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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생전(楮生傳)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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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생전(楮生傳)

생의 성은 저인데, 저란 닥나무로 종이의 원료이다. 그의 이름은 백이며, 희다는 뜻이다. 자는 무점으로 무점은 아무런 티가 없이 깨끗하다는 말이다. 그는 회계 사람으로 한나라 채륜의 후손이다.

생은 태어날 때 난초탕에서 목욕을 하고, 흰 구슬을 희롱하고 흰 띠로 꾸렸기 때문에 그 모양이 깨끗하고 희었다. 그의 아우는 모두 19명이나 된다. 이들은 저생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이들은 서로 화목하고 사이가 좋아서 잠시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이들은 원래 성질이 정결하고, 무인을 좋아하지 않아, 언제나 문사들만 사귀어 놀았다. 그 중에서도 중산 모학사가 가까운 친구인데, 모학사란 곧 붓을 가리킨다. 저생과 모학사는 마냥 친하게 놀아서 혹시 모학사가 저생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더럽혀도 씻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저생은 학문으로 말하면 천지, 음양의 이치를 널리 통하고, 성현과 명수에 대한 학문의 근원에까지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제자백가의 글과 이단 불교에 이르기까지도 모조리 써서 보고 연구하였다.

한나라에서 선비를 뽑는데 책을 지어 재주를 시험했다. 이때 저생은 방정과에 응시하여 임금께 말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의 글은 대개 댓조각을 엮어서 쓰기도 하고, 흰비단에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은 비록 두텁지는 못하오나 진심으로 댓조각이나 비단을 대신하려 하옵니다. 저를 써보시다가 만일 효력이 없으시거든 신의 몸에 먹칠을 하시옵소서."

이 말을 듣고 화제(和帝)는 사람을 시켜서 시험해 보라 했다. 시험해 보니 그의 말대로 과연 편리하여 전혀 댓조각이나 비단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에 저생을 포상하여 저국공(楮國公) 백주 자사(白州刺史, 종이이기 때문에 닥나무 저(楮) 자를 써서 저국공이라 한 것이고, 희기 때문에 백주라고 한 것임)의 벼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만자군을 통솔케 하고 봉읍으로 그의 씨(氏)를 삼았다.

이것을 보고 나무껍질, 삼(麻), 고기 그물, 칡뿌리 네 사람이 자기들도 써 주기를 청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말처럼 완전하지 못하여 파면되고 말았다.

저생은 마침내 노래 사는 술법을 배워, 비나 바람이 그 몸에 침입하지 못하고 좀이 먹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항상 7일이면 양기(陽氣)를 빨아들이고 먼지를 털며, 입을 옷을 볕에 쬐면서 조용히 거처하고 있었다.

그 뒤에 진(晉)나라 좌태충(左太沖, 중국 진나라 때의 시인으로, 그가 10년을 구상하여 완성한 '삼도부'는 그 당시의 부호들이 다투어 베끼느라 뤄양의 종이 값이 올랐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음.)이 '성도부(城都賦)'를 지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저생이 그 글을 한 번 보더니 이내 외워 버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외우는 대로 다투어 베껴 썼으나, 그것은 풍류를 아는 선비나 알 수 있는 글이었다.

뒤에 와서는 왕우군(王右軍, 왕희지)의 필적을 본받아서 해자(楷字, 해서체)로 쓴 글씨가 천하에서 제일 묘했다. 그는 다시 양나라 태자 통(統)을 섬겨 함께 <고문선>을 편찬하여 세상에 전했다. 또 임금의 명령을 받고 위수(남북조 때 학자로, 황제의 명으로 역사 책인 <위서>를 편찬함)와 함께 국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수가 칭찬하고 깎아 내리는 것을 공정하게 하지 못한 까닭에 후세 사람들은 이 역사서를 예사(穢史, 더러운 역사)라고 했다. 이에 저생은 자진하여 사직하고 소작(蘇綽)과 함께 장부나 기록하겠다고 청했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자 지출은 붉은 글씨로 쓰고, 수입은 먹으로 써서 분명하게 장부를 꾸몄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그의 재능을 칭찬했다.

