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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赤)과 흑(黑) / 스탕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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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赤)과 흑(黑) / 스탕달



 

(전략)

차석 검사는 범행의 잔인성에 대해서 졸렬한 프랑스 어로 열을 올려 논고하고 있었다. 데르빌 부인 옆에 있는 부인들이 그것에 대해 극히 불안스러워하는 것을 줄리앙은 알아차렸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한 몇 명의 배심원이 부인들에게 말을 걸고는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떻든 좋은 징조인 것만은 틀림없어.'라고 줄리앙은 생각했다. 그때까지 그는 공판에 와 있는 사람들 전원에 대해서 속으로 경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차석 검사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열변이 이 혐오감을 한층 증가시켰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에게 향해진 동정의 표시를 보고 있는 동안 줄리앙의 굳어졌던 마음도 차차 풀어졌다. 그는 변호사의 확고한 표정에도 만족했다.

"미사여구(美辭麗句)는 그만두세요."

줄리앙은 변론에 나서려고 하는 변호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쉬에의 과장된 말투를 그대로 빌려다가 당신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당신에게 유리하게 되었군요."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변호사가 5분도 채 이야기하지 않은 동안에 대부분의 여자들은 손수건을 꺼내 들고 있었다. 이것에 힘을 얻은 변호사는 배심원을 향해서 매우 강력하게 변론을 늘어 놓았다. 줄리앙은 전율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런! 이렇게 되면 적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 솟아오르는 감동에 압도당할 뻔했을 때, 다행히 발레노 남작의 건방진 시선과 마주쳤다. '저 빌어먹을 놈이 눈을 번뜩이고 있군. 저런 비열한 놈에게는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일까!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것만으로도 내 범행이 저주스러워지는군. 저놈이 나에 대해 레날 부인에게 뭐라고 할지 알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자 다른 생각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곧 청중의 박수로 줄리앙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변호사가 변론을 막 끝낸 참이었다. 줄리앙은 악수를 청하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변호사와 피고에게 시원한 음료수가 제공되었다. 이때 비로소 줄리앙은 어떤 사실을 알고 놀랐다. 여자들 중에 누구 하나도 방청석을 떠나서 식사하러 가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배가 고프군요. 당신은?"

하고 변호사가 물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고 줄리앙은 대답했다.

"보십시오. 지사 부인도 식사를 좌석에 날라다가 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는 작은 발코니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

공판이 속개되었다. 재판장이 사건의 개요를 말하고 있을 때 밤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재판장은 말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동의 불안에 싸인 정적 속에서 큰 시계의 종소리가 법정 안에 울려 퍼졌다.

'나의 최후의 날이 시작된 것이다.'라고 줄리앙은 생각했다. 이윽고 어떤 의무감이 치솟아 그의 온몸은 불타는 듯이 느껴졌다. 그때까지 그는 감동을 억누르며 결코 입을 열지 않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재판장으로부터 무언가 보충할 것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자 줄리앙은 일어섰다. 맞은편의 데르빌 부인의 모습이 보이고. 그 눈이 광선을 받아서 이상하게 빛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그는 생각했다.

"배심원 여러분, 죽음을 앞두고 이와 같은 일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경멸받는 것은 참을 수 없어서 한 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불행하게도 저는 여러분의 계급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관점에서 본다면, 저는 자신의 신분이 천한 것에 반항한 한 사람의 농부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줄리앙은 한층 더 목소리를 확고하게 하여 계속했다.

"저는 조금도 여러분의 호의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착각 같은 건 조금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죽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도 당연한 귀결입니다. 온갖 존경과 숭배를 받기에 가장 어울리는 부인의 생명을 저는 해치려고 했습니다. 레날 부인은 저에게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저의 범행은 잔인했고 더구나 '계획적'이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따라서 저는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저의 죄가 더 가벼운 것이라 해도, 저의 소년 시절이 얼마나 동정할 만했는가는 전혀 참작하지 않고, 저를 처벌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층 계급에서 태어나 소위 빈곤이라는 것에 압박받으면서도 다행히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되어, 대담하게도 부자들이 오만하게 사교계라고 부르는 세계에 들어가려고 하는 청년들의 의욕을 영원히 꺾어 버리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저의 죄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지금 이렇게 저와 같은 계급이 아닌 분들에 의해 재판을 받고 있으므로 더욱 엄하게 처벌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배심원석을 둘러본 바로는 유복한 농민으로 보이는 분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모두가 분개한 유산 계급 사람들뿐이군요……."

20분에 걸쳐 줄리앙은 이런 어조로 계속 이야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을 남김 없이 털어놓았다. 귀족 계급의 은혜와 후원을 얻으려고 필사적이었던 차석 검사는 좌석에서 뛰어오를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줄리앙의 다소 추상적인 변론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흐느끼고 있었다. 진술을 끝내기에 앞서 줄리앙은 다시 한 번 범행이 계획적이었다는 것,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전에 행복했던 시절에는 레날 부인을 존경하고 어머니와 같은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말했다. 데르빌 부인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실신해 버렸다.

2시 종소리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배심원실의 조그만 문이 열렸다. 발레노 남작이 엄숙하고 과장된 걸음걸이로 나오고 나머지 배심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발레노 씨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는, 영혼과 양심에 비추어서 검토한 결과, 배심원 일동은 한 사람의 이의도 없이 줄리앙 소렐이 살인죄, 그것도 계획적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이 답신은 곧 사형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즉시로 그 선고가 내려졌다. - 2부 41장 '공판' 중에서 



요점 정리

지은이 : 스탕달

갈래 : 심리소설, 사회소설

배경 : 19세기 7월 혁명 전야의 프랑스

경향 : 사실주의

성격 : 객관적, 사실주의적(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계층이 여전히 구별된 사회상, 사교계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그리고 한 인간이 근대인으로 태어나는 것을 막는 불합리한 사회 제도 등을 줄리앙의 삶의 과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밝혀 주고 있다), 현실 비판적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주제 : 불합리한 사회 제도에 대한 비판

특징 : 가난한 하층 계급 출신의 주인공이 부유한 계층의 사교계에 들어가 겪게 되는 성공과 좌절을 그린 리얼리즘 소설의 서구적 작품이다.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줄리앙 소렐의 좌절을 통해 시대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줄거리 : '적과 흑'의 부제(副題)는 '1830년대사'(年代史).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행위의 은밀한 동기와 사람들의 내면적인 영혼의 특성에 대해 말해주는 심리학과 역사철학의 연구서이기도 하다. 자연이나 사물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관찰과 심리적 상상, 감정의 가장 미묘한 차이의 분석에서는 매우 뛰어난 심리소설로, 시골 도시 베리에르(Verriere)의 목재상(木材商)의 아들로서, 나폴레옹 몰락 후 군인으로서의 출세길이 막힌 시대에, 여전히 나폴레옹을 숭배하는 야심적인 청년 줄리앙 소렐(Julien Sorel)이 주인공이다.

 이 도시에 사는 가난한 목재상 소렐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업을 돕고 있었으나, 셋째 아들 줄리앙은 아버지와 형의 학대를 받으며 아버지의 사업은 자기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 항상 책만 읽고 있었다.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기보다는 책 읽기를 즐기다가 아버지와 형에게 학대를 당하기도 한다. 줄리앙 소렐은 여자처럼 섬세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그가 가진 놀라운 기억력으로 신부의 눈에 들게 되고, 라틴 어를 배운 덕에 베리에르 시장인 부유한 레날 씨 집의 가정 교사로 들어가게 된다.

 베리에르 시장(Mayor of Verriere) 레날(Rénal)은 오십에 가까운 나이였고 레날 부인은 서른 살이었다. 그들에게는 세명의 아이가 있었다. 가난한 줄리앙에게 레날 부인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처음에는 상류 계급에 대한 증오심과 출세에 대한 야심으로  정숙한 레날 부인을 유혹하지만, 그녀의 순수한 열정으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하녀 엘리자(Elisa)에게 발각되어 레날에게 알려지고, 레날 부인과의 소문 때문에 그 자리에서 나오게 되고, 줄리앙은  브장송 신학교로 들어간다.

 줄리앙은 브장송 신학교에서 학업에만 매진하던 중, 라 몰 후작(Marquis de La Mole)의 비서로 추천되어 파리로 간다. 파리에 온 그는, 사교계에도 참석하며 점차 세련되어 간다. 상류 사회에 진출한 줄리앙은 명사들을 사귀기 시작하고, 자존심 강한 후작의 딸 마틸드(Mathilde)의 관심을 끌게 된다. 마틸드는 줄리앙의 남다른 모습에 끌려 결혼을 결심하고, 후작은 딸을 위해 줄리앙에게 지위까지 준다. 그러나 결혼식 직전, 레날 부인의 질투와 비방이 담긴 편지로 인해 줄리앙의 꿈은 깨지고, 이에 분함을 이기지 못한 줄리앙은 피스톨(Pistol)을 구해서 베리에르의 성당에서 기도하던 레날 부인을 쏘아 살인미수로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린다.

 그는 베리에르 감옥에서 브장송 감옥으로 옮겨지고 친구인 푸케와 연인 마틸드가 찾아온다. 감옥에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된 줄리앙은 자신의 사형을 인정하고, 죽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탄압받는 사회를 고발한다. 줄리앙은 감옥으로 찾아 온 마틸드에게 자신이 사랑한 것은 그녀뿐이라고 말한다. 줄리앙의 사형 집행후 마틸드는 그의 머리를 훔쳐 무덤을 정성스럽게 꾸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그 죽음의 충격으로 레날 부인은 줄리앙이 죽은 사흘 후에 자기 자식들을 품에 안고 숨을 거둔다.

 

등장 인물 :

줄리앙 소렐 : 재목상의 아들로 성공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다가, 레날 씨의 가정 교사로 들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많은 우여곡절 끝에 출세의 가도를 달리는 듯하나, 단두 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자존심이 강하고 경멸을 당하면 못 참는 성격으로 특출한 재능의 소유자. 지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귀족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애를 쓰다 실패하는 비극의 인물로 마틸드와 결혼 직전 레날 부인의 편지로 줄리앙의 꿈은 다시 한 번 좌절을 맞게 된다. 이에 줄리앙은 사랑하는 여인이었던 레날 부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려 한 것이다.

