상을 통하여 미래의 천후를 추측한다거나 어업·수렵 등의 생산 결과를 예지하는 일월성복(日月星卜)·홍복(虹卜)·운복(雲卜)·수빙점(水氷占)·천기점(天氣占) 등과 같은 자연현상점을 말하며, 후자는 적극적인 점복술로 탁선(託宣)·주법(呪法) 등으로 길흉을 판단하는 몽점(夢占)·신비점(神秘占)·작괘(作卦)·현상점(現象占) 등을 가리킨다. 이 인위적 점복을 행하는 점자를 그 직능에 따라 전문적인 점자와 부업적인 점자로 구분할 수 있어, 전자는 고대 사회의 일관(日官)·일자(日者)·무자(巫者)·사무(師巫)·점복관(占卜官)·복술자·신점자(神占者) 등이 이에 해당되며, 후자는 다른 직업을 주업으로 하면서 부업으로 점복 행위를 하는 기도업자·승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위정자는 점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점복가를 두었는데 백제에서는 이들을 일자 또는 무자라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사무 또는 단순히 무(巫)라 하였다. 신라에 이르러 이들을 일관이라 부르고 그들이 소속된 관청을 관상감(觀象監)이라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시대에 구체화되어 천문·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를 담당하는 태사국(太史局)과 점복을 담당하는 태복감(太卜監)을 두고 여기에 복박사직(卜博士職)과 복정직(卜正職)을 임명함으로써 점복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었다. 이들 관청은 그 후 여러 가지 명칭으로 개칭되는 한편 과거제도를 통하여 점복사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서운관(書雲觀)을 두고 천문·지리·역수·점산(占算) 등을 관장하게 하였다. 한편 이들 국가기관이 관장하는 점복과 병행하여 민간에서도 많은 점복술이 오랜 세월을 두고 깊이 뿌리를 박게 되었다.
특히 점세적(占歲的) 행사가 크게 성행하여 전통적인 점복 이외에도 토정비결(土亭秘訣)·직성행년법(直星行年法)·행년치성법(行年致誠法)·오행점(五行占)·행년액일법(行年厄日法)·출행법(出行法)·분출행법(分出行法)·절초법(折草法)·구궁법(九宮法)·사주법(四柱法)·병인마채점(病人馬采占)·병인산점(病人算占)·천간자병점(天干字病占)·지지자병점(地支字病占) 등 각종 점속이 횡행하였으며 그 일부는 지금도 전한다. 현대 과학 문명의 발달은 이들 미속(迷俗)을 근본적으로 부인하여 이를 불식시키려 하나 인간의 본능 속에 자신의 운명과 길흉을 예지하려는 심리작용이 있는 한 좀처럼 이들 속신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 사전)
점복(占卜)
인간의 지능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사(未來事)나 부지(不知)의 일을 주술의 힘을 빌려 추리 내지는 판단하고자 하는 행위.
고대인들은 어떠한 특이한 일이 발생하면, 그것을 곧 미래에 발생할 어떠한 일의 전조라 믿고, 사전의 일을 통하여 미래의 일을 추측하거나 판단하였다. 이것이 곧 점복이며, 사전에 나타난 일들이 곧 예조(豫兆)이다. 여기에서의 예조는 인과관계로 치면 인(因:원인)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점복이란 인과관계의 인으로부터 과(果:결과)를 미리 알아내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인에 해당하는 예조를 기초로 한 결과의 추측, 즉 점복의 기술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랜 경험을 통하여 축적된 지식의 소산이다.
〔역 사〕
점복의 역사는 인류생활과 더불어 찾아볼 수 있고, 인류의 문명은 점복의 발달과 더불어 병행되어 왔다. 원래 점복은 개인적·심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집단생활이 시작되고 통솔자가 나타나면서 점복의 결과를 통일하여야 할 필요가 생겼다.