그런 뒤로 진(陳) 나라 후주(진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놀이와 향락에 빠져 나라일을 태만이 하다가 수나라에게 멸망당함)의 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후주는 그의 행신(幸臣,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인 학사의 무리들과 함께 항상 임춘각에서 시를 지었다. 이 때 수나라 군사가 경구(京口)를 지나자, 진나라 장수가 이를 비밀리에 임금에게 급히 알리었다. 그러나 저생은 이것을 숨기고 봉한 것을 열어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나라는 수나라에 패하고 말았다.

대업(大業, 수나라 양제의 연호) 연간의 일이다. 저생은 왕주, 설도형(수나라 때의 문인들)과 함게 양제를 섬겨, 그들과 같이 정초(庭草), 연니(燕泥)의 글귀를 읊었다. 그러나 양제는 딴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싫어해서 저생을 돌보지 않았다. 저생은 마침내 소박을 당해 대궐을 나오고 말았다.

당나라 때였다. 홍문관이란 기구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에 저생은 저수량, 구양순 등과 함께 옛날 역사를 강론하고 모든 나라일을 상고하여 처리하였다. 이리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정관의 좋은 정치'를 이룩했다. 또, 송나라가 일어나자 정주학의 모든 선비들과 함께 문명의 좋은 경치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사마온공은 '자치통감'을 편찬할 때 저생이 박식하고 아담해서 해서 늘 옆에 둑물어서 썼다. 그때 마침 왕안석은 권세를 부려 '춘추'의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왕안석은 '춘추'를 가리켜 다 찢어진 소식지라고 평하였다. 저생은 이를 옳지 못한 평론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배척당하고 쓰이지 못하였다.

원나라 초년이 되었다. 저생은 본업에 힘쓰지 않고, 오직 장사만을 좋아하였다. 몸에 돈꾸러미를 두르고 찻집이나 술집을 드나들면서 한 푼 한 리의 이익만을 도모하였다. 세상사람들은 간혹 이를 비루하게 여겼다.

원나라가 망하자 저생은 다시 명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비로소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대대로 역사를 맡아 쓰는 사씨가 되기도 하고, 시가의 일가를 이루기도 하였다. 발탁되어 관직에 있는 자는 돈과 곡식의 수효를 알게 되었고, 군사에 관한 사무에 종사하는 자는 군대의 공로를 기록하였다. 그들이 맡은 직업에는 비록 귀천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 직무에 태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았다. 대부가 된 뒤부터 그들은 거의 다 흰띠를 두르기 시작하였다.

태사공은 말한다.

무왕이 은을 이기고, 아우 속도를 채땅에 봉하여 주의 아들 무경을 도와서 은나라의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무왕이 죽자 성왕이 주나라를 다스리레 됐는데 나이가 어려서 주공이 이를 도왔다. 이때 채숙이 나라 안에 근거 없는 풍설을 떠뜨리자 주공은 그를 귀양보냈다. 그 아들 호는 과거의 행동을 고쳐서 덕을 닦았다. 이에 주공은 그를 천거하여 높은 벼슬에 썼다. 성왕은 다시 호를 신채로 봉했으니 그가 곧 채중이었다. (중략)

아아! 왕자의 후손들은 그 조상이 대대로 쌓은 두터운 덕으로 해서 국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융성해지고 쇠약해지는 것은 모두 운명과 교화의 탓이었다. 채는 본래 주와 같은 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는 양쪽 강국 사이에 끼여 있어서 공연한 공격을 받아 왔다. 그러면서도 같이 그 자손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가 한의 말년에 이르러 드디어 봉읍을 받고 그 성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니 나라가 변해서 사사로운 집이 켜져서 그 자손이 천하에 가득해지는 것을 채씨의 후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점 정리

연대 : 고려말(14세기)

작자 : 이첨

갈래 : 가전

성격 : 경세적, 교훈적

주제 : 문신으로서의 바른 삶(근시(近侍)와 정객(政客)들의 직간(直諫)을 주제로 하여 위정자들에게 올바른 정치를 권유하는 교훈이 담김)