레날 부인 : 베리에르 시장인 레날 씨의 아내로 소박하고 정숙한 부인. 줄리앙에게 반해 난생 처음 뜨거운 연정에 몸을 맡기나 늘 괴로워한다. 끝내 줄리앙을 중상하는 편지를 거의 강제로 쓰게 되어 줄리앙의 분노를 사서 총에 맞게 되는 비극을 가져온다. 시장의 부인으로 귀족적인 삶에 예속된 남편을 버리고 줄리앙을 사랑함.

마틸드 : 라 몰 후작의 외동딸로 자존심이 강한 아름다운 여자로 줄리앙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하려고 했지만, 줄리앙의 사고로 줄리앙이 사형을 선고받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셀랑 신부 : 베리에르의 사제로 줄리앙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며 레날 씨네 가정 교사로 소개해 준다.

레날 시장 : 레날 부인의 남편으로 베리에르의 시장. 못공장의 주인으로 많은 축재를 했다.

피라르 사제 : 신학교의 교장으로 줄리앙에게 우정을 보이며 그를 라 몰 후작에게 천거한다.

라 몰 후작 : 마틸드의 아버지로 권력과 명망이 있는 대귀족. 줄리앙의 재능을 인정해 등용하나 결국 외동딸의 장래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 것에 분노한다.

푸케 : 줄리앙의 친구로 선량하고 순박한 우정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줄리앙의 유언을 실행하는 성실성을 보인다.

출전 : 적과 흑

 

내용 연구

(전략)

차석 검사는 범행의 잔인성에 대해서 졸렬한 프랑스 어로 열을 올려 논고하고 있었다[서술자의 검사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데르빌 부인 옆에 있는 부인들이 그것에 대해 극히 불안스러워하는 것을 줄리앙은 알아차렸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한 몇 명의 배심원이 부인들에게 말을 걸고는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떻든 좋은 징조인 것만은 틀림없어.'라고 줄리앙은 생각했다. 그때까지 그는 공판에 와 있는 사람들 전원에 대해서 속으로 경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차석 검사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열변이 이 혐오감을 한층 증가시켰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에게 향해진 동정의 표시를 보고 있는 동안 줄리앙의 굳어졌던 마음도 차차 풀어졌다. 그는 변호사의 확고한 표정에도 만족했다.

"미사여구(美辭麗句)는 그만두세요."

줄리앙은 변론에 나서려고 하는 변호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쉬에의 과장된 말투를 그대로 빌려다가 당신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당신에게 유리하게 되었군요."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변호사가 5분도 채 이야기하지 않은 동안에 대부분의 여자들은 손수건을 꺼내 들고 있었다.[변호사의 변론이 감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에 힘을 얻은 변호사는 배심원을 향해서 매우 강력하게 변론을 늘어 놓았다. 줄리앙은 전율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런! 이렇게 되면 적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 솟아오르는 감동에 압도당할 뻔했을 때, 다행히 발레노 남작의 건방진 시선과 마주쳤다. '저 빌어먹을 놈이 눈을 번뜩이고 있군. 저런 비열한 놈에게는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일까!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것만으로도 내 범행이 저주스러워지는군. 저놈이 나에 대해 레날 부인에게 뭐라고 할지 알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자 다른 생각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곧 청중의 박수로 줄리앙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변호사가 변론을 막 끝낸 참이었다. 줄리앙은 악수를 청하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변호사와 피고에게 시원한 음료수가 제공되었다. 이때 비로소 줄리앙은 어떤 사실을 알고 놀랐다. 여자들 중에 누구 하나도 방청석을 떠나서 식사하러 가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재판에 대한 청중들의 관심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 배가 고프군요. 당신은?"

하고 변호사가 물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고 줄리앙은 대답했다.

"보십시오. 지사 부인도 식사를 좌석에 날라다가 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는 작은 발코니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

공판이 속개되었다. 재판장이 사건의 개요를 말하고 있을 때 밤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재판장은 말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동의 불안에 싸인 정적 속에서 큰 시계의 종소리가 법정 안에 울려 퍼졌다.

'나의 최후의 날이 시작된 것이다.'[불합리한 사회 제도에 대해 고발하겠다는 줄리앙의 사명감과 소명 의식이 드러남]라고 줄리앙은 생각했다. 이윽고 어떤 의무감이 치솟아 그의 온몸은 불타는 듯이 느껴졌다. 그때까지 그는 감동을 억누르며 결코 입을 열지 않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재판장으로부터 무언가 보충할 것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자 줄리앙은 일어섰다. 맞은편의 데르빌 부인의 모습이 보이고. 그 눈이 광선을 받아서 이상하게 빛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그는 생각했다.

"배심원 여러분, 죽음을 앞두고 이와 같은 일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경멸받는 것은 참을 수 없어서 한 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불행하게도 저는 여러분의 계급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관점에서 본다면, 저는 자신의 신분이 천한 것에 반항한 한 사람의 농부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줄리앙의 처지는 고립무원임]

줄리앙은 한층 더 목소리를 확고하게 하여 계속했다.

"저는 조금도 여러분의 호의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착각 같은 건 조금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죽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도 당연한 귀결입니다. 온갖 존경과 숭배를 받기에 가장 어울리는 부인의 생명을 저는 해치려고 했습니다. 레날 부인은 저에게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저의 범행은 잔인했고 더구나 '계획적'이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따라서 저는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저의 죄가 더 가벼운 것이라 해도, 저의 소년 시절이 얼마나 동정할 만했는가는 전혀 참작하지 않고, 저를 처벌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층 계급에서 태어나 소위 빈곤이라는 것에 압박받으면서도 다행히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되어, 대담하게도 부자들이 오만하게 사교계라고 부르는 세계에 들어가려고 하는 청년들의 의욕을 영원히 꺾어 버리려는 것입니다.[줄리앙의 신분과 지내온 과정, 실패가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여러분, 이것이 저의 죄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지금 이렇게 저와 같은 계급이 아닌 분들에 의해 재판을 받고 있으므로 더욱 엄하게 처벌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배심원석을 둘러본 바로는 유복한 농민으로 보이는 분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모두가 분개한 유산 계급 사람들뿐이군요……."[주인공의 마지막 발언 내용에서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 없이 가문, 재산, 지위에 의해 인간이 판단되고, 그 사회적인 판단으로 세상에 편입하게 되는 것에 대해 직접 행동하고 항변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는 인간 정신을 보여줌 / 부르주아 배심원의 '하층계급'의 상향 지향에 대한 경고'에 대한 항변으로 사실주의적 성격이 명확하게 됨]

20분에 걸쳐 줄리앙은 이런 어조로 계속 이야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을 남김 없이 털어놓았다. 귀족 계급의 은혜와 후원을 얻으려고 필사적이었던 차석 검사는 좌석에서 뛰어오를 듯한 기세였다.[줄리앙의 최후 진술 내용에 불만을 품고 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그러나 줄리앙의 다소 추상적인 변론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흐느끼고 있었다. 진술을 끝내기에 앞서 줄리앙은 다시 한 번 범행이 계획적이었다는 것,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전에 행복했던 시절에는 레날 부인을 존경하고 어머니와 같은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말했다. 데르빌 부인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실신해 버렸다.

2시 종소리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배심원실의 조그만 문이 열렸다. 발레노 남작이 엄숙하고 과장된 걸음걸이로 나오고 나머지 배심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발레노 씨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는, 영혼과 양심에 비추어서 검토한 결과, 배심원 일동은 한 사람의 이의도 없이 줄리앙 소렐이 살인죄, 그것도 계획적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이 답신은 곧 사형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즉시로 그 선고가 내려졌다. - 2부 41장 '공판' 중에서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줄리앙의 성격 :  근·현대 소설 중에는 우리의 삶에 모델이 되는 전형적인 인물을 창조한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줄리앙 소렐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그는 신분 제도와 불합리한 제도에 끝까지 반항한 인물로 전형화된다. 제시된 대목에서 줄리앙 소렐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재판의 불공정성과 상류 계층의 허위 의식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에서 줄리앙의 성격이 드러난다. 근대 사회로 바뀌면서 계급이라는 것이 없어진 듯하지만 그것은 아직 요원한 것임을 줄리앙의 모습과 사형 언도를 통해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작품개관

 19세기 영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펴지 모한 한 젊은이의 삶의 비애를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근대 문학의 대표적인 장르인 소설이 어떤 장르인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특징과 사회의 무순된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을 통해 소설 장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내용연구

줄리앙의 성격 : 근·현대의 소설 중에는 위의 삶에 모델이 되는 전형적인 인물을 창조한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줄리앙 소렐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그는 신분 제도와 불합리한 제도에 끝까지 반항한 인물로 전형화된다. 제시된 대목에서 줄리앙 소렐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재판의 불공정성과 상류 계층의 허위 의시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에서 줄리앙의 성격이 드러난다. 근대 사회로 바뀌면서 계급이라는 것이 없어진 듯하지만 그것은 아직 요원한 것임을 줄리앙의 모습과 사형 언도를 통해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실주의적 성격 :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계층이 여전히 구별된 사회상, 사교계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그리고 한 인간이 근대인으로 태어나는 것을 막는 불합리한 사회 제도 등을 줄리앙의 삶의 과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밝혀 주고 있다.

 

지도 방법

·주인공의 마지막 발언의 내용에 주목하여 읽는다.

 줄리앙 소렐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중점을 두도록 한다. 그가 최후 진술을 하는 대목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이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자품의 의의를 사실주의 소설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근대의 대표적인 장르인 사실주의 소설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효과적인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소설이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는 인물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필요하다.

1. 다음 글을 참고하여 소렐이 레날 부인을 죽이려 한 이유를 분석해보자.

이끌어주기

 이 작품의 전체 줄거리를 참고하여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소렐이 지향하고자 하는 삶의 과정에서 레날 부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생각하면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시답안]

 소렐은 베리에르 시(市)의 시장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레날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드러나고 이에 두 사람은 헤어진다. 소렐의 첫 번째 삶이 좌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어 소렐은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사랑을 통해 프랑스 사교계와 프랑스 사회의 일원으로 설 수 있는 위치에 이른다. 그러나 마틸드와의 결혼 직전 레날 부인은 자신과 소렐 사이의 관계를 알리는 편지를 보내게 되고, 쥴리앙의 꿈은 다시 한 번 좌절을 맞게 된다. 이에 줄리앙은 사랑하는 여인이었던 레날 부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려 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줄리앙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레날 부인을 죽이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2. 소렐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대목을 주의 깊게 읽고, 우리나라 소설 속 인물 중 이와 유사한 성격의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지 생각해 보고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말해 보자.

