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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自畵像)- 윤동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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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自畵像)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9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핵심 정리>

감상의 초점

이 시는 나르시스가 우물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반하여 수선화가 되었다는 그리스 신화와 맥이 통한다. ,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바탕으로 하여 자아 성찰을 하기 위하여 씌어진 것이다.

이 시에는 우물 속의 사나이가 등장하고 그를 들여다보는 가 있다. 이 둘은 양분된 자아로서 부정(否定)과 긍정(肯定)을 거듭하다가 화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변증법적 구조다.

우물은 윤동주의 시에 자주 나오는 거울이나 하늘처럼 내 모습이나 생활을 성찰하는 매체이며 밀실의 심상도 포함되어 있다.

성격 : 성찰적, 고백적

경향 : 나르시시즘적()

어조 : 여성적 어조.(‘습니다의 어미 활용)

특징 : 평이한 구어체 사용, 산문적 표현

시상 전개 : 반복에 의한 전개

구성 : 우물 속의 정경 관조(1-2)

추한 자신에 대한 미움(3)

불쌍한 자신에 대한 연민(4)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움(5-6)

제재 : 우물 속의 자아

주제 : 자아 성찰과 자신에 대한 애증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화자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3단계로 쓰라.

미움 가엾음 그리움

2. 이 시에서 은 화자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는 삶의 공간을 시각적 심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 심상들이 지닌 공통점을 모두 쓰라.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

3. 우물과 화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라.

나의 과거와 현재를 비추어 주는 매개체

4. (1)공감각적 표현을 한 시구를 찾아 쓰고, (2)감각의 전이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라.

(1) 파아란 바람

(2) 촉각을 시각으로 전이시켜 표현하였다.

 

< 감상의 길잡이 1 >

6연으로 된 이 시는 산문처럼 쓴 자유시다.

1연은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서 는 논가 외딴 우물을 찾아가 가만히 들여다 본다. ‘외딴’, ‘홀로’, ‘가만히에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물은 거울의 심상과 통한다.

 

2연은 우물 속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 구름, 하늘, 바람 등 자연의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이 전개된다. 이 자연의 묘사는 나의 초라한 모습과 대조시키기 위한 것이다. ‘파아란 바람은 촉각을 시각으로 전이시켜 표현한 공감각적 심상이다.

 

3연은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사나이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암담한시대를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고와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미워져 우물을 떠나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 염오(厭惡).

 

4연은 그러나 돌아가다 생각하니 이러한 자신이 가엾어진다. 자기 연민(憐憫)이다. 그래서 다시 가서 들여다본다.

5연은 들여다보니까 그 사나이가 다시 미워진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진다. 자신에 대한 애증(愛憎)이 교차한다. 여기서 미워지는것은 무기력하게 좁은 공간에서 안이하게 살아가는 현재의 자신이 밉다는 것이고, ‘그리워진다는 것은 순수하게 살던 옛날의 자신의 모습, 또는 이상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리워진다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좋다. 다음 연에 나오는 추억이라는 말과 관련이 된다.

 

6연은 우물 속의 아름다운 배경을 묘사하고 그 곳에 사나이가 추억처럼 있다고 했다. ,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정(想定)해 본 것이다. 두 자아의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하는 장면이다. ‘추억(追憶)’은 그리움이나 동경(憧憬)의 뜻과 통한다.

 

윤동주는 유년 시절을 항상 아름답게 보고 그것을 그리워했다. 그의 다른 시 󰡔별 헤는 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 시대 상황의 고뇌를 겪으면서 현재 자신의 생활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이상적인 세계를 동경하면서 살았다. 이런 두 개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미워도 하고 그리워도 하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 이 시다.

 

 

< 감상의 길잡이 2 >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노래한 작푸믄 옛날부터 있어 왔다. 냇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서 열렬히 사랑을 했다는 나르시스(수선화)의 희랍 신화가 그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향가에도 구리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죽은 자기 짝인줄로만 알고 부리로 쪼며 그리워하다가 죽었다는 앵무가가 있었다고 전한다.

