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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 / 해설 / 에리히 프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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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대하여

 

우리는 가끔 부모님이나 학교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과연 마냥 자유롭고 행복하기만 할까? 때로는 자유가 짐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거기 따르는 책임까지 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겨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자유의 무게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독일 출신의 사회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현대인들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독일인들이 왜 자유를 포기하고 히틀러와 나치에게 복종하는지를 분석해 냈다. 지금부터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중 한 부분을 읽으며 현대인에게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근대인을 위한 자유의 양면성                      

      자본주의는 인간을 전통적인 속박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자유를 증대시켜 능동적이고 비판적이며 책임을 가진 자아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에 미친 '하나의' 효과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그것은 개인을 더 한층 고립되고 격리된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그로 하여금 무의미함과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여기에서 언급되어야 할 첫 요소는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적 특징의 하나인 '개인주의적 활동의 원리'이다. 모든 사람이 질서 있고 투명한 사회 제도 속에서 하나의 고정된 지위를 갖고 있던 중세의 봉건 제도와는 정반대로 자본주의적 경제 아래서 개인은 전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그가 무엇을 했고 또 어떻게 했으며, 그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일이 된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개성화의 과정을 촉진시킨 것은 분명하며, 이것은 근대 문화의 명예로운 측면을 이루는 데 중요한 항목의 하나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로부터의 자유'(free form)가 더욱 진전되어 가면서 이러한 원리는 오히려 개인과 다른 사람들 간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켜, 그로 인해 개인을 그의 동료로부터 고립시켰다. 이러한 발전은 종교 개혁의 교리에 의해 마련된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개인의 관계는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연결시키는 고리이며, 한편으로는 인간의 개성을 제한하고, 다른 한편으론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의 한 구성 분자로서 하느님을 향하게 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16세기 종교 개혁기에 루터와 칼뱅, 츠빙글리 등에 의해 주도된 종교 개혁의 중심 사상을 가리킨다. 금욕적인 자세로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은 개인이 혼자서 하느님을 향하게 하였다. 하느님의 권능 앞에 홀로 서게 된 개인은 압박감을 느껴 완전한 복종 속에서 구원을 추구하였다.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정신적 개인주의는 경제적 개인주의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어느 경우에서도 개인은 완전히 고립되며, 그 고립된 상태에서모두가 하느님이나 경쟁자나 비인간적인 경제력과 같은 우월한 힘과 직면하게 된다. (…)


  (종교 개혁과 자본주의 발달 이후)개인은 더욱 고독해지고 고립되었으며, 자기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압도적인 힘의 손아귀에 있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는 하나의 '개인' 이 되긴 했지만 당혹하고 불안한 개인이 되었다. 이러한 잠재적인 불안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 인간은 재산의 소유에 의해 지탱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자기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분리시킬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의복과 가옥도 그의 육체의 일부분이면서 그의 자아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자기가 비범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는 더욱 더 많이 소유하고자 했다.
만일 개인이 재산을 갖지 못했다든지 또 그것을 상실하여 버렸을 때는, 그는 '자아' 의 중요한 부분이 결여되고 있다고 느끼며, 어느 정도는 완전히 성숙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자아를 지탱해 가는 또 다른 요소는 명성과 권력이다.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재산의 소유에서 생겨난 결과이고, 또 한편으로는 경쟁의 분야에서 얻은 직접적 결과이기도 하다. 권력은 재산이 부여해 준 토대를 보강하여 불안한 개인적 자아를 뒷받침했다.


  재산과 사회적 명성을 거의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가족이 개인적 명성의 한 원천이 되었다. 가족들 사이에서의 자신은 '상당한 사람' 이라고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처자의 복종을 받았고 무대의 중심에 위치했으며, 소박하게도 그의 역할을 자연권으로서 받아들였다. 그는 사회적 관계에서는 보잘 것 없을는지 모르겠으나, 가정에서는 왕이었다. 가족 이외에 국가적인 자존심(유럽에 있어서는 때때로 계급적인 자존심)이 또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닐지라도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이 다른 비교할 수 있는 집단들에 대해 우월하다고 느낄 것이 있다면 그는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약화된 자아를 지탱하는 이러한 요소는 실제적인 경제적·정치적 자유와 개인적 창의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와 합리적인 계몽의 증대라는 것과는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뒷 요소들은 실제로 자아를 강화시켜 개성과 독립성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앞의 요소들, 즉 자아를 지탱해 주는 요소들은 불안과 근심을 뿌리 뽑아 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은폐한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으로 하여금 의식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적인 안정감은 오직 표면적인 것일 뿐이어서 자아를 지탱해 주는 요소가 존재할 경우에만 지속되는 것에 불과했다.