여기서 집단 전체의 이해에 관한 것은 그 대표자가 일괄하여 점을 침으로써 어떠한 통일된 결과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이에 마침내 점복자는 그 집단의 대표적인 주술자로서 그 집단을 통솔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점복은 주술적 행위이므로 동서양과 문화정도의 고저에 관계 없이 존재하였다. 유럽에서는 바빌로니아에서 발생하였다고 하는 점성술과 동물의 간장 등에 의하여 점치는 내장점(內臟占)이 일찍이 발달하였다.
또, 점장(占杖)에 의하여 지하수나 광맥을 찾아내는 점법, 무심히 책을 펼쳐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지침으로 점치는 개전점(開典占) 등이 있다. 크리스트교에서는 성서로써 개전점을 쳤는데 이를 성서점이라고도 하였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인도의 점성술, 중국의 복서(卜筮) 등이 발달하였다. 중국의 대표적인 점복은 복서로서, 복은 수골(獸骨)이나 귀갑(龜甲)을 사용하여 행하는 점을 말하며, 서는 서죽(筮竹)과 산목(算木)을 사용하는 점을 말한다.
수골은 견갑골(肩甲骨), 구는 복부의 갑(甲)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불에 구워 터지는 모양으로 미래의 길흉을 점쳤다. 서는 음양의 산목과 서죽의 산술적 조작에 기초하여 그 결합에 따라 판단하는 점이다.
이 때 그 판단의 전거인 ≪역경 易經≫은 오경의 하나로서 고래로 매우 중요시되어 왔다. ≪역경≫의 원리를 응용하고, 서죽과 산목을 이용한 ≪주역 周易≫은 민간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오행설이나 간지설(干支說)을 받아들여 몇 개의 유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서죽이나 산목을 사용하지 않고 전(錢) 등을 이용하는 역점(易占)이 일반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점법 이외에도 각종 점성술이 발달하였다.
우리 나라의 점법도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미 상고시대에서부터 복(卜), 즉 수골이나 귀갑을 사용하는 점이 있었다. 그 한 예로 부여의 민속을 보면,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톱을 보고 전쟁의 승패를 미리 점쳤다. 즉, 도살한 소의 발톱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점쳤다(≪三國志≫ 魏書 東夷傳 夫餘條).
고대사회에서는 점복을 담당한 전문적인 점복자를 일관(日官)·일자(日者)·무자(巫者)·사무(師巫)·점복관(占卜官) 등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들 전문적인 점복자들을 관직에 두고 그들로 하여금 국가의 제반사를 점치게 하였다. 그들이 소속한 관청을 신라에서는 관상감(觀象監)이라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 이후 구체화되어 고려에서는 천문·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를 담당하는 태사국(太史局)과 그 밖의 점복을 담당하는 태복감 (太卜監)이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는 점복을 담당하는 복박사직(卜博士職)과 복정직(卜正職)을 두고 점복을 국가적 차원에서 다루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서운관(書雲觀)을 두고 여기서 천문·지리·역수·점산(占算)·측후·각루 등을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전문적인 점자(占者)를 복사(卜師)라고도 하였다. 복사는 박사와 같은 말이었으며, 박사는 박수(博數), 즉 남무(男巫, 覡)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처럼 복자·박사·박수는 모두 같은 기능을 지닌 인물에 대한 호칭으로서 이들은 모두 무인(巫人)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다. 무인에 의하여 미래를 점친 예는 고래로 어느 시대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유 형〕
점복은 크게 자연현상에 의한 점복과 인사(人事)에 의한 점복, 그리고 신비점 (神秘占)·인위점(人爲占) 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자연현상에 의한 점복 고대인들은 특이한 자연현상이 발생하였을 때 그것을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사건의 예조로 믿는 일이 많았으므로 그 예조를 통해서 미래를 추측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자연현상 가운데에는 일월성신의 이변이라든가 풍운뇌우(風雲雷雨)·수변(水變)·지변(地變), 동식물의 이변 등이 모두 포함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현상에 의한 점을 자연현상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인사에 의한 점복 인사에 의한 점복이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어떠한 특징이나 생활하는 동안에 우연히 발생한 일을 원인으로 하여 미래를 점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점복의 범위는 인간의 활동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더욱 광범해진다.