내용 연구

구성

내용은 서두·선계·사적·후계·평결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서두 - 저생의 성은 저(닥나무), 이름은 백(흼), 사는 곳은 종이의 생산지인 회계라는 것을 밝혔음

선계 - 종이를 처음으로 만든 채륜의 후예라는 것을 서술

사적 - 본래 그는 천성이 정결하여 무인보다 문인을 좋아하고 모학사(붓)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학문을 하여 천지음양의 이치와 성명의 근원에 통달하였고, 제자백가의 글까지 모두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이의 내력을 통시적으로 언급하여, 종이의 발명시기인 한 대부터 진·수·당과 작자 당시인 원·명에 이르기까지 종이의 용도와 내력을 기술하였다.

후계 - 종이의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었다.

평결 - 종말을 설명하고, 후손들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칭찬하였다.

생(生) : 성 뒤에 붙여 젊은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채륜 : 중국 후한 중기의 환관으로 후난[湖南] 출생. 종이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는 사람인데, 궁중의 집기 등을 제조 ·관리하는 상방령(尙方令)으로서, 97년에 검(劍) 등을 만들었고, 그 후 목간(木簡)·죽간(竹簡)·견포(絹布) 대신 쓸 수 있는 서재(書材)를 발명했다. 이것은 톱밥 ·헝겊 ·풀 등을 소재로 한 ‘채후지(蔡侯紙)’라는 종이이다. 그는 114년 용정후(龍亭侯)로 책봉되어 장락(長樂:福建省) 태복(太僕:卿)이 되었으나, 안제(安帝) 즉위 후에 정쟁에 말려들어 음독 자살하였다.

그의 아우는 모두 19명이나 된다 : 종이는 한 권이 20장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말.

중산 : 중국에 있는 지방의 하나로 예부터 품질 좋은 붓이 많이 나온다함.

명수 : 운명 또는 수명.

제자백가 : 춘추 전국 시대의 여러 학파. 공자(孔子), 관자(管子), 노자(老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윤문자(尹文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귀곡자(鬼谷子) 등의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음양가(陰陽家) 등을 통틀어 이른다

책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科擧) 과목.

방정과 : 한나라 과거제의 하나

저국공 백주 자사 : 종이이기 때문에 닥나무 저자를 써서 저국공이라 한 것이고, 희기 때문에 백주라고 한 것임.

홍문관 : 고려 시대에, 학사(學士)들이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성종 14년(995)에 숭문관을 고친 것이다.

저수량 : 중국 당나라 때의 서예가

구양순 : 중국 당(唐)나라 초의 서예가로 자 신본(信本). 담주임상(潭州臨湘:후난성) 출생. 진(陳)나라의 광주자사(廣州刺史)였던 아버지 흘(紇)이 반역자로 처형된 데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는데 이왕(二王), 즉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황보탄비(皇甫誕碑)》《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화도사비(化度寺碑)》 등의 비와 《사사첩(史事帖)》《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北魏派)의 골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였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능서가(能書家)로서 유명하다.

상고 : 서로 견주어 토론하는 것

정관의 좋은 정치 : 정관의 치로 중국 당(唐)나라 제2대 왕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치세(治世:626∼649)를 말하며 이때의 연호가 정관(貞觀)이다. 수(隋)나라 말기 전국적인 동란과 백성의 피폐 가운데 굳건히 일어서서, 당나라의 국초(國礎)를 확립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율령체제(律令體制)의 정비에 따라 학교 ·과거(科擧)도 발달하였다. 안으로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위징(魏徵) 등의 명신들이 문치(文治)를 도왔으며, 밖으로는 돌궐(突厥)을 제압하고, 토번(吐審)을 회유하여 국위를 널리 떨쳤다.