  종교 개혁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및 미국의 역사를 상세히 분석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에의 자유'라는 진화 과정 속에 이 같은 두 가지 모순된 경향이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19세기 후반 및 20세기 초에는 적극적인 자유를 구하는 경향이 그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자본주의의 독점적 경향이 증대되면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두 경향의 비중은 바뀌어 버렸다. 개인적 자아를 약화시키려는 요소가 강화되고 개인을 강하게 하는 요소가 비교적 약해졌다. 모든 전통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보다 강화되고 개인의 경제적 성과에 대한 가능성은 좋아졌지만 무력감과 고독감이 증대된 것이다. (…)


그러나 개인의 무력감과 고독감을 정상인들은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이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내일의 일상적인 활동과 개인적 및 사회적인 여러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확신과 찬성, 사업상의 성공, 모든 종류의 오락, '재미있는 일', '교제하는 일', '놀러 다니는 일' 등으로 덮여 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어 봐도 빛은 보이지 않는다. 고독과 공포와 당혹은 여전히 남는다.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그것을 견뎌 낼 수는 없다. 그들은 '…으로부터의 자유' 라는 부담을 이겨 낼 수가 없다면, 결국 '자유로부터의 도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 도피의 중요한 사회적 통로는 파시스트 국가에서와 같은 한 개인에 대한 종속(전체주의)이며, 우리들 자신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보급되고 있는 강제적인 획일화(대중 사회화)이다.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대하여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유태계 독일인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n, 1900∼1980)이 미국으로 망명한 후 쓴 책으로, 1941년에 발간되었다. 이 책은 특히 나치즘이 대두하게 된 원인을 사회 심리학(사회 속에서 행동하는 개인 또는 집단의 의식이나 행동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분석하여 주목을 받았다.


  주요 내용을 알아보자. 먼저 프롬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와 적극적 자유('…을 향한 자유'(free to), 두 종류로 나뉘어 보았다. 소극적 자유는 어떤 속박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찍이 중세 이후 서구 사회에서 개인이 획득한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이런 소극적 자유에 해당한다.


그러나 인간은 소극적 자유를 얻음으로써 고독과 무력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적극적 자유를 획득할 때에야 비로소 참된 의미의 자유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적극적 자유는 소극적 자유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자유로, 개인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 새로운 유대 관계를 찾아낼 때에만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다. 적극적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곧 참된 자아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종교 개혁 이후 근대로 들어오면서 인간은 자연의 속박, 정치적·종교적·경제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소극적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개인에게 고독과 불안의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인간이 왜 고독을 두려워 하는가에 대해 프롬은 '인간은 본래 남과 협력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 이며, 또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판단을 통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임을 깨닫게 되는 데 있다고 했다.


  인간은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며 모든 경제 활동의 목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자본가건 노동자건 간에 인간은 모두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현대에 와서 인간 관계가 '인간적' 인 관계가 아니라, '기계적' 또는 '소외적' 관계가 되면서 사람들은 한층 더한 고독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서운 고독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모든 사람들과 자발적으로 하나로 뭉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새로운 유대감을 키워 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자유를 포기하고 어떤 강한 힘에 종속됨으로써 안도감을 느끼려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고독과 무력감에 떠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가는 것이며, 또 다른 길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 즉 소극적 자유에서 적극적 자유로 나아갈 수 없는 경우에 인간은 참을 수 없는 고독과 무력감의 상태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 한다.


이와 같은 도피는 대체로 권위주의적 성격(지배-복종의 관계를 맺으려는 성격)과 자동 기계화의 측면으로 나타난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경우, 독일인들이 히틀러로 대표되는 나치즘에 복종한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경우 1차적 속박에서 벗어난 개인이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2차적 속박을 구하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권위에 복종하여 그 희생이 되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 즉 유태인들을 멸시하고 학대하며 욕구 불만과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심리가 여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자동 기계화의 상태로 나아갈 경우는 자아를 상실한 개인이 그 상실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의 기대에 따라 자동 인형(주체적 판단 없이 유행이나 광고에 따라 수동적으로 소비 생활을 하는 대중들의 삶을 비유한 말이다.)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행동함으로써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게 되고, 거기서 안정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안정감을 잃지 않으려 더욱더 남의 기대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독일 나치즘은 물론이고, 미국 같은 민주주의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투표를 할 때만 주권을 가진 존재로 대접받고, 선거가 끝나면 자신이 뽑은 그 권위 체제에 복종해서 살아가는 민주주의 체제 역시 자동 인형화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프롬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적극적 자유를 실현할 방법도 제시하였다. 즉 인간이 자발적으로 사회 과정에 참여하여 개인의 자유화 개성화가 억압받지 않는 완전한 민주 사회를 이룰 경우, 적극적 자유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먼저 사회 기구와 제도의 개혁을 통해 사회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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