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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사(慈母思) - 정인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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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사(慈母思) - 정인보

 

1

 

가을은 그 가을이 바람불고 잎 드는데

가신 님 어이하여 돌오실 줄 모르는가

살뜰히 기르신 아이 옷 품 준 줄 아소서

 

2

 

부른 배 골리보고 나은 얼굴 병만 여겨

하루도 열두 시로 곧 어떨까 하시더니

밤송인 쭉으렁*인 채 그지 달려 삽내다

 

3

 

동창에 해는 뜨나 님 계실 때 아니로다

이 설움 오늘날을 알았드면 저즘미리

먹은 맘 다 된다기로 앞 떠날 줄 있으리

 

4

 

차마 님의 낯을 흙으로 가리단 말

우굿이* 어겼으니 무정할 손 추초(秋草)로다

밤 이여 꿈에 뵈오니 편안이나 하신가

 

5

 

반갑던 님의 글월 설움될 줄 알았으리

줄줄이 흐르는 정 상기 아니 말랐도다

받들어 낯에 대이니 배이는* 듯하여라

 

6

 

므가나* 나를 고히 보심 생각하면 되 서워라

내 양자(樣子)* 그대로를 님이 아니 못보심가

내 없어 네 미워진 줄 어이 네가 알것가

 

7

 

눈 한번 감으시니 내 일생이 다 덮여라

* 보아 가련하니 님의 속이 어떠시리

자던 닭 나래쳐 울면 이때리니 하여라

 

8

 

체수는 적으셔도 목소리는 크시더니

이 없어 옴으신 입 주름마다 귀엽더니

굽으신 마른 허리에 부지런히 뵈더니

 

9

 

생각도 어지럴사 뒤먼저도 바없고야

쓰다간 눈물이요 쓰고 나니 한숨이라

행여나 님 들으실까 나가 외워 봅니다

 

10

 

미닫이 닫히었나 열고 내다보시는가

중문 턱 바삐 넘어 앞 안 보고 걸었더니

다친 팔 도진다마는 님은 어대 가신고

 

11

 

젖 잃은 어린 손녀 손에 끼고 등에 길러

색시꼴 백여가니 눈에 오즉 밟히실가

봉사*도 님 따라간지 아니 든다 웁내다

 

12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되고 말어라

 

13

 

썩이신 님의 속을 깊이 알 이 뉘 있스리

다만지 하루라도 웃음 한번 도읍과저

이저리 쓰옵던 애가 한 꿈되고 말아라

 

14

 

그리워 하 그리워 님의 신색 하 그리워

닮을 이 뉘 없으니 어딜 향해 찾으오리

남으니 두어 줄 눈물 어려 캄캄하고녀

 

15

 

불현듯 나는 생각 내가 어이 이러한고

말 갈 데 소 갈 데로 잊은 듯이 열흘 달포

설움도 팔자 없으니 더욱 느껴 합내다

 

16

 

안방에 불 비치면 하마 님이 계시온 듯

닫힌 창 바삐 열고 몇 번이나 울었던고

산 속에 추위 이르니 님을 어이 하올고

 

17

 

밤중만 어매 그늘 세 번이나 나린다네

게서 자라날 제 어인 줄을 몰랐고여

님의 공 깨닫고 보니 님은 벌써 머셔라

 

18

 

태양이 더웁다 해도 님께 대면 미지근타

구십춘광(九十春光)이 한 웃음에 퍼지서라

멀찌기 아득케나마 바랄 날이 언제뇨

 

19

 

어머니 부르올 제 일만 있어 부르리까

젖먹이 우리 애기 왜 또 찾나 하시더니

황천(黃泉)이 아득하건만 혼자 불러 봅내다

 

20

 

연긴가 구름인가 옛일 벌써 희미(熹微)해라

눈감아 뵈오려니 떠오느니 딴 낯이라

남없는 거룩한 복이 언제런지 몰라라

 

