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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너머 성권롱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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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너머 성권롱

 

고개 너머 사는 성 권농 집의 술이 익었다는 말을 어제 듣고,

누워 있는 소를 발로 차서 일으켜 언치만 얹어서 눌러 타고,

아이야, 네 권롱 어른 계시냐? 정 좌수 왔다고 여쭈어라.

요점 정리

지은이 : 정철(鄭澈)

갈래 : 평시조. 단시조. 정형시

율격 : 3(4)·4조. 4음보

성격 : 전원한정가(田園閑情歌). 풍류적, 전원적, 경쾌함

표현 : 서사적, 압축적, 해학적, 시상의 과감한 생략으로 인한 비약적 표현, 호방한 성격이 드러남

제재 : 술과 벗

주제 : 전원 생활의 흥취(興趣)

출처 : 송강가사

내용 연구

고개 너머 사는 성 권농 집의 술이 익었다는 말을 어제 듣고,

누워 있는 소를 발로 차서 일으켜 언치만 얹어서 눌러 타고,

아이야, 네 권롱 어른 계시냐? 정 좌수 왔다고 여쭈어라.

 

재 : 고개

成勸農(셩권롱) : 성혼(成渾)을 가리킴. '勸農(권농)'은 지방의 방(坊)이나 면(面)에 달려 있으면서 농사일을 권장하던 사람

언치 : 안장 밑에 까는 털 헝겊

지즐타고 : 눌러 타고

: 아이야

鄭座首(뎡좌슈) : 송강 자신을 가리킴. '座首(좌수)'는 향소(鄕所)의 우두머리

아이야, 네 권롱 어른 계시냐? 정 좌수 왔다고 여쭈어라. : 성권농의 집앞에 도착하여 하인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는 대목으로 종장을 모두 큰따옴표로 묶을 수 있는 대화 부분이다.

 

다음 두 작품을 감상하고, 아래의 활동을 해 보자.

(가)

 

- 정철의 시조

(나)

김홍도의 '기우선인(騎牛仙人)'

 

1. (가), (나)의 표현 매체는 각각 무엇인가?

(가)는 언어이고, (나)는 선과 색채이다.

2. (가)와 (나)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형식과 내용의 측면으로 나누어 이야기해 보고, 다음 표를 완성해 보자.

 

형식의 아름다움

내용의 아름다움

(가)

4음보의 율격

여유 있고 낙천적인 삶의 자세

(나)

부드러운 곡선, 여백

한가로운 삶의 여유

이해와 감상

 

한 편의 이야기를 보는 듯한 시조이다. 정좌수로 나타나는 시적 화자가 맛있는 술이 있다는 성권농의 집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경쾌하고 발랄하게 서술하고 있다. 긴 시간의 여정을 짧은 시조 형식에 이렇게 경쾌하게 압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철의 문학적 역량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으며, 술과 벗을 좋아하는 지은이의 풍류와 멋스러움이 토속적인 농촌의 정취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전편을 통해 생동감이 넘쳐 흐르며,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멋스럽게 구사하는 송강의 언어 능력이 유감 없이 발휘된 작품이라 하겠다.

재 너머 성권롱 집에 술이 익었다는 말을 듣고 흥겨움에 누워 있는 소를 발로 차서 성급히 달려가는 모습에서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지은이의 행동에서 해학적인 면이 보이는데, 특별히 이 시조의 특징은 시상의 과감한 생략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심화 자료

정철(鄭澈)

 

1536년(중종 31)∼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이다.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인 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명종 즉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자(滋)는 광양(光壤)으로 유배당하였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되었고, 맏형은 이 때 장류(杖流) 도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하였다.