이끌어주기

소렐의 최후 진술 내용이 무엇인지 요약하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나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소렐과 유사한 인물을 찾아보도록 유도할 수 있다.

[예시답안]

 소렐은 그가 살아가던 당시 사회의 계층 장벽으로 인해 좌절하고 고뇌하며, 이를 허물기 위해 저항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홍길동전’의 홍길동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홍길동 역시 신분 제도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활빈당 활동을 하였고, 마침내는 임금과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러한 모습은 소렐이 최후 진술을 통해 재판정에 있는 상류 계층 사람들을 향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과 유사성이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참고자료

 

 ‘적과 흑’의 현대적 의의

 스탕달은 자기 시대의 대단히 충실한 묘사자로서, 사회 계급의 모든 뉘앙스를 포착하고 격변의 세기를 특정짓는 사회 계급의 다양한 양상들을 드러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실 전체를 사회 계급 문제와의 밀접한 이기적 정치를 고발하는 비판적 사고가 도처에 보인다. ‘적과 흑’은 앙시엥 레짐을 음험하게 복구시키려는 귀족 계급의 반동에 대한 단죄다.

 경제생활 : 스탕달은 시대의 심각한 변화와 더불어 금전이 시대의 힘이 되고 사회적 구분의 주요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귀족 계급의 쇠락과 부르주아지의 세력 신장을 의미하는 현상이다.

 현대 사회를 향한 격동을 강조하여 지적하면서도 스탕달은 물질주의적이고 관례 추종적이며 생기없는 몰취미한 사회, 즉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결함을 폭로한다.

 풍습 :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그룹을 형성하는 각각의 계급은 자계급 특유의 삶의 방식과 관례와 습관과 편견을 지니고 있다. 귀족과 부르주아는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며, 부자와 빈자는 인생을 다르게 생각한다. 스탕달은 풍속이 계층에 따라 현저하게 변화를 보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중인물 : 우리는 인물들을 통하여 각 사회 계급의 본질적인 특징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줄리앙 소렐 : 총명하고 야심만만하며 대담한 이 하층민은 반항아가 된다. 자기를 희생물로 삼는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다. 스탕달이 그의 작품 속에서 제기하는 사회 계급의 문제가 우리 시대의 현대 사회에서는 무효가 된 것일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는 스탕달이 그의 주인공들ㅇ과 더불어 도래하기를 희망하고 기원했던 사회, 즉 사회적 구분이 각자의 가치와 재능에만 근거해있는 그 정당하고 공정한 질서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가 문제 삼았던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은 아직도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스탕달은 그의 시대에 와서 인정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해 시대의 서자로 죽었으나, 20세기에 와서 모든 영광을 되찾은 작가이다. 후세에게만 신뢰를 표명했던 이 작가는 자기 시대를 폭넓게 앞지르면서 현대 세계의 날카로운 문제점들을 제기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작품을 대단히 현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스탕달은 현대적인 작가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인간 영혼에 관한 탁월한 비전을 지녔던 이 작가는 인간성의 기본적이고 영속적인 모든 문제들을 부각시킨다. 전체 사회의 계급으로의 분화라는 현상이 지속되는 한, 사회 계급 문제에 관한 그의 선험적 또는 경험적 추론은 의미를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거기에는 항상 고통받은 예외적인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 이동렬,「스탕달 소설 연구」

 

이해와 감상

 1830년에 발표된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은 스탕달이 '법정 신문'에 기재된 한 사건에서 취재하여 소설화한 것으로, 7월 혁명 전야의 프랑스 사회를 그리고 있다. '적과 흑'이라는 제목은 그 당시 사회상을 또 한번 대변해 준다. 그 시대에 귀족 계급이 아닌 사람이 출세하는 길은 성직자가 되거나, 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나폴레옹은 몰락했고, 군인으로서의 출세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줄리앙은 성직자의 길을 택한다. 제목의 적색과 흑색은 이러한 시대의 색을 보여 준다. 군인의 견장인 빨강과 성직자로서의 신부 옷인 검은 0색, 마음으로는 나폴레옹의지지자로 '적'을 택한 줄리앙이 현실에서는 성직자인 '흑'을 선택하는 것이다. (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심화 자료

1830년대를 묘파한 걸출한 정치사회소설로 스땅달(Stendhal)은 혁명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783년 프랑스의 그르노블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앙리 베일(Henri Beyle). 부친 셰뤼벵 베일은 그르노블 고등법원의 변호사로 돈만 아는 저속한 남자였다. 7세 때 어머니 앙리에뜨를 잃은 스땅달은 그의 부친과 가까운 사이였던 이모 셰라피에게 양육되다시피 했지만 그는 평생 그녀를 미워했다. 그의 자전적인 소설《앙리 브륄라르의 생애(Henri Brulard)》에서 그는 그녀를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가 어렸을 때 발코니에서, 화분 속에 씨앗을 심으려고 흙을 파다가 칼을 떨어뜨려 지나가던 노파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는데, 이모 셰라피는 그가 노파를 죽이려 했다고 단언했다. 이 일은 그의 마음속에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다.

  또한 자기의 어린 시절의 교육을 맡았던 라얀느 신부도 그의 부친, 이모와 함께 스땅달이 매우 싫어했던 인물 중의 하나였다. 반면 그는 어머니 쪽 친척인 가뇽 가의 사람들을 좋아했고, 또 그들에게서 많은 정신적 영향을 받았다. 외할아버지는 스땅달에게 18세기적인 합리주의 사상을 심어 주었고, 외삼촌 로망 가뇽은 쾌락주의적인 인생관을, 외종조모 엘리자베스 가뇽은 고매한 영웅주의적 에스파뇰리슴을 심어 주었다.

  그의 생애를 대충 훑어본다면, 17세에 나폴레옹 군대의 소위로 활약, 19세에는 극작가를 지망하는 문학청년, 22세에는 여배우 멜라니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수입 식료품상의 점원생활, 27세에는 나폴레옹 제정의 참사원 서기관생활, 29세에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에 종군, 31세에는 나폴레옹과 함께 몰락한 후 문필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는 휴직 군인, 38세에는 사랑에 열중하나 연인으로부터 당한 실연의 연속, 43세에 작가생활, 48세에 다시 관직으로 들어가 이탈리아 주재 프랑스 영사를 지낸다. 이와 같이 스땅달은 다채로운 경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특히 1814년, 그의 나이 31세 때,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실직한 스땅달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이주해서 1821년, 이탈리아 해방운동(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 공명하고, 오스트리아 정부를 비방하는 말을 했던 까닭으로 추방명령을 받는다. 이 시기, 즉 1814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하기 전해인 1821년까지가 스땅달의 생애에서는 가장 특이할 만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영국의 여러 잡지에 반정부적인 논문인《프랑스 통신》을 쓰면서《연예론(De l'Amour)》,《적과 흑(Le Rouge  et le Noir)》등 걸작을 발표한다. 7월 혁명 후 트리에스테 영사로 임명되나 메테르니히에게 거부당해 법왕령 치비타비키아의 영사로 지낸다. 1836년 파리에 돌아온 1842년 3월 22일, 길가에서 졸도하여 의식을 잃은 채 그 이튿날 사망하였다. 이와 같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서, 그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탐구했다.

  친척인 나폴레옹 정부의 고관 삐에르 다뤼의 권유로 입대한 용기병 장교의 직업을 버리고 스땅달은 문학가가 되려고 결심하고 파리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몰리에르와 같은 희곡을 쓰면서 파리에서 사는 것이 소년시대의 꿈이었던 그는 훌륭한 희곡을 쓰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해서 잘 알려고 노력했다. 정치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도, 인간을 잘 모르고는 숭고한 경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는 프랑스의 감각론적 유물론자인 꽁디약과 에르베쉬스, 카바니스 등 관념학파(감각을 인식의 기초로 하는 학파)의 저서에 대한 탐독에 열중했다. 특히 에르베쉬스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이때에 스땅달의 기본적인 사상형성이 거의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희곡작품을 쓰기 위해서 철학 연구나 연극의 이론을 공부하였는데, 비록 이 방법은 실패하였지만 그러한 연구는 인생의 다른 면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왜냐하면 후에 나타난 스땅달의 모든 작품 속에는 더 완성된 형태로 더 멋지게 그 사상이 개화되었기 때문이다. 또 스땅달이 인생에 있어서, 행복 추구의 기본 개념을 거의 완성시킨 것도 그 연구 덕분인 것이다.

  그후에 스땅달의 사상은 평생토록 거의 변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나의 정신생활은 몇 개의 중요한 관념을 주의 깊게 고찰하고, 그 관념에 입각하여 진리를 보기 위해서 일생을 보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그의 사상의 경력엔 어떠한 위기나 비약적인 발전은 없지만, 그 대신 자기가 그려낸 사상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충실성이 깃들여져 있다. "나는 어제 찬양한 것을 오늘도 찬양하고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말처럼 자기가 걷는 길을 절대로 바르다는 강렬한 신념이 스땅달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성장이란, 변화가 아니고 깊이 파고드는 일이었다.

  그럼 스땅달이 깊이 파고들고, 끝까지 추구했던 행복이란 무엇인가.

  "물체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한 것은 느껴지는 것뿐이다." 이 말이 증명해 주듯 스땅달에 있어서, 행복이란 감각의 세계와는 유리된 형이상학이나, 신비적인 추상관념이 아니라 감각의 기쁨, 말하자면 쾌락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사실 쾌락은 여러 가지 사회적·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고서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스땅달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 사회에 종속적 존재(아부하는 인간)가 되지 않고, 사회나 타인을 태연히 무시하고 자기의 내부세계에서 이 감각의 기쁨을 찾아내려 하였다. 향락주의자로서 그의 위대한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겠다. 감각의 기쁨을 자기의 내부에서 극도로 승화시켜 마침내는 영혼의 전율의 경지까지 자신을 높여 간 것이다. 그리고 사회나 타인의 구속을 받지 않는 순수하고 주체적인 행복을 그는 연애의 세계에서 발견했다.