 

윤동주의 자화상역시 그와같은 경상(鏡像) 모티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나르시스 신화나 앵무가의 경우처럼 완전히 남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 자화상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으면서도 우물속에 비친 그의 모습을 가 아니라 한 사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映像을 하나의 실체로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 같다. 윤동주는 마치 그 사나이가 우물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윤동주의 자화상은 나르시스의 얼굴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바슐라르물과 몽상에서 나르시스의 신화를 낳은 그 물의 물질적 이미지를 밝은 물, 봄의 물과 흐르는 물, 나르시시즘의 객관적 조건, 사랑하는 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거울 속에 익사한 사람까지 많았다라는 세르나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람의 얼굴을 반영하는 물과 거울을 같은 이미지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자화상의 물질적 이미지는 바슐라르가 제시한 그것들과는 정반대이다. 밝은 물어두운 물, 그리고 흐르는 물이라고 한 것은 고여 있는 물로 뒤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객관적 조건은 오히려 주관적 행동으로 현시되고, 사랑의 물미움의 물로 설정된다.

 

그러한 차이는 윤동주의 자화상이 나르시스와 같은 시냇물이 아니라 (혹은 거울이 아니라) 우물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바꾸면 윤동주의 자화상읽기에서 가장 중심적인 코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우물이라는 이야기다.

 

소설 같으면 발단부라고 할 수 있는 자화상의 첫행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로 시작된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우물물의 물질적 이미지는 얼음이 막 풀린 봄의 냇물가에 피어나는 수선화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우물물 속에 갇힌 영상은 오히려 짝잃은 앵무새의 새장 속에 넣어준 구리거울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기의 우물물은 임의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거울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윤동주가 설정한 우물물은 보통 우물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정된 장소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우물은 들판과 산의 境界領域산모퉁이돌아서가야만 하는 곳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일상적 삶의 장소인 마을이나 도시에 있는 우물이 아니라 논가 외딴곳의 孤立領域에 있는 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 찾아가서」 「들여다보려는 의지와 행동이 없으면 그 우물도, 우물 속의 의 모습과도 만나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물물은 흐르는 시냇물과는 대조적이다. 그것은 한곳에 고여 있으며, 무거움과 어두움을 간직한 물이다. 단절과 비연속적인 이 물을 더욱 차별화하고 강화하고 있는 것이 산모퉁이라는 境界領域이며, 논가의 외딴 곳이라는 孤立領域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우물은 경계와 소외(고립)의 공간만이 아니라 地下에 있으면서도 天上界에 속해 있는 역설의 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거울은 좌우가 뒤바뀐 鏡像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비해서 우물은 상하가 뒤바뀐 假想空間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화상의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다. , 구름, 바람 그리고 가을은 모두 하늘에 속해 있는 것으로 垂直 上方向에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우물은 垂直 下方向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깊은 바닥에 비쳐있는 영상은 垂直 上方向에 있는 하늘인 것이다.

 

높은 것일수록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우물물은 동시에 밝은 것을 어둠에 의해서 보여주는 의미론적 역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물속에 비친 하늘은 밤하늘이며, 그 계절 역시 가을로 되어 있다. 태양이 있는 대낮의 봄하늘과는 상반된다. 시냇물은 공자도 탄식했던 것처럼 주야로 쉬지 않고 흘러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한 유동적인 물을 한 곳에 가두어 고이도록 한 것이 우물물이다. 그것처럼 윤동주의 우물속에 비치는 달, 구름, 바람 역시도 그 의미의 공통적인 요소는 다같이 물처럼 흐르는 것이지만 한 공간의 프레임 안에 유폐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 우물속에 비쳐 있는 사나이로서 발견되는 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그 우물물의 물질적 이미지를 통해서 쉽게 그 코드를 해독할 수 있게 된다. 우물처럼 심층적 의식속에 가라앉아 있는 나, 그리고 시간이 정지된 원초적인 어둠의 공간인 하늘을 바닥으로 디디고 있는 나그것은 모태 속에 있는 나, 어둡고 무거운 생명의 양수 속에 빠져 있던 나의 映像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경계적-고립적-심층적 공간인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한 사나이」… 모태의 우물물인 그 양수 속에서 살고 있는 原人間으로서의 그 는 누구인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인가. 우리가 흔히 라고 생각하고 있는 라캉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象徵界에 속해 있는 인 것이다. 상징계 속의 란 바로 언어로 인식되는 ,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제도나 법규-규범, 그리고 외부에서 작용하는 온갖 記號作用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 것이다.