21

 

등불은 어이 밝아 바람조차 부는고야

옷자락 날개 삼아 훨훨 중천 나르과저

이윽고 비소리나니 잠 못 이뤄 하노라

 

22

 

풍상(風霜)도 나름이라 설움이면 다 설움가

오십년 님의 살림 눈물인들 남을 것가

이저다* 꿈이라시고 내 키만을 보서라

 

23

 

북단재 뾰죽집*이 전에 우리 외가(外家)라고

자라신 경눗골*에 밤동산은 어디런가

님 눈에 비취던 무산* 그저 열둘이려니

 

24

 

목천(木川)집 안방인데 누우신 양 병중이라

손으로 머리 짚자 님을 따라 서울길로

나다려 말씀하실 젠 진천인 듯하여라

 

25

 

뵈온 배 꿈이온가 꿈이 아니 생시런가

이 날이 한 꿈되어 소스라쳐 깨우과저

긴 세월 가진 설움 맘껏 하소 하리라

 

26

 

시식(時食)도 좋건마는 님께 드려 보올 것가

악마듸* 풋저림을 이 없을 때 잡숫더니

가지록 뼈아풉내다 한()이라만 하리까

 

27

 

가까이 곁에 가면 말로 못할 무슨 냄새

마시어 배부른 듯 몸에 품겨 봄이온 듯

코끝에 하마 남은가 때때 맡아 봅내다

 

28

 

님 분명 계실 것이 여기 내가 있도소니

내 분명 같을 것이 님 가신지 네 해로다

두 분명 다 허사외라 뵈와 분명하온가

 

29

 

친구들 나를 일러 집안 일에 범연타고

아내는 서워라고 어린아이 맛없다고

여린 맘 설움에 찢겨 어대 간지 몰라라

 

30

 

집터야 물을 것가 어느 무엇 꿈아니리

한 깊은 저 남산이 님 보시던 옛 낯이라

게섰자 눈물이리만 외오 보니 설워라

 

31

 

비 잠깐 산 씻더니 서릿김에 내 맑아라

열구름 뜨자마자 그조차도 불어 없다

맘 선뜻 반가워지니 님 뵈온 듯하여라

 

32

 

마흔의 외둥이를 응아하자 맏동서께

남없는 자애렸만 정 갈릴가 참으셨네

이 어찌 범절만이료 지덕(至德)인 줄 압내다

 

33

 

찬 서리 어린 칼을 의로 죽자 내 잡으면

분명코 우리 님이 나를 아니 붙드시리

가서도 계신 듯하니 한 걸음을 긔리까*

 

34

 

어느 해 헛소문에 놀라시고 급한 편지

네 걸음 헛디디면 모자 다시 안 본다고

지질한 그날 그날을 뜻 받았다 하리오

 

35

 

백봉황(白鳳凰) 깃을 부쳐 도솔천궁(兜率天宮) 향하실 제

아득한 구름 한점 옛 강산이 저기로다

빗방울 오동에 드니 눈물 아니 지신가

 

36

 

엽둔재 높은 고개 눈바람도 경이랏다

가마 뒤 잦은 걸음 얘기 어이 그쳤으리

주막집 어둔 등잔이 맛본상*을 비춰라

 

37

 

이 강이 어느 강가 압록(鴨綠)이라 엿자오니

고국산천이 새로이 설워라고

치마끈 드시려 하자 눈물 벌써 굴러라

 

38

 

개울가 버들개지 바람 따라 휘날린다

행여나 저러할라 돌이고도 굴지 마라

이 말씀 지켰다한들 누를 향해 사뢸고

 

39

 

이만 사실 님을 뜻조차도 못받든가

한번 상해드려 못내 산 채 억만년을

이제와 뉘우치란들 님이 다시 오시랴

 

40

 

설워라 설워라해도 아들도 딴 몸이라

무덤풀 욱은 오늘 이 살붙어 있단 말가

빈 말로 설운 양함을 뉘나 믿지 마옵소

 

