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눈 - 박용래
by 송화은율저녁 눈 - 박용래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겨울에 여행을 떠난 화자는 저녁 때가 되어 허름한 주막에 찾아 든다. 저녁을 먹고 우연히 바깥을 바라보는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한가하던 주막은 갑자기 활기를 띠고 바빠진다. 주막임을 표시하는 희미한 호롱불과 마굿간에 매어 있는 조랑말의 수선스런 움직임, 온종일 짐을 지거나 주인들을 등에 태워 고단하고 시장할 조랑말을 위해 부산하게 여물을 준비하는 주인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화자는 바쁨 속의 한가함 혹은 한가함 속의 바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인적이 끊긴 허허벌판에서 휘몰아치는 눈발을 묘사한 마지막 연은 날이 새면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할 나그네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심상
▶ 어조 : 겨울 눈발을 응시하는 나그네의 관조적이면서 현실 비판적인 어조
▶ 표현 : ①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붐비다’를 반복함으로써 시상을 단순화함.
② 고유어만을 사용하여 향토성을 살림.
▶ 시상 전개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주막 풍경을 자세히 묘사하다가 변두리 빈터로 시선이 옮겨지는 원근법적 전개 방식.
▶ 구성 : ①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주막집(1행)
②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마굿간(2행)
③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여물 써는 풍경(3행)
④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변두리 빈터(4행)
▶ 제재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주막 풍경
▶ 주제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나그네의 애상적 정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적 감상)
<연구 문제>
1. 이 시의 통사 구조상의 특징을 말하라.
<모범답> 동일한 어구의 반복
2. 이 시에서 (1)반어적 의미로 쓰인 시어를 지적하고, (2)그 근거를 설명하라.
<모범답> (1) 붐비다
(2) 겉으로 드러난 표현과는 달리 시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한적하고 여유롭게 느껴진다.
3. 이 시와 다음 <보기>시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간략히 서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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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치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섭섭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박용래, 「그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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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답> * 공통점 : ① 통사 구조의 반복
② 고유어 사용
③ 사라져가는 옛 풍물에 대한 애상적 정서
* 차이점 : ① 사물에 대한 감상적 정서의 직서적 표현
② 계절적 배경의 차이
③ 가난한 삶의 서러움과 비천함을 직접 제시
< 감상의 길잡이 1 >
박용래의 시는 점차 사라져가는 한국 농촌과 자연의 풍물에 강한 연민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감정이 전통적 · 애상적 정서에 힘입어 독특한 토속 미학을 형성한다.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겨울의 늦은 저녁이고, 공간적 배경은 주막의 마굿간과 변두리 빈터이다. 도시화에 밀려난 변두리의 빈터는 매우 을씨년스런 풍경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따뜻하다. 시인의 관념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의 풍물이 일상적 토속어를 통해 시로 형상화되면서 명징(明澄)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은 전적으로 시인의 탁월한 능력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해가 저무는 겨울, 그리고 하루의 바쁜 일상을 마감하는 저녁, 온 세상을 흰색으로 뒤덮으며 내리는 눈발은 나그네(화자)의 외로움, 회한, 애상을 자아내는 매개물이다. 그런데 화자는 붐비는 눈발 속에서 지나온 한평생을 돌아보고 감상에 젖기보다 무덤덤히 눈발을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화자의 눈에 비친 주막의 풍경은 바쁜 듯하지만 전혀 바쁘지 않다. 오히려 늦은 저녁의 함박눈을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더욱 강하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붐비다’란 말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에도 전혀 바쁘다는 느낌이 없이 평화롭고 적막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이런 한가함 혹은 여유는 전적으로 화자의 관조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 감상의 길잡이 2 >
박용래는 ‘소묘법(素描法)’이라는 표현 방법과 반복, 병렬에 의한 민요적 구조를 통해 그의 독창적 시 세계를 개척한 전형적 향토 시인이다. 그의 시가 대부분 정지적(靜止的) 언어로써 정상적인 구문보다는 명사나 명사형 어미로 시행을 마감시킨다거나 행간(行間)의 여백을 중시하는 것도 모두 소묘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그러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시인의 정서를 펼쳐 보이고 있다.