그러므로 일정한 한계를 정하기란 매우 곤란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운명적·생득적(生得的) 특징에 의한 사람의 동작·행위에 의한 점복, 우연한 일에 의한 점복, 꿈에 의한 점복 등이 있을 수 있다.
(3) 신비점 신비점은 크게 인체강령점(人體降靈占)과 기물강령점(器物降靈占)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인체강령점이란 신활(神活)·신필(神筆)·공창(空唱) 등과 같이 신령이 점자의 육신에 강림, 빙의(憑依)하게 함으로써 점자 자신이 일시적으로 신령이 되어 미래의 길흉을 점쳐 주는 점법이다. 이를 신탁점(神託占)이라고도 한다.
기물강령점이란 산미(撒米)·척전(擲錢)·신장간(神將竿) 또는 반혼(返魂)과 같이 각종 기물에 신령이 빙의하도록 하고, 점자가 거기에 나타난 신의(神意)를 파악하여 미래의 길흉을 예측하는 점법이다. 이를 신시점(神示占)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점법은 신의 강림·빙의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인간의 영과 신령 사이를 교통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점법은 고도의 정신훈련과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점자만이 할 수 있는 점법이다.
① 신탁점:신탁점은 특별한 제작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몇 가지의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여 정감을 일으키는 언어와 행동으로써 신을 접하는 점법이다. 그러고 나서 그 신과 암호나 판에 박힌 관용구 또는 어떠한 형용어구로써 의사를 교환한다.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 筆苑雜記≫(권2)에 보면, 무녀가 능히 귀신어로써 지나간 일이며 장차 닥쳐올 일들을 모두 알아맞힌다고 하였다. 또, 성현(成俔)도 그의 ≪용재총화 弁齋叢話≫에서 무인이 공중에서 소리가 나게 하여 지나간 일들을 모두 알아맞힌다고 하였다. 이처럼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공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신이 빙의하여 귀어(鬼語)나 공창으로써 매복(賣卜)하는 자를 서울에서는 ‘태주(太子)’, 남부지방에서는 ‘명두(明圖)’라 하였다. 이는 손님마마(천연두)를 앓다 죽은 어린아이의 영혼이 그 점자에게 붙어 이루어지는 일이라고도 한다.
② 신시점:신시점은 점자의 육신 대신 어떠한 기물에 신령이 빙의하도록 하고 거기에 나타난 징표로써 미래를 예측하는 점법이다. 이 때 흔히 이용되는 기물은 쌀·돈(엽전)·방울·신장간·재·분(粉) 등으로서, 이러한 기물을 통하여 나타난 신의 징표를 보고 미래에 도래할 사건을 점친다. 이러한 점은 어떠한 기물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척미점(擲米占)·전점(錢占)·신장점(神將占)·영점(鈴占)·초혼점(招魂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척미점은 상 위에 쌀을 흩어 놓고 주문을 외며 그 쌀알을 집는다. 그리하여 집힌 낱알이 짝수인가 홀수인가, 또는 잡힌 낱알의 수가 몇 개인가에 따라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것을 말한다. 또, 상 위에 뿌려 그 흩어진 상태에 따라 점을 치기도 한다. 아니면 상을 뒤집어도 상에서 떨어지지 않고 거기에 붙어 있는 낱알의 수로써 점을 치기도 한다.
전점은 3매(梅) 이상, 수십 매의 엽전이나 동전을 상 위에 던져 그 흩어진 상태에 따라 신의를 파악한다. 또는 돈의 흩어진 상황과 문점자(問占者)의 사주를 맞추어 길흉을 판단하기도 한다. 혹은, 구형(龜形)의 점구(占具) 속에 돈을 넣고 흔들었다 꺼내어, 그 돈의 표리(表裏)로써 괘를 만들어 길흉을 판단하기도 한다.