 

 

** 밤송인 쭉으렁 : 우리 속담에 쭉으렁 밤송이 삼년 달린다는 말이 있다. 다병(多病)한 사람이 그대로 부지하는 것을 이에 견주어 말하며 못 생기고 오래 사는 것을 이에 견주어 말한다.

** 우긋이 : 茂盛한 모양

** 배이는 : 점읍

** 므가나 : 미운

** 양자(樣子) : 모양

** : 저를

** 봉사 : 봉선화의 와(), 소녀들이 봉선화를 짓찧어서 손톱에 홍색을 들이니 이를 봉사들인다고 한다

** 이저다 : 이것 저것 모두

** 뾰죽집 : 천주교당(天主敎堂)의 속어

** 경눗골 : 정릉동(貞陵洞)

** 무산 : 무산(巫山) 십이봉(十二峰)

** 악마듸 : 억세인 것

** 긔리까 : 만과(瞞過), 속여 넘김

** 맛본상 : 겸상으로 보아 놓은 밥상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작가 : 정인보(1892-?) 한문학자, 사학자, 시인.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담원. 서울 출생. 한말(韓末) 이건창(李建昌)의 문하에서 한학(漢學)을 수학. 1910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동양학을 공부하면서 박은식, 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여 독립 운동을 벌임. 1918년에 돌아와 연희전문, 이화 여전, 중앙불교전문에서 국학과 동양학을 가르치는 한편, 시대일보와 동아일보등에서 논설 위원으로 활약함. 광복 후 국학대학장, 초대 감찰위원장 등을 지내다 625 때 납북.

국문학사, 한문학, 국사학 등에 걸쳐 광범위한 연구를 하였고, 시조와 한시에 능하였다.

저서로 조선사연구, 조선문학원류고, 담원시조집등이 있다.

 

< 감상의 길잡이 >

이 작품에 보이는 어머니는 한국의 정통적인 어머니 상()이다. 지은이는 그 어머니를 회상하며 자신의 보잘것없는 정성을 자책하고 있다.

 

12: 어머니는 자식과 가족들을 위하여 언제나 자신의 안락함을 희생하시었다. 바리에 담긴 따뜻한 밥은 다른 식구들 특히 자식들에게 먹이시고, 당신께서는 늘 찬밥을 잡수셨다. 겨울이면 자식들에게 따뜻하게 입히시면서도 어머님 자신은 늘 엷은 옷으로 지냈다. 한 벌 가지고 계셨던 솜치마를 좋다고 하시면서 아끼느라 못 입으시더니 마침내 돌아가신 뒤 관 속에 채워 넣는 옷이 되고 말았구나.

 

37: 여성으로서도 나라를 잃은 슬픔을 깊이 느끼시었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고국의 땅을 떠나는 길에 이 강이 어느 강이냐고 물으시기에 압록강이라 말씀드리니 고국 산천을 잊지 못하여 서러워하신다. 그 슬픔의 눈물은 마치 닦을 겨를도 없이 흘러 내렸다.

 

40: 지극한 사랑과 덕을 지니셨던 어머니를 회상하며 자식으로서의 부족한 정성을 자책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아무리 서럽다고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님의 크나큰 사랑에 비하면 아들조차도 그에 못 미치는 딴 몸인 것 같다. 어머님 무덤에 풀이 우거진 오늘, 자식인 나는 내 자신의 삶에 바빠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구나. 때때로 슬퍼하는 체하여도 그것은 어머님의 깊은 사랑에 비하여 마치 빈말이나 다름 없는 것이니 누구라 한들 믿지 마십시오.

어머님을 생각하는 간절한 그리움과 정성이 구절마다 서리어 있는 작품이다. 시조 형식의 간결함과 안정감이 여기에 더 깊은 맛을 더해 주고 있다. [해설: 김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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