  한편 그에게 있어서 행복의 추구는 논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몰두한 것도 수학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 요소, 즉 위선과 애매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이 수학에 대한 열정이 그를 명확한 논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인생의 거의 모든 불행은 우리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인간을 철저하게 알고, 사건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행복을 향한 가장 튼 진보이다."라는 그의 말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어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론으로는, 첫째로 인간의 마음을 아는 것, 둘째로 올바른 진리, 또는 논리가 불가결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위대한 극작가가 된다는 예술적인 필요에 의해서, 또 행복해져야겠다는 생활상의 필요에 의해서도 인간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스땅달에 있어서는 절대의 전제조건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마음부터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는《에고티슴의 회상(Souvenirs d'egotisme)》속에서 "인간은 자기자신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지 알 수 있다"고 탄식을 하고 있다. 인간을 알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해야만 했던 스땅달의 생애는 이러한 객관적인 자기 분석에 의한 끊임없는 자기 연마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지성의 냉정한 거울에다 자기의 미묘한 감정의 움직임을 비춰 보고, 그 감정이 비록 제아무리 부끄러운 것일지라도 두려움이 없이 면밀히 그것을 기록하는 훈련을 되풀이하는 인간만이, 비로소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숨은 진실을 정확하고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스땅달 작품의 생생함 심리 묘사도, 작가 자신의 철두철미한 자기 의식의 노력에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인간의 마음을 묘사하는 한 방법으로 그는 에코티즘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에고티즘이란 과잉의 자기 의식, 또는 자기에 관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다. 스땅달 자신도 일종의 에코티즘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의《일기》《서간집》《에고티슴의 회상》《앙리 브륄라르의 생애》, 그 밖의 수많은 노트 등, 자기에 대해서 쓴 많은 작품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자기 탐구를 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스땅달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작품이 읽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가 1880년이나 1935년에는 많이 읽힐 것이라고 예언한 것도 그의 작품이 선구적인 역할을 하리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외할아버지의 동생이었던 외종조모에게서 물려받은 에스파뇰리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1835년 9월, 그의 나이 52세 때 스땅달은 알바노 호숫가를 거닐면서 모래 위에 12명의 여인의 첫 글자를 썼다. "이 여성들의 대부분이 나의 사랑에 응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여자들은 나의 전 생애를 지배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이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스땅달에게 있어서 연애란 인생 최대의 관심사였다. 사랑을 통한 행복 없이는 입신 출세도, 재산도, 쾌락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던 바와 같이 어렸을 적부터 그에게 사랑을 가르친 교사는 그의 외삼촌 로망 가뇽이다. 그는 그르노블의 유명한 멋쟁이로 수많은 미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외삼촌의 품행은 스땅달의 연애행각에 있어서 많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실상 스땅달의 성격은 겁이 많고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소심증 체질로, 그가 배웠던 사람의 패턴과 그의 소심증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의 수많은 연애 사건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1818년 밀라노 사교계에서 알게 된 마띨드 뎀보스키와의 열애 사건이다. 1821년, 밀라노를 퇴거할 때까지 그녀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으나 결국 이루지 못했고, 그런 까닭에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의 가슴속에서 점점 더 이상화되어, 결국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이 불행한 사랑의 경험을 토대로 그가 쓴 작품이《연애론》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결정 작용(cristallisation)〉이라는 말은 모든 현상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대상의 새로운 완성을 발견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을 미화시켜 생각하는 심리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작용의 이론은 연애의 출발과 그 형성의 이론인 동시에 그 종말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예상하는 이론이다. 물론 스땅달 자신도 불멸의 연애에 대해서 언급은 하고 있지만, 그가 진정 관심을 두었던 것은 멸하는 연애, 즉〈정열적 연애〉만을 가리킬 뿐이고 취미적 연애, 육체적 연애, 허영의 연애는 여기서 제외되고 있다. 또한〈정열적 사랑〉은 세속적인 것과 육체를 초월한 것으로 스땅달 자신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지만 세속의 모든 사랑이 필연적으로 시간과 더불어 멸해 간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스땅달이 그의 저서의 서두에서 흔히 썼던〈행복한 소수의 사람들〉이란 허영심이나 자만심·감정의 과장이 없는 애정이 깊고 소박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는 이런 사람에게만 정열적인 연애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가 이탈리아를 사랑한 것도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인이 이른바 정열적인 연애가 어울리는 기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밀라노는 그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였다.

  명석한 논리를 사랑하는 스땅달은 남에게 속지 않으려는 조심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억제의 습관을 지니게 되었고, 자기의 본심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지성의 힘으로 자기를 방어하면서 냉소와 풍자로써 남을 두렵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속에는 타는 듯한 정열과 섬세한 영혼이 깃들여 있었다. 몽상을 무엇보다도 즐긴 스땅달은 음악의 멜로디를 타고 자기의 감정이 방황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하이든, 모차르트, 메따스타지오, 로시니 등 저명한 음악가의 전기를 썼지만 음악교육을 받은 것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기술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감정과 영혼의 문제였다. 그는 음악을 들으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 있는 기분이 든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불행한 연인이던 스땅달은 마음의 위로를 음악 속에서 찾았다. 음악은 부재의 연인이 그에게 달콤하게 속삭여 주는 관능적인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의 기쁨은 애인과 함께 있을 때를 상상하고 느끼는 쾌락과 유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의 기초는 바로 이 육체적 쾌락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으며, 음악에 의해서 강력한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우울한 분위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우울은 마음의 위로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복을 예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 때문에 더욱더 그는 이탈리아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울함이 없이는 정열적인 음악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허영심이 강하고 경솔하고 우울을 모르는 프랑스인 에게는 음악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이탈리아 회화사(Histoire de la peinture en Italie)》속에서 예술은 시대·풍토·인종·정치체제의 영향을 받고 변화한다는 미의 상대성원리를 전개했다. 음악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 있어서도 채색·데생·원근법 등의 기술보다는 표현을 그는 훨씬 더 중히 여겼다. 표현은 예술의 모든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으며 남의 비판보다는 그림을 감상할 경우에 자기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강렬한 정열이 없는 사람은 그림 속에 표현되어 있는 본질적인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가 다 독자적인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한 예술가가 자기의 독특한 행복추구의 방법을 표현한 것이므로 예술가와 감상가의 행복추구의 방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그 작품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다. 이것이《이탈리아 회화사》속에서 스땅달이 주장한 교훈이다.

  그의 정치관에 대해 말한다면, 스땅달은 평생 변함없는 반 권력주의자였다. "폭군적인 모든 것은 나에게 반항심을 일으킨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권력은 인간을 어리석게 만들고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그는 가정의 왕당파적인 공기에 반발하여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였고, 또 나폴레옹에게 봉사하면서도 그의 독재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왕정복고 기에는 망명귀족의 반동정책과 제주이트파 성직자들의 활동을 비판하였다. 1813년에서 1825년에 걸쳐 그는 영국 계통의 잡지에 파리 문단의 소식이나 서평을 썼는데, 그 속에서 그는 당시의 정치기구나 사회구조, 자유주의 탄압정책에 대한 공격을 가하였다. 이 논문은《영국 통신》속에 수록되어 있지만 여기서 나타난 시대 비평은《적과 흑》의 시대적 배경이다. 그는 또 1825년에《산업가에 대한 새로운 음모》라는 팜플렛을 발표하여 신흥 부르주아 산업가의 실리주의를 공격했다. 이 태도는 그의 미완의 소설《뤼시앙 루벵(Lucien Leuwen)》속에 나타난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그는 다시 관직에 앉아 이탈리아의 치비타비키아의 영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루이 필립의 금권정치와 금융 부르즈와의 정권 탈취의 내막을《뤼시앙 루벵》속에서 폭로하고 있다.

  스땅달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주의자이다. 그의 자유주의는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고 어느 계급의 이익도 대변하지 않는 순수자유주의의 입장이고 따라서 그는 어느 정권도 비판할 수 있었던 점이 그의 특징이었다. 그는 진보를 믿는 자유주의 사상가인 동시에 시대의식을 정확하게 포착할 줄 아는 역사감각을 갖추고 있다. 그는 어떠한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왕성한 호기심을 보였고 그 원인을 알려고 노력했다. 그의 진보사상과 통찰력에 의해서 그의 작품은 오늘날 점점 새로운 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그리고 스땅달에 있어서 나폴레옹은 하나의 상징적 존재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부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제1 통령이 되고 황제가 되어 프랑스의 자유를 짓밟는 군주가 되자 스땅달은 그를 몹시 비난했다. "요컨대 위인으로서의 그를 찬양하라, 군주로서의 그를 증오하라"라는 말이 스땅달의 나폴레옹 관을 지탱하는 기본 태도였다. 스땅달은 나폴레옹을 뛰어난 에네르기의 교사로 보았다. 즉, 나폴레옹은 그에게 있어 예술적인 영감의 원천이었다. 스땅달 소설의 주인공은 다소 나폴레옹을 반영하게 된다. 《적과 흑》의 쥘리앙, 《뤼시앙 루벵》의 뤼시앙, 《빠르므의 수도원(La Chartreuse de Parme)》의 파브리스가 그러하다.

  특히《빠르므의 수도원》에서 프랑스군의 밀라노 입성 광경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스땅달이 나폴레옹 법전을 유난히 사랑한 것은 그가 간결하고 명확하고 스피디하고 에네르기에 넘치는 문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스땅달의 무신론, 특히 반승려적인 태도는 소년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카톨릭 신자면서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인 아버지와, 가정교사가 된 제주이트파의 성직자 라얀느, 그리고 어머니가 죽은 후 그를 기른 아주머니 셰라피, 이 세 사람에 대한 반발에서 종교에 반감을 갖게 된 때문이었다. "나는 사제를 미워하고, 사제의 권력의 근원인 나의 아버지를 미워하고 또 사제가 그 이름 아래서 나를 압박한 종교를 미워한다."고 그는《앙리 브륄라르의 생애》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종교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종교가 지니는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무감각했던 것도 아니다. 종교미술이나 카톨릭교의 의식의 장엄함에 대해서는 그는 감동을 표명하고 있다.《적과 흑》속에서 국왕이 부레이 르 오의 쌩 클레망의 유골에 참배하는 장면에 대한 쥘리앙의 감동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또 그가 모든 성직자를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적과 흑》에 나오는 셸랑 사제, 쟝세니스트인 삐라르 사제, 《빠르므의 수도원》에서는 프라데스 사제가 선량하거나 감동적인 성직자로서 그려져 있다. 그가 종교나 성직자들 비난한 것은 허위와 위선, 즉 승려들의 위선이 도덕적 내지 사회적인 진보를 막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것 때문이다. 그는 무신론자로서 사후의 세계를 믿지 않았으나 그것을 믿는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사람에 따라서는 내세에 대한 신념이 한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 없었다. 그는"나의 신이 존재하는 것을 기뻐했다. 나처럼 성실하게 산 사람에 대해서는 신도 나를 천국으로 맞이해 줄 것이다."하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인생에 대해서 충실했기 때문에 내세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파리의 몽마르뜨르에 있는 그의 묘비명에는 그의 유언에 의해서〈앙리 베일, 밀라노인, 쓰고, 사랑하고, 살았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스땅달 자신의 이 묘비명이야말로 1783년에 태어나서 1842년까지 59년이라는 스땅달의 전 생애를 가장 짧게,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문구라 하겠다.