정주학 : 심화 자료 참고

사마온공 : 사마광. 북송 때의 관료 정치가

자치통감 : 중국 북송 때 사마광이 지은 통사적 사서

왕안석 : 송(宋)나라의 개혁정치가. 신법당의 영수로 본적은 무주(撫州) 임천(臨川). 자 개보(介甫). 1042(경력 2)년 진사출신으로 강남지역의 지방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이재(理財)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때마침 정치의 일대 쇄신과 개혁을 갈망한 야심적 황제 신종(神宗)에 의해 발탁되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파격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는 1069년(熙寧 2)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되어 국정전반을 관장하기에 이르자 한기(韓琦)·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 인물들을 축출하고 이재에 능한 강남출신 신진관료들을 대거 발탁 기용하여 신법(新法), 즉 농업생산성의 향상을 목적으로 종래 가뭄과 홍수 등으로 황폐해진 전토의 복구와 어전법(隙田法) 등에 의한 새로운 경작지의 조성 및 하천의 개수(開修) 등을 통한 조운(漕運)의 진흥 등을 골자로 한 농전수리(農田水利)정책, 농민에 대한 저리의 금융정책인 청묘법(靑苗法), 도시의 중소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저리의 금융정책인 시역법(市易法), 차역(差役) 부담 대신 재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면역전(免役錢)을 징수하게 한 모역법(募役法), 모병제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唐)의 부병제(府兵制)하의 국민개병제 원칙을 모범으로 한 보갑법(保甲法)과 보마법(保馬法)을 실시하였다. 왕안석의 신법은 국가재정의 확보와 국가행정의 효율성 증대 등에서 일정한 실적을 거두었으나 원래의 취지 중의 하나인 중소농민과 중소상인의 구제라는 면에서는 결과적으로 세역의 증대, 화폐경제의 강요 등으로 인해 후진지대에서는 오히려 영세농민층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문제점도 있었으며, 또한 이는 반대파인 구법당이 재집권하게 되는 주된 명분이 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몸에 돈 꾸러미를 두르고 : 남송 말년에 종이로 돈을 만들어 쓰는 법이 생겼기 때문에 한 말.

사씨 :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대부 : 벼슬 품계에 붙이던 칭호

태사공 : 사마천. 중국 전한의 역사가 여기서는 작가를 대변하는 인물임.

무왕 : 주나 제 1대왕

주 : 은나라의 마지막 왕. 중국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중국의 폭군으로 일컬어짐.

주공 : 주나라의 정치가로 무왕의 동생.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무왕이 죽은 뒤 성왕을 왕위에 앉히고 섭정 7년 동안 주나라 왕실의 기초를 튼튼히 닦고 어진 정치를 했음.

교화 : 백성을 가르쳐 감화시킴

이해와 감상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의 문신인 이첨이 종이를 의인화해서 지은 가전체 작품, '동문선' 제 101권에 실려 있고, 이 작품에 의인화되어 있는 저생의 생애는 작자 이첨의 실제 생활과 유사하고, 이렇게 지은 작자가 교묘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저생의 일생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내용은 서두·선계·사적·후계·평결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당시의 부패한 선비의 도에 대하여 경종을 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작품의 끝부분 "왕자의 후손들은 그 조상이 대대로 ~ 융성해지고 쇠약해지는 것은 모두 운명과 교화의 탓이었다."에서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심화 자료

이첨(李詹 1345~140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홍주(洪州). 자 중숙(中叔). 호 쌍매당(雙梅堂). 시호 문안(文安). 1365년(공민왕 14) 감시(監試)에 합격, 68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이 되고, 69년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75년(우왕 1) 우헌납(右獻納)에 올라 이인임(李仁任) 등을 탄핵하여 10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88년 풀려나 내부부령(內部副令)·응교(應敎) 등을 거쳐 우상시(右常侍)가 되고 이어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감시를 맡아보다가 김진양(金震陽) 사건에 관련되어 결성(結城)에 귀양갔다. 조선 건국 후 98년(태조 7) 이조전서(吏曹典書)에 기용되어 1400년(정종 2)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태종 2)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라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撰修)했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에 《저생전(楮生傳)》 《쌍매당집(雙梅堂集)》 등이 있다.