‘말집 호롱불’, ‘조랑말 발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 등 네 장면의 제시 이외에는 동일한 구문의 4회 반복에 불과한 이 시는, ‘저녁눈’을 통해 가려져 있는 것, 소외되어 있는 것, 그리고 잊고 있던 자신을 뒤돌아 보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먼저 시인은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리듬의 효과와 함께 유전(流轉)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저녁눈’은 물질적 현상으로 언젠가는 없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이다. 그와 함께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사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 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이제 그것들 위로 ‘붐비듯이’ 늦은 저녁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애상적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사물들과 결합되어 더욱 을씨년스러운 겨울 저녁 풍경을 한 장의 사진처럼 묘사하고 있을 뿐,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4행시 형식의 커다란 행간 속에 그 감정이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문명의 거센 물결에 밀려 머지않아 사라져 버릴 토속적 세계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눈발’로 환치되어 ‘붐비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의도적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붐비다’로 표현함으로써 적막한 분위기와 ‘소멸’의 이미지를 역동성의 눈발로 상쇄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은 그로 하여금 화려한 문명의 도시보다는 밀려나 있는 변두리, 즉 향토의 사물 위에 머물게 한다. 시간적 배경으로 제시된 ‘늦은 저녁’이라는 하강적 이미지와 ‘눈발’이라는 소멸의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 낸 <저녁눈>은 공간적 배경이 되는, 같은 이미지의 네 가지 사물들과 결합됨으로써 이 작품을 ‘텅 빈 아름다움’의 시로 만들어 주고 있다.
< 감상의 길잡이 3 >
이 시를 이루는 기본 원리는 축약과 반복이다. 이미지즘 수법의 시들을 통해 생략과 여백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해 왔던 박용래는 단순하지만 정감있는 시어를 압축적으로 담아내어 축약과 의미의 울림을 효과적으로 결합해 내었다.
그러나 이런 시편들은 회화적 구도로 인해 선명한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깊은 시적 울림을 주지는 못했다. 등단 10년 후 쓰여진 「저녁 눈」에 이르러 박용래는 득의(得意)의 시를 쓰게 되고, 문단의 주목도 받게 된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시의 구문은 단순하다. 유사한 문장과 풍경들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반복이 주는 울림은 난삽한 진술보다 효과적이다.
말집, 호롱불, 조랑말 발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 등 네 장면의 제시 이외에는 같은 구문의 반복에 불과한 이 시가 살아 있는 감각을 되살려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가려진 것, 소외된 것을 찾아오는 눈발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보편적인 삶을 일깨워준다. 붐비는 것을 통해 비워져 있는 것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화자의 진술은 가득찬 것들보다는 비워진 것에, 또한 드러난 것들보다는 가리워진 것들의 의미를 교묘하게 부각시킨다. 특히 제 3연의 `여물 써는 소리'는 눈길을 달려온 조랑말에게 줄 먹이를 썬다는 뜻에서 음향적 효과를 상기시키며 독자에게 전하는 시적 내포가 뛰어나다.
어찌 조랑말뿐이겠는가. 가난한 서민들의 삶이란 언제나 고단한 것일 터인데,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늦도록 일해야 하는 이들의 삶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다 늦은 저녁에 찾아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을 침침한 어둠으로 감싸주며, 이 침침한 어둠에 스며 있는 따스한 삶의 숨결이야말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적 체취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의 `변두리 빈터만 다니다 붐비는' 눈발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음미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다음 변두리 빈터에 붐비는 눈발이란 무엇일까. 다 늦은 저녁때 귀가한 사람은 물론 여물을 먹는 조랑말도 머지않아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이 빈터를 울리는 것이 고단한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가장자리일 것이며, 그 속에 사람들의 삶을 푸근하게 껴안는 시의 시선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명징한 형태로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침침한 호롱불을 중심으로 퍼져 가는 삶의 그물망일 것이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다 늦은 저녁때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는 조랑말의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방울 소리처럼 단순한 문장과 최소한의 말들이 빚어내는 여운을 이 시가 지닌 뛰어난 장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설: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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