 

 

《적과 흑》에 대해서

  우리는《적과 흑》의 소재를 스땅달이 1827년에 도피네 지방에서 일어난 베르데 청년의 살인미수 사건에서 얻었으며, 이 소설에〈1830년 연대기〉라는 부제가 붙어 잇는 것을 보아도 왕정복고시대에 대한 스땅달의 정치적 견해가 여기에 가미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행복에의 탐구라는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으며, 한 개인으로서 특정한 시대환경을 초월하여, 인간의 본질적인 과제인 에고티슴에 관한 멋진 고찰도 볼 수가 있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앙은 제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난폭한 아버지와 형들에게 학대받으며 자라난다. 그는 나폴레옹을 열렬히 숭배하면서도 노 사제 셸랑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고, 마음에도 없는 성직에 들어가고자 한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빈민도 재능만으로 출세할 수 있었지만, 왕정복고시대에 있어선 성직만이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쥘리앙은 돈과 명예밖에 모르는 지방의 귀족 티를 내는 부류를 경멸했다. 물질보다 정신세계에 사는 시골청년으로서의 쥘리앙은 레날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 돈 많은 귀족청년들이 이기주의나 허영에 비해 〈성실한 마음〉을 가진 자로서 마띨드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두 여성을 대상으로 사랑의 꿈을 추구함으로써 쥘리앙은 그가 멸시하는 지배계급에 대하여 복수를 하는 것이다. 레날 부인에 대한 사랑도 따지고 보면 그가 가정교사로 들어간 집의 주인인 레날 씨에 대한 반발에서였다고도 볼 수 있다.

  레날 부인은 이러한 그의 마음속을 헤아리지 못한 채 행복감에 젖는다. 그녀는 신앙심·부덕·모성애 때문에 자책하지만 한편으로는 쥘리앙의 사랑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쥘리앙은 괴로워하는 여성에게서 영혼의 위대성을 발견했다. 레날 부인은 비록 자기 마음속에선 갈등을 일으키지만 쥘리앙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헌신과 애정으로 대하였다. 쥘리앙은 후에 마띨드 라 몰 양과의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레날 부인에 대한 참된 사랑의 추억을 되살려낸다. 우리는 이 작품에 나타난 두 번의 연애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쥘리앙의 행복 탐구가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알게 된다.

  쥘리앙과 마띨드와의 연애 관계는 호감보다는 반감에서 시작되고, 두 개의 자존심의 상극과 친화력으로서 나타난다. 즉, 마띨드의 오만한 성격에 기분이 상한 쥘리앙의 자존심은 이 여성을 정복하는 데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마띨드가 지적 연애, 즉〈머리로써 하는 사랑〉의 여성인데 비해, 레날 부인은 정적인 연애, 즉〈마음으로 하는 사랑〉의 여성으로 나타나 대립하게 된다. 어느 날, 마띨드는 쥘리앙과의 대립관계를 사랑이라고 규정해 버렸다. "나는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명료하다, 이 나이에 재능 있는 젊은 아가씨가 사랑이 아니고는 어디에서 자극을 구할 것인가?" 하고 그녀는 외친다.

  이 구절은 마띨드의 사랑이〈두뇌의 사랑〉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랑하는 가능성이지 사랑한다는 사실은 아니다. 그 증거로 그녀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연인을 모색하고 있었으나 남자를 발견하지 못한다. 물론 쥘리앙은 그녀의 계급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여기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소설의 주인공이나 역사적 인물을 상상하여 루이 13세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관념 속에서 영웅적이고 위대한 사랑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러한 관념은 극복해야만 할 장애를 전제로 하고 있다.

  자기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남성인 쥘리앙에게서 이러한 영웅적인 면을 발견했을 때, 그러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그 장애 때문에 그녀의 마음속에 결정작용이 일어난다.

  그녀는 왕정복고시대의 특권계급의 청년과 대비시켜서 쥘리앙의 개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그는 나를 사랑하는가?"하는 의문을 갖는다. 한편 쥘리앙은 자기의 지위에 대한 열등감에 마띨드 주위의 젊은 귀족들에게 시기심을 갖게 한다. 또한 마띨드는 자기의 구혼자 앞에서 쥘리앙에게 호의를 보여 그들이 쥘리앙에게 적개심을 품게 만든다. 그 때문에 쥘리앙은 궁지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에 골몰한다. 그럴수록 그는 점점 위험한 공상 속에 빠지게 되고, 그 자신의 행동이 더욱 소심하게 되자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비상한 용기로 바뀌어서 나타나게 된다.

  쥘리앙의 이러한 행위는 그의〈에스파뇰리슴〉의 전형으로, 마띨드는 그의 내부에 도사린 공포병이나 소심함보다는 그것을 이겨내려는 의지, 즉 영웅적인 행위만을 보고 감탄하게 된다. 그녀의 사랑은 쥘리앙으로 하여금 "이것은 레날 부인 곁에서 발견한 영혼의 기쁨은 아니다. 여기에서  애정이 깃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말하게시리 한다. 왜냐하면 마띨드가 쥘리앙을 사랑하는 것은 귀족이 평민을 사랑하는 행위로, 거기서 그녀 자신의 영웅심리를 발견하고 그녀의 자존심에 만족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영웅적인 행위를 감행하는데 있어서 마띨드가 세상 일반의 사고방식에서 자기를 해방하는 데 그처럼 노력을 하는 이유는 그녀가 전통과 인습으로 굳어진 상류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문제는 그녀를 둘러싼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난다. 또한 쥘리앙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자신의 결정작용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이 청년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쥘리앙 자신이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를 위장하는 것은 자기의 낮은 신분과 가난함에 대한 열등감에서인 동시에 자기도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결국 쥘리앙에 대한 레날 부인의 사랑이 자연스럽고, 헌신적인 기분에서 나온 것과는 정반대로 마띨드의 사랑은 정복된 노예가 할 수 없이 정복자에게 끌려가는, 반발로 가득 찬 사랑이다.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열렬히 추구하면서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경멸하는, 소유와 욕망의 갈등 속에서 자존심을 괴롭혀 대는 것이 바로 쥘리앙과 마띨드의 사랑이다. 이전에는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도 없지만, 재능이 특출한 쥘리앙의 존재가 마띨드의 자존심을 만족시켰으나, 결국은 이 두 요소가 분리되면, 거기엔 그저 야심 많은 천한 계급의 청년의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

  마띨드는 그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선 쥘리앙의 영웅적인 모습을, 그러나 때로는 하잘것없는 쥘리앙의 모습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기가 먼저 사랑을 고백한 후 다시 냉담해져 버린 마띨드로부터 자존심을 상한 쥘리앙은 스트라스부르로 떠난다.

  그때에 그는 그곳에서 코라소프 공작을 마나 마띨드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도를 받는다. 코라소프 공작은 그에게 자존심을 바탕으로 한 결정작용을 잘 구사하라고 가르쳐 준다. 마띨드라는 여성이 그를 이미 자기의 것이 되어 버린 것으로 경멸하고 있다면 그 역으로 그의 애정을 불분명한 상태에 두어 그녀를 불안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녀가 불안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기 위해서 페르바끄 원수 부인에게 접근하는 시늉까지 한다.

  마침내 마띨드는 자존심에 얽힌 결정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쥘리앙 스스로가 원수 부인과의 사랑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으므로 더욱 질투심이 솟은 마띨드는, 그의 멸시를 받았다는 패배감에서 그의 위대성을 다시 인식하게 된다. 쥘리앙이 높이 평가를 받는 것은 역시 오랜 내면적 갈등을 그가 용케 견디어 낸 데에 있었던 셈이다. 이리하여 쥘리앙은 여인의 마음을 조정하는 데 성공하고, 마띨드에게서 사랑의 보증을 얻는다. 그 순간부터 그들의 관계는 역전된다. 마띨드는 그를 미칠 듯 사랑하고 그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그에게 높은 신분과 부를 주려고 한다. 하나 마띨드를 완전히 소유한 쥘리앙은 명예심에 사로잡혀 사랑을 잃어버린다.

  이 두 사람의 모험적인 결혼이 이루어지려는 때, 쥘리앙을 비방하는 편지가 레날 부인으로부터 도착한다. 이에 화가 난 쥘리앙을 교회로 달려가 기도를 드리는 레날 부인을 권총으로 쏜다.

  타인(사회)과 자기를 대립시켜 살아 왔던 쥘리앙은 감옥에 갇힌 뒤, 새로운 사실에 눈뜨게 된다. 즉, 세속인의 눈, 타인의 눈, 적의 눈, 신부의 눈을 피해 자기 자신과의 대결 속에서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죽음 직전에 있는데도 아직도 위선가이다. 위선을 저주하면서 왜 위선을 가장하는가?"

  여기서 쥘리앙이 자기의 위선을 지적한 것은 자기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보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과 <두되>의 대립이다. 쥘리앙은 사회적 존재로서 외부세계와의 연관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날카로운 <두뇌>의 소유자이고 유물론자이며 반항자이지만, 자기 자신과 대결할 때는 자기가 진실하게 살지 못하고 참된 사랑을 저버린 것을 후회하는 <심정>의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울부짖으며 레날 부인을 찾았던 것이다.

  쥘리앙의 생애는 이처럼 외면적·물질적 행복, 파리·미녀·지위·명성·돈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되어, 외부세계와 격리됨으로써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행복에 도달했던 것이다.