1551년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에 선출되었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하였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 우거시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을 받고 파직되었다.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하였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 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 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 短歌雜篇〉 32수, 〈성은가 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 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 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 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 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적으로 애군(愛君)·애민(愛民)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풍류적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 전한다.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 文淸公遺詞≫가 있다.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참고문헌≫ 李朝時代의 歌謠硏究(金思燁, 大洋出版社, 1956), 松江·盧溪·孤山의 詩歌文學(朴晟義, 玄岩社, 1966), 松江鄭澈硏究(金甲起, 二友出版社, 1985), 國譯 松江集(松江遺蹟保存會, 第一文化社, 1988), 松江文學硏究(申庚林·李殷鳳·曺圭益 編著, 國學資料院, 1993), 松江歌辭의 硏究 1∼3(李秉岐, 震檀學報 4·6·7, 1936∼37), 松江의 前後美人曲의 硏究(徐首生, 慶北大學校論文集 6, 1962), 訓民時調硏究(尹星根, 한뫼金永驥先生古稀紀念論叢, 1971), 장르論的 關心과 歌辭의 文學性(金炳國, 현상과 인식, 1977 겨울호).(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혼(成渾)

 

1535(중종 30)∼1598(선조31).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현령 충달(忠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세순(世純)이고, 아버지는 현감 수침(守琛)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관 사원(士元)의 딸이다. 서울 순화방(順和坊 : 지금의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생원·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 해 겨울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상서 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뵙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1년에 어머니상을, 1564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다. 1568년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그는 〈서실의 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했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즉, 그는 일찍이 이황을 사숙했으나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는 회의를 품고 있었다. ≪중용≫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1573년 2월에 공조좌랑에, 7월에 장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 해 12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이이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모두 사임하였다.

1575년 6월에 다시 지평으로 불러 상경했으나 병으로 사체(辭遞 ; 사양하여 임명이 보류됨.)하니 선조는 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공조좌랑·사헌부지평 등을 제수했으나 사임하고 본가로 돌아가니 선조는 그의 체임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예빈시판관·장흥고주부·종묘서령·광흥창주부·사헌부장령·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계속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1년 정월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은 허가받지 못하였다. 그 해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 : 임금을 찾아 봄.)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 해 3월에는 사헌부장령에서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으로 전직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법(役法)과 공법(貢法)의 민폐를 논하고 경장(更張)을 역설하되 혁폐도감(革弊都監)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귀향이 허가된 것도 아니었다. 녹봉을 거부하면 미숙(米菽 : 식량)을 하사하면서까지 귀향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어 내섬시첨정·풍저창수(豊儲倉守)를 역임하면서 선정전(宣政殿)에 등대했으며,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뒤 전설사수(典設司守)·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다. 그는 경연석상 또는 상소로 계속 그만두고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도리어 겨울용 신탄(薪炭 : 땔감의 하나)을 명급하고 용양위상호군(龍蚊衛上護軍)에 승진되었다. 그 해 연말에 선조의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년에는 다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사옹원정(司饔院正)·사재감정(司宰監正) 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이듬해 특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이어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이러한 그의 관계 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 후 이이가 죽자 사양하면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다. 그 해 7월에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 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纂集廳堂上)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그를 공격했으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 ;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하였다. 15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 : 자신이 죽은 뒤에 성명이나 행적 등을 밝힌 글)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했는데,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억울하게 죽자 동인의 화살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정철(鄭澈)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1590년에는 양민(養民)·보방(保邦)·율탐(律貪)·진현(進賢)의 방도를 논하는 장문의 봉사소(封事疏)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1591년에 ≪율곡집 栗谷集≫을 평정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그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이천(伊川)·연천(連川)·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였다.

이 후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駐魚)하면서 불러들여 전삭녕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다.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 : 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그가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그를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그는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편의시무9조 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영유(永柔)·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했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곁에서 호위하였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 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그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또 허화완병(許和緩兵 : 군사적인 대치 상태를 풀어 강화함.)을 건의한 이정암(李廷目)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그는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乞骸疏 : 나이가 많은 관원이 사직을 원하는 소)를 올린 후, 그 길로 사직하고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 2월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 ≪우계집≫ 6권 6책과 ≪주문지결 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 爲學之方≫ 1책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 : 관작이 회복되고 제향의 허락이 내려짐.)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 : 배향에서 삭출됨.)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黛)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牛溪集, 牛溪年譜, 谿谷集, 淸陰集, 月沙集, 愼獨齋遺稿, 牛溪先生年譜附錄, 牛溪先生年譜補遺, 牛溪先生年譜後錄, 燃藜室記述, 儒敎淵源(張志淵),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東國文廟十八賢年譜(韓國名賢遺蹟硏究所, 1966),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韓國儒學史(李丙燾, 亞細亞文化社,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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