신장점은 나뭇가지를 신장간으로 하여 한 사람이 그 신장간을 잡고 그 곁에서 점자가 주문을 외어 신령이 그 신장간에 빙의하도록 한다. 이윽고 신령이 그 신장간에 빙의하면 신장간은 저절로 동요하게 된다. 이 때 점자가 그 신장간을 향하여 문복자(問卜者)가 알고자 하는 사항을 묻는다. 그러면 신장간은 움직임이나 이동으로써 신의를 나타낸다. 점자는 그 신의를 문복자에게 전달한다.
영점은 점자가 방울을 흔들어 그 방울에 빙의하게 하고, 그 신령(神鈴)을 향하여 문복자가 알고자 하는 사항을 묻는다. 그러면 방울이 흔들려 신의가 표시된다. 초혼점은 사자(死者)의 영혼이 현재 어디에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지를 점치고, 그 혼을 찾아내는 점이다. 이는 주로 익사자가 생겼을 때 그 익사자의 혼을 찾아내기 위한 점으로, 이를 흔히 ‘넋 건진다’라고도 한다.
넋을 건지기 위하여 “주발에 쌀을 가득 넣고 뚜껑을 덮어 보자기에 잘 싸서 익사한 지점의 물 속에 가라앉혀 놓는다. 그리고 무인이 굿을 한다. 굿이 모두 끝난 다음 주발을 꺼내어 열어보면 거기에 머리카락이나 손톱 또는 발톱이 들어 있다.”고 한다.
그것이 곧 익사자의 넋이라고 한다. 한편, 죽은 자의 영이 어떠한 상태로 있는가를 점치기 위해서는 밀가루나 쌀가루를 그릇에 판판하게 펴 놓는다. 그리고 그 곁에 종이로 인형을 만들어 놓은 다음 굿을 한다.
오래 굿을 하고 난 다음 가루 위를 보면 거기에 특정한 조수(鳥獸)의 발자국이 생긴다. 그러면 점자는 그 발자국을 보고 죽은 자의 영혼이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점친다.
그 발자국이 소나 개같이 일반적으로 싫어하지 않는 동물의 것이면 길하고, 뱀 등과 같이 싫어하는 동물의 것이면 크게 흉하다고 점친다. 대흉(大凶)으로 점쳐지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그 대흉을 면하도록 하여야 한다. 굿이 끝나면 종이인형은 불에 태워버린다.
(4) 인위점 인위점은 어떠한 우연한 예조나 현상 또는 주력(呪力)에 의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어떠한 일을 조작하여 거기에 나타난 결과로써 미래를 판단하는 점법이다. 앞에서 살펴본 신비점은 주로 전문적인 점자들에 의하여 전개되는 점이나, 인위점은 비전문적인 일반인에 의하여 전개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위점은 주기적인 의례에서나 전통적인 방법으로써 진행된다. 그것은 주로 집단의 길흉, 특히 농작물의 풍흉을 미리 예측하는, 다분히 유희적이며 오락적인 점이다. 따라서, 인위점은 현대의 문명사회에서는 점으로서의 기능보다도 문명인들의 심심풀이 또는 유희적·오락적 기능이 우세해졌다. 이러한 인위점은 승부점·오락점·연점(年占)으로 대별할 수 있다.
① 승부점:승부점은 다른 말로 경기점(競技占)이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경기는 종교의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즉, 신전에서 경기를 거행하여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의식으로부터 각종 경기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경기에는 대개 승부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신전에서의 승부는 곧 그 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서 승부의 결과로써 미래의 길흉을 점치려는 승부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유희·오락 시설이 거의 없었던 고대사회에서는 신전에서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거행되었던 경기가 유일한 오락수단이었다. 따라서, 그 경기는 급격히 일반화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원래 그 경기가 지니고 있던 신성성은 점차 희박해지고 오늘날에 와서는 다만 유희나 오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경기로는 석전·줄다리기·차전·횃불싸움〔鼠火戰〕 등을 들 수 있다. 석전은 안동을 비롯하여 김해 등지에서도 매우 격렬하였던 것 같다. 줄다리기는 지금도 일부 농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집단경기의 일종이다.