성리학

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

Ⅰ. 개관

중국 송(宋)·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이(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이(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Ⅱ. 태극설

태극이라는 말은 성리학 이전에도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데, 그것에 의하면 태극을 만물의 근원, 우주의 본체로 보고 “태극은 양의(兩儀:음양)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고 팔괘에서 만물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우주관을 계승하고 여기에 오행설(五行說)을 가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수립한 것이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태극도설》은 만물 생성의 과정을 ‘태극―음양―오행―만물’로 보고 또 태극의 본체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그 본체는 무성무취(無聲無臭)한 것이므로 이를 무극이라 하는 동시에 우주 만물이 이에 조화(造化)하는 근원이므로 태극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자는 이것을 해석하여 태극 외에 무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만일 무극을 빼놓고 태극만을 논한다면 태극이 마치 한 물체처럼 되어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고, 반대로 태극을 빼놓고 무극만을 논한다면 무극이 공허(空虛)가 되어 역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같이 무극과 태극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유(有)가 즉 무(無)이며, 절대적 무는 절대적 유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소옹은 태극이 곧 도(道)라 하였다. 만물의 근원적 이치가 도 또는 도리(道理)라 한다면 태극은 곧 태초부터 영원까지, 극소에서 극대까지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치라 하였으니, 다시 말하면 공간적으로 대 ·소가 있을 수 없고, 시간적으로 장(長)·단(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자는 천지도 하나의 태극이요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태극이라 하였고, 이 태극에서 음양으로의 이행(移行)은 태극의 동정(動靜)에 의하는 것이며 동정은 곧 음양의 두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 만물의 근원적인 생성(生成)이 전개된다고 하였다.

Ⅲ. 이기설

성리학의 이기설은 우주 ·인간의 성립 ·구성을 이(理)와 기(氣)의 두 원칙에서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 이 ·기라는 말은 성리학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있었으니, 《역경(易經)》에서는 천지만물을 음양 2기의 활동에서 성립된 것이라 하여 이 ·기의 개념을 말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주돈이는 그의 《태극도설》에서 모든 근원인 태극이 2기를 낳고, 2기에서 수 ·화 ·목 ·금 ·토의 5행을 낳고, 5행에서 남 ·녀가 생겨 거기에서 만물이 화생(化生)하였다고 논하였다.

장재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 하였고 그 작용으로서 음양의 2기가 있어 여기에서 천지만물이 만들어졌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폈으며, 정호도 기의 통일체로서의 건원(乾元)을 내세웠으나 그의 아우 정이는 기의 세계에서 출발하면서도 기와는 별도로 이의 세계를 생각하여 이와 기를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단서를 열었다.

《역경》에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정이는 이 도를 ‘음양의 원인이 되는 것이 도’라고 보았다. 즉, 형이상(形而上)의 도를 형이하의 기에서 구별하여 도를 기의 현상(現象) 속에 존재하는 원리로 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세운 것이다. 이 도가 곧 이이다. 그러나 이와 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어, 그 어느 것이 빠져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기 양자는 동시존재이며 다만 그 질(質)을 달리할 뿐, 경중(輕重)의 차는 없는 것이나, 기는 항상 변화하는 데 대하여 이는 법칙성을 지니고 부동(不動)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연히 경중이 부여된다. 특히 그것이 윤리(倫理)에 관련될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천(天)은 이(理)이다’ ‘마음은 이이다’라고 하는 이면(裏面)에는 이가 법칙적 성격이 부여된 데 대하여 기는 항상 물적(物的)인 것, 그리고 자칫하면 이의 발현(發現)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내재하게 된다. 이것을 일방적으로 말하자면 종래의 성선설(性善說)에 명확한 설명을 붙이는 결과가 되었으니, 즉 ‘성은 이이다(性卽理)’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정이의 이기철학은 주자에게로 계승되어 이 ·기의 성격은 더욱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주자는 이에 ‘소이연(所以然: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과 ‘소당연(所當然:법칙론적 의미를 가진다)’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은 기의 내부에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가 형질(形質)을 지니고 운동하는 것에 대하여, 이(理)는 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고, 그 실재는 기를 통하여 관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기가 형질을 갖고자 할 때, 또는 운동을 일으키려 할 때, 이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의 이러한 작용은 전혀 불가능하며, 기의 존재 자체도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자는 이것을 윤리에 적용시켰을 때, 이 ·기에 경중을 두면서도 기를 악(惡)으로만 단정하지 않고, 기의 청탁(淸濁)에 의한 결과에서 선악을 인정하려 하였다. 인간의 신체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은 기에서 성립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善)한 성(性)은 이(理)가 마음에 내재화(內在化)된 것으로 보았다. 이 이기설은 그 후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윤리적 입장에서 기에 중점을 두느냐, 이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일 뿐, 우주관 자체는 부동의 것이 되었다.