  스땅달 자신의 생애도 쥘리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정신, 외면에서 내면을 향한 행로였고, 언제나 외면적 행복은 그에게 내면적인 불행을 가져오는 까닭에 이 갈등을 이겨가면서 끝까지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물론 《적과 흑》은 그 밖에도 많은 연구를 위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아라공은 《적과 흑》이 쥘리앙이라는 한 인간을 통해서 당시의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고 있으며, 뛰어난 정치풍자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1822년에서 1829년까지의 《영국 통신》에 나타난 스탕달의 지적 형성이 《적과 흑》의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지면 관계로 《영국 통신》과 《적과 흑》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없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사회변화에 대한 고찰, 사회계급의 분석, 반교권사상 등 정치·사회사상에 대하 스땅달의 탁견으로 가득할 뿐 아니라 1820년대 이후의 프랑스의 소설, 즉 연애심리소설·공포소설·유머 소설·역사소설 등에 대한 비평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시대의 증인으로서, 그리고 연대기로서의 《적과 흑》의 새로운 가치가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스땅달은 《적과 흑》을 쓸 당시 정신적으로 국적을 잃은〈망명자〉의 위치에서 당시의 정치와 사회를 비판코자 한 것이다. 그것은 복수욕과 분노에 불타는 패자의 반역 정신, 몰락 의식과 체념주의에 입각한 패자의식이 아니라 총명한 지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겸비한 진보주의의 반항적인 패자의식인 것이다.《적과 흑》의 부제〈1830년 연대기〉가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제주이트파와 망명 귀족을 규탄하고 그들의 악에 대한 민중의 노여움을 그려내고자 한 점이 있어 7월 혁명을 일으킨 민중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쥘리앙이 공판에 있어 배심원들을 향해서 퍼붓는 증오의 말에 주의해야 한다.

  "배심원 여러분!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이 같은 것은 문제 밖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경멸을 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감히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저는 불행하게도 여러분의 계급에 속한 영예를 갖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신 바처럼 저는 자기의 신분이 천한 것에 반항한 일개 촌뜨기에 불과 합니다‥‥‥저는 조금도 여러분의 후의를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즉, 안이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죽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저를 처벌함으로써 본인과 같이 하층계급에 태어나 빈곤 속에서 학대를 받으면서도 다행히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서, 대담하게도 부자들이 사교계라고 부르는 세계로 신분도 깨닫지 못하고 감히 발을 들여놓으려는 청년들의 의기를 완전히 꺾어 버리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피압박계급의 무력한 노여움이 반역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말은 왕정복고시대에 훌륭한 교육을 받고도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한 청년의 발언이며, 보수적이고 어리석은 사회풍조와 타협하여 위선이라는 무기를 역이용하여 출세하고자 하는 길 이외의 다른 길을 찾지 못하는 한 패자의 발언이다.

  한편 자기가 자기를 꾸준히 형성해 나가는 쥘리앙의 사고방식은 실존주의 문학의 하나의 선구자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출처 : 閔熹植 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스탕달(Stendhal)

 본명은 Marie-Henri Beyle. 1783. 1. 23 프랑스 그르노블~1842. 3. 23 파리.19세기 프랑스의 주요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 그의 작품은 심리적·정치적 통찰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은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830)·〈파름의 수도원 La Chartreuse de Parme〉(1839)이다. 그는 많은 필명을 갖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름은 프로이센의 도시 슈텐달에서 따온 스탕달이었다.

 어린시절

아버지 셰뤼뱅 벨은 그르노블 고등법원의 법정 변호사였고, 어머니 앙리에트(결혼 전 姓은 가뇽)는 그르노블에서 명망 높은 의사의 딸이었다(외가는 14세기에 교황과 함께 아비뇽으로 이주한 이탈리아 가문으로, 스탕달은 이 점을 내세워 자신을 이탈리아인의 후손으로 여기기를 좋아했음).

어린 벨은 7세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숭배했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어머니의 아름다움과 민감한 감수성 및 뛰어난 지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썼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아버지의 사상과 태도와 물욕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는 외할아버지인 앙리 가뇽을 사랑하고 존경하여 되도록 많은 시간을 외할아버지와 함께 보냈고, 외할아버지를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었다. 벨은 집에서는 아버지와 세라피 이모, 그리고 가정교사인 랠란 신부에게 억눌려 지내면서(그는 이들의 억압적인 태도를 과장한 것이 분명함), 개인주의적이고 무례하며 충동적인 성격을 키웠다. 이 세 '폭군'은 그가 싫어하게 된 그르노블 부르주아지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사춘기에 이를 때까지 과보호를 받으며 지극히 정상적인 교제조차 갖지 못한 채 격리되어 있었다. 외향적인 활동 대신 몽상을 즐겼고, 이때 생긴 명상 취미는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스탕달은 나중에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 Vie de Henri Brulard〉라는 자서전에서 가족과 교육에 대한 자신의 반발을 '에스파뇰리슴'(스페인주의)으로 설명하고, 이 용어를 평범하고 진부한 것에 대한 혐오, 돈과 장사에 대한 경멸, 인간의 의지력과 넘치는 정열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규정하고 있다. 17세 때 그는 파리로 갔는데, 겉으로는 유명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그르노블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대한 그의 안목은 소설(그가 특히 애독한 소설은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 Manon Lescaut〉와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 La Nouvelle Heloise〉였음)에서 읽은 것뿐이었다. 그는 몇 주 동안의 비참한 생활 끝에 위장병에 걸렸으나 다행히 외사촌 형인 노엘 다뤼가 그에게 방 한 칸을 내주었다. 노엘 다뤼는 엄격한 신사로서 시골뜨기 청년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육군성의 말단 서기 자리를 구해주었다.

직장생활과 글쓰기

3개월 뒤인 1800년 5월, 앙리 벨은 이탈리아에 2번째로 원정중인 나폴레옹의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나폴레옹이 마랭고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날 밀라노에 도착했다 (→ 색인 : 나폴레옹 전쟁). 밀라노는 그에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는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들은 훌륭한 음악에 대해 글을 썼고, 밀라노의 몇몇 귀부인들, 특히 프랑스의 화가 앙투안 장 그로의 친구였던 안젤라 피에트라그루아의 아름다움을 찬양했으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11년 뒤에 그녀의 애인이 된 그는 밀라노에 도착한 직후 난생 처음으로 성 경험을 가졌는데, 이때 걸린 성병이 주기적으로 재발하는 바람에 평생 동안 시달렸다고 함). 벨은 안젤라에 대한 사랑으로 고민하는 한편 라 스칼라 극장의 공연을 관람하고 카지노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면서 그의 인생의 특징이 된 연정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다. 군대생활을 막 시작한 그는 이탈리아어와 펜싱 교습, 승마, 연극, 오페라 및 밀라노 숙녀들과의 연애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18개월 동안 원정에 참여했지만 진정한 군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801년말에 그는 군대를 떠나 파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무렵 20세가 된 그에게는 문학이 주요관심사가 되어 있었고, 희곡은 그를 가장 사로잡은 문학 형식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몰리에르의 후계자가 될 작정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려면 책이 필요했고 사교계에 나가려면 옷과 돈이 필요했다. 그는 그르노블 사투리와 못 생긴 외모, 열등감 그리고 여자를 유혹하는 면에서 한 번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경력 때문에 자주 우울증에 빠졌고, 운문 희곡을 쓰지 못하는 것도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가 파리에서 참고 견딘 경험은 모두 그르노블 출신의 부르주아 앙리 벨을 소설가 스탕달로 바꾸는 데 이바지했다. 여배우 멜라니 길베르(루아종이라고도 함)와 연애에 빠진 그는 1805년 길베르를 따라 마르세유로 가서 몇 달 동안 식료품과 잡화를 파는 도매상 노릇을 했다. 그후 육군부로 돌아와 1806년 10월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할 때 그 현장에 있었고, 2년 동안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에 주둔했다. 이곳에서 그는 전부터 읽기 시작한 18세기 철학자들(특히 데스튀트 드 트라시, 클로드 아드리앵 엘베시위스)의 책을 계속 읽었고,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다. 1809년에는 일선 부대로 돌아왔으며 1812년 병참 참모로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전쟁터에 남겨진 끔찍한 장면들을 목격했고, 이 장면들을 몇 통의 편지에서 탁월하게 묘사했다. 나폴레옹 제국이 무너진 뒤 새 정권에 등용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자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에게 밀라노는 전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그가 L.-A.-C. 봉베라는 필명으로 쓴 첫 작품 〈하이든과 모차르트 및 메타스타시오의 생애 Vies de Haydn, de Mozart et de Metastase〉(1814)는 과연 그가 어떤 유형의 작가인가(음악 비평가냐, 예술 비평가냐, 또는 문학 비평가냐)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벨은 평생 동안 약 170개의 필명을 사용했지만, 독일의 유명한 예술 비평가인 J. J. 빙켈만이 태어난 프로이센의 작은 도시이름에서 따온 'M. 드 스탕달'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17년의 로마, 나폴리, 피렌체 Rome, Naples et Florence en 1817〉를 발표할 때였다. 1821년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는 파리에서 사교계 출입을 되도록 삼가면서, 그후 9년 동안 〈연애론 De l'amour〉(1822), 2권의 소책자로 작성된 〈라신과 셰익스피어 Racine et Shakespeare〉(1823, 1825), 〈로시니의 생애 Vie de Rossini〉(1823), 그의 첫 장편소설인 〈아르망스 Armance〉(1827), 〈로마 산책 Promenades dans Rome〉(1829),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 된 장편소설 〈적과 흑〉 등 6권의 책을 출판했다.

1830년 7월혁명이 일어난 뒤, 그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주재 프랑스 영사로 임명되었지만, 이듬해 4월에 다시 로마 근처에 치비타베키아로 파견되었다. 그는 직책과 관련된 하찮은 일들과 치비타베키아의 단조로운 생활에 싫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에게 글을 쓸 기회는 충분했고,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밀라노뿐 아니라 로마도 차츰 사랑하게 되었다. 스탕달은 공무원 신분으로 있는 동안 책 출판을 자제했다. 그러나 〈에고티슴 회상록 Souvenirs d'egotisme〉(1892)과 끝내 완성하지 못한 장편소설 〈뤼시앵 뢰뱅 Lucien Leuwen〉(1894), 사춘기까지만 다룬 자서전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1890)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글을 썼다. 그는 로마의 관습·예술·역사 등 모든 측면에 매혹되었으나 로마 가톨릭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영적인 문제나 신비주의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로마 가톨릭은 놀라운 제국, 유능한 정치체제일 뿐이었다. 스탕달은 늙어갈수록 활동을 줄인 조용한 생활을 원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호기심을 어느 정도는 유지했다. 그는 젊은시절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사랑을 꿈꾸었고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한 연애의 추억에 잠겼다. 그는 건강이 나빠져서 자주 파리를 방문했는데 〈파름의 수도원〉도 그런 기회에 쓴 소설이다. 그가 이 소설을 쓴 52일 동안, 수많은 여인들의 모습이 유령처럼 그의 머리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스탕달은 평생 동안 행복의 이미지를 추구했지만 현실에서는 행복을 얻지 못했으며, 그 이유를 이해하려고 애써본 적도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후세에 가서야 자신이 존경을 받게 되리라는 확신으로 위안을 얻었다. 죽기 직전에 그는 〈파름의 수도원〉을 격찬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기사를 읽는 기쁨을 누렸다. 이 칭찬은 '행복한 소수'가 스탕달의 소설에서 결국 무엇을 발견하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최초의 신호였다. 1841년 3월에 뇌졸중 발작을 일으켰으며, 그후 이따금 실어증에 걸리곤 했던 그는 질병을 이유로 공식 허가를 얻어, 1841년 10월 11일에 프랑스로 떠났다. 5개월 뒤 스탕달은 심한 발작을 일으켜 쓰러졌고 결국 호텔 방에서 죽었다.