이것도 원래는 신제(神祭) 끝에 서로 줄을 당겨 그 승에 따라 풍흉을 점치던 놀이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종교적 기능은 약화되고 유희적 기능이 강화된 채 전승되고 있다. 마을을 동서 또는 상부·하부로 편을 갈라서 한다.
횃불싸움은 정월 상원일(上元日)에 거행되었다. 이날 낮부터 홰를 만들어 두었다가 저녁이 되면 각기 홰를 들고 산으로 오른다. 달이 떠오르는 때를 기하여 홰에 불을 붙여 들고 이쪽 마을에서 저쪽 마을을 향하여 “덤벼라!” 하는 함성과 함께 달려 나간다.
그러면 상대방에서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달려와 양편이 횃불을 흔들며 밀고 밀쳐 서로 넘어뜨린다. 그러다가 몰려 달아나는 편이 지게 되는데, 이로써 그 해의 풍흉을 징험(徵驗)한다.
② 오락점:각종 유희를 통하여 그 해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다. 가령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서로 편을 갈라 윷을 놀아, 윗동네가 이기면 그 해는 천수답에 풍년이 들고 아랫동네가 이기면 평야지대에 풍년이 든다고 점친다. 또, 연날리기·그네뛰기 등의 놀이로써 그 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한다. 이러한 점속(占俗)을 오락점이라고 한다.
③ 연점:그 해 작물의 풍흉에 관련하여 매월의 천후(天候)·기상 등을 점치는 것이 연점이다. 이러한 연점은 정초, 특히 정월 보름날에 행하는 것이 많고 그 유형도 다양하다. 연점은 극히 간단한 방법으로 그 해의 풍흉을 점치는 것을 말한다.
(5) 기타의 점복 위에서 소개한 점복의 유형 이외에도 허다한 점복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작괘점(作卦占)·관상점(觀相占) 등은 일찍이 고도로 발달되어 어느 면에서는 학(學)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점복의 유형들이 주로 우연적이고 신비성을 지닌 점법인 데 비하여, 작괘점이나 관상점은 비교적 이론적 체계를 갖춘 과학적 점법이라 할 수 있다. 작괘점은 음양오행이나 수리를 기초로 괘를 만들어 이것을 수리적으로 해석하여 길흉을 판단하는 점법이다.
이러한 작괘점을 구체적으로 세분하면 육효점(六爻占)·산통점(算筒占)·송엽점(松葉占)·사주점(四柱占)·단시점(斷時占)·오행점(五行占)·사점(柶占) 등이 있다. 이러한 점은 해박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점이 아니다. 비록, 전문적인 점술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 방면에 많은 조예가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점법이다.
관상점은 사람의 안면·골격·수족 또는 음성이나 거동 등에 나타난 특징을 보아 그 사람의 성격·심성·운명 등을 판단하는 점이다. 이는 속신으로서의 점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관상학으로서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관상점은 신체의 어디를, 또는 무엇으로써 그 사람의 미래를 판정하느냐에 따라서 비상(鼻相)·구상(口相)·이상(耳相)·수상(手相)·골상(骨相)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연 구〕
현대적 안목에서 볼 때 점복이 비록 비합리적·비과학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조상들은 오랜 생활 속에서 그것을 전승시켜 왔고, 또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현대의 문명사회 속에서도 역시 점복은 크게 성행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의 생활을 지배하여 왔고 현대문명인들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는 점복에 대하여 그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초조사나 연구는 매우 미진한 상태이다. 그것은 점복을 무조건 미신이라 하여 치지도외(置之度外)해 온 때문인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물론 점복에 관한 문헌적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본격적인 연구서라기보다는 점복행위에 대한 단편적인 소개에 머무르는 것들이었다.
점복에 대하여 비교적 구체적인 자료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은 무라야마(村山智順)의 ≪조선의 점복과 예언 朝鮮の占卜と豫言≫(1933)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되고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 이 방면의 자료집이나 연구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朝鮮巫俗考(李能和, 1927), 朝鮮の占卜と豫言(村山智順, 1933), 占卜·呪術(朴桂弘, 韓國民俗大觀 3,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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