Ⅳ. 심성론

성리학의 이기설이 우주를 논한 것이라면 심성론은 인생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인간은 우주 내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기설과 심성론은 상호 관련성을 갖게 된다. 중국 유학에서는 맹자 이후 인간의 성(性)이 선(善)이냐 악(惡)이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분규를 거듭하였고 오랫동안 중국 철학의 큰 문제로 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순자(荀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으나 송대에 이르러 순자의 성악설은 배척되고 성선설은 당시 새로 대두된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다시 의리(義理)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나누어져, 전자는 본래 완전한 선이라 하고 후자는 기질의 양부(良否)에 따라 선악으로 갈린다는 성리학설이 정립되었다.

즉, 정이는 이(理)가 인간에 들어와 성(性)이 되고 기는 인간에 들어와 재(才)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만물의 본체이므로 순선(純善)하고, 따라서 사람의 성은 모두 선하여 악한 것이 없으며, 기에서는 청탁과 정편(正偏)이 있다 하였고, 그 때문에 사람의 재에는 지혜(智慧)와 우둔(愚鈍)이 있고, 현명(賢明)과 불초(不肖)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정호는 《주역》을 인용하여 형상(形狀)이 없는 것을 도리(道理)라 하고, 형상이 있는 것은 기(器)라 하여 하늘의 도리는 음 ·양이요, 땅의 도리는 유(柔)·강(剛)이요, 인간의 도리는 인(仁)·의(義)라 하여, 비록 천 ·지 ·인의 삼재(三才)가 음양 ·강유 ·인의로 다른 것 같으나 도리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귀일된다고 하였다.

주자는 인간의 심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본연지성은 이(理)요, 선(善)이라 하였고, 기질지성은 타고난 기질에 따라 청탁과 정편이 있어 반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악하게도 된다 하였다. 정(情)은 반드시 악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는 선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즉 기질을 맑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이 선하게 되지만 이것을 탁하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이 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에 따라 청탁 ·지우(智愚) 등 여러 차별이 있으나, 이 정은 불변이 아니므로 인간의 노력과 수양에 따라 우(愚)가 지(智)로도 변하고 탁함을 청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니 여기에 인간의 윤리성 및 도덕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성리학자들은 성(誠)·경(敬)을 공통의 진리로 파악하였다.

Ⅴ. 성경론

인간이 자연의 진리와 진정한 자아를 추궁하여 근원적 도리에 도달하는 요체로서 주돈이는 이것을 정(靜)에 두었고, 정호는 성(誠)에 두었으며 정이와 주자는 경(敬)에 두었다. 정이는 “수양에는 경이 필요하며 학문의 발전에는 치지(致知)가 중요하다”고 하였으니, 이들 성리학자들의 정(靜)·성(誠)·경은 필연코 인(仁)과 의(義)로 귀일되는 것이다. 즉, 인 ·의의 인식 파악은 성 ·경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함을 말하였다.

성리학은 주자 생존시에는 이것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박해를 받았으나 송나라 멸망 후 원대(元代)에 이르러 관학(官學)으로 채택되고 과거(科擧)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고증학(考證學:實學)이 대두되면서 귀족의 학문이니 실속 없는 공론(空論)이니 하여 배척되었으나 교과 과목으로서의 성리학은 여전히 그 지위가 높았다.