감성적 인생

스탕달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은 가정과 사회에서 행복을 얻는 전통적 비결을 마음에 항상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결코 따르지 않은(또는 따르지 못했던) 한 사람의 생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일정한 주소나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집도 자식도 없었고, 심지어는 애인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1808년에 누이 폴린(그는 폴린에게 모든 것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고, 마르세유와 독일에서 많은 편지를 써보냈음) 마저 결혼한 뒤에는 가족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 되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갈망했고 대다수 사람보다 훨씬 더 간절히 우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데도 오늘날 입수할 수 있는 모든 문서 자료에 따르면,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진정한 공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의 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앙리 벨의 가장 근본적인 삶(그의 생각과 환상, 감정의 전기)은 '스탕달'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속에서 영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젊은이의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들은 서로 다른 무대 속에 펼쳐진 앙리 벨의 환상이며,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이다. 소설 주인공인 젊은이의 매력은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을 매혹시키고, 그들의 마음 속에 질투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의 주인공들(〈적과 흑〉의 쥘리앵, 〈파름의 수도원〉의 파브리스, 〈아르망스〉의 옥타브)은 각기 다른 사회에 나타나 다른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만, 그들의 욕망과 감수성 및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똑같다. 그들은 스탕달이 상상하는 스탕달 자신이며, 따라서 이 소설들은 일종의 자서전이다. 그는 이런 소설로써 자신의 감정을 달랬다.

벨리슴

스탕달은 이러한 소설들을 쓰고 싶은 이상한 충동, 이런 소설이 제공하는 쾌락과 심리적 위안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 신비에 걸맞는 이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필명이 아니라 본명을 이용하여 '벨리슴'(Beylisme)이라는 낱말을 만들었다. 이 낱말은 소설의 방법 및 행복의 추구를 가리킨다.

벨리슴 신봉자는 앞서 말한 '행복한 소수'의 한 사람이다. 행복에 대한 스탕달의 개념 속에는 신비주의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행복의 추구는 수학의 증명과 비슷한 것으로, 행복의 논리는 이기주의(egoisme)의 명령에 따르는 데 있었다. 스탕달은 이기주의야말로 모든 인간행동의 유일한 동기라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이 복잡한 세계(나폴레옹의 몰락과 부르봉 왕조의 복위 및 1830년의 혁명을 목격한 일 등)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움직임을 빈틈없이 계산하고, 기회를 판단하고, 습관적으로 아첨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벨은 누이에게 보낸 많은 편지에서 자신의 결함을 몇 가지 이야기하고, 이제 그 결함의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채택하여 추진해야 할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고백했다. 1820년대의 스탕달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방에 틀어박혀 지냈던 19세기초의 젊은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연애론〉에서 그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감상만이 아니라 1821, 1822년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이때쯤 스탕달은 그가 나중에 M. 뢰뱅(〈뤼시앵 뢰뱅〉)과 모스카 백작(〈파름의 수도원〉)을 통해 묘사한 세련된 신사와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1830년에 〈적과 흑〉이 출판된 뒤에도 그는 여전히 행복을 추구하고 있었고, 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에게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해준 철학은 인류의 완성가능성을 믿는 18세기 관념론자들(ideologues)로, 데스튀트 드 트라시에 의해 설명되었다. 벨리슴은 인간의 행동을 재료로 삼아 인생을 유물론적·관능적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완전히 의식적인 수단을 만들어낸다.

스탕달은 예술, 즉 그림과 음악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자신을 훈련한 방법에서 그의 타고난 쾌락주의적 측면을 보여준다. 평범한 안락과 그 이상의 것(마차, 오페라 극장의 지정석, 친구들을 충분히 대접할 수 있는 집)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입이 있는 생활을 하고 싶다는 그의 꿈은 쾌락주의자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자신의 목표를 그렇게 사교적이고 미학적인 것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쥘리앵은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범죄를 저질렀고, 파브리스는 사교계 신사의 특징과는 걸맞지 않은 기질과 대담성을 갖고 있었다. 스탕달 자신의 본성이 갖고 있는 쾌락주의와 소설 주인공들의 대담한 영웅주의가 빚어내는 모순은 벨리슴 속에서 한데 뒤섞이고 조화를 이룬다. 감정적인 면에서 스탕달은 가족과 결별했고, 지적인 면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결별했다. 이러한 스탕달의 태도는 보들레르가 나중에 '당디슴'이라고 부르게 된 것과 거의 일치했다. 그것은 모든 측면(예술적·사회적·지적 측면 등)의 고립이었다. 스탕달의 끊임없는 필명 사용은 심리적 성격(비록 신비주의적인 성격은 아닐지라도)을 띤 순례나 탐색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찾아 헤맨 행복, 그러나 항상 그를 피해 달아나는 행복을 책(특히 2편의 걸작인 〈적과 흑〉·〈파름의 수도원〉)을 쓰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찾아냈다. 이 책들은 소설일 뿐 아니라 세계의 나아갈 바에 대한 연구서인 동시에 앙리 벨이 그 자신의 숱한 자아가 엮어내는 드라마와 함께 유물론적으로 또는 상상적으로 배워온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가공의 설계도인 것이다.

평가

스탕달의 전기작가들은 그의 성격과 그가 종사한 직업의 다양한 측면을 묘사하면서, 끊임없이 '실패'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그는 연인으로도 실패했고, 군인으로도 실패했으며, 작가라는 천직에서도 실패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비평가들이 그를 발자크·플로베르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 인정하고 있다. 젊은 독자층, 특히 프랑스·영국·미국의 젊은 독자들은 발자크나 플로베르보다 스탕달한테서 훨씬 더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스탕달의 글은 수많은 역설적 갈등과 욕망이 뒤섞인 그의 인간성과 생각을 놀랄 만큼 많이 반영하고 있다. 그는 '행복한 소수'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 비굴함 속에서는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 감각과 본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자신이 살고 봉사하는 세계에 반항하는 인물로 제시되어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탕달은 세계를 맞서 싸워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세계와 싸울 때는 세계가 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W. Fowlie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사실주의(realism)

자연이나 현실생활을 정확하고 자세하며 꾸밈 없이 묘사하는 예술적 경향.

사실주의는 상상력에 따른 이상화(理想化)를 거부하고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자세히 관찰한다. 넓은 의미의 사실주의는 여러 문화의 다양한 예술적 경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미술에서는, 검투사와 노파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사실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카라바조, 네덜란드의 풍속화가들, 호세 데 리베라와 디에고 벨라스케스 및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같은 스페인의 화가들, 프랑스의 르냉 형제 등을 비롯한 17세기 화가들의 작품은 그 접근 방식이 사실주의적이다. 18세기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디포, 헨리 필딩 및 토바이어스 스몰릿 등의 작품도 사실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주의가 하나의 미학적 계획으로서 의도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였다. 1850~80년에 나온 프랑스 소설과 그림에서는 사실주의가 주류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1826년 〈메르퀴르 프랑세 뒤 디즈뇌비엠 시에클 Mercure francais du XIXe siecle〉지(誌)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여기에서는 과거의 예술적 업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현실생활이 제공하는 모델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바탕을 두는 예술가 원칙을 나타내기 위해 이 낱말을 사용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주창자들은 아카데미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갖고 있는 인위성을 거부하고 예술작품이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려면 동시대 의식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을 같이했다. 그들은 중하류층의 서민들과 평범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꾸밈 없는 사람들의 삶과 모습,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문제와 관습 및 도덕관을 묘사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그들은 그때까지 무시당했던 동시대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 즉 심적인 태도, 물리적 배경, 물질적 조건 등을 재현하는 작업에 진지하게 몰두했다. 사실주의는 19세기초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지적인 발전에 자극을 받았다. 즉 주로 평범한 사람을 예술 작품의 주제로 삼는 독일의 반낭만주의 운동, 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회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기록하는 전문적 언론의 등장,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 사진술의 발달 등이었다. 이런 모든 발전은 동시대의 삶과 사회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다.

회화

사실주의 미학을 의식적으로 선언하고 실천한 최초의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그의 대작 〈화가의 작업실 The Studio〉(1854~55,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거절당하자, 그는 특별히 지은 가설 천막에 '사실주의, G.쿠르베'라는 이름을 달고 이 작품과 함께 여러 작품을 모아 전시했다. 쿠르베는 그의 그림을 통해 이상화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고, 평범하고 동시대적인 것에 예술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그는 일상생활상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적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앞서 1850~51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던 〈오르낭의 매장 Burial at Ornans〉(1849, 루브르 박물관)과 〈돌 깨는 사람들 Stone Breakers〉(1849, 이탈리아 밀라노, 개인 소장)은 검소한 농부와 노동자들을 꾸밈 없이 사실대로 묘사하여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쿠르베가 농부들을 미화시키지 않고 대담하고 거칠게 제시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미술계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주제와 표현 양식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닦아놓은 터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바르비종파는 1830년대 테오도르 루소,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장 프랑수아 밀레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그 지방의 특징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프랑스 바르비종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독특한 화풍과 서로 약간씩 다른 관심사를 갖고 있었지만 자연의 웅장하고 위풍당당한 측면보다 소박하고 평범한 측면을 강조하여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 그들은 문자 그대로 그림처럼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형태를 충실하게 묘사했다. 밀레는 〈키질하는 사람들 The Winnower〉(1848) 같은 작품에서 농부들을 위엄있고 장대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때까지 중요한 인물들을 묘사할 때만 사용했던 모습을 보잘것없는 서민에게도 적용한 최초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주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로 프랑스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가 있다. 그는 프랑스 사회와 정치를 풍자화한 전형적인 도시 화가였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노동계층의 남녀, 비열한 변호사, 사악한 정치가 들을 그림의 주제로 선택했다. 그 역시 쿠르베처럼 열렬한 민주주의자로 풍자 화가의 명분을 정치적 목적에 직접 활용했다. 도미에는 프랑스 사회의 부도덕성과 추악함을 힘찬 윤곽선, 대담하게 강조한 사실주의적 세부 묘사, 거의 조각 같은 형태 처리 등의 기법을 사용하여 비판했다. 미술에 있어서 사실주의는 프랑스 이외에 19세기 미국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윈슬로 호머의 바다를 주제로 한 힘차고 표현력이 풍부한 그림들, 토머스 에이킨스의 초상화와 뱃놀이 광경 등은 당시의 삶을 솔직하고 냉정하며 정확하게 관찰한 그림들이다.