 

그러한 어머니의 몸의 일부로서 모태 속에 있었던 現實界와는 아주 딴판의 인 것이다. 그러나 상징계 속에 있는 우리는 언어 이전의 그 현실계 속의 와는 만날 수가 없다. 이 현실계와 상징계 사이에 존재하는 가 바로 우물 속의 사나이로 드러나고 있는 鏡像 속의 인 것이다.

 

라캉의 이론을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것보다 시의 텍스트 속의 두 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면 그 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는 우물을 찾아가 의식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 행위는 바로 모태 속의 와 만나서 그것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행위와 의지를 나타낸다. 그러나 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떠나버린다. 왜냐하면 나르시스 행위로서 그 사나이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볼 때에는 미움이 憐憫(가엾음)으로 바뀌고, 다시 떠나면 그리움으로 변한다. 이러한 미움과 사랑의 앰비밸런스(兩價性)로서의 (자신의 원모습)는 결국 추억의 , 부재하는 로서 정착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체가 아닌 그림자로서의 인 것이다. 일상적인 와 원초적인 와의 끝없는 갈등, 그러면서도 그것과 결합하려는 나르시스와 나르시스의 드라마가 윤동주의 시를 탄생시키는 자화상인 것이다. <이어령 교수>

 

 

< 감상의 길잡이 3 >

윤동주의 시는 일제 말기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적극적인 의미의 무장 독립 투쟁에 가담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 있는 자신을 끝없이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는 성찰의 과정에서 쓰여진 고독과 내면 성찰의 시이다. 윤동주 시의 주제인 부끄러움과 성찰, 도덕적 순결성 등은 모두 시대의 암울함이 개인에게 가한 무게와 고통의 시적 표출이다. 1939년에 쓰여진 이 시에는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면서 느끼는 젊은 시인의 자기 연민과 미움이 나타나 있다.

 

화자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은 자신을 들여다 보고 성찰하는 행위이다. 우물이란 그 안에 담긴 물을 들여다 보는 이의 모습을 비추어 보여주는 것이고, 또 물의 집으로서 우물 밖과는 분리된 새로운 세계이기도 하다. 우물 속에는 현실이 되 비췬 새로운 사물들이 있고 그 새로움에 맞는 새로운 시간이 흘러갈 수도 있다. 현실에는 없는 이상적인 자연이 있을 수도 있고 이미 흘러 가버린 과거와 과거의 자신이 혹은 전혀 새로운 자신의 모습이 그 안에 남아 있다 떠오를 수도 있다.

 

화자가 들여다보는 우물 속은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는 곳으로 얼핏 보면 매우 행복하고 평화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한 사나이' ,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려는 화자에게는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던 자신의 미운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돌아간다. 가다 생각하니 그 미운 사나이가 `가엾어' 돌아오게 되고 다시 `미워져' 돌아가다가 `그리워'져 다시 돌아 오게 된다. 화자는 자신에게 미움을 느끼고 그 미움은 연민으로 연민은 그리움으로 변하는데, 이런 변화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반성하고 내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일어난 감정이며, 도덕적 순결성으로 자신을 성찰할 때 겪게 되는 당연한 과정인 것이다. 윤동주 시에 많이 나타나는 부끄러움은 `미움'으로, 미움이 심해질 때 그 반작용으로 연민이 생기고, 연민은 다시 부끄러움인 미움이 되고, 그 미움은 본래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진정한 성찰자의 모습인 `그리움'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물 속은 `'`구름'`하늘'`바람'`가을'이 있는 또다른 세계이고 그 안에는 `추억'이라는 또 다른 시간의 흐름이 화자의 진정한 성찰과 인간적 고뇌 속에 존재 하고 있다. [해설: 이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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