Ⅵ. 한국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정도전(鄭道傳) 등을 들 수 있다.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는 데 그쳤고, 또 신왕조에 협력하지도 않았으나 정도전 ·하륜(河崙)·권근(權近) 등의 성리학자는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교리(敎理) 자체를 논리적으로 변척(辨斥)하는 동시에 이태조를 도와 법전(法典)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통하여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는 조선조가 성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면서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어서였다.

즉, 이때 한국 유학의 쌍벽인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이 태어났으며, 서화담(徐花潭)·이항(李恒)·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 그리고 성혼(成渾) 등도 모두 같은 시대의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한편, 내면적 도덕원리인 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 등에 의하여 유교의 행동규범인 예설(禮說)로 발전하였다. 이퇴계와 이율곡에 앞선 서화담은 그 이론이 송나라 장재와 같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 할 수 있으니, 곧 “태허(太虛)는 맑고 무형(無形)이나 이름하여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가 바깥이 없으며, 거슬러 올라가도 시작이 없다”고 하며 기(氣)의 본체를 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화담은 이러한 기 가운데 “갑자기 뛰고 흘연히 열림이 있으니 이것은 누가 시키는 것인가? 저절로 그렇게 되며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이치(理致)가 시간으로 나타남인 것이다”라고 기의 작용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화담은 기라는 것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기만 있을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퇴계는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본 학자였다. 그는 정통 정주학의 계통을 따라서 항상 이우위설(理優位說)의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하였으며, 이의 구극성(究極性)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무릇 옛날이나 오늘날의 학문과 도술(道術)이 다른 까닭은 오직 이 이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허(虛)하지만 지극히 실(實)하고 지극히 없는 것(無) 같지만 지극하게 있는 것(有)이다. …능히 음양 ·오행 ·만물 ·만사(萬事)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기와 섞어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유(萬有)를 명령하는 자리요, 어느 것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퇴계는 이와 기를 엄격히 구별하여 그 혼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태극 또는 이로 표현되는 것을 다름 아닌 인간의 선한 본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리란 곧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확충하고 발휘함으로써 인간이 인간된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체적 ·물질적 조건에서 유래하는 것과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는 당시에 사화(士禍)가 연달아 일어나서 올바른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부조리한 사회현실에서 진실로 선악과 정사(正邪)를 밝히고 올바른 진리를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이 나아갈 바 표준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퇴계의 이같은 성리학설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퇴계보다 35년 후에 태어난 이율곡도 퇴계와 마찬가지로 정통 성리학파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위시한 제자(諸子)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 여러 학파의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은 유학의 본령(本領)을 들어 그 기본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문제에까지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는 논하기를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공자가 가르친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든지 인의(仁義)와 같은 일상적으로 인간이 행할 도리를 떠나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규범(規範:所當然)만을 알고 근본원리[所以然]를 알지 못하면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선행(善行)에 합치한다 하더라도 도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자애(慈愛)와 효도와 충성과 우애라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율곡 성리학의 요령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경험성)에 근거하여 그 까닭을 추구함(논리성)에 있어 논리적인 모순이나 비약을 배제하고 그 본원성(本源性)을 체계적으로 나타내는 철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율곡은 진정한 학문이란 내적(內的)으로 반드시 인륜(人倫)에 바탕을 둔 덕성(德性)의 함양과 외적으로 물리(物理)에 밝은 경제의 부강(富强)을 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피폐한 현실을 역사적 갱장기(更張期)로 파악하고 국방력의 강화, 경제적 부강, 사회정의의 확립 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러한 실리를 주장하다 보면 의리(義理)에 어긋나고 의리를 추궁하다 보면 실리를 망각하기 쉬우므로 이러한 모순을 원만히 타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권능(權能)과 의리가 상황에 따라서 창의적으로 그 마땅함[宜]과 알맞음[中]을 얻는다면 의(義)와 이(利)는 그 가운데 융화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퇴계 ·율곡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허한 관념을 벗어나 역사적 ·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으며, 후세에 실학사상(實學思想)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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