사실주의란 20세기 미술의 뚜렷한 흐름의 하나로서 일상생활에 대해 좀더 정직하고 예리하며 대상을 이상화시키지 않는 시각을 제시하고자 하는 미술가들의 욕망과, 이 미술을 사회·정치 비판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 8인회'(The Eight)라 불리는 미국 화가들은 도시생활의 어두운 면을 신문 기자처럼 신랄하게 묘사한 풍경화를 그렸고, 한편 독일의 미술운동인 '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의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의 냉소적인 사고방식과 환멸을 사실주의 양식으로 표현했다. 또한 사회사실주의라 부르는 대공황기의 미술 운동도 그당시 미국 사회의 불공평과 해악을 가혹하고 노골적인 사실주의로 묘사했다. 1930년대초부터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후원을 받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삶을 충실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실주의와 거의 관계가 없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직함'이란 국가의 이데올로기 및 선전의 필요성과 일치해야 했고, 용감하고 강인한 노동자와 기술자들의 초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대개 대상을 자연주의적으로 이상화하는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용했다. 이런 그림에 묘사된 노동자와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영웅적인 적극성을 보여주는 대신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부족하다.

한국에서 사실주의는 통칭 '구상'이라는 용어와 동일시되어왔다. 이는 서구의 아카데미 사실화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유입되어 미술교육의 근간을 이룸으로써 사실상 구상적인 미술 전체가 이러한 아카데미 사실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카데미 사실화란, 사실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면서 시민계층의 삶을 인상 깊게 묘사하고 찬미하는 방식으로 생겨났던 서구 사실주의 미술이 19세기 중·후반에 들어와 보다 아카데미적이며 관습적·상업적인 '부르주아 사실주의'로 변화해간 것을 말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미 관례화된 주제(풍경·정물·누드·인물) 시각에 대한 기법적인 혹은 감각적인 변용에 그쳤고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한국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인상파의 한 갈래인 양식과 혼재되어 형성되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는 묘사중심의 회화를 형성했지만 기본적으로 피상적 수준에서의 현실재현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서구의 아카데미즘적인 사실주의 화풍을 직접적으로 들여온 화가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리에서 유학했던 이종우였으며 이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우리의 아카데미즘의 한 양식으로 굳어졌다. 주요작가로는 이종우·김인승·심형구·김창락 등이 있다.

 

문학

문학에서는 소설가인 오노레 드 발자크가 〈인간희극 La comedie humaine〉에서 프랑스 사회 전체를 백과사전처럼 자세히 묘사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의 선구자로서 지적된다. 그러나 문학에서 의식적으로 사실주의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 것은 1850년대에 와서였고, 그후 사실주의 문학은 화가인 쿠르베의 미학적 입장에서 영감을 얻었다. 쿠르베의 화풍을 널리 소개한 프랑스의 언론인 샹플뢰리는 〈사실주의 Le Realisme〉(1857)에서 쿠르베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했다. 샹플뢰리는 비평문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비범한 인물보다는 평범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57년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장편소설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이 출판되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불행한 중산층 가정주부의 심리 변화를 낱낱이 검토하고 부르주아의 정신적 경향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은 사실주의 문학의 걸작이며 유럽에 사실주의 운동을 뿌리 내리게 한 작품이기도 했다. 루이 필리프 시대 프랑스의 거대한 전경을 제시한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L'Education sentimentale〉(1870)은 또 하나의 주요한 사실주의 작품이다. 쥘 공쿠르와 에드몽 공쿠르 형제도 중요한 사실주의 작가였다. 그들은 대표작인 〈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1864)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사회 및 직업 환경을 다루었고, 상류층과 하류층의 사회적 관계를 솔직하게 묘사했다.

이러한 사실주의 문학가들의 정신은 1860~70년대 유럽 문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초연함과 객관성, 정확한 관찰을 강조하고, 사회환경과 관습을 명쾌하면서도 절도있게 비판하며, 도덕적 판단 밑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는 사실주의는 소설 형식이 한창 발전하는 동안 근대소설의 구조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영국의 찰스 디킨스와 앤서니 트롤로프 및 조지 엘리엇, 러시아의 이반 투르게네프와 레프 톨스토이 및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미국의 윌리엄 딘 하웰스, 그리고 독일의 고트프리트 켈러와 초기의 토마스 만 등은 모두 자신의 소설에 사실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였다. 문학에서 사실주의가 낳은 중요한 결과는 자연주의였다. 자연주의는 현실을 의도적으로 고르지 않고 훨씬 더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19세기말 20세기초의 문학운동이었다. 자연주의의 주도적 인물로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있다.

한국에서 사실주의 문학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신소설이 등장한 1900년대 중반 이후로 볼 수 있다. 물론 그전에 〈허생전〉·〈양반전〉 등 박지원의 한문소설과 〈춘향전〉 등의 판소리문학에서도 사실주의 경향을 찾아볼 수 있으나, 이 작품들의 근대 지향성과 사실주의 경향은 지극히 부분적인 데 그쳐 진정한 의미의 근대 사실주의 문학으로 보기는 어렵다. 신소설 가운데 특히 이인직과 이해조의 초기 신소설은 봉건체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 변혁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는 가운데 당대의 현실을 충실하게 그려냈을 뿐 아니라, 인물의 개성적 성격화에도 상당한 진전을 거둠으로써 근대 사실주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계몽주의적 문학관의 압도적 영향으로 인해 신소설은 중세문학의 관념성과 추상성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신소설의 통속화가 급속히 진행되자 초기 신소설의 진보적 전통을 새로이 계승하려는 노력이 이광수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은 인물의 개성적 성격화, 언문일치제의 수립, 구성의 치밀성, 관념성 극복 등에 있어 신소설보다 한 걸음 나아간 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무정〉은 일면적이고 허구적인 근대주의와 비현실적 낙관주의로 인해 당대 현실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신소설의 사실주의적 성취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의 사실주의 문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특히 염상섭의 〈만세전〉은 평범한 일본 유학생이 귀국 후 다양한 사건을 겪으면서 민족의 현실을 자각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식민지조선의 여러 모습을 냉철하고 꼼꼼하게 그려냈다. 또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등도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비판적으로 폭로하여 사실주의 문학의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의 문학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또는 추상적 휴머니즘에 머물러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데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적 생산관계와 계급대립의 측면에서 현실을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1923년을 전후하여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 신경향파'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최서해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당시 민중의 극한적 궁핍과 지주와 소작인의 계급대립을 다루었다. 한설야의 〈황혼〉, 채만식의 〈태평천하〉, 이태준의 〈농군〉 등도 이 시기의 중요한 사실주의 문학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연극

연극에 있어서 사실주의는 희곡작품과 공연에서 실제 생활을 좀더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19세기 후반기의 일반적인 동향이었다. 많은 사실주의 극작가들 중에서도 특히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헨리크 입센과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와 막심 고리키 등은 잘 짜인 연극의 복잡하고 인위적인 줄거리 구성을 거부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동시대 사회의 갈등과 주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시적 언어와 과장된 말투 대신 일상적인 행동과 말처럼 보이는 연기와 대사를 사용했다. 사실주의는 과거의 연기에서 볼 수 있는 웅변조의 대사 전달과 지나친 기교를 피했고, 이런 표현양식 대신 자연스러운 동작·몸짓·대사를 채택했으며 일상적인 환경을 정확히 재현하는 무대 배경을 이용했다.

한국에 처음 사실주의 연극을 선보인 것은 1920년대인데, 이때 다양한 사조들이 짧은 기간에 한꺼번에 밀려들어왔기 때문에 사실주의는 낭만주의·표현주의 등과 한데 뒤섞여 특정한 표현양식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까지 연극계의 주도권을 잡았던 프롤레타리아 연극은 사실주의를 표현양식 중심이 아니라 세계관 중심으로 해석해낸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1930년대 연극계의 다른 한 줄기인 극예술연구회도 사실주의를 목표로 내세웠는데, 이 계열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유치진의 경우를 보면 사실주의를 순수한 표현양식의 문제로 다루면서 세계관의 측면에서는 허무주의, 낭만주의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영화

20세기의 연극이나 문학과 마찬가지로 영화 예술의 주제와 구성은 19세기의 사실주의 전통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러나 영화가 현실과 허구의 중간쯤 되는 사실주의를 채택한 것은 영화의 본질로 미루어볼 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신사실주의라고 부르고 프랑스에서는 '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라고도 부르는 영화들은 배우가 아닌 사람들을 주역으로 기용하고 실제 기록영화의 일부 장면을 줄거리에 삽입함으로써 기록영화 같은 객관성을 얻으려고 애썼다 (→ 색인 : 네오리얼리즘 영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Open City〉·〈파이산 Paisan〉과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 The Bicycle Thief〉 등의 영화들이 이런 장르의 대표적인 보기이다.

한국 영화사에서 대체로 사실주의는 대중문화의 주된 흐름인 신파(新派), 즉 한국적 멜로드라마와 결부되어 드러났다. 이 계열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는 나운규의 〈아리랑〉,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 김소동의 〈돈〉, 강대진의 〈마부〉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이러한 특성 때문에 '신파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6·25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피폐한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영화가 다수 등장하는데, 유현목의 〈오발탄〉으로 대표되는 이 작품군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에 비견될 만한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금자탑이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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